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개화기 선각자 尹致昊의 영문일기〈2〉중인들이 쓰는 갓 쓰고 차관 임명장 받은 윤치호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6. 2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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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11 2015 MAGAZINE 글 : 윤경남  譯述

개화기 선각자 尹致昊의 영문일기〈2〉

중인들이 쓰는 갓 쓰고 차관 임명장 받은 윤치호

尹慶男
⊙ 이화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캐나다 토론토 거주.
⊙ 저서: 《부부의 십계명》 《노년학을 배웁시다》 《유니스의 지구촌 여행》
    《성지의 향기(The Fragrance of the Holy Land)》 《고독》 《꿈꾸는 어른》(역서)
    《눈물의 아들 어거스틴》(역서)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역술서)
    《윤치호 일기 제4권에 나타난 역사의 흐름》(역술서).
⊙ 現 국제펜클럽본부 회원, 한국번역가협회 회원, 좌옹 윤치호 문화사업회 이사.

 

1896년 12월 윤치호의 영문 일기 일부.

 1부 (1895~1896년) 〈민영환과 윤치호, 러시아에 가다〉
 

 1895년 3월에 일어난 일들
 
  ● 윤치호는 부모님이 하느님의 역사와 기적을 인정하게 된 데 감사한다. 비참한 조선을 문명국으로
      개화시키기 위해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신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 교육을 통하여 민중을 깨우치는 일과 정치에 참여하여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참신한 개화정책을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 호러스 알렌박사(미국공사관 보좌관이며 민영익이 갑신정변 날 밤에 다쳤을 때 치료해주어 고종의 어의가 된 분)가 아직은 가족을 데리러 상해에 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새로 임명된
      참의(參議) 직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리라는 것이다.
  ● 탁지부 대신 어윤중에게 지금같이 불리한 조건으로는 일본의 차관을 받지 말라고 건의하는 의견서를
      보내다.
 
 
  3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어윤중(魚允中, 1848~1896): 1881년 일본 시찰단원. 유길준과 윤치호를 수원으로 데리고 간 인물.
      김홍집과 더불어 친일 진영에 속함. 탁지부 대신으로 연립내각의 친일 진영에 섬. 1895년 여름에
      면직되었다가 민비시해 사건 직후 복직함. 1896년 아관파천 후에 고향에서 피살됨.
  ● 우범선(禹範善. 1857~1903): 무관. 민비시해 가담자, 일본에 도피 중 피살됨. 우장춘(禹長春) 박사의
      아버지.
  ● 윤치소(尹致昭, 1875~1944): 삼촌 윤영렬(尹英烈)의 둘째 아들. 제4공화국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의
      아버지.

 3월 1일 금요일.
  서울.

1902년 원산감리로 있을 무렵 찍은 윤치호 가족사진. 중국인 아내 마애방과 자녀들. 왼쪽으로부터 아들 광선, 영선, 딸 봉희.

아름다운 날씨지만, 거리엔 물과 눈이 질퍽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다. 상감께서 베푸는 사은식(진급 신고식-옮긴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대궐에 들어가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한 건물 안에 들어가 기다리며 시편 23편을 읽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 정말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님도 하늘에 계신 주님께 우리 식구가 평화롭게 모여 살기를 간구하는 기도를 해 오셨다. 이제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더욱이 아버님과 나는 승진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이 말할 수 없이 크구나”라며 감격하신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와 자매를 그리워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내 어여쁜 보뱃덩이가 내 옆에 없다면 얼마나 불행하겠나. 하지만 언제, 어떻게 아내를 이곳에 데려올 수 있단 말인가. 조선에서의 생활은, 이곳에 나와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고장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같이 마음을 짜증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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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尹致昊日記 四 1895년 고종32년
  乙未 개국504년 MARCH, 1895. 1st. (5th of 2nd Moon). Friday.

 
  Rather pleasant—Streets water and mud and snow. Up at 6 a.m. Went into the Palace to perform the ceremony of thanking T. Majesties for the promotion(謝恩). While waiting in one of the buildings now not used, read the 23rd psalm and could not but thank the Almighty God, for He indeed has spread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My mother prayed to the Lord of Heavens that we all might together in peace. Now God has granted unto us this request. Besides my father and I have been promoted. No wonder that my father says “The miracles of God are unspeakably great.”
 
  I have no word to express my longing for my precious Darling and my sweet Sister. I shall not be happy without my precious Jewel by my side. But when and how shall I be able to make a decent home for her? Life in Corea to anyone who has been abroad is, unmodified friction and vexation of spirit.
 

 [편집자주]
  ※ 윤치호 영문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에 접속하면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월간조선》은 지면관계상 일부만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3월 2일. 토요일.
 

구름 낀 날씨. 서울.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다. 귀여운 자매에게서도 왔다. 2월 20일에 부친 편지다. 나 자신이 조선이라는 틀 속에서 개혁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상투를 올리는 문제만 해도 내가 작년 3월에 청국에서 겪었던 것처럼 짜증이 난다. 신발은 왜 그리 뻣뻣하고 꼴불견인지! 한복은 전혀 활동하도록 만든 옷이 아니다. 버선은 흰색이고, 갓은 아주 뭣같이 묘하게 생겼다. 한복에 얼룩이 지지 않게 하고, 버선을 잘 신으려면 하루 종일 온 정신을 옷과 버선에만 신경 쓰며 지내야 한다.
 
 
  3월 7일. 목요일.
  구름 낀 날씨. 밤에는 폭우가 쏟아지다. 서울.
 
  오늘 아침, 동학군을 진압하러 나갔던 일본 관리들이 전투 결과 보고서를 조정에 제출하다. 군부대신 조씨는 그 보고서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호레이스 알렌 박사가 내게 “아직은 상해에 가지 말라”고 충고해 주다. 지금 조정 관리의 법규가 바뀔 때 서울을 떠나면, 조정 안에서의 나의 입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상해로 갈 계획을 다른 날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상해에 있는 나의 보배, 내 아내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구나.
 
  사람들은 주인이 여러 해 동안 모질게 부려 온 하인들을 노비해방시키는 법률에 찬성하고 있다. 어느덧 조선의 계사년(癸巳年)도 저물고 갑오년(甲午年)을 점치는 화투놀이를 한다. 화투놀이꾼들은 대대층층기치갑오(臺臺層層旗幟甲午)라고 서로 불러 준다. 해석하면, 갑오년에 전쟁과 방불한 전투를 연속해서 목격하게 된다는 점괘가 나온 것을 말한다. 나는 길거리에서 술주정뱅이들을 많이 본다. 서울에서 3주 동안 본 주정뱅이가 상해에서 5년 동안 만난 주정뱅이 수보다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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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th. (11th). Thursday.
  Cloudy most of the day. Heavy rain in the night.

 
  This morning the Japanese officers who had been sent to disperse Tong Haks reported the result of their campaign to the Cabinent. Mr. Cho, the Minister of War, did not seem to take much interest in the report.
 
  Dr. Allen advises me not to go to Shanghai just yet. Besides, to leave Seoul at this time when the official regulations are being revised may affect my standing in the government. All things considered I have decided to postpone my trip to some other time. In the mean time, my heart literally aches with intense yearning for my dearest Treasure in Shanghai. People appreciate the abolition of the numerous retainers whom big men used to keep to the disgust of tradesmen.
 
  At the end of the Corean year 癸巳 the game played with cards was called Kap-o(甲午). The players used to say “臺臺層層旗幟甲午” and this was intepreted as a prophecy that the year 甲午 would witness series of war-like operations. I have seen more drunken fellows on the streets in 3 weeks in Seoul than in 5 years in Shanghai.
 
 
  3월 9일. 토요일.
 

따뜻하고 아름다운 날씨. 서울.

1895년 일본군에 체포된 동학농민군의 전봉준이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다.

길을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로 질척거린다. 어제 이모부 이건혁씨가 청국산 조랑말을 끌고 오셨다. 말에 얹을 안장을 사러 일본 정착촌에 가다. 신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아버님에게 버선을 더럽혔다고 따끔하게 꾸중만 듣다. 오후에 총리 비서실에서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다. 5명의 젊은 여인들이 나와서 노래하고 기악을 연주하기도 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일들엔 도저히 흥미가 일지 않는다.
 
  1. 조선 여성의 한복은 일본 옷같이 우아한 데가 없다. 그러나 청국 옷에서 보여주는 유치하게 화려한 것과는 다르게 의젓해 보이긴 한다.
 
  2. 아마도 조선 사람은 이 세상에서 제일 담배를 많이 피우는 백성임에 틀림이 없다. 여인들이 유행과 관계없이 시도 때도 없이 피워 댄다. 잎담배, 줄담배, 곰방대, 큰 파이프 담배 등을 천연스럽게 잘도 피워 댄다.
 
  3.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시고, 먹기도 하다가, 손님들 앞에서 요강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민족은 세상에 아무 데도 없을 것이다.
 
  4. 노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방 안엔 담배연기가 끊임없이 자욱하다.
 
  5. 조선 사람들은 술을 지저분하게 마신다. 아무리 큰 통이라도 술통이 바닥날 때까지 일어서지 않는다. 먹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6. 조선 음악은 청국이나 일본보다 데테르(Detter)에 가까운 소리를 내어 곤혹스럽게 만든다. 소녀가 조선춤을 추면서 아름다운 발을 자랑스럽게 살짝 내미는 모습이 귀엽다.
 
 
  3월 10일. 일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진흙, 진흙, 진흙투성이다. 오전 10시에 스크랜튼 박사와 함께 상동교회에 갔다. 내가 회중 설교를 하다. 스크랜튼 박사는 6명의 어른과 한 여성에게 세례를 주었다. 스크랜튼 박사 댁에서 점심을 들었다. 스크랜튼 박사의 어머니와 부인은 어디를 가나 똑같이 훌륭한 선교부를 만든다. 스크랜튼 박사에겐 아주 예쁜 딸들이 있다. 조선 사람들이 “노마님”이라고 부르는 스크랜튼 박사의 어머니는 여학교(이화학당-옮긴이)도 세웠다. 박영효는 이들의 교육제도를 신뢰하여 그의 어린 딸을 스크랜튼 학교에 보낸다. 박영효는 참 지각 있는 일을 한 셈이다.
 
 
  3월 11일. 월요일.
  구름이 덮인 날. 이른 아침에 눈이 오고, 밤은 아름다웠다. 서울.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일본 망명중, 윤웅렬(오른쪽에 앉은 이)이 장남 윤치호와 함께했다.

조선달력으로 오늘이 어여쁘고 사랑스런 우리 보배와 지난해에 결혼한 날이다. 아내가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오직 아내의 사진을 내 가슴에 꼭 대고 잠드는 수밖에 없었다. 아내도 나를 생각해 줄까? 하느님께서 아내와 늘 함께하시고 우리가 곧 만날 수 있게 은총을 내리소서.
 
  정부 고문관 이시즈카(石塚)와 오랫동안 이야기 나누다. 그는 잘생긴 젊은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조선 관리들이 교활한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부리는 것을 불평하다. 이달에 들어와 처음으로 시원하게 목욕하다. 오늘 오후에 어여쁜 내 사랑하는 아내에게, 리처드슨 선생에게, 도쿄에 있는 사촌동생 치오에게, 그리고 상해의 MN에게 편지를 쓰다. 아내에게는 어머님의 사진 한 장을 보내다.
 
  다음 이야기는 청국인들이 아산(牙山)에서 동학당에게 행패를 부린 이야기이다. 삼촌 윤영렬과 윤치소 부자(父子)에 관련된 이야기:
 
  예(葉)장군과 세(攝)장군 휘하의 청국 군인들이 동학당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포악한 행위를 저질렀다. 게다가 약탈과 겁탈을 일삼는 행패마저 저지르고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시치미 떼고 있었다. 그 청국군 중의 한 명이 참외밭에 들어가 잘 익은 참외만 따는 게 아니라 익었건 안 익었건 몽땅 서리해 갔다. 단지 장난인 것처럼 하면서 들어가 온 벌판의 포도넝쿨과 뿌리까지 뽑아 버린 최악의 해를 끼친 사건이 벌어졌다.
 
  청국 장군들은 가난한 조선 사람들이 청군이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 왜놈들을 몰아냈는지 그 모험담을 들을 기회를 아깝게도 놓쳤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이 가까이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청국 장수들이 조선의 한 관리에게 목숨을 구해 주는 대가로 황소 100필을 요구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기르던 가축들이 모두 도망쳐 버려 조선 관아에서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관리들이 내 작은아버지께 간청해서 가축들을 받아내려고 내 사촌, 윤치소를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고맙게도 삼촌이 50마리의 암소와 황소를 주기로 보증을 해 주고 나서야 청군들은 성환(成歡)으로 떠났다. 만일에 청군들이 대가를 다 받지 못하면 삼촌이 대신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성환에서 소떼를 몰기도 전에 일본 군인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문을 듣자마자 그들은 겁에 질려서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어, 청주(淸州)로 소떼를 몰고 갔다. 그곳에서 충주(忠州)로 들어섰는데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일본군이 그리로 쳐들어온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소떼 임자들은 소를 하나둘씩 청국인 손에 넘기고 도망쳐 버렸다. 내 삼촌은 하는 수 없이 50마리 소 값을 갚아 주어야만 했다. 조선 조정이 지난 여름에 노비제도를 폐지한다고 공포했을 때 종을 데리고 있던 많은 주인들이 방면된 종들에게 참혹하게 모욕을 받았다! 또 어떤 경우엔 자유를 얻은 종들이 전 주인을 모욕하고 두들겨 패거나, 자기 마누라와 딸을 가마에 태우고 옛 주인이 강제로 메고 가게 했다!
 
 
  3월 12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오늘 조정에서 회의하다. 일본 정부가 조선에 지폐로 300만 엔을 차관할 것이라고 선포해서, 일본 공사와 꽤 까다로운 토론을 벌이다. 어윤중 대신이 강력하게 반대하다. 일본이 진심으로 조선을 도울 생각이라면, 그렇게 형편없는 제안을 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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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th. (16th). Tuesday.
  A pretty day.

 
  Today, in the Cabinet meeting, the Japanese Minister produced a livey discussion by informing the Corean Ministers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would let Corea have Yen 3,000,000 in paper money. Mr. 魚 opposed to the proposition very strongly. If Japan really wants to help Corea, she ought not to insist on such miserable propositions.
 
 
  3월 14일. 목요일.
  눈 오고, 바람 불고 춥다. 무릎까지 묻히는 진흙창. 서울.
 
  지독하게 불쾌한 오늘의 날씨는 우리 조선의 참혹한 현실과 딱 들어맞는다. 아침 일찍 어윤중 대신에게 편지를 쓰다. 일본 정부의 차관 조건에 대한 의견서다.
 
  1. 차관금은 은화로 받을 것. 은화를 지폐로 환산하면 100만 엔만큼 가치가 더 있으므로 400만 엔을 받는 셈이다. 따라서 조선이 지폐로 300만 엔을 받는다면 100만 엔을 적게 받는 셈이 된다.
 
  2. 일본은 그들의 안정된 금융시장에서 은화가 빠져나가면 신용에 타격을 받을 것이라 핑계를 댄다. 만일 자신들의 금융제도에 영향을 받을 거라면 조선 사람들에게 비관적이며 도움이 되지 않을 300만 엔을 아무런 상환 보증도 없이 꿔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3. 조선은 지폐로 300만 엔을 꾸기보다는 차라리 은화로 200만 엔만 받아 오든지 아니면 150만 엔 은화와 태환권(국제 금융시장에서 바꿀 수 있는 正貨-옮긴이)으로 50만 엔을 받는 것이 더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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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th. (18th). Thursday.
  Snow, wind, cold, mud an ankle deep.

 
  The wretchedness of weather agrees well with the wretchedness of the condition of Corea. Early in the a.m. wrote to Mr. Wo Yun Chung, giving him my arguments against accepting the loan in money.
 
  1. Should Corea get 3 million in silver, she could issue convertible notes to the amount of, say, one million thus practically increasing the loan to 4 million. It follows therefore that a paper loan would cost Corea the loss of one million at least.
 
  2. Japan pleas that the withdrawal of silver might produce disturbance in the Japanese market by endangering the stability of her credit system. If such an effect is to be feared in Japan where everything is highly organized, what disaster may we not fear when 3 million of pieces of paper, without a sufficient guarantee for their redemption, be let loose on the hopeless and helpless Coreans?
 
  3. Rather than borrowing 3 million of paper, Corea may better reduce the loan to, say, 2 million or 1 1/2 million and issue one million or 1/2 million convertible notes.
 
 
  3월 19일. 화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조선 사람들은 거의 모두 벼슬을 좋아한다. 벼슬하기를 바라는 이유는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황당하고 이기적이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내게 말하는데, “난 지금 30세가 다 되도록 돈도 없고, 벼슬도 없고, 아들조차 없습니다. 난 만날 무시당하고 어리숙하기만 한데, 나를 제발 주사(主事)가 되게 해 주십시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는 관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100살이 되셨기 때문이란다. 10개 부처에 사람들이 몰려 있어도 할 일이 없다. 농부(農部)만 해도 3명이면 족한데 지금 30명 넘게 있다. 학부(學部)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 한 일본인 방문객이 내게 말하기를, 자기는 그 웅대한 대궐을 구경하러 온 그 많은 사람이 그렇게 가난에 찌들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고 한다. 별로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인과응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여쁜 나의 보배, 내 아내에게 편지 쓰다. 존경하는 리처드슨 선생에게도. 자애 깊으신 내 어머님이 독감에 걸리셔서 몹시 앓고 계시다.
 
 
  3월 20일. 수요일.
  아름다운 날씨. 서울.

개화기 선각자로 《서유견문》을 집필한 유길준.

오후 5시, 배재학당에서 미국의 교육제도와 조선 교육제도의 결점에 대해 강연하다. 내 연설이 끝나자, 우범선이 내게 그런 연설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내가 개인의 안전을 촉진하기 위한 외국인의 보호에 대해 말한다거나, 교육과 정보는 입법이 개혁의 뿌리이듯 결국 가지와 잎사귀의 관계라고 연설하는 일들은 시간낭비라는 것이다. 그 충고는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준다. 내가 좋은 개선책을 원하는 순수한 열망으로 말한 것인데, 이기적인 동기를 제언한 것처럼 책망하다니. 우범선은 분명히 교육보다는 법률제정 쪽이 맞는 것 같다. 김노완(金魯莞)이 내게 정보를 주다.
 
  1. 무예청이 지금 임금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단다.
 
  2. 유길준은 교활하고 위험한 인물이다. 그는 나를 장사치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3. 상감께서는 일본 공사를 내치시고, 영국, 러시아, 미국 대사 등을 끌어들이려고 하신다는 것. 그러나 미국 대표가 그에게 말하기를 공화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휩쓸리거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며, 조선의 문제에도 간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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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th. (24th). Wednesday.
  A lovely day.

을미사변 때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휘하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궁궐에 침입,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인 여성 사카이와 결혼해 살다가 1903년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고영근에 의해 살해됐다. 장남이 농학자 우장춘이다.

 At 5 p.m. addressed the boys of the Pai Chai School on the educational system of America and the defects in the Corean method of education. Wu Pom Sunn afterward told me that I ought not to waste my time in making speeches and that I made speeches under the foreigner's protection to promote personal safety; and that education and information are after all leaves and branches while legislation is the root of reformation. I felt very much hurt to be taxed for consulting selfish motives in making speeches when I do so from the purest desire of doing good. He is certainly off in saying that education is of secondary importance to legistlation.
 
  Kim No Wan 金魯莞 informed me that:
 
  1. The bodyguard(武藝廳) are now special courtiers acting as spies to T.M.
 
  2. Y.K.C. is cunning and dangerous(奇險). He has been making a merchandize of me.
 
  3. His Majesty has tried to induce the English, the Russian and the American Ministers in turn to deliver him from the Japanese. But the U.S. representative told him that the Republic could not involve itself in war with Japan or anybody else for matters Corean.
 
 
  3월 31일.
  바람이 불지만 햇빛이 좋은 날씨. 서울.
 
  1. 지난 1주일 동안 감기를 앓으며 누워 지내다.
 
  2. 24일에 영 알렌 박사와 캔들러 박사와 맥도날 형제로부터 편지를 받다. 나의 어여쁜 아내는 소식도 없다.
 
  3. 차관 계획이 300만 엔으로 비굴하게 책정되다. 반은 은화로, 반은 지폐로 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의 왜놈들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이곳에 주재하는 일본 대표들은 조선이 얼마나 희망도 없고 도움도 제대로 받을 줄 모르는 나라인가를 실감하기에, 흔들어 털어내기 작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미국한테 그런 치사스런 차관을 한다고 말할 면목이 없을 것이다.
 
  4. 며칠 전 탁지부 대신에게 편지를 보내다. 상인들과 기능공들에게 휘둘리지 않아야 할 중대한 이유를 조언하고, 쓸데없이 비싼 임금만 축내는 관리들의 수효를 줄이도록 건의하다.
 
  5. 어제 작은아버님(윤영렬)이 강계부사로 요직에 발령 나시다.
 
  6. 27일에 캔들러 박사에게 편지 쓰다.
 
 
  (4, 5, 6월 일기 없음)
 



 

 1895년 7월에 일어난 일들
 
  ● 연립내각의 신당파 수장인 박영효가 역모혐의를 받고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도주하다.
  ● 윤치호는 외부협판(차관)으로 승진했으나 학부에 남아 신학제(新學制)와 교과서의 틀을 만들어 놓으려고
      했다. 당시 나이 30세.
  ● 윤치호가 격식에 개의치 않고 작은 갓양태(갓모자의 밑 둘레 밖으로 둥글넓적하게 된 부분-옮긴이)의
      갓을 쓰고 임명장 받으러 온 것을 보고 대신들이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비난하다. 그 당시 고관일수록
      갓양태가 넓었다.
 
 
  7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신당파 수장. 일본으로 도주. 철종의 사위.
  ● 유길준(兪吉濬, 1856~1914): 구당파의 실권자. 어윤중의 문하생.
  ●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 일본 공사. 원로 정치인으로 조선책략의 수장.
  ● 이하영(李夏榮, 1858~1929): 알렌박사의 보좌관. 자수성가한 인물.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었음.

 
  1895년 7월 7일. 일요일.
  서울.
 
  아침 5시. 박영효씨와 이규완(李圭完), 신응희(申應熙) 체포령이 내렸는데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깨어 일어나다. 안경수(安駉壽)가 경무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길준이 내게 어젯밤에 심각하게 문제가 된 궁내 포고문을 보내 소식을 확인해 주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박영효가 다시 충성함으로써 자신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를 바라며 사면해 주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배은망덕하게도 음모에 가담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판부에 그를 계속 추적할 것을 명하노라. 그리고 그의 안전을 보장하며 동행자들도 함께 사면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閏 5월 14일).”
 
  우리는 안전하단 말인가? 박영효, 조선의 전권을 쥐고 있던 그가 어젯밤에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야반도주했다. 그의 앞에서 굽신거리던 사람들의 자비를 바라고. 나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지난달에 상해에서 귀국한) 내 아내 윤 부인과 아기를 커틀러 박사에게 보내서 며칠 지내게 하다. 저녁에 허치슨 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지만, 조선에 대한 정치적인 견해는 강직한 프러시안답다. 그는 내게 다른 나라는 말고 러시아를 신뢰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난파선’이 된 박영효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랬다. 박영효가 스기무라 일본 공사에게 왕비를 제거하기 위해 50명의 일본 군사를 지원해 달라고 했다는 것. 러시아 공사 지휘하에 있는 그 일본인은 감히 그 요청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것. 그러고는 그 일본인이 그 소식을 상감에게 알린 것이다. 러시아가 도와줌으로써 사전에 발각이 된 것이다. 전하는 어젯밤에 바로 포고령을 내리셨다.
 
 
  7월 8일. 월요일.
  서울.
 
  오늘 아침 알렌 박사를 방문하다. 그는 박영효의 모의(謀議)에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음을 말하다. 그러나 알렌은, 그의 죄목을 믿기엔 얼마나 사실과 거리가 먼지 박영효는 몰랐을 거라는 의견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이 박영효를 전적으로 내치려는 것 같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도 그를 좋아하지 않음으로 박영효에게서 더 이상 다른 동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문과 생각들의 난무 속에서 전체적인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박영효의 몰락에 왕비가 재치 있게 손을 쓴 일이다. 왕비는 박영효를 대원군과 한통속으로 몰아넣었다. 왕비는 또 그를 김홍집(金弘集)과 그 일당에게 보내서 이용한 것이다. 결국 김홍집이 박영효와 한통속이 되게 만들었다. 파멸에 이르게 될 다음 타자는 누구일까? 조선 사람들은 누구나 반상(班常)과 나이를 막론하고 박영효의 몰락을 즐겁게 관망하려는 듯이 보인다. 피로 물든 윤오월 14일 밤은 불행한 사건의 조짐이 되기에 충분하다.
 
 
  7월 12일. 금요일.
  서울.
 
  오늘 오후, 나는 외부협판으로 전직 발령이 나다. 내 마음 같아서는 학부에 계속 남아 있기를 바랐는데도 말이다.
 
 
  7월 16일. 화요일.
  서울.

급진 개화파로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박영효.

오후 2시에 임명장을 받으러 입궐하다.
 
  1. 사람들은 이노우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가 앞서 펴낸 정책을 보면, 아직까지 그가 뭔가를 완수해 놓은 건 아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배타적인 정책을 따르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하와 왕당파를 몰아냄으로써 러시아에 가까워지게 만들 것이다.
 
  2. 일본과 러시아가 진정으로 조선에 좋은 역할을 하는 국가라면, 그들은 그들의 특권을 활용하여 임금을 지켜 드리고, 또 한편으로는 각료들이 그들의 노선을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3. 외국 대표들 간에 친선을 도모하는 연합정신이 절대로 필요한 때이다. 대궐과 외국공관 사이에서 악마 같은 술책을 부리며 비열한 상거래를 하는 화적떼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도 시급한 일이다.
 
  4. 러시아 공사가 말하기를 왕비가 졸라대고, 김홍집이 졸라대고, 대원군도 지원해 달라고 졸라댄다는 것.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옛날에 결심한 대로 침묵, 신중함, 확고한 태도를 지킬 일밖에 없을 것 같다.
 
  5. 나의 갓양태가 6.3센티미터 폭이다. 일반적으로 쓰는 갓양태의 절반이다. 군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이 내게 “그런 갓을 쓰고 다니는 것은 협판 격에 맞지 않는다”고 나무란다.
 
  6. 당신의 속 좁은 마음자리 치수나 따져서 말하시오.
 
  7. 박영효의 속 좁은 처신에 대하여 수군거리다 등등. 이제 박영효는 가 버렸다. 조선 정부 안에서 인생의 태양같이 빛나던 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8. 사사키라는 일본 사람이 조선 사람과 대화한 이야기를 쓴 것을 보았다. 그 조선 사람 말이 박영효는 음모에 말려들었다는 것. 조선 사람이 이 멋진 연극 내용을 상감께 알린 것. 그래서 박영효에게 벼락이 떨어진 것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도 안전하다고 할 수가 없겠구나.
 
 
  7월 19일. 금요일.
  좋은 날씨. 서울.
 
  오전 일찍 제물포를 공식 방문하게 되다. 이탈리아 왕의 조카인 아메데 공작을 맞으러 나가는, 전혀 달갑지 않은 출장길이다. 덥고, 먼지투성이에 느리기 짝이 없는 행보.
 
 
  7월 22일. 월요일.
 
  오후 2시, 이탈리아 왕자와 그의 일행을 모시고, 이런 행사 때 전세 내는 기선을 타고 돌아오다. 강물 따라 기선 여행을 하니 기분이 참 좋다. 오후 8시에 용산에 내렸다. 가마와 조랑말들과 노비들, 지게꾼들, 경찰과 군인들이 정신없이 법석대다. 이른바 안내를 맡은 사람은 안내만 하면 된다. 나는 군중들 틈에서 수하물을 잃어버리는 등 혼란스런 시간을 보냈다. 우리가 남대문에 들어서자 손님들이 체류할 장소 준비가 안 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영국 공사관으로 손님들을 안내하게 되었다.
 
  나는 너무 창피하고 화가 나서 아메데 공작과 일행을 쳐다볼 낯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나는 그 일행들을 공사관 안으로 떼밀어 넣다시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공사관 안에 들어서자 실망하고 지쳐 버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김윤식(金允植) 대신을 만나러 들어갔다.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설명했다. 그는 나를 데리고 궁궐로 가서 손님들이 내일 묵으실 수 있는 숙박시설이 있는지 보러 갔다.
 
 
  7월 23일. 화요일.
 
  새벽 5시였다. 전하께서 나를 알현하게 해 주셨다. 대궐 식구들이 내게 성의껏 대해 준다. 나는 그들을 만나 본 게 10년 아니 11년 전이었는데, 다시 한번 정답게 궐내 식구들을 뵙게 된 것이 행복하다. 전하께서는 황감하게도 내빈들이 묵을 장소를 위해 내게 온갖 편의를 다 베푸셨다. 오전 10시. 이상하게 생긴 종친부 건물 안에 내빈들을 영접하다. 오후 2시에 이탈리아 공작과 공식 알현. 오후 4시부터 5시30분까지 시내를 관광한 다음, 7시30분에 궁궐에서 만찬을 들다. 만찬장에서 소녀들의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 하루 종일 모든 관계자들과 함께 지냈다. 알렌 박사의 친구, 이하영이 내게 친절하게 잘해 주다.
 
 
  7월 24일. 수요일.
 
  7시30분에 일어나다. 9시에 이탈리아 손님을 한강변으로 모시고 가서 제물포로 가는 배를 타다. 제물포에 오후 4시에 도착하다. 공작과 함께 일행이 크리스토퍼 콜롬보라는 이탈리아 군인에게 인계하다. 거기서 그를 전송하다.
 



 

 1895년 8월에 일어난 일들
 
  ● 박영효가 일본으로 도피하고, 신당파 각료는 퇴출당하다.
  ● 어윤중이 임금의 신임을 잃고 해임되다.
  ● 일본군 3500명 주둔비용으로 일본 차관금이 소진되다.
  ●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으나 치료 시설이 전무하다.
  ● 윤치호가 미국 남감리교 헨드릭 감독을 초청하다.
  ● 학부참의(學部參議, 학무국장과 교육감을 겸한 직책) 윤치호가 배재학당에서 강연할 때
      이승만(李承晩)은 학생이었다.
 
 
  8월에 등장하는 주요인물
 
  ●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공사, 원로 정치인으로 조선책략가.
  ● 이완용(李完用, 1858~1926): 학부대신.
  ● 김윤식(金允植, 1835~1922): 외부대신.
  ●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 1835~1926): 영국인 탁지부 고문.
  ●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 제2왕자. 패기만만한 18세 청년.

 
  8월 5일. 월요일.
  더운 날씨에 햇빛 나다. 서울.
 
  일주일 내내, 밤낮으로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그치고 다시 해가 비쳐 기분이 좋다. 이런 일, 저런 일들:
 
  1. 이노우에 공사가 그의 조선 정책에 아주 색다른 계획을 내놓았다. ‘내정 불간섭’이 그의 슬로건이다. 어느 날 이노우에가 내게 말하기를, 임금을 감싸고 있는 의심의 구름을 헤쳐 버리는 가장 최선의 방책을 실천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에 도착하여 임금님과 두 번 회담을 가졌다. 회담 중에 그는 말하기를, 조정에서 신하들을 믿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가 좋은 결과도 없이 언제까지 그의 계획을 끌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는 조선 왕비, 민 중전이 애국심을 가지고, 덜 이기적이고 좀 더 자비롭기를 바라지만, 왕비를 설득하는 일에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왕비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남산을 옮기는 일보다 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이노우에가 세운 기본적인 목표는 일본이 왕비의 거대한 세력을 꺾어 버릴 만큼 강해질 때까지 조선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놓고 당분간은 러시아와의 갈등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보는 것 같다.
 
  2. 탁지부는 언제나 “먹을 게 없다” “반쯤은 남아 있다” 사이를 오락가락하더니 이제는 급하게 절망적으로 재정이 바닥이 나고 있다. 일본에서 300만 엔을 차관했을 때 50만 엔의 자금을 따로 비축해 놓았다. 그런데 현재 겨우 6만 엔만 남아 있다. 그 비축금은 3500명의 공병을 유지하는 데 다 써 버렸다. 군부가 소비하는 푼돈들이 내 마음속에 온통 허망하게 쓸려 나가는 낙엽 같다. 왜 그럴까? 군인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하는 일 없이 남의 집 식객 노릇이나 하며 소일하는 도적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 무리에 끼여 완전무결하게 쓸데없는 시간만 허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리석게 써 버릴 돈이면, 국민학교를 전국에 세우고 보급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6세에서 15세 사이의 어린이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 우리 조선의 유일한 장래 희망이기 때문이다.
 
  3. 지난 몇 주 동안에 서울 장안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공포에 떨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의사들을 서울에 초빙하여 건강전문 기관을 만들었다. 이 중요한 기관은 질병예방과 치료방안에 관한 규칙을 계속 만들어 냈다. 그런데 그 원칙이나 규칙이 통하지를 않는다. 가공할 만한 경찰력을 동원해 무시당하고 불결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청결대책을 도입할 계획이나, 실천을 기대하느니 스스로 병을 쫓아내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규정으로는 실행 불가능한 예를 들어 본다.: 어느 날 우리집 하인 하나가 콜레라에 걸려서 내장이 뒤집혔다. 나는 사동(使童)을 시켜 가까운 경찰서에 사태를 보고하게 했다. 사동이 가까운 중부서에 갔더니 그 주재소에서는 사동을 북부서로 보냈다. 그곳에선 또 번소(종합지서)로 가 보라고 했다. 그곳에선 또 그 아이를 중앙 경찰서로 보냈다. 그곳에선 그 아이를 내무부로 뛰어가게 했다. 그곳에선 그 아이를 혜민사(惠民社) 병원으로 보냈다. 사동이 그곳에 도착하자 귀하신 순사 나리가 말하기를, 집에 가서 그 환자의 이름을 적어 가지고 오라는 것! 이러니 사람들이 어찌 정부에 대고 욕을 하지 않을 수 있으랴?
 
  4. 조선은 현재 실제로 무법천지이다.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감싸 줄 방법이 없다. 존귀하신 서광범(徐光範) 신사는 유난히 깔끔하게(혼자 자부심에 차서) 치장하고 돌아다닌다. 공동체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새 법률을 실시할 생각은 없고, 조선의 옛날 법규-악당으로 혹은 방랑자로 쉽게 판정해 버리는-도 아예 모두 잊어버린 듯하다. 그렇다고 이런 경우에 감히 재판정에 가려고 한다거나 갈 사람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판 비용을 마련할 수도 없고, 시간도 없거니와, 뱀같이 지혜로운 불한당을 손에 넣을 인내심도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달팽이들은 다른 사람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을 짜낼 때만 음흉하게 질질 끌려다닌다. 그 어느 누구도 돈을 꿔 달라거나, 다른 자와 계약도 못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신용이 없기 때문이고, 전자는 그렇게 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5. 정직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조선의 노비, 특히 마부의 이야기는 놀랄 만하다. 불성실함이 전체 계급을 망쳤고, 이 야비하고 가엾은 나라마저 망쳐 놓고 있다.
 
  6. 문부대신 이완용의 문부에서 인쇄작업에 바쁘다는 보고가 들어오다(옛날 조선식 인쇄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내가 학부에 있을 때는 이 가공할 만한 음모를 내 직권으로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학부는 조선의 조폐공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더 비싸고 쓸모없는 인쇄기가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7. 우리 사랑하는 아기가 예쁘고 귀엽게 매일매일 무럭무럭 자란다. 아기가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내 어여쁜 아내는 걱정스러울 만큼 서울의 더위를 잘 이겨내고 있다. 아내의 천성적인 상냥함과 헌신적인 모습은 아내가 이곳에서 불편해한다는 사실마저 잊게 할 지경이다(1895년 4월, 부인 마애방이 아기를 데리고 상해에서 서울 전동 시댁에 돌아오다-옮긴이).
 
  8. 결국 일본이 조선을 개혁하려는 일은 실패로 돌아간 듯하다. 그 잘못은 조선 정부에 있지 일본 측에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나귀를 샘가에 끌어올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하진 못한다(물은 자기가 마셔야 한다).
 
  9. 그렇다고 일본이 조선을 위한 친선관계 유지를 도모하는 일에 흥미를 잃은 것일까? 결코 아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일본은 조선에 대해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는 생각을 행동으로 나타내진 않았다.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차관해 주는 치욕적인 속임수를 그들 자신이 수치스럽게 생각하게 해야 한다. 일본은 이미 시행에 들어갔고, 만사에 일본을 믿게 하면서 그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조선에 큰 상처를 줄 것이다.
 
 
  8월 11일. 일요일.
  서울.
 
  어젯밤에 전하의 칙령으로 정부가 개각을 했다. 군부 안경수(安駉壽), 경무사 이윤용(李允用), 탁지 심상훈(沈相薰), 군부협판 권재형(權在衡), 내각비서 이성렬(李聖烈), 탁지협판 이정환(李鼎煥). 개각은 잘된 일이라고 해야 되겠지. 조선 조정의 내각이 자주 바뀌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서글픈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제 조정은 개각할 힘도 전진할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사물의 질서는 결국 돌고 도는 법. 이 내각은 또 언제 다시 바뀔 것인가. 박영효가 실각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그가 자신의 편견을 버리지 못한 데 있다. 그는 의구심을 타고났고, 완고함마저 타고났다. 냉정한 마음가짐도 그의 유약한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의 몇 안 되는 진정한 친구에 대한 태도(아니 모든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는 섬칫하리 만큼 차갑다. 그는 내가 그에게 거역한다고 생각해 나를 의심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애국심은 그를 회복하게 만드는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8월 16일. 금요일.
  서울.
 
  샤로 보 신부와 불어 공부를 시작하다. 조선 정부의 여건들이 매일 불만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왕당파 손에 약속된 권력들, 즉 모든 중요 기관의 주축을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를 털어내어 왕당파를 치장시키는 재주를 가진 자들로 채우고 있다. 이 야비한 나라에서 도덕심, 정신력, 정치적인 부패가 바닥에 깔려 있듯, 길거리나 지저분한 오두막집, 점점 부패해 가는 관리들, 무시당하며 사는 백성들로 넘쳐나지 않을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점점 더 볼썽사납고, 점점 더 비뚤어져 갈 수밖에 없구나. 조선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점점 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러나 더 슬픈 일은 조선의 재건은 가까운 장래엔 전혀 희망이 없다는 점이다. 르 장드르(젠더) 장군과 다이 장군이라는 두 쓸모없는 미국인 장군이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많은 월급을 받는 데는 그들 자신도 놀라고 있다. 조선은 이 악당들을 해외로 수출하지 않는 한 회복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김윤식 외부대신은 유식하고 친절한 노인이시다. 하지만 다른 사람 말에 잘 넘어간다. 그의 개인 비서인 육종윤(陸鍾允)이 그의 코를 꿰어 끌고 다니는 간사스런 자이다. 나는 그자를 아주 경멸한다.
 
 
  8월 17일. 토요일.
  어제처럼 덥다. 서울.
 
  오후 8시30분에 의화공(이강)이 나를 방문하다. 그 왕자는 18세의 명랑한 청년이다. 미숙하고 위험한 처지가 그를 조심스럽게 관망하게 만든다. 의화공은 그의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씨를 많이 닮았다. 그는 해외로 나가는 것을 아주 두려워한다. 박영효 내각 때, 그는 일본 특사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박영효의 몰락으로 무산되었다. 전하께서는 타고난 공포심 때문에 아들에 대한 부성애(父性愛)를 잘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무얼 좀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조선에서 탈출하고 싶어한다. “희망이 없다”고 모두 외친다. “자, 서쪽으로 눈을 돌려라”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 달린 슬로건이다.
 
 
  8월 18일. 일요일.
  시원한 아침-더운 대낮. 서울.

어윤중은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의 단장으로 일본의 문물제도를 시찰했고, 갑오개혁 때 탁지부대신으로 재정개혁을 주관한 재정전문가였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갑오개혁 내각이 무너지면서 고향인 보은으로 내려가다 살해당했다.

조선 감리교회 예배에 참석하다. 언덕 위에 사는 귀부인들과 점심을 같이하다. 호레이스 알렌 박사를 방문하다. 박사가 말하기를 어윤중같이 강직한 인재가 단지 상감의 엉뚱한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된 것을 아주 유감스러워한다. 브라운 씨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그는 조선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보고 실망한 듯하다. 뒷전에서 음모 꾸미기, 앞에선 썩어 빠진 아첨 떨기, 급속히 늘어나는 오래된 악습들이 아무렇지 않게 국가의 재난으로 몰아가고 있다. 민영달(閔泳達)을 방문하다. 민씨 문중에서는 진취적인 사람이다. 그는 내게 “서울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정말 안 든다”고 말한다. 최근에 민씨들이 범죄와 결탁하는 왕족의 비리가 역겨워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러시아로 여행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러시아는 조선과 복합적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므로 조선을 위해서도 잘될 것이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조선이 위대한 이웃나라의 조건과 의도에 맞는, 믿을 만한 이웃 친구나라를 갖는다면 조선으로서는 아주 잘된 일이다.
 
 
  8월 19일. 월요일.
  매우 덥다가 시원해진 날씨. 서울.
 
  헨드릭스 감독에게 조선을 방문하도록 편지 쓰다. 9월 말이나 시월에 방문하면 좋겠다고 말하다. 의화공이 내게 편지로, 그가 일본 공사로 가는 일이 취소되고 이재순(李載純)이 자기 대신 가게 되었다고 써 보냈다. 사촌 치오의 부인과 다른 여인(의화공 수발 들어줄 소실-옮긴이)이 18일에 제물포를 떠나 일본에 가다.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소서!
 
 
  8월 20일. 화요일.
  대낮엔 아주 더운 날씨. 서울.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명성황후의 13촌 조카인 민영달. 1894년 호조판서로 있다가 김홍집 내각의 내부대신이 됐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사직했다.

민영달을 방문하다. 그는 내게 대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온통 옛날처럼 나쁘게만 돌아간다고 말하다. 일본이나 유럽 등의 비싼 국비연수생 25명 중에 민씨가 5명이나 된다고 개탄하다. 상감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어릿광대들과 정탐꾼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한탄한다. 콜레라가 서서히 서울에서 물러가는 듯하다.
 
 
  8월 21일. 수요일.
  새벽에 매우 추운 날씨. 서울.
 
  4000명의 병사인지 공병인지 그들에게 들어가는 국고(國庫)가 가슴속에 기어들어 온 뱀보다 더 빨리 고갈이 되어 가고 있다. 정부와 대궐에서는 너무 늦게야 그 사실을 안 듯하다. 그 군인들에게 줄 임금이 바닥난 사실을 늦게야 알아챈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궁궐이 재빠르게 파멸로 치닫는 일을 도와주려는 것 같다. 아울러 일본 대표들은 조선의 제2의 파멸을 기다리며 관망하고 있는 것 같다.
 
 
  8월 28일. 수요일.
  해가 나고 구름도 낀 날씨.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궐내에 있었다. 9월 4일 현 조선왕조 건국기념일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1. 무지막지한 소요와 군중들을 빼면 조선은 할 일이 없는 나라 같다. 그럼에도 경이로운 일은 그 모든 큰 소요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잠잠해지는가이다.
 
  2. 대궐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유교의 옛날 관습, 황당함을 되찾는 듯했다. 비록 범위가 줄어들고 변화가 있다 해도. 미천한 허풍쟁이, 험담꾼, 술수쟁이, 거짓말쟁이들이 그들의 실속을 챙기려고 상감을 구름 위에 둥둥 태우고 둘러싸고 있다.
 
  3. 이시즈카(石塚)와 늦도록 담화를 나누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이노우에 공의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 조선 정부에 고문관으로 강요를 받은 사이토와 시오타루 같은 사람은 그들 업무에 적격이 아니란 것, 그리고 이곳에 주재하는 일본 대표들은 지난봄에 차관한 300만 달러에 대한 그 비참한 입씨름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4. ‘전중이’란 말은 조선말로 ‘유죄선고를 받은 노동자’란 뜻이다. 이 말이 들어온 경로는 이러하다. 14년 전쯤, 다나카(田中)라는 한 일본인 건설업자가 쿨리(제2차 세계대전 전의 중국과 인도의 노동자로 짐꾼이나 광부를 부르는 호칭이다-옮긴이) 몇 명을 데리고 조선에 왔다. 그는 자기 이름을 프린트한 짧은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그 쿨리들을 일본사회에서 가장 천하게 여기는 일을 시키고, 비난과 멸시의 뜻으로 다나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유죄선고 받은 노동자 제도가 작년에 도입되자, 요 몇 해 동안 그 이름을 부르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당장에 그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푸른 수의에 검은 띠를 두른 사람들을 향해서.
 
  5. 박영효가 한때 나를 의심했다는 정보를 듣다. 그가 일본에 목숨을 의탁한 반대파이며 불한당의 한 사람으로 나를 의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자와(게이오대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옮긴이) 씨와 논쟁을 벌인 다음에야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그의 정신 나간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8월 31일.
  구름 끼고 더운 날씨. 서울.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궐내에서 행사 준비하다. 창고 안에 보관한 사기그릇을 점검하는 일 등. 그리고 상감께서 2~3년 전에 세운 외빈 숙소 등도 점검하다. 나는 조심해서 다루어도 모두 부서져 버리는 비싼 가구들을 보고, 궁궐이 온통 나태하고 먹고 자고 도적질하는 놈들만 우글거리는 소굴 같아 보였다. 그 악당들의 임무는 창고 지키는 일과 그럭저럭 할 만한 일들이 있다. 그러나 조심해서 다루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대궐을 개혁하기 전엔 이 나라 개혁에 희망이 없다. 대궐 안에서 다이 장군과 닌스테드 대령에게 음식을 해 주는 사람이 한 달에 600달러를 받는다고 한다. 대령이 보고한 바로는 한 달에 300달러를 받는 대령이 되기보다는 다이 장군 집의 베란다에 앉아서 일하는 숙수(熟手)가 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이학균(李學均)씨가 웨이터에게 르 젠드르 장군과 손탁(독일 국적의 프랑스 여성인 마리 앙트와네트 손탁은 고종 재위 연간 황실전례관으로 일하며 공식 업무인 황실 음식과 의전뿐만 아니라 외국 고위 사절과 조선 황실의 가교 역할을 하며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옮긴이) 여사를 위해 맥주를 주문했다. 내가 보니(정말 보기만 해도 미친 노릇이다), 키가 큰 세 명의 남자가 각각 맥주를 한 병씩 들고 온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런데 이학균은 “박용화(朴鏞和)가 상감에게 둘도 없는 영향을 주는 측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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