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4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 - Philosophical Investigation by Ludwig Wittgenstein, 1953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5. 12.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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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3D6fO9BXy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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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강재벌2세로 태어나 유산의 1/3 예술철학가들에게 후원했고 최고가 아니면 죽는게 편하다는 에리트의식에 젖어 살았으며 동성애의 삶을 숨기지 않았던 항공공학자이자 수학자이자 철학언어학자 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사후유작철학적 탐구에서 철학은 사용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며 한국어를 사용하면 한국인이고 미국영어를 사용하면 미국인, 영국영어를 사용하면 영국인이라는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설명했습니다. 공감가는 이런 통찰력을 보여준 철학적 탐구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삶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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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 Life of Ludwig Wittgen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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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1889 4 26일에 빈부의 극단을 보여주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에서 다이아몬드 수저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1847~1913)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철강 산업을 이끌던 철강재벌 한명이였고 어머니 레오폴디네 칼무스 비트겐슈타인(1850~1926)은유대인 아버지와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974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이모이기도 합니다. 루트비히는 8남매 가운데 막내였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헤르만 크리스티안과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대인이었으나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1850년대에 작센에서 빈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할머니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요제프 요아힘의 사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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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아들이 철학사나 논리학사에서 주요인물로 다뤄지듯, 아버지인 카를 비트겐슈타인도 오스트리아 경제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입니다. 1880년대 후반 무렵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독점하는 제철 사업가이자 세계에서 뛰어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철강재벌인 만큼 공업과 관련된 크고작은 회사를 여러개 가지고 있었는데, 가장 컸던 회사인 알프스 산맥에 있는 철광석 기타 광물 채굴회사인 오스트리아제국 알프스 광산회사(Österreichisch-Alpine Montangesellschaft) 대기업이었습니다. 이거는 나중에 아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회사에 팔아버렸서, 카를의 형제나 조카들이 엄청나게 욕을 했습니다. 카를 비트겐슈타인의 자산은 부동산, 주식, 귀금속, 외화 형태로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북미 등지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재산이 분산되어 있었기에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뒤에도 부를 유지할 있었습니다. 이런 가족력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개신교와 천주교에서 세례받았는데 다른 형제들은 침례교를 신봉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은 할머니의 신앙을 좇아 천주교 세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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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지식인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음악 같은 예술을 사랑하였습니다. 제철 사업가로서뿐만 아니라 예술 애호가로서도 유명했던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오귀스트 로댕,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였고 분리파 전시관을 설립하려는 재정을 책임졌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집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구스타프 말러 같은 예술가가 초대되었습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비트겐슈타인보다 위의 누나에게 피아노를 가르쳤고 요하네스 브람스의 주요한 작품 가운데 몇몇을 비트겐슈타인 집의 음악실에서 초연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넷째 파울 비트겐슈타인(1887~1961) 후일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파울은 1 세계대전 참전 오른팔을 잃고 러시아에서 포로수용소에 갇혀서도 왼손만으로 피아노를 연습하여 명성을 유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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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도 절대음감이 있었고, 음악을 향한 열정은 비트겐슈타인의 생활과 사상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 저작에서도 음악에 빗댄 예를 자주 사용하였고 클라리넷을 능숙하게 연주하여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교향곡 전체를 외워 휘파람으로 불르기도 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자신이 최고이어야 하는 재벌가에서 종종 나타나는 우울증에 따른 자살 경향을 보였습니다. 장남인 첫째 한스(1877~1902) 작곡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나 1902 쿠바의 아바나에서 자살했습니다. 뒤를 이어 삼남 셋째 루돌프(1881~1904) 1904 베를린에서 자살하였고 차남 둘째 쿠르트(1878~1918) 1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1918 10 오스트리아군의 퇴각이 결정되자 자신이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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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5 30 파울 엥겔만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에서 보듯, 루트비히도 청년 시절 줄곧 자살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최근 상황은 완전히 비참함 자체입니다. 나는 생명을 끊는 것을 계속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도 생각은 여전히 나를 괴롭힙니다. 나는 내려갈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까지 가라앉았습니다. 당신은 절대로 지점까지 오지 않기를!”  다행하게도 러셀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은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있었습니다. 1903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개인가정교육을 받은 가업을 있기를 바라는 부친의 뜻에 따라 대학진학학교가 아닌 린츠에 있는 린츠실업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보다 6 생일이 빠른 아돌프 히틀러가 1년간 비트겐슈타인과 2 후배로 같은 학교에 다니다 낙제하였습니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서로 알던 사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양측 모두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회고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리라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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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토 바이닝거(1880~1903)성과 성격 출판하고 그해 베토벤이 죽은 집에서 "천재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자살하였습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인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가 바이닝거의 주저성과 성격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책을 탐독했으며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시신이 운구될 뒤를 따라갔고 평생 그의 추종자로 남았습니다. ‘성과 성격 내용은 비장하리만치 과장된 여성의 결함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과 금욕을 통해 인류가 멸종된다고 주장하는 책입니다. 학교 생활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높은 톤의 어투에 약간 말더듬이가 있었고 우아한 옷을 입은 민감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심중으로만 생각하는 학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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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거의 대부분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점을 특징으로 꼽았습니다. 학업과는 거리가 분위기 속에서 학식있어 보인 덕에 비트겐슈타인은 "선생", "헤어 루트비히"(독일어: Herr Ludwig→루트비히 ) 같은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905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한 영웅과 천재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선집을 읽고 과학철학에 흥미를 느껴 린츠의 실업학교를 떠나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배우려고 대학으로 가려고 했지만 1906 9 볼츠만이 두이노에서 자신이 과학계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음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바람에 무산됐습니다. 1906 이론과학을 공부하고 싶은 자신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강요로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기능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빈치, 파우스토 베란치오 같은 사람들이 남긴 르네상스 시기 작업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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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로 진학하여 항공과 관련한 논문으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공학 연구소의 연구생으로 등록되어 대기권 상층에 연을 띄우는 연구를 하였고 작은 제트 엔진에 사용될 프로펠러를 제작하였습니다. 맨체스터에서 연구 생활하는 동안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 원리’,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수의 근본 법칙 읽고 수학기초론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수학 원리에서 유형론의 난점을 발견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했고 수리철학과 기계공학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1911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그는 항공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그해 8 '항공 기계에 응용할 있는 프로펠러의 개선' 대한 임시 설계 명세서를 제출하며 특허가 받아들여지기까지 그의 공학도로서의 경력은 계속됐습니다. 1911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예나 대학에 있는 프레게를 방문한 후부터 연락을 자주 교환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라고 권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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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1911 8월부터 버트런드 러셀의 강의실에 출석하였고, 10 18,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러셀의 방에 갑자기 나타나서 불쑥 자신을 소개한  러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 급기야 웃음꽃을 피우면서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한지에 관한 주제로 토론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러셀은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비트겐슈타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고, 11 조지 에드워드 무어를 알게 되어 수리 논리학의 원리를 대상으로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러셀은 겨울 방학 동안 철학과 관련된 글을 비트겐슈타인더러 쓰게끔 1912 1 글을 받아보게 됩니다. 러셀은 글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적 재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그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시기 러셀은 수학 기초론과 철학을 확장하고자 연구하고 있었고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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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자주 거침없이 비판받기도 하였습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천재다운 능력을 이용해 논리학상 난제를 해결하는 것에 매료되었고 영국 철학계에 비트겐슈타인의 능력을 소개하는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 의해 자신이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로만 비추어지는 것을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시기 동안,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주요 관심사는 고전음악과 여행이었습니다. 1912 2,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 된후, 그해 여름 러셀이 주최하는 스쿼시 모임에서 나중에논고 헌정하게 수학과 2학년생 데이비드 핀센트와 사귀게 됩니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한 비트겐슈타인은 여로에 종종 애인이었던 데이비드 핀센트와 동행하였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무어가 이끌던 엘리트임을 자처하는 비밀 사도모임인 케임브리지 어포슬스에 가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나지 않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사도 회원들과의 마찰 때문에 클럽을 탈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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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1 20일에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이 작고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유산을 상속받아 유럽에서 부유한 사람 가운데 명이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상속받은 유산의 1/3 오스트리아의 예술가와 작가들을 도우려고 기부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지원한 예술가 가운데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게오르크 트라클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14년에 비트겐슈타인은 트라클을 방문하고자 하였으나 트라클이 자살로 급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볼츠만에 이어 트라클까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자살하는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자신이 일하기에 이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겐 대학연구자들이 심오한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자신들이 영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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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에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송네 피오르의 끝에 있는 숄덴 인근의 오지에서 독거에 들어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곳의 이층을 빌려 겨우내 지내면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였습니다. 시기는 비트겐슈타인에게서 가장 정열 있고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시기에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흔히 "논고"라고 불리는 논리 철학 논고 정리되었습니다. 1914 7, 예술가들에게 돈을 배분하는 문제와 휴가 문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잠시 오스트리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1 세계대전이 났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크게 충격받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육군에 자원입대하였습니다. 입대 초기에는 함선에서 근무하였으나 얼마 포병대로 전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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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12 하사관이 되고,1916 3월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7군에 자원하여 브루실로프 공세를 방어하는 최전방 첨병으로 참전하였습니다. 7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후퇴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진지를 고수하여 "용감한 행동과 침착하고 냉정한 영웅다운 활약"으로 훈장을 받고 상사를 거쳐 소위로 진급했습니다. 8, 그는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모리비아에 있는 올뮈츠의 연대 사령부로전출되었습니다. 1917 1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전선의 곡사포 연대 포병장교로 전근되었고 여기서 다시 용감한 행동으로 은성무공훈장을 비롯해 훈장을 여러 개나 받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918 2 1 중위로 승진하였고 오늘날 트렌티노로 불리는 이탈리아 티롤 남부 전역에서 산악 포병 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1918 615 오스트리아의 공세에서 전훈을 세운 비트겐슈타인은 최고 훈장인 금성무공훈장에 추천되었고 아래 단계인 검의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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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군인의 눈으로 목격한 천박을 대상으로 경멸을 노트에 기록하였습니다. 종전 뒤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노트에 철학과 종교를 대상으로 단상을 적어나갔습니다. 노트에 적힌 단상을 보면 비트겐슈타인의 종교를 향한 태도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있습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 비트겐슈타인은 종교를 대상으로 불가지론다운 태도를 견지했는데 전쟁 중에 비트겐슈타인은 레프 톨스토이의 요약 복음서: 믿음 안의 찬송 갈리치아 루마니아 왕국에 있던 서점에서 구입한 어디나 가지고 다니면서 읽는 바람에 후일 비트겐슈타인의 지휘에 있던 부대원들은찬송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란 별명을 얻었으며,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저작에서 종교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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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종교에 딸린 기호를 가지고 "논리" 부합한 연구를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 관심했던 논리 분석을 윤리 개념에 접합하면서 전쟁 기간에 발전하게 소위 "그림 이론" 적용하였습니다. 여기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과 노르웨이에서 은둔 생활한 시기에 작업이 "논고" 바탕이 되었습니다. 1918 6 6, 전쟁이 막바지로 치다를 무렵 비트겐슈타인이 이탈리아 북부의 포병 연대에서 중위로 복무할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에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거기에는 데이비드가 5 8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의 삼촌 폴에게 찾아가 완성된 논고를 핀센트에게 헌정하였습니다. 논고는 출판사에 보내졌으나 출판되지는 않았습니다. 1918 10 비트겐슈타인은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1월에 트렌토 근교에서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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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의 카치노에 수감된 비트겐슈타인은 버트런드 러셀과 키네스 같은 영국 친구의 도움으로 책의 반입이 허락되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여러 원고가 영국으로 보내졌습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원고가 철학상 뛰어난 성과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1919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으로 출간하였습니다. 프랭크 램지와 찰스 케이 오그던이 비트겐슈타인의 원고를 영역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이 영역물을 검토하였습니다. 책의 제목 논리 철학 논고 원제논리 철학 논설 스피노자의 정치학 논고 기려 조지 에드워드 무어가 지은 것입니다. 서문은 버트런드 러셀이 썼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포로로서 수감된 가운데 버트런드 러셀의 서문을 받아 보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기본 사항을 러셀이 오해한다고 판단하고, 자신의 작업 출판을 대상으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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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으로 출판사는 서문을 러셀만을 부각하게 뿐이었습니다. 1919 8 21 수용소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석방되었습니다. 1919 10, 빈의 프라터 거리에서 젊은 이성애자인 자동차 기계공 아르비트 셰그렌과 사귀게 되어 그의 집에 하숙하게 되지만 셰그렌의 어머니가 비트겐슈타인을 사랑하게 되어1920 4,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0년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끔찍한 전투를 경험한 1 세계대전 이후 견고해진 비트겐슈타인의 지성과 감성은 "논고" 집약되었습니다. ‘논고 1921 빌헬름 오스트발트가 운영하던 독일의 출판사인자연철학 분석(독일어: Annalen der Naturphilosophie)’에서 독일어로서 마침내 출간되었습니다. 러셀의 서문과 램지와 오그던이 영역한 판본은 1922년에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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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작업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답을 구했다고 생각했기에 철학을 떠나 사범학교를 다니며 오스트리아의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톨스토이의 요약복음서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형제들에게 나눠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하스바흐, 오테르탈, 트라텐바흐와 같은 곳의 산골 초등학교를 돌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농촌 학부모들 동료 교사들과 불화를 일으켜 교사 생활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논고를 번역한 프랭크 램지가 1923 가을 비트겐슈타인의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 갔을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좁다란 방에 침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작은 테이블과 난로가 고작이었습니다. 프랭크 램지는 저녁 식사로 질긴 하나와 버터와 코코아 잔을 건네받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침 여덟 시에서 정오나 오후 시까지 수업하였고 오후 시간은 자유롭게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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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교직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이롭게 하려고 42쪽으로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을 만들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사전 (Wörterbuch für Volksschulen)’ 논고 제외하면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유일한 책입니다. 사전은 1926 빈에서 출판되었고 횔더 피흘러 템프스키의 간단한 서문이 들어 있습니다. 사전의 초판은 2005 2 경매에서 75,000 £ 판매되었습니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체벌 문제에 휩싸인 비트겐슈타인은 1926 4 나중에 14살에 백혈병으로 죽게 요제프 하우트바우어(이때 당시 11)라는 남자 아이가 비트겐슈타인에게 맞아 실신하게 되어 아이를 심하게 때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였고 결국 1926 4 28 교직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교직을 그만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잠시 머문 휘텔도르프 자비의 형제 수도회에서 정원사로서 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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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비트겐슈타인은 셋째 누나인 마르가레테(1882~1958) 위해 스턴버러 하우스를 구상하였습니다. 건축은 전쟁 중에 친구가 파울 엥겔만이 진행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과 파울 엥겔만은 참호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습니다. 파울 엥겔만은 집이 아돌프 루스 이후 현대 건축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자리잡기를 바랐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집을 짓는 일에 온통 매달렸고 창틀, , 난방기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 손잡이와 난방기는 직접 설계하기도 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요구로 모든 창문에 150Kg 이르는 금속 차양막을 달았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건축 버나드 라이트너는 건축물이 건축사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것이라 평가하면서 " 집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로 매우 정교하게 지어졌다. 모든 철제는 바닥에 숨겨져 있도록 하였다" 기술하였습니다. 집이 거의 완공되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정의 높이를 30mm 높이라고 하였고, 그가 원한대로 천정을 높이고서야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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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인 비트겐슈타인의 첫째 누나 헤르미네(1874~1950) 집을 두고 "나는 언제나 내가 안에서 살아도 되는 걸까 자문하곤 하였다. 집은 신의 거처처럼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집을 좋게 말하면 너무 소박하게 지었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집이 건축의 기본이 되는 생활이나 건강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고 여겼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난 집은 러시아 군인들의 병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950년대 누나 마르가레테의 아들이 개발업자에게 집을 팔아 없어질 위기에 놓였으나 랜드마크 협회가 1971 집을 구매해 보존했고, 현재는 불가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건축 작업을 마치고 모리츠 슐리크와 만났습니다. 슐리크는 학파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학파의 논리실증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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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크 자신은 학파의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적이 없으나 프리드리히 바이스만과 같은 학파의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에 기초한 주제를 화제로 하여 자주 대화했습니다. 슐리크와 학파의 회원들이 자신의 논고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자주 좌절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에 딸린 생활과 신비에는 말로는 설명할 없는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논리실증주의는 이러한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비하한다고 간주했습니다. 모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를 돌아가면서 낭송하는 사이 자신의 언급을 거부하여 좌중을 짜증 나게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철학에 다시 관심을 가졌습니다. 모임이 이어지는 동안 프랭크 램지가 논고 관련해 토론하려고 빈을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토론을 통해 프랭크 램지가 자신의 논고 오해한다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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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1 28 비트겐슈타인은 프랭크 램지와 다른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복귀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한 기차역에는 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오랜 친구였던 메이너드 케인스, 자신의 아내 리디아 로포고바에게 편지에서 , 신이 강림하셨으니 나는 사람을 5 15 기차에서 만났어.”라고 술회했습니다. 이런 환대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위를 받지 못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집필하여 이미 철학 박사의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기록하였고 무어와 함께 박사학위 심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929 6 18 박사학위 심문장에서 심사관이 오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얻으며 말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논고를) 절대로 이해 못한다는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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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는 케임브리지 철학박사학위 심사보고서에 스스로 천재다운 연구를 검토하였고 내가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논고가 철학 박사학위를 받기에 충분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남겼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에 부임한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의 집에서 만나게 마르게리테 레스핑거와 혼인을 고려하였으나 1931 파혼한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양성애자였고 빈의 프라테르 공원에서 젊은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윌리엄 워렌 바틀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를 쓰면서 1973 발견된 비트겐슈타인의 노트에는 프라테르에서의 만남을 "애인의 격려" 같이 표기하였다고 밝혔습니다. 뒷날 바틀리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의심받았으나 비트겐슈타인이 데이비드 핀센트, 프랜시스 스키너, 리처드와 같은 사람들과 동성애 관계에 있었다는 풍문은 거의 정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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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치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지녔다고 평가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자신이 "심장에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고 많은 방면에서 노동자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도덕적 성찰이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방법을 혐오하였으며, 음악취향은 보수적이었고, 핵무기의 사용에 반대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오토 바이닝거를 존경한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이론을 복사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배포하기도 하였습니다. 오토 바이닝거처럼 비트겐슈타인도 민족성과 성적 지향으로 말미암아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1930년대 초반 기록된 MS 154 같은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자책하는 여러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성자는 단지 유대인 천재일 뿐이다. 가장 뛰어난 유대인 사상가라 할지라도 더는 재능이 없다. ( 자신을 대상으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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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비트겐슈타인은 " 생각은 100% 헤브라이즘답다"라고 스스로 비판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에 대한 자기부정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때문에 그는 자신의 참신함과 천재성을 확신하였습니다. 1934 비트겐슈타인은 친구인 케인스가 러시아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서 서술된 소비에트 생활에 매료되어 스키너와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으로 이민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어를 배웠고 1935년에는 비트겐슈타인이 안전 요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여행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집단 농장의 노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당국은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카잔 대학의 철학 과장직과 모스크바 대학의 철학 강사직을 제의했습니다. 결국 자신의 바람이 들어지지 않자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됩니다. 소련에 대한 인상은 "군대에서 사병으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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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년부터 37 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은 스키너와 함께 노르웨이에 다시 머물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에서 연구를 계속하였고 이것을 철학적조사라고 불렀습니다. 1936년과 37 사이의 겨울에 가까운 친구에게 보내는고백 썼습니다. 글들은 대부분 선의의 거짓말과 같은 것을 밝히는 소소한 내용이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통하여 자신을 정화하고자 하였습니다. 1938 비트겐슈타인은 모리스 드루어리를 만나기 위해 아일랜드를 여행하였습니다. 드루어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정신 의학을 소개한 제자이자 의사였습니다. 드루어리를 만난 자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마침 드루어리를 찾아온 아일랜드 대통령 이몬 발레라를 만났습니다. 자신도 수학 교사 출신이었던 발레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업적이 수학의 발전에 기여할 있기를 희망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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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말미암아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독일 국적을 갖게 되었고 나치의 인종법에 따라 유대인으로 취급되게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상황을 견딜 없었고 케인스와 같은 친구들의 힘을 빌어 영국이나 아일랜드 국적을 획득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제자매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처지가 매우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에는 곧바로 오스트리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그만두었습니다. 왼손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던 넷째 파울(1887~1961) 공연과 교습을 금지당하자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탈출하였고, 여자 형제들은 위조 여권으로 탈출하려다가 발각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유일한 희망은 나치 독일의 혼혈법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이 유대인 조상이 있는 혼혈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조부인 헤르만이 독일 귀족인-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사생아였다는 증언을 모아 제출하였으나 거부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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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해외 자산에 눈독을 들인 나치 당국과 재산의 상당 부분을 헌납하는 힘겨운 협상 끝에 비트겐슈타인의 가족들은 혼혈로 인정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있었습니다. 긴박한 협상 과정은 알렉산더 워의 비트겐슈타인 가문 상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재산을 지키려는 파울과 목숨을 지키려는 누이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이후로 파울은 죽을 때까지 형제자매들과 다시는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침공 하루 전날 비트겐슈타인 가문을 혼혈로 승인하는 문서에 직접 사인을 아돌프 히틀러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혼혈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2,100건의 신청 가운데 인정된 수는 12건에 불과할 만큼 이러한 조치는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1939 4, 무어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직을 사임하자 비트겐슈타인이 후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교수직을 갖게 얼마 6, 영국 시민권을 획득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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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7 비트겐슈타인은 빈을 방문하여 마르가레테과 다른 누나들을 만났고, 하루는 라이히스방크의 직원을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들렀습니다. 이후, 그는 가족이 처한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던 파울을 설득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습니다. 1939 8 가족에 대한 해방 요청이 접수되었는데, 전쟁이 시작되기 1주일 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승인으로 비트겐슈타인 가족의 재산 1.7톤이 나치에게 인도되었습니다. 이는 2023 가치로 환산하면 1.2 달러가 넘는 금액입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해에 모스크바를 번째로 방문하여 철학자인 소피야 야노프스카야를 만났습니다. 일을 마무리 지은 다음 비트겐슈타인은 영화관 제일 앞자리에서 영화를 보는가 하면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편안히 서방세계를 관망하였습니다. 노먼 맬콤의 회고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이 강의를 마치자마자 빵이나 파이 따위를 사들고서는영화관으로 달려가 영화를 보면서 먹곤 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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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수학기초론에 대한 자신의 기존 견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초기 사상에서 논리는 단단한 기호였으며, 그는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수학 개론 대해서도 이러한 사고를 기초로 비평하였습니다. 하지만 무렵에 이르러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글과 강의를 통해서 과거 자신의 사상을 부정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2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는데도 철학 강의나 하고 있는 스스로의 처지를 견디기 힘들어하였습니다. 1941 9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형제였던 라일 교수에게 요청하여 런던에 있는 가이스 병원에서 봉사하겠노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라일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의학 교수였습니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은 가이스 병원에서 약품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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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직원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간혹 비트겐슈타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하고 부탁하였고, 자신을 비트겐슈타인 교수님이라 부르지 말고 여느 의사들과 같이 박사님이라 불러 주기를 바랐습니다.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몹시 외로웠습니다. 1941 4 1 그의 노트에는 생활의 미래를 대상으로 나는 더는 어떤 희망도 없다. 살아 있는 사망이 길게 늘어진 것과 같은 이런 것은 예전에는 없었다. 최악의 상황 말고는 미래를 상상할 없다. 친구도 없고 기쁨도 없고.”라며 외로움을 술회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란시스 스키너의 연구 수업에 참여한 십대였던 케이스 커크와 우정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관계는 스키너가 죽은 1941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스키너는 비트겐슈타인과 커크의 관계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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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학문 연구에 비트겐슈타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최소화된 점을 고마워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커크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사랑에 빠져 있었습니다. 기간 비트겐슈타인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종종 커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적곤 하였습니다. “열흘 동안이나 K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일주일 전에 사람을 언급했는데도. 아무래도 사람이 듯하다. 비참한 생각.” 비트겐슈타인이 편지를 무렵 커크는 혼인하였고 둘은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1944,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얼마 지나지 않아 1944 여름까지 휴직을 신청하고 웨일스의 스완지로 철학적 탐구 완성하기 위해 힘을 씁니다. 1944 10, 케임브리지로 복귀한 그는철학적 탐구 완성하지 못한 것에 낙담했고, 강의를 하는 책임을 다시 맡아야하는 것에 대해 열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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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7, 비트겐슈타인은전쟁의 원흉 처칠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 영국 선거에서 노동당에 투표하고,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습니다. 1947 비트겐슈타인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집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의 교수직은 친구인 게오르크 헨리크 브리흐트가 물려받았습니다. 1947년에서 48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더블린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로즈 호텔에서 머물렀습니다. 1946, 리처즈와 사랑에 정신이 팔려있는 바람에 10 26 도덕학 클럽에서 포퍼와 부지깽이 패싸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19497, 비트겐슈타인의 학생이었던 노먼 맬콤이 더블린으로 찾아왔을 비트겐슈타인은 전립선 암으로 병들어 있었습니다. 맬콤은 보다 좋은 환경에서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하여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이 교수로 있는 미국 코넬대학으로 데려갔으나 10 그의 증세는 악화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맬콤에게 " 미국에서 죽고 싶지 않아. 유럽인이라고. 내가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게"라고 요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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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10 , 비트겐슈타인은 런던으로 돌아왔으며 전립선 암이 골수에까지 옮게 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1949 12 24 빈을 방문하여 죽음이 임박한 누나 헤르미네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을 간신히 알아보는 처지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와 우리 모두에게 크나 손실. 내가 생각했던 보다 심하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1950 2 11 누나의 임종을 지켜본 비트겐슈타인은 1950 4 케임브리지로 돌아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를 가보고 싶어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1951 비트겐슈타인은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였습니다. 그는 노먼 맬콤에게 " 마음은 이미 죽었어. 더이상은 고통일 뿐이지. 알기로 삶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다음엔 정신적인 삶만이 남게 되는 거야"라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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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번째 생일이던 1951 4 26 의사가 생이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좋군요, 사람들에게 삶이 멋있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3일뒤인 4 29 리처즈, 엘리자베스 앤스콤, 요릭 스마이시스 그리고 모리스 드루어리가 가톨릭 임종기도를 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고 4 30 케임브리지 자일스 성당에서 천주교식 장례의식을 거쳐 인근(북위 52.217094° 동경 0.099828°) 묻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논고에서죽음은 삶에서 일어나는 그저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죽음을 경험하지 못한다. 만일 우리가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들어선다면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속한 것이다. 제한 없이 펼쳐진 길에서 우리의 삶에 끝은 없다.” 아직도 우리들 속에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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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의 배경 – Background of Philosophical Investig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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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논리 철학 논고 출판한 후에 특징인 논리적 원자론이 너무나 기계적이라는 점을 반성하지 않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론을 버리고 명제(문장, 판단, 인식, 어느 것이나 같다) 그것이 사용되는 문맥(文脈맥락·상황·전후 관계와 그것이 사용되는 목적에 의해 의미있는 것이 되며, 기계적으로 논리적 원자인 원자적 명제로까지 분석(分析환원(還元)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명제 사용이 안에서 행해지는 일상 언어의 분석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철학자의 과제는 언어를 형이상학적 용법에서 일상적 용법으로 회복시키는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학의 언어 사용에 있어서의 모순·혼란·불명료성 등을 치료하는 노력했습니다. 그의 후기의 비교적 유연한 분석 태도는 협의의 분석철학파로서의 일상언어학파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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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함께 재직하던 이탈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와 자신의 그림 이론에 대해 토론을 하던 가운데 잘못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론에 스라파가 반론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목부분을 밀어 올렸습니다. 스라파의 행동은 이탈리아에서 의문이나 조소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제스처였습니다.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주장했던 언어의 논리학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언어의 의미는 결코 가지로 고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생각의 전환을 바탕으로 철학적 탐구 집필하였으나 출판하지는 않았습니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의 사후에 남겨진 초고를 합하여 출판되었습니다. ‘철학적 탐구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상당부분 수정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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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그림 이론과는 달리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그림 이론을 포함한 기존에 있었던 사물과 언어가 일치한다는 주장을 반대하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가 있기 전에 생활 양식이 있습니다. 또한, 언어는 '' 아니라 '사용' 본질이 있으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는 하나의 공통된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쓰임에서 나타나는 여러 유사성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것을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이라고 불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놀이에 비유했는데, 줄넘기 놀이, 술래잡기, 가위바위보 등의 '놀이'에서도 어떤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족처럼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대니얼 솔로브는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접근을 현대형 프라이버시 개념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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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의 내용 – Contents of Philosophical Investigation,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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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哲學적探究, Philosophical Investigation)’ 비트겐슈타인이 생애에 끝내지 못하여 죽은 2 후인 1953 앨리자베스 앤스콤과 러시 리스가 공동 발행하고 앤스콤이 번역하여 독영 대역판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책은 2부로 이루어졌는데, 1부는 비트겐슈타인이 1945년까지 두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그의 사후에 남겨진 초고를 2부로 첨가하여 출판되었습니다. 1부의 순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리한 그대로이며, 2부의 순서는 앤스콤과 리스가 정한 것입니다. 2009 2부를심리철학-단편이라는 별개의 제목을 달아, 요하임 슐테의 비평본을 기반으로 요하임 슐테와 피터 해커가 공동으로 번역한 4판이 독영대역본으로 나왔습니다. ‘철학적 탐구 본래 목차가 없었습니다. ‘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의 초고를 모아 출간한 관계로 책의 내용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여러가지 주제들이 번복되며 서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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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독자들이 서술의 맥락을 파악하며 읽기가 불편합니다. 목차도철학적 탐구 주석서를 베이커(Gordon Park Bakrer) 해커(Peter Michael Stephan Hacker) 제안한 목차와 루설의논리 연구목차 형식과 비슷한 제노바(Judith Genova) 목차가 있습니다. 취급된 주제는 의미·이해·명제·논리학 등에 대한 개념, 수학의 기초, 의식의 상태, 기타 광범하지만 반드시 논리적 연관이 명백한 것만은 아닙니다. 1부에서 주석은 거의 단락 이상이며 단락별로 순차적으로 번호가 매겨집니다.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요점을 통일된 작업으로 종합하지 못한 자신을 설명합니다. 실패로 인해 그는 책의 구조가 "모든 방향으로 십자형 사고의 넓은 분야를 여행하도록 강요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비트겐슈타인은 1부에서 자신의 말을 " 길고 복잡한 여행 과정에서 만들어진 여러 풍경 스케치"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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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1절에서 693절까지의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언어 학습과 명시적 정의에 의한 언어 설명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합니다. 논의는 1절에서38절까지를 차지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138절에서 242절까지 규칙과 규칙 준수에 대해 논의합니다. 사적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주요 논의는 244절에서 시작하여 271절까지 계속됩니다. 측면을 보는 것에 대한 논의는 398절에서 시작하여 401절까지 이어집니다. 책의 2부는 14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고는 길고 로마 숫자를 사용하여 번호가 매겨집니다. 2부의 특성은 비트겐슈타인이 1부에 다시 통합하려고 의도했을 있는 메모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망한 텍스트는 번째, 번째 번째 판에서 "파트 II" 출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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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료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에 대한 지속적인 불확실성에 비추어, 4(2009)에서는 "파트 I" "철학 탐구", "파트 II" "심리학 철학 - 단편"으로 다시 제목을 변경했습니다. 전형적인 철학 텍스트는 철학적 문제를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대안적 접근법을 요약 비판하고, 접근법을 제시하고, 접근법에 찬성하는 논증을 합니다. 대조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책은 철학을 활동으로 취급하고 텍스트를 플라톤의 대화에서 대담자에게 질문하는 소크라테스의 방법과 유사한 대화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담한 사람의 이름이 언급된 플라톤의 대화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은 누구의 견해가 주장되고 있는지 또는 누구에게 언급되고 있는지 결코 명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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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이론과 언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도구가 근본적으로 단순하다고 보았고 철학자들이 언어를 오용하고 무의미한 질문을 함으로써 단순성을 모호하게 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논고에서 보였던 전반기 철학과는 달리 세계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아니라 "!", "저쪽!", "!", "도와줘!" 같은 언어 표현을 부각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사용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이와 관련하여 비트겐슈타인은 "'낱말의 의미란 언어 안에서의 사용이다"'라고 설명하며 언어의 고정적 의미을 부인합니다. 그는 자신의 전반기철학의 진리 대응설을 비판하고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활동, 일종의 게임이라 주장하며 언어의 화용론적 측면을 부각시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언어 게임 내에서 단어가 이해되는 방식에 기초한다고 주장합니다.이러한 말의 움직임은 현실과 유사하지만 결코 일치하지도 않고 대응하지도 않습니다. 언어에 대한 기준은 교육, 설명, 기술 정확성 기준과 같은 일련의 상호 연관된 규범적 활동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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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언어는 공유 가능해야 하지만 이것이 언어가 실제로 이미 공유되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언어의 의미는 사용되는 방식, "삶의 형태" 있다는 그의 주장은 언어의 의미가 문화와 사회에서 나온다는 "인류학적 전체론"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게임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언어 게임 핵심 개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 게임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언어를 말하는 것이 활동 또는 생명체의 일부라는 사실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입니다. 언어 게임의 중심 특징은 언어가 문맥 안에서 사용되고 언어는 문맥 밖에서는 이해할 없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예는 "게임"이라는 단어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보드 게임, 내기 게임, 스포츠, "전쟁 게임" 같은 다양한 종류의 게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모두 "게임"이라는 단어의 다른 용도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느낌표, 명령, 요청 또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사용할 있는 "!" 예를 제공합니다. 단어의 의미는 단어가 사용되는 언어 게임에 따라 다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요점을 제시하는 다른 방법은 ""이라는 단어가 언어 게임 내에서 사용되는 외에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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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당신에게 잔을 가져오도록 하는 명령으로 단어를 사용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누군가에게 물이 독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사용될 있습니다. 비밀 사회의 구성원이 단어를 암호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인에게는 호남지방에서 사용되는 거시기같은 겁니다. 낱말의 개념범주의 구성 요소들을 모두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성질은 있지 않아도 됩니다. 마치 어머니와 아들은 코가 닮고, 아들과 딸은 이마가 닮고, 딸과 아버지는 입이 닮았지만 가족 모두 공통적으로 닮은 외모의 어떤 부분이 있지 않아도 '가족'으로 불리듯이 낱말의 개념 범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어떤 요소가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올림픽 표적 사격은 게임이지만 유사한 활동(예를 들어: 군사적 심각한 사격) 생존의 문제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은 중요한 유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 서로 관련이 있음을 어떻게 인식할까요? 우리는 비슷한 , 몸무게, 색깔, 머리카락, , , 말투, 사회적 또는 정치적 견해, 버릇, 신체 구조, 등을 있습니다. 일치하는 항목이 충분하면 가족 유사성 (family resemblance)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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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항상 의식적인 과정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특정 임계값에 도달할 때까지 다양한 유사성을 분류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유사성을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도 마찬가지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간접 의사소통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의존과 사고 실험에 대한 의존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어떤 철학적 혼란은 우리가 가족 유사성 (family resemblance) 없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는 언어가 사용하는 모호하고 직관적인 규칙을 이해하는 실수를 했고,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을 철학적 매듭에 묶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특정 위치의 문제를 지적하는 단순한 연역적 논증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대신, 비트겐슈타인의 목표는 가족의 유사성을 보는 직관적인 능력을 인식할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랫동안 철학적 문제에서 우리를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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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주위에 있는 인간이 오토맨(자동 기계)이며, 비록 행동 방식이 항상 같다고 해도 의식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만약에 내가 지금-혼자 자신의 방에서-그와 같이 상상하고 있다면 나는 사람들이 경직된 눈초리로 (황홀 상태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인데- 생각은 아마도 약간 으스스한 것입니다. 그러나 번이라도 예를 들어, 가두에서의 보통의 교제 가운데서 생각을 고집하려고 시도해 보십시요! '저기에 있는 아이들은 단지 오토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들의 생생한 모습은 모두 기계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에게 말해보십시요. 그러면 이러한 말이 당신에게는 전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 되거나, 또는 당신 자신 안에 일종의 으스스한 감정 내지는 그와 비슷한 것이 생기게 것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오토맨이라고 본다는 것은 어떤 형상을 다른 형상의 극한 상태 내지는 변종으로 본다는 , 예를 들어 창의 십자 격자를 갈고리 십자로 보는 것과 유사합니다. 나는 남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수는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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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는 것은 옳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철학의 모든 구름 덩어리가 방울의 언어 이론으로 응축됩니다. 비트겐슈타인 교화 철학의 정수는 어떤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 "사적인 존재자와 그를 향한 특권적인 접근"이라는 사밀성(사적인 비밀) 직접성에 적의를 품게 되었다고 까지 생각했습니다. 논리학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비트겐슈타인은 후반기 철학에 이르러 '모순'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앨런 튜링과 잘못 건설된 다리 관한 논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튜링은 모순이 있다는 것은 무너질 다리를 짓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대해 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물리적인 문제이며, 모순은 아무것도, 심지어 어떤 거짓된 것도 만들지 않는다고 반박했습니다. 수학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후기 철학에 이르러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이 철학에 기초(토대) 부여할 있다는 희망을 버렸습니다. 반대인 철학이 수학의 토대를 부여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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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 어떤 수학적 발견도 철학을 전진시킬 수가 없으며, 모순을 수학적·논리수학적인 발견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철학이 일이 아니다."라고 얘기합니다. 규칙 규칙 준수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의는 138절에서 242절까지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특정 형성 규칙에 따라 일련의 기호를 기록하도록" 명령하는 예를 들어 규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일련의 기호는 자연수로 구성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지시에 따라 숫자를 복사하고 일련의 숫자 구성을 이해함으로써 다음 순서를 구별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자세히 고려하는 게임의 일반적인 특성 하나는 다음 규칙으로 구성되는 방식입니다. 규칙은 명시적으로 정의할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구성합니다. 결과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실, 그는 행동의 과정은 어떤 특별한 규칙과 일치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규칙이 동작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할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규칙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는 행동이 사람이 관련된 특정 형태의 삶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살펴봄으로써 결정되어야 합니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사회 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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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딱정벌레를 살펴보면서 철학적 탐구 마무리를 해보고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적 언어의 가능성에 반대하는 다른 요점은 딱정벌레 상자 사고 실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사람이 "딱정벌레"라는 단어로 언급하려는 상자가 있다고 상상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나아가,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상자 안을 들여다볼 없고 각자 자신의 상자를 조사해야만 "딱정벌레" 무엇인지 있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상황에서 "딱정벌레"라는 단어는 사물의 이름이 없다고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상자에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또는 전혀 단어의 의미가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딱정벌레를 사적인 대상으로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겁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할 있다면 그것은 고려되는 의미에서 사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무언가를 정말로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그에 대해 이야기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상자안에 딱정벌레가 있다고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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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적 탐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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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이, 하이데거와 함께 체계 철학에 대비되는 3 교화 철학자 사람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학문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자들이 명료하고 논리적인 이상적인 상태의 언어를 추구하는 것을 비판했고, 이러한 철학은 옥스퍼드학파라고 불리는 일상언어학파를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는 논리 철학 논고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서 중에 하나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과 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고 예술가들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논리 철학 논고 대표되는 전기와철학적 탐구 대표되는 후기로 나뉩니다. ‘논리 철학 논고 나타난 전기 사상이 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 집중된 반면, 후기 사상은 언어-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중심이 놓여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단어의 의미는 주어진 언어-놀이 안에서 단어들이 사용될 가장 이해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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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철강재벌2세라는 다이아몬드수저 출신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 통해 같은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공유한다는 ,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설명했습니다. 바로 한국어를 사용하면거시기한국인이고 영어를 사용하면 미국인 영국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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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46번째 인문학 부문 16번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사후 1953년에 출간된 유작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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