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7_20세기100선

045.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1951 –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by Hannah Arendt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4. 5.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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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rWomm4iKM

45.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1951 –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by Hannah Aren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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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인종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2차세계대전 유태인들은 악조건 속에서 생존을 위한 두뇌활동을 활발하게 해야만 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도 하이데커와 불륜까지 해가며 독일 철학계를 기웃거렸고 나치의 방해로 교수자격취득이 불가하자 나치에 협조적인 하이데커를 비난하며 아우구스티누스 성인 사상의 권위자 카를 야스퍼스로 말을 바꾸어탑니다. 결국 53세의 나이에 미국 프린스톤 대학에서 최초의 여성 전임교수가 되는 집념을 보입니다. 책을 접하면 우선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일치된 생각과 행동을 강요받는 남한과 북한이 떠오릅니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사소한 사랑조차도 무력화시키고 인간 존재의 본질인 자유와 인간이 회복해야 본성을 말살합니다. 전체주의의 가면 아래 피비린내의 학살 광풍이 몰아치던 1980년대 한국에서 학살괴수 전두환의 광란 속에서도 남녀간의 사랑과 배신 그리고 학살자 전두환의 주위를 맴돌던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의 괘변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살인마 전두환처럼 반란에 의해서 권력을 강탈한 것과는 다르게,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독재는 민주적인 투표에 의해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권력을 장악합니다. 그런 다음 법과 관료 제도를 이용하여 개인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강화합니다. 마치 한나 아렌트가 살펴본바처럼 1930년대 출현한 우익 히틀러와 좌익 스탈린의 전체주의는 국민국가를 바탕으로 하며,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을 통하여 개인과 사회를 통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인 자유와 인간이 회복해야 본성을 말살하고 전체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제했습니다. 그러면 한나 아렌트의 생애와 그녀의 출세작 전체주의의 기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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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생애 – life of Hannah Aren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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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당시보다 사망 이후에 각광을 받고 있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10 14 ~ 1975 12 4)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20세기와 21세기 정치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정치 이론가입니다. 종종 정치 철학자로 평가되지만, 아렌트 자신은 항상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그러한 호칭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대신에 자신을 정치 이론가로 묘사했는데, 이유는 그의 업적이 “‘ 인간 아닌인류 지구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1906 10 14, 당시 독립국이었던 지금은 하노버(Hanover) 일부인 린덴(Linden)에서 세속적 반시온주의 유대인 집안에서 무남독녀 외동딸 요한나 아렌트(Johanna Arendt) 태어났습니다. 3살때 엔지니어인 아버지 아렌트(Paul Arendt, 1873–1913) 매독치료 때문에, 그가 존경한 선구자 이마누엘 칸트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이사했습니다. 아렌트는 영특했습니다.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가 되기도 4세이전에 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4년뒤 한나 아렌트가 7살되던해에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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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브르크의 추종자로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던 어머니 마사 아렌트(Martha Cohn Arendt, 1874-1948) 그로부터 7년후에 재혼했습니다. 아렌트가 어렸을 집에서 조차유태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길거리에서 다른 아이들한테서 유태인이라는 조롱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사람은 머리를 숙여서는 안된다. 사람은 저항해야 한다!’ 어머니의 신념에 의해 강화되어, 만약 선생님이 반유태인 발언을 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어머니는 딸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아렌트는 1922 15세의 나이로 자신을 모욕한 교사에 대한 보이콧을 주도한 혐의로 루이스 중등학교에서 퇴학당해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이라는 존재, 자기가 속해 있는 사회에서 타자(他者)라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며 성장하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사회민주당 가족 친구들이 있는 베를린으로 보냈습니다. 아렌트는 조숙했습니다. 열여섯에 이르러선 칸트의순수이성비판’,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그리고 야스퍼스의세계관의 심리학 읽었습니다. 그녀는 학생 기숙사에 살며 두학기동안 베를린 대학교(1922–1923) 라틴어와 그리스어 과정을 청강했습니다. 그녀는 어니스트 그루막(Ernst Grumach)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밑에서 공부했던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의 입학 시험에 성공적으로 합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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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1924년부터 마르부르크 대학(1924–1926)에서 사유의 왕국의 숨은 이라며 흠모하던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밑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17세의 아렌트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35살의 하이데거와 21세까지 길고 산발적인 애정 관계에 있었는데, 이후 나치에 적극 협력하던 그에게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되어 그를 떠나 프라이부르크의 후설을 거쳐 1926 하이데거의 추천을 받아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옮겨갑니다. 20 뒤에 하이데거는 한나 아렌트에게 시기에 그녀는 자신의 활동의 영감이었으며, 열정적 사유의 자극이었다 고백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카를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아,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입각한 사랑의 개념 대한 박사논문을 22살의 나이에 썼습니다. 논문은 1929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해 한나 아렌트는 언론인이자 철학자인 귄터 슈테른(Günther Stern, 1902-1992) 결혼했지만 1930년대 나치 독일 에서 반유대주의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에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불법 연구를 수행한 혐의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8일간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의 교수 자격 시험인 하빌리타치온 취득을 금지당했으며, 따라서 독일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도 좌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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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독일에서 야밤에 오레산맥을 넘어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로 탈출하여 기차를 타고 스위스의 제네바를 거처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파리에서 그녀는 문학 평론가이며 마르크스 신비주의자인 발터 베냐민(Walter Benjamin) 레이몬드 아론(Raymond Aron) 친구가 되었습니다. 1934년에 프랑스에서 그녀는 유스 알리야(Youth Aliyah) 위해 일하면서 유대인 어린이들이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탈출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아렌트는 1937년에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습니다. 비록 독일 국적을 갖고 있었지만 독일 민족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자랑스럽게 독일국적을 버렸습니다. 그해 슈테른과 이혼한 , 1940 1 16 아렌트는 독일 시인이자 공산주의 철학자인 하인리히 블뤼허(Heinrich Blücher) 재혼했습니다. 그러나 2 세계 대전 프랑스가 선전포고를 1940 5 5 독일이 프랑스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유대인이 수용소에 강제 이송되게 되자, 아렌트는 프랑스에 의해 외국인으로 구금 되었습니다. 그녀는 독일의 파리 점령 가까스로 탈출하여 어머니와 함께 1941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아렌트를 포함하여 2500 정도 되는 유대계 망명자에게 불법으로 비자를 발행해 미국 외교관 하이램 빙엄 4(Hiram Bingham IV) 도움으로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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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5 22, 그는 뉴욕에 정착 독일 출신 유대인 공동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주간지아우프바우’(Aufbau)’지에 기고활동을 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국적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따기 전까지 무국적 상태였으며 실제로도 독일 출생이지만 독일 국민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2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렌트는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독일 ()나치스화 청문회에서 하이데거가 진짜 나치당원이 아니라 살기위해 위장 나치활동을 했다고 증언하여 하이데거를 살려주었습니다. 이는 평소 하이데거를 깊이 존경하던 공산주의자인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의 부탁과 권유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일 그녀가 하이데거와 대학 시절부터 불륜 관계였기 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비록 그가 나치에 협조하였다는 과오가 있었을지라도 그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 그녀가 증언했다고 하나, 이것이 거짓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1950년에 그녀는 미국 귀화 시민(naturalized citizen) 되었으며, 1951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을 분석한 전체주의의 기원 출판 되면서 사상가이자 작가로서의 그녀의 명성이 확립되었고 일련의 작품이 뒤따랐습니다. 명성으로 시카고대, 버클리대, 브루클린대 등에서 강의를하고, 1959년에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전임 교수직에 지명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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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1960년엔 콜럼비아대로 옮겼으며, 1963년에서 1967년까지는 시카고대, 그리고 1967년부터는 뉴욕의 망명자들이 주로 강의하던사회조사대학원(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1970 10 31일에는 남편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충격을 받았습니다. 1960 나치의 대표 전범으로 유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이 12년간의 도주 끝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잡히자 당시 뉴욕에 거주 중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기자로서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에 참석하였고, 그곳에서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합니다. 수많은 초년 중년 노년의 사진이 끽연하는 모습임을 봐도 있듯이, 아렌트는 엄청난 골초였습니다. 얼마나 담배를 좋아했던지 그녀의 말에 따르면, 본인이 담배를 피는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사명과 같다고 했습니다. 담배를 통해 본인 개인의 몸에 엄청난 해악을 끼칠지라도 이를 통해 풍부한 사유를 한다면 인류에게 이득이라는 소리입니다. 아마 독일인 특유의 유머일 겁니다. 이러한 아렌트의 이미지는 영화 매트릭스의 캐릭터인 오라클의 컨셉으로 차용되었습니다. 유부남이었던 하이데거와 연인사이였지만 하이데거의 부인도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이데거가 나치당원이었던 이유로 불륜관계는 오래 지속될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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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하이데거가 노환으로 앓아눕게되자 하이데거의 부인이 직접 한나 아렌트에게 편지를 보내 "남편이 임종을 앞두고 당신을 보고싶어한다" 초청하였고, 한나 아렌트는 초청에 응하여 독일로 날아가 하이데거를 만난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정작 임종 직전이던 하이데거보다 본인이 먼저 1975 12 4일에 69세의 나이로 친구들을 접대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1951전체주의의 기원출간 이후 아렌트가 책으로는 1958인간의 조건’, 1961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1963혁명론’, 196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68암흑시대의 인간’, 1970폭력론’, 1972공화국의 위기등이 있으며 사후 1978정신의 (The Life of the Mind)’, 1982칸트의 정치철학 강의등이 출간되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이름은 동구권의 몰락 이후 서방 세계에서 더욱 빛이 났으며, 한국에선 전체주의 군사독재 극우세력의 정권찬탈 난동에 지성인들이 지속적으로 언급하며 이름을 각인 시켰습니다. 학문적 평가와는 별도로, 아렌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준 책은악마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 불리우는 1963년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입니다. 책은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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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악마의 평범성 - The Banality of Evil) – 교수형에 처해진 나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재판에서 아이히만의 모습과 진술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상상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감기에 걸려 연신 손수건으로 콧물을 닦으며저는 다만 일에 유태인 담당과가 책임이 없다는 것만 말할 있다”, “지시대로 명령을 따라야 했다. 행정적인 절차니까”, “ 죽이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에게서 지극히 평범한 관청 직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는그는 악마가 아니다”,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썼습니다. “말도 되는 소리라고 흥분하는 사람들에게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에 따랐을 뿐이라고 하잖아요. 정말 흥미롭지 않아요? 살육적인 체제가 요구한 뭐든 열심히 사람이 저기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 유태인을 미워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다니.” 한나 아렌트가 보기에 아이히만에게는 목적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이히만은 기차가 떠나면 자기 일을 마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전혀 가책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됐든 관계없었습니다.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인정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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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히만의 끔찍한 행동과 평범함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마치 1980 한국의 살인마 전두환 정권에 종사했던 모든 공무원, 군인, 교사, 직장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나 아렌트의 악마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우리는 악을 대체로 초자연적인 어떤 , 사탄의 체현으로 봤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이런 깊이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는 사유할 능력이 없었다. 그를 20세기 최대의 극악무도한 범죄자로 만든건 어떤 어리석음과도 일치하지 않은 사유의 부재였다. 그는 다만 사유할 능력이 없었다.”라고 시작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도 감추지 않았습니다. “유태인이 사는 곳엔 지도자가 있었다. 지도층이 거의 예외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이유로 나치에 협력했다. 유태인들에게 이렇다 조직이 없고 지도자가 없었다면 혼란과 불행은 있었겠지만, 희생자 숫자가 600만까지는 이르지 않았다는 엄정한 진실이다.” 1980 한국에서도 살인마 전두환 정권에 모든 지도층은 거의 예외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이유로 협력했고 충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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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 내용 – Contents of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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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일주일에 번씩 동물농장의 투쟁과 승리를 축하하는 것을 목적으로 자발적인 시위를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지정된 시간이 되면 동물들은 하던 일을 중지하고 돼지들을 선두로 , , 가축 동물의 순서로 군대처럼 열을 지어 농장의 마당을 빙빙 행군했다. 이것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Animal Farm) 중의 부분인데 작품은 수퇘지 나폴레옹이 공포와 억압으로 동물들을 기만한다는 풍자 정치소설입니다. 이처럼 동물농장의 독재자 나폴레옹은 전체가 일치된 행동을 하고 일치된 생각을 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한편 적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겼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조지 오웰은 포악한 나폴레옹으로 스탈린을 풍자했으며, 소련을 공포정치가 행해지는 동물농장에 비유했다는 이유로 소련에서 판금되었을 아니라, 영국과 외교문제까지 벌어졌습니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소련에서 문제가 책이 있는데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 1951년에 ‘전체주의의 기원’ 바로 책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책에서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인류역사상 유례를 찾을 없었던 ‘절대악’으로서의 정치체계인 “전체주의”  히틀러의 나치즘과 스탈린의 공포정치의 기원과 특징에 대해 상세히 분석했습니다. 아렌트는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을 분석한 책에서 전체주의의 기원이 ()유태주의와 19세기 제국주의에 있으며 더욱 근본적인 뿌리는 대중적 인간의 고독한 심리적 상황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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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로 나누어진 방대한 책에서 1 “반유대주의”와 2 “제국주의”는 책의 핵심인 3 “전체주의”를 위한 서론 격이라고 있으며,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가 전체주의의 도래를 위한 길을 닦았다”라는 정도로 요약될 있습니다. 야스퍼스의 말처럼 길고 이해가 어려운 1, 2부보다는 핵심에 해당하는 3부를 먼저 읽는 것이 책을 읽는 현명한 방법입니다. 전체주의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운동으로 정의될 있으며, 운동으로서의 특성을 유지할 동안에만 권력을 유지할 있습니다. 전체주의 운동에서는 운동만 지속될 궁극적으로 지도자도 대중도 독립적 인격으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운동의 핵심 목표는 가능한 많은 지지자를 끌어들여 조직하고 그들을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전체주의 정권은 개성을 가지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획일화되고 고립된 군중 혹은 잉여 존재로 만드는 정치적 도구와 장치를 끊임없이 발전시킵니다. 근대 국민국가의 몰락과 계급사회의 붕괴과정을 통해 어떠한 계급이나 정당 혹은 공동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잉여집단인 ‘폭민’이 발생했습니다. 체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얻지 못한 모든 계급의 폐물로 구성된 집단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원자화되어 있으며 절망과 증오로 가득 자신들을 조직하여 소속감과 정체성을 부여할 지도자를 기다립니다. 이러한 폭민의 존재야말로 전체주의 발생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있으며, 전체주의는 간단히 말해 폭민의 운동 · 조직 · 정권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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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 운동은 폭민에게 정체성과 목표를 부여하고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줌으로서 거대한 운동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희생하도록 만듭니다. 또한 그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기존 사회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전체주의 운동의 총체적 비전에 매혹된 엘리트들과도 폭민과 엘리트의 동맹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전체주의는 폭민의 폭력적 창의성이야말로 엘리트의 지적 창의성과 함께 전체주의를 진정으로 위협하는 요소라는 사실과, 폭민보다는 획일화된 속물 대중이 지배와 말살의 가혹한 통치를 위해 나은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나치 정권하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역들은 아이히만과 같이 개인의 사적 안녕을 보호하는 데만 골몰하던 속물화한 부르주아 계급이었으며, 지적 능력과 창조성의 부족이야말로 전체주의 정권이 요구하는 충성심의 가장 중요한 보증이 되었습니다. 폭민과 엘리트는 전제주의 운동 자체의 힘에 의해 끌릴 있으나 대중은 선전을 통해서만 얻을 있습니다. “자연과 역사의 법칙에 대한 배타적이고 과학적인 예언”의 형태가 전체주의 선전의 특징이며, 전체주의 운동은 이러한 선전적 예언의 오류 불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무법적 폭력인 테러를 이용했습니다. 전체주의 운동에서 테러는 사람들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화된 교의와 실천적 거짓말을 끊임없이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이며, 따라서 전체주의가 정권을 장악한 선전은 교화로 대체되지만 테러는 권력 장악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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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이 非전체주의 세계를 다루기 위해 전체주의가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라면, 테러는 전체주의 지배의 본질이라 있습니다. 나치가 이용했던 가장 핵심적이고 효과적인 선전은 ‘유대인의 세계음모’라는 허구였으며, ‘유대인 의정서’ 같은 가짜 문서를 통해 유포된 유대인의 세계통치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거짓을 유대인 말살과 독일의 세계지배를 위한 토대로 삼았습니다. 전체주의 조직은 전체주의 운동의 선전용 거짓말들을 현실로 전환시키고 구성원들이 허구세계의 규칙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전체주의의 조직은 다수의 동조자와 엄격히 선발되는 소수의 당원으로 이루어지며, 동조자 조직은 전체주의 운동을 정상적이고 점잖은 외양으로 둘러싸 외부세계에 대해 일종의 완충장치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조직은 계속해서 높은 엘리트 조직을 만들면서 이전 조직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무한히 반복됩니다. 동조자와 당원에게는 각각 지도자의 모든 발언과 이데올로기적 선전을 믿을 것이 기대되었으나, 운동의 최상위 엘리트 집단에게 요구된 유일한 자질은 지도자의 모든 ‘사실적 진술’을 즉각 현실 속에서 실현시켜야 ‘목적의 선언’으로 알아듣고 실행할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정권을 장악한 전체주의는 전제정권의 형태로 경직됨으로서 운동성을 상실할 절대주의적 위험과 운동의 이동이 국경 내에 제한될 민족주의적 위험에 직면했으며, 스탈린 정권은 영구적으로 제도화된 숙청을 통해 나치는 끊임없이 강화되는 인종선택과 말살을 통해 운동의 내부적 동력을 유지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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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집행자이자 후견인으로 비밀경찰을 구축하고 절대적인 지배를 구현하는 실험실로서 강제 수용소를 세웠습니다. 그러한 운동성의 3가지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전체주의 국가기관의 특징은 관직의 중복과 권위의 분할, 실질적인 권력과 표면상의 권력의 공존입니다. 기능이 중복되고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며 어디에 실권이 있는지 불확실한 관청들 간의 부단한 경쟁은 반대나 사보타주를 성공적으로 차단하고, 중간 단계 없이 모든 조직이 지도자의 의지를 직접 구현할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중복의 부작용인 관료체제의 거대화는 숙청을 통한 반복된 청산 작업으로 억제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은 권력 유지를 위한 통치 기술로서는 탁월했으나 행정의 책임감과 전문성, 효율성이라는 면에서는 재앙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전체주의 국가에서 모든 실권은 공식적인 국가 군대 기구의 밖에 있는 운동의 제도에 있었으며, 핵심에는 유능하고 능률적인 실질적 권력기관인 비밀경찰이 존재했습니다. 일반적인 전제 권력하의 비밀경찰이 정권에 반대하는 ‘범죄 용의자’를 추적한다면, 전체주의 국가의 비밀경찰은 구체적 범법 여부와 상관없이 권력이 자의적으로 운동의 장애물로 규정한 ‘객관적인 적’, 예를 들면 히틀러 치하의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 활동했습니다. 전체주의 정권이 정권을 장악한 실질적인 적들의 제거 작업이 완성되고 ‘객관적인 적’에 대한 추적이 시작되면 비로소 비밀경찰을 통한 공포정치가 전체주의 정권의 실질적인 내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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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3번째로, 인간 행동의 표현인 자발성 자체를 제거하고 인격을 단순한 사물로 격하시켰던 전체주의 정권의 강제 수용소나 집단학살 수용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의 기본 신앙을 실증하기 위한 무서운 실험실이자 인류역사에 전대미문의 ‘극단적 악’이 출현했음을 의미합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자와 죽은 자의 세계에서 철저히 삭제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졌으며, 법적 인격과 도덕적 인격 그리고 자발성과 개성이 철저히 파괴된 사물 혹은 ‘반응의 묶음’으로 ‘개조’되었습니다. 집단 수용소야말로 모든 사람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하게 지배하기를 원했던 전체주의 권력의 목적이 가장 구현된 ‘모범적 사회’였으며, 절대악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공포와 침묵 그리고 열광을 통해 전체주의 정권이 권력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제도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전체주의 정권은 다양한 인간들을 내면에서부터 지배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거리를 제거하여 ‘사고’하거나 ‘행동’하는 존재가 아닌 ‘순종’하거나 ‘반응’하는 존재로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개개인들에게 총체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무조건적이고 변치 않는 충성을 요구합니다. 개인들은 다원성을 잃고 획일화되어 마치 사람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 대중이 의견을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동일하게 행동할 , 그들은 전체주의의 폭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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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잉여’ 혹은 ‘폐물’로 전락한 절망과 증오로 가득 일군의 대중인 폭민(mob) 존재가 전체주의 발생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폭민들의 정권인 전체주의가 가장 선호하는 통치 대상은 자신과 가족의 안녕에만 관심이 있는 고립되고 생각 없는 대중이었다고 강조합니다. 실제로 나치가 저지른 ‘절대악’ 대부분은 바로 아이히만과 같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상실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던 소시민 대중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구하지 못하거나 비정규직으로 만족해야 하는 사회, 일상화된 해고나 조기퇴직으로 인해 언제든지 자본주의 체제의 ‘잉여’로 밀려날 위험에 처해 있는 사회, 그리고 타인과의 연대를 상실하고 타인의 고통에 눈감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는 성실하고 고립된 개인들로 가득 사회,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체주의나 그와 유사한 ‘절대악’으로 규정될 있는 정치체제의 위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없습니다. 아렌트는 자유나 평등이란 인간들이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공동체에 부과하는 것이며, ‘연대’와 ‘생각’과 ‘행동’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권력과 지도자의 선전에 대해 ‘고립된 조건반사들의 다발’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는 스스로 선택한 ‘절대악’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이미 접어들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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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은 1951년에 영어로 처음 출판되었습니다. 독일어 번역본은 1955년에 출판되었습니다. 번째 확대판은 1958년에 출판되었으며 그녀의 원래 "결론" 대체하는 개의 장이 추가되었습니다. 13장은 "이데올로기와 테러: 새로운 형태의 정부"라는 제목으로 그녀가 1953년에 별도로 출판했습니다. 14장은 1956 헝가리 혁명을 다루었습니다. 후속 판에서는 "에필로그 : 헝가리 혁명에 대한 반성"이라는 장을 생략하여1958년에 확대판을 출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은 19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중부, 동부 서부 유럽 에서 반유대주의의 다양한 전제 조건과 그에 따른 영향을 설명합니다. 그런 다음 1884년부터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되었던 1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의 신제국주의를 아루었습니다. 그런 다음 이데올로기로서의 인종주의의 출현과 제국주의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서의 현대적 적용을 추적합니다. 책에서 한나 아렌트는 1830~40년대의 19세기 전체주의가 대중을 예속시키기 위해 공포를 적용한 "전제, 폭정, 독재와 같이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형태의 정치적 억압과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분석했습니다. 더욱이 아렌트는 단순한 정치적 적대자가 아니라, 독특한 이데올로기와 강압 장치에서 할당된 역할 때문에 "전체주의는 내부로부터 인간을 지배하고 공포에 떨게 하는 수단을 발견했다"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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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또한 유태인이 홀로코스트의 작동 요인이 아니라 단지 편리한 대리인이라고 주장합니다. 독일의 전체주의는 결국 공포와 일관성에 관한 것이지 유대인만을 근절하는 것이 아닙니다. 책의 핵심 개념은 칸트의 “불필요한 사람들인 근본적인 " 적용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특히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 초점을 맞춘 유럽의 반유대주의 부상에 대한 분석으로 책을 시작합니다. 특히 한나 아렌트는 1792 프랑스 칙령으로 해방된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의 사회운동과 유럽 계급사회에 동화되지 못한 민족국가를 지지하고 유지하는 특별한 역할을 추적했습니다. 유럽 유대인과 민족 국가의 연관성은 그들의 운명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관찰한 바와 같이, 현대의 반유대주의는 전통적인 민족주의가 쇠퇴함에 따라 성장했으며, 유럽의 민족국가 체계와 불안정한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바로 순간에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나치 독일은 나중에 반유대주의를 악용하고 무엇보다도 민족 국가의 대리인으로 해석된 유대인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치즘은 무엇보다도 대중을 조직하여 국민국가 체제를 해체하고 전체주의적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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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한나 아렌트는 과학적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적 제국주의 에서의 역할 , 자체가 무제한적인 영토 경제적 확장을 특징으로 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무한한 확장은 필연적으로 자신과 대립하고 영토적으로 한정된 민족 국가에 적대적이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근대 제국주의의 뿌리를 19세기 유럽 민족국가의 과잉 자본 축적에서부터 추적합니다. 과잉자본은 생산적이 되기 위해 유럽 밖의 해외 투자를 필요로 했고 정치적 통제는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해외로 확장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게르만주의 슬라브주의같은 대륙 제국주의를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치적 당으로 대체하는 이러한 운동은 국가와 반의회에 적대적이며 점차 반유대주의와 기타 인종주의를 제도화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탈리아 파시즘이 민족주의 권위주의 운동 이라면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는 운동의 권력에 대한 모든 제약을 제거하려는 전체주의 운동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녀는 차이가 부분적으로는 최소한의 필요 인구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체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국가에서 전체주의 정권이 유리한 상황에서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순수한 숫자의 힘에 의존했습니다. 무숄리니(Mussolini) 조차 “전체주의 국가”라는 용어는 완전한 전체주의 정권을 수립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으며 독재와 일당 지배에 만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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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마지막 섹션은 나치 독일과 소련에 초점을 맞춰 전체주의 운동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할애했습니다. 여기에서 한나 아렌트는 계급의 대중화, 비전체주의 세계를 다루는 선전의 역할, 이러한 형태의 정부에 필수적인 테러의 사용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전체주의 운동은 전제 정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습니다. 전제정권은 절대적인 정치적 권력을 얻고 반대를 불법화하려는 반면, 전체주의 정권은 세계 지배의 전주곡으로 모든 사람의 삶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한나 아렌트는 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유럽 식민지와 함께 소련과 나치 정권을 제국의 부메랑 효과로 인한 끔찍한 변형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녀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를 인종주의와 전체주의 발전의 단계로 분석했습니다. 그녀의 분석은 "내부 식민지: 러시아 제국의 경험"이라는 책에서 알렉산더 에트킨트(Alexander Etkind) 의해 계속되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비전체주의 세계에서 전체주의 목표의 급진적 성격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최전선 조직, 가짜 정부 기관, 난해한 독트린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책의 부분에서 한나 아렌트는 외로움이 전체주의 지배의 전제 조건이며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운동에 끌릴 가능성이 높다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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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주의의 기원과 한나 아렌트의 분석 Analysis of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and Hannah Aren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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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새로운 형태의 정부”였으며 “전제, 폭정, 독재와 같이 우리에게 알려진 다른 형태의 정치적 억압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 했습니다. 아렌트는 또한 유태인이 홀로코스트의 작동 요인이 아니라 나치즘이 단순히 유태인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공포와 일관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편리한 대리인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렌트는 칸트의 표현인 “급격한 악”을 사용하여 폭정을 설명했는데, 그들의 희생자는 “불필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나중 판에서 그녀는 “이데올로기와 테러: 정부의 새로운 형태”와 헝가리 혁명에 대한 그녀의 작업을 포함하도록 텍스트를 확대했지만 후자는 별도로 출판되었습니다. 독일의 유태인으로 하이데거의 학생이었던 한나 아렌트는 책에서 인간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원인을 전체주의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당이 장악한 독일 3제국과 스탈린이 통치하는 소련을 전체주의의 예로 들었습니다. 근대 전체주의는 전제군주나 왕정체제(王政體制) 달리 공공영역인 정치의 장악을 넘어서 개인의 일상까지 통제했습니다. 체제에서 개인은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전체만이 중요하며 개인은 집단의 부속품입니다. 또한 전체주의는 개인주의를 폭력과 공포로 말살하고 자유와 창의성을 억압하며 개인은 오로지 합집합인 전체의 원소로 존재했습니다. 이처럼 개인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인 전체주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은 희생될 있다는 이데올로기입니다.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 진영에서 보면 한나 아렌트가 히틀러의 나치와 스탈린의 소련을 동일시했기 때문에 격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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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주목한 것은 전체주의는 특정한 지배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성립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히틀러나 스탈린은 혁명에 의해서 권력을 강탈하지 않았고 민주적인 투표에 의해서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그런 다음 법과 관료 제도를 이용하여 개인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강화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1930년대 출현한 우익과 좌익의 전체주의는 국민국가를 바탕으로 하며,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을 통하여 개인과 사회를 통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인 자유와 인간이 회복해야 본성을 말살하고 전체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제합니다. 한나 아렌트는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잉여가치가 축적되고, 잉여인간들이 생김에 따라서 공황과 같은 사회적 위기가 조성되었을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전체주의를 택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립한 전체주의는 거대한 기계와 같이 작동되며 획일성, 단일성, 효용성을 중요시합니다. 개인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개조하는 한편 집단을 우선하기 때문에 자유를 억제합니다. 체제에서는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것을 시작할 없고 창의적인 것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유태인 600 명을 학살한 나치의 전체주의가 근본적인 악인 반면 나치의 친위대 중령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관료들은 생각과 판단을 하지 않고 전체의 명령에 따른 평범한 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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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이었습니다. 살인이 자행된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은 현실에서 현존하는 제작된 지옥입니다. 황천, 연옥과 달리 인간도살장인 지옥을 설계한 것이 바로 전체주의인데, 현실의 지옥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는 폭력적 전체주의 자체입니다. 그런데 전체주의에서 개인은 집단의 명령을 이행하는 부품이기 때문에 학살에 동원되었다고 하더라도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악이라고 없습니다. 이처럼 인종차별과 제국주의가 전체주의를 성립시켰고, 히틀러의 예에서 보듯이 근대적인 미디어를 통해서 대중을 조작했습니다. 원래 전체주의는 무솔리니가 국가가 유일한 목적이자 실제라고 말에서 유래했고, 학문적으로는 1930년대 이후의 전체주의 국가를 대상으로 쓰였습니다. 책은 당시 최고조에 이른 냉전 분위기에 편승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동구권이 몰락한 90년대 중반 재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책은 냉전적 분위기 속에서 나치즘과 스탈리니즘을 전체주의라는 동일한 개념하에 다루기는 했으나 실제로 읽어보면 같은 체제하에서의 인간 조건을 통찰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었던 것이지 비판론자들의 주장대로 냉전 분위기에 편승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잊혀진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재발견한 한나 아렌트의 시도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녀 자신의 모습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보다는 실현될 있는 이념을 추구한 점에서 룩셈부르크와 아렌트는 닮은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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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와 야스퍼스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관계 Relationship of Hannah Arendt with Karl Jaspers and Martin Heideg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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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학문적 업적과는 별도로, 아렌트는 야스퍼스와 마르틴 하이데거라고 하는 탁월한 철학자들과의 관계로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1992년에 출간된 ‘한나 아렌트와 야스퍼스의 편지’라는 책은 불윤의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람의 관계가 부녀관계에 가까웠다는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은 1926년부터 1969년까지 43년간이나 편지 교환을 했는데 스승과 제자간의 편지는 2차대전이라는 전쟁통에 잠시 끊긴 것을 제외하고는 1945 이후 더욱 잦은 교신을 갖았습니다. 1 가량 편지가 도착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배달 지연’이며 5 정도 편지가 오지 않은 것은 ‘배달 사고’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아렌트의 아버지는 그녀가 6 되었을 매독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야스퍼스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평생토록 아렌트는 야스퍼스를 ‘존경하는 분’이라는 경칭을 썼지 번도 야스퍼스의 이름을 ‘칼(Karl)’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아렌트와 야스퍼스의 관계가 아름다운 것인 반면,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관계는 기이하다 못해 씁쓸한 느낌마저 갖게 만드는 불륜 그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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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사람이 만났을 아렌트는 18 소녀였고 하이데거는 35 철학 교수였습니다. 그들의 애정 관계는 4 만에 끝이 났지만, 전후(戰後) 하이데거가 () 나치 경력으로 수난을 당하게 되자 아렌트는 앞장서서 하이데거의 결백을 주장하고 나섰으며 그의 저작 홍보까지 떠맡았습니다. 1995 엘츠비에타 에팅거가 ‘한나 아렌트, 마르틴 하이데거’는 사람의 기이한 관계를 탐구한 책으로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위선적 태도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 동안 불같은 관계를 나누어 왔던 그녀에게 지적 미성숙을 이유로 마르부르그를 떠나도록 종용했을 , 그녀는 자신이 그곳을 떠나게 것은 단지 하이데거가 처하게 될지 모르는 위험을 줄이는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이데거는 용케 아렌트의 주소를 알아내어 그녀와 밀회를 즐겼으며, 그녀는 그의 요구대로 노리개가 되었습니다. 1928 훗설이 하이데거에게 정교수직을 물려준 해를 전후해서 그들의 관계는 마감됐습니다. 하이데거에게 새로운 여인이 생긴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애인에게 3 아렌트에게 써보낸 싯구들을 반복하면서 새로운 만남을 즐겼습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가 훗설을 대학에서 내쫓는 서류에 서명함으로써 그의 죽음을 재촉한 ‘잠재적 살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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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하이데거를, 야스퍼스가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한 하이데거를, 한나 아렌트는 어떻게 이해하고 그가 연구활동을 계속할 있도록 도와주었을까요.그것은 아렌트의 식지 않은 하이데거에 대한 열정과 의도적인 하이데거의 유인, 껄덕거림에 있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전쟁 5 동안 친나치 전력으로 학문 활동을 금지당했습니다. 그의 나치 활동에 대한 비판이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에 1950년이 되어서도 그의 입지는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그의 상황에서 아렌트 같은 유태인 학자와의 관계는 매우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나치 협조는 그들의 요구와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강변했습니다. 그의 변명은 매우 구차하고 위선적인 것이었지만 아렌트는 그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리면서 그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하이데거보다 나치 활동에 더욱 열성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고하고 자기 확신에 독일 최고의 철학자를 지배할 있었을까요. 그녀에게 하이데거는 ‘신과 같이’ 사고의 세계에 군림하는 무관의 제왕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첫사랑의 어찌할 없는 각인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이해와 관대함이 뒤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과 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그에게 자신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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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철학자이기에 가질 있는 고집과 이기심, 그리고 그녀에게 일방적인 순종과 공경을 요구하는 그에게 아렌트는 ‘노예의 미덕’으로 따랐습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의 기이한 애정관계가 화제가 되던 바로 그때에 아렌트는 아쉽게도 죽어서야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1995 12 4일은 독일 출신의 유태인인 한나 아렌트가 뉴욕에서 숨진 20 되는 날이었습니다. 날을 기념해 아렌트와 스승 하이데거의 비밀스런 사랑을 다룬 전기가 독일과 미국에서 동시 출판, 논란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국제심포지엄 기념상 제정 ‘아렌트의 날’ 행사 등으로 구미 사상계 전체가 ‘아렌트 열기’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한나 아렌트를 재발견하고자 했던 시도는 그의 사상이 마르크시즘이 한물간 시점에서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할 있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진실의 징표 아렌트’라는 제목으로 열린 기념학술대회에서 쾰른대 철학교수 에른스트 폴라트는 ‘지난 60년대 아렌트는 한때 냉전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했으나 이제는 오히려 좌파에 의해 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면서 ‘당분간 마르크스는 죽은 것으로 보이나 아렌트는 살아 있다’는 말로 그의 위력을 요약했습니다. 인간행동을 결정론의 관점이 아니라 그리스 전통으로부터 유장하게 흘러나오는 자발성과 ‘자유의 신장’이라는 각도에서 설명하려는 그의 정치철학이 동구권 변혁 이후 서구에서 각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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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을 통해 살인마 전두환과 잔당들이 5.18 북괴의 소행이고 공산혁명의 전주곡이라며 1930년대의 전체주의의 수작을 답습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에게 알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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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있는 100 45번째 인문학 부문 15번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51년에 출간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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