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제6장> 1886년 이후 재미한인의 잡다한 양상

忍齋 黃薔 李相遠 2023. 6. 2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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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뜻으로본 재미한인125년사> 이민 전기 1883년부터의 재미한인들

보빙사

1) 도주망명 변수일행의 기구한 신세
 
     1861년 역관과 의관의 중인 가문 변진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변수는 부친의 친구 시인이며 개화사상가인 강위에게 수학하며 김옥균과 교분을 맺는다. 한국은 1876년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고 미국과의 수교를 앞두고 일본의 국정을 살피며 차관도 얻으려 1881년 12월 김옥균을 파견하며 서광범 강위와 함께 변수도 대표단에 참여했다. 변수는 일본의 발전에 놀라며 특히 농업문제에 관심이 많아 실업학교에 입학 양잠술과 화학 등의 공부에 몰두했다.
 
 1883년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의 여러 공장 시설을 시찰하며 뉴저지 뉴왁에 있는 죤커터쓰 John D. Cutters 견직공장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이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에, 뉴욕타임스 11/16/1883일자)는 이를 기사화 했다: “변수는 일찍이 일본에서 비단처리공장에서 견습을 쌓았으며 특히 이번 면직공장 시찰에 아주 만족하면서 관련된 여러 질문을 했다.” 이 밖에도 보빙사 일행이 미국 여러 곳을 방문할 때에도 변수는 특히 뉴욕의 헤럴드 신문사, 하바드 마이어 제당공장, 웨스턴 유니온 전신회사, 에디슨 전기회사, 보스톤의 웨코트재령의 시범농장, 로웰 프레트 방직공장, 아이어 제약회사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질문하며 메모하기에 바빴었다. 귀국 직후 그는 국왕을 자주 알현하는 직임을 맡아 왕의 총애를 받으며 국왕이 개화사상을 통해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준비작업을 착수하게 된다. 그러나 가담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김옥균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민영익이 대원군의 환국저지를 위해 천진에 가 이홍장을 설들했으나 실피한 후, 상해와 홍공을 왕래하며 홍삼수출권을 독점 막대한 이익금을 얻어 홍공의 프랑스 은행에 예금했었다. 그러나 이 예금이 당시 상해 유학생 민주호와 윤정식 두 사람이 예금을 흠쳐 달아나게 된다. 상해에 먼저 와 유학하던 윤치호가 14세의 민주호와 윤정식을 1885년 10월 상해 중서학원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했으나, 이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민영익을 따라 홍콩으로 가 그의 집에 살았으니 이런 연고를 이용하여 1만 6천원 (양화 $17,288달러)의 거액을  흠쳐 일본 요코하마로 도주, 망명생활을 하고있는 김옥균을 찾아 돈 처리와 앞날의 일을 의논한다. 김옥규은 자신도 수배의 몸으로 변수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없고 변수 또한 이미 미국에 다녀 온뒤 다시 미국에 갈 기회를 찾고 있는 처지였다. 따마침 민주호와 윤정식도 도주의 길을 찾기에 변수와 함께 가도록 김옥균은 주선했다. 그들은  4천 달러를 김옥균에게 내어놓고 1886년 1월 24일 변수와 함께  조국의 도적의 몸으로 수배된채 미국으로 도주 망명하여 간 것이다.
한국의 김윤식 독판은 포크공사에게 이들의 나교 송환을 요구했으나 불가의 통보를 받았다. 이들은  콜리어(Lucian Collier)여사의 주선으로 워싱터의 벌리츠 어학원 (Berlitz School of Language 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중, 조정은  프에이자  Everett Frazar  뉴욕주재 한국명예총연사에게 다시 콜리어를  통해 변.민.윤 삼인을 귀국토록 간청했으나 콜리어 여사는 “이들이 죄인이나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면 조미 양궁의 교섭업무에 도움이 될 것”이라 답변하며 다른 요청은 거절하기에 조정의 이들 체포는 포기하게 된다.
 
     1887년 9월 변수와 민주호는 현 메릴랜드대의 전신인 작은 메릴랜드농과대학에 입학하여 46명의 학생 중 단 2명의 한국학생으로 공부한다. 학우 중에는 남북전쟁의 영웅 암멘 (Daniel Ammen)제독의 아들 그랜트 암멘  (Ulysses Grant Ammen) 과 메릴랜드 귀족 칼머트의 아들 칼버트 (Calvert )도 있었다. 특히 암몬 제독은 곤고한 처지의 두 망명학생들을 친절히 보살피며 학비보조까지 후원해 주었다. 그러나 1888년 1월 막 문을 연 워싱턴의 북미한국전권공사관의 박정양 공사는 돈을 훔친 주범은 윤정식이고 민주호는 14세의 소년이기에 무죄를 선언하며 귀국을 종용한다. 이에 민주호는 학교를 중퇴하고1888년 귀국하여 빚을 갚은 후 이름도 민상호로 고치고 한일합방 후에는 남작칭호까지 받은 것을 보면 친일적인 여생을 살다 1936년에 사망했다.  윤정식은 돈 갚을 형편도 되지 못해 거취를 감추었다가 귀국하여 투옥되었다는 소문이나 그 뒤는 불확실 하다.
 
다만 변수만이 농업 근대화가 농민의 만성적 절대빈곤을 물리치고 한국을 살게 할 수 있다는 화신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농업공부룰 계속했다. 한국의 죄인으로 쫓기던 변수는 대학 3년째인 1890년 1월에는 미국시민권을 신청하였고, 1891년 6월에는 이학사의 학위를 받음으로 한국인의 최초 미국대학 졸업생이 된다. 그는 졸업 직전 농무부의 위리츠 (Wililtts) 차관보를 만나 농무부에서의 일자리를 구하던 중, 일본 중국 한국의 농업통계자료 정리가 필요함을 알게 되고 우선 3개월간 농무부의 촉탁으로 근무를 했다. 일어 중국어 영어에 능통한 변수는 먼저 ‘일본의 농업’에 관한 보고를 완성하여 ‘농무부 통계월보’ 제89호 , 10월호(The Monthly Report of the Statistic Bureau, U.S.Agriculture Dept. No.89, October 1891, “Agriculture in Japan”) 에 게재했다. 이에 윌리츠 차관보는 그의 “어학 능력과 농업지식으로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대학졸업 4개월, 농무부에 근무한 3개월만인 1891년 10월 22일 통근열차를 기다리던 중에 그곳에 서지 않는 급행열차를  마땅히 정지하는 완행열차로 오해하고 선로에서 손을 흔들다가 늦게 발견한 기차가 브레익을 할 겨를도 없이 그를 떠미는 사고로 운명하니 그의 나이 겨우 30이었다. 낙후 한 한국의 근대화를 통해 조국을 구해보겠다며 만난을 무릅쓰고 수고한 그의 모든 한과 꿈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실로 애석하고 기구한 운명이었다. 사망소식을 한국공사에 통보했으나 변수에 대해선 아는 바 없다는 것이 공식답변이요 수배의 망명죄인이라는 구실로 아무런 관심도 도움도 없었다.
 
     그러나 변수의 사망 소식을 접한 ‘워싱턴 포스트’지 (1891/10/24일자)는 그의 사망과 함께 슬퍼할 아무런 직계 가족 하나도 없는 한 많은 젊은 망명객의 생을 동정적으로 보도했다: “…열차에 치어 사망한 한국 청년 변수는 왕가의 외척으로서1880년대 초 보빙사절단의 일원이던 그는 농업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고…메릴랜드농대를 지난 6월 졸업했다…보빙사절 귀국 직후 집권당인 수구사대당과 대치한 개화당에 가입, 정부로부터 추방되었다. 그의 재산은 몰수되고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평소의 관심이던 농학을  메릴랜드농대에서 공부하고 농무부장관으로부터 주로 중국 일본 양국의 농업통계자료에 관한 정보를 입수 보고 하도록 한 바 그는 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그후 일주일 수습기간이 끝난 후 농부부관리 촉탁에 재입명되었다. 사망 당시 그는 ‘중국의 농업 상태’에 관한 보고서를 준미하고 있었다. 성격이 세심하고 외국어에 능한 그가 사망시에 겨우 30세의청년이었다.오늘 오후 4시20분에 암멘데일에 있는 암멘 제독의 저택에서 장례식이 있으며 유해는 성 요셉 공동묘지에 안치된다. 그의 동창 친구 암멘, 칼머트, 부르크스, 맨닝 (Grant Ammen, Richard Calvert, Brooks, Russel Manning)  등이 관을 메고 간다.”
 
     변수의 장례식은 1891년 10월 24일 암멘 저택에서 거행되었으며, 장례식에는 암멘 제돌과 그의 가족들, 메리랜드농대 총장 알보드 Alvord,  변수의 대학 동창생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가 비록 수배의 몸이나마 아직  극소수의 한인이 미국에 있던 1891년 당시 이채영 공사와 공관원들이 장례식에 불참한 것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서글픈 일이었다. 특히 그랜트 대통령과도 교분이 있던 암멘 제독이 아들의 친구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그의 유해를 캐토릭 묘지에 안장하도록 주선하고 비석까지 세위 기리니 재미 후손된 우리로사 고맙기 그지 없다. 워싱턴 동북 쪽 메릴랜드주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의 성요셉묘지에 안장된 그의 묘비에는 ‘벤수’라는 한국말 밑에 (이는 미국 친구들이 평시에 기억한 변수의 한글 이름 표기 같음) 영문으로 ‘변수를 기념하여 이 비를 세운다. 이 나라에 파견된 최초의 사절에 속하였던 한국인으로 1891년 10월 22 칼리지 정거장에서 철도 사고로 사망했다.”고 적혀 있다.
 
    당시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던 윤치호는 1891년 11월 2일 변수의 열차사고사의 부음을 그의 친구 칼버트  (Carlvert)에게 듣고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변수는 중인출신으로서 세련되고 멋진 도회지 서울 사람으로 태어났다. 1882-83년 일본에소 농옵계통의 학교엔서 수학하였고, 귀국 후 국왕의 은총을 받아 출세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김옥균 음모 (갑신정변)에 감담, 정변실패 후 영원히 해외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여름 워싱턴에서 그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는 미국 최신식 유행스타일의 양복을 입은 멋진 신시차림이었다. 4년만에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월 60달러의 보수를 받고 미국 농무부 농무국 종자과에 취직했고, 이어 미국시민으로 귀화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음이 착하고 다정다감한 사나이다. 그러나 자기의 주견이 결려된 것이 그의 결점이다.”  (Yun Chi-Ho’s Diary (1890-1892), Vol.2. pp.231-232, Nov. 2, 1891)
 
    암엠 제독은 블레인 국무장광에게 변수의 유품을 보내며 가족에게 전달해달라는 부탁까지 하고 이는 다시 주한공사 허드 Augustine Heard에게 도달하며 조정은 변수의 연고자를 찾으나 대역의 수배자로 몰린 가족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한다. 그러나 숨어 어렵게 살던 변수의 어머니가 이 소식을 듣고 뮈텔 주교(Gustave Marie Mutel) 를 찾아와 아들의 사물을 인수해주도록 부탁했다. 이런 우여골절 끝에 가련한 변수의 유품이 마침내 어머니의 품속에 돌아오게 된다. 유품이래여 값진 대단한 것들은 없었으나 호구지책도 어료운 어머니에겐 그 몇가지라도 팔아 연명에 도움이 되었다 하니 당시 한국인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엿보게 한다. 장례 비용은 변수의 친구들이 부담하고 학비로 빌린 돈은 국무부에서 보낸 돈으로 청상했다고 한다. 유품 속엔 줄달린 금시계, 장식용 연필쏮이, 금반지, 작은 주머니 칼이 하나 씩 들어 있었다. 칼과 연필만 남기고 얼마나마 값되는 것들은 팔아 생계유지에 보탰다기에 더 애처럽다.
 
 그후 1910년 7월 18일 친일의  이완용내각은 변수를 사면하고 종2품 규장각부제학을 측증하는 은사를 내려 ‘역사의 죄인’의 누명을 사후에라도 면하게 됐다 (고순종실록, 하.p 551).  미국에서 대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아는 재미한인들로서 더욱이 한국인으로 첫번째의 이학사의 대학졸업생인 변수가 불의의 사고로 직계 가족 하나도 이 땅에 없이 외롭게 유명을 달리한 사실은 참으로 애석할 뿐이다. 기구한 죄인망명의 누명을 쓰면서도 주저안지 않고 농업한국의 장래를 생각하며 농업을 전공하며 나라에 공헌하겠다며 조국의 사면 부름을  하루하루를 기가리며 살다다가 죄인의 누명도 농업국가의 가난한 농민들에 대한 꿈도 표보지 못한 채 불의의 사고로 떠나게 되기에 연민의 정이 한층 더 한다. 뒤 늦은 사면이나마 저승에서 편히 쉬기 기원하며, 후손 된 우리는 인생의 무심함을 되새기며 이국 땅에서의 나날을 더 귀하게 살며 미국과 한반도에 보랍되게 사는 자들이 되기만을 바란다.  
 
 
2) 열강침투 타개책의 불안한 최초 주미공관과 박정양 공사
 
          최초의 주미공사관  설치나  박정양공사의 부임에 앞서 당시의 한말조정이 열강세력의 침투에 둘려쌓여 신음하며 그 타개책을 갈구하던 정황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먼저 일별할 필요가 있다. 박정양 전권공사가 1887년 말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나  중국 청나라의 위협과 방해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알렌공사의 극적인 협력으로 겨우  부임하게 되나 청의 해외에서 주미공사 부임을 방해하는 연유를 살펴보자.  1884년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고 이에 연루되어 도망했던 일본은 내정간섭을 사과하기는 커녕 되려 일본 피살자의 보상을 요구했다. 이에 한국은 일본공사관 건축비를 부담하는 ‘한성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기회를 틈타 일본은 청의 세력을 한국에서 축출하는 계기로 삼으로 했다. 일본의 이또 (이등방문)는 청국을 방분 이홍장을 만나 마침내 1885년 ‘천진조약’을 맺어  4개월 내에 청일군은 한국에서 철군하며 차후에도 파병시에는 사전에 통보하기로 약정했다. 그러나 청의 원세개는 아직도 일본보다 우세였기에 통상의 명목으로 청군 일부를 계속 주둔시켜 조정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 즈음 외교수완이 특출한 러시아 대표 웨베르 (Waeber) 가 부임하여 궁궐을 드나들며 친로적인 세력을 키우기에 지나친 청의 간섭에 지친 고종과 민비는 친로정책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청은 이를 트집삼아 1886년 새 외교고문으로 미국인 데니 (Denny) 를 추천했으나 그도 반청친러적이요 한국에서의 러시아 세력이 강해지기에 러의 남하를 경계하던 영국이 1885년 함대를 거문도에 주둔케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청의 개입으로 2년 뒤인1887년 영국함대가 철수하되 ‘어떤 나라도 한국 영토를 점령하지 모한다는 러시아의  다짐을 받고서 였다. 이와같이 한국의 문제가 한국이 아닌 다른 여러 강대국들의 이익에 의해 흥정되는 위기 속에소 조정은 그 타개책으로 1888년 주미공관을 세우고 박정양을 주미전권공사로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에서 청국의 세력을 과시하며 스스로 한국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청은 자국과 사전에 의론하지 아니하고 한국이 독자적으로 서양에 공사를 파견하는 것을 문제삼았다. 더욱이 해외없무의 경험도 없이 한국이 사신을 파견함은 국고만 소비하는 것이라 힐책했다. 고종의 입장이 난처한 중에 미국측이 그 부당함을 지적하기에 중국은  ‘전권공사’ 대신 ‘주차공사’로 바꾸라며 주장을 좀 낮추었다. 조정의 난색표명과 미국의 관여에 주춤한 청은 이번엔 ‘영약 3단의 조건’을 제시했다. 즉 1. 한국 공사가 그 주차국에 가면 먼저 중국 공사를 찾아보고 그의 지도로 외무성에 함께 부임한다; 2. 회의나 공사자리에 한국 공사는 마땅히 중국 공사의 다음 석에 앉는다; 3. 중대사건은 반드시 사전에 중국 공사와 협의한다는 등 속국이나 다름 없는 조건들이었으나 주미한국공사의 파견문제 해결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우여곡절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박정양 공사관 일행은 기차로 대륙을 횡단, 1월 초 워싱턴에 당도하여  클리브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 제정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권대사 박정양을 비롯하여 참찬관 이완용, 서기관 이하영,  친군후 영문관 이상재, 번역관 이재연, 수행원 강진희, 진사 이현용, 무반 이종하, 하인 김노미 허능업 등 10명 이었다. 문일평의 ‘한미 50년사”에 따르면  이종하의 얼굴은 얽은 곰보에 두 눈이 감은 것 같고 한인 김노미는 애꾸에 추모였다. 이들은 일본에서 미국인 호레이스 알렌과 합류하고 전년 10월 26일 영국 배 오셔닉 호를 따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한다. 19일의 긴 여행으로 상항에 도착했으나 공교롭게도 3등 선객 중에 두 창이 발생하여 미이민국의 상륙허가가 나지 않아 일행은 배 안에서 4일이나 머물렀었다. 그러나 뒤 늦게 한국 공사의 탑승이 알려지자 이민국은 1등 선객들만 먼저 상륙을 허락하여 1887년 1월 1일 다른 선객들도 상륙하게 되자 그들이 공사에게 감사하는 만세까지 불렀다.  일행이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 나서자 시내 곳곳에 한국 공사를 환영하는 태극기가 게양됐다.
 
    태극기를 본 감상을 이상재는 그의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갔던 이야기,” (‘별건곤’ 1926년 12월 호)에서 다음 같이 기술했다. “상투잡이 공사 일행인 우리가 조선을 떠날 때에 공사관에 게양할 태국기를 미리 준비한 것은 물론 우리가 타고 가는 기선과 객실에도 태극기를 꽂았다. 눈치 빠른 선주는 미리 태극기를 준비하여 식당이나 우리가 출입하는 문 입구에 계양했다. 미국에 상륙할 때에도 부두,ㅡ 정거장, 찻간, 호텔까디 태극기를 게양해 환영의 뜻을 표했다. 도초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볼  때 반갑기도 했거니와 미국의 외교술이 발달된 것도 감복했다.”
 
      일행은 상항의 팔리스 호텔에 머물렀고 호텔규모에 놀란 죽천 박양호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호텔은 8층에 방이 천여 간이요 남녀 사환이 5백, 매일의 손님이 1천여명, 3시에 식사하며 1인 숙박비는 금화로 3등은 10원, 하등은 3원이었다.”이곳에서 각국의 영사, 주지사, 사장, 세관원, 철도회사 전무 등의 예방을 받던 공사관 일행은 5일 솔티 패시픽 회사의 급행열차편으로 워싱턴으로 출발, 1만 5천리를 횡단하며 세 번이나  기차를 갈아타고 편의상 3등의 한 칸을 전세로 1인당 89달러 50센트의 요금을 지불했다. 어느 정거장에서 한 곡마당의 지배인이 “당신들의 다음 공연은 어디에서 가지느냐”의 질문을 받은 것을 보며 이들의 복장 행세는 자뭇 곡마당의 복장같은 이색적이었던 같다.
 
     1월 초 일행이 워싱턴의  에비트 호텔 하우스에 투숙하자 이틀 후  뉴욕 명예 총영사 프레이저 가 찾아와 합류하고 박공사가 비서와 알렌을 국무성에 보내 1888년 1월 17일 미대통령을 알현하는 일정이 알려지자, 청의 공사 장음환은 ‘영약 3조’를 위반했다며 문제를 제시했다. 이 시비는 여러 차레 오가며 부쾌감을 더하고 미국 언론에도 보도되기에 한국 외교관들에게는 모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행이 미국무장관 베야드가 이를 감지하고 “미합중국은 청국과 한국의 관계는 알바 아니요 양국을 똑같이 독립국으로 대우하기에, 미국에 주재한 양국 사절은 국제 관례에 따라 각자의 정부를 대표한 독립 관리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박공사는 그후 이때의 사정을 김홍집 수반에게 다음 같은 서신을 보냈다: “…무릇 국왕의 명에 의해 외교 대표로 어느 나라에 가면 먼저 상대방 국가의 외무부를 방문하며 타국의 공사관을 방문해서즌 안됩니다. 이는 상대방 국가의 외무부를 경시하는 것입니다. 외교의 도는 오직 예의와 공경을 제일로 합니다…각국이 공사를 보내며 지금까지 다른 공사와 함께 외무부를 방문한 예는 없었다 합니다…” 청국 공사의 강력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결국 박공사는 단독으로 국무성과 교섭하고 1888년 1월 17일  클리브랜드 대통령을 알현 국서를 봉정한 것이다.
 
     박정양은 그의 “미행기”에서 이 날의 봉정식에 관해 상세히 전한다. 한국의 복색으로 단장한 일행은 알렌, 프래이저 등과 함께 먼저 국무성의 베야드 장관과 브라운 차관을 만나고 다시 이들의 안내로 백악관에 가 클리브랜드 대통령께 정중히 알현하고 국서를 제정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홍사중의 ‘상투 틀고 미국에 가다’에서는 대통령이 앞에 서있는데도 한국 공사일행은 특별한 복장의 대통령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한참을 문쪽을 향해 두리번거렸다. 얼마 후 앞에 이미 서있는 보통 옷을 입은 분이 대통령인 것을 알고 박정량 공사는 어찌할 바를 몰으며 당황하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사죄와 충성의 표시로 세 번 배례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댜. 대통령 수행원들이 박정양의 돌출행동을 제지하고 일으켜 세우자 그는 당황하며 어쩔줄 몰랐다고 한다.  거기에 국서를 넣은 상자의 열쇠를 찾지 못해 미리 준비한 취임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엉망이었다. 수행한 알렌은  웃음을 참느리 고생했다고 전한다. 대통령과 국무장관도 말리서 탖아온 손님들에게 무안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몰론 한인 공사관 일행은 그들이 국서 봉정식을 코미디처럼 진행됐지만 그것이 얼마나 미국인들에게는 우스운 것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여하튼 제정식 후 한국공사관은 처음 빌린 워싱턴의 제15가 1513 혹은 1513 O 스트리트라고도 하는 빌딩에서 시작됐다.  다음에 이사한 곳은 13가 1500번지의 건물로 한국정부가 1891년 11월 28일에 2만 5천달라로 구입한 것이었으며, 1층은 공사관 2,3층은 주거지로 사용했다.
 
    제정식 후 공사관이 새 청사를 빌려 공사업무를 시작했으나 청나라는 박정양 공사가  ‘영약 삼단’을 이행하지 않고 어겼다며 주미 청의공사, 한양주재 원세개의 항의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의 계속적인 압력으로 한국조정은 공사 일행을 차례로 소환했고,  박정양을 힐책하여 그가 병석에 눕게하고 마침내 1888년 11월에는 본국으로 소환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은 원세개는 박공사에게 사약을 내리도록 협박하기에 4개월이나 일본에 머물다가 귀국했으나 또다시 70여일 남대문 밖에 숨어 기다리다가, 청에 변명 사죄를 청한 후 1889년 8월 20일에야 고종 황제께 복명했다. 한말의 조정이 얼마나 처량한 신세였던가를 실감케 한다. 이와같이 김정양은 청의 압력으로 주미전권공사직을 강제 사임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며 귀국했으나 그 이후 호조판서, 경성부 판윤, 갑오개혁 때 김홍집 1차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내고, 다음 해 내각이 붕괴되고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되자 내무대신으로 총리대신서리와 궁내부대신서리를 겸임했다. 그는 한말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 애썼으나, 한말은 해가 갈수록 점차 일본침략의 마수에 빠져들고 있었다.
 
    박정양이 이완용, 이채연와 파에 소환 귀국안 뒤 주미공사관에는 서기관 이하영만 남게 되었고, 더 이상 새로운 공사관 직원을 체우지도 못하는 조정은 관직에 오른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이하영을 주미 서리공사로 임명했기에 그는 수직 상승한 셈이었다. 이런 이하영이 미국에 부임하기 전에 고종은 특별한 밀명을 주었다. 그것은 부산 인쳔 원산의 세 부드를 담보로 200만 달러를 차관하여 그 동으로 미국 병사 20만을 한국에 빌려오도록 한 것이었다. 고종은 이 차용군대로써 청국 세력을 몰아내고 중원까지 밀고 올라가겠다는 황당한 꿈이었다. 이하영의 기록에 의하면 고종은  “나에게 ‘대조선 해육군 대도원수’라는 교첩까지 내리며, 내가 20만 미국 병사를 이끌고 북을 울리며 환국하면, 고종께선 쉰양간 건너편까지 통치하기 편하도록 평양으로 환도한다는 엄청난 계획을 품으셨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야사건.’ ‘신민’ 1926켴 6월호)

    고종의 밀령을 위해 홀로 남아 백방으로 교섭한 끝에 이하영은 그 첫 결실을 보았다. 뉴욕은행이 200만 달라의 차관을 통보하여 왔다. 이에 이하영은  차관의 일부 돈으로 워싱턴에서 엄청난 로비를 시작하여 비싼 연회를 열어 문무백관과 상하의원, 기자들까지 초대하며 미군 20만을 원병으로 한국에 파병한다는 의안이 미 상하의회에까지 상정하게 되었다. 성공적이며 큰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이 안이 상원에서 부결되기에 이햐영의 부풀었던 마음은 곧 바로 깊은 걱정으로 변했다. 이미 소비한 16만 달러를 어떻게 갚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어떤 방도로도 갚을 길이 없오 고민하던 어느 날 국무장관의 호출이 떨어졌다. 이하영이 무거운 마음으로 국무장관을 찾은 자리에는 채권자인 뉴욕은행의 대표 이사도 참석하고 있었다. 국무장관의 말은 이하영이 의아할만큼 전혀 예상 밖의 제안이었다. 이미 소비한 16만 달러는 미국 정부가 갚을 것이기에, 차관의 남은 돈을 즉시 은행에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한국 공사는 즉석에서 승낙하고 남은 차관을 돌리는 것으로 미국측의 관대에 감복하면서도 오히려 미국 정부를 존경하나 함부로 빋을 나라는 아니라 느꼈다. (이하영, ‘한미국교와 해야사전,’ ‘신민’ 1926년 6월호). 이하영이  고종의 꿈을 이루어주지는 못하였으나 미국의 사교계나 금발의 미녀들에게선 춤 잘 추고 돈 잘 쓰는 한국의 신사로 인기가 대단했다고 했다. 그러나 1889년 조종이 소환하자 이런 개인의 영화도 끝이었고 1년 6개월의 공사서리직을 이완용에게 물려주고 귀국했다.
 
   그 사이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로 가장 큰 거침 돌들을 제거하고 한국침략의 청국 러시아 영국 미국 등의 국제적인 승인을 얻으며 마침내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된다. 이때 미국은 한국과의 어느 조약국보다도 먼저 서울의 주한미공사관의 폐쇄와  워싱턴의 주미한국공사관의 퇴거를 명함으로써, 한미조약에 따라 미국이 일본침략의 마수에서 한국을 구원하리라는 한국조정의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이로써 언제나 친미적이며 나라의 위기 때마다 미국에 기대하던 한국은 친일반한의 정책을 분명히 보며 낙심을 금할 수 없었다. 사실 을사조약 몇해 전부터도 일본은 한국 내외의 행정 외교권을 장학하였으며 1905년 5월5일에 벌써 일본은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하와이일본총영사 사이토를 한국총영사로 정하고  주미공사를 통해 이를 미국정부에 알렸고,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체결됨 따라 일본은 온 세계에 일본 공사와 영사가 해외 한인들의 ‘보호자’가 된것을 공표했다. 이어 미국정부도 11월 27일 즉각적으로 미국무장관은 한국의 외교 일체를 일본정부와 교섭할 것이라며 이를 일본에 공식 통보했다. 2월 15일 대한제국은 “해외 한인은 어느 곳에 있던지 일본 영사의 보호를 반아라”는 훈령을 내렸기에, 해외 한인들은 이제 외교권을 상실한 망국민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와이나 본트의 한인사회는 재미한인공동대회를 개최하고 일본을 배척할 것을 결의하고 배일결의문을 한국정부에 발송하며 항일운동의 기치를 본격화 하기 시작했다. 일제 통감부는 1906년  주미일본영사관에 훈령를 내려 미국 각처의 한인들을 조사하도록 지시했으나 한인들은 일본영사의 인구조사에 불응할 뿐아니라 강력한 반일운동을 전개하기에 한인들의 조사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재미한인들은 미국 전역에서 반일독립단체들을 조직하고 재미한인교회들도 함께 반일애국 돌립운동을 전개하기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재미한인들의 구국활동이 왜정의 가장 두려운 애국세력으로 발전해 갔다. 이는 재미한인의 국민회 총회의 애국운동을  논하는 장에서 상론하려 한다. 
 
 3) 구한말의 개화 크리스천 정치가 윤치호의 미국 망명 유학
               
 
     개회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부친 윤응렬의 영향으로 유소년 시절 유교교육과 함께 개화사상가들에게 교육을 받으머 교분을 가지고 성장한 윤치호는 17세되던 1881년 1월 신문물제도를 시찰하려 일본으로 떠나는 ‘신사유람단’의 최연소자로 수행게 된다. 시찰단의 귀국 후에도 윤치호는 계속 동경에 머물러 유학하며 신학문과 며 일어 영어 등의 공부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때 마침 한국 최초의 주한미국공사로 부임하는 프트는 동경에 머물러 있는 동안 윤치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그는 한국으로 떠나면서 적합한 통역자가 없어 아직 영어가 부족한 윤치호지만 그를 강권하여 통역 보조인으로 동행하게 된다. 그의 프트 공사와의 통역으로의 인연은  미국공사공사관과 유대관계를 원하는 고종에게 자유로이 접견할 수 있게 된다. 뿐아니라 그는 청.일의 인사들과 친분을 나누며 한말 조정의 관리들 특히 개화파 주역들과  자주 접하면선 세계 정세에 눈뜨고 한국의 개화와 독립의 절실함을 느끼며 고종황제에게도 자주 이러하 뜻과 정보를 상신했다.
 
     개화당의 갑신정변 계획을 대략적으로 알게 된 윤치호 부자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자제의 의견을 비쳤기에 그들에게는 구체적 정보를 주지 않았기에 상세한 일정을 몰랐다가 당일의 현장에서 알게 되었으나, 평시 그들이 개화당 인사들과 친밀했기에 정변 공모자들로 보수관료들의 의심을 받았다. 윤치호의 1884년 12월7일의 ‘일기’에 의하면 그가 프트 공사와 함께 청의 원세개 진영에 머물고 있는 고종을 알현했을 때 “나는 너희 부자가 죄 없음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고종의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은 계속되었기에 국왕의 해외 망명 유학의 허락을 친필로 받고 미국 유학은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평소 적대감을 가지기도 한 청국으로 유학하게 된다.
 
  1885년 1월 21세의 윤치호는 프트 공사의 추천서를 가지고 인천을 출발 일본 나가가기를 경유  1월 23일 상해에 도착한다.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알렌 Young J. Allen 이 세운 ‘중서서원 대학’ Anglo-Chinese College에 입학한다. 윤치호는 일본에서 2년간 근대교육을 받은 경험이 았으나 아직 산발적이었으며 체계적인 근대교옥은 4년 여년에 걸친 중서서원에서의 배움이었다. 그는 인문 사회과목과 성경, 영어 중국어 등 고루 공부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댜. 그 밖의 과외활동이나 대인관계에도 열심이었으며  독서도 ‘미국사’ ‘프랑스사’ ‘문명제국약시’ ‘무국책’ 등과 문명개화에 관계된 서적들 뿐아니라 섹스피어 등의 세계 문학 등까지 폭 넓게 탐독했다.
 
   무엇보다 상해 중서서윈에서의 유학기간에 윤치호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신학문 못지 않게 그가 이곳에서 기독굥에 접하게 된 사실이다. 그는 성경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신학서적과 고전 등도 진지하게 공부하며 교회의 예배와 여러 집회에고 열심으로 참석했다. 여러 기독자들을 사귀던 그는 특히 선교사 알렌  Y. J. Allen 에 대해 “자신은 복음 안에서 그의 아들”이라 했고, 보넬은 “자기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직접적인 안내자”라 고백했다. 4년 여의 기독교 연구와 수련 끝에 그는 크리스천이 되는 결심을 하고 마침내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1887년 4월3일 세례를 받았다. 그의 기독교 수용은 그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자신의 생만이 아니라 위기의 한말을 구하는 길도 다만 이 기독교의 정신에 달려있다고 확신한다. 
 
   4년 여나 중국에서 망명 유학을 하던 윤치호는 그의 경험을 통해 중국에 대해선 아직도 그들이 야만적이고 미개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청이  서구 강대국들에게는 굴종하면서 한국을 속국으로 취급하며 방자하게 구는 일에 대해선 여전히 분노했다. 그는 한국이 청국의 보호로 나라가 유지된다는 생각을 가진 한국인들이 많은 것을 개탄했다. 청국은 그럴만한 능려도 없으며 한국의 개화발전에 방해자로 간주한다. 더 일찍 일본을 시찰하고 공부한 윤치호에게 미개한 청국보다는 차라리 서구군명을 본받아 놀랍게 발전하는 일본에서 본받으며 배울 것이 많다고 여겨졌다. 그러므로 열강의 침략에서 한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권을 확립하며, 정치를 쇄신하고 내정을 개혁하며, 개화제국의 모델을 본받아 문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에게는 일본도 개화발전국의 하나로 비췄기에 아직 24세의 젊은 윤치호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서는 청국보다는 차라리 일본이 도움이 된다고 여겼던 것같다.
 
     여하튼 바로 이런 사상과 고민을 지닌 윤치호가 보넬 교수, 알렌 박사와 감리교의 후원으로 1888년 9월 상해를 떠나 일본을 경유, 동년 11월 8일 열망하던 미국 테네시주의 내쉬빌에 도착하여 명문 벤더빌트대학에 입학한다. 즉 이는 명치 이후 서구문명을 본받아 발전한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배움이 아니라 서구문명의 대표적인 미국에서 그가 직접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다. 윤치호에게 붙는 ‘망명’의 이름은 좀 특이하다. 그가 개화사상은 가졌으나 갑신정변에 직접적인 가담은 아니 하였고 고종황제도 그의 죄 없음을 확언까지 해주었다. 또한 윤치호의 유학은 비록 친청조정이 그를 정변 역적들과 같은 친일성향의 개화파 무리라 하여 죽이려는 위협 속에서 나라를 떠나 유학길에 오르기는 했으나 왕이 친히 그의 해외 유학에 대해 친필로 “지도 知導”라 써주며 ‘알았다, 승낙한다’며  제가하였다. 또한 그가1888년 망명 유학생으로 미국 땅을 밟을 때에는 상당한 영어 실력이 있고 상해의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중서서원 대학’에서 기초적인 미국대학과 대학원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기에 방학이나 유학생활 속에서 미국 전역을 한국의 정황과 구원의 길이나 기독교에 관한 강연을 하며 순회까지 할 정도였기에 ‘특별한 망명 유학생’이요, 이런 그의 5년여의 미국에서의 학업과 활동은 재미후손들에게 본받을 또하나의 귀감이 된다고 믿는다. 이런 시각에서 그의 미국에서의 망명 유학생의 생활을 좀더 살펴보자.
 
    1888년 10월 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상선 아라빅  Arabic 호를 타고 하와이에 잠시 정박하고 내리지도 못한 채 출발하여 19일만인 1888년 10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시에는 배멀비로 상당한 고생을 했던 것같다. 그러나 상해 중서서원의 알렌 선교사의 소개를 받은 하논 목사  Reverend Hannon의 도움으로 상항의 코스모포리탄 호텔에 머문 후 곧바로 기차료 $48달라65전의 테네시행 기차를 타고 7개주를 거치며 8일간 5차나 기차를 갈아타며 상항을 떠나 리노, 덴버, 켄자스시티, 센트루이스를 지나 내쉬빌에 11월 4일 도착한다. 도중 미조리 주 캔자스 시티의 호텔에 유숙하려 하다가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거절을 당하고 역에서 밤을 세우기도 한다. 당시 중국인 제거법이 미의회에서 제정될 정도였기에 중국인이든 한국인이든 할 것 없이 결국 황인종으로 차별을 받은 것이기에 그는 벌써 유색인의 인종차별의 쓴맛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영어에 능숙한 그는 당시 클리브랜드 대통령 ( 제22대)의 임기가 끝날 쯔음 새 공화당의 도전자  해리슨  Benjamin Harrison (제 23대)이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들으며 참으로 놀라고 감탄한다. 한국의 세습적인 절대 황제나 청나라의 왕정 속에 살던 그에게는 절대 권력자를 백성들이 자유스런 직접 선거로 선택한다는 것이기에 참으로 기절초풍할 신기한 노릇이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민주주의와 민선의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유세나 토론을 처음 보고 듣는 것이기에 놀라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윤치호가 늘 쓰던 당시의 ‘일기’에 따르면 그는 먼저 내쉬빌의 도시나 벤더빌트 대학 캠퍼스가 놀랄만큼 아름다울 뿐아니라 대학의 규모나 교육내용이 전혀 새로웠다. 그리고 영어에 큰 지장이 없는 그였기에 공부와 대학의 그룹참여, 교회와 사회의 각가지 활동에도 자유스럽고 폭 넓게 참여했다. 신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게 된 윤치화가 3년의 벤더빌트에서 택한 과목들은 교회사 네 학기, 연설학 세 학기, 성경사, 설교학, 논리학 두 학기 등을 중심으로 하되 로마사, 심리학, 설교사, 교회정치, 수신, 화학과 조직신학 등 다양한 과목들을 두루 택했다. 그는 여러 과목에소 수석을 하고, 그의 ‘조직신학’의 답안지가 ‘웨슬리언 애드보케이트 Wesleyan Advocate’지에 게재된 것을 보면 그의 신학이나 사고, 영어 등이 특출했던 것같다. 그의 계속된 2 년 동안의 죠지아 주의 에모리 대학Emory  University  에서의 공부는 벤더빌트에서 택하지 않은 과목들을 더 선택했다. 어떤 관목이나 분야의 전문성보다는 미국에서 발달된 여러 분야들을 고루 배우려 했던 것같다. 따라서 에모리에서는 대부분 물리 화학 식물학 대수학  기하학 등의 자연과학 과목들과 역사 헌법사 정치경제학 자연지리학 등의 인문사회 과목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인문 사회 자연 과학의 제분야의 과목들을 다같이 큰 지장없이 우수하게 공부한 것을 보면 윤치호는 퍽 댜재다능 할뿐 아니라 선진국의 발전된 제분야에 대해 배우고 알려는 열정이 컸던 것같다. 이런 그의 재능과 열정을 본 에모리대 총장 캔들러 Warren A. Candler박사는 윤치호가 장차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다. (‘일기’ 1892/10/14일자 참조)
 
     미국 5년여의 유학기 동안, 윤치호가 그의 ‘일기’에 수록한 독서의 저서들을 보면 역사서적과 문학작품들까지  댜양하다. 원문대로 소개하는 편이 참고에 도움될 듯하다: Thomas Macaulay, Waren Hasting’s Indian Policy; History of England; Edward Gibbon, The Decline and Fall of Rome;Mackenzie, Indian Empire in the 19th Century, Macarthy, History of England. Shakespere, Ingersoll, Nathananiel Hawthorne, Edgar Foe, Victor Hugor, Thomas Carlyle, Ralph Emerson  등의 역사와 문학작품들을 탐독한 것을 보면 그의 문명과 역사에 관한 관심이나  꿈을 엿보게 한다.  약육강식의 국제관계나 영국의 인도경약에 관한 공부는  그의 약한 조국의 열강에서의 생존모색을 위한 관심이라 할 수 있으며, 세계적인 문학가들의 고전적인 작품들의 독서들은 그의 인생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신의 인격과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윤치호는 미 중부나 동남부의 명문 벤드빌트나 에모리에서 유학하는 동안 교내외의 행사나 서클 등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벤드빌트 시절 그는 문학서클이나 논리학회 철학회 등의 토론회에 참여하고, 시 문학의 낭속회에 참석하고 각종 강연회의 연사나 대학과 국제적인 YMCA  대회의 연사로  초청되기도 했다. 에모리에서도 Y 의 강사만이 아니라  메모리 대학의 양대 토론회의 하나인 ‘퓨 학회’ Few Society 의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그가 에모리 졸업생들의 영예라 할 ‘시니어 Senior’로 선발 추대된 것은 그의 인격과 능력이 아주 뛰어났던 것을 잘 보여준다. 당시 외국 학생들이 많지도 않은 미국 대학에서 외국 유학생에게는 꽤 드문일이었기에 윤치호의 대학에서의 토론회 회장이나 시니어의 추대는 자랑스런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상해에서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된 윤치호가 유학하던 벤더빌트나 에모리에서 공부하면서도 교내외의 기독교 활동과 주변의 감리교에서의 참여와 활동은 대단히 활발하고 주목할만하다. 벤더빌트 유학하던 1888년 12월에 그는 벌써 교회초청 강연을 하기 시작하였고 조지아에서는 제19아 조지아 주일학교연합회에서 한국에 대한 강연을 했다. 그의 ‘일기’에 나타난 초청이나 모금 전도 강연 회수는 무려 벤더빌트에서 50여회, 에모리에서 100여회로 150여차니 되기에, 그의 5년여의 재미시절은 그후 어느 한인들도 따르기 힘든 황동이었다. 그의 강연의 주 내용은 한국 중국 일본의 기독교 선교 현황 등에 관한 것이요, 때로 자신의 유학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이 나라들의 풍습과 예절 등을 유머와 위트로 소개하며 미국 기독교인들의 동양선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1893년 9월 윤치호가 에모리의 캔들러 총장에게 $200달러를 기탁하며 한국 선교를 간청한 사실은 그가 얼마나 기독교에 희망을 가지고 한국에 선교해 주기를 열망했던가를 보여주며 기탁한 달러는 그가 모금 강연에서 얻은 것이기에 흥미롭기도 하다. 그는 이어 1895년 8월에 북청에 주재하던 남감리교 선교사 헨드릭스 감독  Bishop E.R. Hendrix 에게 한국 방문을 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1895년 10월 13일에 헨드릭스는 미 남감리교 선교사 리드  C. F. Reid와 함께 서울에 와 남감리교의 시작이라 할 선교를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ㅔ 153;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I, p 444)
 
     이 밖에도 윤치호는 미국 학생들외 대외 활동이나 교회의 사회참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일기’에 따르면, 기회되는 대로 동참했다. 그는 감옥의 수인선교를 위해 벤드빌트 시기엔 1년 6개월간 매주일 오후에 형무소를 방문하여 기독교 강론이나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죠지아에서는 가난한 흑인들에 관심을 가지며 그들에게 전도하기도 했다. 그는 사생활에 관한 내용들도 ‘일기’ 담아 학비걱정이나 일본 학생친구들과의 대화, 교수들의 초청과 시귀임, 자신의 이성이나 성적인 혹은 음주문제의 고민, 그 절제를 위한 노력과 실패 등도 언급하며 자신의 수련의 결의를 때로 ‘머리를 깎는 삭발’로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윤치호의 떠나지 않는 고뇌는 역시 약소하고 미개하며 썩은 관료들로 인해 피폐한 나라를 구할 수 있을가 하는 것이었다.  여러 미국의 스승들 중에 조직신학 교수 틸레트 Tillet와 성경사 교수 호스  Hoss, 캔들러 총장 등은 특별한 영향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특히 캔들러는 윤치호의 정치 사회 역사의식이나 기독교의 원숙한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5년여 미국에 유학하며 윤치호가 배운 것은 무엇이어는가?  첫째는 미국이 최대의 문명국이라는 것이다. 우막에 살며 마차도 없이 흑토 길을 겨우 걷는 한국의 형편이나 미국은 새로운 빌딩과 화려한 동시를 형성하고 대로를 기차로 달리며 바다엔 스팀기관으로 움직인다. 국제사회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열국경쟁에 의해 생멸하기에 한국의 살길도 개화를 통한 문명사회를 이룩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의무는 조국의 힘을 키워 한국이 정치변혁을 통해 문명국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룰 위해서 “청국 세력을 제거”하고 “낡고 무지한 정치를 쇄신”하며 “개화제국의 모델을 따라 문명을 추구하고 과감한 “개화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윤치호는 국가변혁에 앞서 먼저 해야할 일은 백성을 깨우쳐 정치변혀을 이루는 힘을 키우고 한민족을 문명국 자질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라 여겼다.
 
     둘째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체제를 가추고 모든 권력이 백성들로부커 나오며 다만 백성을 위한 정치가 백성들에 의해 되어지기에 이 보다 더한 정치체제는 있을 수 없음을 확신했다. 1888년 벤더빌트를 향해가던 하니발에서 또한 1892년 옥스퍼드에서 양차의 대통령 선거를 목도하고, 미국인들의 고도의 정치의식과 자유토론, 국민의 여론과 다수결에 의해 대통령이나 민선의웡들이 선출되며, 주의회나 상하연방의회에서 국정이 책정되는 과정들을 견학하고 또한 인권이 보장되고 정의의 사법제도가 확립된 미국을 보면서 윤치호는 민주주의 국가에 대한 확신과 체험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조국의 현실이나 구태의연하고 탐관오리로 득실거리는 조국을 비춰보며 윤치호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개화에 대한 열정과 비관주의가 민족패배주의로 이끌며 윤치호로 하여금 먼 훗날 일제시대에 친일협력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를다. 여하튼 그가 미국에서 직접 공부하고 체험하며 얻은 결론은   은 민주국가의 건설에 한국의 운명이 달렸다는 확신이었다. 때문에 최대의 목표는 온갖 억압을 배제하고 인권과 민권을 존중하며 민주사회의 독립국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셋째 미국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 나라가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국가라는 것이었다. 문명에의 원동력이나 민주사회를 이룩하려는 의지가 다 기독교 윤리의 영향과 도전으로 보였다. 따라서 기독교 종교는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또한 모든 경우 모든 종교의 기초”요 (1892/11/12 일기), “삶 속에 실용되는 기독교는 그 앞에 어느것도 맞설 수 없는 힘”이라 믿었다 (1893/12/17 일기). “모든 종교 중에서 기독교를 선택한 것은 기독교는 일을 해내기 때문이다” (1894/1/1 일기). 확실히 윤치호는 기독교를 인간개선의 실천종교와 국가 사회개선의 원동력이 되는 사회윤리로 파악했다. 이와같이  기독교는 미국에 있어 문명부강과 자유 민주주의를 창출한 힘을 가진 가장 우월한 종교요 (1894/3/9) 약자와 소외된 계층에도 관심하는 것이 사실이나 미국에서의 하나의 큰 약점은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과 유색인에 대해 아직도 차별의식을 가지고 실제로 저들을 인종차별로 대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치호는 이런 미국의 문명과 민주주의 및 기독교의 높은 윤리와 이상만이 한국을 구원할 희망으로 보았다. 따라서 문명과 민주국가를 위한 일차적 과제는 국민계몽으로 가능하기에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먼저 “국민을 교육해야 하며” “한국민의 교육을 돕고 인민의 기상을 회복할 기계는 예수교 밖에 없다”고 믿어 교육과 선교를 국민계몽의 양축으로 삼았다. 이로써 백성을 개조하고 “개화국민’을 형성하여 개화 개혁의 정책을 뒷받침하며 조국개화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이 미국에서 배운 윤치호의 국민계몽의 이상이었다. (1889/3/30; 1889/12/14; 1893/3/10-11일기). 이러한 미국교육을 마무리 하며 우수한 글을 써 알렌상까지 받은 윤치호는  1893년 6월 에모리를  영예스럽게 졸업하고 귀국을 원했다. 그러나 국내정세가 아직도 그를 받을 형편이 못되어 결국 다시 모교인 상해의 ‘중서서원 대학’으로 돌아가 영어를 가르친다. 때마침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그치고 한국에선 수구사대당이 무너지고 친일적인 김홍집내각이 시작되면서 갑신정변 연루자들을 사면하게 되기에 윤치호도 1895년 중국에선 결혼한 마노라 부인과 함께 귀국했다.
 
     고종 황제는 10여년만에 귀국한 윤치호에게 의정부 참의를 시작으로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의무협판, 학부협판 등의 중직에 봉직케 하며, 내각이 무너지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세력이 팽창하면서 고종은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민영환을 수행하여 참여하게 했다. 대관식에서 돌아온 윤치호는 동년 7월 2일  뜻을 같이하는 서재필과 30여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독립렵회’를 창설하여 미국에서 배우고 결심한 바를 조국 땅에서 시도하며 ‘독립신문’ 발행, ‘독립문 건립’ 독립을 위한 각가지 강연과 국민계몽의 운동을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진행했다. 그러나 수구세력들의 완강한 반대는 이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할 정도이기에 서재필은 2년 여만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고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사장의 책임을 맡아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사이 고종은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로 고치고  1897년을 광무 원년으로 하며 국내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며 새로운 독립제국으로의 새 체제를 가추기 시작하니 이는 국민 여론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런 외형상의 변화와 조정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경복궁이 아닌 겨운궁에 머물고 있는 것은 황제가 일본이 무서워 러시아를 비롯한 미국이나 영국 등 경운경을 둘러싼 외국공사관들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으니 나라의 형세가 어떤 지경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정황에서나마 윤치호는 황제의 비호하에 지금의 서울 시장인 한성부 판윤 등의 직임으로 독립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1904년에는 외부협판에 임명되어 하와이의 한인 이민들의  상황을 살피려 다시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윤치호가 그의 ‘한인경황’에서의 하와이의 한인 노동 이민자들에 대한 보고는 아주 상세히 그 실상을 전하며 비록 그들이 고생은 하고있으나 고난의 당시 한국의 정황을 고려하며 상당히 긍정적이며 성공적으로 평가했다. ‘대한일보신보’ (1906/11/16-17). 이 보고의 시기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한국이 일체의 국권과 외교권을 일본에게 빼았긴 직후인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윤치호는 이런 일제하 친일 정부의 외무대신으로 하와이를 시찰하게 되기에 망국에서나마 조국을 위한 차선책일지 모르나, 못나고 미개한 약소국민의 애환어린 한소리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 일제의 장장의 앞날을 생각하면 윤치호의 신세는 그의 운명을 예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이제 그의 화와이 이민 보고를 끝으로, 윤치호의 망명 유학생활 중 5년여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이어간 그의 생의 이야기를 여기서 일단 마무리 하며 그 보고의 요지를 살펴보자: 우리 국민의 하와이 이주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본도 20여년 세계 각국에 수십만이 이민하며 하와이에만 7만이나 되고 본국에의 송금이 년간 1200여만에 달한다. 하외이 이민은 땅수질기후가  한국인의 농사에 적합하고 노동으로 근면하게 하며 신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혀 주기에 유익하여 “한민실엄학교”라 칭할만 하기에 이민을 금할 필요가 없다. 이민 노동의 어려움을 아나 하와이는 새로운 문물이나 농사방법 등의 거대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기에 이를 잘 배워 우리 백성을 연마하며 한국의 자연황경과 자원을 개발하여 몇 배의 소득을 올리는 계기가 되게 하자며 이민의 의미를 아주 높이 평했다. 본국에서는 일제의 압제로 어쩔 수 없는 좌절의 상태나 미국 땅 하와이에서나마 새 이민자들이 긍정적인 자세로 힘든 노동이민에 임하여 기우는 조국의 희망이 되게 하고 싶은 그의 소원이 함께 담긴 보고 같다. 그나마 하와이의 한국이민은 겨우 3년여 지속하다가 일본의 반대로 중단되고 말기에 이러한 큰 꿈도 짓밟히고 마나 이미 온 이민자들이 남아 20여년 미국 땅을 먼저 밟은 한국의 선각자들이 있어 이들이 합류하게 되기에 바로 이런 재미동포들이 조국을 위한  새 힘과 역사를 이루게 된것이다. 다음에 이후 계속된 망명 유학생들로 인해 미국에서 전개된 한인사회의 발전을 더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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