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7_芳園(李盛粲)

원로 생태학자 고 김준호 서울대 명예교수 행장 (자서전)

忍齋 黃薔 李相遠 2024. 3. 6.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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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3일 작고하신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절친인 생물학자이자 생태학자 김준호 서울대  명예교수가  1년 3개월 뒤인 2019년 7월 14일 작고하셨다.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故 김준호 명예교수는 공주사범대 교수를 지내다가 서울대 문리대  생물학과 교수로 부임해 제자를 양성했다.

 

김준호 박사는 한국식물학회장과 한국생태학회장, 한국생물과학협회장, 한국환경교육협회 부회장, 환경운동연합 고문을 지냈다. ‘현대생태학’, ‘고급생태학’,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 등의 저서를 남겼다. 대통령 표창과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또 지난 2014년 평생 수집한 생태학 관련 문헌 22종 1485권을 국립생태원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곳에 생전에 김준호 박사님이 직접 작성하신 행장을 올려두니 김준호 박사를 기리고 추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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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한 가계 (제1회)  -  제1장 핏줄과 탯줄

 

나는 1929년 9월 2일 (음력 7월 29일) 12시 경에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면 아산리 110번지에서 아버지 김기완(金基完) 씨와 전주 이씨(全州李氏) 근생(根生) 여사의 사남이녀 중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호적상으로는 1929년 11월 29일로 통용하고 있다. 그 까닭인즉 1920년대의 높은 유아사망률로 말미암아 출생신고를 늦게 하여서이다. 어머니께서 이름을 지으시고 낳은 지 3개월 뒤에 면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하셨다고 한다.

 

나의 생일은 결혼 전까지 음력으로, 결혼 후부터 양력으로 지내고 있으며, 사회에서는 출생신고한 날로 쓰고 있으니 생년월일을 세 개 가진 셈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음력 생일을 맞아본 적이 없었지만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바로 그 날이 내 생일이라 하여 푸짐하게 생일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상산 김씨(商山金氏) 영중추공파(領中樞公派) 29세 손이다. 상주(尙州)를 본관으로 1세이신 휘(諱) 수(需) 공이 시조(始祖)이며, 11세 손인 죽헌(竹軒) 운보(云寶) 공이 전남 장성에 오신 뒤 15세 손인 첩정(疊汀) 익률(益嵂) 공이 약 450년 전에 아산리에 오셔서 삶의 터전을 마련하셨다. 조선시대의 호조참판(戶曹叅判)이신 첩정 공께서 어떤 이유로 장성에서 아산리로 오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첩정 공의 아버지이신 수준(守濬/ 14세손) 공께서 1655년에 임피(臨陂) 향교의 훈장을 지냈다는 짤막한 기록이 발견되고 있을 뿐이다. 이 기록으로 보아 그 어른께서는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아산리가 살만한 고장으로 생각되었는지도 모른다. 첩정 공부터 철견(哲堅/ 16세손), 경립(敬立/ 17세손), 수징(守澄/ 18세손), 종설(宗設/ 19세손) 및 상의(尙毅/ 20세손) 공까지는 조선시대에 서반(무과)에서 꽤 높은 벼슬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21세손부터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아산리 농촌에 묻혀 살게 되었다.

 

우리 가계(家系)는 자손이 매우 단출하게 이어져왔다. 나의 8대 조부이신 석삼(錫三/ 21세손) 공은 태장(台章)과 우장(禹章)의 형제를 두셨는데 장자인 태장 공은 자손이 5대 독자로 내려오다가 그만 절손(絶孫)되고, 차자인  우장 공은 6대를 독자로 내려오다가 할아버지 대에 와서 비로소 3형제를 두셨다. 가계가 마치 풍전등화처럼 150~200년간을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온 셈이다. 따라서 나의 가까운 일가는 사촌뿐이고, 나머지는 훨씬 멀리 떨어진 16촌들이다.

 

그런데도 나의 직계 선조님들은 몇 분을 제외하고, 장수한 분이 많으셨다. 사람이 70세 이상의 수(壽)를 누리기가 어려웠던 시대에도 우리 족보에서 생(生)과 졸(卒) 년의 기록이 확실한 8대 조부모님까지의 열여섯 선조님에 대하여 수명을 조사한 결과 여섯 분이 70세 이상의 수를 누리셨고, 일곱 분이 회갑을 맞이하셨으며 세 분이 회갑 전에 돌아가셨음을 알게 되었다. 이 선조님들은 17세기~20세기초에 걸쳐 생존하셨던 분들로 그 때가 전염병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선조님이 회갑이나 수를 누리신 것으로 보아 유전적으로 장수한 가계라는 생각이 든다.

 

6대 독자였던 할아버지 용선(容宣/ 호적 이름 益瑞 호는 愚石․ 27세손) 공은 1855년 7월 3일(음력)에 출생 하시고 1931년 3월 14일(음력)에 별세하셨으니 76세의 수를 누리셨다. 탐진 최씨(耽津崔氏)이신 할머니 대선(大善) 여사는 1858년 5월 6일(음)에 출생하시고 1946년 9월 4일(음)에 별세하셨으니 88세의 수를 누리셨다. 이처럼 조부모님은 그분들의 시대에 장수하신 셈이다.

 

조부모님이 출생하신 시대는 조선의 왕권이 쇠약해지고 국정이 문란하기 시작하던 철종(哲宗)조였다(조부님은 철종 6년, 조모님은 9년에 출생). 철종 조 12년(1862)에 익산, 부안, 금구 등을 비롯한 삼남 각지에서 민란(民亂)이 드세게 일어났었다. 조부모님께서 별세하신 시대는 일본의 식민정책이 뿌리를 내렸거나 8․15 광복 후의 혼란기였다. 따라서 그 어른들은 편안한 날 없이 일생을 사셨으리라고 짐작된다.

 

내 어릴 적 할아버지 대상(大祥) 때 소머리를 사다가 제수를 준비하던 어른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이때 내 나이 네 살. 이 밖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으나 철들어 작고하신 할머니의 기억은 생생하다. 근엄한 모습에 냉정한 성품이어서 여느 할머니들처럼 손자들을 귀여워하시지는 않은 듯하였다.

 

조부모님은 삼남이녀를 두셨다. 곧 기완(基完), 기현(基炫), 기태(基泰), 장녀(성명미상; 옥산면 사정리의 고덕술 씨와 결혼하였으므로 흔히 사정리 고모라고 불렀음), 복례(福禮/ 성산면 도암리 원유당 씨와 결혼하고, 이혼한 후 발산리 최 씨에게 개가하였으며 젊어서 요절하였다고 함)의 다섯 남매를 장성시켰으니 이때부터 우리 문중은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부모님과 형제들 (제2회) - 제1장 핏줄과 탯줄

 

나의 아버지 기완 씨는 자(字)를 성옥(聲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880년 3월 17일(음)에 출생하시고 1929년 2월 28일(음)에 별세하셨으니 49세로 단명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1886년 6월 12일(음)에 출생하시고 1958년 1월 7일(음)에 별세하셨으니 72세의 수를 누리셨다. 아버지가 출생하신 시대는 고종(高宗) 16년이었다. 이 해는 일본인들이 강권으로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1876년)을 체결한 지 4년 뒤이다. 따라서 출생하실 때에는 이미 나라에 짙은 먹구름이 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드넓은 호남평야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나셨지만 일본인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빼앗기고 그들의 소작인으로 되어 농사를 짓다가 마지못해 목수가 되어 도편수로 활동하셨다. 그러던 중 나포면의 어느 부잣집 2층집을 짓다가 낙상한 것이 화가 되어 별세하셨다고 한다. 49세의 짧은 삶이었다.

 

내가 철들어서 어머니와 큰 누님으로부터 들은 아버지는 둘째 형이 아버지의 체격을 닮아서 균형이 잡히고, 집에 있는 물건을 남들에게 베풀려고 하였으며 밤에 집 주변에 불을 켜서 밝게 밝히도록 하였고 술을 좋아하셔서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쾌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키가 크고 날씬한 미인형 체구에 소박하고 조용하며 인자한 성품이셨지만 일생을 하루같이 과음하는 남편의 뒷바라지와 자식과 손자를 키우느라 편한 생활 한번 못하신 분이다. 어머니가 고생하며 사신 모습은 나의 무딘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어머니는 무남독녀(無男獨女)로 태어나 14살의 어린 나이(1900년)로 시집을 오셨고, 그때의 아버지 나이 21세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결혼하시기에 앞서 호남지방에서는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1894년)이 일어나서 사회가 불안하였고, 조혼(早婚)의 풍습에 젖어 외가에서는 귀여운 외동딸을 서둘러서 출가시켰는지도 모른다. 발산리(안터)에서 사시던 외할아버지는 조카를 양자(養子)로 들여 대를 이었다고 한다. 양외사촌은 함열(咸悅)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어머니께서 별세하신 후 외가와의 왕래가 끊겨 소식을 모르고 있다. 어린 나이에 시집온 어머니는 남다른 성품을 가진 할머니와 술을 즐기시는 아버지를 받드시느라 적지 않은 애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 두 분 사이에서 태어난 4남2녀가 우리 6남매이다.

 

큰누님 계월(桂月)은 1908년 4월 8일(음)에 출생하여 회현면 우동리의 문인섭(文仁燮) 씨에게 출가하여 2남2녀(順女, 福禮, 炳牽, 炳厚)를 낳아 기르고, 1986년 4월 14일(음)에 별세하시니 78세의 수를 누리셨다. 나는 한국전쟁 중에 이 큰누님 댁에서 무려 1년 반 동안 피난생활의 신세를 졌을 뿐만 아니라 각급 학교에 입학할 때마다 큰매부로부터 신입생 등록금을 융자받는 신세를 지곤 하였다.

 

큰형님 수근(壽根/ 족보 이름 根鎬)은 1913년 9월 18일(음)에 출생하여 회현면 군률리의 담양 전씨(潭陽田氏)인 성녀(性女) 여사와 결혼하여 4남3녀(良源, 源球, 明子, 英子, 來源, 英淑, 壯源)를 기르고, 1973년 7월 7일에 별세하셨다.

 

큰형님은 명석한 두뇌로 정확한 사리판단은 물론 수려한 필력을 갖추시고 손재주도 좋은 분이었다. 나보다 16년 연상인 큰형님은 아버지 없이 자란 나에게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다. 내가 유년시절부터 오늘날까지 마음속에 온유(溫柔)한 동기애(同氣愛)를 간직할 수가 있었고 대학교육까지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큰형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려운 일을 당하면 큰형님의 슬기로우셨던 조언이 아쉽기만 하다.

 

큰형님은 당신이 철이 들기도 전인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뒤에 많은 식솔(食率)과 몰락한 가재(家財)를 물려받아 천신만고 끝에 집안을 중흥(中興)시킨 분이다. 누이와 동생들을 혼인시키고, 두 동생에게 새집을 지어 따로 분가시키며, 한 동생에게는 대학교육까지 시킨 것이다. 나는 물론이고 둘째와 셋째 형님도 큰형님의 가르침에는 기꺼이 따랐고, 그 분부에는 무조건 복종하며 살았다. 이러한 질서가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운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이렇게 된 데는 큰형수님의 내조와 그 음덕이 컸다. 늦둥이로 태어난 내가 늙으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기 어려웠을 때는 큰형수님은 나에게 어머니의 구실을 두루 해주셨다.

 

둘째 누님인 계선(桂仙)은 1917년 12월 25일(음)에 출생하여 전주인 이반석(李盤石) 씨에게 출가하여 4남3녀(鳳鉉, 春培, 根培, 玉禮, 陽文, 英順, 興培)를 낳아 기르셨다. 둘째 누님은 우리 집 뒷산 재너머의 성산면 창호리에 사셨으므로 내가 어렸을 때 자주 놀러가곤 했다. 익산군 팔봉면 석암리의 과수원 경영을 하던 64년부터 73년까지 10년간이나 나와 둘째 누님은 고락을 함께 하였다.

 

둘째 형님인 수봉(洙鳳)은 1921년 5월 10일(음)에 출생하여 김해 김씨(金海金氏)인 우영(雨榮) 여사와 결혼하여 4남1녀(文源, 貞子, 洪源, 剛源, 炯源)를 낳아 기르셨다. 둘째 형님은 대단히 건강하셔서 고희를 훨씬 넘긴 지금도 젊은 사람 못지 않게 활동하신다.

 

둘째 형님 내외분의 두터운 정분은 주변 사람들을 감탄시키고 있다. 한 예를 들면, 둘째 형수님이 뇌일혈로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형님은 2년 반을 하루같이 영양공급과 물리치료와 배설물 처리를 손수 도맡아 하셨으니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그 보람도 없이 둘째 형수님은 1996년 12월 4일(음)에 73세의 생애를 마치셨다. 그 후에도 둘째 형님은 부인의 묘소 앞에 꽃잔디와 화초를 심는 등 애틋한 정을 나누고 지내신다. 이러한 일들이 자손들의 눈에 비쳐서 화목한 집안이 이루어지는 듯하다.

 

셋째 형님인 규호(奎鎬)는 1925년 1월 7일에 출생하여 평강 채씨(平康蔡氏)인 정희(貞嬉) 여사와 결혼하여 2남4녀(貞淑, 貞禮, 仁淑, 鐘源, 京源, 賢淑)를 기르셨다. 천성이 부지런한 셋째 형님은 모든 일을 스스로 풀어나가는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이재술도 뛰어나서 무에서 시작하여 남의 도움 없이 꽤 많은 재산을 모으는 데 성공하였고, 농촌에서 살면서 두 아들과 한 딸에게 대학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남에게 자선(慈善)하는 미덕도 지니고 있다.

 

앞에서 말한 세 형님들은 모두 근면(勤勉)하고 사행심(射倖心)이 없으며 주색(酒色)을 멀리하고 원리원칙을 지키는 삶을 살았기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살고 있다.



축복 받지 못한 출생 (제3회) - 제1장 핏줄과 탯줄

 

나는 어머니가 43세 때 늦둥이로 태어났다. 요즈음의 출산연령으로는 부끄럽다고 할 연세이다. 더구나 나는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던 것이다. 아버지가 2월 28일에 돌아가시고 나는 7월 29일에 낳았으니 정확히 5개월 1일의 유복자인 셈이다. 낙상한 후 병세가 악화하여 비명(非命)으로 돌아가신 남편을 여의고 거기다가 만산(晩産)으로 유복자를 낳았으며 슬하에 어린 다섯 자매가 이미 있었으니 어머니께서는 나의 출산이 죽기보다도 저주스러웠을 것이다.

 

 

  ▲ 어머니의 모습(56세 때)

나의 출생은 축복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내가 철이 든 다음 둘째 숙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기저귀에 싸인 영아가 엎드려 놓여졌더라고.

 

내가 출생한 1929년경에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정착기에 들어가 조선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한 때였다. 더구나 우리 아버지는 농사에 관심이 적은 목수인데다 비명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재산이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날 당시 우리 집에는 1,000평 남짓한 소작 농지가 있을 뿐이었다. 이러니 나의 출생이 축복받을 수 있었겠는가?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처럼 어머니는 우리 6남매를 모두 사랑했지만 그 중에서도 나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셨다. 병약한 나는 일곱 살 되던 해까지 어머니 젖에 매달려 있었고, 그 달콤한 맛과 아늑한 품을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잊지 못하였다. 형님들의 사랑도 지극하였다. 그 사랑을 낱낱이 글로 표현하기에는 나의 글재주가 너무나 모자라서 한스럽다. 아버지의 엄격한 훈계 없이 자란 내가 삐뚤어진 심성을 갖지 않게 된 연유는 어머니와 형님들의 사랑에서 왔다고 믿는다.

 

나는 성장한 뒤 유복자로 태어난 운명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아버지가 계시는데 왜 나는 없을까. 이것은 나의 숙명이다. 그러니 아버지 있는 친구들보다 오히려 잘 살고 그리고 바르게 살아야지 하는 다짐을 몇 천 번이나 하며 살았다. 내가 네 아이의 아버지가 된 뒤에도 혹시 내가 아버지로부터 배우지 못한 탓에 아이들에게 잘못 가르치지나 않는지를 스스로 생각하고는 하였다.

 

중학교 때「뉴우튼 전기」를 읽으면서 만유인력과 광학 등을 발견한 근대과학의 원조인 아이삭 뉴튼(Isaac Newton, 1642~1727)이 유복자임을 알아 위안을 받기도 하면서 나에게도 위대하게 되는 길이 열려 있음을 깨달아 희망에 찬 일이 있다.

 

내 고향에서는󰡐유복자는 유복녀와 결혼해야 잘 산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결혼 연령이 되었을 때 유복녀를 중매서겠다는 혼담이 자주 있었던 모양이지만 나는 공부에 마음이 쏠려서 유복녀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내가 죽산 박씨(竹山朴氏)인 박시현(朴始鉉)과 결혼하여 1남3녀(蕙源, 貞源, 珖源, 紬源)를 두고, 아들과 딸들이 낳은 친 외손이 모두 7명으로 늘었다. 나의 가족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쓰려고 한다.

 

여기에서 나의 부모님 슬하에 둔 친손과 외손 수를 셈하여 본다. 손자 17명, 손녀 16명, 모두 33명이며 여기에 우리 6남매를 합하면 39명의 대가족이 이루어졌다.

 

나의 중부(仲父)인 기현(基炫) 씨는 어렸을 때 판득(判得)이라는 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분의 처가 마을 이름을 따서 ‘사랭이작은아버지’라고 불렀으며 이 택호는 우리에게 친숙감을 안겨 주었다. 고종 27년인 1890년 10월 24일에 출생, 1964년 6월 28일에 별세하셨으니 74세의 수를 누리셨다.

 

큰숙부님은 평강 채씨(平康蔡氏)인 예묵(藝黙) 여사와 결혼하여 1남6녀(順禮, 貞禮, 貞姬, 貞嬉, 貞鎬, 貞愛, 瑞愛)를 기르셨는데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세 손자를 두어 집안이 번창하게 되었다. 정호 사촌과 나는 동갑이고 초등학교를 함께 다녀서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자주 둘째 집 사랑방에서 숙부님, 정호 그리고 내가 함께 자곤 하였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서로 하는 일이 달라서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소원하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큰숙부님은 목수가 주업이고 농사를 부업으로 하셨다. 큰 집을 짓거나 아름다운 사찰을 지으며 장롱과 같은 목공일에도 능하셨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정호 사촌과 함께 성산면 산곡리 역말에 가서 목재에 먹줄을 튀기고 짜구로 다듬어 기둥을 세우며 상량을 올리는 모습을 구경하였고, 또 은적사(군산시 소룡동 소재)를 증축할 때 기둥을 세우고 봉황을 기둥 위에 장식하며, 목수들을 총 지휘하는 도편수로서의 큰숙부님을 뵌 적이 있다.

 

노년에는 한복에 갓을 쓰고 미투리나 나막신을 신는 멋을 부리기도 하셨고, 나의 결혼식에서도 전통적인 의관을 갖추시고 사진을 찍으셨다.

 

작은 숙부인 기태(基泰) 씨는 어렸을 때 억쇠(億釗)라는 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우리들은 흔히 ‘박으메작은아버지’라는 택호로 불렀다. 고종 30년인 1893년 4월 29일에 출생, 1959년 8월 13일에 별세하셨으니 향년 66세로 생을 마치셨다. 전주 유씨(全州柳氏)인 소방(小芳) 여사와 결혼하여 아들 딸을 많이 낳았지만 그들이 단명하여 두 아들(京鎬, 寬鎬)만을 장성시켰다.

 

둘째 숙부님은 쟁기를 잘 만드는 목수였다. 우리 고을의 쟁기는 도맡아서 만들었고 또 수리를 잘 하셨다. 그래서 그 댁의 헛간(작업장)에는 쟁기의 성에(쟁기 술의 윗머리에서 앞으로 길게 뻗은 나무토막) 모형이 걸려있었다.

 

경호 사촌은 20대 초반에 일본군속으로 남양군도에 끌려가서 생사의 소식이 끊겼고, 나보다 한 살 위인 관호 사촌은 국민학교 일학년 선배였으므로 매우 친하게 지냈다. 그는 손재주가 좋아서 모형 글라이더를 잘 만들어 학교 대항 시합에 나갔고, 소년비행학교에 뽑힐 만큼 체격이 좋았지만 폐결핵으로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였다.



아산리 (제4회) - 제2장 고향산천

 

나는 고향을 무척 좋아한다. 고향 마을은 순수한 농촌이었고 그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고희를 넘긴 요즘에도 옛날 기억이 되살아난다. 내가 태어나서 소년 시절을 보낸 아산리(峨山里)는 아득한 옛날의 삼국시대에 마한(馬韓)에 속했고, 백제시대에 시산군(屎山郡)에 속했던 땅이다. 약 1,5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지명이 바뀌고 행정구역이 변하여 오늘날에는 군산시에 속하고 있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경덕왕 때 시산군을 병합하여 임피군(臨陂郡)으로, 이웃에 있던 백제의 마서량현(馬西良縣)을 병합하여 옥구현(沃溝縣)으로 이름을 바꾼다. 세월이 흘러 고려 때에는 옥구현을 임피군으로 합병하고 그 뒤 다시 임피현으로 강등하여 현령(縣令)을 두어 다스리게 한다. 고려가 쇠퇴하던 1356년 (공민왕 5년)에는 금강유역에 있는 조운(漕運)의 중요성을 관할하도록 군산에 진포(鎭浦)를 둔다. 이때부터 군산은 이 고장의 경제 전진 기지로 발돋움하는 싹이 튼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인 1397년에 태조(6년)는 군산열도(현 고군산군도)에 있던 진영(鎭營)을 군산포에 옮기고, 용안현(현 익산시 용안면)에 있던 득성창(得成倉)에서 군산창(群山倉)을 분리하며, 임피현에서 옥구현을 분리시킨다. 이 때 우리 마을은 임피현 서삼면(西三面) 아산리에 소속된다.

 

이렇게 해서 약 500년의 세월이 지난다. 조선의 왕권이 쇠미해지는 1895년(고종 32년)에 임피현과 옥구현은 다 같이 군으로 승격된다. 일제의 강제합병 후인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임피군이 폐지되고 그 땅의 대부분이 옥구군에 통합되는데 아산리는 와동리와 북일면의 고봉리 일부를 병합하여 옥구군 개정면에 편입된다.

임피군이 옥구군으로 통합된 까닭은 1899년에 개항한 군산항을 거쳐 일본으로 쌀을 반출하려는 일본의 식민 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옥구군 관내에 있던 군산부가 49년에 군산시로 승격하여 떨어져 나갔지만 96년에 군산시가 오히려 옥구군을 통합함으로써 이번에는 아산리가 군산시에 속하게 된다.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임피(臨陂) 읍내에는 원님(守令)이 살았고, 아전(衙前)이 득실거렸는데, 아전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앳재를 넘어와서 죄진 사람을 잡아갔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을이 옥구현이 아닌 임피현의 땅에 속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산리의 본래 이름은「애터」였다. 옛날에 소금장수들이 옥구현에서 마을 뒷산의 고개를 넘어 임피현으로 다닐 때 너무 험하고 지루해서 애타서 죽은 데에서, 「애타 마을」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다시 애터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산리라는 이름은 일제의 강제합병 후 마을 이름을 한자로 바꿀 때 뒷산이 칙칙하여 뫼뿌리 아(峨)에 뫼 산(山)을 붙여 아산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아산리에는 여러 가지 유서 깊은 지명(地名)이 남아 있어 어렸을 때의 기억을 새롭게 한다. 아산리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 애터가 내가 태어난 마을이고, 지금의 원아산(元峨山)이다. 애터에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본뜸에 15채, 건너뜸에 6채. 본뜸 맨 위에 있는 채씨 문중의 재사(齋舍)를 제외하고 모두 초가집이었다. 그 재사는 네 귀가 번듯한 조선기와집이었는데 1950년대에 남에게 팔려 아깝게도 헐려 버렸다.

 

애터의 앞에는 평질메가 있고, 그 남쪽에 방죽굴이 있다. 나의 15대조인 익률 공이 처음으로 오신 곳이 방죽굴이었다. 방죽굴을 중심으로 우리 집 종산(宗山)이 있어 산소가 흩어져 있었다. 애터와 방죽굴 사이에 있는 애굴에 익률 공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애터의 동쪽에는 가뭄에 마르지 않는 옹달샘, 곧 앳굴샘이 솟는다. 애터의 서북쪽 구릉 너머에는 쥐실이라는 마을이 있고, 쥐실의 동쪽에는 쇠죽굴이라는 마을이 있어 한 때 둘째 숙부님이 그곳에서 사셨다.

 

애터에서 북쪽으로 광굴구렁을 넘으면 광굴 마을이 있고, 또 그 북쪽에는 와동(瓦洞)이 있다. 그 북쪽에는 샛고봉 마을이 있고 샛고봉의 서쪽 마을이 재말이다. 한편 애터 서남쪽에 있는 애터방죽 건너편에는 엉청굴〔億千洞〕이 있다.

 

애터의 동북쪽에 고봉산이 솟아 있고, 정상에서 남쪽 능선을 내려오면 앳재가 나타난다. 애터와 방죽굴의 앞을 남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골짜기를 냉정골이라 부르는데 여기에서 흐르는 물이 냉정제(또는 애터방죽)에 모인다. 애터 뒤의 고봉산 기슭에 있는 골짜기를 비승굴이라 하며 평강 채씨의 묘소가 있는데 여기가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고봉산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능선 중에서 광굴 동북쪽에 있는 산을 서당메라 부르는데 여기에는 장수의 지팡이 구멍과 오줌 눈 자국이 남아 있는 장수바위가 있고, 샛고봉 동쪽에 있는 산을 동살메라고 부른다.

 

논에도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아산리 서쪽에는 역마배미가 있었는데 아마 이 논은 옛날에 역토(驛土)로서 역에 세미(稅米)를 바치는 논이었을 것이다. 와동 남쪽에는 통사논이, 그 서남쪽에는 질때배미가 있다. 샛고봉의 서남쪽에는 차다리논이, 그 동쪽에는 방자무논이 있다. 샛고봉과 잿말 사이에는 지우논이, 와동과 엉청굴 사이에는 배쪽 같이 생긴 배쪽다리논이 있다. 이밖에도 1년 내내 물이 잠겨있는 무논, 장마 때 물이 차이는 둠벙배미, 물길이 나빠서 볍씨를 직파하던 파종배미 등이 있다. 이들 이름 있는 논은 지금도 옛날과 다름없이 농사를 짓고 있다.

 

이밖에도 고봉산의 남쪽 방향 능선을 내려오면 80여 년 전에 세워진 지장암(地藏菴)이 있다. 이처럼 아산리에는 수많은 옛 지명이 남아 있지만 젊은이들이 그 이름을 쓰지 않아 자칫 사어(死語)가 되어 잊혀질까 염려되어 기록해 놓는다.

 

다음에 나의 어렸을 때 동심(童心)을 길러준 아산리의 중요한 장소를 회상하면서 기록하기로 한다. 이 장소들은 옛날의 모습이 많이 바뀌어서 아쉽기만 하다.

 

고봉산 (제5회) - 제2장 고향산천

 

고봉산(高峰山/ 해발 152m)은 애터의 동북쪽에 솟아 있다. 이 산정에서 뻗어 나온 100미터 높이 안팎의 구릉이 서북쪽과 남쪽으로 새 날개처럼 펼쳐져서 아산리를 감싸고, 서쪽만이 들판(무논)으로 열린다. 이 들판은 개정들을 거쳐 망망대해 같은 호남벌에 맞닿는다.

 

고봉산은 개정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개정면 언저리의 초등학생들은 봄 가을에 소풍을 오고는 하였다. 고봉산 위에 올라가면 금강과 군산 시가지 그리고 장항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호남평야의 개정들이 시원하게 열려 있고 줄을 그은 듯한 전군도로와 군산선 철길이 보인다. 남쪽으로 저 멀리 만경강 줄기가 희미하게 빛난다. 심하게 가뭄이 드는 해에는 개정면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보리짚을 어깨에 메고 풍악을 울리며 고봉산에 올라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낸다. 나는 1939년 여름에 지낸 큰 기우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봉산의 8부 중턱에는 이 고장에서 보기 드문 품위 있는 ㄱ자 모양의 기와집이 있다. 그 정면에는 낙영당(樂英堂)이라는 현판이, 조금 높은 대청 위에는 부양류(扶陽樓)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그보다 높은 장소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산앙서원(山仰書院)이 세워져 있다. 어렸을 때 이들 유적 옆에 함석지붕의 절이 있어 목탁과 바라소리가 애터까지 들려오고는 하였다. 이 절은 낙영당의 부속건물이었던 것이다.

 

고봉산의 이 유적들은 100여 년 전에 고봉산에서 일어난 아산리의 근대사를 간직하고 있다. 유적의 내력은 1900년 전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봉산에 은거하며 이 고장의 유생들을 모아 교육에 열을 올리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연재 송병선(淵齊 宋秉璿) 공이다. 연재 공은 행실과 경륜을 높이 쌓아 일찌기 고종황제로  부터 좨주(祭酒)로 기용된 뒤 서연관(書筵官), 참판(參判) 및 대사헌(大司憲) 등 세 번이나 요직을 제수(除授)받았지만 사양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연재 공은 고봉산을 근거지로 하여 이 고장의 유생(儒生)들을 모아놓고 강론하였다. 나는 어렸을 때「송살림(宋翰林의 사투리)이 고봉산에서 선비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 제자들이 뜻을 모아 낙영당과 부양류를 짓고 공부하는 터전으로 삼았던 것이다.

 

▲ 고봉산 산앙서원 입구

마침내 1901년 봄에 연재 공이 주동하여 전국의 백일장백(白日場)을 고봉산에서 개최하여 이 고장 유생들의 경륜을 높이게 되었다. 이때 고봉산 일대는 전국에서 모인 유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흰옷을 입은 유생들로 고봉산이 흰색으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아산리 사람들은 고봉산으로 물 한 지게를 지고 오르면 술 한 지게를 가지고 내려왔다고 전한다.

 

이 고장에서는 연재 공을 유현(儒賢)으로 알고 있지만, 한국의 근대사에서 그는 애국지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왜냐 하면 일본의 야욕이 노골화되어 강압적으로 을사오조약(1905년)을 맺게 되자 그 슬픈 소식을 들은 연재 공은 서울의 궁궐 앞에 나가 "매국노들을 엄벌하고 오조약을 철폐하라."고 임금에게 청원하여 고종황제는 소청을 받아들이겠다고 언약하였다. 그러나 장례원경(掌禮院卿)인 남정철이 "물러가서 며칠간 기다리시오."라고 타일렀다. 이때 경무사(警務使)인 윤철규가 교자를 대령시킨 뒤 "일본 헌병이 상소를 철회하라고 강압할지도 모르니 타시오."라고 속였다.

 

연재 공이 교자에서 내려보니 남대문 밖이었고, 곧 일본 헌병이 그를 강제로 기차에 태워 대전역에 하차시켰다. 공은 고향인 회덕에 돌아와 고종황제와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현재 이 고장의 유생들은 산앙서원에서 공에게 제향을 드리고 있다. 이처럼 고봉산에는 연재 공과 얽힌 사실(史實)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의 고봉산은 숲이 마을 이름인 아산(峨山)에 어울릴 만큼 우거져 있었다. 사나운 맹수는 없었지만 여우가 살아서 여우 소리를 들으며 새벽에 눈을 뜨곤 하였다. 그런데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44년에 일본군이 미군의 적전 상륙에 대비하여 고봉산에 벌집처럼 땅굴을 파고 그 받침목으로 굵은 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렸다. 그 이후 약 10년 동안 보슬비만 내려도 홍수가 나서 마을 앞의 샛뚝이 터지고 모래와 자갈이 논을 쓸어 덮는 천재(天災)가 계속되었다.

 

다행히 50년대 중반에 이승만 대통령이 전군도로를 지나다가 고봉산의 헐벗은 꼴을 보고 나무심기를 독려하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군청에서 특별히 사방(砂防)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녹화되었다. 지금은 고봉산과 그 주변의 구릉지에 나무가 빼곡하고 임상 식물이 우거져 함부로 걸어다닐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여기 저기에 고사리가 무성하고 지하수위가 높아져서 나무가 잘 자라며 마을 앞의 개울 폭이 좁아졌는데도 홍수의 걱정이 사라졌다. 고봉산의 우거진 숲은 사람이 숲을 가꿈으로써 천재를 다스린 성공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애터방죽과 평질메 (제6회) - 제2장 고향산천

 

애터 앞에 있는 애터방죽(일명 냉정제)은 냉정골의 소유역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저수하였다가 농번기에 이용하는 작은 저수지이다. 이 방죽에는 봄에 두꺼비가 모여 기다란 동아줄 같은 알을 낳는다. 얼마 후 그 속에서 새까만 올챙이가 나오고 관개한 논물에 휩쓸려서 못자리나 벼논을 헤엄쳐 다닌다. 그런데 지금은 두꺼비가 모이지 않는다고 한다.

 

애터방죽에는 최호(崔湖/ 1532~1597) 장군에 얽힌 설화(說話)가 전해지고 있다. 곧 이무기(용이 오르다 떨어진 상징적인 동물)가 애터방죽과 거산방죽(통사리) 사이에 뚫린 지하굴을 왕래하면서 방죽 둑에 매어 놓은 소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최호 장군이 무술 연습 삼아 활로 이무기를 쏘아 죽여서 우환을 없앴다는 것이다.

 

방죽 둑은 어림잡아 10미터 높이이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큰 역사(役事)를 이룬 곳이 애터방죽일 것이다. 어느 시대에 이 방죽을 처음 만들었는지는 고증할 문헌을 찾지 못하여 애석하기만 하다. 앞의 설화로 미루어 애터방죽은 이조시대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치수(治水)나 농경(農耕)에 과히 힘을 쏟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백제시대에 만들어졌던 벽골제(碧骨堤/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소재)와 같은 시대의 치적(治績)으로 이 방죽도 축조되었으리라.

 

애터방죽은 아산리의 풍광을 아름답게 가꾸어 주며 어린이들의 정서를 길러주었다. 넘실거리는 깊은 물과 얕은 쪽 가장자리에 소담하게 자란 줄과 물위에 납작하게 잎을 띄운 어리연꽃과 물 속에 고봉산을 비치는 풍경은 한 폭의 동화 속 그림과 같다. 뒷재에서 넘어 흐른 안개가 방죽물에 깔리거나 방죽물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안개가 냉정골로 기어드는 풍광은 아산리의 경치를 빼어난 절경으로 만든다.

 

찌는 듯 더운 여름에는 이 방죽에서 멱을 감았다. 내가 애터방죽에서 배운 수영실력은 늘지도 줄지도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초겨울에 깔린 살얼음에는 행여나 물 속에 빠질세라 어른들이 접근을 엄금하였지만 한겨울의 두꺼운 얼음에는 자작의 썰매나 짝발의 스케이트 타기에 해 기우는 줄 몰랐다.

 

어느 해인가 장마 때 애터방죽 물이 넘쳤다. 여수구(餘水口) 위를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내렸다. 센 물살에 젖은 몸을 내맡기며 놀기에 바빴다. 나는 삽날로 내리는 물살을 가르며 놀고 있었다. 그런데 아차 삽을 잘못 놀려 옆 친구 무릎을 찍은 것이다. 친구의 무릎에서 피가 흐르고 내 얼굴은 새파랗게 질리고…. 이러한 쓴 경험도 애터방죽이 나에게 안겨주었다.

 

가뭄이 와서 물을 빼면 가리질로 물고기를 잡았다. 바쁜 농사철이라 밤에 모이도록 통문을 띄우면 마을 어른들이 제각기 가리를 들고 나왔다. 한 줄로 선 어른들은 소경이 지팡이 짚듯이 가리를 구정물 밑으로 질팡갈팡 내리꽂는다. 가리 속에 갇힌 물고기가 가릿살에 충돌하는 촉감으로 잡아낸다. 여기저기에서"잡았네!" 하는 큰 목소리의 외침이 들리고. 인해전술로 하는 원시적인 어로법(漁撈法)이긴 하였지만 온 마을의 단결된 축제임에 틀림이 없었다.

 

애터방죽의 빨래귀신 이야기 한 토막. 휘영청 달 밝은 어느 늦여름 밤에 내 또래의 친구들이 평질메에서 놀고 있었다. 애터방죽에서 우렁찬 빨랫방망이 소리가 들린다. 달빛에 보이는 방죽 언저리에는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다. 애터방죽에 얽힌 물귀신과 도깨비를 떠올리며 등이 오싹함을 느낀다. 방망이 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친구들이 용기를 내어 소리의 원인을 탐색하기로 뜻을 모은다. 한걸음 한걸음 방죽에 접근하니 소리의 진원지는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던 물문과 여수구 언저리임이 드러났다. 소복한 물귀신이 빨래를 한다는 생각에 머리끝이 쭈삣해진다. 그래도 한발 두발 접근한다. 빨래소리는 물문에서 나지만 물귀신은 보이지 않는다. 용기 백배하여 물문에 접근해보니 물문 구멍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 구멍을 막는 나무토막이 쇠고리에 매달린 채 앞뒤로 부딪치고 있지 않은가. 이 물문은 위에서 아래로 구멍을 통하여 흐르는 구조이고, 쇠고리에 매달린 나무토막을 상하로 움직여서 유속을 조절하도록 되어 있었다. 나무토막이 바로 빨래귀신일 줄이야 짐작이나 했을까? 과거 애터방죽에 얽힌 물귀신과 도깨비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 모를 일이다.

 

애터 앞의 넓은 평지에는 소나무 숲이 있어 애터마을을 어머니 품처럼 포근하게 가리고 있었다. 앞쪽의 적송은 아름드리로 크고 뒤의 해송은 20~30년의 어린 나무였다.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이 뚫려 있어 마을 사람들은 평질메(平道山)라고 불렀다. 천 평 넓이는 됨직한 평질메는 전주 유씨의 종산이어서 한 편에 잔디가 잘 자란 산소가 있다. 그런데 평질메라는 이름은 아직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평질메는 내가 어렸을 때의 놀이터였고 운동장이었으며 편안한 쉼터였다. 술래잡기, 자치기, 팽이돌리기, 공기, 연날리기, 야구 등 조무래기 친구들의 놀이가 여기에서 벌어졌다. 남의 집 종산인 줄도 모르고 평질메를 마을의 공유지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어른들도 평질메에 모였다. 마을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평질메는 회의장이 되었다. 명절 때마다 모였고, 농사일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모였으며, 풍년의 흥이 났을 때 모여서 풍악을 울리고 막걸리 사발을 돌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신명을 돋우었다.

 

가뭄이 극심할 때, 이웃집이 상을 당했을 때, 평질메에 모여 서로 걱정을 나누었다. 추석 무렵에는 젊은이들이 씨름 대회를 열었고, 멍석을 친 무대에서 신파극(新派劇)을 벌여 어른들을 즐겁게 하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쓴 큰 농기(農旗)를 흔드는 시합과 큰돌을 어깨너머로 넘어치는 힘겨루기를 벌이기도 하였다. 대동계(大洞契) 날에는 마을의 공유물인 차일, 사모관대, 원삼족두리, 가마, 농악기 등을 평질메에서 점검하였다. 정월의 망(望/ 1월 15일) 안에는 한 해의 무사태평과 풍농을 비는 고사터가 되었고, 여름의 보리타작과 가을걷이 때는 마을의 공동 탈곡장이 되었다.

 

여름의 김매기 때에는 점심 뒤에 소나무 숲 밑에서 일꾼들이 늘어지게 자면서 가마솥 더위를 식혔다. 그 옆에서 아이들은 공기를 굴리거나 다리를 자르고 머리를 돌린 풍뎅이를 땅바닥에 뉘어 놓고 뱅뱅 돌리는 재미를 보곤 하였다. 군산에 나들이를 가거나 힘겹게 앳재를 넘어 온 길손이 소나무 밑에 잠시 멈추며 땀을 식히는 곳도 평질메였다.

 

평질메는 고향에 대한 나의 상상을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을 한 해 앞둔 사범학교 1학년 때 여름방학이 되어 바르메구렁을 넘어 궁금했던 애터를 바라보는 순간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인상이 싹 가시고 말았다. 평질메의 소나무 숲이 삭발한 스님 머리처럼 까까숭이가 된 것이다. 마을의 회색 초가지붕과 울타리가 어설프게 드러나 있지 않은가? 아늑하였던 애터마을이 흉측한 몰골로 변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귀성의 인사를 하자마자 "왜 평질메 소나무를 비었대요?" 하고 여쭈었다. "일본사람들이 배를 맨들려고 그랬단다." 시무룩한 어머니의 대답이셨다.



고향의 옛자취 (제7회) - 제2장 고향산천

 

아산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몇 가지 증거를 가지고 유추해본다. 나의 큰형님(壽根)은 1960년대에 마을 뒷산에서 두 개의 마제석부(磨製石斧)를 주웠던 일이 있다(이들 돌도끼는 공주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여 보관되고 있다). 매끈하게 간 돌도끼는 겉모습으로 보아 신석기(新石器)시대 (또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임이 틀림없었다.

 

고고학(考古學)에 따르면 한국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시작하여 기원전 3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구석기(舊石器)시대의 유물인 타제석기(打製石器)는 함경도에만 분포하고 그 이남에서는 발굴되지 않지만 마제석기(磨製石器)는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에 마제석기를 만든 인류는 대륙(만주)으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하였다고 해석된다. 그렇다면 아산리에서 발견된 마제석부는 신석기시대의 인류가 대륙에서 남하하면서 아산리에도 정착하였다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즉 아산리에는 적어도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사람이 입주하였다고 추정된다.

 

지질학에 따르면 약 1만 년 전은 지구의 기온이 대단히 낮은 홀로세, 곧 제4빙기(氷期)였고, 그 이후에 기온이 서서히 상승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해석한다. 몽고지역에서 기원한 한민족은 만주지역에서 살다가 기온이 낮은 제4빙기를 맞아 높은 기온의 한반도로 남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에 사람들은 신석기인 마제석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인지가 발달하였던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인류는 돌로 기구를 만들고 마을에 정착하여 살며 식량을 생산하여 저장하고 불에 익혀 먹는 생활 습성을 가졌다고 한다. 농작물로서 조․피․콩을 재배하고 얼마 후에 벼의 재배도 시작하였다. 이렇게 유추해 보면 아산리에는 한반도로 사람들이 이주할 때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 단경구형평저호(上)와 황유자광구평병(下)

 

한편 셋째 형님(奎鎬)은 59년에 고봉산 기슭의 야산(아산리 산 35번지, 현재 전 121-4)을 개간하면서 우연히 여러 개의 고총(古塚)을 발굴하였다. 이 고총은 인위적으로 채석한 돌로 벽을 쌓아서 만든 토광묘(土壙墓)였고 그 속에 유물이 수장되어 있었다. 유물은 청동제 숟가락과 두 가지 종류의 자기(瓷器)이었다. 자기는 표면에 유약(釉藥)을 바르지 않은 토기로서 단사문(單斜紋)을 찍은 단경구형평저호(短頸球形平底壺)와 유약을 바른 자기로 구별되고, 후자는 다시 황색 유약과 흑색 유약으로 구별되는데 황색은 황유자광구편병(黃釉瓷廣口扁甁), 황유자당초문광구병(黃釉瓷唐草文廣口甁) 및 황색주전자 모양 그릇이고, 흑색은 검정색 유약을 바른 흑유자광구편병(黑釉瓷廣口扁甁)이었다.

 

이 유물을 고고학적으로 고찰해 보면 청동제 숟갈은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단경구형평저호는 백제 토기로 추정되며 적어도 신라 토기는 아닌 것 같다. 황색을 띠는 편병, 당초문병 및 주전자 모양 그릇은 유약 기술이 발달한 다음에 만들어진 녹청자(綠靑瓷)로서 고려 초기(918년-1046년)에 구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주전자 모양 그릇은 소박한 손잡이와 주둥이가 있어 주전자처럼 보이지만 덮개가 막혀 있고 주둥이가 큰 것으로 미루어 그 쓰임새가 남성의 변기(요강)인 듯하다.

 

고려 초기에 녹청자병을 묘 속에 부장품으로 넣거나 변기를 사용할 만한 신분은 상당히 권세가 있는 부호이거나 고급 관리로 사치 생활을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들 세 가지 황색자기는 고려의 아름다운 비색청자(翡色靑瓷)보다 앞서서 만들어졌거나 지방의 가마에서 구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姜敬淑, 1990). 그리고 검정색 광택이 나는 흑유자광구편병은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의 유물로 추정된다.

 

한편 아산리로 출입하는 주요 통로의 지형을 살펴보기로 한다. 애터의 동쪽에는 성산면 산곡리로 가는 앳재가, 남서쪽에는 바르매(발산리)로 가는 바르매구렁(또는 고정목 고개)이 그리고 북쪽에는 광굴로 통하는 광굴구렁이 가로막고 있다. 이들 재(嶺)와 구렁은 사람이 왕래하여 지형이 움푹 패인 길을 만들고 있다. 사람이 경사진 구릉(丘陵)의 길을 오랫동안 걸어 다니면 길 위에 난 풀이 자라지 못하므로 여기에 빗방울이 치면 흙이 씻겨내려 조금씩 패이게 된다. 현재와 같이 신작로를 닦기 이전의 바르매구렁과 광굴구렁의 깊이는 5~6미터나 패였고, 앳재의 길도 2~3미터나 낮아 있었다. 이렇게 깊은 구렁이 패이려면 수천 년 동안 사람이 왕래했어야 한다.

출토 유물과 지형의 변화에서 유추한 것처럼 아산리에는 적어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백제를 거쳐 고려 때에는 신분이 높은 분이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도 사람이 살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옥구문화원에서 발간한「우리 마을 유래 (1994)」에 따르면 아산리의 형성 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산리에 사람이 입주한 시대는 그보다 훨씬 앞선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판단된다. 앞의 책에서는 나의 중시조이신 상산김씨 14세손 익률 공이 아산리에 정착하신 지 17대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연대를 처서 계산하면 익률 공께서 아산리에 처음 터전을 잡은 지도 약 500년에 이른다. 이처럼 한 씨족의 가계로 보아서도 아산리에 사람이 입주한 지는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향의 모습 (제8회) - 제2장 고향산천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의 자손(종형제)들은 넓은 한 필지의 집터에 있는 세 채의 집에서 각각 따로 살았다. 집터는 부정형 세모꼴이었는데 우리 집은 세모꼴의 정점에 자리잡고, 둘째 집(基炫 숙부)은 왼쪽에, 그리고 셋째 집(基泰 숙부)은 오른쪽에 위치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집터가 가장 못생기고 둘째 집터가 가장 넓고 잘생겼었다. 할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편애가 집터의 생김새에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세 집은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이 각각 따로 있고, 이밖에 우리 집과 둘째 집 사이 또는 둘째 집과 셋째 집 사이에 통로가 있어 서로 자유롭게 내왕하였다. 점잖은 어른들은 자기 집 출입문을 통하여 출입했지만 어린아이들은 편한 대로 둘째 집이나 셋째 집으로 갔다가 각 집의 출입문을 통하여 밖으로 나갔다. 비록 한 지붕 밑에서 사촌들이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한 집터 안에서 함께 사는 대가족제도의 마지막 시기에 나는 자랐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집은 방 하나 부엌 하나의 두 칸 짜리 초가집이었다. 방은 사방 9 자이고 부엌은 사방 12 자로 시골집치고는 넓은 편이었다. 그리고 방의 벽은 도배를 안한 흙벽에 들녘에서 파온 점양토를 칠하여 엷은 회백색을 띠었다. 내가 철든 뒤에는 마분지를 발랐고 광복 후에 비로소 상품화된 도배지를 발랐다. 방바닥에는 얇은 대오리를 엮은 대자리를 폈는데 방이 정사각형이 아니어서 기성품 대자리를 펼 수가 없었으므로 삿갓장사네 집에 가서 특별히 주문하였다고 한다. 30년대 말쯤에 비로소 종이 장판을 발랐다. 처음에는 시멘트 포대 종이를 바르고 콩을 으깬 물로 맥질하고 들기름을 발라 끝마무리를 하였으니 지금의 각장에 비하여 너무나 볼품이 없었지만 그래도 위생적이었다.

 

▲ 왼쪽 그림처럼 큰숙부, 작은숙부, 아버지는 우물을 중심으로 집터가 위치했다 / 오른쪽은 실제 생가의 모습이다

 

대장장이 집에 식칼이 없다는 옛말처럼 목수인 아버지가 살던 집치고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아버지는 큰형이 결혼할 때 그 두 칸 집의 오른쪽 편에 방을 한 개 들여 세 칸 집을 만들었다. 그후 다시 왼쪽 편에 두 칸을 증축하여 ㄱ자의 다섯 칸 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방을 완성하지 못하고 헛간으로 남겨둔 채 별세하셨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초가집의 안방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좌우로 증축한 집의 구조가 정연할 리 없고 ㄱ자의 부정형 구조이므로 우리들은 흔히 앳재 밑의 꼬패집이라고 낮춰 불렀다.

그 후 12~13년이 지난 뒤 둘째 형이 결혼할 때 아버지께서 미완성으로 남겨 두었던 헛간에 큰형님이 목수 솜씨를 발휘하여 방을 들이게 된다. 우리 집에서는 이 방이 네 귀가 맞는 가장 번듯한 방이었다. 또 큰조카가 결혼할 무렵 또 하나의 방을 들임으로써 모두 5개의 방을 가진 큰 집으로 발돋움하였다.

 

본래 두 칸 짜리 초가집은 내가 어렸을 때 70년 묵은 집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아직도 조카딸(貞子)이 살고 있으니 줄잡아 140년의 역사를 지닌 귀(貴)한 고가(古家)로 보존된 것이다. 비록 초가 지붕이 70년대 새마을 운동의 기세에 눌려 슬레이트로 바뀌었을 뿐 초라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지만.

 

집 주변에는 울대를 세우고 짚풀을 엮어 두른 볏짚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울타리에 붙어서 곧고 높게 자란 참죽나무와 낮고 구불구불한 뽕나무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우리 집터는 좁았으므로 과일나무가 없었지만 둘째 집 울안에는 큰 감나무, 대추나무, 배나무, 앵도나무가 있어, 이것들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을 때는 어린 우리들의 침을 흘리게 하였다. 어느 해 가을(30년대 말엽) 큰 태풍이 배나무를 넘어뜨렸을 때의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 집 마당 한 편에는 특이하게 가마니돌이 한 개 박혀 있었다. 이것은 가마니 짤 때 짚풀을 부드럽게 두들기는 납작하고 판판한 돌로 가마니 짠 시대의 기념비적 유물로 내 추억 속의 반석이다.

 

애터마을의 공동 우물 앳굴샘은 우리 집에서 300미터 거리인데 모든 가정 용수를 그 샘에서 길어다 썼다. 물동이에 든 물을 머리에 이고 동이에서 넘치는 물을 한 손으로 훔치며 자갈길을 걸어오는 형수님들의 힘겨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 집 울안에 우물이 생긴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우리 집, 둘째 집 및 셋째 집의 중간쯤에 우물을 팠던 것이다. 50년 여름 심한 가뭄이 계속되던 때에 셋째 형님이 불시로 우물파기를 작심하였다. 집안 식구들이 협동하여 세 길 깊이의 우물을 힘겹게 만들었다. 셋째 형님의 개척정신이 물긷는 노동력을 절감하고 위생적인 생활에 다가서는 길을 트게 하였다.

 

수 백년 전해오던 옛 마을은 새마을 운동의 메아리를 타고 변하기 시작하였다. 초가 지붕은 슬레이트로 바뀌고 볏짚 울타리는 불록 담으로 바뀌며 컴컴한 등잔불은 밝은 전깃불로 바뀌고 자갈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바뀌었다. 90년대 들어서는 집의 기둥을 뽑아내고 벽돌집 문화 주택으로 바꾸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세시풍속, 정월대보름에서 삼복더위까지 (제9회) -  제2장 고향산천

 

옛날부터 아산리에는 계절이 바뀌거나 사람이 태어나거나 죽거나 결혼하거나 하면 여러 가지 관습과 풍속이 불문율처럼 전해내려 왔다. 계절이 바뀔 때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은 음력 섣달 그믐날부터 시작된다.

어른들은 집안을 깨끗이 쓸고 그 대빗자루를 남몰래 숨겨 놓았다. 그믐날 저녁에 동네 사람들이 풍장〔農樂〕을 치며 모든 집의 구석구석을 돌며 액(厄)막이를 해 주는데, 이 때 숨겨놓은 대빗자루를 찾아내어 횃불로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 대비를 찾기 쉬운 곳에 놓으면 액막이굿이 오래 머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깊숙이 감추는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부자 집에서는 일부러 많은 새 빗자루를 나누어  주고 술을 대접하며 굿판의 흥을 돋우기도 하였다.

 

섣달 그믐날은 집에 있는 모든 등을 닦거나 새 종이로 발라서 밤에 집 안팎을 밝혔다. 그리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온 밤을 지새우는 풍습이 있었다. 어른들은 ‘졸거나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단다’고 하던가. 어린이들은 졸음을 참아야 했다. 이러한 풍습을 해지킴〔守歲〕이라 했고, 섣달 그믐날 밤을 제야(除夜), 제석(除夕) 또는 세제(歲除)라 하며 그 세속이 꾸준히 계속되었다.

 

음력 정월 보름날은 대보름이라 하여 농사와 건강에 관련된 민속 행사가 벌어졌다. 새벽에 밤, 호두 등을 입 속에 넣고 큰 소리가 나도록 부럼을 깨물며 오곡밥과 일곱 가지 나물과 탕을 먹었고, 어린이들은 이웃집으로 오곡밥을 얻으러 다녔으며, 복조리 장사가 집집을 돌며 조리를 팔았다. 외양간의 소에게 오곡밥과 나물들을 주어 먼저 입에 대는 것을 보고, 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며 점을 치기도 하였다.

 

정월 열나흗날에는 겨울 내내 날리던 연(鳶)에 모든 액을 싣고 소원을 적어 멀리 띄워 보내기도 했다. 나는 그 액막이 연을 띄우고 몹시 섭섭했던 기억이 난다. 대보름날 새벽 마당에서의 폭죽 또한 즐거운 추억의 하나이다. 마당 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우고 그 위에 굵은 대통을 놓아 대나무 마디가 터지는 요란한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이다. 애터마을의 거의 모든 집에서 동시에「탕탕탕」소리가 난다. 창호지로 등거리를 만들어 진짜 옷 밑에 입고 열나흗날 밤을 자고 보름날 새벽의 폭죽에 그 액막이옷을 넣어 태웠다.

 

▲ 정월 대보름의 쥐불놀이 모습 / 세시풍속 중 아이들의 가장 신나는 놀이가 아닐까 한다

 

또한 작은 오쟁이를 두 개 만들고 그 속에 나이 수만큼씩 삽으로 뜬 흙을 넣고 내가 자주 건너는 도랑의 양편에 묻은 다음 나이 수만큼 왕복하여 건너게 했다. 나는 운수가 나쁘다는 일곱 살과 아홉 살 때 이러한「다리밟기」를 하였다. 큰 개울에는 여러 아이들이 다리밟기를 한 오쟁이가 마치 징검돌처럼 나란하게 놓이기도 했다.

 

대보름날이 지나면 그 해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쳤는데 이 점은 일진(日辰)을 잘 푸는 둘째 숙부가 토정비결을 보아주어 인기를 모으셨다. 해마다 정월 첫 쥐날에는 쥐를 쫓는다 하여 논․밭둑의 마른풀에 불을 놓고 콩을 볶아 먹었다. 이 행사는 쥐 쫓는 효과보다 마른풀에 붙은 병해충을 박멸하는 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밤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깡통에 불을 담아 돌리면서 여기저기에 불을 옮겨 붙이고는 하였다. 단오(음력 5월 5일)에는 여자들이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고 놀며 수리취를 넣은 단오떡을 만들어 먹으며 농사의 풍작을 빌었다.

 

삼복(三伏) 더위에 농작물은 쑥쑥 자라지만 농군들은 더위에 지친다. 복날마다 개장국과 참외․수박을 먹고 바쁜 농사일도 하루쯤 쉬었다. 특히 말복에는 돼지를 잡고 술먹이를 하였다. 농사일의 마무리와 말복이 겹치는 해에는 술먹이가 1주일이나 계속되기도 했다. 돼지 잡기와 술먹이를 위하여 집집마다 추렴을 하고, 나무 술통을 매단 술배달꾼의 자전거가 부리나케 나다녔다.

술먹이에 앞서 온 동네 농군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두레를 짜고 김매기를 하는 데 이때에는 반드시 풍장을 치고 선창에 맞춰 엎드린 채 노랫가락을 불렀으며 마지막 판에"와!"하는 소리로 끝을 맺었다. 술먹이가 계속되는 동안 풍장과 춤과 노래가 따랐으니 농군들의 진정한 명절은 바로 이 때였던 것이다.



세시풍속, 칠월칠석에서 풍습까지 (제10회) -  제2장 고향산천

 

칠석(음력 7월 7일) 날 밤에는 은하수 동쪽의 견우〔牽牛星〕와 서쪽의 직녀〔織女星〕가 오작교에서 1년에 한 번 만나는데 까치가 모여서 다리를 만들기 때문에 그 머리가 벗겨진다고 믿었다. 칠석날에 부녀자들은 견우와 직녀에게 길쌈이 잘 되게 해 달라고 비는 걸교(乞巧)를 하고, 책을 꺼내 볕에 쬐고 바람에 쐬는 폭서(曝書)를 하였다. 길쌈을 하지 않는 요즈음은 걸교를 안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칠석마다 걸교를 하셨을 것이다.

추석이 다가오면 남자들은 선조님들의 산소를 벌초하고, 부녀자들은 헌 옷을 빨래하며 새 옷을 지었다. 옛날의 한복은 꿰맨 실을 풀어내어 빨아서 풀 먹이고 다듬이질하며 홍두깨다듬이에 걸은 다음에 다시 꿰매야 하기 때문에 부녀자들의 많은 노력이 들었다. 따라서 추석과 설날을 앞둔 부녀자들은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

아산리의 거의 모든 집에서는 며칠 동안 다듬이 방망이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철야(徹夜)하는 등잔불이 켜 있었다. 가윗날에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 등 음식을 장만하여 차례를 지낸 뒤 성묘를 하는 명절의 풍속은 요즘에도 지켜지고 있다. 차례상 한편에는 집을 지키는 신령으로 믿는 성주에게 음식을 차리되 제상이 아닌 방바닥에 차렸다. 명절과 제사 음식은 반드시 동네 어른을 모셔다가 대접하였다.

10월 상달에는 선조님들의 산소에서 묘제(墓祭)를 지냈다. 그리고 동지(冬至)날에는 새알 팥죽을 쑤어 집 주변에 뿌린 뒤 나누어 먹었다. 벽면에 닿은 팥죽이 말라서 흔적을 남기곤 하였다.

 

▲ 아들출산을 알리는 통고추를 끼운 금줄

 

어린애를 해산(解産)할 때에도 특이한 민속이 전해지고 있었다. 분만할 때에는 볏짚을 펴고 그 위에서 낳았다. 산기(産期)가 가까워지면 미리 정갈한 볏짚을 골라, 검불을 추려내어 묶어 두었다가 낳을 기미가 보이면 이「삼짚」을 방에 깔았다. 해산에 삼짚을 까는 것은 비위생적이다. 왜냐 하면 임산부는 자칫 산욕열로 고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병원균이 삼짚에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산리에서는 1960년대 이후 삼짚을 깔지 않게 되었다.  

해산한 지 3일에는 삼짚과 탯줄을 왕겨불 속에서 태우거나 삼짚에 싼 탯줄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방죽물에 가라앉혔다. 아기가 태어나면 곧 문 앞에 금(禁)줄을 걸었다. 금줄은 왼새끼줄에 숯을 꽂고, 숯 사이에 아들은 통고추를, 딸은 솔가지를 각각 세 개씩 끼워서 성을 표시하여 부정(不淨)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아기의 점지와 생모와 아기의 건강 장수를 맡아본다고 믿는 삼신(三神)할머니에게 세이레[三七]를 차리는데 이렛날에는 아침 일찍 흰밥과 미역국을 바치고 두 손을 비비며 치성을 드렸다.

나도 삼짚 위에서 태어났음이 분명하다. 나를 낳으신 어머니께서는 유복자인 나를 낳으시고 무엇을 비셨을까. 내가 읽은 임억규 시인의 「금줄의 기도」를 옮겨 본다.

금줄의 기도

초가집 지붕 밑에 짚을 깔고 태어난 아기  

외로 꼰 줄타기가 삶이라 할지라도    

아린 맛 고추로 세워 어둔 밤을 밝히라네

불길이 자거들랑 숯으로 남았다가     

쓴맛도 가셔 주고 냄새도 지워 주고  

질화로 다순 정으로 지친 몸을 재우라네

이런 것들 말고도 더 많은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어른의 치상(治喪)에는 상제가 삼베로 만든 굴건(屈巾)을 쓰고 제복(祭服)을 입으며 상장을 짚었다. 마을에는 울긋불긋하게 장식한 상여(喪輿)가 있어 상여꾼들이 메었고 여러 장의 만장(輓章)이 앞서고 상제가 뒤따랐다. 치상 뒤에는 혼백을 상청(喪廳)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상식(上食)을 올리고 음력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에 곡을 하여 상망喪亡을 지냈다. 1년 뒤에 소상(小祥)을 치르고 2년 뒤에 대상(大祥)을 지낸 다음 상청을 철거하였다.

아산리에는 여러 가지 무당의 무속(巫俗)도 있었다. 여자 점쟁이가 있어 신정을 읽는 날은 이웃이 시끄러웠다. 집안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점굿을 하고, 먼길을 다녀오다 급작히 아프면「주당(周堂)」을 만났다고 해서 마당에 멍석 깔고 병자를 뉜 다음 풍장을 울려서 잡귀를 쫓아내는 무속이 행해졌다. 또 가벼운 두통 환자가 생기면 됫박에 쌀을 가득 넣고 천으로 싸서 누워 있는 환자의 이마에 지근지근대는「잠밥」을 먹여서 치료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무속이 얼마나 치료 효과를 가졌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산리의 농사 (제11회) -  제2장 고향산천

 

왜정시대의 아산리는 넓은 농토를 가진 농가가 적어서 쌀을 자급자족하기 어려운 가난하고 쓸쓸한 마을이었다. 지금의 부촌이 된 아산리와 옛날의 아산리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1930년~40년대의 아산리에서 재배하던 농작물은 벼, 보리, 콩, 참깨, 들깨, 무, 배추, 고추 등 식량과 기름, 김장거리가 주였고 녹두와 돔부(광젱이)를 약간 심었으며, 감자, 고구마, 토란 등을 겨우 심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아산리에서 오이, 수박 등 환금작물(換金作物)을 많이 재배하지만 옛날에는 거의 재배하지 않았다.

 

벼 재배는 재래식 못자리, 모내기, 김매기, 벼베기 등을 완전히 인력으로 하는 원시 농사법이었다. 벼논은 초벌과 재벌의 김매기를 하는데 이 일들은 호미로 잡초를 흙 속에 파묻고 벼 뿌리를 끊어주며 흙탕물을 일으키는 작업이었다. 김매기는 하루 종일 엎드려서 하므로 가장 힘든 일이었다. 두 번의 김매기를 한 뒤에도 남아있는 잡초를 손으로 뽑는「만도리」를 하였다. 요즈음은 제초제를 뿌릴 뿐 김매기를 안 해도 수확량이 옛날의 두 배나 되는 것을 보면 왜 힘들여 일했는지 모를 일이다.

 

▲ 모내기 전에 논을 고르는 써래질이 70년대까지는 보편적이었으나 모든 농작업이 기계화되면서 지금은 사진 속에서만 볼 수 밖에 없는 풍경이 되었다

 

보리는 종전에 밭에만 심었는데 40년대부터 논에도 심었다. 논에 보리를 심은 이후 우리 집 가계는 피게 되었다. 왜냐 하면 퇴비를 듬뿍 주고 보리를 심는 논은 소작료를 내지 않고서도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집은 수십 가마니의 보리를 수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농사에 쓰는 비료는 주로 인분과 재 그리고 두엄이었다. 재깐에 겨울 동안 짚재를 모았다가 그 위에 인분을 끼얹어서 봄에 밭에 냈다. 소․돼지를 기르는 집은 두엄이 넉넉하지만 가축이 없는 집은 마당 쓴 것을 모아 두엄을 만들었다. 내가 철들기 전에 부지런한 농부는 개똥을 주어 모아 거름을 하였다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을 할 때는 풀을 베어 퇴비를 많이 만들어 집집마다 또는 마을 단위로 퇴비경진대회를 열었다. 30년대 말에 유안硫安이라는 질소비료, 콩깻묵․정어리깻묵 등의 유기질비료가 보급되었고, 60년대에 요소가 제한적으로 보급되며, 80년대에 비로소 화학비료가 풍족하게 되었다.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집의 논은 손바닥만한 넓이였다. 모두 합해도 1,024평 밖에 안 되었으니까. 그것도 다랑다랑한 논배미가 세 곳에 흩어져 있었다. 둠벙배미(642평), 방죽밑배미(214평), 방죽안배미(162평)가 전부였다. 내가 철들은 뒤에 냉정골논(700여 평)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이것들은 모두 소작료를 바쳐야 하는 소작농토였던 것이다.

 

삼림은 주로 땔감을 채취하는 데 이용되었다. 집에서 쓰는 땔감은 솔가지와 솔가리(소나무 낙엽)였다. 벼농사를 많이 짓는 집은 볏짚을 땔감으로 썼지만 가마니를 짜기 때문에 값이 비쌌다. 우리 집에는 산이 있어 땔감에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가을에 소나무가 낙엽지면 새로 만든 갈퀴를 가지고 온 집안 식구들이 솔가리를 긁어다 집 마당에  높이 쌓아 올렸다.

솔가지는 2년에 한 번씩 가지치기를 한 것을 다발져서 쌓아 놓았다. 소나무를 벤 그루터기는 잔뿌리까지 파냈고 숲 속의 하초와 잡목도 베어서 연료로 썼다. 이렇게 해서 산은 피폐하였지만 겨울에 춥지 않게 살았고, 남는 땔감은 더러 팔기도 했다. 50년대까지의 연료 소비량은 많지 않아서 에너지량으로 환산하면 석유나 전기 에너지를 쓰는 요즈음에 비하여 10분의 1도 안되었을 것이다.



길쌈 - 1 (제12회) - 제2장 고향산천

 

우리 집에서는 오랫동안 길쌈을 하였다. 요즈음은 아산리에 길쌈하는 집이 없어 젊은 사람들이 관심조차 없으므로 기록으로 남겨놓기 위해서 이 항을 자세히 기술한다.

명주 길쌈 / 명주실은 누에고치(봉고지라고 불렀다)에서 뽑았으므로 뽕나무를 반드시 길러야 했다. 우리 마을에는 넓은 뽕밭을 만들만한 밭이 없었으므로 울타리나 밭두렁에 뽕나무를 듬성듬성 심었다. 누에는 1년에 춘잠과 추잠의 두 번씩 길렀다.

길쌈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종이 위에 붙여 놓은 누에알을 면사무소에서 받아 왔다. 까만 개미누에가 알에서 깨어나면 이때부터 어머니의 일손이 바빠진다. 첫잠(제1령기), 둘째잠(제2령기)을 지나 막잠(제4령기)에 이르면 밤에 뽕잎을 주느라고 어머니는 잠을 설치신다. 특별한 잠실(蠶室)이 따로 없었으므로 막잠 무렵에는 방 한 개를 치우고 임시 잠실로 이용한다. 방에 층층으로 시렁을 지르고 그 위에 누에를 펴놓는다.

막잠에서 깨어난 누에의 왕성한 식성은 봄에 눈 녹듯이 뽕잎을 먹어 치운다. 이 때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는 마치 여름날의 소낙비 오는 소리 같다. 나는 잠실에서 어머니와 함께 잤으므로 누에의 생육 과정과 사육법을 보며 자랐다. 고치를 짓기 전 배설물을 모조리 버린 누에는 몸이 투명하고, 머리를 불규칙하게 흔든다. 이런 누에를 어머니 몰래 문살 사이에 넣고 종이를 발라 고치를 짓게 하는 재미를 맛보곤 하였다.

우리 집에서 생산한 고치는 거의 내다 파는 일이 없이 명주실을 뽑았다. 헛간에 임시로 만든 화덕에 걸쳐 놓은 냄비나 뚝배기에 물을 넣고 잘게 쪼갠 장작불로 데우면서 고치를 넣는다. 데워진 고치 사이에 나무 젓가락을 넣고 저으면 하얀 명주실이 따라 오른다. 실의 굵기는 고치 수로 가늠한다. 명주실은 실자새를  거쳐 손으로 잡아당겨 뒤에 사려 놓는다. 사려진 실은 헝클어지지 않게 타원형으로 사려진다. 실자새는 낱낱의 고치에서 풀려 나온 가는 실들을 밀착시키면서 꼬아주는 구실을 한다. 이렇게 하여 수백 개, 수천 개의 고치에서 실을 한발 한발 손으로 뽑는다.

명주실을 풀어낸 고치 속에는 번데기가 들어 있게 마련이다. 누에가 건강하면 좋은 번데기가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말라비틀어진 누에가 나온다. 번데기는 우리들의 좋은 군것질 감이다.

 

사려 놓은 실은 두 가지 조작을 한다. 그 하나는 둥근 뭉치로 감아서 날실(經絲)로 쓰고, 다른 하나는 대통에 감아서 장타원형의 꾸리를 만들어 씨실(緯絲)로 이용한다.

모시 길쌈 / 우리 집에서는 언제부터인지 모시 길쌈을 하였다. 모시풀은 비탈진 밭 언덕이나 자투리 밭에 심었다. 다년생식물인 모시풀은 한번 심어 놓으면 해마다 세 번씩 수확한다. 우리 집에서는 모시풀을 방죽굴밭 언덕에 재배하였다. 모시풀은 섬유를 벗길 수 있고, 잎은 쑥잎처럼 떡에 넣어 먹는다. 모시풀은 키가 2미터 정도로 자라는데 알맞게 성숙하면 줄기 끝까지 섬유(껍질)가 벗겨지지만 너무 쇠면 중간까지만 벗겨지고, 반대로 미숙하면 섬유가 질기지 않아서 쓸모가 없다. 어른들은 모시풀의 성숙한 정도를 용하게 알아서 베는 시기를 맞추었다.

벤 모시풀은 잎을 따내고 줄기를 다발로 묶어서 그늘에 놓고 물을 축인다. 이러한 줄기의 밑둥 가까이를 두 손으로 잡고 오른손은 앞으로, 왼손은 뒤로 밀치면 두 동강이 나면서 목질부와 인피부(섬유와 껍질)가 떨어진다. 손가락을 목질부와 인피부 사이에 넣어 밑둥의 목질부에서 인피부를 분리시킨 다음 다시 줄기 끝까지 인피부를 벗긴다. 그러면 줄기를 싸고 있는 인피부는 납작하게 두 가닥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모은 인피부를 물에 축여 놓고 모시칼로 암갈색 껍질을 밀어내면 안쪽의 연두색 섬유가 남는다. 이 섬유의 머리부분을 가지런히 묶은 모시단은 햇빛에 말리고 흐르는 물에 담가서 표백한다.

 

▲ 길쌈을 하고 있는 모습

 

모시는 명주보다 노동력을 더 많이 들이는 길쌈이다. 모시단의 납작한 섬유를 엄지손톱과 앞니를 이용하여 가늘게 쪼갠다. 이렇게 쪼개는 일을「모시 째기」고 말한다. 어머니와 형수들은 서서도 째고 앉아서도 짼다. 단조로운 손놀림과 입놀림을 하루 종일 되풀이하여 한올 한올 가늘게 짼다. 위 끝을 짼 모시단은 아래 끝을 얼레빗으로 빗어내려 갈라지게 한다.

가늘게 짼 두 가닥의 모시올을 모아 끝머리를 엄지와 인지 사이에 넣고 새끼줄을 꼬듯이 맞물려 꼬고, 그 끝을 구부려서 다시 비벼 꼰다. 모시올의 이음매는 마치 이중나선(二重螺旋)처럼 겹으로 꼬아져 길게 이어진다. 이렇게 이은 기다란 모시올을 무릎위에 놓고 손바닥으로 비벼서 동아줄처럼 꼬아 놓는다.

모시올을 길게 잇는 일을「모시 삼기」라고 말한다. 이음매의 이중나선과 올의 꼬임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이중나선의 방향이 같아야 날실을 늘이고 베매기의 풀솔질을 할 때 이음매가 풀리지 않고, 올을 같은 방향으로 꼬아야 날실들이 서로 꼬이지 않는다. 모시길쌈을 하는 이들은 경험으로 이러한 일을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어쩌다 설 배운 사람이 이중나선과 올 꼬임을 잘못하면 베 짤 때 날실이 바디에 걸려서 끊어지므로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모시는 반듯이 앉아서 삼는다. 그리고 아무리 수줍은 처녀라도 치마 밖으로 무릎을 내놓고 삼는다.

 

모시 길쌈은 계절에 민감하다. 공중습도가 낮으면 섬유가 꺾여져서 날실이 끊어지므로 베를 짜지 못한다. 여름 한 철 동안 모시베를 부지런히 짜고 처서가 지나면 베짜기를 끝낸다. 그래서 처서가 임박하면 어머니의 손놀림은 더 바빴던 것 같다. 우리 집에서는 2년에 한번쯤은 모시베를 짜서 표백제로 마전을 하여 가족들의 여름옷을 지어 입었다.



길쌈 - 2 (제13회) - 제2장 고향산천

 

무명 길쌈 / 일제 말년에는 무명 길쌈을 하였다. 40년대에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광목이 귀해졌을 때 목화를 심었다. 이들 길쌈하는 방법과 도구들은 명주와 모시 길쌈의 그것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무명 길쌈에는 목화 솜에서 씨를 빼는 씨아, 솜을 부풀게 하고 이물질을 없애는 활, 무명실을 뽑는 물레 등이 필요하다. 이러한 도구들은 가락을 빼고 모두 집에서 자작하였다. 큰형님의 손재주가 뛰어났음이 짐작된다. 아마도 어머니는 과거에 무명 길쌈의 경험이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그 기술을 터득하셨는지 모를 일이다.

뭉쳐진 솜 속에 활시위(활의 가느다란 노끈)를 넣고 손으로 튕겨서 솜을 부풀게 하고 잡물雜物을 튀겨냈으며, 손바닥 넓이로 떼어낸 솜 위에 대통을 넣고 돌돌 말아서 속 빈 고치를 만들었고, 그 끝을 가락 끝에 대고 물레를 돌리면서 실을 뽑는 그 기술들은 놀랍기만 하였다. 어머니는 우리 마을에서 무명 길쌈의 솜씨가 좋으셨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때 무명으로 지은 양복을 입을 수 있었다.

삼베 길쌈 / 삼베 길쌈은 40년대에 우리 집에서 새로 시작하였다. 제법 넓은 밭에 삼을 심었다. 일년생식물인 삼은 심은 지 넉 달만에 3미터나 자란다. 삼은 가지가 있으면 쓸모가 적으므로 뵈게 씨를 뿌려 홀쭉하게 기른다. 삼복 더위에 삼을 베어 껍질을 벗기는 일은 곤혹스러운 작업이었다. 더구나 삼은 줄기를 다발 지어 가마니 조각으로 싸서 큰 가마솥 속에 세워놓고 삶아서 껍질을 벗기는 어려움이 있었다. 삼은 모시보다 섬유가 길고 질기지만 거친 점이 달랐다. 삼 삼기는 모시 삼기와 비슷하여 어머니의 몫이었다.

베매기 / 명주, 모시와 삼베는 베 매기에 앞서 날실을 늘인다. 삼기를 하여 사려놓은 실들을 헛간 바닥에 배열하고 그 위에 모래를 얹혀 놓는다. 헛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마당에 말뚝을 박는다. 바디 구멍 수만큼의 실을 모아 말뚝에 걸어놓는다. 이때 모든 날실이 똑같은 장력張力을 받도록 알맞게 당기는 것이 요령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날실을 늘이는 일은 어머니가 전담하셨다.

길쌈하는 바디는 대오리로 만든다. 5센티미터 가량 되는 얇은 대오리를 참빗처럼 촘촘히 배열하여 양쪽을 고정한 것이다. 전남 담양산 바디가 으뜸으로 꼽히는데 이것에는 단위가 있다. 한 단위는 바디살 40개를 한 새로 친다. 명주바디는 13새~15새이므로 520개~600개의 바디살로 구성된다. 따라서 상품의 고운 명주는 보름새(15새)라고 하여 600개의 날실을, 하품의 굵은 명주는 520개의 날실을 나르는 것이다. 모시는 9새~12새의, 삼베는 7새의 바디를 이용한다.

날실은 한올 한올 바디살 사이에 끼운다. 600개나 되는 날실을 바디살 사이에 한올의 오차도 없이 끼우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돋보기를 쓰시고 바디살에 날실을 끼우는 어머니의 진지한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다음에 베매기를 한다. 늘였던 날실을 펴서 풀을 먹이고 고루 쓰다듬어 말리는 작업이다. 베매기를 하려면 헛간에 왕겨불을 피운다. 바디살 사이에 끼워놓은 날실의 한 끝은 도투마리(날실을 감아놓는 판자)에 펴서 묶고, 사려진 나머지 날실은 끌개(날실을 올려놓는 두 가지친 기구)의 기둥에 묶어놓는다. 도투마리는 왕겨불 옆에 세운 두 기둥에 가로로 세우고, 무거운 맷돌을 올려놓은 끌개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놓는다.

빳빳한 솔에 묽은 풀을 찍어 날실에 먹이고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풀을 고르게 묻혀 날실을 매끄럽게 한다. 풀솔과 손의 방향은 날실 이음매의 방향에 맞게 움직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풀칠하고 쓰다듬는 손놀림으로 보이지만 어머니의 손은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였던 것이다. 풀칠을 하고 약한 왕겨불 위에서 말린 날실을 도투마리에 감으면 끌개가 딸려온다. 이렇게 해서 날실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베매기를 계속한다. 도투마리와 끌개의 위치도 중요하다. 도투마리에 감기는 날실은 좌우가 똑같은 장력을 받아야 베짜기 할 때 기울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도투마리의 중앙에 끌개 중심의 연장선이 오도록 배열해야 한다.

베짜기 / 베는 베틀 위에서 짠다. 베틀의 구조는 너무 복잡해서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란다. 베틀은 두 개의 베틀다리, 각각 두 개의 앞기둥과 뒷기둥, 이들을 연결하는 가로대로 구성되어 있다. 높은 앞기둥 위에 용두머리를 올려놓고, 용두머리의 앞쪽으로 꾸부정한 베틀신대가 늘어지고 그 끝머리에 긴 끈이 이어지고 다시 그 끝에 베틀신이 붙는다. 용두머리의 뒤쪽으로는 두개의 눈썹대가 뻗쳐 나와 그들 끝에 눈썹줄이 늘어지고, 눈썹줄 끝에 잉아가 가로놓인다. 잉아는 10센티미터 폭의 무명실을 빗살처럼 배열한 것으로 날실이 교대로 상하운동을 하는 구실을 한다. 베틀다리와 앞기둥 사이에 도투마리를 가로로 놓고 베 짜는 사람의 허리에 두른 부티를 뒤로 밀면 날실은 팽팽하게 늘어진다. 앉을깨 위에 앉아서 베틀신을 끼운 다리를 뒤로 구부리면 잉아에 물린 날실들이 위로 올라가고 나머지 날실들이 밑으로 처진다. 

 

▲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길쌈도구

 

한 올씩 걸러서 위와 아래로 열린 날실 사이를 오른손의 북을 왼쪽으로 보내면 왼손으로 받으면서 오른손으로 바디집을 앞으로 세게 잡아당긴다. ‘딸깍’하는 바디집비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씨실 한 올이 베(피륙)로 변하는 순간이다. 반대로 베틀신의 다리를 앞으로 뻗으면 잉아에 물린 날실들이 밑으로 쳐지고 나머지 날실들이 위로 올라가서 날실 사이가 열리면, 왼손에 잡았던 북을 잽싸게 오른쪽으로 밀어 넣고 오른손으로 그것을 잡으면서 왼손으로 바디집을 낚아채면 또 한 올이 베의 일원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베짜기는 두 손과 한 발 그리고 허리를 쉴 틈 없이 움직이는 작업이었다.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발 운동과 허리힘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었는지 감탄할 따름이다. 어머니의 베짜기는 아침부터 어두울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틀에 앉는 앉을깨는 푹신한 의자가 아닌 널판지였다. 부티가 닿는 허리 부분에 옹이가 보였으니 엉덩이에도 틀림없이 돌덩이 같은 옹이가 생겼을 것이다. 어머니는 일생 동안 바디집을 몇 억 번이나 굴렀을까.

고향집에는 어머니가 길쌈을 하시던 도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별세(1958년)하시고 또 70년대 들어 길쌈이 퇴조하면서 그것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그것을 깨달은 80년대에는 벌써 거의 없어진 뒤였다. 나는 어머니가 쓰시던 가락, 북, 바디집, 바디, 풀솔 등 유품 몇 점을 수집․보존하여 지금 어머니의 체취를 느끼고 있다. 내 자손들도 이들 유품을 오래도록 보존하면 좋겠다.



고향의 부업 (14회) - 제2장 고향산천

 

 

어렸을 때 우리 집의 생산활동은 농사, 길쌈, 가마니 짜기로 요약되고, 큰 흉년이 들었던 39년 경에 일시적으로 대빗자루를 만들었다. 이러한 생산 활동은 우리 집 뿐만 아니라 아산리 사람들의 공통된 생활 수단이었다. 요즈음의 생산 활동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만 어렸을 때를 회상하며 기록한다.

 

▲ 농촌의 가마니 짜는 모습(1960년대)

 

가마니 짜기 / 가마니 짜기는 한동안 우리 집의 부업이 아닌 주업이었다. 1년의 절반 이상을 온 식구가 가마니 짜기에 매달렸고, 또 생계를 유지하는 가업이었다. 여러 생산 활동 중에서 내가 가장 깊이 관계한 부분은 가마니 짜기였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5~6년 간 새끼줄을 꼬아 가마니 짜기의 일원으로 종사하였다. 지금도 새끼 꼬는 기술은 옛날과 다름없이 손바닥과 앉는 자세에 그대로 남아 있다. 가마니 짜기는 소년기에 나를 고달프게 하였고 가슴에 깊이 찍힌 일이었으므로 다른 항에서 자세히 쓰기로 한다.

대빗자루 매기 / 대비는 댓잎을 떼 낸 대가지를 한 발쯤 되는 대토막에 붙여서 탄탄하게 묶어 만든다. 흉년이 들었던 1939년 겨울부터 이듬해 겨울까지 우리 집에서는 대빗자루를 만들었다. 먼저 대토막 밑 부분에 구멍을 뚫고 +자 모양으로 나무토막을 박는다. 그 주변에 왕대가지를 돌려대고 그 겉에 분죽가지를 돌려댄 다음 모양을 내면서 묶는다.

왕대가지는 잔가지가 적고 엉성하므로 안쪽의 구조물로 이용하고 분죽가지는 잔가지가 많으므로 밖에 대어 모양을 내게 한다. 대빗자루는 처음에 철사로 묶었지만 철물이 섞이면 수출 조건에 어긋난다 해서 나중에 칡덩굴로 묶었다. 대빗자루는 성산면 산업조합에서 공동 구매하여 만주로 수출하였다고 한다. 대빗자루를 만들 때 어린이들은 댓가지에 붙은 잎을 따는 데 동원되었다.

대빗자루의 생산량은 대단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산업조합의 넓은 마당에 산더미처럼 쌓인 대비의 산덩어리를 보았다. 댓가지와 칡덩굴도 산업조합에서 알선하여 외지에서 도입하였다. 왜냐 하면 우리 고향에는 대나무는 있지만 그렇게 많은 댓가지가 생산되지 않았고, 더구나 칡덩굴은 거의 없었으니까. 만주로 수출한 대빗자루는 수수나 조로 바뀌어서 당시의 혹독한 흉년에 구황救荒 식량이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복숭아 과수원 / 우리 집에서는 50년대 초에 복숭아 과수원을 만들었다. 쇠죽골에 있는 산을 개간한 새 밭에 심었다. 이 산은 고봉리 부자로 알려진 채오덕 씨 소유였는데 큰형님이 사들였다고 한다. 토지 분배를 시행한 이 무렵에 지주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산을 쉽게 방매하였던 것이다. 새 밭은 경사가 완만하였지만 여기저기 사태가 나서 요철凹凸이 심했고, 심토(心土)가 밖에 노출된 메마른 땅이었다. 형님들은 무진 애를 서서 흙을 고르고 거름을 질러서 옥토로 만들었다. 새 밭에는 처음 몇 년 동안 수박을 심어서 재미를 톡톡히 본 다음 과수원을 만들었다.

큰형님은 씨를 뿌려 대목(台木)을 만들고 복숭아 품종을 골라 접목하며 묘목을 기르고, 과수원을 조성하여 전정, 농약살포, 비배관리 등의 기술을 스스로 연구하며 익혀 나갔다. 그 뒤 이웃들에게 그 기술을 전수하여 한때 아산리가 복숭아 마을로 이름을 떨친 적도 있었다.

60년대에 둘째 형님과 셋째 형님도 복숭아 과수원을 만들었고, 큰형님은 과수원을 더 확장하였다. 복숭아 과수원으로 우리 집안은 경제적으로 꽤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큰형님은 나에게 전정 기술이나 농약에 대하여 자문을 구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군산에 화력발전소가 새로 가동된 뒤 복숭아나무에 병이 생겨서 타산이 맞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몇 년 지나 나무를 모두 베어내었다. 그래서 요즈음은 복숭아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과수원을 통해서 큰형님의 슬기와 탐구심과 집념을 알게 되었다. 왜냐 하면 그 분의 슬기와 노력으로 집안이 중흥되고 아산리에 현대 농업기술이 도입되며 부(富)의 길이 열리게 되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개정 초등학교 (제15회) - 제3장 초등학교 시절

 

나는 개정공립초등학교(開井公立國民學校)를 다녔다. 요즈음은 개정초등학교라고 부른다. 입학할 때 구두 시험과 신체검사를 하였고 필기시험에 대비하여 연필과 지우개를 가지고 간 기억이 난다.

 

어느 날 급작히 큰형님이 새끼줄을 꼬고 있는 나에게 입학시험 준비를 시켰던 것이다. 한글과 일본어 기초를 익히고, 사회 상식으로 마을 이름과 전군도로라는 길 이름 등을 암기하였다. 마침 구두 시험 때 그러한 상식 문제를 선생님들이 물으셨다. 신체 검사는 기둥에 표시한 줄자로 키를 재고, 작은 나무 의자를 매달은 큰 대저울로 체중을 재었다. 까다로운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요즈음의 학령으로는 너무 늦은 10살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1924년 9월 1일에 개정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제1대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와 제2대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의 무단탄압정책․동화정책이 3․1운동(1919년)을 계기로 각성함으로써 제3대 총독 사이토〔齊藤 實〕가 문화정책으로 바꾸어 초등학교를 많이 설립하였다.

 

개정초교는 처음에 4년제로 개교하였으므로 4개의 교실과 1개의 직원실을 가진 목조건물로 세워졌다. 6년제 학교인 이웃의 대야초교나 성산초교보다 늦게 개교하였던 것이다. 내가 입학하던 때에는 이미 6년제로 승격되고 2개의 교실이 증축되어, 교실 7개의 기다란 교사가 서 있었다. 새로 지은 교실 2개는 가운데의 미닫이문을 터서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강당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교사의 겉면은 검정색 콜탈을 칠한 판자 벽에 흰색 페인트를 칠한 문틀이 돋보였고, 지붕은 개량 슬레이트로 매끈하게 이어져 있어 동그스름한 초가지붕만 보던 나의 눈을 잡아끌었다.

 

교사의 앞에는 두 단으로 된 기다란 정원이 있고, 그 윗단에는 전나무, 히마라야시다와 같은 키 큰 나무가 나란하고, 밑단에는 옥향이 나란하였다. 큰 교사 이외에 숙직실, 농기구사, 공작실 및 가축사가 있었다. 학교 안에 두레박 우물 하나밖에 없어서 여름에는 목이 말라 고통을 겪었고, 면사무소에서 물을 끌어오는 작두샘을 증설하였지만 물 사정이 아주 좋지 않았다.

 

▲ 개정 초등학교 / 근래의 모습이지만 내가 다니던 1940년대와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입학하던 해에 학교 뒷산을 헐어서 운동장을 돋우었다. 학부형들의 부역으로 산에서 흙을 지게로 날라다 산처럼 쌓고 그 옆에 학생의 이름 팻말을 세워 책임량을 조사하였다. 이 흙을 운동장에 폈으므로 비가 오면 운동장이 흙죽이 되었다. 돌을 모아 교문에서 직원실 앞까지 묻어 암거를 만드는 것을 보았다. 3학년 때 뒷산의 흙 파낸 터에 교실 3개가 더 지어졌고, 이 무렵에 본 교사 오른쪽에 따로 큰 위생실이 새로 지어졌다. 이 위생실은 구마모토(熊本)농장에서 세워준 건물이라고 교장 선생이 자랑삼아 말씀하셨다.

 

운동장의 동남쪽 모서리(교문의 오른쪽)를 높이 돋아 그 위에 새로 대마봉사전(大麻奉祠殿)이 세워지고, 그 주변에 예쁘게 다듬은 정원수가 빼곡이 심어졌다. 대마봉사전이란 일본인들이 그들의 시조 왕으로 받드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셔놓은 작은 신사(神社)이다. 물론 신사 앞에는 일본식 홍살문인 우물 정(井) 모양의 도리이[鳥井]가 세워졌다. 그 앞에서 학생들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손바닥을 소리내어 두 번씩 치고, 몸을 90도 각도로 구부리는 절을 하여 참배를 하였다. 이 대마봉사전은 광복되던 해에 부수어졌다.

 

학교 앞에는 30여 년 전에 이미 개통된 전군도로(1906년 축조)와 군산선 개정 간이역이 있었다. 나는 입학 당시 전군도로의 잘 포장된 아스팔트를 보고 놀랐고, 그 건너에 하얀 수증기를 뿜으며 요란하게 기적을 울리는 기차를 올려다보고 현기증을 일으켰다.



난징(南京) 함락 전승기념 행렬 (제16회) - 제3장 초등학교 시절

 

1938년에 개정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여 44년에 17회로 졸업한다. 아산리 동기 입학생은 김정호(나의 사촌․별세), 채주석(별세), 최정기(별세), 김정현, 김두용, 그리고 나, 모두 6명이었다. 우리 학년부터 두 학급을 모집하였는데 나와 김정호, 채주석, 최정기는 1학년 1조에, 나머지 친구들은 2조에 소속하였다.

 

1학년 1조의 담임은 이문원(李文源) 선생님이었다. 몸이 가늘고 목이 길어서 상급생들이「콩새」라는 별호로 부르는 것을 들었다. 이 선생님은 대단히 똑똑한 분이어서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익산군)에 당선되시고, 김약수가 이끄는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는 이야기를 훨씬 뒤에 들었다. 이 선생님은 몸이 약해서 자주 결근을 하셨는데 그런 때는 유종원(柳鍾元) 선생님이 대신 수업하셨다.

 

입학 후 얼마 동안 교실 앞에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일장기와 니주바시(二重橋․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 앞 다리) 사진이 바꿔 걸리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보다 1년 선배들은 1학년 때 조선어독본을 가지고 조선말을 배웠다는데 우리 학년부터는 조선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입학시험 준비하느라고 한글을 익혔는데 입학한 뒤에 그것이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입학하던 전해인 37년 7월 7일에 일어난 중일전쟁은 일본의 군국화를 부채질했고, 조선 사람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길들이는데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입학한 후 학부형의 부담으로 책, 공책, 연필, 필통, 색종이 등을 학교에서 받았다. 책보자기는 감색의 질긴 천이었는데, 대각선으로 마주 접어서 꼭 귀가 맞는 보자기라고 큰형님이 설명하였다. 약 두 달 뒤부터 책을 가져오라는 선생님 말씀에 우리들은 박수를 치며 기뻐한 기억이 난다. 책보를 허리에 대고 앞에서 꼭 묶고, 양복과 검정 고무신 그리고 검정 모자를 쓰고 다녔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3.7킬로미터로 먼 거리를 통학하였다. 두 학급으로 편성된 우리 학년은 교실이 모자라서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한달 교대로 등교하였다. 오전반일 때에는 각 이里 별로 상급생들이 인솔하여 열을 지어 등교하였기 때문에 지각하는 일이 없었지만, 오후반일 때는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도랑에서 물놀이를 하며 무논에서 우렁이를 잡는 등 도중에서 해찰하다가 지각하기 일쑤였다.

 

우리는 여학생과 같은 반이었다. 나는 수줍어서 여학생에게는 말을 건네지도 얼굴을 들지도 못하였다. 이리(익산)에서 기차 통학을 하는 여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애는 도시의 여학생답게 특별히 좋은 학생복을 입고 다녔다. 교실에서 자리바꿈을 할 때 우연히 그 애와 짝꿍이 되었는데 나는 힘센 친구들로부터 여학생 친구라고 놀림을 받았다. 1학년 때는 조남문이라는 힘세고 꾀가 많은 학생이 급장에 임명되었는데 그는 공부를 잘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가을에 오성산(五聖山)으로 원족(소풍)을 갈 때는 상급생을 보호자로 묶어 주었다. 산에 오르면서 여선생인 사다께〔佐竹〕 선생의 머리가 풀어진 것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그 선생은 학교에서 쪽머리를 단정하게 말아 올려 뒤통수에 붙이고 다녔는데 산에서 흩어진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나는 벼가 여무는 가을에 새를 쫓았다. 이 일은 내 몫이었다. 냉정골 논에는 유별나게 참새가 많이 날아들었다. 나는 논 한 모퉁이에 지어놓은 새막으로 책보를 챙겨들고 아침 이슬에 젖으며 가고는 하였다. 설익은 벼이삭은 참새에게 빨리기 마련이었다. 책읽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새막 바로 밑의 벼이삭을 몽땅 참새에게 빨려도 몰랐던 것 같다. 며칠 뒤에 어른들이 그것을 발견하고, ‘새 쫓기를 하나마나 한 아이’, ‘피 멍석이 떠내려가도 책만 읽는 아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이러한 호칭은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집을 떠난 뒤에야 면제받았다.

 

▲ 1937년 12월 17일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봄에 일본의 전승기념 행렬에 참가하였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난징(南京)을 함락시켰다는 것이다.󰡐낭낑 간라꾸, 낭낑 간라꾸.󰡑난징 함락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낮에는 일장기 행렬에, 밤에는 등불 행렬에 끼어들었다. 밤의 등불 행렬에는 대나무를 쪼개서 만든 등을 들고 해질 무렵에 학교에 모였다. 아산리에서 김정호, 김정현과 함께였다. 양초를 어떤 어른이 나누어주었다.

 

동부에 사는 학생들은 발산리 방향의 행렬에 들어가야 하는데도 우리는 말귀를 잘못 듣고 사정리 방향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사정리에 도달하여 해산한 다음에 우리 일행은 큰 고초를 겪었다. 나는 집으로 가는 방향 감각을 잃어 옳게 판단하는 친구들과 언쟁이 벌어졌다. 다수결에 따라 친구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어와 보니 개정초교가 나오지 않는가. 학교에서 집까지 오니 새벽이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셨다.

 

나중에 안 일인데 난징 함락은 37년 12월에 일본군이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난징(南京)을 점령한 기념으로 벌이던 전승기념 행렬이었던 것이다. 난징에서 일본군이 수십 만의 선량한 시민을 살육했으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우리들은 전승기념행사 뿐만 아니라 개정면에서 지원병으로 입대하는 청년들의 환송 행렬에도 자주 참가하였다. 입학하던 해 7월 7일에 상급생들이 기르던 소가 새끼를 낳았다. 어떤 일본 선생이 그 송아지를「일지호日支號」라고 이름지어 중일전쟁을 기념한다고 하였다.



수수밥으로 연명한 흉년 (제17회) - 제3장 초등학교 시절

 

2학년 때의 담임은 강서은이라는 처녀 선생이었다. 운동회를 앞두고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무용 연습을 하였다.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몸을 조용히 넘어뜨리는 무용을 연출하는데 우리들은 서로 움켜잡고 씨름판을 벌리고는 하였다. 강 선생님이 화가 나서 회초리 찜을 한 뒤에야 조용히 연습을 하여 운동회에 나가게 되었다. 얼마 후 강 선생님은 결혼하여 나오지 않았고 유종원 선생님이 대신 담임을 맡으셨다. 유 선생님은 교장 다음으로 높은 선생님이었다.

 

이 무렵 나는 몸이 약하고 수줍으며 말수가 적고 얌전하기만 한 아이였다. 나에 비하여 정호 사촌은 말을 잘하고 적극적이며 남의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2학년 봄에 운동장에서, 요즘 말로 짝꿍인 박성옥과 나 사이에 싸움이 붙었다. 내가 이길 리 만무한데 서로 치고 박고 하다보니 친구의 한쪽 눈이 퉁퉁 부어 올라 내가 이기는 꼴이 되었다. 다른 친구들이 떼어 말려서 분을 참았는데 다음날 박성옥과 화해하고 다정하게 옆자리에 앉았다.

 

2학년 때(1939년) 극심한 가뭄으로 전무후무한 흉년을 경험하였다. 그 해의 흉년은 어린 내 기억에 각인(刻印)되어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일로 평년의 연 강수량은 1200 밀리미터쯤인데 그 해는 겨우 517 밀리미터 밖에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6월부터 내리 쬐는 햇볕은 7월, 8월, 9월까지 계속되고, 빗방울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마를 줄 모르던 앳굴샘물이 말랐고, 애터 방죽 바닥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채 몇 달이 넘어갔다.

 

초록을 자랑하는 호남평야의 벼가 한편에서부터 암록색으로 되고 다시 검붉은색으로 변하였다. 나는 애굴밭 옆에 높게 지은 원두막에 앉아서 매일매일 호남평야의 벼 색깔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조이며 비 내리기를 빌었던 기억이 난다. 이 해는 들녘과 고래실을 가리지 않고 벼가 붉게 타버렸고 밭농사도 망쳐버렸다.

 

가을에 고래실 논에는 메밀을 파종하였다. 그 후 1년간은 만주에서 수입한 수수와 조, 콩깻묵 밥을 먹어야 했고, 기민구제(饑民救濟)의 일환으로 전군도로의 폭을 넓히는 공사판이 열렸다. 그래서 한 해 동안 만주에서 가져온 수수와 조와 콩깻묵으로 연명하였다.

 

▲ 옛날에는 소를 벌판에 끌고가 풀을 먹이고 꼴을 베어다 먹였다. 주로 소먹이는 일은 아이들의 몫이었다

2학년 가을부터 우리 집에서는 송아지를 길렀다. 축산농가 장려를 위하여 군청에서 분양 받은 것이라고 했다. 젖소가 아닌데도 검정색의 예쁘장한 암송아지였다.

소에 꼴을 먹이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끌고 샛둑이나 냉정골 산으로 가서 풀을 뜯어 먹였다. 이 검정소는 매우 순해서 나와 친하게 지냈고 내 말을 잘 들었다.

 

나는 송아지가 배가 고픈지 목이 마른 지를 곧 알게 되었다. 풀을 배불리 뜯으면 움푹 패인 양 허리가 메꿔지고 양쪽 배에 짐짝을 실은 듯이 팽팽히 불러 올랐다.

파리채를 휘둘러서 등에를 쫓고, 아주까리씨처럼 생긴 진드기를 따주기도 하였다. 해가 져서 소를 앞세우면 스스로 알아서 집에 돌아왔고, 오는 도중에 물 먹이는 일을 잊지 않았다.

 

두 번째 소는 노랑색 솟소였다. 몇 달이 지난 뒤 굵은 뿔이 나오면서 멀리 암소가 보이면 풀 뜯는 일을 작파하고 암소에게만 정신을 쏟았다. 한번 몽니가 나면 씩씩거리고 들이받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풀 뜯을 때 무심히 그놈 앞에 서기라도 하면 두 뿔로 들이받기 일쑤였다. 앞이 막힌 셔츠를 입은 내 몸이 두 뿔에 받쳐서 하늘 높이 들어 올려지기를 수없이 당했다. 그러나 그놈은 슬그머니 나를 내려놓고 더 이상의 행패는 부리지 않았다.

 

이웃 동네에서는 황소가 노인의 몸을 높이 받아 올렸다가 내려놓는 찰나 뿔에 찔려 크게 부상한 사건이 있었다. 망나니 황소를 더 이상 기를 수 없다는 가족들의 의견이 모아졌다. 지경(대야) 장날에 큰형님은 코뚜레에 젓대를 채운 수소를 조심하면서 끌고 나갔다. 그 후에도 소를 계속해서 길렀지만 사범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소와 나는 멀어지게 되었다.



성을 바꾼 조선 어린이 (제18회) - 제3장 초등학교 시절

 

3학년 1학기 때의 담임은 호사코〔寶迫〕 선생님이었다. 호사코 선생은 내가 책을 읽도록 길을 터주신 분이다. 그 당시에는 농약을 뿌리지 않고 농사짓던 때라 벼에 피해를 주는 이화명충 알을 학교에서 사들였고, 또 학급 학생들이 남의 집 논에 모내기를 하여 약간의 사례를 받기도 했다. 아무튼 학급에 약간의 공금이 생긴 모양이었다. 호사코 선생은 그 공금으로 동화책을 사서 교실에 비치하셨다. 책이라야 고작 네 권이었다.

 

이보다 앞서 2학년 때 군산에서 통학하던 친구가 나달나달 해어진 헌 동화책을 의기양양하게 보여준 일이 있었다. 책이름은「우라시마따오로」(용궁 이야기)였다. 그 동화책을 맛 본 후 나는 책읽기를 목타게 기다렸다. 이러한 내가 한꺼번에 네 권의 동화책을 마주하였으니 가슴이 뛰는 감동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읽는 속도가 느리거나 책에 무관심한 친구들을 제치고 내 차례를 기다려 동화책에 빠져들었다.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 남아서 네 권을 모두 읽은 뒤에야 호기심이 채워졌다. 그 책의 하나는 시골 마을의 가난한 소년이 산나물을 뜯어 팔아서 돈을 버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호사코 선생은 내가 교실 앞에 나가서 친구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도록 지시하셨다. 나는 이때부터 책 읽는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3학년 2학기의 학예회를 앞두고 나는 합창단의 지휘자로 뽑혔다. 3박자로 부르는 노래였는데 몇 아이가 앞에 나와 팔을 휘두르며 지휘 연습을 하였다. 호사코 선생은 우연히 나를 지휘자로 뽑았다. 아마 나의 팔 흔드는 요령이 3박자에 맞았던 모양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졸업할 때까지 합창단을 구성할 때마다, 그리고 전교의 브라스밴드의 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호사코 선생이 입대하고 담임을 가토〔加藤與之〕교장이 맡았다.

 

▲ 1940년 6월 경 일간지에 실린 창씨개명 안내광고

 

3학년 1학기 초부터 우리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의 우격다짐이 시작되었다. 2학년 3학기부터 학교나 집에서 창씨개명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고는 하였다. 그러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려니 생각했는데, 막상 새 학기가 되니 가슴에 붙이는 이름표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바꾸라는 호령이었다.

 

가토 교장은 조회 시간과 수신 시간마다 창씨개명에 대하여 훈화하였다. 처음에는 "진정한 황국신민이 되려면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 "개명하지 않는 집안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이다"라고 말하며, 1학기말쯤에는 "창씨개명하지 않는 학생은 매국노(賣國奴)다"라고 외쳐댔다.

우리 집에서는 창씨개명에 대하여 큰형님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개명하지 않는 사람에게 노무징용(勞務徵用)의 우선 순위를 매긴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나는 1학기 말에 김준호(金俊鎬)라는 이름표를 금정준호(金井俊鎬)로 고쳐 붙였다. 가토 교장은 대단히 좋은 성이라고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한국 사람은 성(姓)을 고치는 행위를 가장 욕된 짓으로 여기는데 나는 본의 아니게 성을 바꿨던 것이다.

 

훨씬 뒤에 알게 된 일인데 창씨개명은 39년 11월에 총독부 제령制令 19호로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40년 2월부터 8월 10일까지 씨명을 개정하여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가토 교장이 1 학기 내내 열을 올린 것도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름 방학 중에는 아산리의 모든 학생들이 아침에 라디오 체조를 하러 모였다. 라디오 체조는 3학년 때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깊은 아침잠을 깨고 눈을 비비며 체조장으로 뛰어 나가야 했다. 라디오 체조장은 당연히 애터 앞의 평질메라야 했는데 엉청굴에 사는 이춘구 선배가 아산리 학생의 대장이 된 뒤에는 엉청굴 뒷산의 잿배기로 체조장을 옮겼다. 어느 날 급작히 잿배기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듬성하게 서 있는 소나무와 풀을 뽑고 체조장을 만들었다. 넓고 편평한 평질메와 좁고 경사진 잿배기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애터 어른들은 체조장을 옮긴 데 대하여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봄 방학에는 아산리 학생들이 모여서 보리밭 밟기를 하였다. 밭 주인에 관계없이 가까운 밭에서 먼 밭으로 옮겨가며 밟았다. 겨울 동안 서릿발에 떠밀린 흙은 부풀어 있고, 그 위의 보리는 잎이 초록색일 뿐 뿌리가 공중에 들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작은 발에 밟힌 보리 뿌리는 흙 속에 차분히 묻히게 된다. 고랑마다 한 사람씩 밟거나 앞사람의 어깨에 뒷사람의 두 손을 올리고 줄서서 밟는다. 이렇게 해서 학생들은 식량 생산에 동원되었다.

 

학교 현관의 좌․우․상 기둥에 황국신민(皇國臣民),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이라는 큰 현판이 걸린 때가 이 무렵이었다. 수신 시간에는「황국신민서사」를 외웠고, 조회 시간에는 그것을 큰 목소리로 외쳤다. 어느 날인가 깨끗하고 기다란 종이 봉투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이라고 쓴 부적을 담임인 가토 교장이 나누어주며 신주 대신에"방의 정갈한 윗목에 붙이고,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하실 때 보이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가토 교장은 수신 시간에 황국정신(皇國精神)을 주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농사와 와라지 등교의 강요 (제19회) - 제3장 초등학교 시절

 

4학년 때는 새로 지은 교실 3개 짜리 신축교사에서 공부하였고, 담임은 후지하라〔藤原〕선생님이었는데 그 분은 일본군 중위였다. 이 무렵에 일본군은 중일전쟁으로 부상병이 많이 생겼다. 후지하라 선생도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이어서 귀에 붉은 약을 바르고 다녔다. 장교인데도 군인의 티를 내지 않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거의 하지 않는 너그러운 분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운동장에서 사열식(査閱式)을 하였는데 후지하라 선생이 교장을 대신하여 사열관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 학년을 마치기 전에 그 분은 다시 소집되어 입대하였다.

 

4학년부터 직업과목으로 농업을 실습하였다. 개정초교에는 제1실습장(면사무소 앞)과 제2실습장(아동리 소재)이 있었는데 우리들은 학교에서 전군도로를 거쳐 제2실습장까지 웃통을 벗은 채 걸어가서 농사 실습을 하였다. 호박․양배추․대파․고구마 등을 가꾼 기억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가축 당번과 농기구 당번을 하였다. 가축은 닭․토끼․거위․소를 길렀는데 당번 날은 집에서 풀이나 모이를 가지고 가야 했다. 어느 상급생이 어린 까투리를 한 마리 잡아다 닭장에 넣었는데 철망에 비벼대서 앞 이마가 벗겨져 안쓰러웠다. 그 까투리에게도 모이를 주어 오래도록 살아있게 하였다.

 

농기구 당번 날은 다른 학급의 실습 시간에 농기구를 내주거나 거둬들이는 일과 부서진 것들을 고치는 일을 하였다. 나는 가축 당번은 과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농기구를 고치는 일에는 재미를 붙였다. 괭이나 쇠스랑의 흔들리는 자루 사이에 알맞은 크기의 쐐기를 박아서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 나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이때 손가락을 다쳐 피가 흐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치는 데 열중하였고, 그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학교에서는 실습농장에 쓸 두엄을 많이 만들었다. 두엄을 만들기 위해서 6월부터 9월 사이(여름방학은 제외)에는 풀 다발을 등에 지고 등교하였다. 교문에서 기율당번이 다발 크기를 검사하거나 담임선생이 조회 시간에 검사하였다. 나는 풀 다발을 지고 3.7 킬로미터의 등교 길을 땀을 흘리고 가슴을 조이면서 걸어야 했다. 이 일은 무척 힘들었지만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다. 덕분에 운동장 변두리에는 각 학급의 퇴비 더미가 쌓여서 비교되고 그것이 농장으로 옮겨졌다.

 

중일전쟁은 학생들을 점점 더 괴롭혔다. 관솔(송진이 들어있는 죽은 솔가지)을 따서 학교에 가져오도록 강요당했다. 일요일에는 손도끼를 들고 산에 가서 관솔을 찍는다. 소나무에 매달려서 큰 관솔을 따기에는 힘이 부치므로 가는 것들만 딸 수밖에 없다. 보자기에 싼 관솔은 교실에 가서 검사를 받은 다음 어디론지 가져갔다.

 

▲ 일본식 짚신 '와라지'

 

학생들은 발에 와라지(짚으로 엮은 일본식 짚신)를 신고 등교하도록 강요되었다. 와라지는 3학년 때부터 신었는데 4학년 때에 더 엄하게 다스려졌다. 나는 형님들이 삼아준 와라지를 신고 등교하였다. 처음에는 와라지로 먼 등교 길을 걸을 때 엄지발가락 사이가 불이 나는 듯이 아프고 발등에 물집이 잡혀서 무척 힘들었지만 점점 길이 들었다.

 

중요한 군수품의 하나인 고무가 전쟁에 쓰였으므로 고무신 배급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시절이었다. 와라지 밑바닥이 닳거나 끈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자전거 타이어를 밑바닥에 붙이기도 하였다. 학교 가까이의 아동리 앞길은 자갈과 사금파리가 흩어져서 발바닥에 상처가 나기 일쑤였고, 더구나 가운데 발가락은 돌에 채여서 성할 날이 없었다.

 

학교 남쪽의 옥성리에는 큰 관개수로(원똘)가 흐르고 곳곳에 수문이 가로 놓여 있다. 내가 인솔하여 제2실습장에서 일을 한 뒤 우리 반 학생들은 더위를 식히기 위하여 그 수문으로 놀러갔다. 마침 수문은 보수 중이어서 넓고 두꺼운 널빤지 몇 조각이 물위에 떠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옷을 홀홀 벗고 뛰어들어 널빤지 위에 올라앉거나 그 위에 팔을 걸쳤다. 우리들은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널빤지가 기우뚱하며 기울어지는 찰나 뒤집혔고 우리들은 모두 물 속에 잠겼다. 그런데 웬일인가. 누군가 내 몸을 힘껏 껴안는다. 순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머리를 스쳤다. 내 몸을 휘감은 팔을 풀려고 허둥댔지만 듣지 않았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비틀어 몸에서 떼어냈다. 몸이 풀려서 두 팔을 흔들어 몸을 물 위에 솟구치니 옆에 널빤지가 떠 있었다. 나는 널빤지를 붙들고 숨을 내뿜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언덕에 남아있던 친구들이 어른에게 구조를 청하러 뛰고 있었다.

 

이때 내 옆에서 손가락 하나가 마치 낚시찌처럼 꼿꼿하게 물 위에 솟아오르지 않는가. 본능적으로 그 손가락을 위로 낚아채는 찰나 4 명의 친구들이 서로서로 껴안아 한 뭉치가 된 채 솟아올랐다. 헤엄칠 줄 모르는 맥주병이었던 그들의 배는 개구리 배처럼 뺑뺑하였다. 나는 며칠 동안 넋 빠진 아이처럼 말을 잊었지만 다행히 이 사고는 무사히 끝났다. 4학년 1학기 때 경험한 이 사건은 성인이 되어 학생을 인솔할 때 순발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어느 날 편평한 운동장에서 낙상사고가 일어났다. 점심시간 뒤에 모든 학생은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양 모군(몸집이 작은 2학년 학생)과 부딪쳤고 그의 몸이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그는 일어나지 못한 채 얼굴이 노랗게 질려서 아픔을 호소했고,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그를 등에 업고 위생실로 달려갔다. 거기에서도 그는 다리를 가누지 못하였다. 위생 담당인 임  선생님의 지시로 그를 학교 소사의 자전거에 태워 농촌위생연구소(소장 이영춘 박사)로 갔다. 그의 다리는 뼈에 금이 생겼다 하여 기브스를 대고 석회칠을 받았다.

다음 날부터 나는 그를 엎고 위생연구소에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누가 시키는 일이 아니었지만 나와 부딪쳤으니 당연히 내가 업어 날라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학교에서 위생연구소까지는 지름길로 2킬로미터의 거리이다. 두 달 뒤에 비로소 기브스를 풀었지만 그 뒤에도 나는 그를 만나면 위로했고 사과하였다. 언젠가 가토 교장은 운동장이 좁아서 충돌 사고가 자주 난다고 탄식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4학년 2학기 말(1941년 12월 8일)의 조회시간에 가토 교장은 대동아전쟁이 일어났다고 훈시하였다. 진짜 큰 전쟁이 일어났으니 너희들은 황국신민이 되고 천황폐하를 위하여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라는 것이었다.



호랑이 담임 선생 (제20회) - 제3장 초등학교 시절

 

5학년과 6학년 때의 담임은 사까이〔酒井政道〕선생님이었다. 학급에서 첫 인사하기를"나는 작년에 결혼하였고, 27세이며 일본군 오장이고 이름이 사까이 마사마찌이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셨다. 감수성이 예민할 때에 2년 간이나 담임을 맡은 사까이 선생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일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그 분은 매를 자주 들었다. 1년에 몇 번씩은 목검木劒이 몇 토막 나도록 어린 학생들을 패댔다.

 

나도 엎드려뻗쳐의 자세로 궁둥이와 장딴지를 두들겨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퍼런 피멍이 든 친구들이 자주자주 눈에 띄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가리지 않고 화가 나면 매타작을 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호랑이 담임 선생한테 2년 동안 배웠다. 또 조선 학생들의 자존심을 몹시도 상하게 하는 욕설을 담임 선생은 서슴없이 내뱉는 분이었다.

 

내가 학예회에 출연하기로 뽑혀서 연습을 할 때의 일이다. 교실이 너무 추워서 벌벌 떨며 연습하는 우리를 본 담임 선생은 자기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한 친구와 함께 선생님 관사에 가서 빈방에 안내되었다. 선생이 오시지 않아서 앉아 있다가 오시는 인기척이 나서 우리는 일어섰다. 선생은 우리에게 조선 사람은 도둑놈 근성이 있다고 몰아 부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순진한 우리가 어떤 물건을 훔치려고 일어나다가 들킨 것 같이 매도하는 데는 할 말을 잊었다.

 

우리 학급에서 역사 과목의 연구 수업을 할 때였다. 사까이 선생은 미리 준비한 교안을 교탁 위에 놓고, 마치 연극배우가 대사를 외우듯이 수업을 두서너 번 연습하였다. 미리 학생을 지정하여 대답을 달달 외우도록 판을 짜는 것이었다. 나는 마지막 결론을 발표하도록 짜여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이 너무 길고 어른들이나 쓰는 어려운 말이어서 애를 먹었다.

 

막상 교장을 비롯한 외부 손님들이 참관하는 진짜 연구 수업 시간에 담임 선생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붉은 얼굴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발표하기로 지정된 학생들의 이름이 뒤바뀌어 선생과 학생이 당황하는 꼴을 보고 참관하던 선생님들이 쿡쿡 웃음을 참고 계셨다.

 

▲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나

 

5학년 봄에 두 번째로 큰 전승기념행사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싱가포르 함락이었다. 난징 함락 때보다 더 요란한 행사였다. 낮에 온 면민이 크고 작은 일장기와 무적일본(無敵日本) 등 구호를 적은 대형 플래카드를 들고 학교 운동장에 모였고, 면장의 일본말 연설, 이장 대표의 조선말 연설이 있고, 일본인들의 군가와 농악소리, 큰북소리가 뒤범벅을 이룬 다음 두 패로 나뉘어 전군도로를 행진하였다.

 

일본군은 전년 12월 8일에 진주만(하와이)에 있는 미국의 태평양함대에 기습공격을 가하고 여세를 몰아 마닐라(필리핀)를 점령하며, 42년 2월 15일에 싱가포르를 함락하고, 이어서 자바섬을 점령(3월 9일)하여 네덜란드군을 굴복시켰던 것이다.

 

이 무렵이 일본 군벌의 최전성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함대가 대패 당한 것을 계기로 하여 전세는 무참하게 기울어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도 규모는 작았지만 군에 입대하는 청년들을 환송하는 행사가 자주 있었다. 그럴 때에는 반드시 개정역까지 나가서 일장기를 흔들며 청년들을 환송하였다.

 

5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종군기(從軍記)가 생각난다. 어느 일본군 종군기자가 남방(南方)에서 진격하던 군대를 따라가며 쓴 글이었다.「불볕더위 속에서 대포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자전거로 부대 뒤를 쫓아간다. 진흙탕에 빠진 자전거가 쭈그러져서 움직이지 않는다. 부서진 자전거를 버리고 장갑차의 한구석에 앉을 자리를 얻었다. 배낭에서 꺼낸 가루된장에 오이를 찍어먹는 그 맛은 어찌 고국에서 맛볼 수 있으랴….」 이 글을 배우려는 참에 상부의 명령으로 중단되었다. 아마도 이 기사를 쓴 장소를 연합군에게 빼앗겼던 것 같다.

 

5학년 1학기 때 우리 집에는 큰 변고가 생겼다. 큰형님이 4월에 해군 군속으로 끌려간 것이다. 나는 개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는 형님 모습을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한 채. 나를 본 가토 교장과 유종원 선생님이 무슨 말인지 위로의 말을 한 것 같다.

 

우리 집안의 대들보 구실을 하던 큰형님이 없으니 가족들은 의기가 소침하고 큰형수님이 우울해졌다. 어린 내 기분도 몹시 허전하였다. 마을의 소식도 끊기는 듯하고 사람들이 우리 집을 멸시하는 것 같았다. 구심점을 잃은 우리 집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든 의논을 하게 되었다.

 

5․6학년 때에도 풀 다발을 지는 등교는 계속되었다. 집에서 놋숟가락과 쇠붙이를 학교에 가져가야 했지만 우리 집에는 그런 여유가 없어서 길가에서 쇠토막을 주어서 충당하였다. 5학년 봄부터는 와라지도 신지 말고 맨발로 등교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와라지를 신지 않은 발바닥이 몹시 아팠지만 차차 길이 들었다. 그러나 전군도로의 아스팔트 위를 걸을 때는 뜨거워서 딱 질색이었다.

 

교실에 들어갈 때에는 흙 묻은 발을 학교 동쪽에 있는 수로水路(방화용으로 운동장과 평행하게 파놓은 긴 물웅덩이)에서 씻고 징검돌을 밟으며 들어갔다. 초겨울에 첫눈이 오든 날에도 와라지를 신으라는 명령이 없으니 맨발로 등교해야만 했다. 마침 빨갛게 핏기가 선 우리들의 발을 본 가토 교장은 빙긋이 웃으면서 내일부터 와라지를 신고 와도 된다고 명하였다.

 

전시 체제 하의 수업과 놀이 (제21회) - 제3장 초등학교 시절

 

가토 교장은 3학년 2학기 때 우리 학급을 임시로 담임하였고 여러 해 동안 수신(修身)을 가르쳤다. 그리고 어린 나는 개인적으로 교장 선생과 자주 접촉할 기회가 있어 마음  속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체구는 살 한 점 없이 야위었고, 몸이 가늘어 성년이 된 뒤의 내 모습과 비슷하였다. 그는 수신 시간에"말이 많으면 손해가 많다. 곧 다변(多辯)은 손변(損辯)이다."라고 가르쳤다. 이때부터 나는 말을 절약하는 습관이 생기고 글쓰기에 비하여 화술(話術)이 뒤지며 말하기보다 듣는 성격으로 굳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때 교장 선생은 일본 스님 일구(一球ㆍ일본의 높은 스님)의 물 절약 이야기를 하였다. 그 스님은 떠낸 우물물을 데워서 유담포 (이불 속에 넣고 자는 함석으로 만든 납작한 물통)에 넣어 이불 속을 덥히고 아침에 그 미지근한 물로 세수하고 걸레를 빨며 마지막에 먼지 나는 마당에 뿌렸다는 옛이야기였다. 이때부터 나는 물을 아끼는 습관이 들었고 이제는 모든 물건을 아껴 쓰는 습관으로 발전하였다.

 

가토 교장은 취미가 다양하였다. 나뭇가지 전정, 낚시, 수렵 등에 능하였다. 교정의 나무를 손수 전정하여 언제나 말끔하게 가꾸었고, 엽총을 메고「존」이라는 사냥개를 데리고 아산리까지 혼자 오곤 하였다. 나는 성장한 뒤에 교장과 같은 취미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개의 분재를 기르고 낚싯대를 사고 엽총 대신 공기총을 지녀 보았지만 가토 교장처럼 취미를 즐기지 못하고 말았다.

 

가토 교장은 한국 여성과 결혼한 분이었다. 광복 후 그는 일본으로 가지 않으려고 무척 망설이는 것을 보았다. 해방의 환희에 젖어 있을 때 사범학생인 나를 만나면 반가워하며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찐 고구마를 대접하면서 자신의 점심끼니라고 말하며, 한국에 남아서 농사를 짓고 낚시를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희망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 해에 일본으로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

 

농번기에는 사까이 선생이 인솔하여 학급 전체가 모내기를 하였다. 웃통을 벗은 채 맨발로 먼 길을 걸어가서 모를 심었다. 모를 찔 때는 새끼손가락이 아프고, 심을 때는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 햇빛에 데인 등과 이마는 따갑고 욱신거린다. 어느 날인가 논두렁에 모를 실은 달구지가 지나면서 친구(채수탁 군)의 도시락을 납작하게 깔아뭉갰던 기억이 난다.

 

우리 학급은 주로 발산리의 일본인 출정군인 집의 모내기를 하였다. 일주일가량 모내기를 계속하면 온 몸은 검정개처럼 까맣게 그을고, 이마와 등에서는 매미 허물같이 피부가 벗겨졌다. 모내기뿐만 아니고 여름에는 논의 만도리에도 동원되었다.

 

▲ 일제강점기 글라이더 만들기를 하고 있는 초등생들

 

체육 시간에는 사까이 선생의 지휘로 군대 훈련을 주로 하였고, 높이뛰기, 멀리뛰기, 나무오르기 등을 약간 할 뿐이었다. 몸이 약하고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나는 웃통을 벗는 운동 시간을 무척 싫어했다. 대마봉사전 앞의 씨름판에서 이따금 일본씨름을 했지만 나는 할 때마다 져서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 중이라서 공이 없었으므로 축구, 농구, 야구를 하지 못했고 그 경기를 구경하지도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원족을 간 기억도 없고, 다만 가을에 한 차례씩 전교생이 토끼몰이에 가곤 하였다. 전시 체제 속에서 재미없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다만 1년에 한두 차례씩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4․5․6 학년생이 길게 열을 지어 군산극장이나 희소관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 내용은 일본군이 승리하는 장면이나 조선 청년이 지원병으로 입대하는 장면이었다. 군산에서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 먼 길을 걷느라 지친 나는 녹초가 되었다.

 

6학년 1학기 때 사까이 선생은 우리들에게 일본 소년비행학교 모집에 응시하라고 권유하였다. 담임 선생에게 주눅이 들어있던 우리들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조회 시간에 가토 교장도 응시를 권고하였다. 비행학교 입학 연령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모두 신체 검사를 받아야 했다.

 

우리들은 멀리 대전까지 가서 하룻밤을 여관에서 자면서 신체 검사를 받았다. 두말할 것도 없이 심판관은 나에게"집에 돌아가서 많이 먹고 몸을 튼튼하게 단련하라."며 불합격을 때렸다. 이 때 합격자는 오직 몸집이 크고 건강한 관호 사촌뿐이었다.

 

대전에서 할 일 없는 우리들은 대전극장에 영화를 보러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다다미를 깔아놓은 2층에서 영화를 보았다. 일본군의 낙하산 부대가 공중 낙하하는 영화를 상영하였는데 그들의 실수 장면을 친구인 김완태 군이 킥킥거리며 비웃는 태도로 보았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일본 옷을 걸친 사람이 김 군의 볼따귀를 마구 때리는 것이 아닌가. 불의의 구타를 당한 김 군은"잘못 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다미 위로 쓰러져 발로 채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학교에 와서 절대 비밀로 부치자고 입을 모았다.



홀로 치르러 간 입학시험 (제22회) - 제4장 청주사범학교 시절

 

학교생활은 지루하고 호랑이 담임 선생이 무서웠지만 학과 공부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발표를 잘하는 편이었고 학년말에는 거듭 우등상을 받았다. 학과 중에서는 지리․역사가 재미없고 산술이나 이과 공부가 재미있었다. 6학년 2학기에는 상급 학교 진학을 해야 하는데 큰형님이 안 계시니 의논할 사람이 없어 답답하였다.

 

나는 담임 선생이 권하는 대로 따르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아마 사까이 선생은 가토 교장과 의논했는지 나에게 청주사범학교에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청주사범은 특차 지원이어서 11월에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사범학교의 필기시험을 치르기까지는 미리 두 번의 서류전형이 있었던 것을 나중에사 알았다.

 

나는 청주가 어느 도에 있으며 어떻게 가는지조차 몰랐다. 이 무렵에 기차표 사기가 대단히 어려웠으므로 학교에서 여행증명원을 받아 가지고 대야역(군산선)에 가서 미리 왕복 기차표를 샀다. 다음날 책과 찹쌀 김밥을 싸들고 혼자서 기차에 올랐다. 이리(익산)에서 호남선으로 갈아타고, 조치원에서 다시 충북선으로 옮겨 청주에는 땅거미 질 때에 내렸다.

 

이리와 조치원역에서 갈아탈 때 지하도에서 방향감각을 잃어 당황한 기억이 난다. 정거장마다 쉬는 완행열차였으니 무척 지루한 여행이었다. 청주 역전에는 사범학교 수험생을 겨냥하여 여관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자고 권하는 대로 이끌려서 들른 곳이 김해여관(金海旅館)이었다. 한 방에 몇 사람이 합숙하였는데 주로 충청남도에서 온 학부형과 함께 온 학생들이었다.

 

 

▲ 일제강점기의 이리역

 

다음 날부터 필 시험, 구두시험 및 신체검사를 3일 간 치렀다. 여관에서 학교까지는 약 3킬로미터 거리인데 매일 걸어 다녔다. 이 학교를 제외하고는 내가 갈 학교가 없다고 마음속에 굳게 다짐하고 시험을 열심히 치렀다. 마지막 날 시험은 오후 늦게 끝났다.

 

여관에서 짐을 챙기고 역에 나와 보니 조치원까지의 막차뿐이었다. 조치원에 내리니 어둠이 짙게 깔리고 호남선 열차는 없었다. 마침 충청남도(두계)에서 학부형과 함께 온 수험생과 일행이 되었다. 나는 여관에서 자고 다음 날 새벽 차를 타고 싶었는데, 학부형이 아는 친척집에 가자고 제안한다. 그들을 따르기로 하고 무거운 짐을 졌다.

 

그 분이 안다는 친척집은 조치원 시내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눈짐작으로 논두렁을 지나고 도랑을 건너기를 1시간쯤 걷는다. 어느 농가에 다다라 싸리문을 두드리고 주인을 깨우고 호롱불을 켜게 한다. 동행한 학부형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저녁밥을 부탁한다. 마침 내가 집에서 가져갔던 말라비틀어진 찹쌀밥을 내놓으며 밥을 짓기를 권한다. 죽같이 묽은 찹쌀밥을 먹은 다음 잠에 곯아떨어진다. 그 무렵의 초등학생은 요즈음보다 성숙했을까. 나 홀로 청주까지 입학시험을 치르러 갔으니.

 

청주에서 돌아온 나는 시험 결과를 지루하게 기다렸다. 만약 불합격이면 담임 선생은 이리농립학교를 지정할 텐데 나는 내키지 않았다. 약 20일 간 지났으리라. 아침에 사까이 선생은 또 화가 나셨고, 학급 전체가 매타작을 당하고 나도 몇 대인가 뺨을 맞았다.

 

모두가 우울한 오전을 넘겼다. 그런데 사까이 선생이 풀어진 얼굴로 미소를 띠며 교실에 들어왔다. 나에게 손짓하며 나오라는 것이었다. 마음을 조이며 가까이 다가가니 합격 통지서를 건네주었다. 일본에 계시는 큰형님이 기다릴 터이니 대야우체국에 가서 합격 전보를 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10리 길을 뛰다시피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전시라서 합격 통지같이 한가로운 전보는 쳐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나의 사범학교 합격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마을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개정면 내의 유지有志들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가토 교장은 나를 보면 벙글벙글 웃음 짓고, 사까이 선생도 얼굴의 주름이 펴졌다. 쓸쓸하기만 했던 우리 집에도 화기(和氣)가 돌았다. 일본에 계시던 큰형님은 편지로 알린 소식을 듣고「합격축하」의 전보로 회신하였다. 어머니와 큰형수님은 고마우신 학교 선생님들을 대접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으셨다. 물자가 귀한 전시였지만 정성을 다하여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선생님들을 집으로 모셨다. 선생님들이 곤드레가 되어 돌아가셨다는 마을 어른들의 후문이었다.

 

나는 관립청주사범학교(官立淸州師範學校)의 심상과(尋常科)에 제4회로 입학하였다. 입학하던 하루 전날 셋째 규호(奎鎬)형님과 함께 청주역에 도착하여 입학시험 때 유숙했던 김해여관에 투숙하였다.



천재를 둔재로 만드는 사범교육 (제23회) - 제4장 청주사범학교 시절

 

입학식 날 신입생들은 강당에 들어가고 학부형들은 밖에서 참관하였다. 가마쓰까〔鎌塚扶〕교장은 "아이들을 일단 학교에 맡겼으니 만약 학교 생활에 불만을 말하려는 학부형이 계시거든 지금 당장 데리고 가시오."라고 깐깐한 목소리로 겁주는 훈시를 하였다.

 

신입생은 120명, 3학급으로 편성되었는데 나는 1학년 3반에 속하였다. 신입생들은 15대 1의 경쟁을 뚫고 입학하였다고 추켜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 학급에 일본인 학생이 15명이 섞여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2:1 정도의 입학시험 특전이 주어졌으므로 조선 학생끼리의 경쟁은 25대 1이 되는 셈이었다. 신입생의 지역 분포는 대부분 충남북 출신이고, 경기, 황해, 강원에 몇 학생씩 있고 전북과 전남은 각각 한 학생뿐이었다.

 

청주사범학교는 조선총독부 관제(官制)에 따라 41년 3월 28일에 설립인가가 났고, 같은 해 4월 1일에 일본인 가마쓰까 교장과 부속국민학교 주사로 우노[宇野卓夫] 선생이 취임하였다. 청주사범은 처음에 청주공립농업학교 구내에 가교사를 짓고 심상과(5년제․147명)와 특설강습과(1년제․97명)를 모집하였다고 한다. 2년 뒤인 43년 7월에 청주시 수곡동에 목조 건물을 짓고 이사하였다.

 

학교 부지를 닦고 건물을 지으며 이사하는 과정에서 상급생들의 피눈물 나는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내가 44년 4월에 입학하였을 때 학교 부지가 정비되어 있을 뿐, 본관은 없고 단층 짜리 부속초등학교 교사 한 동, 기숙사-교실 겸용 건물 두 동, 취사실과 강당 각 한 동씩이 전부였다. 운동장은 무척 넓어서 여름에 풀이 무성하였다.

 

입학하던 해 1학기에 본관을 짓고 있었는데 시멘트 기초 위에 겨우 1층의 기둥이 세워지고 폭격에 대비한 시멘트 벽돌의 방화벽을 쌓다가 중단하고, 2층 바닥을 판자로 조립하며, 지붕의 목재 구조물을 수많은 상급생들이 떠밀어 올리다가 몇 사람이 밑으로 떨어져서 부상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 1940년대 초 청주사범 본관

 

입학한 지 1주일쯤 뒤에 가마쓰까 교장이 총독부 시학관(視學官)으로 영전하고, 오까모토[岡本 寬] 교장이 부임하여 8․15광복까지 재임하였다. 광복하던 해 10월에 최기철(崔基哲ㆍ현 서울대 명예교수) 선생님이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내가 아는 청주사범 졸업생은 심상과 제2회생(1947년 7월 졸업)으로 현재 생물학계에서 이택준 교수(중앙대)와 임양재 교수(중앙대)가, 농학계에서 허문회 교수(서울대 농대)가 청주사범생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와 동기인 제4회생은 50년 4월에 64명만이 졸업하였는데 이중에서 전의식 교장이 식물학자로 활약하고 있다.

 

6. 25동란 중에는 철수와 수복을 각각 두 번 되풀이하는 가운데 30개 교실이 파괴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55년에 이층 본관이 준공되고, 62년에 국립청주교육대학으로 승격한 후, 63년에 제17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청주사범학교는 문을 닫고 교육대학에 이관하였다.

 

일제시대에 사범학교는 처음에 경성(서울), 대구 및 평양에 세워졌고, 다음에 전주와 공주(여자)에, 이어서 대전, 광주, 진주에, 마지막에 춘천, 청주에 세워져 10개교가 있었다. 광복 후에 초등교원의 수급을 위하여 군산, 충주 등 일곱 개 학교가 더 세워졌다.

 

일제시대의 사범학교 심상과 입학은 공립국민학교 6년 졸업자 또는 고등국민학교 1․2년 수료자에게 응시자격을 주고, 두 차례의 서류전형에 합격한 자에게 필답시험과 구두시험, 신체검사를 거쳐 특차로 합격자를 뽑았었다.

 

5년간 수업을 이수한 후 졸업과 동시에 2종훈도(지금의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주었다. 재학 중에 소정의 교련 학점과 교련 검정 시험에 합격하고 6개월의 단기 병역 복무를 마치면 오장(五長, 하사관)에 임명되고 예비역에 편입되어 교직에 몰두할 수 있는 병역의 특혜를 주었다.

 

사범생은 수업료가 면제되고 관비(官費)를 받았다. 조선총독부의 우민정책(愚民政策)은 조선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정책에서 기회를 주되, 우수한 청소년에게 관비를 주고 앞길을 막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마치 낚싯밥을 던져서 큰 물고기를 유인하듯이 관비를 미끼로 입학시험을 특차로 빨리 쳐서 재주 있는 학생을 모집하였다.

 

사범학교에 입학시킨 다음에는 관비를 구실로 황국정신을 철저히 주입하여 세뇌(洗腦)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처박아 놓은 다음 일생 동안 한 눈 팔지 못하도록 꼼짝 못하게 묶어 두었다. 곧 천재를 모집하여 둔재를 만드는 교육을 하였던 것이다. 광복 후 군정시대에 학제 개편과 동시에 관비가 중단된 뒤 사범 출신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눈부시게 진출하여 높은 수준에 오른 분들이 많았다. 이 사실은 총독부가 우민정책을 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군사훈련으로 해가 지고 (제24회) - 제4장 청주사범학교 시절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담임 선생이 시키는 대로 사범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다행히 광복 후 학제 개편의 혜택을 받아 앞길이 가로막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범학교, 서울사대, 공주사대를 거치면서 20여 년 동안「사범」자를 이력서에 붙이게 되었다.

 

입학한 이튿날부터 군사훈련(요즈음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해당)을 운동장에서 하루 종일 2주일 간 받았다. 초등학교 때 배운 군사훈련은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진다. 옷 입고 벨트 매며 각반 두르고 모자 쓰며 배낭 메는 방법이 철저히 바로잡아진다. 기본형에서 한 치라도 틀리면 목검이 어깨에 날아든다.

 

“차렷!” 자세는 가슴을 앞으로 펴고 팔과 손가락을 직선으로 펴서 바지의 봉함선에 대고, 뒷목을 펴고 눈을 부라리듯이 앞을 응시한다. “앞으로 가!”는 다리를 곧게 뻗은 채 발바닥을 땅에 수평으로 유지하며 앞으로 내딛고, 팔과 손가락을 수평선까지 앞뒤로 흔들어라 등의 군사기초훈련이다. “앞으로 가!”를 연습한 자리에는 발바닥으로 밀려서 패인 흙이 10센티미터 깊이로 홈이 패인다.

 

이 군사훈련은 오리엔테이션이 아니고 황국신민으로의 길들이기였다. '천황폐하'라는 말이 나오면 로봇처럼 꼿꼿한 차려 자세를 취한다. 어느 때라도 천황폐하의 부름을 받으면 목숨을 내던지라는 것이다. "너희는 사범학생이다 사범학생은 어른이다. 어른은 부름을 받았을 때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세뇌를 귀가 닳도록 듣는다. 군사훈련이 끝나는 2주일 뒤에 신입생들은 눈이 쑥 패이고 광대뼈가 툭 불거지며 햇빛과 바람에 그을린 얼굴이 거북 등처럼 갈라져서 마치 누룽지를 벗기듯이 벗겨졌다.

 

입학한 지 수 일 후에 신입생에게는 교복, 교모(전투모), 허리벨트, 배낭, 교과서, 노트, 금전출납부, 해부기를 비롯한 문방구가 배급되었다. 물자가 귀한 전시에 이처럼 많은 물품을 준 것은 사범생에 대한 우대였는지도 모른다. 의류와 배낭은 카키색으로 통일되고, 다리에 감는 각반(脚絆)만은 테이프처럼 좁은 흰색 천이었다. 신입생들의 옷차림은 일본 군인의 모습과 흡사했지만 흰색 각반이 특이하여 신입생들이 청주 시내에서 쉽게 눈에 띄었다.

 

2주일 뒤에 강의가 시작되어 교실에 들어가 보니 기가 막혔다. 강의실은 상급생들이 거주하는 기숙사(제일료)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책상도 걸상도 없고 교탁과 흑판이 있을 뿐이었다. 마루 바닥에 주저앉아서 강의를 들어야 했다. 강의실 뒤쪽에는 기숙사생들의 이불과 생활도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개교한 지 4년이 되는 관립청주사범학교의 관립官立이라는 글자가 무색하지 않은가.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이른 일본의 어려운 경제가 사범학교의 시설에 반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 청주사범학교 1학년 때의 학급사진 / 담임은 장인완 선생님 (1944년)

1학년 3반 담임은 처음에 공작工作을 전공한 사사기[佐佐木] 선생이 맡았다. 교문 문주에 양각하여 걸어놓은 학교 문패가 사사기 선생의 솜씨라고 했다. 사사기 선생은 지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 분이 군대에 입대한 후 장인완(張寅琓) 선생님이 우리 담임을 승계하셨다. 수신(修身)을 강의하던 요시나리[鐘成] 선생은 잡담만 늘어놓고 조선 학생을 차별하는 데 앞장선 분이었다.

 

키가 큰 야마구찌[山口] 선생은 국어(일본어)를, 콧수염을 기른 오쓰카[大塚] 선생은 문화사(서양사)를 강의하였는데 그분은 태평양전쟁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고, 곧 일본이 패망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수학은 나리자와[成澤] 선생이, 음악은 이호섭 선생이, 미술은 이시가와[石川] 선생이 가르쳤다. 미술 교육을 위한 시설s이 없었고 음악 교육 시설은 강당에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있을 뿐이었다.

 

조선인 선생으로는 생물에 최기철, 물상에 장인완, 영어에 김홍길, 체육에 정화용(鄭華溶) 그리고 음악에 이호섭 선생만이 계셨다. 최기철 선생님은 1학년 학생들을 야외에 자주 데리고 나가서 자저(自著)인「식물분류검색표」로 식물 이름을 가르쳤고, 철사 끝에 꿴 아주까리씨에 불을 붙이고 타는 모습을 보이면서 식물체 내의 기름에 대하여 토의시켰다.

 

동경물리학교를 졸업한 장인완 선생님은 물상에 대하여 재미있게 강의하시고, 동경고사를 졸업한 정화용 선생님은 재학시절에 그룹 마라톤 선수의 멤버였는데 시합 전에 준비한 도시락이 너무 매워서 먹지 못했기 때문에 시합 중에 눈이 보이지 않아 옆 선수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뛰었다는 무용담을 들려주셨다.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김홍길 선생님은 영어를 정성껏 강의하고, 어느 날 조회 시간의 5분 훈화 때「종이와 문명」에 대하여 특강하셨다. 광복 후 조선 선생님들은 대학교와 중고교의 강단에서 크게 활동하셔서 자주 사사(師事)할 기회를 가졌지만, 김홍길 선생은 월북하여 김일성대학 교수가 되었다는 풍문을 들었다.

 

일본군 중위이며 유도 선생인 미소구찌[溝口]교관,「호랑이」로 불리는 육군소위 하기노[萩野]교관 및「오토바이」의 별호를 가진 노기시[野岸]농업선생은 대단히 무서운 분들이었다. 신입생의 기초정신훈련을 맡은 미소구찌 교관은 점잖은 편이었지만, 삐쭉 마른 체구에 성질이 불같은 하기노 교관은 항상 차고 다니던 번쩍이는 지휘도(指揮刀)로 학생들의 머리를 내리쳐서 피를 흘리고는 하였다.



가마니 펴고 자는 기숙사 (제25회) - 제4장 청주사범학교 시절

 

사범학생은, 청주시 내에 자택을 가진 학생을 제외하고, 기숙사에 입사하는 것이 교칙이었다. 기숙사는 와우산(臥牛山) 남쪽 기슭의 높직한 언덕 위에 있는 두 채의 양관(洋館ㆍ예수교 선교사들의 공관으로 쓰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철수한 양옥집, 현재 일신여고 교사로 이용)이었다. 외모는 붉은 벽돌의 2층집이고 주변에 큰 나무들이 있어 경관이 훌륭하였다.

 

청주사범에는 기숙사가 3개 있었다. 학교 내에 있는 기숙사를 제1료(第一寮), 석교동 로타리에 있는 삼층건물을 제2료 그리고 와우산 기슭의 것을 제3료라고 불렀다. 따라서 신입생들은 제3료에 수용된 것이다. 제3료는 다시 남료(南寮)와 북료(北寮)의 두 건물로 나뉘고, 나는 북료에 들어갔다.

 

배당된 방에 들어가 보니 마루바닥에 가마니 떼기가 펴 있지 않은가? 책상이라는 것은 칠도 페인트도 칠하지 않은 긴 널빤지에 네 다리를 붙인 것이었고, 밥 먹을 때는 식탁을 겸한다는 것이었다. 개인 물건을 보관하는 시설도 전혀 없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살다가 철수한 후 방치한 집을 학교에서 임시로 빌린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실망으로 내려앉는 가슴을 누르고 있는데 형님이 청주역에서 짐 보퉁이를 찾아오셨다. 당장 이불을 꺼내야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합격통지서에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준비물을 적은 명세서가 함께 들어 있었으므로 생활도구를 고루 준비하였다. 한 학기 동안 쓸 이불, 의류, 학용품, 세수 대야를 포함한 세면도구, 심지어 젓가락 통까지 포함되어 있으므로 짐의 크기는 작지 않았다.

 

일본 학생들이 가죽으로 만든 트렁크를 가져온 데 비하여 한국 학생들은 대오리로 만든 고리짝을 가져온 점이 달랐다. 나는 대오리 고리짝을 샀었지만 너무 커서 어머니가 쓰시던 나무궤짝을 깨끗하게 손질해서 가져왔기 때문에 특이하여 위화감이 들었다.

 

형님은 짐 보퉁이를 풀어 주고 기숙사 시설에 실망한 듯 한 표정을 지으며 ‘공부 잘 하거라.’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히 떠나셨다. 입학식 때 교장 선생님의 훈시에 가위가 눌린 다른 학부형들도 불평 한마디 없이 떠났다.

 

▲ 40년대 청주사범 학교 전경

 

각 방마다 식사 당번이 정해지고, 큰 양동이를 두 개씩 든 당번들은 남료의 지하실에 가서 밥과 국 그리고 일본김치(소금에 절인 배추)를 받아오는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기 없는 청주의 4월 초순은 아침저녁으로 추웠지만 서양 사람들이 쓰던 큰 벽난로를 바라볼 뿐 우리들 생활에는 그림의 떡이었다.

 

기숙사 생활이 어언 두 달이 지났을 때 벼룩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한두 학생이 벼룩에 물렸다고 호소했지만 얼마 뒤에 모든 학생이 잠을 자지 못한다. 깔아 놓은 가마니에 숨으리라는 짐작으로 그것을 모두 걷어냈다. 그러나 벼룩의 공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일요일 날 흙을 파다가 마루 판자의 틈새를 메꿨지만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여름 방학까지 밤잠을 설치는 날이 계속되고 몸은 마마 앓은 피부 같았다.

 

기숙사에서 주는 밥은 양이 차지 않았고 영양가도 적었다. 쌀에 옥수수를 섞은 밥, 시래기를 넣은 된장국 그리고 일본식 배추김치가 주 메뉴였고 나중에는 배추김치도 주지 않았다. 2학기에는 시래기국 대신에 파래국을 먹었다. 이따금 간고등어가 나왔고, 국경일에는 돼지 고깃국이 나왔다.

 

기숙사의 밥이 너무 적어서 배가 고팠다. 기숙사에서는 집에서 가져온 간식(間食) 먹는 일을 엄금하였다. 그래서 저녁 점호(點呼)가 끝난 뒤에 어둠 속에 묻혀서 몰래 입을 우물거리는 친구들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께서 장만해 주신 미숫가루는 한 달 뒤에 바닥이 났다. 삶아서 말린 국수는 기숙사에서 먹을 수가 없었으므로 시내의 동급생 집에 가지고 가서 삶아먹을 수 있었다. 그 일요일 하루 동안은 배불리 지났지만 그 다음 날부터 허기에 허덕이며 한 학기를 지났다. 돈을 가져도 음식물을 사먹을 수 없는 시국이었던 것이다.

 

입학 후 매달 20원의 관비(官費)를 받았다. 국민학교 선생의 초임 월급이 27원이었으므로 내가 받은 관비는 큰 돈이었다. 관비 20원 중에서 15원을 기숙사비로 내고 나머지 5원을 현금으로 받았다. 첫째 달에 받은 5원을 일요일에 문방구 등을 사느라고 몽땅 써 버렸다. 기숙사에서는 금전출납부를 쓰도록 규정되어 있어 5원의 사용명세를 적어 놓았다. 금전출납부를 검사한 사감 선생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하루에 5원의 거금을 쓰는 놈이 어디 있느냐.’ 라고 크게 호통을 치셨다.



학질로 넘긴 여름 방학 (제26회) - 제4장 청주사범학교 시절

 

1학기가 중간에 접어든 어느 날 나는 큰 벌(罰)을 쓰게 되었다. 오전 2교시가 끝난 휴식 시간에 몹시 배가 고파서 몇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자기 도시락을 자기가 먹는데 죄의식이 생길 리가 없었다. 이 장면을 복도를 지나던 선생님이 보시고 머리를 쑥 들이밀었다. “왜 지금 도시락을 먹느냐.”는 힐책에, 나는 “왜 그렇게 밥이 적느냐.”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나는 “본래 기숙사 밥이 적습니다.”라고 말하며 도시락 속을 보여드렸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3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먹어야 할 도시락을 2교시에 먹었고 또 기숙사 밥 양에 불만을 가진 학생이라는 선생님들의 해석인 듯 하였다. 교무실에 불려가고 복도에 쭈그리고 앉혀지며, 미소주찌 교관과 하기노 교관의 고함소리가 터지고 사사끼 담임 선생의 날카로운 호령이 귀를 울리고,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실장님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는 끔찍한 하루였다. 나는 중죄를 진 죄인처럼 주눅이 들어 오금을 못 쓰고 며칠을 지내야 했다.

 

통학 길에서는 반드시 4열 종대를 짓고 발을 맞추어 걸었다. 자전거로 통근하는 선생님들이 옆을 지나가면, “발 맞추어!” “머리 좌로!” 하는 구령에 따라 경의를 표하였다. 순진한 신입생들은 격식대로 경례를 표시하지만, 상급생들은 무언(無言)의 반항을 나타내곤 하였다. 즉 선생님이 지나가면 지휘자는 구령을 외치되 대오 안에 있는 학생은 입을 꼭 다문 채 “응응…….”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운동장에서도 이러한 불경(不敬)은 저질러졌다. 열을 지은 상급생들이 트랙에 따라 구보하고, 한 곳에 선생님이 서 있으면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응응…….”의 반항 소리를 내곤 하였다. 불경을 당한 선생님은 전 학생을 정지시키고 큰 소리로 호통을 쳤지만, 어느 특정인을 잡아내지는 못하였다.

 

1학기말이 가까웠을 때 3․4 학년 선배 중에서 몇이 경찰서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그들이 사상범이라는 소문이 퍼져 우리들을 긴장시켰다. 1학기말에는 여러 가지 전방의 소문이 떠돌았다. 일본군이 사이판 섬에서 전군옥쇄(全軍玉碎)하고,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이 총 사퇴하며, 유럽의 파리가 연합군에 점령되었다는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었다. B29의 하얀 비행운과 공습 경보 사이렌도 심심찮게 울렸다.

 

▲ 청주사범 기숙사 1학년생 (1944년 4월)

 

이즈음 나는 학질(瘧疾ㆍ말라리아 병)에 걸렸다. 오후 2․3시가 되면 온 몸에 한기(寒氣)가 엄습하고 열이 나며 떨리는 증상이 생긴다. 이불을 덮어도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이다. 다음 날은 몸이 찌뿌드할 뿐 열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3일째 오후에는 다시 열이 난다. 수업 시간에 열이 나면 얼굴이 노랗게 변하고 몸이 떨려서 정신을 잃을 정도이다. 처음에는 극심한 감기 몸살에 걸렸으려니 생각했는데 네 번쯤 되풀이하여 열이 났을 때 겁이 나서 병원을 찾았다. 학질의 진단과 금계랍(키니네)의 처방이 내린다.

 

방학이 되기 전에 말끔히 나았지만 방학으로 고향에 돌아온 며칠 뒤에 다시 도지고 말았다. 또 쓴맛 나는 금계랍을 먹었는데도 재발되고, 마지막에는 2학기 개학 후에도 기숙사에서 한차례 앓았다. 힘이 빠져서 공부도 운동도 모두 싫어졌다. 몸은 꼬챙이처럼 야위어서 피골이 상접해 있다. 이러다가 필경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교 도중에 석교동 로타리의 약국에 들렀다. 나이 지긋한 남자 약사가 내 몰골을 보고“사범학생인데 자네 어디가 아파서 왔는가?” 라고 묻는다.

 

“학질을 몇 번 되풀이했습니다.”

 

약사의 동정(同情)이 발동했던 것이다. 텅 빈 약장을 뒤로 하고 안방으로 들어간 약사는 작은 유리병 한 개를 건네주었다.

 

“이것을 공복에 조금씩 물에 타서 먹게.”

유리병에는 인삼 엑기스가 들어 있었다. 그 당시에 인삼 엑기스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자혜로운 약사의 동정으로 원기를 되찾게 되었다.

 

여름 방학이 되어 비로소 고향에 갈 수 있었다. 기숙사생은 학기 중에 귀성(歸省)을 금하는 교칙이 있었다. 허가 없이 귀성한 학생은 정학을 맞는다. 며칠 전부터 가슴이 설레고 잠을 설쳤다.

 

2학기가 되면 다시 기숙사로 돌아올 터인데도 모든 짐을 꾸려서 기차에 부쳤다. 기숙사생들은 옷이 헤어지거나 단추가 떨어지면 스스로 바느질을 하지만 양말만은 깁지 못했다. 양말 속에 전구를 넣고 깁는 법을 배웠지만 암만해도 서툴다. 한 학기 동안 해어진 무명 양말을 모아서 큰 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이 무렵에는 질긴 나이론 양말이 없었다). 학교의 활동이 많아서 무명 양말은 사흘이면 구멍이 뚫렸다. 구멍 뚫린 양말을 깁는 일은 내 방학 중 어머니 일과였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전쟁의 여파가 마을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고향 마을을 포근히 가리고 있던 평질메의 소나무 숲이 잘려나갔고, 청년들이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서 부녀자들이 농사를 지었으며, 식량이 모자라서 굶주리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학교 생활의 고생을 위로 받으려는 기대가 멀리 떠나고 말았다.



청주에서 충주까지의 야간 행군 (제27회) - 제4장 청주사범학교 시절

 

2학기 중의 큰 행사는 청주-충주간 야간 행군이다. 그 준비를 위하여 매일 방과 후에 처음 한 달 동안은 2킬로미터를 뛰고, 다음 한 달은 4킬로미터를 구보하는 신체 단련이 계속되었다. 운동장을 출발하여 석교다리에서 되짚어 돌아오면 2킬로미터가 되고, 운동장을 출발하여 석교다리에서 우회전하여 활처럼 휜 무심천 제방을 거쳐 운동장으로 돌아오면 4킬로미터였다.

 

웃통과 신을 벗은 채 팬티만을 입고 뛰는 것이었다. 이때의 배고프고 숨이 찼던 고통은 잊혀지지 않는다. 여름에 학질을 앓은 뒤라서 더 힘에 겨웠다.

 

청주-충주 간 야간 행군은 11월 3일에 있었다. 일본국의 국경일인 명치절을 기념하는 연례행사라고 했다. 전교 학생이 청주 신사 앞에 오후 3시에 집합한다. 상급생들은 이미 경험을 했는데도 얼굴에 긴장이 감돌고 있다. 1학년생은 배낭만을 메지만 상급생은 총도 메야 한다.

 

행군 장비를 준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첫째 구두바닥이 두껍고 단단하여 충격이 발바닥에 전달되지 않아야 한다. 둘째 양말과 발바닥의 접촉면이 매끄러워 물집이 안 생겨야 한다. 구두창을 수선하고, 양말을 뒤집어서 너덜거리는 안의 실을 베어내고, 양말에 비누를 문질러서 두 장을 겹쳐 신는다. 그러나 구두라는 것은 가죽구두가 아닌 삼베천에 얇은 인조창을 댄 것이었으니 발이 편할 리가 없었다.

 

청주-충주간의 국도는 자갈길이었다. 도로는 자동차 바퀴가 지난 자리에 고랑이 두 줄로 패이고 가운데에 자갈 언덕이 돋아 있다. 행군 행렬은 세 줄을 지어 자갈이 없는 두 줄의 바퀴 자리와 한 줄의 인도를 걷는다. 4킬로미터를 걷고 10분 간 휴식하는 행군이다. 저녁밥은 10분 휴식시간에 먹는다. 자정을 넘을 무렵부터 졸음과 추위가 엄습한다. 인도를 걷는 대열 중에서는 졸다가 도로 옆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학생이 속출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의 행군이다.

 

▲ 일제강점기 11월 3일 일본국경일인 명치절을 맞아 왜성대 통감관저로 초대된 소학교 학생들의 모습.

음성(陰城)에 도착하니 날이 밝는다. 길가의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마솥을 걸어 밥을 짓고 돼지고기 국이 끓여 있었다. 아침식사로 몸에 온기가 돈다. 이제부터의 행군이 힘들다는 것이다. 오른쪽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기 시작한다. 발을 디딜 때마다 불이 붙은 것처럼 따갑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물집 밑에 물집이 생긴 두 겹 물집이었다. 대열에 따라오지 못하여 낙오하는 학생은 허리에 밧줄을 묶어 앞에서 끄는 모습이 보인다. 이를 악물고 걸을 수밖에 없다.

 

드디어 충주 역을 4킬로미터 앞둔 달천(達川)에 도착한다. 10분 간 휴식하는 동안 구두와 양말을 벗고,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려 도강(渡江) 준비를 한다. 교량이 없는 달천의 물을 걸어서 건너는 것이다. 물이 들어간 물집은 쓰리고 아프다.

 

달천에서는 충주시의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 10리 길은 너무나 멀고 멀었다. 다리와 몸통이 따로 놀고, 의식이 없는 머리와 몸통은 따로 노는 듯 하다. 오후 2시쯤에 충주역전에 도착하여 점심과 몇 알의 사과를 배급받는다. 기차에 몸을 던진 뒤 한잠에 청주까지 온다. 몸에 쌓인 피로와 발바닥의 물집으로 며칠간의 고생이 이어진다.

 

1학년 2학기 때 고향집에서 큰 변고가 일어났다. 둘째 형님이 징용으로 붙들려서 일본의 요꼬하마시가 있는 가나가와현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이다. 태평양전쟁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여 동경과 요꼬하마가 불바다가 되었다는 보도였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보다 앞서 44년 추석 무렵에 큰형님이 나를 면회하기 위하여 청주에 오셔서 기숙사와 학교를 둘러보고 나를 격려하셨다. 큰형님은 일본 군속 요원으로 구주(九州)의 사세보(佐世保)라는 해군기지에서 근무했는데 1주일 간의 휴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일본 본토에서는 B29의 폭격을 맞아 사람들이 지하 생활을 몇 달째 계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을에 접어들어 기숙사와 학교의 땔감을 학생들이 준비하였다. 방과 후 땔감을 나르러 학교에서 2킬로미터 거리의 산까지 다녔다. 기다란 통나무 한 개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나르는 것이다. 많은 나무를 1학년생들이 모두 운반하였다.

 

청주의 추위는 매서운 데가 있다. 특히 44년도의 겨울 추위는 혹독하였다. 그런데도 웃통을 벗어 던지고 목검을 들어 내리치는 연습과 구보를 하여야 했다. 온 몸이 오그라들었지만 감기에는 걸리지 않았다.

 

겨울 방학이 되어 기쁨에 찬 귀성 길에 올랐다. 기숙사에서 먹다 남은 밥과 파래국을 그릇에 남겨놓은 채 모두 뿔뿔이 헤어졌다. 20일 간의 방학은 짧기만 하였다. 개학이 되어 그 지긋지긋한 기숙사에 다시 돌아와야 했다.

 

청주역에서 짐 보퉁이를 지게꾼에게 부탁하고 기숙사에 돌아와 보니 방학 전에 먹다 남은 밥과 파래국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추워서 방학 내내 쉬지 않은 채 남아있었던 것이다. 불결한 생각이 들어 버리려고 하였더니 지게꾼 아저씨가 자기에게 달라고 애원한다.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주니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청주의 혹독한 추위와 전쟁으로 인한 식량 고갈에서 비롯된 참혹한 현실의 한 토막이었다.



흙짐 지는 학생들 (제28회) - 제4장 청주사범학교 시절

 

겨울 방학 중에는 친구들과 함께 함열에 사는 사까이 선생을 방문하였다. 국민학교 동기인 김판철(별세), 채정석(별세) 그리고 나는 우리 집에 모여서 앳재를 넘고 함라를 거쳐 함열까지의 70리 길을 걸어서 갔었다. 사까이 선생 댁에서 하룻밤을 쉬었다가 올 때는 기차로 돌아왔다.

 

2학년(1945년) 때는 수업을 통틀어서 한 달쯤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머지 시간은 고향에 와서 꾀병을 부렸고, 근로동원(勤勞動員)으로 노동을 하였다. 2학년 때에는 기숙사를 석교동 로타리의 길가에 있는 제2료로 옮겼다. 제2료는 마루 바닥에 다다미가 깔려있고, 한 층이 강당처럼 넓은 방으로 틔어 있어 안정감이 없었다.

 

2학년 초에 일본의 패전 소식이 더 자주 들렸다. 일본군이 유황섬[硫黃島]에서 옥쇄하고, 미군이 오키나와 섬에 상륙하며, 이태리에서 무솔리니가 사살되고, 독일에서 히틀러가 애인과 함께 자살하며, 독일군이 항복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일본인 교관과 교사들은 몇 분을 제외하고,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군에 입대하는 선생들 때문에 대리 강의가 성행하였다. 학교 수업은 부실하고 B29가 파란 하늘에 하얀 비행운을 그리면서 자주자주 지나갔다. 공습경보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자주 울렸다. 어떤 여학생이 ‘저 비행기 참 아름답네’라고 감탄하다가 일본인으로부터 호통을 맞았다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학교에 흥미를 잃은 나는 슬그머니 꾀가 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고향집에 편지를 썼다. 아버지 제삿날(음력 2월 27일)에 맞춰서 전보를 쳐달라는 부탁이었다. 전보 내용은「어머니 위독. 귀가하라」였다. 담임 선생에게 전보가 접수되고 나에게 전달되었다. 나의 의사를 묻는 담임 선생에게 “다녀오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상을 치르고 곧 등교하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의 간계가 적중하였던 것이다.

 

나는 고향에 돌아와서 20일 동안 무위도식하며 시간을 보냈다. 전시 하의 고향은 재미가 없고 불안하였다. 젊은이가 없는 농촌은 일손이 모자라서 허덕이고 있으니 나도 놀 수만은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내가 불안해 보이는 듯 하였다.

 

▲ 일제말기 학생들은 대거 근로동원 되었다. / 사진은 이화여자고등학교 근로보국대의 감자캐기

 

나는 땡땡이를 부린 뒤 불안한 가슴을 안고 학교에 돌아왔다. 제2료에 발을 디디는 순간 어쩐지 썰렁한 분위기를 느꼈다. 동급생들이 근로보국대(勤勞報國隊)로 솔뿌리를 캐러 단양군으로 떠난 뒤였다. 내가 결석하는 동안 본격적인 전시동원령(戰時動員令)이 내렸던 것이다. 귀교했다는 신고를 해야 하는데 신고를 받을 담임 선생도 떠나셨다.

 

학교에는 농업 담당의 노기시(野岸) 선생만 남아 있었다. 가위에 눌려 움 추린 기분으로 노기시 선생에게 귀교 신고를 했다. 앞뒤 이야기를 들은 선생은 노발대발 소리를 지른다. “이 비국민놈아! 이게 어느 전시인데 집에 가서 20일 간이나 자빠져 놀았단 말이냐.”로 시작하여, 그 당시 황국신민이 불령선인(不逞鮮人)에게 퍼붓는 욕설을 모두 토해낸다. 당연히 욕먹을 짓을 했던 나는 머리를 푹 숙이는 길 밖에 없었다.

 

“너는 기무라[木村] 군의 지시를 받아 감자에서 전분 뽑는 일을 하라.”라는 노기시 선생의 명령이었다. 기무라 군이란 3학년 학생으로 단양군의 근로동원을 면제받고 학교에 머무른 착실한 선배였다. 감자 전분 뽑는 일은 원시적인 작업이었다. 포대에 넣은 감자가 연못 속에서 썩혀 있었다. 그 감자를 꺼내어 큰 통 속에 넣고 손으로 주물러 터트리고 썩은 감자 죽을 물 속에서 휘저어서 녹말을 가라앉히고 가벼운 찌꺼기를 떠서 분리하는 작업이다.

 

감자 썩은 냄새는 코를 찔러 속을 뒤집고, 손과 팔은 붓고 허리는 끊어지듯 아픈 나날이 계속된다. 저녁 때 몸과 옷에서 풍기는 냄새로 친구들이 코를 두른다. 기무라 선배의 말에 따르면 연못에 담근 감자가 100포대라고 했다. 전분을 햇빛에 말리면 냄새가 날아가고 알갱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흰 가루가 된다. 2주일쯤 걸려서 전분 뽑기가 모두 끝났다.

 

입학한 뒤에 청주사범의 농장을 보니 다른 시설에 비하여 매우 훌륭하였다. 농기구사와 사무실 그리고 저수지가 있고 펌프로 물을 퍼 올리는 관개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 이따금 노기시 선생이 말을 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농사의 작황(作況)도 매우 훌륭하였다. 그것은 악바리 같은 농업 선생의 근면성과 학생들의 노동력과 전쟁의 요청에서 오는 합작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농장의 길 건너편에는 지형이 울퉁불퉁하고 논두렁이 구불구불한 비경지정리(非耕地整理) 논이 있었다. 전분 뽑기가 끝난 뒤 노기시 선생은 나에게 논의 경지정리반에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경지정리란 높은 논의 흙을 파서 낮은 곳으로 운반하여 편평하게 고른 뒤 논두렁을 바둑판처럼 새로 만드는 일이다. 흙은 지게와 당가(들것)로 운반한다. 상급생이 지게를 지고 서 있으면 나는 삽으로 흙을 파서 바작(발채) 위에 실어주거나 내가 당가(들것)에 싣고 운반한다.

 

논바닥의 높낮이가 심한 곳은 1미터 높이의 차이가 있었다. 평(坪) 떼기로 일정면적의 책임량을 낮은 논으로 운반하는데 마치 시루떡을 자르듯이 흙을 수직 단면으로 깎아서 바작에 실었던 기억이 난다. 6월 14일(일본의 권농일)에 모를 심어야 하는 시간의 촉박함으로 노기시 선생의 서릿발 같은 재촉이 계속된다. 그 분의 소원대로 학생 노동꾼들은 드디어 적기(適期)에 모를 심어 천황폐하에 보은(?)하게 되었다.



해방이라는 낯선 이름 (제29회) - 제4장 청주사범학교 시절

 

2학년 1학기 때의 근로동원은 학년마다 다른 노동을 하였다. 4학년 선배들은 초등학교에 배치되어 군에 입대한 선생들의 보충 수업을 하고, 3학년 선배들은 진천저수지 공사에 동원되어 돌을 날랐으며, 나머지 학년들은 솔뿌리 캐기에 동원되었다.

 

나의 동기생들은 단양군 영춘면에서 하루에 10관(37.5킬로그램)씩 한 달 동안 솔뿌리를 캤었다.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 유숙하고, 쌀을 섞지 않고 이팥(기다란 팥처럼 생긴 콩류)만을 삶아 먹었기 때문에 모든 학생이 설사를 하였고 그 대변에 이팥 알갱이만 나왔다고 한다.

 

내가 전분 뽑기와 논의 경지정리를 할 무렵 제1료의 기숙사생들은 파라티프스에 걸려 있었다. 파라티프스는 이가 매개하는 법정전염병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파라티프스 환자는 입원하였고 그 방 학생들은 출입이 통제되어 갇혀 있었다. 기숙사 현관 앞에 흰줄이 늘여지고, 나는 취사장에서 밥과 국을 날라다 그 현관 앞에 놓아둔 기억이 난다. 파라티프스가 아니더라도 기숙사에서는 늘 이 때문에 시달리며 살았다.

 

두 번째 맞이하는 여름방학이 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마을에 일본 군인들이 득실거렸다. 군산 비행장의 배후진으로 고봉산을 요새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봉산 사면에는 벌집처럼 방공호가 뚫리고, 방공호의 갱목으로 산과 마을의 큰 나무가 모조리 베어져 있다. 마을 어른들은 근로동원에 쫓기고, 어쩌다가 군인들의 말을 거역하면 일본도를 빼든 군인에게 위협받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마을이 온통 적군 없는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고향의 분위기는 청주보다 한층 험악하였다.

 

8․15 패망의 소식을 8월 16일에 들었다. 혼자서 고구마 밭을 매고 있던 어머니께서 ‘일본이 망했단다. 너의 큰 형 소식이 궁금하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마을에 주둔하는 조선 사람 군인이 한 말이라고 하셨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일본 군인과 전쟁이 끝났다고 기뻐하는 조선 군인의 두 표정이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만약 미군이 군산 비행장에 상륙했더라면 우리 마을은 어떻게 되었을까? 미군은 이미 그해 4월 1일에 일본의 오끼나와섬에 상륙하였었다. 이보다 훨씬 뒤인 1984년에 내가 오끼나와의 나하[那灞]를 여행했을 때, 정좌하고 식사 시중을 들던 여관 여주인이 회상하는, 미군 상륙 시 주민의 처참했던 이야기를 들으며, 해방 직전의 아산리를 회상하고, 내 가슴이 오싹함을 느꼈다.

 

▲ 해방직후 연합군이 진주한다는 소문만으로 서울역 앞에 모여든 환연 인파

 

「해방」이라는 새 낱말에 어리둥절하였고, 마을에서는 소를 잡아 해방을 축하하였다. 9월 초에 예정된 개학일보다 다소 늦게 청주에 가는 도중 이리(익산)에서 낯선 미군 함재기(艦載機)가 일본군 잔류병에 겁을 주려고 시위 비행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청주에서는 미군이 시내에 진주하는 광경도 보았다. 취주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미군들이 행진하는데, 처음 보는 미군의 모습과 생김새가 생소하였고, 검정 얼굴을 한 흑인과 행진하면서 껌을 씹는 군인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 무렵 우리 가족들의 최대 관심사는 큰형님에 관한 소식이었다. 둘째 형은 불바다가 된 요꼬하마에서 무진 고생하다가 4월에 탈출하여 고향에서 은신하고 있었다.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마을 청년들이 속속 귀가한다. 사촌인 관호 형도 8월 하순에 돌아온다. 정거장에 나가보면 지붕 위까지 사람들을 가득 태운 기차가 오갔지만 큰형님의 소식은 없다. 9월 하순에야 바싹 야윈 큰형님이 돌아오셨다.

 

일본에서 세 사람이 배 한 척을 세내어 현해탄(玄海灘)을 건넜다는 것이다. 바다에는 여기 저기에 어뢰(魚雷)가 떠 있어 사흘 동안 한잠도 못 잤다고 한다. 목숨을 건 귀향이었던 것이다. 큰형님은 42년 5월에 집을 떠나서 45년 9월에 돌아왔으니 3년 4개월 만에 드디어 가족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세상사를 두루 경험한 큰 형님의 통솔 하에 우리 집은 이때부터 중흥(中興)의 길을 밟게 된다.

 

청주사범은 9월에 강의가 없었다. 강의하기에는 선생님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더 심란한 일은 광복 후 학생들이 없는 동안 제2료와 제3료의 기숙사생의 책과 생활도구를 모조리 제1료로 옮겨 놓은 것이다. 주인 없이 옮긴 짐들은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이 무렵 원거리에 있는 청주에서 학교를 다녀야 할 지 자문(自問)하게 된다. 결국 큰형님은 전주사범으로 전학하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45년 11월에 관립전주사범학교로 전학 수속을 마쳤다. 8․15해방 후 청주와 전주에서 다 같이 전학 수속의 방법이 확립되지 않아서 수속이 늦어졌던 것이다. 청주사범 선배인 성산면 도암리의 고준모 형, 서수면 만석리의 손근배 형의 집을 찾아다니며 전학의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전주사범학교 (제30회) - 제5장 전주사범학교

 

전주사범에서 전학 수속을 밟아주신 분은 이범삼(李範森) 교감이었다. 이때 교장은 김형배(金亨培) 선생님이었는데 그 분은 동경고사 수학과를 나오고 서울에서 명문 중학의 교유로 계신 분으로 늘 나비 넥타이를 매고 국경일에 모닝코트를 입는 신사였다. 이 교감은 삐쭉 야위고 뼈만 남은 분이며 동경물리학교를 3년에 졸업한 수재로서 원칙론자인데 47년 2월에 해양대학으로 영전하셨다. 이 교감과 음악 담당의 황덕철(黃德喆) 선생은 일제시대에 단 두 분의 한국인 교사였고 해방 후 학교 재산을 지키는 데 진력하셨다고 한다.

 

처음 본 전주사범학교의 모습은 오랜 전통을 풍기고 중후한 느낌이었다. 서양식 정원에는 키가 큰 가이쓰까향나무와 히마라야시다가 하늘 높이 솟아있고, 그 앞에 키가 낮은 회양목이 정돈되어 있었다. 정원 뒤의 팥죽색 본관은 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하였다.

 

2층 본관의 중간쯤에는 지붕 없는 평슬라브 지붕이 끼어 있어 옛날에 화재로 서쪽 반을 태웠던 쓰라린 사연이 깃들어 있는 데, 동쪽을 구관, 서쪽을 신관이라 불렀다. 본관의 마루는 목재이지만 벽은 두꺼운 벽돌로 쌓고 창문은 철제여서 재정이 넉넉할 때 지었음을 말해주었다. 본관의 동쪽에 일본 냄새를 풍기는 고풍각(나중에 여자 기숙사로 이용)이 놓여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할 때 다닌 학교이기에 전주사범의 교사배치도는 눈을 감고서도 그릴 만큼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본관 뒤에는 기다란 복도가 남북으로 반듯하게 통해 있다. 나무 발판이 깔려있는 복도를 따라 본관에서 남쪽으로 걸으면 오른쪽에 넓은 강당이 있고, 왼쪽에 숙직실, 특별교실 그리고 음악실이 나란하고 마지막에 기숙사에 닿는다.

 

음악실 건너에는 공작실이 있고, 음악실과 특별교실 사이에는 여러 종류의 식물을 전시한 아름다운 교재원(敎材園)이 있으며, 교재원과 복도 사이에는 조선지도를 본뜬 연못[朝鮮池]이 있어 물이 채워질 수 있다. 이처럼 전주사범은 신발을 신지 않고서도 본관에서 어느 교실이든 갈 수 있도록 건물이 편리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 전주사범학교 교사(校舍) 배치도

 

대운동장 옆에는 농구장과 수영장이 있고 정구장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 학교의 동쪽에는 정원수로 둘러싸인 교장 관사와 사택이 있고 그 건너편에 농장(밭)이 있다. 또 서쪽에는 또 하나의 농장(논)이 대운동장과 부속국민학교 사이에 있다. 학교의 모든 시설은 네모꼴 부지 안에 배치되어 있고 그 남쪽에는 우뚝 솟은 학교림이 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정을 붙이고 이상(理想)을 불태우며 공부했던 전주사범학교는 1923년 4월 17일에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도립전주사범학교로 인가를 받아 강습과(3년제) 학생을 길러냈다. 36년에 관립전주사범학교로 개칭하여 심상과(5년제)와 강습과(1년제)를 두었다.

 

광복 후 47년에 학제 개편으로 국립전주사범학교로 개칭하고 중학과(3년제)와 사범과(또는 본과, 3년제)의 6년 제로 되었다. 이때부터 관비제가 폐지되었으므로 졸업 후의 의무 연한이 없어졌다. 62년에 전북대학교 병설 전주교육대학(2년제)으로 승격하였다가 1년 뒤인 63년에 전주교육대학으로 독립하고, 같은 해 전주사범학교는 23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문을 내린다.

 

그 이후 전주교육대학은 양과 질로 크게 발전하였다. 한때는 학생정원이 20 학급 800 명으로 커질 때도 있었고, 83년에 4년제 교육대학으로 승격하였다. 개교한 지 70년이 지난 93년에는 드디어 국립전주교육대학교로 종합대학 승격이 이루어진다.

 

나는 전학 수속을 가장 빠르게 마쳤고, 그 후 친구들이 줄줄이 전학해 왔다. 긴장한 가운데 인사하러 학급에 들어갔는데 친구들은 무척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요즘처럼「왕따」같은 따돌림이나 텃세가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재학생의 순수성과 작은 내 체구와 얼굴의 순진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복 후 많은 일본 학생이 떠난 뒤였기에 학생이 적어서 2학년은 두 학급만 남아 있었다. 나는 2학년 2조에 배속되었다.

 

해방 후 영.수.역사 학원 (제31회) - 제5장 전주사범학교

 

광복 후는 1년이 3학기제였는데 45년도의 2학기와 3학기의 강의 일수는 많지 않았다. 선생님이 많지 않아서 국어(한글), 역사 및 영어만 집중적으로 강의하는 강습소와 비슷하였다. 나는 이때 비로소 한글과 역사를 처음 배운다. 육낙철(陸洛哲) 선생님의 국문법과 김대준(金大駿ㆍ海剛시인) 선생님의 현대문, 이의권(李義權) 선생님의 고대사(단군신화), 양장노(梁長老ㆍ얼마 뒤에 작고)와 유광원(柳光原) 선생님의 영어를 배운 것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청주사범에서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배우지 않은 재학생들보다 수월한 편이었다.

 

46년 4월에는 중학과 3학년 3반으로 편성되고 김은섭(金銀燮)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이때 나는 키가 작아서 40명 중에서 37번째였다. 이번 학기에는 많은 선생님들이 부임해서 여러 과목에 걸쳐 강의가 고르게 이루어졌다.

 

3학년 때의 강의 중에서 담임을 맡으신 김 선생님의 민법강의는 「선취특권」「정당방위」 등의 용어 풀이를 하셨는데, 이때 배운 법률 상식이 내가 아는 법률의 전부가 되었다. 수신은 김형배 교장님이 서양음식과 일본음식 먹는 방법을 비교하여 강의하셨다. 신동욱(申東旭) 선생님의 한국사는 정사(正史)는 모두 잊어버렸고, 선죽교에서 타살되는 정몽주, 궁중에 들어가 임금을 농락하고 음탕한 생활을 하려다 발각된 불승 신돈, 연산군의 방탕했던 생활 등 야사(野史)만 기억에 남아 있다.

 

46년 여름에는 전국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6월말에 입학 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는데 무기연기하고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보통 기차로 다니던 귀성 길을 서둘러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마을이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지름길로 집에 와 보니 애터에도 콜레라를 앓는 병자가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도 마을 출입구를 지키면서 행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보초를 섰다. 콜레라는 두 달이 지나서 서늘한 바람이 분 뒤에야 물러났다. 이때에는 콜레라의 방역이 겨우 식초를 마시는 정도였다.

 

▲ 전주의 상징인 풍남문 / 사진은 해방 전의 모습이다

 

46년 11월(3학년 2학기)에 김현준(金賢準) 교장님이 부임하셨다. 김 교장은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고매한 학자로 콧수염을 기르고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물고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 멋있는 분이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이 무척 부러웠는데 강의를 듣지는 못하였다. 이 무렵에는 여러 선생님들이 부임하였다가 곧 떠나기를 되풀이하였다. 특히 월남한 선생들이 그러했는데 그 분들은 차분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정서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고는 하였다.

 

나는 47년 9월 1일에 사범과(師範科. 또는 본과) 1학년 3반에 진급하여 심상윤(沈相潤) 선생님이 담임을 맡으셨다. 미군정(美軍政) 하에 서는 일본식 학제를 미국식 학제로 바꾸었다. 그래서 46년부터 일본 학제인 6․5․3제를 미국 학제인 6․3․3․4제로, 학기 수를 3학기를 2학기로 그리고 개학 시기를 4월 1일에서 9월 1일로 바꾸어 시행하였다.

 

그리고 47년부터 중 고등학교에 남녀공학을 처음 실시하였다. 여학생 13명이 입학하여 우리 반에 배치되었다. 1학년 3반은 아마도 나처럼 어리숙한 남학생들만을 골라서 여학생과 한 반을 의도적으로 편성한 것 같았다. 처음에는 교실에 여학생을 두 줄로 앉혔는데 그녀들의 기가 살아나지 않았던지 몇 달 뒤에 모두 뒷좌석에 앉혔다. 나는 동급의 여학생들과는 아예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졸업을 하였다. 그러나 조 모 군(별세․전 상공부차관), 김 모 군(별세․전 교장) 등 성숙한 친구들은 예쁘장한 동급 여학생과의 염문이 자자하였다.

 

사범과 학생은 사범 교육의 특징인 교육과목과 예능과목을 많이 부과되었다. 소재현(蘇在顯) 선생이 교육을, 최봉현(崔鳳鉉) 선생이 심리를 강의하셨다. 그러나 나는 생물과 함께 심종영(林鐘英) 선생의 화학 강의에  대단히 재미를 붙였다. 생물반에서 배운 식물분류는 주변의 무질서한 식물계(植物界)가 질서 정연하게 머릿속에 배열되어 있던 터라, 화학의 주기율표에 따라 배열된 물질계(物質界)도 정연하였고 또 두 가지 원소가 모여서 화합물을 합성하는 규칙성도 대단히 정연하였기 때문이다.

 

사범과 2학년에는 48년 9월 1일에 진급하였다. 나는 2학년 2반에 편성되고 황호면(黃鎬冕) 선생이 담임을 맡으셨다. 전년에 이어서 여학생과 혼성반이었다. 국어학 전공의 황 선생님은 일본대학을 다녔던 분으로 특히 고문(古文)을 잘 하셨다. 좌우 대립의 학생운동으로 학내가 시끄러웠지만 나의 학업성적은 향상되었다. 대수, 물리 및 화학에서 100점을, 공민, 국어, 국사, 지리, 기하, 생물에서 90점 이상을 받았지만 체조, 음악이 60점 대였다. 이 해부터 우등생제도가 생겨 학년말에 우등상을 받았다.



대학 입시 준비 (제32회) - 제5장 전주사범학교

 

같은 해 가을에 조카(良源ㆍ사범과 제6회로 54년 3월 16일 졸업)가 사범학교 중학과에 입학하였다. 나는 조카의 학부형이며 보호자가 된 셈이다. 나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다. 학생이 모두 5 명이나 되는 우리 집 형편에 큰형님이 학비를 보내기가 더욱 어려워졌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초등학교 3명, 중등학교 2명, 여기에 더하여 나와 조카는 전주에서 유학을 하니 웬만한 벌이로는 뒤대기가 어려웠다. 쥐꼬리만한 큰형님의 봉급으로는 당할 수가 없으니 온 집안 식구들이 우리들 학비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철마다 기른 돼지를 팔았고 농촌에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았다. 나는 전주에 오면 머리 속이 꿈으로 가득 차 있고 고향에 가면 참혹한 현실에 부닥쳐 모든 생각이 곤두박질치는 생활을 되풀이 하였다.

 

혼자서 학교에 다닐 때도 기숙사에 유숙했는데 숙질이 함께 다녀야 하니 싫어도 기숙사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개학하자마자 청천벽력으로 기숙사에서 퇴사 명령이 떨어졌다. 암울한 내 심사는 형용할 길이 없었다.

 

사범과 3학년에는 49년 9월 1일에 진급하였다. 2학년 때의 황호면 선생님이 계속하여 담임을 맡으셨다. 교과목은 국어과(강독, 한문, 국문학사), 사회생활과(공민), 수학과(대수), 과학과(생물, 물리 및 화학), 교련, 체조, 농업, 음악과(성악), 외국어과(영어 강독), 미술과(미술, 공예), 교육과(교육, 논리 및 교육사)를 배웠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범형 교과목이었다. 대수시간은 미분․적분 합해서 일주일에 겨우 2시간, 영어 강독도 2시간뿐이었다. 그 대신 교육, 논리 및 교육사의 시간은 많았다. 게다가 1학기에 한 달간의 교생실습을 해야 하였다.

 

 

▲ 전주사범 교기

 

사범학교 교육은 음악, 미술을 비롯하여 모든 과목을 고루 배우므로 전인교육(全人敎育)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들 교과목을 충실히 배우다가는 대학 입학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은 학교 수업과 자기 공부를 각각 따로 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범학교의 교과과정에 정면 도전하는 행동이었다. 나도 그 중의 한 학생이었다.

 

그 무렵에는 전기 사정이 나빴으므로 새벽녘까지 호롱불로 지샜고, 내방은 기숙사에서 불이 꺼지지 않는 방으로 이름이 났었다. 덕분에 3학년 때에는 결석 일수가 무려 43일이나 되었다. 나만의 나태가 아니고 대학입시 준비를 하는 친구들은 모두 결석이 많았던 것이다.

 

50년 4월 27일에 졸업식을 마치고 조카를 남겨둔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생물반과 기숙사 후배들과의 끈끈한 정이 남아 있어 고향에서의 며칠 동안은 기분이 들뜬 채였다.

 

집에 와서 비로소 큰형님께 서울사대에 입학원서를 냈다는 보고를 드렸다. 입학만 해놓고 초등학교에 취직하여 돈을 번 다음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큰형님은 어이없는 얼굴이고 어머니는 입시에 떨어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우리 집 경제 사정으로 보아 내가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5월 초순에 쌀을 넣은 룩색을 지고 서울역에 내리니 서울대 사학과 학생인 심종학(沈鍾鶴) 형이 마중 나와 있었다. 나는 같은 마을의 채수형 씨(군산고등학교 졸업)와 동행이었다. 심 형은 우리를 녹번동에 있는 당신의 누님 댁으로 안내했다. 누님 댁은 비탈진 밭 가운데 있는 독립가옥으로 마치 시골 농촌 집 같은 외모였다.

 

서글서글한 누님과 중후한 매부의 환대를 받았다. 심 형은 한서(漢書) 읽기에 신이 나 있었고 서울대의 근황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심 형이 누님 댁에서 오랫동안 기숙하며 학교에 다니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지금에야 심종학 회고록「봄이 오기 전」을 읽고 비로소 시골에서 상경한 후배들을 위하여 누님 댁에 폐를 끼친 사실을 알았다. 그 무렵에 심 형은 무척 어려운 생활을 하고 고민도 많았음을 이제야 알았다.

 

우리들은 녹번동 버스정류장까지 걸어 나와 버스를 타고, 독립문에서 을지로 행 전차로 갈아탄 다음 을지로 5가의 사범대학에서 시험을 쳤다. 이틀간의 필기시험을 치른 마지막 날에는 고사장에서 나오니 하늘이 빙 돌고 몸이 흔들렸다. 나는 정원 옆의 잔디밭에 누워서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면접시험 날은 이종원 선생님(전주사범에서 경복고로 전근한 생물교사)이 미리 나를 소개를 해놓은 듯 최기철 교수님이 알아보셨다. 면접시험 때는 최 교수님이 창 넘어 나무를 가리키며 이름을 물으셨다. 그 표정으로 보아 합격이 어느 정도 예측되고 있었다.

 

그러나 합격을 해도 어차피 휴학하기로 형님과 약속을 했고, 나도 오르지 못할 나무를 바라보지 않기로 마음을 정리하였으므로,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지 않고 심 형과 작별, 귀향하였다.



전주사범에서의 기숙사 생활 (제33회) - 제5장 전주사범학교

 

따분한 날을 며칠인가 허송하다가 답답해서 전주에 가니 사범학교에서 합격 소식을 알려주었다. 입학금 때문에 합격이 되어도 걱정, 안되어도 걱정이었다. 암울한 기분으로 집에 와서 큰형님에게 합격과 입학금 걱정을 하였다.

 

이 무렵에 화학 비료는 미국에서 제한된 양을 수입하였기 때문에 농가에서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대학 입시를 위하여 서울을 왕래하느라고 배급받은 화학비료를 팔아서 경비를 마련하였다. 나 때문에 이 해는 비료 부족으로 농사를 잘 못 지었을 것이다.

 

이 해 봄에는 내가 서울대에, 둘째 조카(원구)가 군산중학에 동시에 합격하였다. 나의 입학금은 5만 4천 원, 조카의 것은 7만 2천 원. 우리 집의 경제 능력으로는 마련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뒤에 안 일인데 큰형님의 친지 분들이 벼를 2~3 가마니씩 유상으로 또는 무이자 현금으로 빌려주어서 쌀 20 가마니 값으로 두 신입생의 입학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 무렵 벼를 빌리면 6개월 후에 곱 장리로 갚아야 하는 각박한 인심이었는데 그 친지 분들은 참으로 많은 은혜를 베푸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분들의 성명도 모르고 보답할 길도 찾지 못하였다. 다행히 그 해에는 집에서 수박 농사를 잘 지어 빚을 모두 갚았다고 한다.

 

전주사범에서의 기숙사 생활 / 나는 45년 가을부터 50년 봄까지, 방학 기간과 강제 퇴사 당한 때를 제외하고, 4년여 동안 전주사범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이 기숙사를 일제시대에 청명료(淸明寮)라 불렀다고 한다. 일생 중에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성격이 형성되며 전도에 대하여 고민하고 학문의 기초를 닦으며 벗을 사귀던 청소년기를 기숙사에서 지낸 셈이다.

 

내가 생활한 전주사범의 기숙사는 2층 목조 건물로 남료(南寮)와 북료(北寮)의 두 동으로 되고 동 서쪽에서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다. 남 북료의 동쪽은 본관에서 뻗어 나온 복도로 연결되고 그 양 옆에 화장실과 소사실이 이어져 있었다. 기숙사 건물의 서쪽에는 세면장이 남 북료를 연결하고, 그 곳을 지나면 식당, 취사장 및 욕실이 있는 건물이 생울타리를 경계로 하여 대운동장에서 가려져 있었다.

 

▲ 1940년대에서 60년대까지의 전주사범 정문, 그리고 교기, 교가 등

 

기숙사의 한 방에는 바닥에 28장의 다다미가 펴있고 그 위에 학생 수만큼의 앉은뱅이 책상이 두 줄로 놓여 있었다. 한 방의 정원은 14 명인데 실제로 우리들은 6~8 명이 생활하였다. 방의 양 편 벽에는 1미터 높이에 벽장이 7개씩 나란하고, 벽장은 각각 두 쪽의 여닫이문으로 닫히며, 그 안에 한 층의 나무 시렁이 걸려 있어 책과 옷을 가지런히 넣도록 되어 있었다. 벽장 밑 가름장에는 하얀 커텐이 쳐 있어 그 안에 이부자리를 넣었다.

 

창문은 안의 미닫이 종이창과 밖의 유리창으로 된 이중창이어서 찬바람을 막아줬다. 유리창 바깥에는 튼튼한 목재의 가름장이 걸려 있어 별중맞은 학생들의 낙상(落傷)을 막아 주었다. 나는 흔히 가름장에 몸을 기대고 남 북료 사이의 중정(中庭)이나 학교림을 바라보았다. 중정에는 장미, 자목련, 붉은단풍 등 아름다운 정원수가 가꿔져 있었다. 이러한 시설은 40년대의 학생 생활로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처음 입사(入舍)했을 때 나는 북료의 제3실에 배치되었다. 실장은 황동의 선배이고, 나와 같은 학년의 정종환 군과 그밖에 몇 사람이 함께 있었다.

 

45년도의 기숙사 식사는 쌀에 콩을 넣어 지은 밥과 고사리를 넣은 간장국이었다. 해방 전에 학교 건물을 점령한 일본 관동군이 남겨 놓은 쌀과 고사리를 양도받았다고 하였다. 46~48년에는 미국에서 무상원조로 받은 밀가루 수제비와 밀밥을 흔히 먹었다.

 

기숙사는 학교 구내에 있었으므로 운동장의 행사가 없는 날에는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복도를 건너서 교실이나 생물실로 갈 수 있었다. 따라서 등 하교 시간이 2~3 분이면 족하였다. 책보나 가방을 가지는 학생도 없었다. 통학생들은 기숙사를「돼지우리」라고 얕보기 일쑤였지만 기숙사 생활에는 장점이 많았다. 생활비(기숙사비)가 적게 들고 등 하교시간이 절약되며 학교시설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었다. 나는 기숙사의 장점을 활용하였고 그 생활에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46년부터는 기숙사비가 오르기 시작하여 가을에는 두 배로 올랐고, 그 후에도 계속 올랐다. 기숙사비는 쌀로 소두 세 말을 냈고, 쌀을 내지 않는 사람은 돈으로 그 액수만큼을 냈다.



기숙사에서의 퇴사 (제34회) - 제5장 전주사범학교

 

잊혀지지 않는 사건들 / 어느 때인가 기숙사의 쌀을 모조리 도적맞은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쌀을 도둑맞아 밥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쌀 도둑은 피아노를 잘 쳐서 어느 예술대학에 진학한 통학생 선배였다. 그날 밤 그는 기숙사에서 취사계였던 동급생의 방에서 자다가 쌀창고 열쇠를 가져다가 손수레로 쌀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그 이유인즉 예술대에 들어갔지만 학비 곤란을 받아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소사실에서 살던 선생님 댁의 김치 서리를 한 일이 있었다. 밤에 공부하다가 배가 출출해져서 김치 서리를 하기로 합의하고 양동이를 가지고 선생님 댁 김치 독에서 김치를 꺼내왔다. 그런데 우거지만 잔뜩 꺼내왔기 때문에 먹지 못하고 버린 적이 있었다.

 

기숙사에서는 가을에 한 번씩 학예회(신파)를 하였다. 각 방마다 연극, 노래, 만담 등을 꾸며서 연출하였다. 학예회 날에는 여자 사생까지 합해서 기숙사 전체가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다.

 

▲ 전주사범 기숙사의 일요일 식사시간 / 좌로부터 주영기, 김해진, 공창식, 나, 윤희옥, 엄익록, 박종민, 한경춘, 이기찬

기숙사의 수난 /  기숙사는 46년~47년에 좌익학생들에게 짓밟혔고, 47년~49년에는 우익학생들에게 짓밟히는 수난을 당하였다. 46년 가을에는 기숙사가 전주 시내 중등학교 동맹휴학의 총지휘 본부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좌익학생들이 주동하는 것이었다. 경찰에서 지휘 본부를 습격 온다는 소문에 보초를 서기도 하였다. 우리들 하급생은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고향에 가지도 못하고 보초를 서야 했다.

 

학생회 선배들은 기숙사생이 아니면서 기숙사 쌀로 밥을 지어먹고, 신을 신은 채 다다미방에 들어오며, 함부로 책상을 부숴서 난로에 불을 피우기 일쑤였다. 또 지휘본부에서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 반대파 학생을 구타하는 일도 있었다. 나는 하급생이며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해서 크게 문제가 안 되었지만 기숙사가 짓밟히는 데는 부아가 치밀었다.

 

47년 가을(1학기)부터는 학교에서 우익학생들이 우세하여 통학생인 그들은 기숙사에 무상출입하였고, 기숙사생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어 아니꼬왔다. 특히 비워두었던 남료(이때는 북료만 이용하였다)를 학연 계통의 동지회가 사무실로 이용하여 자기들에게 거슬리는 학생을 데려다가 때려주기도 하였다.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가 밖에까지 새어나와 가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에 권투부 학생들이 남료 1층에 학교의 허가도 없이 시합하는 링을 만들었다. 방벽에 구멍을 뚫고 그라이더의 고무줄을 끊어다가 링을 늘이고 권투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기숙사의 질서가 엉망이었다. 애사심(愛舍心)이 강한 우리에게는 분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래저래 힘 없는 기숙사는 수난을 당하였다.

 

퇴사 명령 / 48년 3월부터 최고 학년에 오른 심종학 형이 청소부장을 맡아 질서를 잡기 시작했고, 다시 그는 자치회장인 사장(舍長)에 당선되어 규율을 쇄신하였다. 형은 식사도 개선하였다. 식비는 종전대로 내면서 이틀만에 한 번씩 고깃국을 먹도록 취사운영을 개선한 것이다. 사회나 학교의 무질서와는 대조적으로 기숙사는 질서가 잡히고 운영이 정상화되었다. 이러한 생활이 약 3개월 가량 계속되었다.

 

나는 심 형과 친했고 그가 하는 일에 적극 협조하는 학생이었다. 이 무렵의 어느 날 저녁에 오 사감장 댁으로 심 형과 내가 초대되었다. 댁에는 오 선생님만 계셨는데 과자 등 푸짐하게 대접을 받고, 아무런 말씀 없이 하직하고 나왔다. 나는 왜 초청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는데 그 후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취사 운영에 학생들의 간섭을 배제하는 회유책에 말려든 것 같았다.

 

그런데 48년 9월 1일(사범과 2학년)에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기숙사에 가보니 날벼락이 떨어졌다. 9월 6일까지 퇴사하라는 명령이었다. 심 형을 포함해서 상급 학생 24명에게 내린 퇴사 명령이었다. 퇴사하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으로 퇴학시킨다는 위협도 따랐다. 심 형은 백방으로 사감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며 퇴사 철회를 탄원한 것 같은데 효과가 없었다. 나의 경우 기숙사에 들지 않으면 학교를 다니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퇴사의 죄목은 2학기 말에 있었던 3학년 선배들의 졸업생 송별회 때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었다. 오 사감은 사생에게 송별회 때 쓰도록 술과 안주 값을 주셨으니 교육자로서는 옳지 못한 처사를 한 것이다. 퇴사 명령을 받은 24 명 중에는 나처럼 술을 안 마시는 학생이 네댓 명 끼어 있었고, 송별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생도 끼어 있었다. 그 송별회를 하던 중에 학연 계통의 동지회 회원들도 함께 술을 마시고 뛰며 놀았다. 그런데도 그들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어떤 잣대에 맞추어 퇴사생을 정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전주사범의 졸업 (제35회l) - 제5장 전주사범학교

 

오 사감은 "식비까지 너희들이 간섭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그만 두라. 매달 식비를 일제히 내지 않으니 식사가 나빠진다."는 등의 말을 하셨다. 매달 식비를 기일 내에 내도 식사가 좋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심 형이 개선하였던 것이다. 사감의 부정을 기숙사생들이 눈치챘고 일부 선생님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결국 죄 없는 학생들을 퇴사로 몰고 간 것 같다.  졸업생 환송회 때 술을 마셨다는 구실은 명분이 서지 않았다.

 

나는 조카(양원)와 함께 기숙사를 나와야 했다. 다행히 생물반에서 함께 활동하던 정병영(鄭秉英) 군이 나의 사정을 듣고 자기의 자취방에 우리 숙질을 "함께 있자."라고 제의하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 자취방은 학교에서 약 3킬로미터 거리의 기린봉 기슭의 산비탈에 있었다. 그 집은 영어 담당의 이종택 선생님 댁이었다.

 

학교에서 돌아가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와 옷이 흠뻑 젖었다. 한 달 이상을 자취하고 먼길을 걸어다녔더니 몸이 쇠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이때의 고생은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비참한 나의 모습을 이종택 선생님이 동정어린 눈으로 보신 것 같다. 어느 때인가 담임인 황호면 선생이 "준호 너 고생한다면서, 이종택 선생님한테서 이야기를 들었다." 라고 말씀하였다. 뒤에 들으니 심 형이 매일같이 교감과 사감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퇴사생들의 입사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10월 초순에 기숙사에 입사해도 좋다는 지시가 내렸다.

 

입사해 보니 김 모라는 어용사장(御用舍長)이 임명되어 학생자치회는 없어지고 식사 사정은 사감 본위로 운영되어 전보다 후퇴했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오직 공부에만 열중하기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고난의 한 해였는데도 묻혀서 공부한 덕분에 나에게는 우등상이 안겨졌다. 1년 뒤에 선배들이 졸업하여 어용사장의 얼굴을 보지 않아 좋았고, 심종학 형이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합격하여 당당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주어 마음 속에 승리를 외쳤다.

 

▲ 전주사범의 후신인 현재의 전주교육대학

 

학우들의 끈끈한 정 /  49년 9월 1일부터 기숙사에서 최고 학년이 되어 기숙사 학생자치회의 역원이 되어야할 차례였다. 학생자치회는 선거에 의해서 사장을 뽑고 사장이 각 부장을 임명하는 것이 전례였다. 그런데 9월의 어느 날 밤 회의 소집의 통문이 돌았다. 동급생인 김영군(권투선수였고 졸업 후 스님이 되었다가 작고했음) 군이 앞에 나와"내가 사장이 되고 모모가 부장이 되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방적인 선언이다. 부당함을 직감한 나는 "언제 누가 선거를 해서 네가 사장이 되겠다고 선언하는가."라고 공박하였다. 그러자 그는 변명할 생각도 안하고 쏜살같이 나에게 달려와서 따귀를 때리는 것이 아닌가. 힘으로는 내가 김 군을 당할 수 없지만 이론적으로는 나의 발언이 옳았음인지 수긍하던 하급생들이 뜯어말려서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 그 후 김 군과는 화해를 하고 깊은 우정을 유지하였다.

 

기숙사에 유숙하는 동안 초기에는 박지용과 유기선(이상 47년 7월 졸업), 양동철, 안신모, 김상기, 이영복(이상 48년 7월 졸업), 심종학, 백영기, 장주열, 정우봉(이상 49년 6월 졸업) 선배와 같은 방에서 생활하거나 교우하였고, 동급생으로는 김영규(영홍), 김완수 안두영, 장중식, 최인풍, 정종환, 진웅기, 구윤섭, 후배로는 성규철, 박혁, 임관순, 임완순, 신준식 엄익록, 장선하, 김두환, 조용순, 조당래, 강용구, 황성기, 이정팔, 장진성, 공창수, 김영무, 강영록, 이장옥과 교본이 두터웠다.

 

나의 졸업을 앞두고 기숙사 후배들은 조촐한 송별회를 해주었다. 2년 전에 졸업생 송별회로 물의를 일으켰지만 이것은 기숙사의 전통으로서 1년 중의 중요한 행사였다. 내가 실장으로 있던 제11실의 후배들은「추억의 새봄」이라고 표제를 쓴 사인첩을 써 주었다. 나와 고락을 함께 한 후배들의 끈끈한 정이 잘 나타나 있어 그 내용을 적어본다.

 

「불평 많은 기숙사 생활도 이제는 끝!! 진리는 된장국에도 있지요(황성기).」「믿음직하던 형님의 앞길을 사내에서 진심으로 축복하오. 언제나 웃는 얼굴 다시 볼 수 있을까요(이장옥).」「글렀다 낙심 말고 성공하여 뽐내소(신준식).」「근면하신 생물학자. 장래의 국립서울박물관장 만세(이정팔).」「어서어서 노력하여 대한에서 1위 가는 생물학박사 되기를 ...(장현수).」「안녕히 가오. 생물학계의 주인공이시어. 이 자리에서 축복하나이다(강영록).」「생물학계의 선도자이시어! 나는 원하노라. 쌀 한 개에 하루 양식하기를(김영무).」「A rolling stone has no moss! (강용구․Skangku).」



생물교실 (제36회) - 제6장 전주사범 생물부

 

(1) 생물교실 / 나는 중학과 3학년 때 미술에 흥미를 가졌다. 내가 그린 수채화가 미술실 게시판에 몇 번인가 붙여졌기 때문에 장차 미술가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송주택(宋柱澤) 선생님이 생물반을 모집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생물반 모집의 게시판을 보고 선뜻 응모하여 생물실에 출입하였다.

 

이때가 46년 봄으로 기억된다. 송 선생님은 한글판 생물책을 구해서 생물반 학생을 위하여 열심히 강의하셨다(그때에는 한글판 교과서를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5월의 어느 일요일에 식물 채집하러 덕진못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풀가방〔胴亂〕과 뿌리삽과 전정가위를 나눠주셨다. 할일 없는 일요일이므로 덕진까지 걸어가서 식물을 채집하고 이름을 외우며 하루를 지냈다.

 

이렇게 식물채집을 한 일요일이 내 일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시발이 되었음을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식물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봄에 꽃피는 냉이, 꽃다지, 반하 등 하루에도 수십 종류의 이름을 외우게 되었다. 기숙사에서 표본을 신문지에 누르고 종이를 갈아주고는 하였다. 영어 단어보다 식물 이름이 훨씬 외우기 쉬웠다.

 

나는 헌 책방에서 무라고시〔村越三千里〕식물도감을 사서 그 그림에 맞추어 식물표본을 동정하였다. 2~3개월 뒤에는 학교와 야산에 나는 식물을 모두 구별할 수 있었다. 송 선생님으로부터 식물향명집(植物鄕名集)을 빌려 식물 도감의 그림 옆에 우리말 이름을 써넣었다. 그 유서 깊은 도감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식물계(植物界)의 분류 체계가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랐다. 식물 한 종을 새로 알게 되면 분류 체계의 빈자리를 메우는 듯 싶었다.

 

전주사범의 특별교실, 특히 생물실은 준비실과 실험실이 따로 있고, 준비실에는 수많은 표본, 특히 선태식물과 해산동물 표본이 많았다. 일제시대의 생물 교사가 선태식물을 전공하였고, 이동권 선배(심상과 1회․별세)가 해산동물을 채집하였다고 한다. 여러 가지 도감을 포함한 생물책, 인체모형, 괘도, 현미경, 해부기 등 생물학 실습에 손색이 없었다. 심지어 밖에서 비치는 햇빛을 파이프를 통하여 실험실 내 현미경의 반사경에 비치도록 프리즘 장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생물부에 들어온 뒤 생물책 사기에 열을 올렸다. 기숙사에 밥값으로 내기 위하여 가져온 쌀 중에서 남는 것을 가지고 책방으로 가서 책을 샀다. 이때는 쌀이 귀하여 책방 주인이 돈으로 쳐서 책을 주었던 것이다. 47년 9월 20일에 샀던 미요시〔三好學〕저 「최신 식물학 강의(1911년 판)」, 나가노〔中野治房〕저「식물생리급 생태실험서(1933년 판)」, 고토〔後藤格次〕저「생물 유기화학」등이 아직도 서가에 꽂혀 있다. 이러한 책을 읽으며 중등교사 자격시험을 치르려고 골똘하게 공부한 적이 있었다.

 

생물부에서는 공휴일과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생물채집이나 생물학 실습을 다녔다.

 

(2) 무악산 식물 채집 / 학교림, 남고사, 증바우 등은 아침저녁으로 다녔고, 기린봉, 고덕산, 무악산은 일요일의 하루거리로 다녔다. 송 선생님을 따라 무악산 채집을 나갔을 때의 일이다. 아침 일찍 전주를 출발하여 무악산의 북사면을 오르고 정상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남사면을 거쳐 금산사, 금구에 이르렀다. 전주행 막 버스를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금구에서 전주까지는 30리 길. 걷기로 작정하고 출발하였는데 도중에 비가 억수로 퍼붓지 않는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일행은 길을 재촉하여 자정이 넘어서야 전주의 송 선생님 댁에 도착하여 선생님의 헌 옷을 얻어 입고, 그러고도 힘이 남았는지 채집물 정리를 한 다음에 잠에 들었다.

 

(3) 내장산 식물 채집 / 47년 가을(10월 12일)에는 송 선생님이 인솔하여 내장산 채집을 떠났다. 이 채집에는 김봉곤, 송형호, 진희성, 성규철, 송대권, 전병영 등 20명이 참가하였다. 교통편이 나쁜 때라 일행은 누에머리 고개에서 버스를 기다리기로 하였는데 마침 학교 후원회 트럭이 장작을 나르러 가는 길이어서 편승할 수 있었다. 후원회 간부는 원평에서 배를 푸짐하게 사 주었다.

 

▲ 단풍들기 직전의 내장산

 

정읍에서 내장산까지의 10 리 길을 걸어서 갔다. 내장산은 단풍이 들기 직전이었다. 마음껏 채집하여 야책(野冊)에 누른 식물 표본이 큰 짐짝 크기였다. 단풍에 취하고 기암괴석에 넋을 잃고 머루와 다래에 입맛을 돋우는 신나는 하루를 넘겼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다래를 보며 달콤한 맛을 알았다. 야산의 채집과는 달리 울창한 내장산의 채집은 나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다음 날은 내장산에서 백양사를 거쳐 사거리 역에서 기차를 타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많은 채집물을 등에 지고 사거리 역까지 가기에는 벅찬 노정이었다. 백양사를 앞에 둔 고갯마루에서 땀에 젖은 일행은 씨름판이 벌어졌다. 진희성 군(경희대 명예교수)이 천하장사로 뽑혔던가? 백양사는 구경하는 둥 마는 둥 지나치고 기차 시간에 대기 위하여 사거리까지는 뛰다시피 하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대자연과 접촉하는 기회를 키워나갔던 것이다.

 

월요일에 느지막이 학교에 돌아오니 친구들 말에 담임인 황 선생님이 무단 결석했다고 노발대발하셨단다. 다음 날 새벽에 가위에 눌린 가슴을 안고 담임 선생 댁을 방문하여 백배사죄. 황 선생님은 듣기와는 달리 부드럽게 대해주신다. "다음부터 그러지 마 !"



대천 임해 실습과 이종원 선생님 (제37회) - 제6장 전주사범 생물부

 

대천 임해 실습 / 48년 여름(7. 19.~27.)에는 이종원(李鍾源) 선생님의 인솔로 생물반이 대천으로 임해 실습을 갔었다. 이때에는 실습 준비를 야무지게 하였다. 해수의 간만조차(干滿潮差)를 한눈에 보는 도표, 동물의 표본 제작 방법과 각 문(門)별 특징 등을 번역하여 학생들이 등사판으로 긁고 등사기로 밀어서 두툼한 책을 만들어 나눠 가졌다. 이때 사용한 종이는 옛날에 식물 표본을 만들었던 헌 대지(台紙)였다. 채집병, 시약, 현미경 등 준비물을 완비한 실습 여행이었다.

 

전주에서 군산―장항 나루를 거쳐 대천까지는 기차를 이용하였다. 이때에 동행한 생물반원은 김봉곤, 송형호, 정병영, 송대권, 한병선 등 10 명이었다. 대천해수욕장에서는 서양 선교사들이 버려 둔 문짝 없는 별장에서 그런 대로 재미있게 지냈다.

 

이 실습에서는 모래 알갱이의 굵기에 따른 게의 종류를 분류하고, 모래를 고정하는「갯크렁」이라는 식물이 모래 속으로 멀리 뻗는 지하경을 채집하며, 물위를 나는 날치가 실수하여 모래 위로 날아 오른 것을 채집하는 등 수확이 대단히 많았다. 손수 잡은 게탕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 하룻밤을 고생한 일 이외에는 예정한 일주일을 재미있게 넘겼다.

 

일행은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 뒷면에 이 선생님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주셨다.

 

첫째. 우리는 인간임을 떠나지 못한다. 동시에 사회인으로 지양함으로써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니 위대한 역사적 사회발전 법칙을 체득하여 진리적 원칙적 생활을 할 것이다- 투쟁.

 

둘째. 산천이 허물어져도 꾸준한 자 반드시 승리할 것이매 나는 俊鎬에 있어서 이러함을 믿느니라-진지.

 

셋째. 조선의 학계는 처녀지다. 우고좌면(右顧左眄)하지 말고 자연과학에 있어서 자료수집이 제1조건임을 명심할 것이니라 -과학.』

 

대천 해수욕장을 떠나는 전날 밤에 큰 폭풍우가 몰아쳤다. 우리는 예정대로 기차 시간에 맞추어 해수욕장에서 대천역으로 나오는 첫 버스를 탔다. 버스가 대천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기차가 이미 역에 닿아 있었다. 그런데 역전 300미터쯤 남겨 놓은 지점에서 홍수로 길이 끊겨 버스가 멈추고, 기차는 장항 방향으로 떠나고 말았다. 이 기차가 일주일 이상이나 불통하는 마지막 차일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대천에서 장항까지는 50킬로미터이니 걸어갈 수가 없었다.

 

▲ 충남 대천 임해 실습에서 / 1947년 7월

 

대천여고 임 선배의 주선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천안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천안―조치원 사이의 열차가 두절. 천안에서 하루를 묵고 조치원에 도착, 또 조치원―대전 사이가 불통. 조치원 민족청년단사무실에서 이틀간을 무위도식한 뒤 대전에 도착, 이번에는 대전―연산 사이가 불통. 할 수 없이 대전사범학교 기숙사에서 신세지기를 나흘. 학생들은 기진맥진이다. 매일 대전역에 나가 정보를 듣지만 허사였다. 대전역 광장에는 여행길이 막힌 손님들로 초만원이었다.

 

7일째가 되던 날 일행은 연산까지 걷기로 작심하고 장거리 보행에 대비하여 장딴지 등에 요오드팅크를 바르는 등 준비를 했다. 아침에 정보 수집 차 역에 나갔던 학생이 호남선 개통의 희소식을 가져왔다. 철로는 연산에서 끊긴 채인데 각각 대전과 이리(익산)에서 온 열차가 끊긴 부분에서 연결해 주었다. 집에 돌아오니 내가 실종되었다고 야단법석이었다.

 

9월에는 대천 임해 실습의 결과를 발표하고 채집품을 전시하였다. 나는 사구(砂丘)를 고정하는 갯크렁이 모래 속을 사방팔방으로 뻗은 지하경의 길이, 거리 및 방향을 재현(再現)하여 호평을 받았다.

 

고군산군도의 야외 실습 /  49년 8월 14일부터 1주일 간은 정삼봉(鄭三奉) 선생님의 인솔로 여름 야외 실습을 하였다. 처음에 위도에 가기로 계획하여 줄포에서 배를 교섭하니 위도행 연락선이 없단다. 나 혼자 떨어져서 줄포에서 내소사(來蘇寺)까지 걸어서 식물 채집을 하였다. 그 당시는 내소사 앞의 길이 좁은 소로이고 양 옆에 덤불이 우거지고 사람이 없었다. 약 10 리 길을 걸으며 식물 채집을 하였는데 여간 무섭지 않았다. 길 옆에서 꿩이 날아도 가슴이 털썩 주저앉는 것 같았다. 그때의 무서웠던 생각과 홀로 울창한 숲을 지나 높은 절에 도착했을 때의 상쾌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줄포에 모인 일행은 계획을 바꾸어 고군산군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여기 저기 수소문한 결과 군산행 배가 고군산군도에 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군산군도가 어데 있는지도 모르는 일행은 겁도 없이 그 돛단배에 승선하여 조용한 바다를 항해한다.

 

부도(浮島)와도 같은 작고 아름다운 섬들을 지나더니 갑자기 사공이 외쳤다."고군산군도에 왔으니 내리시오."라며 풀이 무성한 섬의 바닷가에 배를 대지 않는가? 일행은 짐을 수습하여 사공이 시키는 대로 하선한다.



생물부에서 받은 사진첩 (제38회) - 제6장 전주사범 생물부

 

그런데 섬에는 집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답답한 심정으로 짐을 지고 한동안 걸으니 소로가 나타났고, 그 옆에는 땅 위에 말뚝을 박고 가름장을 걸치고 띠 이엉을 덮은 초분(草墳)이 옹기종기 흩어져 있었다. 새 이엉을 덮은 초분과 묶은 것을 덮은 것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것이 초분임을 바로 알았지만 친구들은 무엇인지 몰랐다. 옛날에 우리 마을에도 초분이 있었다고 들었던 이야기가 회상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시신을 초분 속에 놓고 10여 년간 공기 중에 방치하여 육탈(肉脫)이 된 다음에 남은 뼈를 매장(埋葬)하는 관습이 섬에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나는 초분에 대하여 아는 체하며 열어 보자고 친구들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은 망설이기만 한다. 바닷가의 새 초분에는 문어가 올라와서 시신의 살을 먹는다는 설명을 곁들이기도 하였다.

 

마을에 도착하여 "여기가 어딥니까."라고 물으니 "무녀도 에유."라는 대답이다. 마을에는 교실 한 칸 짜리의 초라한 선유국교 무녀분교가 있다. 그 교실에서 묵었는데 우리가 먹는 반찬을 본 선생님이 마을의 어부집에서 멸치젓을 얻어다 주신다. 또렷한 형체와 노란색을 띤 멸치젓은 육지에서 맛볼 수 없는 일품 일미였다.

 

마침 다음 날은 광복절이어서 어린이들이 광복절 기념식을 올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애국가의 곡이 한 옥타브나 틀렸다. 여기에는 표준음을 잡아주는 풍금이 없었으니 무리가 아니었다. 육지 어린이들에 비하여 무녀도 어린이는 너무나 가여웠다. 이때 나는 자라서 돈을 벌면 꼭 무녀분교에 풍금을 사줘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그 다짐을 이행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후 나는 무녀도를 서너 번 방문하였고 그때마다 무녀분교를 둘러보았다. 초라했던 분교는 말끔히 단장되고 큼직한 풍금도 갖춰져 있었다. 1988년에 방문했을 때는 무녀도와 이웃의 선유도 사이가 붉은색 철교로 연결되어 있어 내 마음을 한결 밝게 하였다.

 

삐걱거리는 노 젓는 소리를 들으며 선유도로 채집 장소를 옮긴다. 무녀도와 선유도에서는 해변식물, 염생식물 및 상록활엽수를 채집하였다.

 

전국 과학 전람회 입선 /  48년 봄의 어느 날 생물담당의 정삼봉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전국과학전람회에 아이디어를 짜내서 출품하라는 지시였다. 평소에 식물 표본을 만들 때 신문지를 갈아 끼우는 시간이 많이 걸려서 불편을 느꼈다. 그래서 빠르게 식물 표본을 만들 수 있는「식물 표본 제작기」를 만들기로 하였다. 설계도를 그려서 함석 공장에 가져다주었다. 벽을 이중으로 하고 밑에서 열을 가하는 전기 오븐과 비슷한 구조의 설계도면이었다. 신문지 사이에 끼운 추진 식물 표본이 열을 고르게 받아 빨리 마르는 야책(野柵)도 설계하였다. 공장까지의 먼 길을 매일 왕복하면서 제작을 감독하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조금씩 설계를 바꾸었다.

 

이 기구를 완성했을 때에 나는「폐침윤」이라는 병을 얻게 된다. 과학전람회에의 출품은 정 선생님에게 맡기고 나는 집에 와서 2주간의 병 치료를 하였다. 나의 작품은 전국 과학전에서 장려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parker 만년필을 받았다. 48년경의 학생에게 parker 만년필은 소중한 물건이었다.

 

▲ 생물부의 졸업 환송 기념 사진 / 가운데 왼쪽부터 필자, 남구만 선생님, 문덕준 선생님.

 

생물부에서 받은 사인첩 / 학교 분위기도 웬만큼 좋아졌을 때 나는 졸업(1950. 4. 27.)을 하였다. 학생 운동으로 학교가 어지럽게 술렁일 때에도 일단 생물실에 들어오면 마음이 평안히 가라앉아 공부할 수 있었다. 내가 일생을 통해서 학문을 하고 난세인데도 전주사범을 무사히 졸업하게 된 연유는 생물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졸업하기 2~3일 전부터 생물부원들은 송별회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송별회가 열렸고 생물실에 마련된 송별회장은 꽃다발과 과자와 노래와 손수건 선물과 격려사로 메워졌다. 송대권 군이 만든 잎사귀 모양의 회상부(回想譜)라는 사인첩을 나에게 주었다. 그 중에서 몇 편의 사인을 들추어본다.

 

「그대의 정들었던 생물실. …통틀어 정들인 생물실…. 이 고운 정을 잊지 마오. 그대여 잘 가시오(양세권).」「유수같이 흘러간 과거의 4년!…. 형이여 회자정리(會者定離)라더니 이 불변의 법칙을 부정할 힘이란…. 추억도 새로운 4280년 하계방학. 지긋지긋한 고생을 극복하며 용감하게 매진하였던 그 정열을 다시금 회상하소서. 내장산의 단풍도 좋거니와 대천의 별장 생활도 좋더라. 아이 무시무시해요. 사람 죽은 시체를 넣은 초분을 떠들어 보자고요. ….(송대권).」「졸업, 오! 김형 기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박주린).」「춘풍(春風). 오호! 흰머리 난 풀귀신이오. 남 보기와는 다른 그대이시오….(엄익록).」「오! 부럽도다. 그대의 의지. 그대의 명철한 두뇌. 길이길이 행복하시라.(김진봉).」「형설의 월계관. 영원히, 영원히, 만날 길은 남았다. 교문을 나서는 형님을 어이 붙잡으리. 기쁘고도 섭섭하다. 형님의 뒷모양!(김경렬).」「이제 어델 가시련지? 나는 기다리오 희소식 종소리 울릴 때까지. 언제나 웃음으로 대하던 그 모습 지금은 어데로 사라졌는지….(박준애).」「마음의 태양. 꽃다이 타오르는 햇살을 향하여 고요히 돌아가는 해바라기처럼.…. 고난을 사랑하는 이에게만이 마음의 원광은 떠오르노라.(유치복).」「넓은 천지 샅샅이 바라보며 흰 목련꽃같이 깊은 물과 같이 영원히. 옛날의 추억 그리운 부장 그리운 선배 그리운 형님.(림억규).」「부장나리 동생을 잊어서는 안되오. 태양처럼 뜨겁게 성공. 종달새처럼 즐겁게 영원히. 냇물처럼 꾸준히 노력.(김수자).」

 

나는 사인첩을 받고 맨 뒤 표지에 다음과 같이 메모를 남겨 놓았다.「동기와 같이 생활해 왔던 생물부원들과의 송별회. 감격의 그날! 부활의 그날! 생물실에서 한벽류(寒碧流)까지 눈물의 내를 이루어 그 내에 배를 띄워 나를 보내도다. 울어라, 울어라. 생물부원 여러분! 울대로 울어라.」



장난기 어린 데모 (제39회) - 제7장 해방공간의 내가 겪은 학생운동

 

해방 후 얼마 동안 사범학생과 전주북중학생은 서로 앙숙으로 지냈다. 사범생은 모두 수재이지만 몸집이 작았고 북중생은 그 반대였다. 이따금 시내의 구석진 골목에서 두 학교의 어깨(힘센 학생의 별칭)끼리 만나면 일전을 불사하였다. 나도 그러한 장면을 목격할 뻔했다.

 

어느 일요일에 우리 급우들 몇 사람이 한벽당에서 놀고 있었다. 때마침 신리 쪽에서 북중의 어깨 몇 학생이 가슴을 펴고 윗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걸어오지 않는가? 친구 중에서 어깨가 넓은 배도중 군이 ‘저 짜식들.’하며 반사적으로 그들을 향해 내디뎠다. 우리들은 한사코 배 군을 붙잡아서 위기를 넘겼다. 우리는 학생 수에서나 어깨 넓이에서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46년 3․1절 행사로 전주 시내 중등학교 축구 시합이 벌어졌다. 장소는 전주상생초교 운동장, 때는 3월 3일. 결승에서 사범과 북중의 시합이 불을 뿜었다. 결승전에는 으레히 사범과 북중의 선수들이 붙었다. 두 학교의 거교적인 응원단도 축구 경기에 못지않게 달아올랐다. 시합의 승부는 큰 몸집과 센 힘을 지닌 북중의 승리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응원하던 중에 사범생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소문이 순식간에 나돌았다. 말인즉 ‘우리 북중 학생은 전북여중 학생과 결혼하고 전주공업 학생이 지은 집에서 살며 전주농업 학생이 가꾼 쌀을 먹고, 우리가 낳은 아들 딸은 사범생이 가정교사로 가르친다’이었다. 이 소문은 어딘가에 방문(榜文)이 붙었는지 종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아무튼 그 소문을 들은 사범생들은 모두 머리털이 발끈 일어섰던 것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오수원의 집으로 가자!'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오수원 씨는 북중의 어깨 총대장으로 지목되어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상생초교 운동장에는 농업, 공업학생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슬슬 빠져나가고 순진한 사범생들만 대열 속에 끼었다. 나는 무질서한 대열에 끼어 신바람이 나서 뒤를 따랐다. 대열은 상생초교를 빠져 나와 태평동과 전주역을 거쳐 노송동에 접어들었다. 이때에는 시가지에 이미 땅거미가 깔려 있었다. 노송동의 어느 골목에 이르렀을 때 대열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 속에 묻혀 있었다.

 

밀리고 닥치고 하는 동안 나는 어느 한옥 집 마당에 서 있었다. 집안을 바라보니 건넌방에 뛰어든 선배들이 나무책상을 마당으로 내던지며, 마당에 선 선배들이 그것을 짓밟고 있었다. 방안에서 반백의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무어라고 애원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순간 ‘내가 이런 모습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었는데.’라는 후회가 생겼다.

 

비단 나만이 이런 생각을 했겠는가? 젊은 학생들의 군중심리가 발동하여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마치 동령(同齡)의 병아리가 서로 대적(對敵)하여 싸우듯이, 싸울 상대를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듯 했다. 이때 북중과의 대적은 치기(稚氣)가 넘치는 어린애들 작란으로 보아 넘길 만 하다.

 

마침내 경찰이 공포를 쏘았다. 기세가 당당하던 학생들은 마치 갯벌의 게가 흩어지듯 뿔뿔이 흩어졌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경찰의 공포 쏘는 소리에도 당당히 서 있는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병주라는 간 큰 학생으로 뒤에 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46년에는 학생들이 자유병에 걸려 ‘교장배척이다.’ ‘반동적인 선생을 몰아내자.’ ‘시험반대 동맹 휴학이다.’하여 학교가 시끄러웠다. 좌우익 대립으로 사회도 시끄러웠다. 좌익에서 삐라를 붙이면 우익에서 떼고, 우익에서 붙이면 그 위에 좌익의 삐라를 붙이는 등 정치 운동이 마치 어린애 장난 같았다. 한마디로 혼미한 사회였다.

 

▲ 1946년 서울에서는 반탁 신탁을 주장하는 좌우대립이 심했고 지방에도 그런 연장선의 갈등이 심했다

 

12월 11일에 학생회에서는 성명서를 내고 동맹휴학(맹휴)에 들어갔다. 북중과 농업학교가 먼저 맹휴에 들어갔고, 이어서 전주의 모든 중등학교가 맹휴를 하였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학교 당국은 곧 이어서 겨울 방학을 선포하여 집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학생회에서는 등교는 하지 말고 고향에도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급생들의 지시에 따라 고향에 가지 않고 기숙사에 머물렀다. 나만이 아니고 모든 기숙사생은 고향에 가지 못했다. 전주의 맹휴 총본부가 우리 기숙사 남료에 있었다. 다른 학교 간부들도 남료에 드나들었고 여학생들도 연락 차 출입하였다. 나를 포함한 기숙사생들은 상급생들(학생회 간부)의 지시에 복종할 뿐이었다.



잊혀지지 않는 18사건 (제40회) - 제7장 해방공간의 내가 겪은 학생운동

 

어느 날 상급생이 삐라를 한 뭉치 주면서 경찰서와 서학동 파출소에 가져다 주라는 지시였다. 나는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말했더니, ‘너는 하급생이고 몸집이 작으니까 붙들리지 않을 테니 절대 안심하고 가져다 주라.’는 명령이었다. 나는 두 뭉치의 삐라를 호주머니에 넣고 경찰서 앞에 가서 보초를 선 순경에게 하나를 주었다. 순경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상급생이 갖다 드리라고 했어요.’ ‘안에 들어가서 드려라.’라는 말을 들으며 나는 뒤로 물러나 도망치다시피 걸었다.

 

나는 너무 겁이 나서 다른 한 뭉치를 파출소에 갖다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서학동 파출소를 보니 마침 보초가 없었다. 닫힌 현관문 옆에 삐라 뭉치를 살짝 던져 놓고 유유히 돌아왔다. 그 삐라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에 없지만 이때에는 좌익 세력이 풍미하던 때라 좌익을 선동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12월 18일에는 전주에서 대 사건이 일어났다. 상급생들은 우리에게 시민대회에 나가라고 지시하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상급생들이 집에 가지 못하도록 막은 까닭은 시민대회에 참석시키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기마대를 동원하여 시민대회를 막았던 것 같다(막았는지 질서를 세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회장은 여상 뒤의 어느 초등학교였는데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운집하였다. 악대와 농악대도 등장하였다. 시민대회의 이슈가 무엇인지 확실히 몰랐지만 ‘자유를 달라!’, ‘쌀을 달라!’, ‘인민대중을 위한 정부를 빨리 수립하라!’ 등등인 것으로 미루어 지금 생각하면 좌익에서 선동한 데모임이 분명하였다.

 

시민대회가 끝나고 데모를 하였다. ‘타도 팟쇼!, 타도 팟쇼!’를 부르며 뛰었다. 대회가 늦게 끝났기 때문에 시가지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였다. 아마 경찰에서는 시민대회를 허가하였지만 가두 데모를 허가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우체국 앞에 왔을 때는 도로가 데모 학생들로 넘치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 좌익 군중집회 / 1947년 5월 1일 서울 남산이다

 

앞 학생에 끌리고 뒤 학생에 밀려서 대정동 평화당 책방 앞에 왔을 때 ‘탕, 탕’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났다. 총알에 맞은 벽 부스러기가 머리 위에 우수수 떨어졌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데모 학생들은 길 위에 엎드렸다. 누군가가 ‘공포다, 공포다’, ‘앉아라’ 하며 소리 질렀다. 총소리가 잠잠해지면 행진가를 부르다가 ‘서’하는 구렁에 따라 서서 걸으면 다시 총소리에 앉았다.

 

이렇게 해서 앉았다 섰다 하기를 몇 번 되풀이하였다. 이처럼 긴박한 사태에 왜 ‘‘해산하라’는 명령이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총소리에 가려서 경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극렬한 데모를 하는 동안 기마대가 와서 밟고 차고 때리고 하는 바람에 겨우 해산하였다. 시내의 어느 가게에 들어가 총소리가 멈추기를 기다리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뛰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뛰다보니 나는 경찰서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순진한 데모 학생인가?

 

휘황하게 불이 밝혀진 경찰서 앞에서 순경이 안내하는 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경찰서 안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면서 나는 유치장 안으로 들이밀렸다. 다리 하나 뻗을 수 없을 만큼 초만원인 마루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어린 나이에 두 번 하지 못할 귀중한 경험을 한 셈이다.

 

이튿날 아침 ‘옥구군 개정면에서 온 김 군이 있는가.’ 라는 이상야릇한 부름이 있었다. 나의 귀를 의심하면서도 “제가 개정면에서 왔습니다.” “이름이 무엇인가, ㅇㅇ을 아는가.”"예!"경찰관으로 있던 사돈이 내 이름을 모르고 큰형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사돈이 사주는 국밥 한 그릇을 먹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 길로 기숙사에 들려 짐을 챙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친구들 중에는 여러 날 유치장 신세를 진 애들도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뒤에 안 일인데 데모하던 중에 어느 학교 여학생이 유탄에 맞아 숨지고, 사범학교 여학생은 턱이 떨어지는 불상사가 있었다고 한다. 턱 없는 여학생에 대하여 ‘그녀가 자라면 나와 결혼하겠다.’고 장담하던 상급생들이 있었다는데 실제로 결혼했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우리들은 치기(稚氣)에 흘러서 장난 삼아 한 데모였는데 여학생에게 그토록 큰 불행을 안겨 줄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데모는 46년 12월 18일에 있었기 때문에 18데모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땅에 떨어진 교권 (제41회) - 제7장 해방공간의 내가 겪은 학생운동

 

47년 봄의 어느 날 운동장의 아침 조회가 끝날 즈음이었다. 학생들은 학년별로 줄을 서고, 그 앞에 선생님들이 마주 서 계셨다. K선배가 갑자기 앞으로 뛰어 나왔다. 그는 우등생이며 그 학년의 반장이었고 전교생에게 잘 알려진 모범생이었다.

 

그는 L선생님을 지목하면서 “학교에서 물러가시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엎치락뒤치락 하던 끝에 선생님의 와이셔츠가 찢겨지고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얌전하고 공부 잘 하던 K선배는 한 순간에 교권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들리는 말로는 18데모를 K선배가 주동하고, 학교에서 그를 벌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온 학교는 술렁이고 경직되며 큰 불행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선생님들은 훈육부(訓育部)를 조직하여 이미 조직된 학생회의 협력을 얻어 학교 질서를 잡으려고 하였다. 이때 우리들은 학생증을 처음으로 받았다. 이에 대하여 다른 학생집단은 민학(민주학생연맹)을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이 무렵에 학생회를 우익이라 칭하고 민학을 좌익이라 칭하였다. 훈육부는 학생회를 비호(庇護)하고 좌익 세력은 민학을 옹호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 무렵의 학생회와 민학은 첨예하게 대립되어 나처럼 순진한 학생들에게는 소화시키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다.

 

내 동급생 중에서 B군은 학생회 최고 간부로, H군은 민학의 최고 간부로 지목되었다. 그런데 학생회 간부들은 시내에 살며 운동 잘하는 학생과 월남해 온 학생이 많았고, 민학 간부들은 기숙사에 살며 책읽기를 좋아하는 학생이 많았던 것으로 보였다. 더구나 나는 H군과 기숙사의 한 방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민학으로 지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H군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만큼 학생 운동에 관심이 적었고 또 학교 공부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때에 학생 운동이나 사회 운동에 소극적이었던 내 성격은 지금도 환경운동 단체의 권유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성격으로 굳어진 것 같다.

 

학교는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앙심을 품은 민학 학생들은 퇴근하는 교장 선생을 어둠 속에서 테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47년 3월 20일부터 4월말까지 경찰이 파견되어 숙직실에서 경비 근무를 하였다. 이 기간에 학교 분위기는 자못 삼엄하였다. 해방 후 학생들은 가슴에 명찰을 달지 않았는데 경찰이 파견될 때부터 5월말까지 명찰을 달고 다녔다. 학생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인데도 명찰을 다는 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 무렵에 우리 학급은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모든 학생이 명찰을 뗀 채 사진을 찍으면서「제2차 명찰 침입 최후의 날」이라고 비꼬는 농담을 하였다.

 

▲ 전주사범 본과 1학년생들 (1947. 5. 30.) / 담임은 송진섭 선생님 (제2차 명찰 침입 최후의 날이라는 농담을 하며 찍었다)

 

47년 가을에는 민학으로 지목된 학생들이 약 100명이나 퇴학을 맞았다. 어제까지 한 교실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그 중에는 이름 있는 시를 낭송하며 시인이 되겠다고 공부하던 친구, 이름 있는 명언(名言)을 졸졸 외우며 문학가가 되겠다고 벼르던 친구 등 내 눈에는 꼭 성공할 것만 같은 여러 친구들이 집단 퇴학을 맞았던 것이다.

 

참으로 암울하고 가슴이 텅 비는 심정이었다. 퇴학을 강하게 주장한 선생님은 L선생과 L교감이라는 후문이 나돌았다.

 

‘이에는 이’로 맞서는 사태 수습 방안은 결코 슬기롭거나 교육적이거나 어른스러운 처사가 아니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집단 퇴학 사건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교권을 떨어뜨린 K선배 등 불손한 학생을 옹호하려는 생각은 결코 없다. 어떻게 해서 퇴학 학생 100명의 상한선을 그을 수 있었는가?

 

많은 학생들을 퇴학시킨 학교 당국은 예상치 않았던 학생 부족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월남한 학생으로 빈 자리를 채운다. 그런데 그들은 순진하게 지냈던 재학생들과는 달랐다. 북한 S시 학생 사건을 주도했다고 자칭하는 모 학생은 등교할 때 단도를 지니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우리 학급에도 새로 들어온 학생이 여러 명 있었다. 그들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듯 수업 시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간혹 교실에 모습을 나타내면 눈의 흰자가 뒤집힌 듯이 보였다. 교내의 으슥한 곳에 학생들을 불러내어 사상을 조사한다고 구타하기 일쑤였다.

 

이 무렵의 공포 분위기는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나는 생물부에서 열심히 과외활동을 한 탓인지 구타당하지는 않았다.



교장 배척 사건 (제42회) - 제7장 해방공간의 내가 겪은 학생운동

 

김현준 교장님은 고매한 학자였다. 여기에 비하여 L교감은 사회 과목에서 박식한 분이었다. 나는 교장의 강의를 듣지 못했지만 L교감의 강의는 여러 번 들었다. 개인을 놓고 보면 두 분이 다 같이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교장은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하여 해방 후의 국내 실정에 어두웠고 순수한 교육자의 입장에서 학교 문제를 처리한 데 비하여 교감은 월남하여 절박한 현실에 접하고 학교 문제를 급진적으로 처리한 데서 알력이 빚어졌던 것 같다.

 

아마도 두 분이 등지게 된 동기는 학생 집단 퇴학의 처리 방법에서 비롯된 것 같다. 학생 집단 퇴학 문제를 처리할 때 교장은 ‘과오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더구나 어린 학생들이니……, 또한 학교란 사람을 교육시키는 곳인 만큼 잘못한 학생들을 옳은 길로 지도하여야 할 것이니 퇴학은 어쩔 수 없는 소수의 학생에 한정하자.’라고 주장했고, 교감은 ‘아니다. 좌익학생은 모조리 퇴학시키자.’라며 맞섰다고 한다.

 

이때 학생들도 두 파로 나뉘었다. 표면에서 활동했던 우익학생들(학연)은 교감파이고, 그 밖의 학생들은 은연중에 교장파가 되었다. 선생님들도 교장파와 교감파로 나뉘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학교 분위기를 ‘敎大 60年史’에 쓴 모 선생님의 수기를 이용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1948년 3월 중순 경 필자는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가자 교감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뺨을 때리려고 하였다. 교감의 손을 움켜쥐고 주위를 살펴보니 일부 교사들은 심각한 얼굴로 서 있고, 중앙의 교사용 의자에 월남하여 편입한 지 얼마 안 되는 김 모 학생이 책상 위에 단도를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중략)… 분노로 교감을 밀어내고 모 학생에게로 가서 단도를 걷어차고 학생을 현관 밖으로 끌고 나가서 심하게 때려 주었다. …중략)… 다시 교무실에 들어와서 교장실을 열어 보았다. 교장실에는 백발에 가까운 교장이 와이셔츠만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3~5 명의 교사와 학생들이 둘러싸고 협박하면서 학교에서 물러가라는 것이었다…(중략)… 이유는 무능하다는 것이다. …(중략)… 그로부터 교장은 관사에서 나오지 아니하였다. 일부 교사들은 학교를 우려하고 교장을 측은하게 생각하여 시내 모처에서 회동하고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내용은 ‘교감이 교장을 추방하고 교장을 하려고 하니 교장을 종전과 같이 유임시켜 달라’는 것으로 문안은 S교사가 작성하였다.』

 

▲ 좌우익이 광복 2주년 기념식을 따로 치르고 있다 / 좌우익의 갈등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잘 설명해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소란이 벌어졌던 어느 날 우익 학생이 교장의 뺨을 때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교감파이며 우익 학생으로 활동하던 학생 중에는 교장이 구타당하는 광경을 보고 마음이 변하여 교장 지지파로 돌아선 학생도 있었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1년 선배인 최 모 형은 머리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고 죽을상을 하고 나타났다. 그는 기숙사 사장(舍長)과 학생회 규율부를 맡아 선생님들의 신임이 두터웠고 본래 교감파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학생의 교장 구타 장면을 목격한 다음에 마음이 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교감파와 결별하려는 기미를 눈치 채고 교감파 학생들이 배신자라고 집단 폭행을 했던 것이다. 최 형의 말에 따르면 실컷 두들겨 패고 마지막에 등산용 피켓으로 연수 부위를 겨누면서 찍어 버리겠다고 위협하더라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처절(悽絶)한 학교 분위기였던가?

 

이 무렵의 어느 날 일부 선생과 학연 학생들은 전 교생을 강당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교장 배척의 결의안을 강제로 통과시키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학생은 끌어내어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강당 내외는 무서운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교장은 세상을 잘못 만나 1년 전에 좌익 학생에게서 테러를 당하고, 이번에는 우익 학생에게서 봉변을 당하는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그 후에도 학교는 조용하지 않았다. 모 선생님의 수기에서 그 면모를 알 수 있다.『전라북도 학무 당국에서는 크게 염려하여 교장과 교감을 동시에 해임하고 도에 근무 중인 송 모씨를 교감 및 교장 사무 취급으로 발령하였다. 그런데 부임한 교감 겸 교장은 학교 운영을 원만하게 수행하는 능력이 부족하였던 것 같다. 왜냐 하면 진정서를 제출했던 교사 명단을 입수해서 일방적으로 적대시하고, 교장 추방 교사들에게 알려줌으로서 심한 불화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내가 사범과 2학년 2학기에 신정규(申正圭) 교장이 취임(1949. 2. 28.)한 뒤에야 학교는 안정되어 질서를 찾게 되었다. 경륜이 높은 신 교장님은 취임한지 얼마 있다가 다음과 같이 교훈(校訓)을 제정하였다.

 

1. 뜨겁게 이 정성 대한민국에 바치자.

2. 즐겁게 손잡고 한 형제로 뭉치자.

3. 참되게 배워서 사도정신 높이자.

 

이렇게 해서 나는 겨우 1년 간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쓰지 않고 편안히 학교생활을 한 후 졸업하였다.



50년 6월 상경해서 입학식을 치르고 귀향 (제43회) - 제8장 한국전쟁과 대학생활

 

사범대학의 입학식은 50년 6월 10일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학금 준비가 늦어져서 6월 12일에야 상경하였다. 심종학 형과는 연락이 끊겼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폐를 끼치기도 미안하였다. 그래서 큰 형님의 친구인 이창수 씨(북아현동 산 1-334번지)댁에서 머물렀다. 다음 날 최기철 교수님을 찾아뵙고 휴학 의사를 밝히고 추가등록과 동시에 휴학계를 내놓았다.

 

이미 생물과 입학생들은 신입생 환영회를 받을 준비를 하며 들떠 있었지만 나는 흥미가 없었다. 입학금에 서울대 교모(베레모) 값이 포함되어 있어 황금정의 신라양행을 찾아가서 모자를 받았다.

이창수 씨는 나의 사정도 모르고 휴학하지 말라고 만류하신다. 그러나 학비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휴학하여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하니 그러면 ‘네 살배기 막내딸을 통사리의 친할아버지 댁에 데려다 주라.’라는 부탁을 하였다. 나는 6월 15일 새벽에 북아현동에서 서대문행 버스를 타고, 기차 시간에 대느라고 서대문에서 서울역까지 책가방을 옆에 낀 채 어린애를 등에 업고 마라톤을 하여 겨우 기차에 올랐다.

 

돌이켜 보면 이때가 6․25동란 10일 전의 서울 탈출이었다. 이 무렵에 라디오에서는 북한의 조만식 선생과 남한에 억류되어 있는 간첩 이주하․김삼룡을 38선에서 교환한다는 보도가 자주 흘러나오고 있었다.

 

▲ 한국전쟁 발발 전의 서울 시내 모습 / 멀리 남대문이 보인다

 

6월 25일은 우리 집에서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못 다니는 침울한 심정으로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기다리면서 모내기 등 가벼운 집일을 돕고 있었다. 아침 새 때쯤에 기차 통학하던 중등 학생들이 떼지어 돌아온다.

 

“왜 벌써 오나?”

“38선에서 전쟁이 터졌대요.”

 

종전에도 38선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보도에 자주 접하던 터라 나는 그저 그러다가 그치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을 빼앗겼다.’ ‘평택에 들어왔다.’는 소문까지는 들렸지만, 인민군이 더 가까이 왔을 때는 소문도 끊겼다. 군산 방향에서 요란한 대포 소리가 나서 산에 올라가 구경하였다. 장항 쪽에서 쏜 듯한 포탄이 군산에서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국군이 쏜 것인지 적군의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불안한 가운데 조용한 날이 또 며칠 지났다.

 

이번에는 분명히 미군기가 군산의 미창(米倉)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군산은 포탄에 찢어지고 폭탄에 깨지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하늘의 쌕쌕이 비행기(미군 함재기)가 폭음을 내는 것 이외에는 땅 위가 조용한 날이 또 계속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불안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마을의 몇 학생은 이미 학도병으로 입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고봉산의 8부 능선에 누리끼리한 카키색 옷을 입은 사람이 등에 짐을 지고 정상을 향하여 꾸벅꾸벅 올라가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옷 색으로 보아 분명히 국군은 아닌 듯 싶은데. 전군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 마을이 포위되었나? 그 후 약 두 달 동안 우리 마을도 어김없이 벼 알과 이삭을 세고 논 평수를 조사하고 여기에서 강연을 들어라 저기에 방공호를 파라는 명령에 움직였다.

 

의용군 모집이 한참이었다. 길에서 붙들려가는 청년들도 있다는 소문이었다. 나는 공포에 떨며 어두운 심정으로 집에 갇혀 지냈다. 이때에 나를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그 면담은 피할 수가 없었다. 나를 만난 L씨는 인민위원회 청년부에서 일을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의용군으로 지원하든지 택일하라는 것이었다.

 

양자택일의 기로에 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앞 일을 판단할 힘을 잃었다.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의용군에 나가면 죽으러 가는 것과 같다. ‘병은 사지야(兵死地也)이니 군인으로 전장에 나가면 죽으러 가는 것과 같다. 한국은 힘이 없다지만 미국과 북한이 대적하고 있으니 북한이 이길 수 있겠는가?’ 하는 판단이 났고, 청년부는 우선 전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므로 생명에는 위험이 없을 것이지만 주민과 접촉할 기회가 많으니 인심을 잃거나 인명을 상하게 하는 일을 피하여 이 난세에 내 생명을 지켜야겠다. 내가 원래 신봉하던 인도주의(人道主義)를 간직하면 내 생명도 지킬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주 전시연합대학 (제44회) - 제8장 한국전쟁과 대학생활

 

그 후 나는 개정리의 청년부 사무실에서 주로 사무를 보고 주민과의 접촉을 가급적 삼갔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지식인으로 분류하여 핵심적인 일에는 참여시키지 않았다. 나로서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청년부 사무실이 비좁다 하여 개정리에서 통사리로 옮기게 되어 나에게는 주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더욱 적어 다행스러웠다.

 

전세가 역전되어 군산지방의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인민위원회도 퇴각한다는 말이 나왔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나는 사무실을 조용히 빠져 나와 회현면 고사리 우동부락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에서 나는 1년 6개월을 푸근하게 지냈다. 1․4후퇴 때 다른 청년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남하하였는데 나는 이 마을에서 조용히 묻혀 지냈다. 이때 셋째 형과 큰조카(양원)는 미숫가루를 가지고 남원까지 모진 고생을 하며 다녀왔고 다른 청년들은 거창이나 산청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그런데 우동 부락에서는 1․4후퇴의 고생 바람을 맞은 사람이 없었다. 인심 좋은 우동 부락이 나를 어머니 품처럼 감싸준 배경에는 큰매부인 문인섭 씨가 인심을 얻으며 살았던 덕일 것이다. 큰누님은 어려운 살림에도 늘 웃는 낯으로 나를 위로하였고, 병견, 병후 두 생질도 말벗이 되어 주었다.

 

나는 여기에서 영어공부를 하고 일본 신조사(新潮社)의 34권짜리 세계문학전집 중의 소설 부분 책을 대부분 읽었다. 집에 있기가 답답하면 옥산수원지의 호젓한 물가를 거닐며 세상사를 사색하였다. 이 기간에 나의 키는 10센티미터나 자랐다.

 

나라의 한 쪽에서는 청년들이 죽는 전장 판인데 전주에서는 전시연합대학이 생겨 강의를 하였다. 전시연합대학은 51년 5월 4일에 문교부령 제19호 ‘대학 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처치령’에 따라 부산, 대구, 전주, 광주, 청주, 대전, 제주에 설치하여, 교수와 학생의 소속대학을 불문하고 각기 피난지에서 교육하는 대학이었다. 넓지 않은 나라에서 전쟁 중에 대학 교육을 쉬지 않으려는 의지는 세계에도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

 

▲ 1952년 전시연합대학 강연모습

 

전주전시연합대학은 전주고교 교사를 빌리고, 학장이 고형곤 선생님이었다. 뒤에 안 일인데 전시특별처치령이 내리기 이전에 50년 11월~12월의 약 두 달 동안 서울(서울대 약대)에 전시연합대학이 설치되어 약 500명의 학생이 강의를 들었는데 학생들의 징집과 1․4후퇴로 51년 2월 18일에 부산으로 이동․설치하였다고 한다.

 

봄에 나는 전시연합대학에 등록하였다. 서울대학생임을 증명하는 물건은 입학금 영수증인데 그것을 분실하였으므로 입학 수속 때 받은 베레모가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서울사대 학생회장의 보증이 있으면 된다기에 전주사범 선배인 김병만 형(교육과)의 보증으로 학생증을 받았다. 이때의 학생증은 젊은이들에게 생명처럼 소중한 증명서였다.

 

1학년 학생을 위한 교양과목은 외서강독 뿐이고 3학년 학생이 들어야 하는 동물생리학, 식물생리학 및 유전학을 수강하였다. 약학 분야의 본초학을 듣고 전공인 식물학으로 인정을 받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이처럼 전시연합대학은 학생들의 전공을 돌보지 않고 교수 위주로 강의를 개설하였던 것이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후방이 다소 안정됨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부산에 각 단과대학별로 가교사를 짓고 강의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전주의 전시연합대학은 52년 6월에 해체하고 9월 신학기부터 부산의 자기 대학에 등교하도록 되었다. 그런데 나는 경제 사정으로 부산에 갈 형편이 못되어 전북대학교 농과대학(이리 소재)에서 수강하기로 양해를 구하고 수강하여 한 학기 학점을 인정받았다.

 

1952년 9월부터 나는 부산의 사범대학 가교사(서대신동 3가 130번지)에 등교하기 시작하였다. 이 바라크 교사는 미8군과 유엔 민간원조처(UNCACK)의 자재 지원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가교사는 구덕산의 산비탈(옛날의 밭으로 추정)에 대지 642평, 건평 232평이었다. 시설은 대형교실 3개, 중형교실 8개, 생물학실험실, 화학실험실, 물리학실험실, 가정학실험실, 교육학연구실, 영문과연구실, 체육과연구실, 도서실과 학장실, 교수실, 서무실, 숙직실, 창고 그리고 작은 남녀 기숙사가 전부였다. 이렇게 초라한 시설 속에서 12개 학과 1,081 명 (재적생은 1,640명)의 학생을 38 명의 교수와 10 명의 사무직원이 교육하였다.



판자집 교사(校舍) (제45회) - 제8장 한국전쟁과 대학생활

 

양 옆에 굵은 말뚝을 세운 교문을 들어서면 검정색 콜탈을 칠한, 말 그대로의 판잣집 가교사가 있었다. 교실은 앞에 흑판이 걸리고 맨 땅바닥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널빤지를 가로놓은 긴 의자가 있을 뿐이었다. 비오는 날에는 빗물이 흙바닥과 판자벽과 천장에서 새어 나왔다. 교문을 들어서면 옆에 학장실과 서무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1미터 높이에 지어진 것으로 보아 대지가 급한 경사임을 알 수 있었다.

 

교문과 마주 보이는 곳에 생물실험실이 있었는데 바닥이 시멘트 몰탈로 다져있고 가운데에 실험대, 변두리에 관찰대가 있고, 10대 나 되는 현미경도 갖추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아침 일찍 등교하면 김기석 학장의 독일어 읽는 큰 목소리가 학장실에서 흘러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비좁은 가교사 안에서 이덕봉 교수님(학생과장)은 가족들과 살림을 하셨고, 최기철 교수님은 두 아들과 박한진 형을 데리고 자취 생활을 하셨다. 부산 피난 대학이 얼마나 고달팠는가를 말해주는 장면이다.

 

비록 가교사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듣는 즐거움이 있었다."국화과와 진달래 과는…‘으로 시작하는 이덕봉 교수님의 식물분류학, 최기철 교수님이 열변을 토하던 ‘디토오션으로 꼬이는 연체동물(권패)의 구조…’를 말씀하시는 무척추동물학, 이주식 교수님의 ‘평편상피조직…’으로 시작하는 동물조직학과 간디스토마(Clonorchis sinensis)가 주로 다루어지는 기생충학,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이민재 교수님의 식물생리학, 헛기침을 먼저 하시던 강영선 교수님의 세포학, 두꺼비의 학명 (Bufo Bufo asiatics) 등을 졸졸 외우시던 남태경 교수님의 척추동물학 등의 강의를 감격적으로 듣던 기억이 새롭다. 이때의 강의는 교과서 없이 구술(口述)을 노트에 받아썼으므로 필기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부산에서는 문리대 교수님들이 사범대학에 오셔서 강의하셨다.

 

부산에서 나는 숙식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처음에 송도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암남동에서 이제세, 채수형 형과 함께 방을 얻어 자취를 하였다. 그 집은 한편에서 술을 파는 집이었다. 대신동에서 토성동까지 전차로, 그리고 그 곳에서 송도까지 해안 가의 골목길을 누비며 걸어 다녔다. 고불고불한 그 길이 너무 멀어서 힘이 들었는데 그 골목길에는 삶아 놓은 고래고기 등 먹을거리가 많았지만 호주머니는 빈털터리였다.

 

▲ 부산 피난 대학시절의 학우들 / 왼쪽부터 나, 모경환 형, 박만상 형 (뒤에 사볌대학 건물이 보인다)

 

이제세 형(화가)의 회고에 따르면 흔하게 나돌던 미국산 밀가루와 큰 캔에 든 버터를 사서 수제비를 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한 지혜가 없어 영양실조에 걸렸다고. 나는 어느 일요일에 바닷가에 나가서 바위에 붙은 지충이(Sargassum thunbergü)를 뜯어서 국을 끓여 먹었다. 그런데 30분 가량 지난 뒤 현기증이 나고 눈에 보이는 물체가 빙빙 도는 것이었다. 모든 해조는 먹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지충이에 독성분이 들어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김종목 형(생물과 동기생)은 중앙대에 근무하는 그의 사촌형을 따라 송도에서 유숙하였다. 우리는 등 하교 때 자주 함께 다니며 학문과 사랑과 인생을 논하였다. 어느 날인가 만선의 기를 펄럭이는 배가 마침 송도 해안에 접근하고 있었다. 김 형과 나는 냄비를 들고 배에 접근하였다.

 

“무슨 고기를 잡았습니까?”

“멸치를 잡었는게라.”

“조금만 팔으시오.”

“팔제라.”

 

우리들은 10전 짜리 지폐를 건네주고, 큰 냄비에 멸치를 가득 받았다. 간장만을 넣고 끓여서 이틀 동안 배불리 먹었다.

 

송도는 학교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서 박만상 형이 얻어놓은 서대신동 자취방으로 합류하였다. 집주인은 피난민이 넘쳐서 방이 모자랐으므로 좁은 마당에 판잣집을 여러 채 지어 세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비가 오면 벽에서 빗물이 줄줄이 스며들어 판자에 붙인 잡지 종이가 떨어지고 쌓아놓은 책이 젖어들었다. 이러한 방인데도 방값을 천정부지로 올리는 것이었다.

 

방값의 압력으로 구덕산 꼭대기에 가까운 방으로 다시 이사한다. 이 집은 구덕산을 오르는 길가에 있었다. 아침 일찍 구덕산을 넘어오는 재첩국 장사의 떼를 볼 수 있고, 어느 날인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몸에 옷을 걸치는 둥 마는 둥 허둥대며 시내로 탈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서 박종민(별세), 박만상, 그리고 내가 자취를 한다. 집으로부터 정규 보급이 없는 때라 끼니를 끓이다 말다하는 곤궁한 생활이 계속된다. 10전에 두 마리 하는 고등어를 사서 몇 달 먹으니 얼굴에 여드름이 만발하던 시절이다.



자기발견 (제46회) - 제8장 한국전쟁과 대학생활

 

53년 4월에 신입생이 입학한 뒤 최기철 교수님의 지도로 세븐 서클(seven circle)을 조직하여 상급생이 신입생을 지도하게 하였다. 리더(leader)에는 박한진, 박종민, 이진기, 한정순 그리고 내가 선발되고, 나의 서클 멤버로는 김정자, 공정자, 박상근, 송영옥 등이 배정되었다. 나는 매주 1시간씩 멤버들에게 원서 강독을 지도하고 주말에는 멤버를 인솔하여 야외 채집을 하는 등 학문과 학교 생활 지도와 친목을 돈독히 하였다.

 

세븐 서클 제도는 신입생을 지도하는 데는 좋았지만 리더로 지명된 학년에서 뽑히지 않은 학생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염려가 있었다. 나는 4학년이 되어 졸업 논문의 실험을 할 때 과거 세븐 서클의 멤버였던 김정자와 공정자 양의 도움을 받았다. 김정자 교장의 회술에 따르면 나의 졸업 논문 실험을 도와줄 때 얻은 자료를 보관하였다가 부산 시내 생물교사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부산의 피난 대학은 학교 캠퍼스가 좁아 답답한 대신에 친구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입학 동기인 김종목, 모경환, 박만상, 윤석인, 윤수만, 홍성오, 황극연, 김봉희, 박옥주, 최규옥 등이 자주 어울렸다. 함께 구덕산에 오르기도 하고 가까운 앗치섬으로 배 유람을 가고는 하였다.

 

급우들(class mate)과 어울리다 보니 내 성격의 장단점이 조금씩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나는 학문에 진지한 나머지 사회 상식이 적고 비타협적이며 우월감이 강함을 발견했다. 체격은 균형 잡힌 친구들에 비하여 밀대처럼 가늘었고 몸이 약해서 지구력이 없으므로 급우들과 술자리나 그 밖의 놀이터에 오래 앉아 있기가 짜증이 났다. 그래서 혼자서 우두커니 서 있기 일쑤여서 김종목은 나에게 ‘말뚝’이라는 별호를 붙여 급우들 사이에는 그 별호가 통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자기 발견한 성격의 결함을 교정하려고 일생 동안 노력하였지만 행동의 구비구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 학급 친구들과 앗치섬 배 유람 / 왼쪽부터 필자, 박만상, 윤수만, 박옥주, 김봉희, 최규옥

 

이 무렵 강의를 듣다보니 나의 학문상의 장단점도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생물학 지식은 내가 앞서는 듯 했지만 영어 발음이 엉망진창이었다. 일제시대에 사범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발음 기호를 꼼꼼히 적어가며 큰 목소리로 읽는 버릇을 들여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었지만 한번 그르친 발음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교과서 없이 강의를 듣던 때였지만 다만 미군용 교과서인 일반식물학(General botany)과 일반동물학(General zoology)은 쉽게 살 수 있었다. 처음에 이들 영어 원서를 읽었을 때 뜻이 통하지 않았지만 약 6개월 동안 열심히 탐독하니 제법 풀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대학에서는 윤독회(輪讀會)가 유행하였다. 몇 친구가 모여 돌아가며 책을 읽고 설명하는 모임이다. 나는 General botany의 윤독회에 열심히 참가하였다. 앞의 두 책은 내가 생물학의 기초를 확실하게 다지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므로 지금도 간직하며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열어보곤 한다.

 

최기철 교수님은 시험을 치른 다음 앉은자리에서 채점을 하셨다. 그리고 나와 한정순 형의 답안지를 남겨 놓았다가 맨 마지막에 두 사람 앞에서 점수를 매기며 경쟁시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이덕봉 교수님이 부르시며 내 강의 노트를 보여 달라며 필체를 보신 뒤, 두 권의 노트를 주시며 내용을 옮겨 적어오라고 하신다. 노트 내용은 흙 속에 묻힌 토탄(peat)을 연료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은 난방 연료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나는 정자로 또박또박 글씨를 옮겨 적었지만 반쯤 옮긴 다음에 하기 싫어 중단하였다.

 

사실 자취방에서 노트를 필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책상이 없었으므로 앉아서 쓰다 엎드려서 쓰다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 두 달쯤 지났을 때 이 교수님이 노트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완성하지 못했다고 말씀드리니 얼굴이 굳어지셨다. 나는 이틀쯤 걸려서 난필로 모두 옮겨 적었다. 이 교수님께 드리니 얼마인가 돈을 주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교수님에게서 받은 처음의 사례금이었다.

 

피난 대학이었지만 학문에 대한 의욕은 다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생물과에서는 세미나를 매주 열었다. 책이나 잡지가 고루 갖춰지지 않았지만 많지 않은 참고 문헌을 찾아서 공부한 뒤 전 학생 앞에서 발표하고 질의 응답을 하였다. 일본에서 도입한 식물학잡지(植物學雜誌)에서 흥미 있는 논문을 찾아 달달 외우다시피 하여 발표한 기억이 난다. 한 교수의 지도를 받는 학생들이 다른 교수 밑에 있는 학생의 발표를 질문해서 꼬집는 습성이 싹트게 되었다. 세미나가 끝나면 최기철 교수께서 일본에 체류 중인 김준민 교수의 소식을 전하시곤 하였다.



과외활동 (제47회) - 제8장 한국전쟁과 대학생활

 

부산에 있을 때 해조(海藻)에 대단히 흥미를 가졌다. 송도에서 채집한 갈조류나 홍조류를 실험실로 가져다가 관찰하였다. 우무질에 싸인 생식기의 구조는 참으로 신비스러웠지만 지도해 주는 교수가 없어서 발전시키지 못했다. 식물분류학 시간에 구덕산으로 야외 관찰을 나가면 나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근엄하신 이덕봉 교수님이 나를 인정해 주셨다.

 

이 무렵에 어려운 일은 병역 문제였다. 재학생에게는 학도군사훈련(대통령령 제577호, 1952. 5.)이 엄격히 실시되었다. 각 대학에는 장교가 배속되고, 재학 중 군사학을 8학점 취득해야 졸업을 하는데 매 학기 당 1~5학점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4년간 280시간의 훈련을 받는데 1학년생은 주 2시간씩 4년간을, 2학년생은 주 4시간씩 3년간을, 3학년생은 주 6시간씩 2년간을, 4학년생은 주 8시간씩 1년간(4학년생의 경우 연 36주의 훈련이 필수)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 1․2학년 학생은 학년별로, 3․4학년 학생은 합동으로 훈련을 받고, 강의는 3분의 2 출석으로 시험을 치렀지만, 군사 훈련은 4분의 3을 출석하여야 응시자격을 주었다.

 

전장에 나가 부상하거나 전사하는 젊은이가 많았지만 학생 신분으로 좁은 교정에서 훈련받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매 학기 군사 훈련을 5학점 이상 취득한 학생들은 ‘전시학생증’을 발급 받았다. 이 때 전시학생증의 위력은 대단하였다.

 

그런데 휴전 협정이 조인될 무렵(1953. 7.)에는 신병보충을 위하여 군인들이 가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전시학생증을 가진 학생들도 무조건 데려다가 입대시키는 것이었다. 교문 바로 앞에서 잡지는 않았지만 대신동 전차역 주변에서는 강의 노트를 든 친구들이 붙들려서 입대하고는 하였다. 재수 없는 물고기가 투망에 걸리듯이 재수 없는 학생들이 입대하여 몇 년씩 졸업이 늦어지기도 하였다.

 

중부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있고 반공 포로가 석방되며 휴전 회담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전세가 숨 가쁘게 돌아가던 53년 6월에 생물과에서는 졸업한 선배들을 위하여 재교육 강습을 열었다. 주로 이주식․이웅직 교수가 담당하는 실험을 하여 조직학과 염색체 관찰이 인기가 있었다. 나는 임시 조교로서 실험 준비를 도와 식물 세포의 염색체 관찰을 하였다. 이때 염색체 관찰에 효과가 있는 스코치(scotch)법을 처음 도입하였는데 나는 자주달개비의 꽃밥을 수집하는 일을 맡았다. 마침 자주달개비의 화기(花期)가 지나 학교 주변에서 얻기가 어려웠으므로 경남도지사 관사(당시 양유찬 지사)에 가서 따온 기억이 난다.

 

▲ 우장춘 박사

 

강습이 끝난 뒤 약 1주일 간 동래 한국 중앙원예시험장에서 우장춘(禹長春) 박사의 특강을 들었다. 최기철, 이웅직 교수님이 인솔하여 동래까지 내왕하였다. 우 박사님이 발견한 겹꽃 페추니아의 유전 육종의 원리에 대하여 강의를 들었고, 육종학을 하려면 끈기가 있어야 한다는 경험담도 들었다. 우 박사님은 아침에 출근하면 장장이 앞서고 연구원들이 뒤따르며 넓은 농장 안의 많은 농작물을 하나하나 관찰하여 이상한 개체를 관찰해서 변이종을 발견하였고, 그 자신도 수만 개의 페추니아꽃에서 수술을 찾아내어 그 화분으로 겹꽃 페추니아를 만들었다고 이야기하였다.

 

마지막 날 다과회장에서 나는 “우 박사님 지금까지 학문하시는 동안 다른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한 적이 없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그는 “나는 학문하는 데 앞만 보고 살았지 옆이나 뒤를 돌아 본 적이 없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동래의 실습이 끝난 뒤 곧 이덕봉 교수님은 이영노 선생을 비롯한 학생들을 인솔하여 금정산(801.5미터)-범어사로 식물채집을 하러 갔다. 지뢰 때문에 금정산에는 오르지 못하였고 범어사 주변에서 주로 채집하였다. 부산시 수원지의 히마라야시다가 위용을 자랑했지만 길의 곳곳에 지뢰가 설치되어 우리를 긴장시켰다.

 

여름 방학이 되어 이덕봉 교수님은 가덕도 식물채집회에 우리들을 데리고 가셨다. 이영노, 박만상, 이진기, 박종민, 나 그리고 임억규, 장일원, 김명실, 허재순, 김정자, 이연희 등이 함께 갔었다. 부산항에서 마산행 배를 타고 가덕도리 선창에서 하선하여 2박 3일 동안 섬을 두루 조사하였다. 이 때의 가덕도는 작은 어항을 가진 한촌(寒村)이었다.

 

나와 이진기 군은 남쪽 사면을 올라 웅주봉(339 미터)에 맨 먼저 올라가 만세를 불렀다. 높은 산에 오른 경험이 적었던 나는 정상에서 바다 바람을 받던 상쾌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정상에서 바라본 북사면은 경사가 너무 급했고 덩굴식물로만 덮여 있었다. 북쪽 해안에 길이 뚫려 있을까? 북사면으로 내려갔다가 길이 없으면 되짚어서 정상으로 올라온 뒤 하산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랄지도 몰랐다. 한동안 구수회의 끝에 드디어 북사면으로 내려가기로 합의. 막상 북사면에 발을 디뎌 놓으니 덩굴식물이 그물처럼 엉켜서 마치 다람쥐처럼 그 위를 걸어갈 수 있었다. 손쉽게 북쪽 해안에 이르러 오솔길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여학생들이 저녁밥을 지어놓았다.

 

가덕도의 북쪽과 낙동강 하구 사이에는 이름 없는 모래톱이 물 위에 솟아 있었다. 흥미를 느끼신 이영노 선생님이 답사하자고 제의하신다. 조각배를 빌려 타고 모래톱에 내린다. 콧수염을 기른 방 원장이라는 중년 신사가 전쟁 고아를 보살피는 고아원을 차리고 있었다. 방 원장은 모래톱을 진우도(眞友島)라고 이름짓고 있었다. 6만 평 넓이의 진우도는 물위에 솟은 지 오래되지 않은 땅이어서 일차수생천이(一次水生遷移)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덕도 식물 채집을 마무리하고 부산에 돌아온 이영노 선생님은 다시 진우도에 가자고 제안하신다. 더 자세히 조사하자는 것이었다. 며칠 뒤에 이 선생님과 나는 두 번째 진우도 식물조사를 하고 마산을 거쳐 부산에 돌아왔다. 나라의 한 쪽에서는 전장에서 부상한 군인들이 속속 후송되고 있는데 무명의 모래톱 식물에 흥미를 느낀 식물학자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과 환도로 서울캠퍼스로 (제48회) - 제8장 한국전쟁과 대학생활

 

53년 7월에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같은 해 9월에 부산의 피난 대학이 해체됨으로써 환도를 서둘렀다. 최기철 교수님이 선발대로 상경하신다고 들었다. 나는 책과 이불을 싸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53년 9월 을지로 5가 붉은 벽돌 건물인 사범대학으로 3년 3개월 만에 옛 학교를 찾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사는 미군(미 제5군 사령부)이 사용하였으므로 좁은 본관에 짐을 풀었다. 강의실 뒤편에는 부산에서 포장한 실험기구 궤짝들이 쌓이고 낡아빠진 책상은 학생 수보다 턱없이 모자랐다. 입학할 때의 의젓한 대학건물을 미군 사령부에게 내주고 비좁은 문간방을 차지하는 꼴이 되었다.

 

을지로 건너편의 필동은 폭격으로 부서진 벽돌조각만 흩어져 있고 사람이 보이지 않는 폐허였다. 전쟁의 상흔이 무서운 것을 여기에서 보는 듯하였다. 생물과 교수는 이덕봉, 최기철, 이주식, 이웅직의 네 교수님이고, 김준민 교수는 일본에 체류 중이었다. 나는 사범대와 문리대를 오가며 강의를 들었다.

 

환도 후 학교생활을 하면서 차츰 인생의 설계를 한 것 같다.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으니 중등학교 정교사가 될 수 있다. 그것을 목표로 공부한다면 대학을 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사범학교 시절에 독학으로 생물학 공부를 하여 중등학교 교사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으므로 굳이 대학교를 다니지 않았더라도 그 길을 밟을 수 있었다. 일생 동안 중등교사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이 무렵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학문을 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비록 전장의 폐허이지만 내가 나갈 길은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대학원 입시에는 제2외국어가 필수였다. 그러나 사범학교를 다닌 나는 제2외국어를 익힐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겨울 방학이 되기 전에 독일어 자습서 두 권(강하구․김태겸)을 사놓았다. 고향에 돌아온 나는 50일 동안,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독일어를 신들린 사람처럼 공부하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겁 없이 나는 중급독어를 신청하였다. 한 번도 다른 사람 앞에서 독일어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겁이 났지만 발음에서 인터네이션까지 꼼꼼히 강의를 들었다. 다행히 독일어를 가르치던 김정진 교수님은 나에게 창피를 주지 않고 이끌어 주셨다. 덕분에 학기말의 성적은 과히 나쁘지 않았다. 이때에 공부한 독일어가 대학원 시험(석․박사 입시와 자격고사)을 칠 때마다 크게 도움이 되었다.

 

▲ 용두동 사범대학 교정에서 김준민 교수님을 모시고 / 왼쪽부터 전병홍, 김규삼, 김진형, 필자, 김 교수님, 신용필, 김광렬 형

 

교사의 일부만을 사용했던 을지로의 사범대학은 너무 협소하였지만 54년 4월에는 환도 후 처음으로 여기에서 신입생이 들어왔고 그 중에 나의 아내(박시현)가 될 사람도 입학하였다.

 

4학년에 진입하자 박종민 형(별세)이 과대표로, 박만상 형(하와이 거주․뇌생리학자)이 부대표로 그리고 내가 총무로 뽑혀서 생물과의 자치회를 맡았다. 박 형이 나에게 신입생 환영회 준비를 위하여 광릉(경기도 소래면)에 예비 답사를 가자고 권유한다.

 

우리는 퇴계원까지 버스로 가고 그 곳에서 도보로 광릉에 가서 숙소 등을 맞추고 다시 의정부까지 걸었다. 이 해의 신입생 환영회는 버스를 두 대나 동원하고, 밤에 캠프 화이어를 피우고,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신입생과 재학생이 줄다리기를 하여 순진한 신입생들을 찬물에 빠뜨리는 낭만적인 연례 행사를 연출하였다. 만취한 상급생들을 트럭에 태워서 귀경시켰다.

 

드디어 사범대학은 54년 12월 23일에 용두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이 곳은 교사 앞에 정원과 운동장이, 뒤에 청량대(淸凉臺)가 있어 교육환경이 매우 좋았다. 용두동 교사는 옛 서울여자사범학교의 교사였다. 붉은 벽돌의 본관과 부속중학이 각각 한 동씩이고 나머지는 기숙사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사 온 뒤 생물과는 기숙사 방을 몇 개 차지하여 이주식, 이웅직, 최기철 교수님이 실험실을 꾸몄고, 김준민 교수님의 귀국에 대비하여 방을 하나 마련하여 김세형 형(부산교원대 명예교수), 박만상 형 그리고 내가 식물학 연구실을 꾸몄다.

 

그러나 실험실의 마루(옛날 기숙사 다다미방의 판자마루)가 흔들려서 현미경조차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중에 기숙사 맨 뒤 동으로 이사하여 이주식 교수님은 욕실과 그에 따른 탈의실에 기생충․미생물학 실험실을, 최기철 교수님은 취사실과 그에 딸린 복도에 동물학 실험실을 다시 차렸다.



교생실습과 졸업논문 (제49회) - 제8장 한국전쟁과 대학생활

 

4학년 때는 동물발생학, 미생물학, 기생충학, 식물생태학(오계칠), 생물화학(이태영), 식물생리학, 생물통계학(김창환) 등과 생물교육론, 교육사회학을 수강하였다.

 

나는 식물생리학 강의를 연속해서 열심히 듣던 터라 대학원에 진학하면 그 분야를 연구하려고 마음 먹었다. 식물분류학을 공부하면 기초가 되어 있으니 유리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런데 생리학을 전공하려면 먼저 물리화학이 기초가 되므로 물리화학과 일반생리학을 혼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4학년 1학기 때에는 교생실습을 하였다. 부속중학교와 부속고등학교에서 각각 며칠씩 일반 수업을 참관하고 학급경영을 배우며 연구수업을 참관한 다음 각과에서 한 명씩 선출되어 연구수업을 하였다.

 

생물과에서는 중학교에서 내가 연구 수업을 하도록 선출되었다. 연구수업이 끝난 뒤 안 교감선생님의 평가가 있었고 학생 신분인 이영노 선생에게 평을 하라니까 "수업은 잘 했는데 학교 시설이 없어서 수업에 어려움이 많았다."라고 꼬집었다. 교생 실습은 중등학교에 근무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과정이지만 대학원 입학에 뜻을 둔 나에게는 시간 낭비로만 여겨졌다.

 

▲ 생물과 신입생환영회를 마치고 / 1956. 5.. 광릉에서

 

4학년 때는 졸업 논문을 써야 했다. 봄에 식물의 광주율 실험을 하려고 도꼬마리 묘를 찾기 위하여 여러 곳을 찾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광주기에 따른 메밀의 암․수꽃의 성비를 조사하기로 하였다. 계절변화에 따른 낮 길이[日長]의 그래프를 그리고, 야외에서 자생하는 메밀의 개체별 암․수 꽃수(성비)를 세는 실험과 수경 재배한 메밀을 단일 처리한 뒤 암․수꽃 수를 세는 실험을 하였다. 결과는 낮 길이가 가장 긴 하지 때에 암꽃이 거의 피지 않고 수꽃만 피고, 하지부터 추분에 가까워질수록 암꽃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여 암․수꽃 수가 같아졌다가 그 후에 수꽃보다 암꽃이 많아졌다. 이런 현상은 그 당시에 어떤 문헌에도 없었고 아직도 그 사실을 적은 문헌을 보지 못하고 있다. 졸업논문 제목은 ‘메밀 외 수종식물에 관한 광주율 연구’였다.

 

어느 날 문리대 생물학과의 김계중 군(현 펜실베니아대 교수)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사유인 즉 전국 학생 생물 동호회를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USIS(미국 공보원)에 서울대 문리대와 사대, 동국대, 이화여대 등에서 몇 학생씩 모였다. 그 당시는 학생들의 옥내 집회를 경찰서에서 허가를 받도록 되어 있어 두 명의 형사가 입회하였다.

 

회의는 김계중 군의 사회로  진행됐는데 회의 진행이 요령부득이었다. 답답함을 참고 있던 형사가, 동의는 이렇게 하고 개의는 저렇게 하는 것이라고, 사회자를 가르치며 회의를 끌어 나가니 시간이 한없이 길어졌다. 휴식 시간에 김신환 군(문리대 3년․현재 성악가)이 자진해서 앞에 나와 우렁찬 목소리로 한가락 뽑아 피로를 덜어 주었다.

 

회의 결과는 회장을 두지 않고 동물학부장(이영철․전 인하대 교수)과 식물학부장(김준호․사범대 4년) 그리고 총무부장(김계중)만 두기로 합의하였다. 이 모임이 현재 서울대 동물학과/분자생물학과에서 매년 개최하여 1999년도에 38회째 이어지는 전국 대학생 생물학 심포지움의 전신이 되었을 것이다.

 

환도한 뒤에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며 과외활동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54년 봄부터 일요일에 청량리 역전에 나가면 서울 시내의 생물학도들이 떼지어 모이곤 하였다. 약속한 바 없는데 모여서 각자 자기 전공의 생물 자료를 수집하려 여러 방향의 버스나 기차를 탔었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고병갑(별세), 박상근, 송영옥(별세), 최광국, 윤봉균, 이학동, 차종환, 최의민, 홍석필, 박시현, 이시정 등이 동구릉이나 광릉, 또는 도봉산이나 북한산으로 식물 채집하러 갔었다.

 

54년 봄에는 입학 동기인 모경환, 윤석인, 김종목, 홍성오, 황극연, 박노면, 최규옥, 박옥주의 7명이 졸업하여 뒤에 남은 나를 쓸쓸하게 하였다. 그들은 전쟁 중에 심한 고생을 감내하여 운 좋게 졸업했기 때문에 모두 취직할 수 있었다. 돈암동에서 함께 자취하며 동고동락하던 모경환 형도 서울사범으로 취직이 되었다.

 

나의 입학 동기(1950년 입학)들은 윤석인 형을 제외하고 모두 지방 출신이었다. 윤 형은 아버지가 원남동에서 넉넉하게 사셨고 그 댁을 방문할 때는 윤 형의 형수님이 우리들을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그래서 자주 윤 형 집에 모여서 술 파티를 하였다. 어느 술 파티 때는 모두 곤드레가 되었고, 특히 박노면 형의 괴로운 심사가 폭발되어 문짝을 부수는 등 소란을 벌여 곤혹스럽게 한 적도 있었다.



아르바이트와 장학금 (제50회) - 제9장 학문의 오솔길

 

대학의 질서가 잡혀감에 따라 등록 마감 일이 엄격히 지켜져서 예전처럼 연기되는 일이 없었다. 3학년 2학기 때 일이다. 등록마감 일이 부득부득 가까워지는 데도 고향에서 돈이 오지 않는다. 이 사정을 눈치 챈 생물과 학생들이 등록하고 남은 돈을 모아서 내 등록을 하도록 해주었다. 다행히 이틀 뒤에 등록금이 와서 모두 갚았지만 고마운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하였다.

 

전쟁 중의 학생들 의복은 군복에 검정 물감을 들여 입고, 군화는 단속 대상이므로 군화를 뜯어서 껍질을 뒤집어서 단화로 만들어 신었다. 나의 구두는 한쪽은 뒤집은 가죽으로 다른 쪽은 겉 가죽으로 지은 것이었다. 이러한 외모는 나만 초라한 것이 아니고 거의 모든 학생이 공통되어 있었다.

 

학부 재학 중에 두 번의 아르바이트 경험을 하였다. 즉 3 학년 1학기 봄방학 때 영지문화사(사장 백만두)에서 펴낸 중학생용 영어 <펜맨쉽>을 각 중학교에 보급하는 일이었는데 나는 현장에 나가지 않고 사무실에서 일을 보아주었다. 이 때 최기철 선생님의 알선으로 생물과에서 많은 학생이 일하여 4만 부나 팔렸다고 들었었다.

 

4학년 1학기 때에 박만상 형의 소개로 명륜동의 현 씨 집에 입주하면서 3개월간 가정교사를 하였다. 이 집의 가족은 부모와 3남매 그리고 어린 식모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능한 아버지와 여장부 어머니는 무교동에서 큰 음식점을 경영하여, 큰아들은 내가 맡고 딸은 동국대학의 전 모 형이 맡았는데 큰아들이 가정교사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아침에 그 집 큰아들을 깨우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었다. 책하고는 담을 쌓은 아이여서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여름방학 중의 광주보병학교 군사훈련을 구실로 그 집에서 물러났다.

 

▲ 대학 학부 시절의 나

 

54년도부터 서울대에서는 교내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나는 그 1차 장학생에 뽑히는 행운을 누렸다. 나중에 안 일인데 사범대의 각과에 한 명씩 8명의 장학생이 할당되어 등록금이 전액 면제되는 귀한 장학금이었다. 3학년 때 성적이 스트레이트 A를 받아서 생물과에서 한 사람 추천되었다고 한다. 3학년 겨울 방학 때 집에 와 있는데 이덕봉 교수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내용이 너무나 교훈적이고 사랑이 넘처 있어 편지를 보관하였다.

 

『삭만削蔓. 귀서貴書 반갑게 읽었오이다. 나는 1월 4일~7일에 금마金馬에서 집회集會를 마치고 그날 군산群山 가는 도중에 개정開井의 농촌위생연구소農村衛生硏究所의 좋은 시설施設을 멀리 차창으로 바라보고 군君이 이 근처에 있으려니 하면서도 홀홀忽忽한 길이라 바로 군산으로 가서 하루밤 지내고 익翌 8일에는 곧 떠나서 귀로歸路에 올랐소이다. 군君의 평소平素의 진지眞摯한 학구적學究的 태도態度에 감심불기感心不己하는 바인데, 더욱이 인격도야人格陶冶에 깊은 관심關心을 가졌음을 아오니 또한 감탄感歎을 불금不禁합니다. 다만 사람이란 공중空中에 뜬 추상적抽象的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具體的인 실존實存이기 때문에 각자 그 서 있는 입장立場에서 최선最善을 다 하며, 그 직업職業에서 사명감使命感을 느끼고, 그를 통하여 거기에서 부대끼면서 인격人格을 건설建設하여 나가는 것이 실상實相이 아닌가 합니다. 마침 군의 편지를 받자, 교수회敎授會에서 장학금獎學金 받을 학생 8명을 선정한 바, 군君이 그 중의 1명으로 선정選定되었소이다. 장학금은 본부本部에서 한 학기에 1만 환이라고 하니 금액金額이 많은 것이 아니나, 군이 피선된 것을 기뻐합니다. …(중략)…. 1954년 1월 16일. 이덕봉李德鳳. 김준호 군金俊鎬君』

 

때를 같이 하여 이영선 조교(이주식 교수님 연구실 근무)로부터도 편지를 받았다. 생물과에서 유일한 장학생에 내가 뽑혔다는 축하의 편지였다. 이 조교는 편지에 덧붙여서 ‘스스로 돕는 자는 하늘도 돕는다. 부단히 노력한 결과 유일무이하게 장학생에 선발되어 축하합니다’라고.

 

등록 때 사범대 교무과에 들렀더니 ‘장학생이 누구인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자’며 사무실 내의 직원들이 일제히 주목하여 내 얼굴을 붉히게 하였다.

 

환도 직후에 기억에 남는 것은 이영노 선생님 댁에 기식 생활을 하던 일이다. 농촌의 추수 전에 개학하였으므로 넉넉한 하숙비를 마련할 리가 없었다. 학교에서 만난 이영노 선생님은 나의 숙식을 걱정하셨다. 오갈 데 없는 내 사정을 듣고 무조건 당신 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갈 곳이 없으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댁에 가 보니 이 선생님도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상경하여 명륜동 처가댁의 방 하나를 얻어 쓰고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장남 원세가 젖먹이 때이다. 내외분이 쓰던 단칸방에 들이닥쳐서 식객노릇을 하니 이 선생님은 나와 함께 자고, 방을 빼앗긴 사모님은 친정아버지(장지태 옹) 방으로 가셨을 것이다. 밥상이 없어서 이삿짐을 싸온 레이션 상자로 대신하는 형편이었다.



자취생활의 추억 (제51회) - 제9장 학문의 오솔길

 

만 가난한 것이 아니고 이 선생님을 비롯하여 모든 한국 사람이 가난했던 시절이다. 이렇게 염치없는 생활을 열흘인지 2주일인지를 계속하였다. 학교에서 모경환 형을 만나 숙식을 걱정하니 돈암동에 방을 얻어 놓았으니 함께 자취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모 형은 분명히 나보다 생활력이 강해서 방을 물색했던 것 같다. 선택의 여지가 있을 리 없는 나는 그 후 3 년 여 동안 모 형과 돈암동 언저리의 자취방과 하숙방을 전전하며 동고동락하였다.

 

서울의 겨울 추위는 부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취방이라고 얻은 것이 혼자 사는 할머니 집의 문간방이었다. 53년도에는 석유난로로 밥을 지을 수 있지만 구공탄의 사용 방법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였다. 더구나 아침에 등교하면 저녁 늦게 돌아오는 우리에게는 구공탄 불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아궁이가 훤하게 열린 냉방에서 겨울을 나야했다. 모 형은 미군용 공기 매트리스를 사다 바닥에 깔았지만 나는 그러한 주변머리가 돌지 않았다. 이때 얻은 냉기가 지금의 신경통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곤궁한 자취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혹이 붙는다. 사대 생물과 후배인 임억규 군(현재 시인)이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알게 모르게 주인집 할머니는 싫어하는 눈치여서 임 군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랴, 갈 곳 없는 후배를 함께 있도록 할 수밖에.

 

졸업한 모경환 형이 하숙으로 옮긴 뒤 나와 임 군은 사범대에 좀 더 가까운 안암동으로 방을 얻어 이사하였다. 여기에 김철수 군(서울사대 생물과․현 목포대 명예교수)이 자주 들르곤 하였다. 얼마 뒤 임 군이 가정교사로 떠났고 그 뒤를 이어 김창희 군(친척․서울미대 조소과․별세)과 합류한다.

 

이 무렵에 쌀 1말(斗)에 500환하였는데 1개월 생활비가 쌀값 1,200환, 방세 500환, 잡비 400환이었고 학교는 걸어서 통학하였다. 농촌경제가 말이 아니어서 넉넉하게 보급을 받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 무렵에 큰형님으로부터 받는 편지 내용에 농촌 사정이 잘 나타나 있다.

 

▲ 큰 형님의 편지 / 1954. 12.

 

『俊鎬에게. 봄비가 자주 내려 녹음綠陰을 재촉하며 농작물農作物의 생기를 돋우고 논마다 만수滿水되어 못자리 터도 각자 자유로히 장소를 선정하여 거의 끝나려하니 아마도 이대로 가면 풍년豊年을 예상시키는 듯 한데, 수일 전에 2회 째의 서신을 받고 가정소식家庭消息을 알리지 못하여 대단히 궁금히 생각하였겠는데, 실은 제반사諸般事가 여의치 못하여 수일 지연됨을 양해諒解하여라.

집에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다들 여전히 평범平凡하게 지내니 다행일가 하며(중략). 특히 미안을 금치 못하는 바 고독孤獨한 타향객지他鄕客地에서 쓰라린 고통을 겪으며 몸의 영양부족營養不足을 초래할 정도까지 식비食費조차 보급 못하고 방관시傍觀視하고 있는 형들을 책責하여다구. 실지로 면목이 없다.

근자 농촌경제農村經濟는 잘 알다시피 미가저락米價低落으로(白米 1斗에 400圜) 농사만에 의존하고는 도저히 생계生計를 유지할 도리가 없는 정도이다. 요전에 들은 즉 지난 3월에 전선지구戰線地區를 다녀온 후 또 다시 어는 지방인지 여행旅行할 것이리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사실인지. 서신으로나 인편으로 간혹 듣는 바 너무도 활동이 심한 모양인데 그러고서야 심신心身이 쇠약衰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학문學問의 탐구探究도 좋으나 나의 일신도 생각하여 가며 순서있는 행진을 바란다. 그리고 요전 편지에 의하면 지나치게 심각深刻한 학구적 이상學究的 理想을 추구하고 있는 듯 한데 그도 또한 우리 한국에 태어난 민족으로서 대내적對內的으로나 대외적對外的으로 주위 환경을 고찰考察하면서 분수分數에 넘지 않는 활동을 하기 바라며 절대 낙심落心하지 말고 향상력向上力을 키워나가기 바란다.

미안하기 한이 없으나 이제서야 약간 주선된 금 5,000환을 마침 운회리 이주세 선생이 상경하기에 탁송하니 영수하여라. (중략). 그러면 다음으로 미루고 이만 적으니 부디 몸 건강하기를 고대한다. 1954. 5. 2. 수근壽根 서』



외로웠던 졸업식 (제52회) - 제9장 학문의 오솔길

 

안암동으로 자취방을 옮기고 54년 9월부터는 방에 틀어박혀 대학원 입시 공부에 매달렸다. 문을 향하여 밥을 먹은 뒤 곧 돌아앉아 벽을 향하여 책을 읽는 생활이 4학년 2학기 내내 계속되었다. 몸은 피골이 상접하고 얼굴은 창백한 몰골이었을 것이다.

 

지겨운 자취생활은 대학원 2학년 때인 56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생스러웠지만 자유스러웠던 오랜 자취생활은 인생의 추억거리로 남아 있다. 

 

나의 대학 졸업식(1955. 3. 25.)은 더 없이 쓸쓸한 날이었다. 친구들은 가족이나 애인과 어울려서 화환과 선물을 받고 사진을 찍느라 법석이었다. 문리대 교정에서 거행되던 졸업 식장에 먼 친척인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합격했다고 자기 소개를 하는 김창희(金昌熙) 군을 만난 것 이외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식이 끝나자마자 외롭고 쓸쓸해서 도망치듯 교정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가슴 속은 서울대 대학원에 합격한 자존과 긍지로 가득 차 있었다.

 

졸업식 전후에 CSMC 훈련을 받은 졸업 동기생들이 거의 소집되었으므로 사은회를 주선할 사람이 없었다. 여학생은 소집되지 않았지만 수가 적고 분위기가 흔들려서 사은회를 추진하지 못하였다. 아마 사은회 없는 졸업식은 우리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은사님들에게 죄책감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참으로 불행한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 50년도에 을지로 교사에서 입학하여 6․25 전란을 고스란히 겪으면서 두 개의 전시연합대학을 거치고 을지로 교사로 돌아왔다가 다시 용두동 교사에서 55년에 졸업하기까지 무려 일곱 번이나 이사한 뒤 졸업했기 때문이다.

 

 

▲ 식물반 박만상, 김세영 형의 졸업기념 / 1954년

 

55년도의 대학원 생물학과에는 사범대학에서 나와 이진기, 박종민 형과 문리대에서 이영록, 강만식 형, 모두 다섯 명이 합격하였다. 55년도 이전에는 대학원 학생 수가 적어서 희소가치가 있었는데 한 해에 다섯 명이나 입학하였으니 희소가치가 떨어진 셈이었다.

 

대학원에는 박사과정에 김원겸 형(현재 캐나다 거주)이 유일하였고, 석사과정 2학년에 김영태(현재 미국 거주), 조완구(전 서울대 총장) 형뿐이니 대학원 학생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해에는 생물학과 수험자의 성적이 좋아서 다른 학과의 정원을 할애 받았다고 한다. 다음 해에 하두봉과 김종협 형이 입학하였다. 대학원생들은 이따금 대포집도 가고 세검정으로 야유회를 가기도 하였다.

 

대학원 입학 후 나는 사대 생물과 조교와 사대 부속중학교 강사 발령을 받고, 문리대에서 강의를 들었다. 이 해부터 행동 반경이 넓어졌고 시간이 대단히 바빠졌다. 생물과 조교로는 1주일에 4시간의 실험(일반생물학)을, 부속중학교에서는 8시간씩 강의를 하였다.

 

대학원 생활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때임을 경험하였다. 학부에서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고향집에서 받을 수 있었지만 대학원에 입학한 뒤까지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등록금은 대학원이 학부보다 많았다. 사대 조교는 무급이므로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 되었고 부속중학의 강사료만으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그것조차도 방학 중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쪼개 써야만 했다.

 

석사과정 1학년 때는 식물생리화학, 생물통계학, 방사선생물학 및 효소학을 들었고, 세미나 및 실험 시간에는 외국에서 진행하고 있는 첨단적인 실험 결과에 대한 정보 교환을 하였다. 석사과정 2학년 때는 생물물리학, 방사선생물학 및 효소학을 수강하였다.

 

대학원 재학 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약 10년이 지났으므로 영미에서는 생물학에 관한 탁월한 연구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일본은 그보다 훨씬 뒤져 있었으며, 한국은 전쟁으로 쓸만한 실험기구가 하나도 없었고 학술잡지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대학원에 입학은 했지만 학문하기가 마치 구름 잡는 느낌이었다.

 

석사과정 1학년 때는 학문에 대하여 고민하며 지났다. 이 무렵에 한국에서는 방사선생물학이 생물학계를 풍미하였다. 방사선에 쬐인 종자가 모두 돌연변이를 일으켜서 그 식물들이 모두 쓸모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방사선생물학에는 흥미가 없고 식물분류학은 간에 차지 않았으며 식물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리 현상을 규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문헌도 실험기구도 시약도 없으니 고민스럽기만 하였다.



학창에서의 병역 문제 (제53회) - 제9장 학문의 오솔길

 

5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사람들은 늘 병역문제로 머리 속이 뒤숭숭하였다.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나는 대학 4학년 때인 54년 7월 3일부터 9월 10일까지 70일 간 광주보병학교에서 CSMC 장교훈련을 받았다. 제2구대에 속했던가? 머리를 빡빡 깎고 입교 첫날밤에 구대장(소위)의 지껄이는 소리에 하도 기가 차서 히죽히죽 웃어 주었다. 그랬더니 화가 난 구대장이 나에게 다리를 의자 위에 올리고 팔을 마루에 뻗는 엎드려 뻗쳐를 하라는 것이었다. 군대는 이런 것인가 하고 기가 죽고 말았다.

 

나중에 생태학 실습에 도움이 됐던 독도법(讀圖法)을 익힌 것은 이때였다. 그러나 막상 지도를 읽으며 목적지를 찾아가는 현장실습 때는 도중에 수박을 사먹느라고 컴퍼스를 잘못 읽어 엉뚱한 곳에 도착하는 우를 범하였다.

 

삼복의 불볕 더위에 1,000인치 사격, 100미터 사격, 구보 등 나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훈련이었다. 더위를 먹어서 입맛이 떨어지고 물만 먹혀 몸이 몹시 허약해졌다. 그런데도 성적은 우수하게 수료하였다. 이 훈련생들은 대학 졸업 후 자원에 의해서 소위 임관이 규정되어 있었다. CSMC 훈련생은 대학 졸업 전후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2년간 입대가 연기되었다.

 

대학원에 입학할 무렵에 큰형님을 비롯하여 가족들이 내 병역문제로 많은 걱정을 한 흔적이 큰형님의 편지에 나타나 있다.

 

『俊鎬에게. 우수겨칩雨水驚蟄지나면 대동강大洞江 물도 풀린다는데 금년에는 거꾸로 설을 지났는지 삼동三冬보다 몇 배나 혹한酷寒이 계속되어 따뜻한 지방에서도 견딜 수 없는데 객지客地의 복잡한 환경環境 속에서 그 얼마나 고통苦痛을 겪고 있는지. …(중략)…. 집에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家族이 모두 여전 무사如前無事히 지내니 안심하게. 그런데 일전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참고로 동봉한 신문기사와 여如히 55년도 대학졸업자大學卒業者로서 CSMS 군번을 받은 자는 대학원大學院 진학자라도 3월 25일까지 자진입대自進入隊하라고 되어 있으니 어찌된 셈인지 그곳에서 여러 방면으로 미리 연락문의連絡問議하여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으네. …(후략). 수근 서壽根書』

 

대학원에 입학한 나는 소집이 연기되어 마음 편안하게 지냈다. 그러던 55년 4월 하순의 어느 날 실험실에서 혼자 시약을 만들고 있는데 말쑥하게 차린 두 신사가 별안간 들어오더니 신분증을 제시하며 조용한 말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분증을 보기는 했지만 내용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 광주 보병학교에서의 CSMC 훈련생 시절

“어디로 갑니까?”

“가보면 압니다.”

 

나는 학생증을 제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포승으로 손을 묶어야 하지만 도망갈 염려가 없는 학생이니 그저 갑시다.”

 

나는 바짝 긴장하였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들이 가자는 대로 따라간 곳은 남산의 중앙정보부였다. 뒤늦게 연세대 대학원 신입생도 연행되어 왔다. 그 사유인즉 문교부에서 국방부 CSMC 훈련생 중의 대학원 신입생 명단이 전달되지 않았으니 문교부의 확인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교부에서 확인증명을 받는데 하루가 걸렸으므로 하루 밤을 중정 숙직실에서 자야만 했다. 그 즈음에는 병사 행정이나 학무 행정이 느렸고, 기관 사이의 신뢰도 적어서 나를 36시간 이상 불안에 떨게 하였던 것이다.

 

일이 해결되어 실험실에 돌아오니 시약 병이 열리고 저울 위에 시약이 놓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원을 수료할 무렵에 나의 병사 문제는 묘하게 얽혀 있었다. CSMC 훈련생이었으므로 수료한 다음에 입대하여야 하는데 마침 병역법이 개정되어 내가 징집1기에서 제2국민병으로 넘어가는 이행기었다. 그래서 개정병역법 시행령이 공포될 때까지 기피자의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얼마 동안 전전긍긍하며 지내야 했다. 이 무렵에 친구인 모경환 형으로부터 받은 편지에 그 때의 절박했던 사정이 나타나 있다.

 

『준호 형. 예정대로 무사히 귀성하였네. 홀로 공방空房에 앉아 있을 형의 영상影像이 떠오르네. Ink 색도 낡아빠지고 주인을 잃었던 pen도 녹슬었기에 긴말 쓰지 못하겠네. 그러나 벌서 닭 한 마리를 요리한 사실은 굳이 알리고 싶네. 시골은 기자 記者(병역기피자를 지칭하는 은어) 단속이 서울처럼 심하지 않네. 언제와도 같은 구태의연舊態依然일세. 차車 중에서도 경찰관을 구경하지 못했네. 그래서 서울에서의 일이 잘 되면 좋겠지만 불여의不如意하면 혼잡한 야간열차夜間列車로 귀성하는 것도 무방하지 않을까? 옥구군沃溝郡은 어떨지 모르나 정읍, 부안, 김제,…는 여름과 다름없네. …(중략)…. 하숙집 주인에게 안부 전해 주게. 1956년 1월 2일. 모경환.』

 

모경환 형의 다른 편지에는 병역문제에 관해서 더 절박한 사연이 나타나 있다.

 

『준호 형. (전략). 병사관계가 보다 험악해졌나 보네. 기자記者(병역 기피자의 은어) 중 체포된 자는 빈틈없이 서대문西大門을 거쳐 입대하는가 보데. 이제까지 안 바에 의하면 6개월 징역언도懲役言渡를 받고 복역服役 중인 자가 있네. 출감出監 즉시 입대하는가 보네. …(중략)…. 단속은 9월말까지라고  하며 구 후에도 가두검색街頭檢索이 있을지 모를 일이고, 12월경에 다시 한 번 있겠는지도 모른다니 걱정이네. 다행히 이번 개정병역법改訂兵役法이 통과됐고 머지않아 공포公布된다면 형이나 나나 소집召集으로 넘어가는 기쁨을 동시에 나눌 수 있겠네. (후략). 1957년 8월 9일. 모경환.』



석사학위 논문 (제54회) - 제9장 학문의 오솔길

 

얼마 후에 개정병역법이 공포되어 입대가 면제되었다. 학문하는 시간의 길이와 병역 복무 기간은 반비례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는 학문하는 행운을 타고 난 것이다. 왜냐 하면 나는 엄연한 CSMC 훈련생이며 징집1기생이었으므로 대학원을 수료하면 반드시 군에 입대하여야 했다. 그런데 대학원 재학 중에 병역법이 개정되어 그 기산 일이 종전의 9월 1일에서 1월 1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호적상의 생일이 11월 29일인 나는 징집 제1기에서 제2국민병으로 넘어가고 CSMC에 의한 소집도 면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에 입대한 친구들보다 오랜 시간을 연구실에 남아서 더 많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던 것이다.

 

대학원 2학년초에 이민재(李敏載) 교수님께서 약병 하나를 건네주시며 이것으로 석사논문을 쓰라고 하셨다. 그 약은 IPC(Isopropyl N(3-Chlorophenyl) Carbamate)라는 단자엽식물을 선택적으로 죽이는 살초제였다. 그 당시에 2.4-D라는 쌍자엽식물을 선택적으로 죽이는 살초제는 이미 실용되고 있었지만 단자엽식물 살초제는 처음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이 교수님도 나의 논문 테마에 관해서 무척 고심하신 것 같다.

 

나는 IPC가 단자엽식물을 선택적으로 죽이는 기작을 쌍자엽식물과 비교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약품의 농도를 달리하여 밀(단자엽식물)과 콩(쌍자엽식물)의 발아 실험을 1단계로 끝내고, IPC에 대한 탈수소효소 활성 반응을 2단계로 진행하였다.

 

그런데 IPC의 농도를 표시하려니 전착제 등 불순물이 포함된 농약이기 때문에 정확한 농도를 표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농약에서 순수한 IPC를 추출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고, 막상 IPC 결정을 만들어 놓으니 이번에는 물에 녹지 않았다. 그래서 알코올에 녹인 다음 물로 희석하여 정확한 농도 표시를 할 수 있었다.

 

IPC는 낮은 농도에서 단자엽식물의 생장과 호흡을 억제하지만 쌍자엽식물의 경우는 이를 촉진하고, 효소활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나의 석사논문 제목은「식물에 미치는 IPC의 작용성에 관한 연구」이며, 문장 수정없이 생물학보 2권에 게재되어 있다.

 

실험 결과를 논문으로 쓸 때 이 교수님은 실험 지도를 적당히 하신 데 비하여 논문 형식과 문장 구성을 꼼꼼하게 지도해 주셨다. 그 당시에는 대학원 학생 수가 적었기 때문에 논문 지도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석사 논문은 전주사범 후배인 지리과의 박희수 군이 등사판으로 밀어서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요즈음처럼 형식을 갖춘 하드 카바 석사논문과는 거리가 먼 탈(脫)형식의 논문을 56년 12월 말일에 제출하였다.

 

▲ 식물반의 광릉 식물채집 / 1956. 5

석사논문을 제출하고 하숙집에 돌아온 나는 밤에 큰형님에게 원고지 20장 분량의 긴 편지를 썼다. 아마 내 딴에는 석사논문을 제출하기까지에 축적되었던 감상(感傷)이 한꺼번에 폭발하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편지를 썼지만 우송하지 않은 채 최근에야 누렇게 바랜 원고지를 발견하였다.  

 

 『형님 전 상서前上書. 오랫만에 붓을 들었습니다. 바로 오늘이 금년今年의 마지막 날이며, 또한 아마도 저의 일생 중에서 학창學窓의 총결산總決算하는 날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형님! 아마도 집안에서는 복잡複雜한 일이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마는 저는 오늘 바로 석사과정碩士過程을 마치는 논문論文을 내고 왔습니다. 뭐라고 이 심정心情을 표현表現하여야 할지 가슴이 막막하여집니다.

 형님! 지금부터 18년 전 제가 열살 때 아닙니까. 그때의 집안의 형편形便! 가마니 짜기에 여념餘念이 없었고 하루하루의 식생활食生活에 곤난困難을 받던 것이 어린, 그리고 순진純眞하였던 저의 머리 속에 깊이깊이 사무쳐 있습니다. 저는 학교學校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꿈을 꾸지도 못하였던 때였습니다. 학문學問과는 거리距離가 멀었던 제가 열살 먹던 정월 명일正月命日이 지나자, “アイウエオ” “가나다”부터 시작하여 질서秩序없는 저의 뇌조직腦組織을 형님께서 하나하나 정리整理해주셨습니다. 저는 정말 급작急作히 당하는 일이기에 하나도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땀이 나서 연필 겉에 칠한 붉은 페인트가 손가락에 물들었고, 옆에서는 모른다고 꾸지람을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런 자신自信없이 입학시험入學試驗을 치루고, 요행僥幸히도 합격合格을 하였고.

 그 당시에 5円 얼만가 되는 입학금入學金을 융통하기 위하여 “주걱대”라는 별칭을 가지는 채蔡 모 씨에게서 형님이 대금貸金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순진純眞하고 세상 모르는(지금도 역시 같습니다마는) 어린이였습니다. 옷엔들 공부엔들 관심關心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그저 밥을 먹으면 학교學校에 가고 공부를 마치면 집으로 오고…

 형님! 1円70錢짜리 여름양복이 기억記憶나십니까. 아마 가마니 팔아서 사주셨을 거예요. 지금도 학생들의 소위 “쑥대바지”라는 것을 보면 그 양복 생각이 납니다.



부치지 못한 형님에게 보낸 편지 (제55회) - 제9장 학문의 오솔길

 

 저는 국민학교國民學校 3학년 때부터 점점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칭찬稱讚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제가 5학년 때에 형님은 도일渡日하였습니다. 때는 마침 못자리 물을 품는 때였지요. 저는 개정역開井驛에서 형님을 견송見送했습니다. 저는 울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울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울하였고, 선생님(가토 교장加藤校長과 유종원柳鍾元 선생)들에게서 위안慰安을 받았습니다.

 저는 공부를 더 하였고 뜻도 품기 시작하였지요. 청주사범淸州師範 입학의 기쁨! 저는 지경우체국地境郵遞局에 가서 형님에게 전보電報를 치려다 그 당시의 비상시非常時 운운으로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에 형님으로부터 돈 50円이 전보 진체구좌電報 振替口座로 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돈에 무관심無關心한 저였습니다. 큰아주머니와 셋째 형님이 마련하여 당시의 300円! 거액巨額을 가지고 셋째 형님과 함께 청주淸州로 갔었습니다. 듣자하니 그 거액은 우동雨洞의 매형이 대부貸付하셨다고요. 제가 신세身勢지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매형은 또한 저의 은인恩人이기에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형님은 그간 많이 고생苦生하셨고 그 고생은 아마 영원히 제가 모르는 비밀秘密에 묻히겠지요. 해방解放이 될 때까지 일본에서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아니 또 하나 기억記憶 나는 것은 제가 청주사범淸州師範 1학년 때 추석秋夕에 형님이 일본日本에서 귀향歸鄕하셔서 청주淸州까지 오셨습니다. 형님과 작별하고 형님이 가져오신 새 이불 속에 들어가 눈물을 어떻게 주체할 줄 몰라 홑이불을 깨물었습니다. 일제말기日帝末期의 고생은 모두 마찬가지 민족적 운명民族的運命이었으니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해방解放! 동요動搖! 전학轉學! 등, 특히 전학轉學에 있어서 형님은 오죽이나 서둘렀습니까. 청주淸州에 갔다 또 전주全州에 오는 등 발버둥치듯 그 열성熱誠, 저는 그 당시는 실제로 학문學問이나 학교學校에 애착愛着이 적었습니다. 그러나 전주사범학교全州師範學校에 전학하여 기숙사 생활寄宿舍生活을 하게 되고 공부에도 취미趣味가 생기고 칭찬稱讚도 받고 하여 집안 식구들의 그 곤란困難한 생활 속에서도 저는 공부를 그저 이어나갔습니다.

 전주에 오면 희망希望이 솟고 집에 가면 절망絶望에 빠지는 것이 그 때의 저였습니다. 집에 가서 그 비참悲慘한 상황狀況을 보면 공부고 무엇이고 다 그만 둘 생각 밖에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반비례反比例로 전주에 오면 어떻든 끝까지 배워야한다는 이념一念만이 굳게 솟아 나왔습니다. 이것이 저를 지탱하는 원동력原動力이었습니다. 한편 집에서 가족들의 가혹苛酷한 희생犧牲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났습니다.

 사범학교師範學校 6년 중 기숙사 생활寄宿舍生活이 5년 8개월이고. 자취 생활自炊生活이 2개월, 대학교 4년은 대부분이 자취생활自炊生活이며. 대학원 1년은 또 자취생활이였으니 저도 가족들의 고생과 병행竝行한 셈입니다.

 부산釜山에서 굶으며 등교하던 생각. 서울로 환도還都 후의 1개월 생활비生活費가 쌀값 1,200환, 방세 500환, 잡비 400환하던 때의 4년간은 방 고래가 한 번도 먹지 못하는 불행한 방의 주인이었던 생각 등, 동숙同宿하던 모경환牟京煥 형과 자주 그 때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하며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時節 모른다고…” 하는 등 지금의 훨씬 좋아진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대학 졸업논문 준비를 위한 포장 앞에서 / 왼쪽부터 김세영 형, 박만상 형, 나

 

 형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이제 어엿한 한 남자男子, 아니 한 청년靑年의 구실을 할 정도는 되었습니다. 현재의 제가 되기까지에 형님은 저의 정신적 지주精神的 支柱였고. 원동력原動力이었습니다. 대학졸업大學卒業, 대학원입학大學院入學 그리고 대학원大學院도 마칠 준비準備가 다 되었습니다.

 제가 꼭 필요必要하니 보내달라고 하는 대학大學이 있는가 하면, 그 자者가 없으면 우리 과科의 운영運營이 안되니 주지 못하겠다고 하는 교수敎授님들도 계셔서 진퇴양난進退兩難인 저는 뿌듯한 행복幸福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 행복幸福은 저만이 소유所有하여야 할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집안 식구들과 다 같이 고유共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제출提出한 논문論文만 하더라도 동료同僚 중에서 가장 방대放大하고 충실充實한 점에서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자부自負합니다. 어제 밤에는 학과주임學科主任 선생과 내년도의 시간표를 짰는데 저의 시간에 식물분류학植物分類學 4시간, 식물생리학植物生理學 4시간, 일반생물학一般生物學 2시간, 생물통계학生物統計學 2시간, 계 10~12시간을 배당配當받았으니 일은 벅차지만 대학교수大學敎授의 기반基盤을 세워줄려고 노력하여 주십디다. 과연 제가 감당하여 나갈 수 있을지 체력이 염려念慮됩니다. 내년 초하루부터는 다음 학기부터의 교재준비敎材準備를 하려고 합니다. 형님! 현재의 저를 만들어 주신 이가 누구라 묻지 않겠습니다.

 다가오는 3월 28일에 형님은 네 가지 목적目的을 가지고 상경하셔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환도還都 후의 서울 모습을 구경하고. 둘째는 원구 군源球 君의 입학축하入學祝賀를 하며. 셋째는 저의 석사학위수여식碩士學位授與式에 참석하고, 그리고 넷째는 말하기 거북하지만 저의 배우자 선택配偶者 選擇의 절차節次를 밟아주시는 일들입니다. 어머니를 도반同伴하시는 영광榮光을 주시면 오죽 좋겠습니까마는 아마도 어머니는 곤란困難하지 않을까요?

 대학원大學院 2년간은 저의 체력體力과 정신력精神力에 너무나 벅찬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연구생활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생활生活과 사교社交를 모두 돌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고향故鄕도 가족 家族들도. 이제는 인간人間의 부드러운 생활, 그리고 자연自然의 아름다운 모습, 혈연血緣의 온화溫和한 감정感情 그리고 힘이 되는 교우交友도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결혼結婚도 현실現實의 생활도 생각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두서없이 썼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여러 가지 수속절차手續節次(대학원)에 필요하오니 급히 호적초본戶籍抄本 2통을 만들어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몇 일 후에 귀성歸省하려고 합니다. 그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1956年 12月 31日 밤.     준호俊鎬 올림』



조교생활 (제56회) - 제9장 학문의 오솔길

 

석사 수료식은 57년 3월 25일에 있었다. 이 날은 학사 졸업 때와는 달리 나를 축하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미 1년 여 동안 교제하며 장래를 약속하고 지내던 박시현과 그 조카(박준강), 그리고 고향 친구인 신동희 형(고대)과 문리대 독어독문학과의 이병우 형(전 중앙대 교수․별세)이 식장에 나와 주었다. 나는 외롭지 않았고 보람을 느꼈다.

 

대학원 1학년 2학기 때 일본에 체류하시던 김준민(金遵敏) 교수님이 귀국하셨다. 나는 김 교수님의 조교가 되어 생활이 바빠졌다. 김 교수님의 실험실을 차리고 실험준비를 서두른다. 김 교수님은 듀보스크 비색계 등 몇 가지 측정기기를 가져오셨다. 옛날 기숙사의 식당 복도에 칸막이를 하여 단독 연구실을 만들고 그 옆의 큰 방을 실험실로 꾸몄다.

 

나는 손수 칸막이 벽에 페인트를 칠하는 등 경비를 절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최기철 교수님이 얼마인가 경비를 주셔서 김 교수님과 함께 시내에 나가 일용 잡화를 산 기억이 난다.

 

서울사대 생물과의 식물학 분야는 김 교수님의 귀국과 동시에 활기가 넘쳤다. 학생을 위한 생태학 강의는 물론이고 졸업생들을 위하여 겨울 방학 중에 식물학 실험 강습회가 열렸다. 서울과 지방을 합하여 30명에 가까운 졸업생들이 참가하여 실험에 열중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기초적인 내용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높은 수준의 실험이었다.

 

 

▲ 대학원 석사 수료 식장에서 / 왼쪽부터 이병우 형, 신동희 형, 나, 박시현, 박준강 군

 

김 교수님은 실험 교재를 타자로 치셨고, 나는 시약과 실험 기기 등 실험 준비의 총책임자로 생태학 연구실의 후배들을 지휘하였다.

 

실험 강습회는 문교부인가 서울시교육청인가의 지원을 받아 실시하였다. 지원받을 경비를 현금으로 받으리라고 예상하여 약품이나 유리 기구를 미리 구입하였는데, 지원기관에서는 현품으로 지원해서 당황하게 하였고, 강습회가 끝난 뒤에 보내온 약품과 유리 기구는 거의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 이때 나는 공무원 사회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물 납품의 차질이 생겨서 김 교수님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김택(金澤․그 당시의 실험 기구상인)에서 구입한 실험기기와 약품 대금의 지불이 늦어지자 김 교수님과 김택 사이에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어느 날 김택이 단단히 벼르고 왔던지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도전하는 것이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격으로 나는 당연히 김 교수님과 한편이 되어 몸싸움을 하는 동안 나와 김택의 와이셔츠가 찢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의 와이셔츠를 박시현 양이 사왔던가?

 

이 무렵에 나의 한쪽 눈에 핏발이 서서 안대를 붙여야 했다. 아마 실험에 사용하던 수은이 눈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런데 동국대의 이덕봉 교수님 조교로 가 있던 박노면 형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박 형을 만나니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어떤 아가씨를 소개하며 사귀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 아가씨는 박형의 애인인 K양의 친구였으며 간호 교사라고 하였다. 그 때 나는 결혼할 처지가 아니었으며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고 그 아가씨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쯤 이야기 하다가 작별 인사를 하니 그 아가씨가 을지로까지 따라오며 한 번 더 만나달라고 말하였지만 나는 시큰둥한 대답을 남기고 헤어졌다.

 

56년 봄부터 김 교수님의「식물에 미치는 토양 염분 농도의 영향」에 관한 실험이 시작되었다. 실험 시설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화분, 흙, 재배실 등을 마련해야 하였다. 화분은 나와 박시현이 비 오는 날 천호동 공장에 가서 주문하고, 흙은 뚝섬 실험 농장에서 실어오며 재배실은 실험실 남쪽 화단에 각목으로 외쪽 지붕을 세우고 비닐을 쳐서 만들었다.

 

건조한 흙에 일정 비율의 염화나트룸(화이트 알칼리)과 탄산나트륨(불랙알칼리)을 섞고 상추와 무씨를 심은 다음 자람에 따라 뽑아서 탄수화물과 비타민 C를 정량하는 실험 설계였다. 분석하는 데 필요한 약품과 기기s도 새로 사들였다. 분석은 주로 학부 학생들이 맡아서 해주었는데, 나는 예비 실험을 해서 결과를 확인해야 했다. 나 자신의 실험과 부속중학의 강의가 겹쳐서 무척 바쁜 한 학기를 넘겼다.

 

2학기 말에 김 교수님의 실험결과를 통계 처리 할 때는 계산량이 방대하기 때문에 부속중학교에서 수동(手動) 계산기를 빌려다 계산하고, 또 한 계산 문제를 두 학생에게 숙제를 주고 이튿날 두 답을 비교하여 일치하는가를 보고 정답을 선정하였다. 요즈음처럼 전자계산기가 없을 때에 분산분석과 요인분석을 손 계산으로 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음을 경험하였다.

 

김 교수님의 실험 결과는 국내 외에 발표되고 호평을 받아 나는 보람을 느꼈다.



공주사범으로 (제57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56년 연말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할 무렵에 생물과 주임을 김준민 교수님이 맡고 계셨다. 57년도 1학기의 강의 시간표를 짜는데 내 강의를 10시간 이상이나 넣어 주셨다. 이 무렵에 생물과에는 김준민, 최기철, 이주식 및 이웅직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웅직 교수님은 도영할 예정이었고, 박한진 형이 강의를 도왔지만 시간강사의 자격이 없었다.

 

식물학 분야의 교수가 부족한 실정이었으므로 나에게 강의시간을 많이 넣어 주신 것이었다. 석사과정을 갓 나온 풋내기에게 4과목 10시간을 맡기는 것은 무리였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덥석 받아 놓았다. 

대학원에 입학한 뒤 최기철 교수님께서 ‘자네가 대학원에 가지 않았으면 보내려는 취직처가 하나 있었는데 이제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 하겠군.’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안 일인데 그 자리가 한국의 명문 K고교였다.

 

한편 졸업하기 전에 모교인 전주사범의 신정규 교장이 사범대학에 오셔서 나를 찾으셨지만 만나지 못한 채 내려가셨다는 말을 신현순 형(신 교장의 아들이며 서울사대 체육과 출신)한테서 전해들었다. 그 후 전주에 갈 기회에 신 교장님을 방문하였더니 ‘너는 어째 그리 만날 수가 없냐. 네 모교에 올 생각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꿈은 큰 학자가 되는데 있었으므로 공손하게 거절하였다.

 

석사 논문을 작성하는 동안 취직에는 머리를 쓸 짬이 없었다. 석사 논문을 제출한 며칠 뒤 이영노 선생님으로부터 ‘공주사대의 이원구 교수가 내 집에 와 있으니 빨리 와서 만나라.’라는 전갈을 받았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자네를 공주로 데려가려고 왔다네.”

 

한편에서는 반갑고 한편에서는 불안한 심정이었다. 왜냐 하면 어쭙잖은 석사논문 한 편을 겨우 써 놓고 서울에서 떠나기가 참으로 아쉬웠기 때문이다.

 

서울은 공주보다 문헌, 실험 시설, 인적 자원 그리고 학문하는 분위기가 월등히 좋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서울에 머물며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공주에 가는 것은 마치 먼 고도(孤島)에 떠밀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공주에 가본 적도 없고 공주사대에 대하여 아는 바가 전혀 없었던 것도 가기 싫은 이유의 하나였다.

 

나는 김준민, 최기철 교수를 만나 뵙고 공주행을 의논드렸다. 김준민 교수님은 반기지 않으셨다. 이제껏 생물과에서 충실하게 근무하며 실험을 도와온 조교를 보내기가 섭섭한 듯 싶었다. 더구나 새 학기의 강의시간표에 4과목 10시간 이상을 배당하여 놓았으므로 내가 떠나면 생물과 운영에 지장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최기철 교수님은 그런 자리가 있으면 빨리 가라고 권하신다. 또 친구들에게도 의논한 결과도 같은 의견들이었다.

 

▲ 김준민 교수님의 교수 시절 / 1956. 5. 광릉에서

 

이렇게 여러 분의 자문을 받다보니 이원구 교수님과의 약속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연되었다. 이 선생님 댁에서 홀로 기다린 이원구 교수님의 안색은 몹시 불쾌한 듯이 보였다. “공주사범대학에 가서 선배님을 모시겠습니다.” 하는 나의 말을 들으신 연후에야 안색이 풀어지신다.

 

이렇게 인연을 맺던 날이 57년 3월말쯤이었다. “4월 2일이 입학식이니 공주에 와서 참석하시오.”라고 속결주의로 처리하신다. 이틀 뒤에 나는 공주행 기차를 탔다. 공주사대에 가면 그곳에 뼈를 묻거나 10 년을 봉사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면서.

 

내가 공주행을 결정한 뒤에 생물과에서는 나에 대하여 말이 많았던 것 같다. 새 학기의 강의시간표에 이름을 넣은 상태에서 떠났으니 배은망덕(背恩忘德)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였다. 얼마 뒤에 이영노 선생님의 편지에 의하면 나를 공주사대로 빼내는 역할을 이 선생님이 했다고 생물과의 화살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제면이나 건강면에서 지탱할 수가 없었고, 생물과에서 내 T/O를 마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전적으로 내 주관에 의한 결정이었다. 1년쯤 뒤에 김준민 교수님은 그 때의 섭섭함과 아울러 나를 아량으로 용서하시는 편지를 주셨다.

 

『金俊鎬 君. 때를 달리하여 용건에 따라 여러 가지로 편지를 받고도 한번도 회답을 올리지 못하여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하여 오던 중 불연이 오랫동안의 격조와 감회를 풀 겸 또 이제까지의 무거운 짐을 벗어보려는 생각이 가슴에 치밀려와서 이 회답을 올리는 바입니다.

 유능한 군이 떠나간 후에 여러 가지로 서운하며, 때로는 망막한 경우가 많았음을 인정하기에 인색치 않으며, 무슨 일이든지 일의 수행에 좋은 동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바입니다. 서로 곳을 달리하여도 피차의 연구를 바르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토론을 함으로써 의견의 교환 및 경험의 개진을 문필로, 담화로 연락함으로써 한층 더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먼저 제의하신 채집회를 공동으로 가져본다는 것은 나로서도 항상 머리에 있던 일로 크게 찬성하는 바입니다. 구체적으로 귀의를 전하여 주시면 전적으로 협찬할 생각이오며. 그런 기회에 피차 하고 있는 일의 일부라도 소개하여 좋은 지시를 받기를 기대합니다. (중략).

 더욱 건강하며 건투를 빕니다. 1958년 8월 30일 김준민』

 

김 교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해 가을에 계룡산에서 서울사대와 공주사대 생물과의 고동 식물 채집회를 가졌다.



조선시대 같은 첫인상의 공주사범대학 (제58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공주사대의 대우전임강사 발령을 받은 다음 서울에 와서 최 교수님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니 ‘공주에 가서 집을 마련하려면 지형이 높은 곳을 골라야 하네.’라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공주에서 큰 물이 지면 금강 가의 예비 둑에 황토 물이 넘실댈 때마다 최 교수님의 말씀이 옳구나 하고 감탄하곤 하였다.

 

내가 12년여의 젊은 정열을 쏟았던 공주사대는 충청남도에 고등교육기관이 하나도 없었던 1948년 7월 30일에 설립되었다. 대학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한 도지사(당시 서덕순 지사)와 도민들이 당시의 군정청에 대학설립을 요청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각 군과 도에서 2천만 환을 거출하기로 결의하고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같은 해 8월 1일에 김연창(金淵昌) 학장이 임명되고, 정부수립 직후인 11월 1일에  국문과, 수학과 및 가사과 학생 135명을 모집하여 12월 1일에 개강식을 거행했다. 이것이 2년제 도립공주사범대학이었다. 6․25 사변이 발발하기 4일 전인 50년 6월 21일에 문교부로부터 국립공주사범대학의 인가를 받는다. 그러나 전쟁 중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가사과를 폐과하고 그 대신 물상과를 증설한다.

 

그리고 54년 4월 1일에 4년 제 대학으로 승격하고, 교육과, 국문과, 수학과, 물리과, 화학과, 생물과를 증과한다. 이로써 공주사대는 서울대 사범대 및 경북대 사범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한국의 교육자 양성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60년대 들어 여러 곳에서 국립과 사립의 사범대학이 증설되어 공주사대의 위치가 다소 좁아지게 된다.

 

그런데 61년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공주사대는 매우 큰 위기를 맞는다. 혁명정부의 문교부는 동년 8월 15일에 공포한 제2차 대학정비계획안에서 4년제 사범대학을 폐지하고 교육대학원을 설립하는 안을 냄으로써 사범대학이 풍전등화처럼 흔들린다.

 

그 시행령으로 같은 해 9월 5일에 문교부장관은 다음 사항을 발표한다. ①공주에 공주교육대학원을 설치하고 학생모집을 62년부터 시작한다. ②공주사범대학은 가정과, 체육과, 생물과, 사회생활과만 두고 기타 학과는 폐지한다. ③폐지된 학과의 현 재학생은 졸업할 때까지 잔류한다.

 

▲ 공주사범대학 교문앞에서 /1958.

 

이어서 62년 2월 17일의 각령에 의하여 3개 국립 사범대학의 정원을 거의 절반수준으로 감축한다. 이때 국어과, 영어과(60년에 증설), 수학과가 폐과되고 물리․화학․생물과가 과학과로 통합되며 사회생활과, 가정과, 체육과가 신설된다.

 

그 후 교수ㆍ학생ㆍ동창회ㆍ지방유지의 끈질긴 복과 운동이 계속된다. 드디어 63년 3월에 교육학과가 신설되고, 국어ㆍ영어ㆍ수학과가 부활되며, 사회생활ㆍ가정ㆍ교육학과가 폐지되었다가 후자의 3과는 65년 2월에 다시 복과된다.

 

이렇게 해서 대학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전 학과를 문학ㆍ이학ㆍ교양의 3학부로 분리 운영한다. 이후 계속 발전하여 현재는 공주와 예산에 캠퍼스를 가지고 사범,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공과, 산업과학 대학 및 대학원을 가지는 공주대학교로 발전하였다.    

 

내가 취임할 무렵 공주사범대학의 첫인상은 현대를 조선시대로 되돌려 놓은 듯이 보였다. 학교 캠퍼스는 모양 좋게 솟아있는 봉황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위엄을 떨치는 문주(門柱)를 가진 교문(일제시대의 도청문)을 들어서면 앞에 높은 연필향나무들이 가로막아 길이 양쪽으로 갈라져서 운동장으로 인도하였다.

 

넓지 않은 운동장에 말 그대로의 고목(枯木) 한 그루가 서 있고 그 겉면을 등 덩굴이 감아 올라가서 마치 큰 노거수(老巨樹)가 살아 있는 듯이 위장하고 있다. 이 고목은 보수성을 지닌 공주사대의 상징인 듯이 오랫동안 보전되어 오다가 내가 공주를 떠나던 69년 여름에야 신진 세력의 여론에 밀려 학장의 용단으로 제거되었다.

 

반죽동의 대학 본관은 수십 년 묵은 일제시대 도청의 2층 건물이었는데 위층에 학장실이, 아래층에 서무과가 있었다. 그 오른쪽에 도청사무실로 사용한 듯한 목조 2층 건물에 이택준 교수가 실험실을 차렸고 그 오른쪽의 가까운 곳에 화장실이 있었다.

 

화장실의 오른쪽에 조금 떨어져서 생물과 공동 실험실과 이원구 교수가 실험실로 사용한 목조 단층 별관이 있었다. 운동장의 동쪽에 단층의 강의실과 조그마한 구강당이 있고 그 뒤쪽  부속실에 최두문 교수가 실험실을 차리고 있었다.



공주, 공주 사람들 (제59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본관 뒤에 옛날의 창고인 듯한 목조건물을 물리과가 사용하고, 그 뒤에 새로 지은 교실을 화학과에서 실험실과 강의실로 이용하며 그 위쪽에 부속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강의동은 다닥다닥 붙어 있어 위 동에서 강의하는 목소리가 아래 동에 들릴 만큼 캠퍼스가 좁았다.

 

50년대의 가난했던 정부 재정이었지만 공주사대가 받은 재정은 너무나 빈약해 보였다. 명색이 국립대학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좁은 부지에 대학과 부속 중․고등학교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었는지. 서울에서 크고 넓은 학교를 보는 데 익숙했던 나의 눈에는 답답하기만 하였다. 60년 초에 새 과학관이 준공되었고, 62년 말에 임한영 학장의 공로로 대강당이 준공되어 큰 행사를 치를 수 있었다.

 

내가 부임할 때 학장은 김연창 선생님이었다. 김 학장은 중후한 체격의 노신사로 광도고사 출신이며 일제시대에 양정고보, 개성고보의 교유를 지낸 교육자였다.

나와 함께 부임한 교수는 국어과에 강귀수, 수학과에 이화영, 물리과에 송인명, 화학과에 박성록 선생이었다. 생물과에는 이원구(李元求), 최두문(崔斗文), 이택준(李澤俊) 교수가 계셨고 내가 새로 부임하여 네 사람이 되었는데 이택준 교수는 62년에 중앙대로 가셨다. 그리고 부속중 고등학교의 김성회 선생과 공주고등학교의 임양재 선생이 생물과의 교육을 측면 지원하고 있었다.

 

나는 부임하는 날 입학식에 참석하여 교수 소개를 받았는데 생물과의 신입생은 제4회이고 제1회가 4학년에 진급하였음을 알았다. 학생들은 충남북, 전남북(제주도 포함), 경기도 및 경남에서 모인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교육만 잘하면 우수한 교사가 될 수 있는 소양을 구비하고 있었다.

 

공주는 좁은 읍(邑)이었다. 그래서 서울대에 비하여 공주사대는 교수나 학생이 가족처럼 친근하였다. 떠도는 말로는 어느 교수님 댁에 쌀이 얼마 있는지도 소상히 안다고 하였고, 어느 교수가 어느 때 어느 술집에서 곤드레가 되었다는 소문이 하루 만에 퍼질 만큼 정보가 빠르게 날았다.

 

내가 부임한 2, 3일 뒤에 생물과에 총각 선생이 왔다는 소문이 공주에 파다하게 퍼졌고, 하숙집 판자 울타리의 틈새를 통하여 이웃집 아낙네들의 눈이 번뜩이기도 하였다. 부임한지 얼마 뒤에 하숙집 아주머니나 학부형을 통해서 혼담을 걸어오기도 하였다.

 

공주는 도보로 30분이면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인구는 학기 중에 3만 명, 방학 중에 2만 명으로 학생 수가 1만 명을 헤아린다고 했다. 폐쇄된 읍지이므로 사람들의 생각이 개방되지 못한 듯 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착했지만 외지와의 교류가 적어서 언행이 폐쇄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외부의 학문 세계를 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공주는 사람들의 행동거지가 점잖고 양반다웠다. 특히 여성들은 예의가 발랐다. 예를 들면, 네거리를 건너는 경우 여학생이 건너지 않고 우두거니 서 있어서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하고 내가 먼저 건너면, 서 있던 여학생들이 다음에 비로소 건너는 것이었다. 한 발이라도 먼저 건너려는 서울에서의 습관이 남아서 이상하게 여기고 잘 관찰해 보니 거의 모든 여학생들이 어른에게 길을 양보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지금도 공주의 그 예절이 간직되어 있으면 좋으련만 어떤지 모르겠다.

 

▲ 생물과 제16회 졸업생의 사은회를 마치고(1967년). 앞줄 왼쪽부터 나. 최두문, 이원구, 박영철 교수. 뒷줄 왼쪽부터 강석두, 임병재, 이치삼, 김기철, 박원백, 유삼현 군

 

나는 부임한 첫학기에 2학년의 식물분류학과 3학년의 식물생리학을 강의하였다. 그런데 식물분류학 실습은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지만, 식물생리학 실험은 시설이 없어 참으로 난감하였다. 부임한 직후 생물과에는 공동실험실이 겨우 한 개 밖에 없었고 내 단독 연구실이 없었으므로 최두문 교수 연구실을 함께 사용하였다.

 

생리학 실험을 하려면 증류수가 필요하였으므로 증류수기를 자작하였다. 즉 큰 고무마개에 전선과 유리관을 각각 두 개씩 끼우고 전선 끝에 굵은 니크롬선을 연결하여 이것들을 플라스크 속에 넣고 단단히 밀폐하였다. 이 플라스크를 각목(角木)으로 짠 틀에 거꾸로 세우고, 한 유리관을 높은 물탱크에, 다른 유리관을 냉각기에 연결한 다음 전기를 통하여 물 속에서 니크롬선의 가열로 수증기가 나오도록 하고 냉각기로 식혀 증류수를 모았다.

 

자작한 증류수기가 잘 가동되면 좋았지만 때로는 니크롬선이 풀라스크 벽에 닿아서 깨지기 일쑤였고, 수도시설이 없었으므로 용인들을 시켜 물탱크에 물을 길어다 붓도록 하였다.

 

한 가지 기구를 만들면 그에 관계되는 다른 기구나 약품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손들고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실험기기를 나 스스로 만드는 버릇이 생겼다. 다행히 광명초자(光明硝子)라는 유리기구상사와 알게 되어 간단한 유리기구를 주문하여 썼지만 유리 질이 좋지 않아서 자주 깨지는 것이었다.



깐깐한 젊은 교수 (제60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58년부터 본관 오른쪽의 목조 건물에 내 실험실을 차렸다. 실험대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두꺼운 합판에 6개의 다리를 붙이고 표면에 검정색 비닐을 씌우며 그 위에 시약대를 놓았다. 씽크대는 판자마루에 시멘트 벽돌을 쌓고 헌 씽크를 주워다 놓고 파이프를 밖으로 내뽑아 완성하고, 천평대도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

 

부임한지 3년이 지난 60년 초에 비로소 콘크리트 건물의 과학관에 입주하였다. 과학관은 봉황산 중턱에 자리하여 공주 읍내를 한눈으로 굽어보는 위치에 지어졌다. 일제시대에 일본 신사 자리였고 광복 후 성결교회에서 사용하던 터였다.

 

신축 과학관은 3층 727평으로 실험실, 준비실 그리고 강의실이 각각 6개, 그리고 도서관 시청각실, 암실로 되어있었다. 나는 2층에 연구실을 차리게 되어 공주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쾌적한 방을 차지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바닥이 흔들리지 않는 연구실을 가지게 되었고, 여기에서 나의 박사 학위 논문을 쓰게 된다.

 

식물분류학 실습은 4월부터 주변의 산야에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 현장 실습을 하였다. 식물의 과(科)와 종(種)의 특징과 종명을 가르쳤다. 몇 달 뒤에 학생들은 주변의 식물을 빠짐없이 알게 되어 나를 흐뭇하게 하였다.

 

분류학 실습의 시험은 그 학기에 다루었던 20종의 식물표본에 번호를 매긴 다음 실험대 위에 배열해 놓고 학생이 한 사람씩 지나면서 답안지의 번호에 과명과 종명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식물분류학 시험에 패스하려면 야외에서의 관찰과 표본의 특징을 두루 알아야 했다.

 

식물분류학은 깐깐한 교수 앞에서 학생들이 적당히 요령을 부리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식물분류학 실습은 공주사대 생물과 학생들의 학문하는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 속리산 정일품 소나무 앞에서 공주사대 제자들과 함께

 

어느 해에는 학제 변경으로 식물분류학 실습을 2․3학년의 두 학년을 맡아야 했다. 한 학년을 데리고 금강 가에 나와서 야외실습을 한 다음 해산시키고 곧 이어서 그 자리에 다른 학년을 집합하도록 지시하였다.

앞의 학년이 끝났을 때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읍내까지 들어가기에는 시간이 없고 거리가 멀었다. 하는 수 없이 부근 농가를 찾아가 요기시켜 주기를 청한다. 주인 아주머니의 말에 “식은 보리밥은 있지만 반찬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고 말한다. “저기 있는 풋마늘과 고추장이 있으면 됩니다.” 이렇게 보리밥에 풋마늘과 고추장으로 점심을 때우는 일도 자주 있었다.

 

식물생리학은 광합성과 호흡을 먼저 강의하였다. 그 당시에 광합성은 고전적인 내용이었지만 호흡은 해당(解糖)과 크레브스 회로를 강의하였다. 화학식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기 때문에 내 강의가 무척 어려웠던 것 같다.

식물생리학은 2주간 강의한 다음 간단한 퀴즈 문제로 테스트하려 했는데 학생들의 보이코트로 중간 고사와 학기말 고사만 치렀다. 시험 답안지는 채점을 한 다음 학생들에게 돌려주어 자신의 장단점을 스스로 알도록 틀린 데를 하나하나 고쳐주었다. 3학년 학생들에게 식물생리학은 가장 어려운 과목이라는 평판이 나기도 하였다.

 

60년대 들어서 2학년의 일반생리학을 맡았다. 이 과목은 물리화학의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교과서를「의예과 학생을 위한 물리화학」(A physicochemistry for premedical students)이라는 원서를 나누어주고 강의하였다.

 

물리화학과 영어 해독의 기초가 약한 학생들이 많아서 이해시키는 데 힘이 들었지만 이 과목에서 학생들의 우열이 판가름 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이 착실하게 따라주었다. 강의에 신이 나서 이때 물리화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가르쳤다.

 

60년대 중반부터 생태학을 강의하였다. 담당시간이 너무 많아서 격년으로 맡았던 것 같다. 그 당시는 나도 생태학이 약해서 용어 풀이 정도의 낮은 수준으로 강의하였다. 교수의 실력이 부족하면 학생을 이해시키기가 어려움을 경험한 셈이다. 나는 그 당시에 식물분류학, 일반생리학 그리고 식물생리학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학부 때 소홀히 배웠던 식물생태학이 취약하기만 하였다.

 

자연을 벗 삼으며 (제61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공주사대에는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학생들만 모인 것 같았다. 농촌 학생답게 되바라진 학생이 거의 없었다. 교수들이 지도하는 대로 순진하게 따라오는 것이었다. 부임 초에는 생물과에 나와 동갑내기 학생이 있었지만 나이 먹은 티를 내지 않고 따라주어서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나는 부임하던 해에 영어 원서를 읽는 과외 반을 결성하여 아침 일찍 등교하도록 하였다. 2․3학년의 4분의 1의 학생이 모여서 열심히 영어 강독을 하여 큰 효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 영어 강독으로 생물과의 학문적 분위기가 매우 좋아짐을 느꼈고, 그때의 기억을 지금도 회상하는 졸업생들이 있다.

 

채집 여행을 가거나 체육대회를 할 때는 학생들이 발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체육대회는 산성공원의 운동장에서 하였는데 건강한 체구를 가지고 있어서 빈약한 내 체구를 압도하였고 씩씩하게 활동하는 모습은 부럽기만 하였다. 씨름대회에 나가서 소를 탔다는 학생도 있었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순진하였다.

 

1년에 한두 번씩 야외 채집 여행을 하였다. 봄 채집은 3․4월 두 달 동안 강의하여 학생들의 몸이 비비꼬일 무렵인 5월 초 중순에 떠났다. 이러한 학생들의 심리 파악은 이원구 교수님의 특기였다.

 

채집지는 가까운 계룡산을 비롯하여 속리산, 가야산(수덕사), 무량사, 마곡사, 설악산, 지리산, 내장산, 제2덕유산(무주), 변산반도, 고군산군도 등 호서․호남의 명승지를 두루 다녔다. 내가 부임하던 이듬해(1958. 10. 18.~19.)에는 서울사대 생물과와, 61년(5. 13.~14.)에는 이화여대 생물과와 합동으로 계룡산에서 채집회를 가졌다. 박봉규 교수가 인솔한 이화여대생들은 그들이 돌아갈 때 5․16 전야의 계엄령이 선포되어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었다.

 

속리산에서 춘계채집회를 하기 위하여 대절 버스에 학생들을 태우고, 옥천 경유의 넓은 길로 갈 때는 무사했지만 청주 경유의 좁은 길로 돌아 올 때는 도중에 다른 차와 교차하려다 우리 버스가 슬그머니 넘어져서 아찔한 순간을 경험하였다. 다행히 우리 버스가 옆의 작은 둑에 차체를 기대어 참사를 면하였다.

 

▲ 제2덕유산(무주)의 식물 채집을 마친 생물과 일동 (1967. 5.13.)

 

65년 7월에는 학생들과 1주일간 지리산(천왕봉)의 식물채집을 하였는데 운봉면 인월에서 마천을 거쳐 백무동까지 30리 길을 걸었고, 백무동에서 천왕봉을 등정한 다음 장터목에서 비를 맞으며 밤을 샌 기억이 난다. 이 때 지리산의 아고산대 침엽수(구상나무)가 대대적으로 도벌된 모습을 목격하였다. 함께 간 학생은 서용택, 강석태, 방기섭, 이용필 군이었다.

 

고군산군도의 여름 실습 때는 작은 배가 폭풍에 요동하고 썰물로 시간이 지연되어 몸과 짐이 온통 바닷물에 젖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여름 휴가가 끝나면 학생들이 그 학년 중에 채집한  동․식물 표본을 정리하여 전시회를 열었다.

 

이 무렵에 공주사대 생물과 학생들의 식물분류학 수준은 대단히 높았으므로 그 영향이 호서 호남지방의 생물학 교육에 크게 공헌했다고 믿는다.

 

공주에 왔을 때 나는 적어도 1년에 1편 이상의 학술 논문을 발표해야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바 있었다. 그러나 공주사대의 시설이 너무 빈약하여 실험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증류수 등을 자작하여 실험을 시작한 것은 이듬해부터였다.

 

이 무렵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은 지원자의 의사대로 입학시험을 치르지 못하였다. 박사과정의 학생 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고 또 지도교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민재 교수님이 사석에서 흘리는 말로는 취직을 해서 조교수가 되어야 박사과정에 입학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 무렵에 박사과정 학생은 김원겸, 김영태 형의 두 사람뿐이었다.



박사과정 입학과 인삼 연구 (제62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59년도에 공주사대에 부임하고 처음으로 요소엽면 시비에 관한 논문을 한국식물학회에서 발표하였다. 나의 발표를 들은 이민재 교수가 감동한 것 같았다. 발표 후 간친회에 참석했을 때 김영태 형이 "이민재 교수님이 김형의 발표를 듣고 역작이라고 칭찬하데 그려, 내년 봄에 박사과정 입학시험에 응시하라고 하셨네"라고 말하였다.

 

나는 간접적으로 박사과정 입시의 허락을 받은 셈이었다. 그래서 60년 봄에 박사과정 입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그리고 61년부터 요소 엽면 시비에 대한 영문논문을 연속해서 식물학회지에 투고하였다.

 

한 학기가 지난 뒤부터 학위논문을 어떤 제목으로 잡을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직장과의 거리  관계로 서울에서 실험할 수는 없고 공주에서 실험을 해야 하는데 공주사대에는 실험시설이 빈약하니 완전한 실험실 실험으로 박사논문을 쓰기가 어려웠다. 몇 달 동안 고민하던 끝에 충남에서 특징 있는 식물이 무엇인가에 생각이 미쳤다. 이 무렵에 개성 사람들이 부여로 피난 와서 전매청 지청을 설립하고 인삼재배를 보급하고 있었다.

 

전매청에서는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와 부여읍 가증리 그리고 대덕군 유성읍 반산동에 넓은 인삼시작장(人蔘試作場)을 만들어 재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실험재료를 얻기 쉬우며, 세계적으로 이름난 인삼을 재료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본래 금산군에서도 인삼재배를 하였지만 재배방법이 규격화되지 않아서 제외하기로 하고, 개성식 재배방법에 따른 부여의 인삼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주말마다 부여행이 시작된다. 국도와 지방도로가 비포장인 시절이었으므로 공주에서 부여까지 버스로 두 시간이, 부여에서 규암리를 거쳐 합송리까지 40분, 다시 부여에서 가증리까지 30분이 걸렸다.

 

하루에 몇 번 밖에 없는 버스를 기다리고 자갈길에 흔들리다 보면 시간이 길어지고 피로가 쌓이므로 실제로 인삼을 관찰하고 재료를 측정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막차에 맞추어 공주에 돌아오면 몸은 풀솜처럼 늘어졌다.

 

▲ 지리산 식물 채집(1965. 7. 백무동에서). 왼쪽부터 서용택, 강석태, 방기섭, 이용필 군

 

재배 인삼은 야생 식물과 달라서 재료 얻기가 무척 힘들었다. 처음에 전매지청에 찾아가서 인삼시작장 장장에게 신분을 밝히고 ‘인삼에 흥미가 있어 연구하려하니 시작장의 인삼을 관찰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장장은 내가 마치 이방인(異邦人) 인양 눈으로 흘겨보며 말하기를??인삼 연구는 우리들이 하고 있으니 돌아가시오.라는 대꾸이다.

 

내가 문헌 조사에서 밝힌 바로는 인삼의 식물학적 연구를 일본인 기술자가 쓴 연구 논문 몇 편이 있을 뿐이었다. 이 무렵 전매청은 담배?인삼?소금의 전매제를 관장할 뿐 연구를 하지 않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 인삼 연구는 문전에서 박대를 당한 것이다.

 

나는 주말마다 찾아가서 인삼시작장 장장을 만나서 인사를 드렸다. 삼고초려(三顧草廬)라던가? 드디어 장장도 나의 설득에 감복되어 인삼시작장의 문을 열게 되었다. 물론 인삼 뿌리를 캐지 않는 엄한 조건부로. 이렇게 하여 첫해에는 인삼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5?16혁명이 난 다음에는 장장이 경질되고 전매청의 분위기가 굳어져서 시작장의 문이 다시 닫혔다. 2~3개월 뒤에야 겨우 문이 다시 열려서 연구를 계속한다.

 

인삼 연구를 어떤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1년 여를 꼼꼼히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한 다음에야 비로소 방향이 잡혔다. 현장에서는 인삼 식물의 생육과 광선량의 관계를, 대학 내 포장에서는 생육 실험을, 실험실에서는 광합성과 호흡을 실험하기로 가닥을 잡는다.

 

62년 여름방학에는 학생들을 합송리 시작장으로 동원하였다. 인삼이 심어 있는 앞, 뒤의 열(列)에 따라 줄기ㆍ잎의 굽은 각도를 측정하였다. 나는 파자마만 입은 채 붉은 황토 흙밭에 누워서 자작한 각도기(角度器)로 측정한 값을 읽고 학생들은 받아 적었다.

 

해질녘에는 내 몸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황토 흙투성이가 된다. 밤에는 원두막에서  모기에 뜯기고, 먹거리는 주변 농가에서 되는대로 시켜 먹는다. 이렇게 하기를 1주일, 나나 학생들이나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공주로 돌아온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는 인삼 뿌리가 어떤 수광 조건에서 가장 잘 자라는가를 해석하는데 이용되었다. 이 현장 실험에는 양부웅, 오성태, 김영식 군 등이 수고하였다.



6편의 논문을 게재하며 박사학위 준비 (제63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63년에는 실험실 옆의 빈터에 인삼 묘를 심고 일복(日覆)을 가설하였다. 일복은 광선의 투과량이 다르도록 두께를 조절하였다. 2주일 간격으로 인삼을 뽑아서 무게를 단 결과로 생육 분석을 하였다. 이 실험은 윤화자 양이 도와주었다.

 

인삼의 광합성과 호흡은 자작한 이산화탄소 측정 장치, 광합성 상자, 항온수조 등을 조립하여 측정하였다. 잎의 광합성 측정은 그 당시에 대단히 어려운 실험이었다. 이산화탄소를 제거한 공기를 일정한 속도로 광합성 상자에 흘려주고, 그 상자를 항온수조에 담구어 일정 온도가 되도록 하면서 잎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을 적정한다.

 

요즈음의 적외선 광합성측정기기는 연속적으로 측정치가 레코더에 기록되는 데 반하여 그 당시에는 광선, 온도, 시간, 공기 유속을 각각 맞추어 광합성의 한 측정치를 얻는 데 하루가 소비되었다. 한편 뿌리의 호흡은 가을에 뿌리를 미리 캐서 화분에 심어 가假매장해 놓았다가 온실 안의 항온수조에서 겨울 내내 측정하였다.

 

인삼은 일복 밑에서 재배하므로 실제로 일복 밑에서 식물이 받는 광선량을 알기 위하여 모형실험을 하였다. 일복 내에 투사하는 광선량은 현지의 일복구조를 모방하여 합판으로 만들고 그 중앙 단면에 10센티미터×10센티미터가 되도록 노끈을 늘여 가로 세로 격자를 만들었다. 노끈의 교차점에서 측정한 조도에 대한 일복 밖의 조도(100%)의 백분율을 계산하여 일복 내의 광분포도(光分布圖)를 그렸다. 광분포도는 개인 날, 구름낀 날, 그리고 비오는 날에 각각 측정하여 그 차이를 밝혔다.

 

▲ 공주사대 생물과의 식물표본 전시회 (1981. 11. 9.)

계절과 일주 변화에 따른 태양의 고도와 방위 및 일출과 일몰의 방위 등을 일복 내의 광분포도에서 계산하여 일기 변화에 따른 인삼 식물의 수광량을 추정하였다. 이러한 실험 설계는 주로 공주-부여 사이의 자갈길을 달리는 지루한 버스 속에서 구상하였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 공주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과학관 2층의 내 연구실은 통금 예비 사이렌(11시 30분)이 울려야 불이 꺼졌다. 예비 사이렌이 울리면 창문을 잠그고 계단을 뛰어 내려와 집에 도착하면 본 사이렌이 울리고는 하였다.

 

특히 겨울에는 난방시설이 연탄 난로였으므로 그것을 갈아주는 것이 문제였다. 연탄불은 화력이 약하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거운 코트를 입고 일을 하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오십견이 오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얻어낸 인삼에 대한 연구 결과는 62년에 처음으로 논문화 하였고, 64년에 한꺼번에 4편을 게재하였다.

 

공주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학교의 강의와 연구와 학생지도 이외에 시간을 빼앗기는 일이 없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이므로 차를 탈 필요가 없고, 또 공주에는 시내 버스가 없었다. 어쩌다 다방이라도 나가면 그 소문이 바로 퍼져나가므로 아예 나가지 않기로 하였다. 공주에서는 하루를 100퍼센트 활용하는 생활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래서 10여 년간에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64년 말까지는 논문이 공주사대논문집(1편), 서울대 논문집(농생물계 3편) 및 학술원회지(자연과학계 2편)에 게재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제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민재 교수는 제출하라는 말씀을 안 하신다.

 

나의 선배 교수로서 정영호 교수와 홍순우 교수가 학위를 받지 않고 있었다. 지도 교수께서는 현직에 있는 제자들의 서열을 고려하셨던 것 같다. 실제로 그러한 염려의 말씀을 비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홍 교수가 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서열이 무너지고 말았다. 박사과정을 수료한 제자들이 밀고 올라오는 데는 서열을 지킬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60년대 초에 인삼을 실험하는 동안 동경대학 생태학연구실의 몬지[門司正三], 사에키[佐伯敏郞] 양 교수의 물질생산 연구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따금 편지를 내어 그 분들의 논문을 받았고, 그밖에 서양의 여러 나라 학자들의 물질생산 논문도 수집하여 나 자신의 지식으로 소화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인삼을 재료로 한 나의 박사학위 논문의 흐름과 요체는 물질생산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몬지, 사에키 양 교수를 만나기는 66년 제11차 태평양과학회의(동경대학) 때였다(후술).

공주사대에 있을 때 영문논문 초고(草稿)를 만든 다음 서울사대 김준민 교수님 댁(동대문구 회기동)을 방문하여 교정을 받은 일이 자주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재에서 대좌하고 원고가 빨갛게 되도록 교정을 받은 기억이 난다. 저녁 때가 되면 젊은 나도 피곤했는데 김 교수님은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교정을 보아주셨다. 나는 김 교수님의 좋은 영문 표현에 늘 감탄하곤 하였다.



다섯 번의 박사학위 심사 (제64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종전에는 대학원의 박사학위 논문 제출 자격 고사를 논문 제출 후에 치렀는데 65년부터 제출 전에 치르도록 문교부 방침이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논문 제출 전에 의과대학에서 자격 고사(영어와 독일어)를 치렀다. 이 때 고사를 치르면서 고사장으로 커피를 시켜다 먹은 기억이 난다.

 

내가 박사학위 논문을 낼 무렵의 학위 논문은 학회지에 발표한 별쇄를 순서대로 철할 뿐 규격에 맞는 표지를 붙이지 않았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주논문(主論文)과 부논문(副論文)으로 구분하여 제출하였다. 심사위원은 이덕봉(고대 교수․ / 심사위원장ㆍ별세), 이민재(서울대 문리대 / 지도 교수ㆍ별세), 김준민(서울대 사대 교수), 이배함(건국대 교수ㆍ별세), 이희명(서강대 교수ㆍ별세)의 제 교수님이었다. 이 교수님들은 그 당시 한국 생물학계의 최고권위자였다.

 

봄부터 시작한 박사학위 심사는 다섯 번을 꼬박 채웠다. 전화 통화가 어려운 시대였으므로 심사할 때마다 홍순우(洪淳佑) 교수님이 결과를 세 번에 걸쳐 편지로 알려주셨다.

 

제1신:『김 선생 앞. 신학기(新學期)를 마지하여 여러모로 바쁘시겠습니다. (중략). 김 선생의 심사건(審査件)은 오는 주말(週末) 경부터 시작하여 4월 중순까지 매듭을 짓겠다고 이 선생(李 先生)님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전번 일심(一審) 때에는 영문(英文)의 mistake 또는 methodology에 관한 얘기가 나왔는데 모두 점잖게 처리(處理)하자는 의견(意見)에 일치(一致)된 듯 하오며 대체(大體)로 무난(無難)하게 진행(進行)될 것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간 소식(消息) 전하려고 하였으나 삼심(三審)의 일자(日字)를 알고 pen을 들려고 하였는데 금일(今日) 교수회의(敎授會議) 때 이 선생님께서 말씀이 떨어졌기에 우선 밀렸던 소식(消息)을 보내고저 합니다. (후략).  홍순우.』

 

제2신:『김 선생 앞. (전략). 김 선생의 박사학위 논문 심사(博士學位論文審査)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후략). 홍순우.』

 

제3신:『김 선생 앞. 축하의 말씀을 먼저 올립니다. 작일(昨日)의 심사(審査)에서 모든 것을 예정(豫定)대로 심사완료(審査完了)의 토의(討議)를 끝 마쳤습니다.  일심(一審) 때보다는 매우 smooth하게 전원(全員)이 좋은 말씀만 해 주셨다고 합니다.  기간(其間)의 노파심은 이제 청산(淸算)하셔도 좋을 것이며 결심(結審)은 전일(前日)에도 말한 바와 같이 대학원교무과장실(大學院敎務課長室)에서 본인(本人) 출두(出頭) 하에 show 형식의 결심(結審)을 한다고 합니다. 결심(結審) 일자(日字)는 아직 교무과장(敎務課長)의 시간사정(時間事情)을 문의(問議)해 보지 못했지만 현재로는 4월 2일(금요일) 하오 3시에 있을 예정(豫定)입니다. 따라서 김 선생(金先生)께서는 3월 말일(末日) 경까지는 일차(一次) 상경(上京)하셔서 대학원(大學院)에 제출(提出)할 요지작성(要旨作成) 등을 마련하셔야 하므로 결심(結審) 때 상경(上京)하셔야 합니다. (후략).

1965년 3월 20일. 홍순우.』

 

▲ 부여 합송리 인삼시작장의 학생과 필자.(1961. 7.)

 

심사기간 중 심사 위원을 직접 만나면 듣기 거북한 말들이 많았겠지만 홍 교수님이 편지로 한번 걸러서 전해주셨기 때문에 거북한 말을 듣지 않고 넘겼다. 홍 교수님의 친절에 깊은 감사를 잊지 않는다.

이민재 교수님이 수려한 필체로 작성한 박사학위 심사요지의 초본(草稿)를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기에 다음에 옮겨본다.

 

【김준호 이학박사청구논문심사요지(金俊鎬理學博士請求論文審査要旨)】

⊙주논문: ‘인삼(人蔘)의 생육(生育)에 대한 생리생태학적 연구(生理生態學的 硏究)’

『본 연구는 고려인삼(高麗人蔘)의 생육과정(生育過程)을 세밀히 검토하여 그 식물학적 특성(植物學的特性)을 밝히고 동시에 인삼(人蔘)의 생육환경(生育環境)의 제조건(諸條件)과 물질생산력(物質生産力)과의 관계를 분석하여 생산증강(生産增强)의 합리화(合理化)에 대한 기본적인 요인을 밝힘으로써 식물학(植物學)에 끼친 바 공헌(貢獻)이 클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인삼산업(人蔘産業)에 귀중한 재료(材料)를 제공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중략).  

⊙부논문: ‘식물(植物)의 대사代謝에 미치는 요소질소(尿素窒素)의 영향(影響)’

『본 연구는 식물의 질소대사(窒素代謝)에 있어서 요소(尿素)의 엽면흡수(葉面吸收)와 근흡수(根吸收)와의 효과(効果)를 비교하면서 엽면흡수의 기작(機作), 단백질(蛋白質) 및 엽록소합성(葉綠素合成)에 이르는 대사(代謝) 및 체내의 탄수화물(炭水化物)에 미치는 영향(影響)을 추구한 것으로서 식물학적으로 공헌(貢獻)이 크다고 사료된다. (중략).

이상의 주론문과 부논문을 통해서 볼 때 그 학문적(學問的) 가치(價値)로 보나 또 저자의 석사, 박사 학위과정에서의 학적 배경(學的背景)으로 보나 이학박사학위(理學博士學位)를 수여(授與)함이 타당하다고 사료(思料)됨.

1965년 4월 2일. 주심主審 이민재李敏載.』



학위 취득 축하연 (제65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박사학위 수여식은 1965년 9월 30일에 거행되었다. 이 날은 가족과 친가․처가에서 많은 친척이 모여 축하해 주었고, 네 살 짜리 아들(광원)이 대학 구내에서 ‘응아’를 하겠다고 하여 웃음꽃이 피었다.

내가 학위를 받던 학기에는 이학박사를 박상윤 교수(성균관대ㆍ별세), 이영록 교수(고려대 / 현 학술원 회원) 그리고 나의 세 사람이 받았고 문학박사에 윤태림 교수 (숙대 총장ㆍ별세)가 받았다. 박사학위는 75년 2월까지 구제(旧制)와 신제를 함께 수여하였는데 박상윤ㆍ이영록 박사는 구제였고, 나는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신제 박사 제1호였다. 그리고 공주사대 교수 중의 박사학위 제1호이기도 하였다.

 

박사학위를 받고 공주에 돌아오니 공주의 인사들이 축하 인사를 하였고, 누구보다도 김영돈(金永敦) 학장이 기뻐하셨다. 김 학장은 대학에 박사가 태어났으니 마땅히 축하연을 열어야 한다고 암시하신다. 내 기분도 축하회를 열어 공주사대 교수, 특히 생물과 교수님들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다. 이 무렵 나의 가정 경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아내와 의논하여 축하연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5일에 집에서 장만한 음식과 술을 리어카에 실어 사대 도서관으로 운반하였다. 이때 생물과 학생과 아내의 근무 학교인 사대부고 여선생 및 여학생들이 수고하였다. 사대 교수, 부중고교 교사, 동창회원 및 공주의 유지들이 120명 이상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사회를 공주교대 교수이며 나와 서울 사대 동기인 김경환 형이 맡고, 김영돈 학장이 축하 인사를 하며 내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뷔페 식으로 차린 음식을 대접하였다. 학위논문의 내용에 대하여 호기심이 많은 듯 개인적으로 질문하는 손님이 많았다.

 

축하연을 전후하여 전 학장이신 김연창 선생과 임한영 박사, 교대의 윤봉수 학장, 은사이신 장인완 선생, 충남대 총장이신 김영묵 박사께서 전보를 주시고, 여러 신문사 지국에서 화환을 보내오며, 공주 유지이신 김석순, 김석봉 형제(제세당), 임헌원 선생 등이 축의금을 보내주셨다.

 

▲ 박사학위 수여식장에 오신 친척들 (1965. 9. 30. 서울대 문리대교정).

나의 학위 취득 소식을 뒤늦게 접한 모경환(牟京煥) 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방금 동아일보에서 형이 이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알았네, 하마 형은 알았을 것이고 지금쯤 지난 이야기가 돼서 도리어 형한테는 싱거운 것이 될 줄로 아네마는 나는 오늘 석간에서 비로소 알았으니 어쩌나. 내 일 만큼이나 기쁘네. 전에 임억규 군한테서 논문을 제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기사에서 형의 이름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도네 그려. 형에게 보내는 알맞은 축하의 표현이 아직 우리말사전에 없음이 안타까울 뿐일세. 그저 기쁘네. 모경환』

 

이러한 편지는 전주사범 선배인 심종학 형과 후배인 임억규 군에게서도 받았고, 대학동기인 박만상 박사, 조규송 교수 등으로부터도 받았으며, 공주사대 재학 중에 말수가 적었던 문병기 군으로부터도 편지를 받았다.

 

『존경하는 선생님, 박사의 영광을 축하합니다. 전주에서 길봉섭 친구를 만나 선생님 소식을 듣고 기대하던 차 22일자 신문을 보고 선생님의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합니다.

고창군 흥덕 중학교 문병기 올림.』

 

이러한 편지는 공주사대 제자인 길봉섭, 서용택, 김영식, 신준식 군 등으로부터도 받았다.

 

한편 서울신문(1965. 9. 27)에서는「인삼재배의 과학화, 42%의 증수 가능, 공주사대교수 김준호 박사」라는 일면 7단 톱기사를 내주었다.

 

학위 수여식이 있은 지 사흘 뒤인 10월 3일에 제9회 충청남도 문화상 시상식이 있어 나는 아내와 함께 참석하여 자연과학부문 문화상을 받았다. 수상 업적은 충남의 명산물인「인삼의 생육에 대한 생리 생태학적 연구」였다. 여기에는 이원구 교수님과 졸업생인 장석운 선생 부부, 재학생인 김기철 군 등이 자리를 함께 하였다.



4.19의거와 5.16쿠데타 (제66회) - 제10장 공주사범에서의 후학 양성

 

4․19혁명 후의 변화 / 공주사대도 예외 없이 4․19학생혁명과 5․16군사쿠데타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렸다. 60년의 3․15부정선거를 앞두고 하마터면 교육공무원으로서 자유당에 입당할 뻔했다. 2월의 어느 날 교수회가 소집되었다. 김연창 학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공주사대 전 교수는 자유당에 입당하라는 지시가 내렸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이때는 대통령 선거 운동을 경찰에서 장악하여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공주사대는 지방의 단과대학이기 때문에 외세(外勢)에 대단히 취약했고, 그 당시에는 대학의 권위가 지금처럼 높지 않을 때였다. 전 교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만 정년퇴임을 앞둔 법학 전공의 송상용 교수만이 말문을 열었다.

 

“대한민국 공무원법에 공무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고 명확히 규정되어 있습니다. 전 교수가 자유당에 입당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학장도 교수도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법에도 없는 입당을 강제로 시켜 교수를 선거운동에 내몰려는 음모였던 것이다. 그 이후 입당설은 다시 거론되지 않았다.

 

▲ 충청남도문화상 시상식을 마치고 / 뒷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나다 (1965. 10. 3.)

 

3․15 투표 날 나는 서울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공주에 와서 투표장에 갔었다. 투표를 하려고 보니 투표자 명부에 내 이름이 빠져 있지 않은가?  3․15 이전에도 공주에서 몇 번인가 투표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만 의도적으로 이름을 누락시킨 것이 틀림없었다. 사대 교수의 자유당 입당 보이코트와 무관하지 않았고, 신문이라도 읽어서 정세를 판단할만한 인사들의 이름을 빼버리는 수법이었다.

 

3․15부정선거 이후 사회는 술렁이고 수업은 제대로 되지 않으며 마음은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계엄령이 내려져서 수업이 중단되었으므로 나는 4월 19일 전후에 서울에 머물렀다. 성균관대 학생인 조카(源球․별세)가 데모에 참가하고 4월 20일에 시내 질서 세우기를 위하여 청소를 하는 등 자세한 소식에 접했다. 마음속에 엉킨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개운함을 맛보았지만 지방대학 교수들은 수수방관이었다.

 

한편 공주사대는 4․19혁명 이후 큰 변화를 겪었다. 김연창 학장이 참의원으로 출마하기 위하여 사표를 냈고(6. 29.) 임한영 학장이 취임(8. 29.)한 것이 그것이다. 이때는 민주적 분위기가 고조되어 학장이 임명제에서 선거제로 바뀌었다. 공주와 연고가 있는 L씨와 임한영 박사가 출마하였는데 교수회의 투표 결과 임 박사가 당선되었다.

 

학자를 좋아하던 나는 상경하는 길에 임 박사를 만나 그 결과를 알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후 나는 임 학장에게 호감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그 분은 학장의 큰 그릇이 못되었고 존경받을 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하였다. 공주사대에서 자신의 교육 이론(듀이의 교육철학)을 실천하려던 임 학장은 교직원 및 학생들과 불화를 남긴 채 인천교대로 떠나신다(63. 10. 26.). 임 학장의 재임 중에는 학교가 조용한 날이 없었다.

 

5․16쿠데타와 사대의 동요 / 나는 5․16 군사혁명을 공주에서 맞이하였다. 계룡산에서 박봉규 교수와 함께 이화여대 학생들의 식물분류 실습을 도와준 다음날 서울의 쿠테타 소식이 들렸다. 소식이 늦은 공주에도 계엄령 선포가 내려져 휴교되었다. 나는 일제 트란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연구실에서 방송을 들었는데 서울에서 사관학생들의 시가행진이 있은 후 기자들이 장도영 사령관에게 던진 질문에 대하여 어색하게 답변하는 것을 듣고 혁명군이 일심동체가 아님을 직감하였다.

 

군사 정부가 수립되고 문교부에 문희석 장관과 이민재 차관이 임명된다. 대학 입학 자격 국가 고시제와 학사학위 국가 고시 제, 교수 논문 제출제 등 대학의 과감한 정비가 시달되어 대학이 혁신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문교부는 ‘① 동일지역 내의 독립된 단과대학은 종합대학의 단과대학으로 흡수한다. ② 4년제 사범대학은 폐지하고 교육대학원을 설치한다. ③ 종합대학교의 문리과대학은 사범대학 폐지와 교육대학원의 신설 등을 고려하여 폐지하지 아니하며 설치 학과는 이를 조정하여 증설 또는 폐과한다. ④ 폐지되는 대학 또는 폐과에 따르는 학생 정원은 원칙적으로 감축한다’는 고시를 내어 사범대학 폐지가 확정된다. 공주사대는 폐지되어 교육대학원으로 개편되거나 충남대학교로 병합되며 생물과는 폐과되는 운명이었다.

이 고시가 발표된 뒤 서울사대에서는 정범모 교수가 ‘사범대학 폐지는 부당하다. 불합리한 행정은 언젠가 시정되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하여 군사정부(문교부)의 미움을 사서 면직되었다. 나는 불안한 심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 정범모 교수를 댁으로 찾아가 위로 겸 전망을 들었고, 이민재 차관을 방문하려 했지만 전화통화에 그쳐서 공주사대의 입장을 간략히 설명하였다.



어머니의 별세 (제67회) - 제11장 아내와 자녀들

 

그 이후 나는 직장에 대한 불안에 휩싸였다. 신설된 교육대학원은 교육학 관련 강의가 주가 되겠고 생물 전공 과목은 대폭 축소될 것이므로 교수 정원이 감축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 분의 선배 교수가 잔류하고 소장 교수인 내가 물러나야 한다. 30세가 훨씬 넘은 나이에 대학에 취직할 곳은 없을 터이니 어떤 회사라도 가야하지 않을까. 이 무렵에 나는 신문의 구직 광고를 꼼꼼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62년 9월에 문교부 장관은 공주사범대학에 생물과를 비롯한 몇 과를 존속한다는 발표를 한다. 이게 무슨 문교 행정의 난맥상인가? 그러나 내가 1년 여 동안 고민했던 퇴출의 고민이 사라졌다.

 

그런데 다시 반 년 뒤에는 생물과, 물리과 및 화학과가 과학과로 통합되고, 66년 신학기에는 과학교육과의 생물전공 정원이 20명에서 7명으로 감축된다. 과학교육과 20명을 3학과로 나누므로 6명~7명이 되는데 서로 1명을 더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인다. 종전에 40명의 학생 앞에서 강의할 때는 저절로 신이 났는데 6명을 앞에 놓으면 풀이 꺾이기 때문이었다.

 

한편 5․16 이후 문교부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공포하여 ‘학사학위는 4년제 대학의 전 과정을 이수하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학사 자격 고시에 합격한 자에게 수여한다’를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61년도 학년말에는 학사 자격 고시가 실시되었는데 나는 문교부에서 내려 온 카드에 4지선택형 문제를 복수로 출제하였고 그것을 문교부에 올려 보낸 다음 그 한 벌을 가져다가 졸업반 학생에게 시험을 치렀다.

 

생물과는 다행히 100퍼센트 합격하여 생물과 교수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런데 학사 자격 고시제는 획일성 등 여론에 부딪쳐 일년 뒤에 전공과목이 폐지되었고, 63년 4월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공주사대에 부임한 지 채 1년이 안되었을 때 어머니가 별세하셨기 때문에 여기에서 회상해 본다. 늦둥이로 태어났고 장성해서 공부에 미치다시피 지낸 나는 공주사대의 전임강사가 된 이후에도 어머니에게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생각은 타성(惰性)에 젖어 있는가 보다. 나는 어머니께서 언제까지나 건강하시겠지 그리고 어느 때까지라도 살아 계시겠지 하는 기대심리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생각이 불효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지 훨씬 뒤인 음력 설 전날에야 어머니의 쉐타와 약간의 약을 사들고 귀성하였다. 이 쉐타가 어머니께 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 될 줄 어찌 알았으랴.

 

▲ 별세하시기 열흘 전의 어머니 모습

어머니는 설음식에 체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종전보다 많이 허약해지신 모습이 역력하였다. 공주에서 귀성하기 전에 빈혈증세가 있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빈혈치료제를 준비하여 드렸지만 하루 이틀에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사진을 찍어 드린다고 졸랐지만 몸이 성하지 못하니 반기지 않으신다.

 

언제나처럼 다시 건강해지시겠지 하는 기대를 하며 초사흗날 집을 떠났다. 집에서 돌아온 다음날 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전보가 날아 왔다. 공주에서 200리도 채 안 되는 고향길이 왜 그리도 먼지. 해질녘에 집에 도착하니 자손들이 모이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어머니 팔에는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어머니는 임종에 임박해서 혼백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신다. 우리 집에서는 큰 참죽나무로 판자를 낸 어머니의 관재(棺材ㆍ널을 만드는 재료)를 작은집에 보관해 놓았었다.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아들들은 그 관재로 치관(治棺 : 관을 짜서 만드는 일)시켰다. 그런데 의식을 회복하신 어머니는󰡐관이 참 좋구나󰡑라고 말씀하신다. 사경을 헤매는 어머니의 신경을 거스릴까 보아 치관에 관해서는 함구했는데 마치 현장을 돌아보신 듯이 말씀하신다.

 

또 의식이 회복되었을 때 ‘내가 가려는데 무엇인가 걸려서 가기 어렵구나’ 하신다. 가족들이 온통 신경을 곤두세워 방안에서 걸릴만한 것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출상(出喪) 날에야 앞집의 울타리 밖으로 모과나무 가지가 뻗어 나와 그것을 자르지 않으면 상여가 걸려서 지나지 못하게 됨을 발견하였다.

 

자손들이 모르는 동안에 어머니의 혼백은 집 주위를 마지막으로 살피셨는지 그렇지 않으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를 일이다.

 

임종하기 한 시간쯤 전에 유언을 하셨다. “셋째 아들(규호)은 분가한지 오래지 않았으니 당분간 어렵겠지만 곧 좋아질 것이다. 막내아들은 제 앞가림을 할 터이니 걱정이 없고, 다만 큰손자를 장가보내지 못해서 서운하구나.”

 

어머니는 58년 2월 25일(음력 1월 7일) 15시에 조용히 주무시는 모습으로 운명하셨다. 73세의 수를 누리셨다.

1886년에 탄생하셔서 한말의 쇠약해진 국운과 일제의 식민지 수탈 그리고 광복 후의 혼란과 한국전쟁을 치르시고, 쇠퇴하는 가운(家運)을 지탱하면서 6남매를 기르는 고생을 감내하며 30년간의 미망인 생활을 청산하신 것이다. 참으로 고생으로 점철된 일생이었다.

나는 울음이 폭발하였다. 5일장을 지내는 동안 상제의 체면도 염치도 다 저버리고 울기만 하였다. 유복자를 낳아 길러서 성년이 되기까지 애정으로 보살펴주신 어머니께 효도 한번 못한 내 불효가 한스럽기만 하였다. 나는 막내아들로 태어나서 언제까지나 철없이 어리광만 부리며 자랐다. 조병화 시인이 읊은 시 구절이 나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어머니, 간밤에〉

  어디선지 들리는 생시의 어머님 말씀

  ‘어, 너, 언제 철이 드니’

  어머님

  저는 언제나, 언제나

  어머님의 철없는 막내아들이옵니다.



약혼과 결혼 (제68회) - 제11장 아내와 자녀들

 

어머니가 영면하신 뒤 내 마음은 허공에 뜬 것 같이 반년을 넘겼다. 앉아도 누워도 어머니의 생각뿐이었다. 마음을 의지할 중심을 잃은 것이다. 김선진 시인의 시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일까.

 

     죽어도 못다 부를 노래

 

  하늘만큼 높게 불러도        바다 속처럼 깊게 찾아도

  돌아오지 않는                  나의 메아리

  어머니                            아직까지도 당신 가슴에

  무수히 뜨는 별들              깨닫지 못하고

  이승에서 마냥                  절룩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별세하실 무렵에 나는 박시현과 연애를 하였고 장래를 약속하던 터였다. 그래서 어머니 생전에 결혼 못한 원인이 마치 상대방에 있는 양 화풀이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인즉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왜냐 하면 백면서생이 전임강사가 되어 월급 받기 시작한 지가 겨우 반년도 채 안되었으니까.

 

이야기의 줄거리를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대학원 1학년 때인 55년 6월의 어느 날 나는 명륜동의 이영노 선생님 댁에 가고 있었다. 대문 가까이 접근하였을 때 마침 그 댁에서 나오는 박시현을 만났다. 그녀는 내가 생물과 4학년 때 1학년에 입학한 학생이었으므로 이때는 2학년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건넸는데 깊은 뜻이 담긴 말을 한 것 같지 않고, 상대도 말을 했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 뜻밖에 내 얼굴이 붉어졌으며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고, 그녀도 얼굴이 붉어지는 듯 하였다. 이때의 만남이 지금까지 45년의 긴 반려(伴侶)의 출발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미스 박과 그 이전에도 1년 여를 자주 만났었다. 이영노 선생님이 서울대 생약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저술하는 일을 내가 도와드렸고, 식물도감의 그림을 미스 박이 그려 드렸기 때문에 그 분의 연구실에서 이따금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이 선생님이 주말에 북한산․도봉산에 식물채집 하실 기회에 함께 동행한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답답하던 나였는데 이 선생님 댁 앞에서 단둘이 만났을 때의 나는 마치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듯이 동요되었다.

수 주 후에 나는 마음속에 지닌 참뜻을 이 선생님에게 고백하였고, 그 뜻이 미스 박에게 전달된 듯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생을 토론하고 학문을 이야기하며 장래를 약속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나 미스 박이나 학생 신분이어서 곧 결혼할 처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타계하신 뒤 형님들은 나의 결혼을 몹시 서둘렀다. 큰 형님이 이영노 선생님을 사이에 넣고 신부집에 정식으로 청혼하는 형식을 밟았다. 그래서 58년 5월 17일에 신부집에서 조촐한 약혼식을 올렸다. 이 때 이영노 선생과 모경환 형이 배석해 주었다. 약혼 선물로 만년필을 받았고 백금반지를 주었다.

 

▲ 약혼하던 날 (1958. 5. 17.)

 

우리들은 58년 11월 1일에 종로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청첩에 쓴 내용을 보면, 청첩인은 김준민 교수, 주례는 이덕봉 교수이다. 축사를 최기철 교수가 하셨는데 그 분이 어떤 좋은 말씀을 하셨는지 지금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들러리는 나와 키가 비슷하고 친하게 지낸 이 흔 형과 신부측에 양순진 양이 서 주었다.

 

김덕만 형이 사진을 열심히 찍었는데 그만 불량 필름을 넣었기 때문에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 축하객들의 답례품으로는 복떡을 한 상자씩 드렸다. 이때 나는 공주사대 전임강사이고, 아내는 동덕여고 교사였다.

 

결혼식 전날 형님이 준비해준 채단(采緞)과 혼서지(婚書紙)를 새로 산 트렁크에 넣어 함을 준비하였다. 함잡이 친구들은 윤석인 형 집에 모여 신부집으로 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윤 형의 부인 (허 연 여사)이 함을 보고 놀라며 함보로 싸야한다고 주장한다. 서울과 시골의 풍습 차이가 노출된 것이다. 허 여사는 자신이 받았던 함보를 꺼내서 다리미질을 하여 함을 싸주었다. 위기를 모면해 주었는데도 나는 이제껏 그 함보를 돌려줄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한발 앞서서 신부집으로 갔고 함잡이 모경환, 박만상, 윤석인 군은 뒤따라 왔다. 그런데  친구들의 장난이 너무 심했는지 신부집 젊은이들과 시비가 벌어지는 듯 하였다. 다른 방에서는 사촌 처남 될 사람이 불균형한 결혼을 반대하는 언사를 큰 소리로 외치고 있어서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서울 처녀와 시골 총각 사이의 불균형, 빈털털이인 신랑에게 사촌누이를 내주는 섭섭함이 노출된 것 같다. 나는 미래를 위하여 참기로 다짐하였다.

 

결혼식장에서 주고받는 예물을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결혼식 직전에 처형이 예물을 확인하신다. 그러나 내 호주머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마도 내 안색이 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약혼식 때 교환한 백금반지가 서둘러서 내 호주머니에 다시 돌아왔다. 또 한번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가족이나 신부나 친구들이 결혼 예물을 미리 단속해 주었더라면 빚을 내서라도 준비했으련만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 생전에 결혼을 했더라도 그러한 위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신부는 결혼 반지 없이 약혼 반지 한 개를 받고 시집온 셈이다. 나는 37년이 지난 뒤 아내의 회갑 날 그 보상으로 다이아 반지를 끼워주는 것으로 가슴 속 깊이 서려있던 빚을 갚았다.



신접살림 (제69회) - 제11장 아내와 자녀들

 

신혼 여행은 온양 온천으로 갔다. 50년대 후반에는 온양 이외에 갈 곳이 따로 없었다. 이틀을 온양에서 머물고 공주사대 졸업생인 배정덕 선생(온양중하교)의 안내로 부근의 신정호를 돌아보았다. 온양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큰처남(승현 씨)과 천안에서 합류하여 고향에 가기로 약속되어 있어 밀월 여행을 마감하였다.

 

고향에서는 친척과 친지를 모시고 잔치가 벌어졌다. 그에 앞서 아내와 큰 처남과 함께 집에 도착한 나는 어머니 영전(靈前)에서 절하다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형제자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형님과 누님은 막내 동생을 결혼시킨 기쁨의 눈물이겠지만 나의 것은 불효를 참회하는 눈물이었다. 고향의 친지들은 대학 선생으로 서울 처녀에게 장가드는 나의 결혼을 축하해 마지않는다.

 

잔치가 끝나고 큰형님이 귀하게 마련한 차를 타고 부여를 거쳐 공주로 온다. 이에 앞서 결혼 생활을 위하여 공주사대 관사를 미리 중학동에 마련했었다. 볼품이 없는 집이어서 쓰러지는 대문 등을 여름에 큰 형님이 오셔서 수리해 놓았었다. 나와 아내는 관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내를 큰처남에 딸려서 서울로 보냈다.

 

나는 2주일이 지난 주말에야 서울의 처가에 들렀다. 그런데 나의 사고를 크게 수정해야 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내는 동덕여고 교사로 근무하였으므로 공주로 전근할 때까지 당연히 처가에 머무르려니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따로 방을 얻어 아내를 분가시켰던 것이다. 집안 어른들은 젊은 부부의 독립심을 기르기 위한 의사라고 했다.

 

그 방은 동덕여고 뒤편(창신동)의 어느 집 문간방이었다. 방에 장롱 한 벌이 들어가지 못해서 한 짝만 넣고 다른 짝은 주인집 대청에 놓아둘 만큼 작은 방이었다.

 

▲ 곃혼 사진

 

준비 없이 결혼한 나에게 방값의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공주에 와서 5만 원을 가불하여 송금하였다. 5만 원 짜리 사글세방에서 출발한 결혼생활인데 40여 년이 지난 오늘의 내 집은 너무 커서 자괴(自愧)를 느끼고 있다.

결혼한지 4달 뒤에 아내로부터 임신의 소식을 듣는다. 둥실 커진 배를 안은 아내는 만원 버스에 흔들리며 출근하는 고된 생활을 하였다. 전농동에서 청량리로 나오는 버스는 유독 만원이었다.

큰딸은 위생병원(동대문구 휘경동 소재)에서 해산(解産)하였다. 새벽에 진통이 온 뒤 아내는 내 손을 꼭 잡고 택시에 올랐다. 분만실에서 나온 젊은 의사가 "뱃속의 어린애가 너무 커서 배를 갈라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겁을 준다."수술하지 말고 더 기다려 봅시다."겁에 질린 나의 대꾸다. 정말 수술하는 것은 싫었다. 초조한 시간이 계속된 뒤 드디어 장녀가 출생하였다.

 

혜원(蕙源)의 생일은 1960년 1월 2일 10시. 표준보다 큰 아이를 낳느라고 남성들이 모르는 고통을 아내는 감내하였으리라. 수술하지 않고 분만했지만 보여주는 신생아의 이마 두 군데와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기계에 눌렸으리라. 퇴원하는 날 포대기에 싼 딸아이를 아버지가 당연히 안아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미숙한 포옹 방법은 하마터면 신생아를 포대기 밑으로 떨어뜨릴 뻔하였다

 

해산 뒤에 변비로 다소 고생했지만 아내의 건강은 신기하리만큼 빠르게 회복되었다. 해산 휴가를 끝낸 아내는 출근해야 했고, 아이는 보모 겸 식모의 손으로 길러졌다. 외국에서 수입한 ‘비락’이라는 분유 값은 세 식구의 식비를 웃돌 만큼 비쌌다. 주말마다 상경하여 관찰한 큰딸의 볼은 나날이 부풀어 올랐다. 우유병 꼭지를 볼에 대면 식욕의 유무를 반사적으로 표시하고 얼굴 표정에는 오줌을 누었는지 응아를 지렸는지 배가 아픈지 열이 나는지를 정확히 표시하였다.

 

딸아이의 표정을 보는 것이 아이 기르는 즐거움이었다. 큰딸은 백일 때부터 오랫동안 설사를 하더니 ‘두개골 연화증’이라는 비타민 D결핍에서 오는 병을 앓았지만 이밖에 건강하게 자라주었다.

 

장녀(혜원)를 낳기 전에 전농동(480-2번지 오두영 씨 댁)의 방 두 개 짜리 전셋집을 얻어 이사하였다. 이 집은 날림으로 지은 서향 한옥이기 때문에 여름에 촛대에 세워 놓은 양초가 엿가락처럼 굽고, 겨울에 방안의 잉크가 얼어서 병이 터지곤 하였다. 방 앞에 나팔꽃을 심고 덩굴을 올려서 해 가리개로 이용했지만 석양 햇빛에는 효과가 없었다.

 

서향 집에 살면 건강이 나빠짐을 잘 경험한 셈이다. 이 무렵의 전농동에는 평지인데도 수도가 없어 작두샘에서 물을 뽑아 썼고 가뭄이 계속되면 그것도 나오지 않아서 이웃집 우물 신세를 져야했다.

 

건강에 좋지 않았던 전농동에서 이문동(319 번지 염애신 씨 댁)으로 이사하였다. 이 집은 철도 변에 있어 어린아이가 기차소리에 놀라곤 하였다. 양옥집이었으므로 따로 달아낸 부엌에서 높은 창을 통하여 밥상을 날랐고, 담이 없었으므로 여름에 포장으로 가리며 목욕을 하는 불편한 집이었다. 좋은 집을 세낼 만큼의 돈이 없었고 또한 내가 공주에서 근무하였으므로 나의 뜻과 관계없이 불편한 집을 전전하며 가족들을 고생시킨 것이다.



사남매를 기르며 (제70회) - 제11장 아내와 자녀들

 

장녀가 돌을 지나기 전에 두 번째 임신을 하였다. 임신모의 고생이 또 되풀이된다. 차녀(정원)도 위생병원에서 순산하였다. 정원(貞源)의 생일은 1961년 7월 25일 2시 40분. 연년생의 두 딸을 기르게 되었다. 한여름이라 해산 후 산모의 몸에는 땀띠가 솟아 벌겋게 꽃이 피어서 알코올 습포로 다소 효과를 보았다.

 

나는 둘째딸의 자라는 과정에서도 얼굴표정을 소상히 관찰할 수 있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어렸을 때는 다분히 본능적이며 합목적성이 있는 것을 느꼈다. 둘째딸도 우유로 길렀지만 표준으로 자라 주었다. 이 아이는 활동적인 데가 있어 커서도 그 성질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둘째딸을 해산한 아내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직장이 서울에 있어 공주에 갈 형편이 못 되었고 또한 아이가 하나일 때는 서울에 남아 있기를 고집하였지만 두 번째 임신한 뒤에는 혼자서 서울에 머물러 있을 자신을 잃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주로 이사하자는 뜻을 비쳤다. 대대로 살아온 서울 태생이 지방으로 낙향하는 데는 단호한 용단이 필요한 것이다. 운 좋게도 마침 공주사범학교에 직장이 마련되었다. 그래서 두 달쯤 된 둘째딸을 안고 두 살 짜리 큰딸은 업고 61년 10월 3일에 공주에 내려왔다. 결혼한 지 3년 여 만에 가정을 합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공주사범에는 문영환 교장과 은사이신 장인완 교감이 계셔서 일이 잘 풀렸다. 이원구 교수의 조언도 효과가 있었지만 문 교장님의 각별한 호의로 아내는 전근하게 되었다. 김연창 학장에게 아내의 전근 사실을 알렸더니 “대단한 빽이 있었나 보네, 요즈음 중등학교에서 자리를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 참 잘 되었네.”라고 말씀하셨다.

 

공주에는 미리 전세 집을 얻어놓았다. 이 무렵 이흔(李欣) 형이 공주사대의 전임강사로 있었기에 나와 함께 다니면서 전셋집을 탐색하였다. 그런데 얻어 놓은 집을 주인이 이사 날짜에 맞춰서 비워주지 않는다. 그래서 서울에서 온 이삿짐과 가족을 내가 거처하던 하숙방으로 옮겼다.

 

이튿날부터 아내는 출근하고 식모가 아이들을 보살폈다. 그런데 두 아이가 심하게 설사를 하지 않는가. 이사할 때 가족이 변을 당하는 불상사가 있음을 듣던 터라 크게 긴장하였지만 다행히 곧 회복되었다.

 

공주에서 살던 전셋집은 대지가 400평이고 큰 벽오동과 사철나무가 자라는 정원이 갖춰져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가 따로 있었다. 과거에 광산업을 하던 오 씨가 큰 살림을 하던 집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안채에서 살다가 몇 년 뒤에 규모가 큰 일본식 가옥인 사랑채로 옮겨 살았다. 이 집은 8년 간 네 아이를 기죽지 않고 활달하게 기를 수 있어 좋은 안식처였다. 시장이 가까워서 편리하고 가까이 있는 예비 뚝방과 산성공원에서 어린애들을 마음껏 놀게 할 수 있어 좋았다.

 

차녀와 두 살 터울로 장남(광원)이 태어났다. 그 무렵에 공주에는 산원이 없었으므로 영생병원의 서 원장(여의사)이 집에 와서 받아주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 방안의 소리를 듣는다. 남성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그 고통스런 비명이 고막을 때린다. 옆에 앉은 두 딸이 영문을 모르고 겁먹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드디어 신생아의 파열음이 터진다.

 

나의 관심은 아들인가 딸인가에 쏠려 있었다. 서 원장의 흥분한 그러나 조용한 말 “고추입니다.” 나는 아들 낳기를 바랐었다. 광원(珖源)의 생일은 1963년 11월 1일 14시 30분. 우리들이 결혼한 5주년의 그 날이다. 장남의 출생지는 공주읍 교동 118번지이다. 아들도 우유로 양육하였다.

 

세 어린애를 한 식모가 보살피기 어려워서 두 사람을 두기로 하였다. 식모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졌고 나가겠다는 말을 들으면 우리 부부는 전전긍긍하였다. 대개 식모는 고향집의 연줄로 구하였다. 이 무렵에는 가족이 일곱 식구로 늘어나 살림살이가 커졌다.

 

얌전하게 자란 두 딸아이와는 달리 아들은 사고를 자주 치며 자랐다. 자칫하면 행인의 자전거에 치어 부상하며, 발바닥에 바늘이 박혀 집안을 온통 긴장시키는 가운데 수술하여 빼내고, 제민천의 오수(汚水) 속에서 잠자리를 잡다가 더러운 물을 마셔서 장염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가 하면, 앉을 때마다 2~3미터를 슬라이딩하여 왼쪽 무릎에 늘 구멍이 뚫리는 등 마음놓을 겨를이 없었다.

 

장녀가 유치원에 갈 무렵에 삼녀(주원)가 태어났다. 삼녀도 장남처럼 집에서 서 원장(영생병원)이 받아주었다. 아내는 며칠 전까지 큰배를 안고 출근하였지만 저녁밥을 먹은 뒤에 진통이 와서 서 원장에게 연락하였는데 빨리 오지 않았지만 나의 조바심도 덜하였다. 신생아가 딸임을 알았을 때 아들을 기대했던 나는 아쉬움을 느꼈다. 주원(紬源)은 1967년 2월 23일 4시에 출생하였다.

 

▲ 건강하게 자란 아이들. 왼쪽부터 장남(광원), 삼녀(주원), 차녀(정원), 장녀(혜원)

 

나는 아이들 얼굴 표정 관찰을 전과 같이 하였고, 네 아이의 표정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의 얼굴 표정으로 병을 진단하였는데 거의 맞아들었다. 표정에서 읽을 수 없는 병만을 의사에게 보내곤 하였다.

 

3녀도 우유로 길렀으며 크게 앓는 일없이 표준으로 자라 주었다. 다만 여중 3학년 때 몹시 심한 수포진(herpes)을 앓았다. 요즈음 같으면 가볍게 앓았을 터인데 그 때는 바이러스성인 헤르페스의 약이 없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3녀는 막내딸답게 어리광이 심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내 무릎에 앉기를 좋아했으니까. 나는 막내딸에게「애완동물」이라는 별호를 주고 있었다.

 

네 아이들이 건강했지만 유아 때 편도선이 약해서 자주 감기에 걸리고 목이 부었다. 그래서 정원과 광원은 73년 정월에, 주원은 74년 정월에 수술을 하였다. 그런데 광원은 수술 후유증으로 방광염을 앓아 몹시 고생했지만 한약을 복용하고 나았다.

 

맞벌이 부부가 네 아이를 기르는 데 있어 공주는 지상낙원이었다. 왜냐 하면 이웃사람들의 심성이 고왔고, 점심 시간에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주사대나 공주사대 부고는 점심 시간에 학생과 교직원이 자택이나 하숙집에 와서 식사를 하는 제도였다. 점심 시간이 되면 남의 손에 맡겨진 네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있고,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시간의 점심 시간이 어머니를 기다리는 긴 불안감을 단절하여 정서를 안정시켰다고 믿는다.

 

나는 공주에서의 생활을 일생 중의 복 받은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순결무구하게 성장하고 출가한 자녀들 (제71회) - 제11장 아내와 자녀들

 

이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네 아이를 큰 탈 없이 길렀다. 요즈음의 가족구성으로 보면 너무 많은 아이를 낳았지만, 현재 60세~70세인 친구들은 대개 나와 비슷한 자녀수이다. 60년대에 가족 계획 운동이 크게 일었지만 나의 남아선호사상은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였다.

 

내가 60년대 중반에 일본 나들이를 하였을 때 일본의 가족계획이 한국보다 한발 앞서 시행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는 이미 넷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어 그냥 낳기로 하였던 것이다. 네 아이를 기르는 동안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잘 했다고 생각하며 후회하지 않는다.

 

공주는 아이들이 초등교육을 받기에 좋은 곳이었다. 혜원, 정원, 광원은 공주유치원에서 유아교육을 받고 두 딸은 공주 교대 부속국교를 다녔다. 교대 부속국교는 한 반이 30명 정도로 편성되고 시설이 현대화 되어 교육밀도가 대단히 짙은 학교였다. 여기에서 혜원은 3학년을, 정원은 2학년을 수료하여 학교 교육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광원)은 유치원만 수료하고 공주를 떠났기 때문에 학교교육의 자리가 잡히지 못하였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공부하라고 윽박질러 본 적이 없다. 시내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학교 교육에 맡겨 놓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였고, 크게 뒤지지 않고 교육이 이루어졌다. 혜원은 혜원여중・고를 나와 동덕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하였고, 정원은 송곡여중과 경기여고를 졸업하여 한양대와 동 대학원에서 음악(작곡)을 전공했으며, 광원은 태능중과 동대부고를 나와 성균관대에서 공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기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원은 혜원여중․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와 서울대 대학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현재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수학했다.

 

순결무구(純潔無垢)하게 자란 네 아이들은 84년~92년의 9년간에 모두 결혼하였다. 혜원은 84년 3월 18일 장윤화(張允和ㆍ공군 대령)에게 출가하여 1남1녀(恩繡, 準熙)를 낳았고, 정원은 89년 6월 30일에 김근배(金根培・현 숭실대 교수)에게 출가하여 1남1녀(恩智, 贊洙)를 낳았으며, 광원(珖源ㆍ대구 미래대 교수)은 91년 12월 17일에 이정은(李政恩)과 결혼하여 1남1녀(相希, 庠秀)를 낳았고, 주원은 92년 5월 31일에 이호영(李湖映・현 행자부 서기관이며 미국 컬럼비아대 로우스쿨 재학 중)에게 출가하여 아들(强壹) 하나를 낳았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한동안 나는 허탈에 빠졌다. 나의 학위 논문은 국내외에서 인정을 받았으므로 더 좋은 연구를 하고 싶었는데 좋은 구상이 떠오르지 않거니와 실험 시설도 나의 뜻에 따라주지 않았다.

 

▲ 네 아이들의 대학 졸업식 모습

 

팔봉과수원에 다니면서 여러 가지 과수목의 생육, 개화, 결실 등을 열심히 관찰하며 소일하였다. 그러나 나의 본분은 연구 생활에 있음을 깨닫고 식물의 생산성을 연구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이 과제는 많은 연구 시설이 없어도 야외에서 측정한 자료를 이용하여 수학적으로 처리하면 논문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시작한 일은 삼림의 생산성이었다. 유성에 있는 충남임업시험장(현 유성컨트리클럽)에 가서 송 장장에게 리기다소나무와 리기데타소나무의 벌목을 허가 받았다. 사유림이나 국유림에서 나무를 베기는 무척 어려웠는데 뜻밖에도 시험장에서 나무를 베게 하였다.

 

학생들과 유성행이 시작되었다. 계산된 수치에 맞춰 나무를 선별하고 톱으로 베고 절단한 토막을 저울로 달고 잎을 따고 가지를 가지런히 묶어 무게를 달고, 수분측정용 부(副)샘플을 모으는 등 하루 종일 몸부림쳤다. 시험장 내에는 사먹을 음식이 없으므로 매번 학생들의 도시락을 집에서 싸갔다. 이론식에 맞을지 안 맞을지도 모르는 모험의 노동을 며칠간 계속하였다. 나무들의 생산성은 상대생장식에 깨끗하게 맞아떨어졌다. 산판에서 진리를 찾은 것이다. 이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무렵에 일본의 생태학자 기라(吉良龍夫) 교수와 교류하고 있었다. 기라 교수도 삼림의 생산성을 연구하는 중이어서 많은 문헌을 보내 주었다. 한국에서는 외국에 돈을 보내 책을 사는 길이 막혀 있는 때였는데 나는 기라 교수의 저서 ‘식물생태학(하권)’을 읽고 싶었지만 구입하지 못하여 망설이던 차에 완도산 김을 보내주고 책을 받았다. 본래 삼림의 생산성에 상대생장식을 적용한 이는 미국의 키트라제(Kittrage) 교수였는데 그 원리를 응용하는 연구를 하였던 것이다.

 

한번 성공한 상대생장식의 도출은 다른 삼림에도 적용할 수 있어서 미개척분야인 삼림의 생산성에 대한 자료를 많이 수집할 수 있었다. 임학에서는 나보다 15년쯤 뒤에 상대생장식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주로 목재 생산에만 적용할 뿐 잎과 가지를 포함한 단위면적당의 유기물질 생산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무렵에 문교부의 학술연구조성비가 지급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는 한발 빠르게 받았지만 공주사대에서는 1968년에 처음으로 받게 되었다. 공주사대에 배정된 문교부 연구비를 나와 이원구 교수가 ‘뽕나무 품종의 생산성 비교 연구’로 받았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뽕나무를 대대적으로 장려하였고 충남 연기군에 넓은 뽕밭이 있었으며 공주읍 내에 잠종장(蠶種場)이 있어 자료를 수집하기가 매우 편리하였다.

 

뽕나무에도 삼림과 같이 상대생장식을 적용하여 생산성을 계산할 수 있었다. 이때 이원구 교수는 뽕나무의 해충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공주사범을 떠나다 (제72회) - 제12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1

 

65년부터 72년까지 국제생물학계획(International Biological Program, IBP)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 사업은 지구상에서 인구가 증가하는데 따른 식량생산, 곧 태양에너지가 1년간에 얼마나 유기물로 바뀌는가에 초점이 맞춰져서 인류와 식물의 생산성 등에 대하여 전 지구적으로 자료를 수집하는 연구 계획이었다. 인삼의 물질생산이나 삼림, 뽕나무, 기타 초본의 생산성 연구는 IBP사업과 밀접하게 관계되었으므로 나의 연구는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공주사대의 김영돈 학장은 유일하게 학위를 받은 나의 대우에 대하여 고심하는 듯 하였다. 문교부의 연구비를 배정하는 호의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한때 도서관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하였지만 나의 생각은 연구 활동에 있었고, 젊어서 행정에 발을 들여놓으면 연구 생활에 지장이 있다고 판단되기에 거절하였다.

 

68년에 공주사대에서 과학교육연구소를 비법정으로 설립하였을 때 학장이 그 소장을 맡고 내가 부소장을 맡아주면 법정으로 된 다음에 소장을 맡으라고 제안하였다. 나는 그것을 수락하고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논문집 편찬, 학생논문공모 및 시상 등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과학교육연구소가 법정으로 되기 전에 나는 공주를 떠났다.

 

공주에 틀어박혀 연구에 열중하다 보니 학회나 그 밖의 회의가 없는 한 서울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이따금 이민재 교수를 만나면 당신 가까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말씀을 하셨다. 공주에 온 지가 10년이 넘었으므로 나도 환경을 바꿔보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았다.

 

전북대학교의 황정규 교수가 구체적으로 접근하였지만 농과대학이어서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이덕봉, 이영노 교수가 간곡히 서울로 자리를 옮기라고 권고하셨다. 이덕봉 교수님의 편지가 보관되어 있어 옮겨본다.

 

『김준호 박사(金俊鎬博士). (전략). 귀하(貴下)의 진출(進出)을 위하여 청량리 서울농업대학장(農業大學長)에게 의뢰하였더니 교수과목(敎授科目)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을 대답하지 못하고 곧 알아보마고 하였으니 현재 그 곳에서 담당(擔當)하고 있는 과목을 알려주시오. 그리고 이력서(履歷書) 2통도 보내주시오. 내가 인삼(人蔘)을 직접 재배실험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리 아시오. 이번에 가능여부(可能與否)는 미지수이나 신실(信實)한 이가 되어서 한번 부탁하면 잊지않고 두었다가 1~2년 후에라도 자리가 있으면 채용採用해 주는 사람입니다. 1967. 2. 16. 이덕봉(李德鳳).』   

 

▲ 공주사범 시절 가족과 함께

 

이영노 박사님도 나의 서울 진출을 꾸준히 추진해 주셨다.

 

『김준호 박사. (전략). 김 박사가 가까이 없는 것이 역시 섭섭하군요. ○○대학의 학과장에게 전화하였더니 자기는 좋은데 총장이 어떨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기다려 봅시다. (후략). 이영노.』

또 서울대 생약연구소에 조교수 자리가 비어있으니 올 의향이 없느냐던가 ○○교수가 다른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니 그 자리를 교섭해 보겠다던가 하는 편지를 꾸준히 주셨다. 한편 나의 학문을 높게 평가해 주신 한창렬(韓昶烈) 박사는 한 학기에 한 번씩 편지를 내주면 내가 잊지 않고 서울에서 자리를 마련해 보겠노라고 언질을 주셨다. 그러나 나의 취향에 맞는 자리는 잡히지 않았다. 

 

68년 초여름에 정영호 교수가 자료 수집 차 공주사대에 와서 나에게"서울대에 교양과정부가 생겼고 그곳에 생물학 교수를 추천해야 하는데 소장 교수는 많지만 중견 교수를 추천해야 하니 이민재 교수를 만나 보라"는 요지의 말씀을 하신다. 나는 교양과정부가 어떤 기관인지 잘 모르고 있었다.

 

여름 방학 때 이민재 교수를 방문하였다. 교양과정부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한 다음 ‘점진적으로 교수를 늘려가고 있으므로 생물학 교수도 추천해야할 입장인 데 교양과정부에서 가르친 우수한 학생들이 식물학과나 동물학과에 지원하게 하려면 똑똑한 교수를 보내야 하므로 고심하고 있네. 중견 교수인 김준호 군과 이영록 군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고대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 군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네.’라고 말씀하시며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교양과정부에서 언제 생물학 교수를 요청할지 모르니 이 교수님도 결론을 내리지 못함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나는 약 1년간 마음이 들뜬 상태에서 그러나 외모로는 차분하게 연구에 주력하였다. 문리대 식물학과 교수들은 무척 나에게 협조적이었다. 68년 봄에 엄규백 교수(현 양정고교 교장)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김 선생님. (전략). 4월초에 교양과정부에 15명의 T/O가 새로 나올 예정이든 것이 7명 밖께 나오지 않아서 이번 기회는 부득기(不得己) 되지 못하겠고 래(來) 9월 초에 있을 새 T/O가 나올 때 생물담당교수의 T/O가 있겠다는 부장(部長)님의 말씀입니다. (중략). 내 예상으로 9월에 아마 가능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략).  1968. 4. 25. 엄규백.』 

1학기말에 교양과정부에서 서류를 내라는 전갈이 왔다. 69년 8월 1일 자로 공주사대에는 사의를 표명했고 교양과정부에서는 시간 강사 발령을 받았다.

 

국립대학 사이의 할애 요청과 동의가 완결될 때까지의 과도기에 시간 강사 발령으로 강의를 하고, 정식 발령은 할애동의를 받은 후에 내는 순서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삼선개헌과 4․27 대통령선거 반대투쟁에 얽혀서 1학기에 이어 2학기에도 10월 말까지 강의가 중단되어 시간 강사의 역할을 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69년 10월 31일부의 공문을 공주에서 받았다.

 

『1. 이미 통지해드린 바와 같이 제2학기 수업이 11월 3일(월요일)부터 시작됩니다. 2. 장기 휴교로 말미암은 제 문제와 제한된 수업일수를 고려하셔서, 특히 결강과 휴강이 없도록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끝.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장.』

 

따라서 나는 시간 강사의 직위가 끝나고 조교수 전보 발령을 받게 되었다.



교양과정부 (제73회) - 제12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1

 

공주사대 학장은 서울대 총장의 할애요청서에 동의함으로써 공주사대를 정식으로 떠나게 되었다. 공주사대 김영돈 학장과 생물과 교수들은 한편 서운해 하면서도 즐거운 낯으로 나를 놓아주었다.

 

내가 떠남으로서 공주사대의 우수한 졸업생인 박영철 교수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고, 또 식물생리학 강의를 김종균 선생이 출강하게 되었다.

 

내가 교양과정부에 들어갈 때 생물학계에서 흘려버릴 수 없는 에피소드를 남겼다. 교양과정부의 민석홍 부장이 생물학 교수를 요청했을 때 이민재 교수는 나를, 강영선 교수는 이정주 박사를 추천하였다. T.O.가 하나 밖에 없으므로 두 교수님이 담판을 하는 자리에서 강 교수님께서 ‘김준호 군이 추천되었다면 당연히 내가 양보해야지.’라고 흔쾌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과거부터 이 교수와 강 교수의 미묘하게 얽힌 관계는 세상에 잘 알려져 있었는데 결정적인 찰나에 합리성이 발휘되었다는 후문이었다. 이정주 박사는 이듬해부터 고양과정부에서 나와 함께 근무하였다.

 

나는 공주에서 57년 4월 2일부터 69년 10월 31일까지 12년 6개월, 날수로 치면 4,592일 간을 젊은 정열을 쏟으며 교육하고 연구하며,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네 자녀를 건강하게 길렀다. 29세에 공주사대에서 근무하기 시작하여 42세에 떠나는 동안 참으로 열심히 교육자를 양성하였고 열심히 연구 활동을 하여 학문적으로 성장하였다. 공주에 갈 때 연구 활동이 어려우리라는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공주의 여건이 시간을 절약하게 하여 많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공주사대 졸업생들은 다른 사범대 출신의 모범이 되어 한국의 중등 교육을 크게 발전시키고 있다. 각도의 장학사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공주사대 졸업생들을 칭찬하고 있다. 그리고 공주사대 출신들은 인성이 매우 좋아서 사회에 진출한 뒤에도 꾸준히 나를 따라주어 교류가 계속되고 있다. 공주에서 수많은 교육자를 기른 것에 보람을 느낀다.

 

▲ 공주사범대 시절로 35세 때다. / 나는 29세에서 42세까지 공주사범대에서 근무했다.

 

나는 1969년 11월 3일에 서울대 교양과정부에 취임하여 1975년 2월 28일에 자연과학대학으로 옮겼다. 5년여 동안 교양교육을 담당했던 교양과정부는 공과대학(서울 성북구 공릉동 소재) 구내의 신축교사에 있었으며, 민석홍 부장, 정명환 교무과장 그리고 윤재환 학생과장이 행정에 임했고, 50명 가량의 30대 내지 40대 젊은 교수들이 있었다. 자연과학계 교수들은 공대의 별관 2층을 연구실로 이용하였다.

 

교양과정부는 학생들의 교양교육을 강화하고 전공과목 연구에 필요한 기초학문을 폭넓은 안목으로 갖추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56년에 본부 관할로 문리대 내에 교양과가 설립되어 문리대․법대․음대․미대․수의대의 신입생이 교양교육을 받고, 사범대․공대․농대의 신입생은 각기 대학별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이 교양과는 예산과 시설이 없어 59년 초에 해체되고 말았다.

 

그 후 교양교육의 중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67년에 교양과정부가 법제 기구로 부활되어, 68년부터 공대․문리대․법대․상대의 신입생 1,410명을 교육하고, 70년에 미대․음대․의예과․치의예과 및 사범대 체육과를 제외한 신입생 전원이 수용되어 학생 수가 2,600명에 달하여 단과대학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다.

 

교양과정부의 편성은 문과 A, B, C…와 이과 A, B, C…반으로 되어 있고 각 반은 40~50명씩으로 구성되었다. 학생 수가 많아져서 문과와 이과가 각각 25반 이상으로 증가되는 해도 있었다. 학생은 고등학교처럼 짜여진 시간표에 따라 기초과목만을 수강하였다. 개설과목은 국어, 제1외국어, 제2외국어, 철학개론, 문화사, 자연과학개론 및 체육이 필수였고, 이밖에 전공과목이 부과되며, 69년부터 남학생에 교련이 추가되고, 다시 70년부터 국민윤리가 필수과목으로 추가되었다. 이들 필수과목 이외에 인문과학계, 자연과학계, 및 사회과학계에서 각각 한 과목씩의 선택과목을 이수하게 하였다.

 

교양과목의 이수학점은 67년 이후 42학점 이상, 71년 이후 48학점 이상을 취득하였다. 72년부터 학점을 세분화하여 A학점의 경우 A+, A◦, A-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교양과정부에서는 학업 성적이 저조한 학생을 엄격히 경고 조치하였다. 즉 직전 학기의 성적 평점 평균이 2.0에 미달하거나 3과목 이상 또는 6학점 이상이 F인 학생에게는 학사경고를 내렸다. 학사경고를 세 번 받거나 한 학기 성적평균이 1.3 이하인 학생은 제적의 중징계를 내렸다.

학사경고를 받은 학생에게는 지도교수 또는 부장이 수강 학점 수, 결석 횟수 및 과외활동에 제한을 가하였다. 그러나 학사경고를 받은 학기의 성적이 평균 2.0 이상이고 전체 이수과목의 성적이 2.0 이상인 학생에게는 학사경고를 해제하였다. 학기말이 되면 내가 담당한 학급에서 두세 명의 학사경고를 받는 학생이 생겨 나를 곤혹스럽게 하였다. 한편 교양과정부의 업무는 교육 이외에 신입생의 등록․휴학․복학․제적․복적 등도 담당하였다.

 

1972년부터 강의의 출석 관리가 더욱 엄격하게 되었다. 출석이 종전에는 3분의 2 이상이면 되었는데 72년부터 4분의 3 이하인 학생은 학점 취득 및 성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출석 상황을 학기말에 제출하였으므로 강의시간마다 출석을 불러야 했다.

 

교양과정부에서는 강의를 열심히 하는데도 학생들의 성적이 매우 좋지 않았다. 왜냐 하면 엄격하게 상대평가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한 학급 전 학생의 시험성적이 아무리 좋더라도 교무과에서 배포한「성적등급속산표」에 따라 A학점은 전 학생 수의 20%, B는 30%, C는 40%, D는 10%의 비율을 엄격히 적용하였다. 그리고 F학점에게는 재시험을 부과하였는데 학기말마다 10%~30%의 학생이 재시험을 치루었다.



서울대 첫 출근 날의 소매치기 (제74회) - 제12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1

 

74년도에는 인문, 사회, 자연 및 교육 계열로 계열별 모집을 하였으므로 자연계열 학생들은 1년 뒤에 인기 학과에만 집중되고 비 인기 학과는 정원 미달될 것이 예상되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이 생물학에 흥미를 가지도록 힘을 기울였다.

 

나와 이정주 교수는 5월의 어느 일요일에 문리대 동물학과와 식물학과 교수를 초빙하는 한편 자연계열 학생을 모두 버스에 태워 광릉에 갔었다. 교수들에게 생물학의 밝은 전망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도록 부탁하였는데, 이때 강영선 교수님이 강의하셨다. 70년대에 있어서 생물학의 비인기성을 반영한 듯 75년 봄에 각 전공학과에 지망한 학생 수는 나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교양과정부에 근무하는 5년 동안 시국 불안이 계속되었다. 69년에 삼선개헌안이 일기 시작하였고, 71년 10월에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어 10개 대학에 무장군인이 주둔하면서 15일간 대학이 휴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7일 국회에서 국가보안법을 변칙적으로 통과시킨다.

 

이때부터 유신체제의 음모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여 곧 통일이 되는가 싶더니 박정희 정권은 화해분위기가 아닌 긴장분위기를 만들어 곧 북한에서 남침할 것 같이 선전한다. 이 무렵에 중앙대학의 모 교수가 총통제 헌법의 기초를 만든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72년 10월 17일 박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동시에 국회를 해산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 이처럼 정치활동과 학생활동을 봉쇄한 상황에서 같은 해 10월 27일 유신헌법을 공포하고, 11월 27일 국민투표를 거쳐 개정헌법으로 확정한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극대화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이 체육관에 모여 간접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역사상 유례없는 악법이었다.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은 74년 1월 9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고, 4월 9일까지 4호를 선포하여 모든 반대 비판 세력을 억압한다. 이렇게 하는 동안 휴교와 개학이 교대되었다. 정부는「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구실로 정당화하였지만 개학하면 독재에 항거하는 맹렬한 학생 데모가 계속되었다.

 

▲ 74년 10월 17일의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 해산, 대학 휴교령 기사 (매일경제신문 1974. 10. 18.)

 

교수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학생의 데모 제지를 설득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였다. 이 무렵 교양과정부 학생 중에는 데모 주동으로 퇴학 맞은 학생이 많았고 현재 그들 중에서 국회의원이나 신문사 주필로 활약하는 인사들이 있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잠시 교양과정부에 취임하는 날의 일화로 돌려본다. 삼선개헌안 국민투표(1969. 10. 17.)로 오랫동안 휴강하던 교양과정부의 강의를 시작한다는 소식을 받고 상경한 나는 하숙집 (용두 1동 712-92 서성원 씨 댁)을 정하였다. 교양과정부에서는 신임 교수의 인사 소개 등의 절차 없이 곧바로 강의실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첫째 날 강의는 1교시에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하여 아침 일찍 하숙집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와 보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몇 대의 버스를 놓친 뒤 가까스로 버스에 매달린다. 청량리에서 밖을 내다보니 서울대 학생 버스 정류장에서 민석홍 부장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학생들의 승차 지도를 하고 있었다. 모처럼만의 개학날이기에 일반 버스나 학생 버스가 모두 만원이었다.

 

겨우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내려 강의실로 가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양복저고리를 들춰보니 안쪽 호주머니가 몽땅 날아가 버렸다. 지갑 속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다. 나의 기분은 몹시 흔들렸지만 정신을 가다듬었다. 서울대에 근무하는 첫날 첫교시에 흔들리는 기분으로 강의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첫날에 소매치기 당한 액운이 앞으로 서울대 생활의 액땜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교양과정부에서는 한번 교재 준비를 해놓으면 똑같은 내용을 3․4번 되풀이하여 강의하였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전공분야 강의나 상급 학년의 논문 지도를 안 하며, 지도반 학생 중에서 지도를 받으려는 학생도 없고, 높은 수준의 실험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대학교수로서는 참으로 답답한 생활이었다. 나는 공대에 있는 대형 컴퓨터를 이용하여 컴퓨터 교육을 받거나 장년의 나이에 스케이트를 타거나 하면서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교양과정부에 취임한 뒤 문리대 식물학과 실험실 내에 앉을 자리를 마련하였다. 그것은 이민재 교수의 호의 때문이었다. 며칠 나가서 앉아 책을 보고 있는데 출입하는 젊은 사람들의 눈짓이 이상해짐을 느꼈다. 그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나에 대한 눈총임을 짐작하였다. 나는 석사논문을 그 실험실에서 썼던 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앉아 있었는데 이 교수님의 호의가 젊은 사람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은 듯 하였다. 나는 책을 챙겨 들고 실험실을 나와 버렸다.

 

훨씬 뒤에 들리는 말인즉 조교로 있던 모 씨가 교양과정부로 가기 원했는데 좌절되고 엉뚱하게 내가 들어가게 되니 화풀이로 나를 보이코트하자 하여 젊은 사람들을 촐싹였다는 것이다. 그 조교는 아직 전임강사도 못 되고 나는 정교수로 있다가 왔는데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다. 이민재 교수가 그 사실을 알고 조교를 노발대발 꾸짖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연구 활동의 좌절을 톡톡히 맛보았다.



학자 모리배 (제75회) - 제12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1

 

1970년 가을에는 경희대 연습림 원장인 정현배 교수(별세)의 양해를 얻어 신갈나무림의 생산성을 조사하였다.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연습림에 가는 버스는 하루에 두 번 밖에 없을 때였다. 과히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왕복 길에 버스를 타려고 무척 바쁘게 서둘렀다. 이때에 교양과정부 학생인 이종섭 군(현 서울대 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부근에서 톱을 사서 신갈나무를 베고 잎을 딴 다음 이 군과 나는 저울로 달아서 기록하였다. 나무토막과 가지와 잎의 샘플을 모아서 륙색에 넣어 버스정류장까지 지고 내려왔다. 이 군은 힘이 세어서 나보다 훨씬 많은 짐을 질 수 있었다.

 

일이 하루에 끝나지 않으면 연습림의 일꾼 집에서 머물렀는데 방바닥에 수확한 옥수수를 빽빽이 깔아놓은 틈새에서 잠을 자야했다. 이 무렵에는 실험비로 겨우 건열기(oven) 한 대를 샀기 때문에 샘플을 말릴 수 있었다.

 

71년에는 농진청 원예시험장에 광합성 측정 장치가 완비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나와 친한 박상근 과장이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 기회에 광합성 실험을 하여 식물의 물질생산 연구를 발전시키려고 수원 행을 시작하였다. 집에서 수원까지는 두 시간이 걸렸고 실험 준비를 끝내면 실제로 실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2년 동안 원예시험장 출입을 하였지만, 박 과장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논문을 쓸 만큼의 결과를 얻지 못하고 말았다. 자신의 실험 기구가 아니고 더구나 먼 거리에 있는 시설을 이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때 경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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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72년에는 과천 인삼시험장에 다녔고, 원예시험장과 인삼시험장의 연구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한 일도 있다. 한편, 72년~76년에는 보건대학원이 주관하여 인류생태학연구회를 결성하여 매월 제3목요일에 모여서 문헌 교환과 발표회를 가졌다. 나는 이 연구회에서 특강을, 의대 4학년 학생들에게 생태학의 기초를 강의한 기억이 난다. 이 연구회에 참여한 교수는 김계숙(철학), 기용숙(미생물학), 한상복(인류학), 최규완(유전학), 김정근(인구학), 정경균(보건사회학), 정문식(환경화학), 김준호(생태학) 등이었다.

72년 말에 연구 교수를 신청하였더니 뜻밖에도 승인이 났다. 연구 교수의 심사위원으로 들어간 유경노 교수(별세)가 나를 강력히 추천하셨다는 후문이었다. 유 교수는”김준호 교수는 서울대에 3년간 근무했지만 공주사대에서 12년이나 근무하여 15년 경력을 쌓았으니 연구 교수가 될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유 교수님 덕분에 73년도에는 1년간 강의 부담이 없었다.

 

▲ 스케이트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왼쪽부터 필자, 막내딸(주원), 장녀(혜원) (1972년. 서울대 공대 연못에서)

 

그런데 약 20년 뒤 퇴임하기 직전 해인 94년에 내가 연구교수를 신청하였는데 73년도의 기록이 남아 있어 경쟁 교수에게 양보해야 하였다. 사실 73년도에는 젊었을 뿐만 아니라 과히 바쁘지 않았지만 94년도에는 정년을 앞두고 대학원 학생 지도 등 너무 바빴었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려면 73년보다 94년도에 연구교수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섣부르게 서두름이 아니함만 못하였던 것이다.

 

다행히도 연구 교수가 되기 전에 문교부의 학술교류지원금(73년도)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는 연구비배정 방법이 제도화되지 않았을 때라서 연구 분야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위원회와 수령자를 정하는 위원회가 따로 열렸던 것 같다. 우선 순위 위원회에서 식물의 물질생산이 뽑혔고, 수령자의 결정에서 내가 선정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동안에 이러한 일이 진행되어 100만 원의 연구비가 내정되었다. 또 연구 교수가 되어 강의 부담이 없으므로 연구에 전력투구하려니 하고 가슴 벅차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학계의 점잖지 못한 치부가 드러났다. 문교부의 위원회에 참석했던 L교수가 모 인사를 연구진에 넣어 달라고 청했고, 또 다른 I교수는 ‘나를 연구진에 넣어 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연구비의 몇 %를 내놓아라’고 요구하였다. 아직도 젊고 때 묻지 않은 나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행위들이었다. 나는 ‘수령한 연구비를 문교부에 반환하고 당신들의 언행을 학계에 공표 하겠다’고 맞섰다. 이 무렵에는 연구비 받기가 무척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학자 모리배가 실존하고 있어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이다.

 

이 연구비로 수행한 연구는「한국의 지역에 따른 육상식물의 생산력 비교 연구: 해바라기 식물의 최고 생산율 비교」였다. 미리 한국 내에 7개 실험지를 정하고 일본에서「manchurian」이라는 해바라기 씨를 수입하여 분배하였다. 그리고 실험방법을 통일하기 위하여 뉴스 레터를 발간한 다음 연구원들이 모여 타합회를 열었다.

연구진은 강상준(춘천), 김준호․최형섭․안진흥(서울), 오지영(청주), 길봉섭․서용택(전주), 김두영(군산), 진희성(광주), 송승달(대구) 교수 등 열 명이었다. 이 연구로 전국의 7 개 지역에 대한 식물의 물질생산과 생육분석 그리고 태양 에너지 이용효율을 비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해 여름에 지방의 6개 지역을 순회하며 연구자들과 당면 문제를 토의하였다. 100만 원의 연구비는 연구자들에게 실비만을 지급하였으므로 남아서 이듬해에 같은 연구를 계속하는데 투입하였다. 연구원들이 실비만 받고 열심히 실험해 주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것이 서울대에 온 후의 첫 연구이고 정열을 쏟았던 연구였다.

72년도부터 교양과정부 생물과에 유급조교 T.O.가 배당되었다. 문리대 식물학과에서 윤권상 씨(현 강원대 교수)를 추천 받았다. 조교의 임무는 실험 조교가 아닌 교육 조교였으므로 그는 맥이 풀렸을 것이다. 이때의 유급 조교는 임기가 단 1년이었으므로 윤 씨는 1년 뒤에 도미하였다. 약 7년 뒤에 내가 미국에 체류할 때 그와 같은 대학에 있었으므로 많은 신세를 졌고 가족들과 함께 긴 여행을 하여 현재도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고 있다.

 

73년도에는 안진흥 씨(현 포항공대 교수)가 유급조교로 와서 생산성 연구와 그 밖의 학사 업무를 도와주었다. 나는 교양과정부에서 만난 두 분의 조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훌륭한 연구업적을 쌓은 학자로 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정착하기 (제76회) - 제12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1

 

이 무렵 C교수와 나 사이에 미묘한 관계가 생겼다. 안 조교는 대학원에서 C교수의 지도를 받았고, 식물학과에 조교를 요청하였더니 C교수가 안 조교를 추천하였다. 나는 민석홍 부장과 사석에서 C교수의 제자가 조교로 오게 되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며칠 뒤에 민 부장과 C교수가 만난 자리에서 조교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다시 며칠 뒤에 C교수를 만난 나는 그 분의 험악한 폭언을 들어야 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폭언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요지는 민 부장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C교수의 제자를 조교로 채용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찌 지도교수의 성함을 밝힐 수 없단 말인지 나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C교수와의 첫 번째 껄끄로운 관계였다. 

    

생산력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 뜻밖에도 나에게 병마(病魔)가 찾아왔다. 오른쪽 얼굴에 안면마비(顔面痲痺)가 생긴 것이다. 아침에 양치질하고 조반을 먹는 데 입의 감각이 약간 이상하고 출근할 때 눈의 감각도 이상하였다. 연구실에 나가서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놀랍게도 비대칭이었다. 나는 안진흥 조교를 불러서 내 얼굴을 보아달라고 말했다. 역시 비대칭이라고 말한다. 얼굴의 한편 근육이 펴진 상태이고 오른쪽 눈이 뜬 채이며 주름이 모두 없어져 있다. 통증이 없으니 자각 증상은 전혀 없었다.

 

나는 바로 서울대병원 신경과 과장인 명호진 교수의 특진을 받았다. 2주일 간 입원하고 절대 안정하라는 진단이 내렸다. 입원을 하는 한편 한약을 달여 먹고, 남몰래 병원을 빠져 나와 침을 맞는 등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격으로 서둘렀다.

 

추진하던 생산력 연구의 연구원 타합회를 소집할 날이 다가왔다. 한 쪽으로 삐틀어진 얼굴을 반창고로 잡아매고 병원을 빠져 나와 회의를 주재하였다. 부끄러웠지만 나는 책임을 다 하여야 했던 것이다. 2주일 후 퇴원할 때에는 얼굴의 힘살에 다소 탄력이 생기고 눈도 감겨지기 시작했다. 안면마비는 약 두 달 뒤에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고, 완쾌되기까지는 2년이나 걸렸다.

 

안면마비가 생기기 직전에 오른쪽 귀 뒤쪽에 몹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을 무릅쓰고 소사연초시험장(장장 허련 박사)에 가서 특강을 하였고, 발병하기 전날 밤에는 통증으로 잠을 설쳤다. 안면마비는 귀 뒤쪽의 삼차신경부위를 차게 하거나(다듬잇돌을 베고 자면 걸리는 수가 있음) 감기에 걸리거나 바이러스 감염을 받았을 때 생긴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바이러스 침입이라고 나 스스로 진단해 보았다. 이 무렵의 내 체중은 53 ㎏까지 떨어져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으므로 바이러스가 침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치의인 명 박사는 원인을 밝히지 않았다.

 

공주에서 서울로 이사 오던 날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70년 2월 25일에 공주에서 트럭에 짐을 실었다. 아침부터 보슬비가 내린다. 나는 트럭에 타고 가족들은 버스를 태운다. 김영돈 학장, 생물과 교수들 그리고 부고 선생님들이 환송을 나왔다. 김 학장이 별안간 봉투 한 장을 아내의 호주머니에 구겨 넣어 그 분의 끈끈한 정을 느끼게 한다.

 

트럭이 면목동에 도착하여 골목길에 들어서려는데 빗길이 미끄러워서 이사 온 집에 접근할 수가 없다. 면목국교 앞길을 택했지만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득불 임시응변으로 일꾼을 사고 가족과 처족들이 200미터 거리에서 짐을 나른다.

 

이사 오는 날 좁은 초가집에 들어온 가족들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게딱지만한 좁은 방에 네 아이에게 거처하라니 억지였고, 초라한 초가집에서 살려니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6개월만 꾹 참으면 문화주택을 짓겠다고 용기를 불어넣는다.

 

▲ 0970년디까지만 해도 서울 변두리에는 초가가 많았다 / 사징은 강남 개발 전인 70년대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초가다

 

마흔 살을 넘긴 나는 문화주택에서 살기가 오랫동안의 꿈이었다. 공주에서 떠나기 직전에 공주사대 교수들 사이에 주택조합 결성 이야기가 무성하게 오갔다. 그러나 서울로 오게 되었으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였다.

 

교양과정부에 부임한 69년 가을에는 서울로 이사올 계획을 세웠다. 강의가 없는 날은 통근버스의 노선이 닿는 휘경동, 면목동 등을 돌아다니며 집을 물색하였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돈에 맞는 집을 찾았으나 문화주택의 꿈은 꿀 수가 없었다. 공주에서는 400평 대지의 큰집에서 아이들이 불편 없이 자랐는데 서울의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였다.

 

어느 날 강의가 끝난 뒤 면목동 어귀에서 복덕방에 들렀다. 주인 영감의 말. ‘선생은 면목동에서 살려는 거요. 집장사를 하려는 거요.’ “서울대학교 공대에 가까운 면목동에서 살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보여 드릴만한 물건이 하나 있소’ 하며 안내한 곳이 허름한 경기도식 ㄷ자 형 초가집이었다.

 

‘선생은 이 초가집을 보지 말고 대지를 보시오. 99평인데 남향이니 초가집을 헐어내고 양옥을 지으면 아주 멋이 있을거요.’라고 설명한다. 대지조건에 경험이 없는 나는 가까이에 사는 처족들의 자문을 받는다. 대지가 좋다는 모두의 의견이다. 6개월간 초가집에서 사는 조건으로 아내에게 초가를 보여주고 동의를 얻는다.

 

용기를 내어 대지 매매 계약을 한다. 대지를 구입한 명세는 다음과 같다. 1969년 11월 29일: 계약금 5만원, 같은 날: 중도금 50만 원, 12월 19일: 잔금 50만 원, 이밖에 소개비 8천 원, 측량비 2,310원, 등본열람비 1천 2백 원, 취득세 1만 4천 5백 원, 토지등본비 6백 원, 잡비 5천 5백 원. 이렇게 해서 18년간 살았던 면목동 1287번지(현재 나의 본적지로 되어 있음)의 기초를 닦았다.



문화주택의 꿈 (77회) - 제12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1

 

면목동은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에 양주군 구리면에 속하며 긴 역사를 간직한 농촌 마을이었다. 북쪽을 200미터 높이의 용마산과 아차산이 가로막고 있어 안온하게 형성된 자연 촌락이다. 내가 이사 올 무렵에는 음지마을과 양지마을을 제외하고 주변 일대가 논․밭․과수원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사 온 곳은 양지마을이었는데 여기에는 대대로 살아온 터줏대감들이 많아서 뜨내기로 들어 온 사람이 뿌리 내리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양지마을에는 땅을 깊이 파고 볏짚을 덮은 움집이 3개 있었다. 움집은 장년, 60세 이하 및 60세 이상의 연령층이 각각 하나씩 차지하여 겨울을 나는 데 이용되었다. 이 마을에 살려고 이사 온 나로서는 동네의 터줏대감들과 친할 필요가 있었다. 마을 어른들과 의논한 끝에 술을 내기로 타합한다.

 

정해진 날에 안주와 막걸리를 마련하여 마을의 젊은이들을 시켜 각 움집으로 날랐다. 그리고 나는 움집을 돌면서 큰절을 하며 자기 소개를 함으로써 친숙하게 되었다. 이러한 소박한 교제가 계기가 되어 나중에 집을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관청의 어려운 일까지도 술술 풀리는 덕을 톡톡히 보았다.

 

70년대 초의 면목동은 큰길도 골목길도 모두 비포장이었다. 비가 오거나 언 흙이 녹으면 길이 팥죽처럼 질어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마을이었다. 출근할 때 장화를 신고 구두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아내가 첫 출근하던 날 그녀의 장화를 학교 교문에서 받아온 기억이 난다.

 

70년 3월 초순에 가옥 설계를 신진건축연구소에 의뢰하고 동시에 시멘트 벽돌을 찍기 시작하였다. 넓은 대지에 여유가 있어서 모래와 시멘트를 쌓아놓고 벽돌을 찍기에 충분하였다. 건축업을 하는 먼 친척(김원종)에게 벽돌 찍기를 부탁하였다. 5월 초순까지 약 2만 장의 벽돌을 찍었고, 수도가 없는 마을이라 우물을 파서 작두샘을 만들었다. 목수를 물색했지만 마침 건축 붐이 일 때라 좋은 사람이 없었다. 설계도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떠돌이 목수와 손을 잡는다.

 

5월 초순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가옥의 위치를 남향으로 앉히려니까 초가집의 반을 헐어내야 했다. 내가 침실로 쓰던 안방과 부엌을 헐어낸다. 수 십 년 묵은 초가집의 잔해를 치우는 일도 만만치 않다. 특히 지붕의 볏짚은 2미터 두께로 쌓여서 처분하기가 어렵다. 짚 풀은 지형이 낮은 곳에 묻고 흙을 덮거나 불로 태운다. 짚 재가 날라 이웃집에 폐를 끼쳤지만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벽돌쌓기(쓰미)는 좋은 기능공을 만났지만 목수는 엉터리였다. 설계도를 읽지 못하고 잣대를 다루지 못하며 고저의 개념이 없고 수평을 못 맞추는 목수였다. 목수가 설계도를 잘못 읽어 거실의 분합문을 낮게 낮추었고 계단을 만들지 못했으며 문틀을 비틀어지게 앉혔다. 퇴근 후에 아내가 문틀의 수평을 잡아주기 일쑤였고, 내가 지시하여 잣대와 각도기에 맞추어 먹줄을 튀겨서 계단을 만들게 하였다.

 

69년 겨울 방학에 공주사대 도서관에서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견고하고 열 관리가 잘 되며 아름다운 집을 짓기 위하여 나는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래서 기초를 1.5미터 깊이로 파고 튼튼하게 다졌다. 마을 사람들이 5층 건물의 기초라고 감탄한다. 방의 난방(외풍)에 세심한 배려를 하여 바깥벽과 안벽 사이에 5센티미터 간격의 공간을 두는 2중 벽으로 쌓게 하였다. 2중 벽이 진동에 견디도록 내․외벽의 벽돌에 파상波狀으로 구부린 굵은 철사를 걸쳤다. 천장에는 가마니를 두세 켜로 얹어서 열 방출을 차단하였다. 이렇게 해서 단열재가 없던 그 무렵에 값싼 공법을 모두 동원하였다. 집의 앞면은 붉은색 미장벽돌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앞으로 2층을 올리기 위하여 계단을 미리 뚫어 놓았다(실제로 12년 뒤에 이층을 증축하였다).

 

▲ 문화주택의 꿈을 이룬 필자 부부 (1974. 5. 26)

 

건축을 시작한 이후 돈의 압박을 크게 받았다. 은행 융자금으로는 태부족이었고, 건축 공정에 맞추어 제때에 돈이 나오지 않았다. 가까운 친척들의 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친척은 처음에 돈을 꾸어 주었지만 나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자기가 집을 사야하겠다고 곧 되돌려 가는 야속한 인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방을 세 내주는 등 많은 빚을 지지 않고 건물을 완성하였다.

 

건축하는 동안에 잊혀지지 않는 긴박한 사건이 벌어졌다. 외부 공사를 끝내고 내부 공사에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다. 오전의 강의를 끝내고 오후에 은행에서 돈을 찾아오려고 집에서 나왔다. 언제나처럼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 앞에서 내렸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안호주머니를 만져보니 갈라진 채 은행통장이 잡히지 않고, 바지 주머니를 만져보니 도장이 잡히지 않는다. 나는 입에 침이 마르고 하늘이 노랗게 됨을 느꼈다. 통장의 돈을 잃으면 건축이 끝장나는 것이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되잡아 타고 은행에 도착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느껴졌다.

 

은행 문을 들어서며”내가 소매치기 당했소, 출금을 정지하시오”하며 소리쳤다. 출금계 여직원 앞에 섰을 때 대리가 통장 하나를 여직원 앞으로 턱 던지는 것이었다.”이것이 내 통장이오”하며 다시 나는 외쳤다. 그 순간 키가 후릿하게 크고 검정 안경을 낀 청년이 후닥닥 밖으로 튀쳐 나간다. 대리가”저놈이다.하며 소리쳤지만 잡을 길이 없었다. 30초만 늦었더라도 돈은 소매치기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위기를 맛 본 나는 통장과 도장을 따로 간직하기로 작심하였다.

 

내가 손수 감독해서 지은 집은 22평으로 비록 작았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문화주택이었다. 약 50평의 마당은 처음에 고저가 울퉁불퉁하였으므로 연탄재로 메워 편평하게 골랐다. 잘 가꿔진 잔디밭 가장자리에는 징검돌을 놓아 아들(광원)의 뜀박질 코스로 이용하였다. 봄에는 장미, 여름에는 백일홍, 가을에는 대추, 겨울에는 대나무가 가족들의 정서를 순화시켰다. 이 정원을 만드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관악산 기슭의 상아탑으로 (제78회) - 제12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1

 

이 무렵 나는 아이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차녀의 학급에서는 내가「한시간 교사」가 되어 강의를 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면목초교에서 장남의 교육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몇 달을 고민하다가 3개월만에 사립학교인 금성초교로 전학시키는 것으로 마매듭을 지었다. 다행히 삼녀(주원)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면목초교에서 잘 적응해 주었다.

 

서울대학교 종합화에 따라 75년 2월 하순에 공릉동의 교양과정부에서 관악산 기슭의 상아탑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이전한 대학은 교양과정부를 비롯하여 문리대․법대․사대․상대․가정대․대학원 그리고 각 전문대학원과 도서관, 박물관 등이었다. 각 대학에서 방대한 이삿짐이 운반되었지만, 많지 않은 내 짐은 생물관(20동) 214호실로 옮겨졌다.

 

관악 캠퍼스에서 내 연구실은 생물관 209호에 배당을 받았다. 생물관은 관악 캠퍼스의 중앙선의 높은 위치에 자리하여 도서관이 내려다 보였고 더구나 내 연구실은 전망이 탁 트여서 멀리 녹음이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공주사대에서도 연구실에서 읍내가 한 눈에 바라보이는 위치에서 10년간을 지냈는데 서울대에서도 20년간을 좋은 연구실에서 지냈으니 연구실 복이 있나보다.

 

실험실은 213호와 214호로 정해졌지만 공간 부족으로 사범대 김준민 교수와 함께 쓰기로 되어 있었다. 은사인 김 교수님과 한 실험실을 쓰는 것이 싫지 않았지만 그래도 불편한 데가 많았다. 그러나 한 학기 뒤에 사범대학이 약대 건물로 이사하여 나 혼자서 실험실을 운영하게 되었다.

 

종합화 된 서울대의 교양교육은 인문․사회․자연과학대학의 3개 기본 학문 대학에서 담당하였다. 따라서 교양과정부 교수들은 제각기 전공학과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문리대 교수들도 인문․사회․자연과학대학에 자원에 의하여 소속되었다. 이때 서울대 교수 중에서 897명이 재발령을 받아 교수의 전면 재조직이 이루어졌는데 나는 자연대 식물학과로, 이정주 교수는 동물학과로 재발령을 받았다.

 

종합화 되었을 때 식물학과 교수는 이민재 교수, 정영호 교수, 이인규 교수, 권영명 교수, 이광웅 교수와 나 등 모두 6명이었다. 그런데 76년 6월에 이민재 교수가 아주대 총장을 거쳐 강원대 총장으로, 89년 8월에 정영호 교수가 정년퇴임으로 떠나시고, 80년대에 홍영남 교수(80. 3.), 김상구 교수(81. 10.) 안정선 교수(85. 3.) 이종섭 교수(86. 9.)가, 90년대에 박종욱 교수(90. 9.), 최재천 교수(94. 9.), 이일하 교수(97. 9.), 이은주 교수(98. 9.)가 새로 부임하여 11 명으로 증원되었다.

 

▲ 식물학과 86년도 졸업생과 함께

 

식물학과는 1946년에 창설한 생물학과에서 59년에 식물학과와 동물학과로 분리된 학과이다. 다시 69년에 미생물학과가 신설되어 식물학, 동물학 및 미생물학의 생물 3 과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91년도에 논란 끝에 생물 3 과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동물학과가 분자생물학과로, 식물학과가 생물학과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미생물학과는 변화가 없었다. 이 과정에서 동물학과의 강만식 교수와 이정주 교수가 생물학과로, 식물학과의 이종섭 교수가 분자생물학과로 자리를 옮기고, 1년 뒤에 조완규 총장이 생물학과로 교수 재발령을 받은 뒤 92년에 문교부 장관으로 이임하였다. 그리고 유전공학연구소의 홍주봉 교수와 강봉균 교수가 생물학과 교수를 겸임하고 있어 현재 생물학과는 15명의 교수가 지원하고 있다.

 

종합화된 두 달 뒤에 긴급조치 9호가 발포되었다(75. 5.). 긴급조치 1호가 발포된 지 1년 여 동안에 9호가 발포되었으니 대통령의 무한권력이 연속해서 발동된 셈이다. 긴급조치 9호로 전시입법인 사회안전법․민방위법․방위세법․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75. 7.).

 

이때부터 대학에 교수재임용제가 실시되어 교수 신분이 일정 기간만 보증받게 되고, 분담지도 교수제가 실시되어 교수의 최우선 임무가 학생지도를 하는 데 있었다. 정국이 이처럼 비민주화로 치달으니,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학생 데모와 최루탄 발사와 정복 경찰의 대학 내 진입이 일상화 되었다. 연구실에 앉아 있어도 최루 가스로 눈물을 쏟던 시절이다.

 

교수 재임용제의 실시에 따라 부교수였던 나는 1차 임용을 76년 2월 29일부터 82년 2월 28일까지 6년간 받았다. 그런데 그 재임용 기간이 끝나기 전인 78년 5월 13일에 정교수 승진이 됨으로써 발령일부터 기산하여 2차 임용을 78년 5월 13일부터 84년 5월 12일까지 받았다. 3차 임용은 84년 9월 1일부터 90년 8월 31일까지 받았고, 4차 임용은 90년 9월 1일부터 96년 8월 31일까지 받았지만, 이 임용기간이 끝나기 전인 95년 2월 28일에 정년퇴임하였다.

 

재임용에 탈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교수직을 유지하였지만 가슴속에는 다소 불안감이 없지도 않았다. 왜냐 하면 독재에 항거하거나 강의에 불성실하거나 논문 요건이 충족하지 못한 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제79회) - 제12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1

 

80년대에도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은 거세기만 하였다. 교수들에게 분담 지도교수 제를 철저히 강요할 뿐만 아니라 82년도부터 대학 내에 학생지도위원회, 대학문화육성위원회, 학도호국단 지도위원회 등을 두어 회의를 하는 등 교수들을 괴롭혔다. 이러한 위원회에 나가 보면 학문이나 교육과는 거리가 먼 알맹이 없는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시달하고 있었다.

 

잊혀지지 않는 일의 하나는 80년 5월 17일 밤에 대학이 무장군인들에 의하여 접수될 때의 사건이다. 나는 아침 일찍 출근하지 말라는 전화를 받고 약 2주일간을 집에서 비실거렸다. 세상의 소식이 모두 끊겼지만 여대생이었던 장녀(혜원)와 차녀(정원)가 휴교로 집에 머물러 있어서 매일 커피 대접을 받는 흐뭇한 분위기 속에서 지낼 수 있었던 모처럼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2주일 뒤에 교문 수위실에 신분증을 보관하고 들어간 대학은 삭막하기만 하였다. 총장은 힘을 못쓰고 교수들은 풀이 죽어 있었다. 내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문형태 군이 17일 밤에 술 취한 무장군인들에게 맞아서 손뼈가 부러졌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 후에도 베레모를 쓴 군인들은 대학의 여기저기에서 보게 되었고, 7월에는 교수들을 모아놓고 노태우 장군이 연단에 올라와 자기들은 반드시 군에 복귀한다며 큰소리치는 강연을 들었다. 이렇게 해서 베레모들이 대학 구내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학생들은 겉면으로 조용하였다.

 

치의예과 학과장(81년 1학기)을 맡았을 때 학생 데모는 더욱 심화되었고 나는 편할 날이 없었다. 치의예과 1학년 학생이 도서관 난간에서 독재에 대항하여 자살하겠다고 소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학년 대표가 퇴학을 맞는 불상사도 있었다.

 

식물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동안(82년 2학기-84년 1학기)에도 학생 데모는 전과 다름이 없었다. 이 기간에 문제 학생에게는 담당 경찰관이 묶여지고, 문제 학생을 강제로 여행을 시키거나 휴학을 시켜서 데모에 끼이지 못하도록 하며 학생들이 잡혀가지 않도록 학부형과 연락하고, 유치장에 갇혀 있는 학생을 면회하거나 각서를 쓰고 빼내오는데 신경을 써야 했다.

 

데모가 일어나면 교수들이 대학 구내의 일정한 위치에 서 있도록 각자의 배치위치가 시달되고, 얼굴을 내밀지 않고 연구실에 머물러 있는 교수들을 뒷조사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피동적으로 데모 진압에 동원되는 교수들의 행동에 학생들은󰡐바보들의 행진󰡑이라고 비꼬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둘만 모이면 민주화 노래를 부르고 셋이 모이면 어깨동무를 하며 넷이 모이면 데모를 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선언을 고비로 하여 학생 데모는 서서히 잠재워졌다.

 

▲ 80년대 서울대 학내 시위

 

종합화된 직후 웃지 못할 이야기 한 토막. 75년 5월에 윤천주 총장이 부임하였고 이때 학장은 조완규 교수였다. 6월의 어느 날 문형태 군과 나는 방문을 열어 놓은 채 연구실 바닥에 채집해 온 식물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종 동정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와이셔cm 차림의 낯모르는 사람이 내 방에 들어 와서 우리를 바라본다. 내가󰡐당신이 누구요󰡑하는데도 상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가 조금 뒤에 말없이 나가 버린다. 나는 잡상인인 줄로만 알았다. 그 분이 윤 총장이었던 것이다. 학생 데모로 학교가 시끌벅적하던 때라 전체 교수회의가 없었으니 총장을 잡상인으로 오인한 내 죄를 다스릴 길이 없었을 것이다.

 

종합화된 뒤 일반생물학은 자연대, 가정대(일부), 의예과, 치예과 및 간호대 학생들에 부과하였으므로 학급 수가 많았다. 그래서 생물 3 과에서 주로 담당하고 사대 생물교육과에서 일부 담당하였다.

 

나는 75년~81년 사이에 생물학 및 실험을 식물학과, 치의예과, 생약학과, 농학계 및 자연계 학생을 위하여 강의하였다. 이 강의에서 특히 생각나는 것은 75년 1학기에 담당한 생물학 및 실험의 수강생이 겨우 7 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식물학과 2학년 진입생이 전부 3 명밖에 안되었다.  예상했던 대로 74년도에 교양과정부가 계열별 모집을 하였으므로 75년도 진입생이 비인기 학과인 식물학과에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오직 식물학과에 진입하겠다고 굳은 의지를 표명한 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바로 이영숙 양이었다. 그녀는 비인기 학과인 식물학과에 진입하여 석사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미국에서 공부한 뒤 현재 포항공대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이영숙 교수의 당당한 모습은 인기 학과를 졸업하고도 비실비실하는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86년 2학기에 교양강좌로 인문․사회계열 학생을 위하여「과학과 환경」을 주광열 교수(별세)와 분담하여 강의하였는데 168명 앞에서 마이크 없이 강의하려니 무척 힘이 들었다. 강의 시간을 아끼느라고 출석을 부르지 않은 것이 말썽이 되었고, 채점한 시험지를 생태학 실험실 학생들을 시켜 성적 정리를 하여 제출한 결과 성적에 착오가 생겨서 나를 당황하게 한 쓴 경험을 맛보았다. 앞으로는 대형 강의에 유급 조교를 배치하지 않는 한 맡지 않기로 다짐하였다. 그럼에도 90년 2학기에「생태계와 환경오염」을 부득불 맡아야 했는데 92명의 큰 학급이었지만 무난히 끝맺음을 하였다.

식물학과 학부의 전공과목으로 75년~76년에는 1년 연속해서 생태학 및 생태학 실험(식물학과 4학년)을, 77년~84년에는 1학기에 환경생물학과 환경생물학실험(식물학과 3학년)을, 2학기에 생태학(또는 일반생태학) 및 생태학실험(식물학과 3학년)을, 85년~94년의 10년간은 1학기에 식물생태학 및 식물생태학실험(식물학과 3학년)을, 2학기에 생태학 및 생태학실험(식물학과 2학년)을 강의하였다.



예비 교수들 앞에서의 강의 (제80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이 기간 중 실험은 생태학 연구실의 학생들(무급 조교)이 담당하였다. 환경생물학과 식물생태학은 주로 생물계 학생이 수강했지만 생태학은 식물학과뿐만 아니라 동물학(분자생물학), 미생물학, 해양학, 지질학, 대기과학, 지리학, 화학, 화공학, 산림자원학, 조경학, 원예학, 천연섬유학, 농가정학, 조선공학, 식품영양학, 생물교육, 지학교육학 등 다양한 전공 분야의 학생들이 40명~50명씩 수강하여 새삼 생태학의 중요성이 높아짐을 느꼈다.

 

대학원 강의는 74년~80년에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학생을 분리 수강하였지만 81년도부터 석․박사 학생을 통합하여 강의하였다. 나의 대학원 강의는 생태학특수연구(석사과정), 생태학특강(석사), 생태계생태학(석사), 식물생태학특강Ⅰ,Ⅱ(석사), 환경생물학특론(석사), 환경론(박사과정), 물질생산론(박사), 생산생태학(박사), 정량생태학(석․박사), 군집대사론(석․박사) 등이었다. 이상의 11개 과목을 석사와 박사 과정 학생이 2년 내지 3년만에 한 번씩 수강하도록 조합하여 개설하고, 어느 학기든 대학원 강의가 폐강되지 않고 반드시 개설하도록 힘썼다.

 

77년 1학기에는 학부 강의 이외에 석사과정에 생태계생태학을, 박사과정에 물질생산론을 겹치기로 두 강좌를 개설하는 정열을 쏟기도 하였다. 나의 강의는 강의 시간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에누리없이 정해진 시간을 꼬박 채우는 것을 신조로 삼았는데 대학원 강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대학원 교재는 반드시 영어원서를 채택하여 한 책을 모두 마스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원서에 나오는 문헌을 각자 조사하여 보충하도록 하였다.

나는 식물학과에서 15년, 생물학과에서 5년을 재임하는 동안 대학원의 생태학 수준을 상당히 높일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대학원의 생태학 강의는 김준민, 최기철, 오계칠, 임양재 교수께서도 여러 학기에 걸쳐 내가 못하는 분야를 메꿔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대학원 강의는 힘이 들었지만 보람이 있었다. 그 보람의 예를 들어본다. 75년 1학기에 석사과정을 위하여 개설한「물질생산론」에는 14명이 수강했는데 이중에서 김상구(현 서울대 교수), 김영환(현 충북대 교수), 안정선(현 서울대 교수), 유순애(현 배재대 교수), 이진범(현 동의대 교수), 김 근(현 수원대 교수), 이길재(현 한국교원대 교수), 문형태(현 공주대 교수), 안경준(현 서원대 교수), 유장렬(현 생명공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최홍근(현 아주대 교수), 윤원배(현 Princetone Biomeditash 연구원 박사) 씨의 12명이 대학 교수나 연구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 식물학과의 야외실습 (1976. 6. 18. 제2덕유산 (장수)

 

77년 1학기에 석사과정을 위하여 개설한「생태계생태학」에는 8명의 수강생 중에서 김준철(현 강원대 교수), 박종욱(현 서울대 교수), 정익교(현 부산대 교수), 이진애(현 인제대 교수), 조성호(현 인하대 교수), 이춘환(현 부산대 교수) 씨의 6 명이 대학교수로,  82년 1학기에 석․박사과정을 위하여 개설한 「정량생태학」에는 17명 수강생 중에서 유병태(현 금호생명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 조경제(현 인제대 교수), 이창석(현 서울여대 교수), 민병미(현 단국대 교수), 박인호(현 동아대 교수), 부성민(현 충남대 교수), 이해복(현 청주대 교수), 이점숙(현 군산대 교수), 임병선(현 목포대 교수), 정연숙(현 강원대 교수), 최청일(현 한양대 교수), 김범철(현 강원대 교수) 씨의 12명이 교수로 활약 중이다.

85년 2학기에 개설한「식물생태학특강 I」에는 14명이 수강했는데 그 중에서 곽영세(현 포항산업과학원 생태환경연구팀장), 김광훈(현 공주대 교수), 김성룡(현 서강대 교수), 조강현(현 인하대 교수), 김형섭(현 강릉대 교수), 문병용(현 인제대 교수), 이창석(현 서울여대 교수), 오윤식(현 경상대 교수) 씨의 8명이 연구소나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밖에 개설한 강의마다 우수한 학생들이 수강하여 현재 학계에서 쟁쟁하게 활약하고 있다. 수강생들에게 내 강의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요즈음 한국식물학회와 한국생태학회의 모임에 나가면 내 강의를 듣던 학생들이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어 무한한 보람을 느낀다. 이처럼 똑똑한 제자들이 배출된 이면에는 내 강의가 탁월해서가 아니고 서울대의 학문적 분위기가 좋아서라고 믿는다. 이 전통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학부나 대학원의 강의는 94년 2학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하였다. 나는 퇴임을 앞두었다해서 강의시간을 적당히 에누리하지 않았다. 종전에 종강시간에는 학생들이 박수를 치는 것이 관례였는데, 94년 2학기에 생태학강의가 끝나는 종강시간에는 박수와 함께 예상하지 않았던  꽃다발을 받았다.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려하니 어느 때 준비했는지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여학생이 꽃다발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빙 돌았다. 이것이 서울대학교에서의 마지막 강의였다. 

    

강의와 연구에 힘쓰던 나는 식물학과 학과장을 2년간(81. 9~82. 8.) 맡게 되었다. 그에 앞서 81년 1학기에 치의예과 학과장을 발령 받고 한 학기 봉사했을 뿐인데,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2학기에 식물학과 학과장으로 발령이 났던 것이다. 발령을 받았을 바에는 학과를 위하여 희생적으로 봉사하려고 다짐하였다.

 

그런데 나의 발령에 C교수가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는 학장에 항의하다 들어주지 않으니까 부총장에게 전화로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C교수를 선배로 깍듯이 대접했는데도 껄끄러운 관계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학과장이 대단한 감투도 아닌데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보다 앞서 그는 대학 밖의 여러 모임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깎아 내리는 발언을 한다는 소문이 귀에 들어오곤 하였다. 학년말에는 과의 경비 사용 내역을 감사하겠다고 정면으로 대드는 데는 속수무책이었다. 국립대에서 학과장 재량으로 쓸 수 있는 경비가 없는 것은 이미 여러 해 동안 학과장을 중임한 분이므로 잘 알 수 있을 터인데도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과의 발전과 민주화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연구비를 좇고 연구비에 쫓기고-1 (제81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외부에서 연구비를 받아야 실험실이 활발하게 움직여서 알찬 연구를 할 수 있는데, 1960년대에는 연구비 받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학자에게 연구비는 필요악인가 보다. 못 받으면 좌절감이 생기고 섭섭하며 받으면 심리적으로 속박 받는다. 그렇지만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키려면 쓰기 싫은 연구계획서를 써서 연구비를 좇는다. 일단 연구비를 받으면 좋은 결과를 위하여 마치 사나운 개에 쫓기듯이 허둥댄다. 나는 주력 연구 분야 이외의 연구비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구비를 받아도 주력 연구 분야 이외에는 힘쓰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실을 원활히 움직일 정도에서 만족하였다.

 

자연대에 근무하면서 연구비를 받아 수행한 연구를 살펴보면, 76년에 전매청에서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내가 연구비를 받았다. 나는 과거에 인삼연구로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고 전주사범 동기생인 조충훈 형이 전매청장으로 자리잡고 있어 울타리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연구비가 내게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전매청 과장․국장이 자기를 연구원에 포함시켜 달라는 거북스런 간청이 있었지만 점잖게 거절하였다.

 

나는 전매청 연구비로 ‘인삼의 무기 영양소 흡수 및 시비기준에 관한 연구’를 1976년에 수행하였다. 마침 양주군 법원읍 갈곡리에 김상회 씨 등 몇 사람이 공동으로 경영하는 인삼포가 있어 그 것을 이용하여 만족한 결과를 얻었고, 인삼포의 기비(基肥)로 이용하는 청초(떡갈나무 잎 등)의 비료 성분도 분석하였다. 이때 문형태 군이 수많은 분석시료의 질소․인․칼륨을 정량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

 

78년에는 문교부(교육부) 정책과제연구비를 받아 ‘개화로 인한 갱신죽림의 생산성 향상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연구에는 주동기 교수(전남대)와 공동으로 하였고,  안효영, 조도순 군이 도와주었다. 남부지방에서 50년대부터 개화한 왕대가 죽어 대밭이 폐허처럼 되어 있었는데 그것의 합리적인 회복과정을 추적하였다. 이 연구를 위하여 전남 담양지방을 수없이 다녔고 현지에 사는 한하수, 조 정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문교부에 제출한 연구보고서는 국가기밀이 누설된다는 이유로 학술지에 발표가 금지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왜냐 하면 70년대에 부산의 모 대학 교수가 문교부 연구비로 얻은 결과를 허가 없이 학술지에 발표하여 봉변을 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연구책임자가 되어 80년에 ‘낙동강 하구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로 문교부에서 연구비를 받았다. 이 연구에는 김훈수, 이인규, 김종원(부산대) 교수가 공동 연구하였다. 연구비로 570만 원을 청구했는데 겨우 100만 원이 배당되었다. 다른 분야와의 형평성이 어긋난다하여 불만을 터뜨렸더니 고윤석 학장님이 야외조사의 어려움을 이해하여 자연대 자체 경비에서 20만 원을 더 할당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나는 낙동강 하구 생태계에 매료되어 참으로 열심히 연구하고, 그곳의 기능적 연구를 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으며, 그 이후에도 낙동강 하구 생태계 연구를 더 계속하였다.

 

▲ 낙동강 하구의 생태계는 살아 움직인다(1988년)

 

81년 6월에는 오계칠 교수(서강대․별세)와 공동으로 ‘한국 서해안 간석지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로 문교부에서 연구비를 받았다. 같은 해 2월에는 ‘해안 염습지 생태계의 보존에 관한 생태학적 연구’로 자연보존협회에서 연구비를 받았는데, 협회에서 요식 행위로 추천자를 요구하였으므로 한국식물학회장이었던 오계칠 교수의 추천을 받았다. 이때 받은 연구비는 협회장으로 계시는 이덕봉 교수의 배려가 있는 듯 하였다. 이 연구는 문형태, 조경제 군과 함께 낙동강 하구와 인천 해안의 오염 실태를 조사하고 해안의 자연보호에 대하여 분석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한편 81년에 자연보존협회에서는 지리산 극상림(極相林)의 종합학술조사를 하였는데 그 극상림의 생산성을 나에게 위촉하였다. 지리산 피아골 상류의 원시림 (거대한 서어나무와 졸참나무 군락)은 벌목하지 않은 채 현지에서의 측정치에 기존의 생산성 자료를 적용하여「지리산 피아골 극상림의 군락구조, 식물량 및 일차생산성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연구에는 임역득 교수(인천교대), 조도순, 고성덕 및 민병미 군이 참여하였다.

82년에는「낙동강 하구 삼각주 식생의 천이에 관한 연구」로 문교부에서 연구비를 받았는데 주로 문형태 군이 대마등, 백합등, 갈매기등의 식생천이를 연구하여 박사 학위 논문으로 종합하였다.

 

같은 해에 김철수 교수(목포대)가 연구책임자가 되어  ‘해변 염생식물 군집에 대한 생태학적 연구’로 산학협동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았으므로 민병미군과 나는 ‘인천 간척지의 토지환경, 종 다양성 및 염류순환’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82년에 국토개발연구원으로부터 「댐 및 하구언의 환경영향 평가에 관한 기초 연구」로 연구비를 받아 문헌연구를 수행하였다.

 

83년에는 문형태 교수와 함께 ‘해안 간석지 생태계의 탄소, 질소 및 인의 동태’로 문교부에서 연구비를 받아 낙동강과 금강의 하구 간석지의 식물군락과 생물군집의 영양소 순환을 연구하였다. 같은 해 성희학원으로부터 ‘장목 지구(거제도)의 토양환경 및 현존 자연 식생에 관한 연구’로 연구비를 받아 멀리 거제도까지 연구실의 여러 학생이 다니면서 조사하였고, 이 때 거제도에 인접한 지심도의 자연 식생을 주로 조도순 군이 조사하여 논문으로 종합하였다.

 

84년~85년에는 문교부의 학술연구조성비와 운영위원이 바뀌고, 학술연구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그 1차 년도가 되는 해였다. 나는「한국 주요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 Ⅰ. 낙동강 하구 간석지 생태계의 영양소 수지와 군집대사에 대하여」에 관하여 문교부에서 연구비를 받아 낙동강 하구의 갈대, 천일사초 및 갯잔디 군락의 생산성과 군집대사를 연구하였다.

 

84~86년에는 ‘교란된 소나무림의 재생전략에 관한 연구’로 한국과학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아 경북 영양군 소나무림에서 자연낙종(自然落種)을 연구하였는데 연구보고서만 제출하고 후속 연구를 위하여 아직 학술지에 게재하지 못하고 있다.

 

80년~84년 사이에 문교부나 과학재단에서 지급하는 생태학 분야 연구비는 100만 원 내지 350만 원 정도였다. 지급된 연구비는 지정된 연구에만 쓰이지 않고 생태학 연구실 학생의 석․박사 논문 실험을 위하여 여비, 숙박비, 자료비 등으로 쓰이기 때문에 연구실 운영이 빠듯하였다.



연구비를 좇고 연구비에 쫓기고-2 (제82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85년~86년에는「한국 주요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 Ⅱ. 수동 집수역 생태계의 군집 대사」로 문교부에서 연구비를 받았다. 이 해부터 문교부에서 팀 연구를 권장하고 또 농과대학 교수가 자연대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연구비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연구진을 새로 구성하여 육상생태에 나를, 미생물생태에 김상종 교수를, 곤충 생태에 허재선 교수(농과대학)를 포함시켰다. 육상생태 팀은 수동집수역에서 잣나무 유림의 형성과정에 따른 잣나무와 임상식물의 생산량 변화와 질소순환을 조강현, 김용택 군이 연구하여 석사논문으로 종합하였다.

 

김상종 교수는 수동집수역 내의 수질오염을, 현재선 교수는 잣나무의 곤충상을 조사하였다. 팀 연구를 권장했지만 연구 장소만 같았을 뿐 연구 내용은 유기적인 관계가 거의 없어 아쉬웠다. 같은 해에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KOPEC)로부터 전남 영광군 계마리의 영광 원전 부지를 중심으로 생태계 조사를 위탁받았다.

 

87년에는 국립환경연구원의 위탁으로 팔당호의 수생식물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후 연구비 없이 연구를 계속하여 조강현 군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종합하였다. 문교부 연구비는 한 팀을 자연대 내에서 세 명 이상의 교수로 팀 구성을 해야 하는 내규였으므로 나와 김상종 교수만으로 팀 구성이 안되어 87년~89년에는 문교부 연구비를 포기해야 했다.

 

88년에는 KOPEC으로부터 인천 일도와 당진군 교로리의 화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주변의 생태계 조사를 위탁받았고, 농업진흥공사로부터 새만금 사업지구 주변(전북 부안구, 김제군 및 옥구군의 고군산군도)의 육상생태계 조사를 위탁받았으며, 환경부로부터 전국 식생조사의 일환으로 천원군, 예산군 및 아산군의 식생조사를 위탁받았다. 이러한 위탁연구는 논문을 쓸 만큼 충실한 연구 결과를 얻지 못하여 아쉬웠다.

 

89년~90년과 95년~96년에는 KOPEC으로부터 경북 월성군 나아리에 있는 월성 원전 부지 주변의, 90년~91년에는 경북 울진군 부구리에 있는 울진 원전 부지 주변의 30킬로미터 내의 육상생태계 조사를 위탁받았다.

 

90년~91년에는 문교부로부터「한국 주요 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로 연구비를 받았는데 이 연구는 육상생태계와 수중생태계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전자에는 나와 문형태 교수가, 후자에는 김상종, 이건형(군산대) 교수가 공동연구자로 참여하였다. 이 연구에서 육상 생태계는 충북 단양 지방의 석회암 토양 생태계의 연구를 하여 곽영세 군과 서계홍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종합하였고, 이밖에도 석회암에 관한 많은 논문이 나왔다. 수중생태계는 미생물에 의한 탄소순환과 에너지 유동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 제자들과 지리산의 식생을 조사하는 모습

 

91년~92년에는 한국 전력공사의 용역으로 강릉 댐 주변 생태계 조사를 민병미 교수와 함께 수행하였다. 91년~93년에는 한국과학재단의 ‘91특정기초연구비로「한국산 보리수나무속 식물의 질소고정에 관한 생물학적 기초 연구」로 연구비를 받았다. 이 연구에서 나는 생태학 분야를, 송슬달 교수(경북대)는 생리학 분야를, 안정선 교수(서울대)는 분자생물학 분야를 각각 담당하였다. 우리 팀에서는 유영한, 김경범 군이 남한산성, 덕적도, 금오도, 보길도 등지를 다니면서 상록성 보리수나무속 식물을 밝히고 개체군 증식, 생육 환경 등을 조사하여 기초연구를 마무리하였다.

 

93년~94년과 97년~98년에는 민병미 교수와 함께 서울시의 용역으로 한강변의 육상생태계를 조사하였다. 93~94년에는 문형태․서계홍․민병미 교수와 공동으로 농촌진흥청에서 용역을 받아 농업의 대기환경 정화기능 계량화의 과제로 국내의 주요 농작물 24종류가 생육하는 과정에 흡수하는 이산화탄소(CO2)의 양을 계산하였다. 93년~95년에는 G7 연구 중의 환경분야인 「생태 복원 기술」과제의 하나인「대기오염 및 산성비에 대한 내성종과 Bioindicator의 선발․육종 개발」로 환경부에서 연구비를 받았다. 이에 앞서 생태 복원 기술 과제는 나와 이경재 교수(서울시립대)가 여러 차례 만나서 심의한 끝에 도출하였다. 이 연구에는 이창석 교수(서울여대), 문형태 교수(공주대), 조도순 교수(카톨릭 대)가 참여하였다.

 

G7 연구는 3년씩 세 번 연속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우리는 초기의 3년만 연구하고 후속 연구가 단절되었다. 이 연구에서 아황산가스에 대한 내성종과 산성빗물에 기인하는 알루미늄에 대한 내성종의 선발 그리고 울산과 여천 공단 주변의 식생과 토양의 오염상태 규명은 큰 소득이었다. G7 과제는 내가 정년 퇴임한 이듬해까지 계속하여 96년 1월 26일에 최종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제1차 G7 연구사업이 끝날 무렵에 구성한 평가단으로부터 제출된 평가 내용을 보니, 우리 팀의 연구 방향과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고, 연구진 구성에 대하여 한 교수의 제자들로 이루어졌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차기 연구를 자신들이 맡으려는 낯간지러운 음해 내용이 엿보여 씁쓸하였다. 그 평가서는 생태학 분야 전공자들이 헐뜯지 말고 서로 도와야 생태학이 발전한다는 여운을 보이는 것이었다.

 

생태학 연구는 최소한의 실험기기가 갖춰져야 발전하는데 나는 일생 동안 그 점에서 만족하지 못하였다. 70년대까지는 실험 기기 없는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다. 다만 AID-SNU 프로젝트로 Stadelman 교수가 식물학과에 와서 강의하던 77년에 휴대용 기공개폐측정기(porometer)를 사서 생태학 연구실에 주었기 때문에 무척 긴요하게 사용하였다. 79년~80년에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광합성 장치에 이용할 소듐 램프, 온도조절용 열전대 등을 잡비를 아껴가며 사왔기 때문에 귀국 후 아주 소중하게 이용하였다. 미국에서 가져온 부속품으로 식물 잎 수분 측정기(pressure chamber)를 자작하였는데 호스의 연결부가 맞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생태학의 산실-1 (제83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80년대에 구입한 실험기기 들은 여러 가지 규정에 묶이고 경험 부족으로 만족하게 사용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시마즈(島津) 제의 식물환경제어기는 1시간에 30kw의 전력이 소비되는 것이어서 전기가 아까워 가능한 한 사용을 억제하였다. Beckman 제 이산화탄소 측정기는 부속품을 제외하고 완제품만을 구입하도록 하는 규정 때문에 본체에 부속품을 붙여서 제작하도록 본사에 설계도를 보냈더니 납품된 것이 부피가 너무 커서 야외에 반출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험실에 놓기조차 어려웠다. 또 일제 광합성장치는 측정 농도 범위가 너무 높아서 자작한 역류장치를 붙여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불꽃비색계(flame photometer)나 열량측정계 등은 수리를 거듭하면서 오랫동안 사용하였다. 90년대에 들어와서는 품목설명서 (specification)를 짜는 요령이 생기고 좋은 기기도 개발되어 만족한 기기를 이용하였지만 나에게는 정년퇴임이 임박하여 사용 기간이 짧았다.

 

관악캠퍼스로 이사왔을 때 생태학 연구실에는 실험기구가 거의 없었고, 학생은 석사과정에 문형태, 채명인 두 학생뿐이었다. 채명인 양은 본래 이인규 교수 지도를 받기로 약속되었던 모양인데 이 교수가 외유할 계획이어서 내가 지도하게 되었다. 대학원 학생을 지도하기는 그해가 처음이어서 여러 가지 고민이 뒤따랐고, 나 자신의 생태학 연구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화가가 백지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머리 속에서 구상하듯이, 앞으로 서울대의 생태학 연구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오랫동안 구상하였다. 그리고 내가 지닌 여건도 분석하였다. 나는 식물분류학, 식물생리학, 물리화학 및 생물통계학에는 자신이 있지만, 물리학과 수학에는 약하다고 판단되었다. 식물분류학이 기초가 되는 군집생태학을 연구할 수도 있지만 구조적이며 정성적인 연구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생리학과 물리화학이 기초가 되는 기능적이며 정량적인 연구를 하려고 다짐하였다.

 

한 개체의 기능을 연구하듯이 군집의 기능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생태계생태학으로 가닥을 잡게 되었다. 다행히 나는 박사학위 논문 실험을 할 때부터 식물의 물질생산과 생산생태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였고, 또 다른 분야보다 많은 문헌을 가지고 있었다. 식물군집의 물질생산을 파악하고 무기영양소의 순환과 태양 에너지의 전이량을 측정하면 만족할 만한 연구가 될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앞으로 10년 간은 이 분야의 연구를 하여도 손색이 없겠고 또한 연구에 보람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이러한 사색을 하며 한 학기를 넘겼다. 그러나 실험실 시설의 미비는 내 사색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1학기 동안에는 대학원 학생과 매주 한 번씩 독대하여 대화를 하며 그들의 기초 실력을 파악하고 생태학의 연구 방향을 설명하였다. 이때 나는 삼림의 생산성과 물질생산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였다. 대학원생의 논문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나무를 벌목할 수 있는 숲을 찾아야 하는데 적당한 곳이 발견되지 않았다. 처음에 탄천 하구에 형성된 버드나무 숲을 선정하려고 하였다. 왜냐 하면 그것은 벌목해도 관청의 간섭을 받지 않기 때문에 몇 번 현장에 나가 보았지만 하상河床이 무르고 냄새가 나며 불결해서 여학생이 일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관악산에 있는 서울대 수목원(9림반)의 상수리나무와 물오리나무 숲을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나무의 벌목 여부는 학생의 대학원 논문 실험과 직결되기 때문에 중대사였다. 연습림 당국은 벌목의 허가에 관한 권한이 자기 소관이 아니고 안양시 산림계 소관이라고 발뺌을 한다. 안양시를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두 숲에서 각각 15개의 나무를 벌목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한다. 관악산은 그린벨트 지역이며 공원 지역이기 때문에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를 위하는 일이니 못 본 척 하겠다고 묵시적인 언질을 받는다.

 

▲ 비 맞으며 조사하는 평창강 조사 (1981. 7.)

 

문형태 군과 채명인 양은 대학에서 도보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연습림을 왕래하였다. 높은 나무에 올라가 위에서 아래로 상대조도계를 대고 수광량의 수직분포를 측정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간석해樹幹析解를 하며 잎과 가지와 줄기의 무게를 측정하였다. 이 재료로 채명인 양은 광합성량과 호흡량의 측정결과로부터 물질생산량을 추정하는 연구로, 문형태 군은 두 숲에서 일어나는 질소, 인 및 가리를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연구로 석사논문을 작성하였다.

 

석사과정의 첫 주자인 두 학생의 부단한 노력으로 실험실 활동은 상당히 높은 궤도에 올랐다. 특히 문형태 군은, 마치 내가 공주사대에 부임해서 실험실을 꾸밀 때처럼, 망치와 톱으로 여러 가지 기구를 자작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음에 드는 새로운 기기는 문 군이 연구실을 떠난 80년대에야 비로소 갖춰지게 되었다.

 

대학원생 수가 많아진 80년대에는 실험실 생활의 규율이 필요하였다. 그 첫째가 등교 시간을 엄격히 지키는 일이었다. 등교․하교․도서관 등을 구획한 하얀 게시판을 출입문에 걸어 놓고 각자의 이름이 적힌 마그네트 보턴을 아침 입실할 때 등교란에 붙이도록 하였다. 나는 아침 9시에 출입문 앞에서 누가 등교했는지를 한눈에 파악하였다. 교통이 불편한 서울 내에서 대학원생이 9시까지 등교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연구에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일찍 등교하는 습관을 들이도록 하였던 것이다. 통근거리가 멀었던 나도 출근시간을 엄격히 지켰다.

다음에 점심 시간에 교수와 학생이 회식하며 대화를 나누는 제도였다. 학생들이 실험하다 보면 점심 시간을 놓치는 경우가 많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12시 반에 시작하는 회식은 점심을 규칙적으로 먹어서 건강에 좋고, 학생들과 대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종합화한 뒤 거의 20년간을 집에서 토스트를 가져와서 학생들과 회식 시간을 지켰다. 점심을 사다 먹는 학생들도 회식 시간에 맞추도록 노력하여 모두 함께 먹었다.

 

생태학 연구실에는 학기마다 방장(실장)․기기․회계․세미나․도서 담당을 자치적으로 선출하였다. 나는 학생들의 연구 활동을 원활히 지원하기 위하여 경비 지출을 이원화 시켰다. 그 하나는 실험실에서 간단한 물품을 사는 경비이고 다른 하나는 실습 여행에 드는 경비였다. 실험실 회계와 실습 여행 회계 담당은 각각 경비의 잔고가 떨어지기 전에 받아가도록 제도화 하였다. 돈이 떨어져서 연구가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신경을 써야 했다.

 

그러면서도 많지 않은 연구비를 쪼개서 써야하므로 나는”절약하라, 절약해서 써라”고 거듭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실습 여행 경비는 교통비 조로 기차와 버스 요금의 실비, 허기를 면할 만큼의 식사비, 하급 여관비를 지불할 뿐 택시 요금은 짐을 나를 때 이외에 지출하지 않는 짠 살림살이였다. 경비 잔고가 거의 바닥났을 때 회계 담당이 찾아와 미안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안쓰러움을 느끼고는 하였다.

 

도서 담당은 신간 서적을 카드에 기록하여 1년 분씩 모아서 회람시켰다. 신간 서적은 우편으로 오는 광고지와 학술잡지에서 수집하게 하였다. 학년초에 회람시킨 신간 도서 카드에 구입을 원하는 도서에 각자 표시하도록 하여 최고표를 얻는 책부터 먼저 구입하였다.



생태학의 산실-2 (제84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연구실의 세미나는 잘 이루어지는 해와 그렇지 못한 해가 있었다. 그것은 세미나 담당의 계획성과 대학원생들의 강의 시간 및 과의 대형 세미나 등의 요인에 의하여 좌우되는 듯 하였다. 다만 대학원생의 논문 실험을 시작하기 전의 연구계획과 실험을 끝낸 단계의 결과는 어김없이 발표하도록 하였다.

 

나는 대학원생에게 테마를 줄 때 석사과정 학생에게는 내가 직접 선정해 주었다. 이때 나는 학생이 학부과정에서 얻은 이론과 실험실 이나 야외에서 체득한 감각 등을 참고로 정해 주었다. 다만 몇 명의 특수한 석사과정 학생은 스스로 테마를 고르고 연구계획을 세우며 자료를 수집하여 논문화 하는 학생도 있었다. 박사과정 학생에게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자신이 선정하도록 지도하였다.

 

박사과정 학생은 석사과정 때의 경험과 강의의 이론과 연결하여 몇 달 동안 고민하다가 스스로 테마를 정하도록 하였다. 이 기간에 주기적으로 학생과 만나서 사고의 방향을 발전․수정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여학생의 테마를 선정하는 경우 야외보다는 실험실이나 가까운 실습현장을 선정하였다. 유럽의 여류 생태학자는 남자 이상으로 활동하면서 야외 연구를 하지만 동양 여성은 그들과 다름을 나는 고려하였던 것이다.

 

서울대의 모든 연구실이 그러했듯이 생태학 연구실도 80년대 이후에 연구가 저절로 굴러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석사과정에 신입생이 들어오면 상급의 석사과정이나 박사과정 학생이 자연스레 학술면의 조언과 인생 문제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빗나간 경로를 바로 잡고 막힌 곳을 뚫어주며 새로운 문헌을 찾아주면 되었다. 이따금 방장과 의논하여 학생들의 분위기를 듣는 일이 더러 있을 정도였다.

80년대 초에는 혼기(婚期)를 넘기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어린애를 가진 학생들도 있었다. 어느 날 실험실에 들어갔더니 대학원생들이 모여 앉아 작명作名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내의 산월이 가까워서 아버지가 되므로 아들 (또는 딸)의 이름을 의논하고 있습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대학원생들은 한글과 한자 이름을 선호하는 두 파로 나뉘었고, 한글 이름 파는 이미 국어국문학과의 예쁜 이름짓기 자문을 받았으며, 아들과 딸 이름을 짝으로 짓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싱그레 웃음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뒤에「문설주」「문새로미」「조한얼」「조한솔」「민슬기」「민초롱」「이한솔」「이한울」등의 기지에 넘치는 어여쁜 이름들을 부르게 해주었다.

 

생태학 연구실에서는 학문 연구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맺어진 세 쌍의 부부가 탄생되었다. 그들은 내가 눈치채지 않는 동안에 사랑을 속삭였고 결혼 직전에야 신고하는 민첩성을 보였다. 아마도 동료 학생들이 나의 눈이 미치지 못하도록 인의 장막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 첫번째 쌍이 임병선-이점숙 부부이고, 둘 번째 쌍이 곽영세-민금숙 부부이며 세 번째 쌍이 조강현-진국정 부부이다. 이 어찌 생태학 연구실의 영원한 경사가 아니겠는가! 이들 부부가 가정과 학문에서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기를 바라며 축원을 드린다.

 

▲ 생태학 연구실 대학원생의 지리산 세석평전 모임 (1982. 7.)

 

연구능률을 향상시킨 퍼스널 컴퓨터를 84년경에 생태학연구실에 도입하였다. 초기의 컴퓨터는 질이 좋지 않아서 여름장마 때 선풍기로 부치면서 사용하였다. 경비가 모자라서 처음에 본체만 들여놓고 2년 뒤쯤에 도트프린터를 들여놓았다. 컴퓨터 사용은 생태학연구실이 다른 연구실에 비하여 빠른 편이었다.

 

한 가지 잊혀지지 않는 일은 81년도에 김두영 교수(군산대학)가 연구 교수로 생태학 연구실에 체재한 것이다. 김 교수와 나는 학부 때부터 친하게 지낸 연유로 왔을 터인데 연구실 공간이 좁아 단독 연구실을 드리지 못하고 실험실의 한편에 책상을 놓는 것이 가슴아팠다. 김 교수는 그해에 열심히 실험 자료를 정리하여 원광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75년부터 94년 사이의 20년간에 생태학 연구실에서는 석사과정에 35명이 입학하여 33명이 수료하였는데 이중에 여성 석사가 6명이고, 박사과정에 25명이 입학하여 17명이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중에 두 명의 여성 박사가 포함되어 있다.

 

생태학연구실에서 배출한 박사들의 활약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낙동강하구 사주의 천이에 대하여 연구한 문형태 박사(84년 학위 취득)는 공주대 교수로, 식물군집의 생태적 지위폭과 중복에 대하여 연구한 이희선 박사(86년)는 서원대 교수로, 해안 간척지의 식생과 토양을 연구한 민병미 박사(86년)는 단국대 교수로, 간척지식물의 균근菌根에 대하여 연구한 고성덕 박사(87년)는 충북대 교수로, 정양호 수생식물의 생산성과 무기영양소 순환을 연구한 오경환 박사(88년)는 경상대 교수로, 낙동강 부착조류의 종조성과 생태에 대하여 연구한 조경제 박사(89년)는 인제대 교수로, 군반群班 형성 식물의 영양생장과 모듈(module)에 관해서 연구한 정연숙 박사(89년)는 강원대 교수로, 해안 간석지의 식물과 토양의 수분관계 및 식물의 분포에 대하여 연구한 임병선 박사(89년)는 목포대 교수로, 솔잎혹파리의 생태에 대하여 연구한 이창석 박사(89년)는 서울여대 교수로, 하구 염습지의 조위구배潮位句配와 염생식물의 정착에 대하여 연구한 이점숙 박사(90년)는 군산대 교수로, 측백나무개체군의 이산화탄소 수지에 관해서 연구한 서계홍 박사(92년)는 대구대 교수로, 팔당호 수생식물의 물질생산과 무기영양소 순환에 대하여 연구한 조강헌 박사(92년)는 인하대 교수로, 석회암식물의 생산성과 호석회 또는 혐석회식물의 분류로 학위를 받은 곽영세 박사(93년)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의 팀장으로, 소유역 생태계 내 무기영양소의 유입과 유출을 비교한 유영한 박사(94년)는 박사 후 과정을 밟고 있고, 수도권 주변의 산성비에 의한 리기다소나무림의 쇠퇴 기구와 회복을 연구한 유태철 박사(95년)는 환경부 자연생태과 사무관으로, 화전 후 묵밭의 식생 천이를 연구한 이규송 박사(95년)는 강릉대 교수로, 대기오염물질에 대한 식물의  반응과 생산성 예측 모델을 연구한 김종욱 박사(95년)는 목포대 교수로 활약하고 있다.

 

이밖에 생태학 연구실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조도순 박사(현 가톨릭대 교수), 류병태 박사(금호연구소 책임연구원) 및 진국정 박사(농촌연구원 농업과학연구소  연구원)가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모두 20명의 생태학연구실 출신 박사가 국내․외에서 생태학 발전에 공헌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제주도를 제외한 나머지 도에 1명 내지 2명씩 근무하고 있다.

 

한편 생태학 연구실에서는 외국에서 열리는 생태학 워크샵에 학생을 파견하였다. 85년 방콕에서 UNEP가 주관한 광합성 관련 워크샵에 서계홍 군이 다녀왔고, 교토대학 생태학연구소에서 열리는 동남아 지역 생태학 워크샵에 91년에 이규송, 김기대, 박상규 군이, 92년에 유태철, 김종욱 군이 다녀왔다.



육상생태계 답사 (제85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76년부터 나는 석사논문을 지도하는 한편 국내의 보존된 자연생태계를 연구하였다. 마침 76년 봄에 식물학과에서 춘계 야외 실습의 일환으로 소백산小白山에 갔는데 그 정상(비로봉, 1,443m)에서 넓은 산지초원을 발견하였다. 그 후 나와 문형태 군은 산정현상山頂現象에 의하여 형성된 초원을 1년에 여섯 번이나 왕래하며 조사하였다.

 

소백산행은 청량리-풍기 사이를 기차로, 풍기-삼가마을 사이를 택시로, 삼가마을-정상 사이를 도보로 다녔다. 더러는 희방사를 경유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비로봉의 초지까지 거리가 멀어서 주로 삼가마을을 경유하였다. 이렇게 교통이 불편하였지만 정상의 초원에 서면 그곳에 깃들어 있는 생태학적 현상에 매료되어 피곤한 줄을 몰랐다. 소백산의 산지초원 연구는 문 군이 석사논문 실험을 하는 한편에서 진행하였다.

 

소백산 조사 때 조난을 당할 뻔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 여름 장마 때 비로봉에서 밤새도록 비에 젖었고, 이튿날 아침 한물이 졌을 것을 예상하고 지도에서 하천을 거치지 않는 코스를 찾아서 하산했지만 억세게 퍼부은 빗물이 실개천까지도 삼켜버렸다.  겨우 산기슭에 내려와서 한물진 개천을 건너려했지만 물살이 세고 깊어서 건널 수가 없었다. 로프에 몸을 의지하여 건너려 했지만 실패한다. 야전삽으로 긴 나무를 잘라 개천에 걸치고 몸을 매단 채 목까지 빠지는 물을 겨우 건넌다. 이때 산악반이었던 박석주 군이 함께 가지 않았더라면 큰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원생들이 육상생태계에 접하도록 꾸준히 노력하였다. 나의 야장野張에 기록된 야외 조사 장소를 추려보면, 서울 근교에서는 산정호수 부근의 초지 조사(76년), 북한산의 해원사와 원통사 및 도봉산 조사(80년~87년), 광릉임업시험장 내의 숲과 소유역 및 죽엽산의 숲 조사(84년~87년), 남한산성의 조사(87년) 그리고 관악산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북한산 조사 때 발견한 넉줄고사리(바위에 붙어사는 고사리류)로 이점숙 양이 수분포텐셜을 실험하여 석사논문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군 축령산의 식생과 수동면의 잣나무 유림幼林의 생산과정과 무기영양소 순환을 조사하여 김용택, 조강현 군이 각각 석사논문으로 종합하였다(85년~86년).

 

서울에서 다소 먼 거리에는 예산군․천원군․아산군의 식생(88년), 인천 일도를 중심으로 문학산, 계양산, 마니산(강화도)의 식생(88년), 당진군 교로리를 중심으로 청명산, 연화산, 대란지도의 식생(88년) 등을 조사하였다.

 

서해안과 도서의 식생으로는 변산국립공원 주변과 고군산군도(내초도․오식도․노래섬․야미도․비안도․비응도․신시도․선유도․무녀도 등)와 옥구군․김제군․부안군을 조사하였다(88년). 고군산군도 조사 때는 뱃길이 닿지 않는 섬을 푹푹 빠지는 갯벌을 걸어서 건너다 밀물에 밀려서 다급하게 뛴 기억이 난다. 변산반도는 길봉섭 교수(원광대) 팀과 함께 조사하였다.

 

한편 영광군 계마리를 중심으로 방문산, 경수산, 송림산, 옥녀봉 등지의 식생도 조사하였다(85년~86년). 특히 이 지역에 많이 보존되어 있는 노거수를 서계홍 군과 함께 중복 더위를 무릅쓰고 걸어다니며 조사하였다. 이렇게 하여 인천, 당진군, 부안군, 영광군 등지의 조사로 서해안의 식생을 개관하게 되었다.

 

▲ 오대산 비로봉(1,583m) 조사 후 휴식하는 여천생태학연구회 회원들(1991. 8. 19.).

 

남해안의 식생은 하동군 가덕加德을 중심으로 망운산(남해군), 가야산(동광양), 쫏비산(하동군)의 식생을 오경환 교수(경상대) 팀과 함께 조사하고(88년~89년), 거제도 장목면의 식생과 토양 그리고 지심도의 상록수림을 집중 조사하며(83년~84년), 완도, 금오도, 보길도 등지의 보리수나무속 식물을 조사하여 그 일부로 김경범 군이 석사논문으로 작성하였다(94년~95년).

 

동해안의 식생은 월성군 나아리를 중심(원성 원전 소재지)으로 삼태봉, 무학산, 토함산, 만리성재와 대종천, 나아천 및 하서천(89년, 96년)을, 울진군 부구리를 중심(울진 원전 소재지)으로 검봉산, 응봉산(매봉산), 장재산 및 천죽산(불영사)과 부구천, 가곡천 및 왕피천 등지를 조사하였다(90년).

 

강원도 내륙의 식생으로는 평창군의 남병산, 발왕산, 옥녀봉, 백석산 등지를 조사하고, 특히 남병산의 신갈나무림의 생산성과 무기영양소 순환을 조사한 곽영세 군이 석사논문으로 정리하였고(83년-84년), 여기에서 그는 계속해서 신갈나무림의 자연솎음질을 조사하여 논문으로 종합하였다(86년). 한편 오대산과 발왕산의 신갈나무림의 구조와 식생도를 조사하였고(91년~93년), 이 주변의 화전적지火田跡地에서 일어나는 천이를 조사하여 이규송 군이 박사논문으로 종합하였다(93년~95년).

 

지리산에서는 세석평전에서 연구실의 전원이 모여 아고산대의 식생을 조사하고(80년~81년), 피아골의 서어나무․신갈나무 극상림의 군락구조와 생산성을 임영득 교수(인천교대)와 함께, 조도순, 고성덕, 민병미 군이 조사하였다(80년~81년).

 

특수한 목적의 조사로는 영양군(경북)에서 아홉 번에 걸쳐 소나무림의 천연낙종림天然落種林을 이창석 군, 하사헌 군과 함께 조사하여(86년~87년) 그 재생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지만 아직 논문으로 쓰지 못하고 있다. 85년~86년에 기승을 부렸던 솔잎혹파리 피해림을 홍천(강원도), 증평(충북), 안면도(충남), 영양(경북) 등지에서 조사하여 이창석 군이 박사논문으로 종합하였다.

 

석회암 토양의 식생은 영월(강원도)에서 산불 후의 생태계 변화에 대하여 정연숙 양이 조사하여 논문으로 발표하고(83년~84년), 단양(충북)의 석회암 식물을 곽영세 군이 호석회암과 혐석회암 식물군으로 분류하여 박사논문으로 정리하며(89년~93년), 같은 석회암에 자생하는 측백나무 군락의 수광량과 이산화탄소 수지를 연구한 서계홍 군이 박사논문으로 종합하였다(89년-93년). 그리고 단양의 석회암 토양과 대모산(서울)의 비석회암 토양의 초지에서 먹이사슬에 따른 칼슘 순환량을 비교하여 이훈복 군이 석사 논문으로 정리하였다(94년).

 

휴전선(DMZ) 부근에서는 학훈단 학생들과 함께 고성(강원도)의 통일전망대를 출발하여 DMZ 550 마일을 따라 중부와 서부 전선 및 대암산을 답사하고, 인천에서 LST 함정에 승선, 백령도를 답사하였다(86년).

 

이때 큰 사고가 날 뻔했다. 곧 트럭에 분승한 학생들이 서부 전선의 백골부대를 출발한 직후 트럭이 논 속으로 전복하였던 것이다. 학생이 트럭 밑에 깔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는 물논에 뛰어들어 앞뒤에 있는 학생들을 부르고 구령을 붙여 트럭을 일으키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이때 트럭 밑에 깔린 학생은 이원섭(의예과), 최의철(해양학과), 하홍철(경제학과) 군이었는데, 이들을 군용 헬기로 후송, 서울대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을 군에서 맡았다. 나중에 나는 문병을 갔는데 모두 무사히 퇴원하여 천만다행이었다.

 

이 답사 때 나는 교수 대표로 갔기 때문에 훈시를 하였는데, 논에 빠진 직후 물에 흠뻑 젖은 몸으로 300명 학생과 장성들 앞에서 훈시를 하고 사단장 등 별들과 악수를 나누는 꼴불견을 연출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습지생태계 답사 (제86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한편 자연보호중앙협의회에서 주관하는 DMZ 조사에 참가하여 이승우 군과 함께 전곡(경기도)의 천덕산, 고대산, 야월산과 사미천 변의 묵논과 산화적지의 식생과 토양의 변화를 조사하였다(87년). 이밖에 철원평야의 철새도래지에서 두루미떼를 관찰한 적도 있다(97년).

 

공업단지에서는 미리 길러놓은 메밀 유식물로 식물계植物計를 만들어 각 공업단지(포항․울산․온산․여천)의 여러 곳에 배치하여 대기오염의 정도를 조사하는 한편 중장기적 오염을 소나무 가지 생장과 연륜 생장을 기준으로 조사하고(81년), 여천공단의 식생 피해와 토양조사(93년~94년) 그리고 울산과 여천공단 주변의 광범위한 토양 오염도를 작도하였다(95년). 여천공단 주변의 식물 피해와 아황산가스 농도의 관계에서 착안하여 황보준건 군이 석사 논문을 쓰고, 공단 주변의 토양 산성도와 소나무 유식물의 내성에 대하여 실험한 류훈 군이 석사 논문으로 정리하였다(95년).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자연생태계는 삼림과 해안 습지(간석지)이다. 해안 습지 중에서 특히 생산성이 높은 하구생태계는 주목할 가치가 있어 80년부터 5년간 낙동강의 하구 생태계를 연구하였다. 서울-부산-명지(낙동강 하구) 여행은 시간과 경비가 들고, 명지에 체류하는 동안 악식惡食과 모기의 공격을 받았지만,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하구생태계에 매료되어 연구를 중단할 수가 없었다. 80년~81년 사이에만 무려 15회를 왕래하며 자료를 수집하였다.

 

특히 하구에서 새로 형성되는 모래톱(sand spit)의 천이에 대한 연구로 문형태 군(1984년)이, 낙동강 하구의 간석지 토양에 붙어사는 부착조류의 연구로 조경제 군(1989년)이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1987-8년에는 낙동강 하구생태계에 대하여 일본 도호쿠(東北)대학 교수 팀과 공동 연구를 하였다.

 

81년부터 5년간 인천, 남양, 장덕, 서산, 당진 등지의 간척지를 연구하였다. 인천 부근의 백석동과 화성군 마도면, 서산 및 당진에서 간척 년도가 다른 간척지의 토양과 식생의 관계를 연구하여 민병미 군(1986년)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종합하였고, 간척지에 새로 침입하는 산조풀, 갈대 등의 다년생초본이 둥근 모양의 군반(patch)을 형성하는 기작을 밝힘으로써 정연숙 양(1989년)이 박사학위를 받았다.

 

나는 생태학 연구실의 대학원 학생들이 해안 습지에 관심을 갖게 할 목적으로 전원이 함께 여행을 한 일이 있다. 예를 들면, 82년 2월에 서울-영산강 하구-금강 하구(오식도-내초도)-삽교 방조제-아산 방조제를 순회하였다. 이 여행을 통하여 학생들은 한국의 간석지와 간척지의 생태계에 대하여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야외 실습할 때의 필자(1987. 8.)

 

백석(인천)의 간석지에서는 조석주기潮夕週期에 맞추어 부침운동浮沈運動을 하고 간조 시간에 광합성을 하며 계절에 따라 종류가 변하는 부착조류를 연구하여 조경제 군(1983년)이 석사논문을 종합하였다. 한편 환경이 혹독한 간척지에서 특이한 냄새로 알레로패티 효과를 나타내는 비쑥을 재료로 실험한 강창수 군(1986년)이 석사논문으로 종합하였고, 비쑥에 관한 알레로패티의 정보를 길봉섭 교수에게 제공하였다.간척지에서 일어나는 여러 생물 사이의 에너지 유전에 대하여 류병태 군(1983년)이 석사논문으로 종합하였다.

 

한편 금강 하구(내초도 앞)의 넓은 간석지에서는 토양의 알갱이 굵기에 따라 서식하는 동물 종이 각각 다름을 밝히고, 부착조류, 초식동물 및 육식동물 사이의 물질순환과 에너지 유전을 밝혔다(83년~84년). 이 연구는 조경제 군이 김지식 교수(군산대)와 공동으로 자료를 수집하였다.

 

팔당호 습지는 애초에 수생식물이 겨울 동안 더럽게 보이기 때문에 그 잔해를 보이지 않도록 해 달라는 요구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수생식물에 각별한 애착을 가졌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수질을 정화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수생식물을 분류하고 종류별 생산량과 전 댐 호의 연생산량을 조사한 다음 그들 식물체가 흡수하는 질소량과 인량을 조사하였다. 87년부터 시작한 이 연구는 조강현 군(1992년)이 박사학위 논문으로 종합하였다.

 

이 연구로 가을에 수생식물을 베어내면 28톤의 질소와 4톤의 인이 제거됨을 밝혔으므로 이 자료를 근거로 물풀을 베는 대형 예초기刈草機를 도입하는 등 연구결과가 곧 응용으로 옮겨졌다.

 

한편 대형 화분에 팔당호의 줄을 옮겨 심고 생장에 따른 물 속의 영양소 흡수량을 조사한 민금숙 양(1991년)이 석사논문으로 정리하였고, 호소에 발생하는 Microcystis aeruginosa라는 조류가 물꽃(blooming)을 형성할 때의 환경요인을 교차상관분석으로 규명하여 박상규 군(1994년)이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밖에 대학원 강의시간에 팔당호에서 몇 가지 실험 과제를 선정하여 대학원생들이 현장 실습을 하기도 하였다(80년대 후반).

 

대학 교수는 연구하고 교육하며 사회 봉사하는 것이 기본적인 사명이다. 일정 기간을 대학에서 근무하다 퇴임하는 교수 중에는 부지런히 많은 연구를 하여 빛나는 분과 보직과 행정을 좇는 분과 허송세월 하여 연구 업적이 부실한 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 나는 두 대학에 근무하는 동안 연구에 전념하기 위하여 가급적 보직이나 행정을 멀리하였다. 어떤 분은 능력 있는 교수만이 보직을 맡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일정 연령 이상이 된 보통의 교수 치고 대학 행정이나 보직을 못 맡을 만큼 무능한 교수는 없을 것이다. 연구 업적 없는 교수는 생명 없는 허수아비에 비유될 것이다.



끝 없는 학문의 길 (제87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나는 앞에서 거듭 말했듯이 소년시절의 가정형편이나 친족親族의 가호加護 면에서 학문을 할 배경이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특출나게 명석한 두뇌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몸이 약한 나를 시계공이나 그밖에 힘쓰지 않고 먹고사는 기술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실제로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시계 부속품을 모으며 시계공이 될 것을 골똘하게 생각하였다.

 

다만 나는 온순하고 순진하며 남을 괴롭히지 못하고 악한 일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내가 자람에 따라 나를 잘 아는 이들은 ‘너는 의사나 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는 하였다. 사범학교 초급 학년 때는 교사 이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체념하였다. 그런데 사범학교 때 생물반에서 야외실습을 다니면서 자연의 오묘한 현상에 매료되어 생물학, 특히 식물학을 공부할 생각을 굳혔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 이후 학문할 생각으로 일관하였다.

 

다행히 나는 학문할 소질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정신 집중이 되는데서 그러했다. 예컨대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는 몸이 추운지 더운지 배가 고픈지를 느끼지 못하고 일에만 집중할 수 있다. 장기․바둑․화투 등 잡기를 즐기지 못했고, 특별한 운동을 하지 못했으며 많은 벗을 사귀지도 못했고 여가를 즐길 줄도 몰랐다. 백화점에서 물건 사는 시간이 지루하기만 하고, 내가 살 줄 아는 것은 책과 문방구와 의약품 정도였다. 그러니 여유 있는 시간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데만 소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석사과정에서 식물생리학을 이민재 교수님으로부터 지도 받았지만 식물생태학은 김준민 교수님의 조교를 했을 뿐 체계적으로 강의를 듣거나 논문 지도를 받지 못하였다. 외국에서 연구생활을 할 때에도 순수한 생태학적 연구 분위기에 싸이지 못하였다. 따라서 식물생태학은 어깨 너머로 공부한 셈이다. 그래서 내 학문에 결함이 있는가를 늘 경계하며, 외국 생태학의 방법과 방향을 받아들여서 국내의 지역 사정에 맞도록 동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내가 식물생태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는 75년부터였고 80년 이후에야 시설이 갖춰져서 뜻에 맞는 연구를 하였으므로 15년 내지 20년 동안 진지한 연구를 한 셈이다.

 

내가 이룬 학문은 식물학, 특히 식물분류학과 식물생리학에 바탕을 둔 식물생태학이다. 식물분류학은 사범학교 때 전주 주변의 자연을 돌아다니며 식물 이름을 외우고 분류체계를 머리 속에서 그리는 아마추어 분류학도였다. 사범학교 때의 식물분류학 실력으로 대학 교수를 퇴임할 때까지 버틴 셈이다. 따라서 식물분류에 관한 논문은 한 편도 써본 적이 없다.

 

대학원의 석사논문은 순수한 식물생리학 분야이다. 생리학을 전공하려고 물리화학과 일반생리학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놓은 것이 나중에 식물생태학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순수 식물생리학 분야의 논문은 석사 논문을 포함하여 요소 엽면 시비에 관한 8편뿐이다.

 

▲ 간석지 생턔계조사

 

박사논문을 쓸 때 비로소 식물생태학을 공부하여 생리학과 생태학을 접목한 생리생태학(ecophysiology)의 성격을 띄게 된다. 인삼의 생육에 관해서 12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것들은 생리생태학적 관점에서 규명한 것이다.

 

식물생태학은 환경 요인과 식물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인데 환경요인과 관련된 연구로는, 햇빛과 식물의 관계로 인삼 기타 식물을 자료로 하여 12편의 논문을, 온도와 식물의 관계(주로 온도와 호흡)로 5편을, 수분과 식물(주로 강낭콩)의 관계로 7편을, 토양과 식물의 관계로 22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들 논문은 주로 생리생태학적 연구이다.

식물군락의 생산성에 관해서 2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 분야가 나의 주전공이라고 할 수 있다. 군락의 물질순환에 관해서 9편을, 생태계의 에너지 순환에 관해서 7편을, 생태계생태학의 입장에서 연구한 종합적인 연구로 25편을 발표하였다. 식물군락의 조사방법에 자신이 없어서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미야와끼 교수(宮脇 昭․일본 요꼬하마국립대학) 연구실에서 1984년에 2개월간 지도를 받아 터득한 일이 있다.

 

이상은 심층생태학(deep ecology)에 속하는 논문들이다. 1990년대 들어 오염생태학 (pollution ecology)으로 관심을 돌려서 산성 강하물(산성비 포함)에 관한 연구로 9편을 발표하였다. 이밖에 군락구조, 한국생태학사, 도시생태학 등에 관해서 6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상을 모두 합하면 120편에 달한다. 이러한 학문의 업적이 평가되었는지 신동호(한계레 기자) 저「한국의 과학자 33인」의 생태학 부문에 나를 선정해 주어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나의 생태학 연구는 구조보다 기능에, 정성보다 정량에 더 주력하였다. 일찍부터 식물체나 식물군락의 생산성을 연구하였으므로 정량화된 자료를 기초로 하여 물질 순환과 에너지 유전을 정량화 하여 생태계의 기능적 연구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

 

나는 특정한 대상을 선정하여 처음에 순수하게 생태학적 접근을 하고 거기에서 얻은 결과를 당면한 환경문제나 인류복지 문제를 해석하는데 이용하며 더 나아가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연구로 발전시켰다.

 

나의 학문은 상아탑에 묻힌 과학논문 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읽도록 쉽게 풀이하는 글로 표현하였다. 나의 연구 결과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들의 것도 해설하여 일반인들이 읽도록 노력하였다. 특히 한국의 자연과 식물에 관한 에세이는 내가 즐겨 쓰는 분야였다. 내가 쓴 식물 에세이 중에서 우연히「중학 국어」1학년 2학기 용에「한반도의 소나무」가 게재되어 수많은 중학생의 국어교육에 이용되고 있어 보람을 느끼고 있다.

 

생태학을 전공하는 사이에 언제부터인지 사고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의 사조思潮인 전체주의(constructionism)와 환원주의(reductionism) 중에서 전자에 나 자신이 길들여진 것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사실을 생태학을 공부하면서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을 분석적이 아닌 종합적으로 보고, 인간관계나 사회의 여러 사건들을 큰 윤곽 먼저 바라보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생명현상을 해석하는 데에도 물리화학적인 기계론보다 합목적성으로 보는 신생기론을 신봉하게 되었다. 자연은 분석만으로 파악할 수 없고 창발성創發性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생태학의 징검돌 (제88회) - 제13장 서울대 시절-교육과 연구의 보람2

 

한편 나는 고등학교 생물교과서를 집필하였다. 84년에 고등학교 생물Ⅰ,Ⅱ(동아서적 주)를 하두봉(서울대), 이학동(단국대․별세), 박영철(공주대) 교수와 공동 집필하였고, 90년에 고등학교 과학 Ⅰ(상)을 91년에 고등학교 생물(금성교과서 주)을 , 95년에 고등학교 생물Ⅰ,Ⅱ(금성교과서 주)를 집필하여 검인정에 통과되어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교재로 이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식물생태학 연구의 1세는 김준민 교수님이다. 나는 2세에 해당하고 내 제자들은 3세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일세에서 3세를 잇는「생태학의 징검돌」이었다면 3세들은 더 훌륭하고 차원 높은 연구를 할 것으로 기대한다.

 

80년대부터 식물의 개체군 생태학을 손대고 싶었다. 77년에 Harper가 쓴「Population Biology of Plants」가 출간된 뒤 나는 대단히 흥미를 느꼈고, 한국에서 이 분야를 발전시키면 지역 식물의 특성뿐만 아니라 인류 복지에 응용할 소재가 많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전부터 하던 연구에 쫓겨서 입문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한편 분자생태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에 관한 전문 학술지인 Molecular Ecology(1992-1996)를 구독하였지만 연구 시설을 갖추는데 시간과 경비가 들어 퇴임을 앞두고 단념하였다. 생태학의 3세나 4세들은 내가 이루지 못한 위의 과제들을 과감하게 붙들어 깊게 연구할 것으로 믿는다.

 

인간은 두 사람이 모이면 대화를 하고 세 사람이 모이면 조직체를 갖는다고 한다. 생태학연구실의 대학원생이 많아지고 박사학위 취득자가 나오니 그 분들에 대한 축하회를 열게되었다. 이에 앞서 대학원생들은 76년 봄부터 야유회를 가졌고 또 80년대부터 신년 초에 우리 집으로 세배를 왔었다. 세배 때는 생태학연구실 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실 학생들도 함께 와서 떠들벅적 한 때를 즐겼다. 이 때에 남녀 대학원생이 서로 뜻이 맞아 결혼한 이도 있다.

 

▲ 가족을 동반한 여천생태연구회 모임(1990. 7. 30-8. 1. 장수온천호텔)

 

세배할 때 결혼한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므로 나는 한꺼번에 많은 손자 손녀가 생긴 양 입이 벌어지고는 하였다. 97년도까지는 설음식을 우리 집에서 차렸는데 내가 퇴임하고 아내가 나이 들었음을 이유로 98년도부터 제자들이 굳이 사양하여 집에서 세배만 하고 신년 하례만찬은 이웃 음식점에서 하고 있다.

 

생태학연구실 졸업생 또는 재학생들은 처음에 형식 없이 1년에 2번, 신년과 여름, 모임을 갖기로 이심전심 합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처음 모임이 86년(7월12일~13일)에 전북 고창군 선운사에서 있었다. 이 때 김종원 박사(현 효성여대)가 함께 와서 군락 조사의 워크샵을 하였다. 그 후 한번도 거르지 않고 해마다 두 번 내지 세 번씩 모임을 가져 금년이 14년째이다. 이 모임의 이름을 「여천생태연구회」(Yeochon Association for Ecological Research)라고 붙였다.

 

여천麗泉은 내 호이다. 제자들이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굳이 호를 머리글자로 쓰자고 고집하니 한 편에서는 쑥스럽고 다른 편에서는 고마운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이름이 자연스레 귀에 익어졌다. 여름 모임은 회원이 돌아가면서 장소와 숙소의 뒷바라지를 하므로 무척 고생스럽고 경비를 많이 부담할 것으로 생각된다. 덕택에 전국의 여러 곳에서 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에는 회원들의 연구 발표와 근황을 말하는 기회를 갖는다.

 

여천생태연구회는 내가 퇴임하던 95년 2월 21일에 미리 준비하여 「金俊鎬敎授停年退任紀念論文集」과 회원들이 투고하여 저술한 「生態學의 징검돌」을 나에게 증정해 주었다. 논문증정식은 롯데월드 에머랄드룸에서 개최했는데 생물학과에서 주관하여 학과장인 안정선 교수의 사회로 최기철 교수, 이인규 교수 및 하두봉 교수의 축사와 문형태 교수의 논문집 헌정에 이어 김준민 교수의 축배 제창이 있었다. 약 250명이 오셔서 성황을 이루었다. 내 생애를 통한 최고의 영예와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양재동연구실은 여천 생태연구회의 사무실을 겸하고 있다. 95년 3월 31일에 서초구 양재동 12-11 삼형 빌딩 401-3호에 여러 회원들이 모여서 현판식을 가졌다. 방이 좁기는 하지만 조용하여 이 방에 들어오면 나는 세속을 잊은 채 일에 열중할 수 있어 좋다.

 

여천생태연구회 회원들은 93년에 「현대생태학」을, 95년에 「고급생태학」(생태학의 징검돌)을, 96년에 「현대 생태학 실험서」를 공동으로 저술하였다. 앞으로도 이러한 공저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다. 98년부터는 여천생태연구회보를 발간하여 회원들의 1년 간 활동 상황을 교환하고 있다.

 

여천생태연구회 회칙을 보면 회원 자격을 생태학연구실 출신과 운영위원회에서 추천한 자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개방되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회원들이 지도한 제자들을 본 연구회에 가입시킬 수 있는 것이다. 모임에는 모든 회원이 참석하도록 앞으로 대학과 연구소의 근무자가 두루 참석할 수 있는 날을 정하기로 했으니 모두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눈이 싫었던 미국생활-1 (제89회) - 제14장 외국연구생활

 

나는 미국에서 1년과 일본에서 2개월의 외국 연구생활을 하였을 뿐이다. 미국에는 79년 2월 22일~80년 2월 21일에 체류하였다. 미국에는 미네소타대학교 식물학과장 D.C. Pratt 교수와 원예학과장 J.L. Ozbun교수의 초청을 받아 두 과에서 연구하였다. 미네소타대학의 교섭은 서울대에 연구 교수로 와 있던 미네소타대 교수인 D.C. Stadelman 박사가 중재하였다. 미국의 왕복 항공권, 체재비 및 도서비를 AID 계획으로 문교부에서 지원 받았다.

 

미네소타대학이 있는 미네아폴리스(Mineapolis)에 도착하기 전에 동서가 사는 Los Angeles(L.A.)에서 융숭한 접대를 받으며 나흘간 머무르면서 주변의 관광 명소를 구경하였다. 미네아폴리스로 출발하기 전에 그 가족들로부터 객지 생활에 필요한 침구, 취사도구 등을 선물로 받았다.

 

미네아폴리스 비행장에는 윤권상 선생 부인이 영접하여 짐을 날라주었는데 윤 선생은 지도 교수와의 약속시간 때문에 나오지 못한다는 전갈이었다. 자유스럽기만 한 미국 대학에서도 사제 사이의 엄격성을 엿보는 듯 하였다. 나의 숙소는 미리 윤 선생이 마련해 놓았는데 입주 날짜가 맞지 않아 하룻밤을 모텔에서 자야만 했다.

 

미네아폴리스는 「쌍둥이 도시」(twin city)라고 하여 미시시피강을 사이에 두고 두 도시로 갈라져 있었고, 식물학과와 원예학과는 세인 폴(St. Paul)이라는 작은 도시에 있다. 나는  Como가의 네거리 모통이의 2층집에 숙소가 정해졌다. 응접실과 침실 그리고 주방이 딸린  집이어서 혼자 살기에는 여유로 왔다. 2층에는 나 이외에 두 세대의 집이 있었는데 내가 입주한 뒤에 과부들이 입주하였다. 1층에는 내 집 바로 밑에 인도인의 식품 가게가 있고, 그 옆에 집주인의 수도수선 가게가 있었다. 집은 좋았지만 길가 집이어서 1년간 자동차 소음에 시달렸다.

 

미네소타는 눈이 많은 곳이었다. 비행장에 내려보니 온 천지가 눈으로 덮여 있고, 길옆에는 제설기로 쌓아놓은 눈이 높은 언덕처럼 쌓여서 자동차가 수로 속을 지나는 듯 주변 경치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눈은 4월 하순에야 비로소 모두 녹았다. 그리고 몹시 추운 곳이어서 15분 이상 걸으면 동상에 걸린다는 경고를 받았다.

 

나의 숙소는 연구실에서 15분 이내에 있었지만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온 몸에 추위가 스며들었다. 집들은 지붕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뾰족하고, 출입 현관은 지붕에서 쏟아지는 눈을 받도록 되어 있으며 또 추녀 끝에는 눈을 녹이는 전기 줄이 배선되어 있었다. 자기 집 앞의 눈은 주인이 제설하도록 의무화되어 있어 자기 집 갖기를 꺼려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두 겨울을 넘기는 동안 많은 눈이 무척이나 싫었다.

 

3월 1일에 식물학과에 들렀지만 초청해준 Pratt 교수가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원예학과의 이옥영 박사의 소개로 Ozbun 교수를 만나 연구실을 배정 받았다. 약 1주일 뒤에 Pratt 교수를 만나 식물학과에도 연구실을 배정 받았다. 윤권상 선생이 식물학과에서 박사 학위 논문의 막바지 손질을 하던 때라 자주 그의 연구실에도 들렀다. 원예학과의  Stadelman 교수는 서울대에서 근무가 끝나고 다시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에서 반년을 지내고 돌아왔기 때문에 3개월쯤 뒤에 만났다.

 

▲ 필자가 연구하던 미네소타대학교 Aldman Hall)

 

미국 생활은 식사, 세탁, 잔심부름 등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분업화된 가정생활에 길들여진 나에게는 처음에 무척 고통스러웠다. 3개월쯤 자취생활을 한 뒤 주변 사람들이 나의 건강이 나빠지는 것 같다고 충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 식사만 집에서 지어먹고 저녁 식사는 외국인 대학원생들을 위한 기숙사에서 먹기로 하였다. 그 기숙사는 연구실과 집의 중간쯤에 있어 퇴근길에 저녁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기숙사에서는 전 세계의 여러 나라 학생들과 대화할 수 있어 좋았고, 학생들이 자기 나라 음식의 조리방법을 적어내면 요리사가 비슷하게 모방한 음식을 먹여주어서 좋았다. 이 기숙사에는 이인원 선생(현 서울대 농생대 교수)이 기숙하였는데, 이 분은 세인 폴에 처음 왔을 때 숙소를 구하기 전이어서 내 집에서 며칠동안 함께 지냈다. 주말마다 윤 선생의 차에 편승하여 식료품을 사러갔고, 그 집 부근의 기계 세탁장에서 세탁을 하고는 하였다.

 

나는 연구실 생활에 익숙해진 한 달쯤 뒤에 식물의 수분관계와 광합성 실험을 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런데 광합성 장치가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고 또한 낡아서 쓸 수가 없었다. 기기를 점검하는 데만 2주일 가량 소비한 끝에 실험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수분 포텐셜(water potential)의 실험 시설은 마침 원예학과의 전임강사로 있는 L. Parsons 박사가 사용하고 있던 터라 나도 손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일요일 오후에 Parsons 박사와 시간 약속을 하고 프레쉬어 쳄버(pressure chamber)라는 기기의 사용방법을 배웠다.

 

실험 계획에 따라 강낭콩을 재배하여 수분 공급을 차단하면서 수분 포텐셜을 측정하기 시작하였다. 원예학과는 식물환경조절실, 온실, 토양 배합 시설이 매우 훌륭하였다. 화분에 담는 흙의 비율을 적어서 사무실에 제출하면 이튿날 화분에 담을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연구를 지원하는 간접 시설이 매우 훌륭하였던 것이다.

식물환경조절실은 사용자가 많아서 처음에 부분 사용으로 제한되었지만 나중에는 육 개월 가량 한 대를 나 혼자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실험 계획에 맞추어 강낭콩을 기르다가 어느 정도 자라면 수분 공급을 차단한 채 잎의 수분 포텐셜을 측정하는 실험을 되풀이하였다.

 

한편 식물학과에서는 부들에 대하여 연구하였다. 식물학과의 Pratt 교수는 미국 에너지국에서 생물 에너지에 관한 연구비를 받고 있었다. 그는 미네소타주 내에 1 만 개나 되는 크고 작은 호소에서 자라는 부들을 생물 에너지로 활용하는 기초 연구를 하고 있어 나를 그 연구 그룹에 끼어 놓았다. 자신의 박사과정 학생인 Mrs. Bonnewell과 연구생인 Mrs. Andrewsl에게 부들의 발아․생장 등의 기초연구를 시키면서 나에게는 부들에 대하여 어떠한 연구라도 해보라는 제의였다. 나는 그 제의를 받아들여 부들의 생산성, 생산구조, 수광량 및 광합성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부들은 학교에서 차로 한시간 반쯤 걸리는 미네소타주 Anoka군 Carlos Avery 야생동물보호구 내에 망망 대해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씩 Mrs. Andrews와 Bonnewell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부들 조사에 나갔다. 그녀들은 현장에 나를 내려놓으면 자기들 일에 착수하였다. 나는 긴 장화를 신고 여러 가지 기기를 가지고 혼자서 측정하고 기록을 하였다. 물 속으로 측정 기기가 빠지지 않도록 여러 가지 고안을 하였지만 물 속에서 몸의 균형을 잃어 조도계의 계기판에 손을 짚어 유리가 깨지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채집한 식물 재료는 자루에 넣어서 원예학과의 대형건조실(80℃ 유지)에 넣어 힘들이지 않게 말렸고, 잎 면적은 잎면적계에 넣어 손쉽게 측정하였다.



눈이 싫었던 미국생활-2 (제90회) -  제14장 외국연구생활

 

가을에 강낭콩과 부들의 광합성을 측정하려 했지만 역시 광합성 측정기가 불실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실험하는 한편 식물학과와 원예학과에서 주관하는 세미나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지만 강의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귀국 후에 대비해서 많은 문헌을 수집하였다.

 

이때 실험한 강낭콩의 수분관계는 1984년에 Journal of Experimental Botany 35권에 게재되고, 부들에 관한 연구는 미국에서 원고를 작성하여 Mrs. Bonnewell과 Pratt 교수의 교정을 받아 1985년에 식물학회지에 투고하였다.

 

79년 10월 25일 저녁 식사를 하러 대학원 기숙사에 오니 한국 학생들이 모여서 한국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고 쑥덕거렸다. 내용을 잘 몰랐지만 정치 구조에 변동이 생겼다는 막연한 이야기들이었다. TV에서는 막연한 보도만 되풀이하였다. 나는 집의 안부가 궁금해서 밤에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무사하다는 소식이었다. 2․3일 후에 전두환 장군의 사진이 TV에 방영되었고 박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보도되었다. 나는 6․25 동란 때에는 10일 전에 서울을 떠나서 생명에 위험을 느끼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대통령의 시해 사건을 이역만리에서 바라보게 되었고, 12월 12일에도 며칠 뒤에사  12․12 사건의 소식을 들었다.

 

미국에 있는 동안 여기 저기 여행을 많이 하였다. 미네소타대 의과대학(미네아폴리스 캠퍼스)에 강만식 교수(서울대)가 나보다 앞서 와 있었다. 나의 실험이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그는 Dallus(텍사스주)에서 미국실험생물학연합회(FASEB)가 열리니 다녀오자고 하였다. 역마직성이 있는 나는 여행하고 싶은 생각으로 Dallus행을 결행하였다(79. 4. 6.~10.). 그곳에서는 김영태, 노준희 박사와 그곳에 유학 온 조진태 선생 등 서울대 출신들을 만났다. 노준희 박사는 중요한 연구발표를 하나 듣기 위하여 사흘 동안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어 감명을 주었다.

  

6월의 어느 주말에는 강만식 교수, 그의 제자인 이종길 선생과 함께 4명의 대통령상이 바위에 조각되어있는 와요밍주의 Black Hills와 혹독한 사막의 지질구조가 적나라하게 나타나있는 Bad Lands 국립유적지를 견학하였다. 이 여행 중에 이 선생의 승용차 엔진이 밑으로 내려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하룻밤을 승용차 안에서 지새고, 이튿날은 일요일인데도 서비스 공장 주인이 친절하게 고쳐주어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 미네소타대학교 Stadelman 교수와 필자(1979. 9. 23. 미쉬간호반에서

 

이밖에도 주말에는 윤권상, 최선진, 김무남 선생과 함께 Boundary Waters Canoe Area에 카누를 타러 가거나  강만식, 송창원 교수와 함께 Mille Lacs호에 낚시를 하러 가기도 하였다.

8월에는 Oklahoma주 Still Water에 있는 Oklahoma대학교에서 미국 생물과학연합학회(AIBS)가 열려서 윤권상 선생 가족과 함께 참가하였다(79. 8. 11.~19.). 여기에서 미국생태학회 연구발표와 학자들과의 의견 교환 그리고 여러 행사에 참가하여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학회가 끝난 후  Oklahoma city를 출발하여 텍사스주-뉴멕시코주-콜로라도주-와요밍주-남다코다주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은 St. Paul에서 Oklahoma city로 갈 때의 아이오와주, 미주리주 및 오크라호마주를 합하면 중남부의 8개 주를 여행한 셈이었다. 이 여행 중에 콜로라도주의 Great sand dunes 국립유적지, 초원, 사막, 로키산의 식물 수직분포, 만년설 등 인상적인 경관을 사진으로 찍었다.

 

1979년 8월 17일 로키산에 올랐을 때는 만년설을 만져보는 신선감을 맛보았지만 승용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아 차를 미는 소동을 벌렸다. 서비스 공장의 말에 따르면 평지형 차가 고지에서는 공기중의 산소 부족으로 시동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공기의 흡입구를 크게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Demver시 부근에서는 숙소를 구하지 못하여 120 여 마일을 달린 뒤에 겨우 방 하나를 얻어 윤 선생 가족과 거북하게 하룻밤을 지내는 일도 있었다. 이 여행 중에 윤권상 선생은 하루 12~13시간씩 운전하여 마지막 날에는 안질이 생길 정도로 피로가 쌓였었다.

 

10월초에는 L.A.로 와서 미리 짜놓은 여행계획에 따라 3명의 이질들과 세 번에 나누어 여행하였다. 첫 번째는 세쿼이아국립공원-요세미테국립공원 등 시에라네바다산맥의 식생을 보았고, 두 번째는 그랜드캐니언-자이언캐니언-산호색 사구-브라이스캐니언-데즈 밸리-배드 워터 등 아리조나주-유타주-네바다주에 펼쳐진 사막 식생을 관찰하였으며, 세 번째는 홋트 스프링-요시아추리 국가유적지 및 산타카다리나섬 등 서부 해안의 채파럴(경엽수림)을 보고 다녔다.

 

79년의 연말 연시에는 Baltmore의 메리랜드대에서 연구하던 신희명 교수(서울대) 집을 방문하여 Washington에 있는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을 두루 견학한 다음 최병두 교수(서울대)와 합류하여 세 사람이 관광버스를 타고 남하하여 프로리다주 Orlando까지 여행하여 크리스머스 이브에 그 부근에 있는 디즈니랜드의 이벤트 행사를 구경한 다음 Baltmore로 돌아왔고, 다시 승용차로 북상하여 Philadelphia의 Long wood garden을 구경하였다. 이 여행에서는 미국 동부 삼림대의 남북에 뻗친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에 한 해 체류하는 동안 동부, 중부 및 서부의 식생과 지질의 오묘한 변화를 개관하였다. 나로서는 연구실에서 쓴 2편의 논문보다 여행에서 얻은 식물지리분포와 북미 대륙의 자연에 관한 자료가 더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다.

 

St. Paul에 머무는 동안 숙소를 마련하는 일부터 중남부의 여행과 귀국할 때의 짐 탁송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윤권상 선생이 교섭해 주었다. 내 집과 윤 선생의 아파트 사이는 걸어서 삼분 거리에 있었으므로 수시로 방문하여 식사를 하였고, 아이들(나영, 지영 양)이 노는 모습을 보며 나의 외로움을 달랬다. 두 달에 한번 꼴로 최선진 박사(현 서울대 치대 교수) 댁에 초청되어 푸짐한 음식을 대접받았고, 추수감사절에는 의과대학의 송창원 교수 댁에 초청되어 칠면조 고기를 대접받으며, 이옥영 박사 댁에도 자주 초대되었다. 이 밖에 힘들게 살며 공부하는 전경수 선생(현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 장직현 선생(현 서강대 교수) 등의 초대를 받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외로울 때 신세진 분들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도호쿠대학 팀과의 공동 연구 (제91회) - 제14장 외국연구생활

 

미국 생활 중 동서양의 문화 차이로 실수한 이야기 한 토막. 내 숙소 부근에 살던 김무남 교수(부산여자대학교)가 자주 놀러오곤 하였다. 김 교수가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어느 날 저녁에 내가 목욕을 막 끝냈을 때 그가 놀러 왔다. 그도 목욕하기를 원한다. 그가 욕조에 물을 더 보충하고 들어간 모양이다. 목욕이 끝난 뒤 욕실에 들어가 보니 바닥이 젖어 있어 ‘아차’ 서양식 욕실 구조를 설명하지 않음을 후회하였다.

 

이튿날 아침 집주인이 찾아왔다. 욕실 물이 1층의 식료품 가게에 새 내렸다는 항의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임 쏘리’를 연발할 수밖에. 식료품 가게의 천장에는 지워지지 않는 지도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2월에 접어드니 귀국 길이 바빴다. 책과 문헌을 정리하고 짐을 꾸려서 포장하는데 꼬박 이 주일이 걸렸다. 밤에 혼자서 짐 싸는 일은 중노동이었다. 이렇게 해서 눈의 고장 St. Paul을 80년 2월 17일에 떠난다. L.A.에서 잠깐 쉰 다음 하와이의 박만상 박사를 방문하여 3일 동안 Ohaw섬과 Hawaii섬을 견학하였다. Honululu에서 비행기로 50분 거리에 있는 Hawaii섬은 마침 3개월 전에 새로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 있었고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식생천이를 사진으로 찍어 나중에 고등하교 생물 교과서의 그림으로 이용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84년 1월 6일~3월 5일에 요코하마 국립대학 환경과학센터에서 연구하였다. 숙소는 이 대학의 국제교류회관에 체류하였고, 체재비는 일본과학재단(JSF)에서 받았다. 일본에서 연구하려는 목적은 그 대학의 미야와끼(宮脇 昭) 교수로부터 식물군락의 조사방법을 자세히 터득하는 데 있었다. 나의 체류 기간이 겨울이었지만 난대지방과 아열대지방(오끼나와)의 식생을 조사하여 곧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미야와끼 교수 일행과 오끼나와에 식생 조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 혼자 떨어져 서부 일본을 여행하였다. 가고시마(鹿兒島) 대학에 들러 다가와(田川日出夫) 교수의 안내로 사쿠라지마(櫻島)의 화산 분출 년대에 따른 식생 천이를 견학하였는데 그는 그 섬의 식생 연구로 학위를 받은 전문가였다. 벱부(別府)에서 하루를 묶고, 히로시마대학에 와서 생태학자들과 대담하고 박사 논문 발표를 들은 다음 나까네(中根周步) 교수의 안내로 시내의 원자폭탄 투하 기념탑을 구경하였다.

 

다음에 오사카시립대학에 들러 생태학 교수 및 대학원 학생과 대담하고, 나라여자대학을 방문하여 미세 조류학자 와다나베(渡辺) 교수와 이야기하고, 그곳에서 연구하고 있던 정준 교수(경북대)의 안내로 주변의 관광 명소를 구경하였다. 교토대학에 들러 구로이와(黑岩澄雄) 교수 그리고 특강하러 온 이시즈카(石塚)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특히 생태학연구실의 8명의 대학원생들과  2시간에 걸쳐 각자의 전공 분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의견을 피력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2월 3일~4일에는 도쿄대학에서 열리는 「환경의 동태에 관한 세미나」에 미야와끼 교수와 함께 참가하였는데 이 세미나의 성격은 일본 문무성에서 주는 환경 분야의 연구비를 심의하는데 있었다. 세미나에 이어 간친회 때 나에게 요청한 한국의 환경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 이 세미나에서 몬지(門司正三) 교수(도쿄대), 다가이(高井康雄) 교수(도쿄대), 구리하라(栗原 康) 교수(도호쿠대) 등과 친교를 맺게 되었고, 이분들은 그 후 나를 일본의 세미나에 초청하거나 공동 연구를 하게 되었다.

 

▲ 미야와끼(宮脇 昭) 교수(일본 요코하마국림대학)로부터 식물군락 조사법의 원리를 배우는 필자(1984. 2. 오끼나와에서)

 

요꼬하마에 체류하는 동안 그곳에 유학 온 김성덕 선생(현 충남대 교수)이나 김종원 선생(현 효성여대 교수)과 각별히 친하게 지냈다.

 

일본 도호쿠대학 팀과 서울대 생태연구실 팀은 87년과 88년에 한국 서․남해안의 하구 연안 및 간척지 토양과 생물군집에 대한 조사 연구를 하였다. 이 연구의 발단은 84년에 내가 일본의 「환경동태에 관한 세미나」(도쿄)에 참석했을 때 도호쿠대학 구리하라 교수와 첫 대면을 하고 간단한 협의를 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구리하라 교수가 86년에 한국에 와서 나와 함께 인천 주변의 간석지를 예비답사 한 뒤 양 팀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87년 6월에 구리하라 교수로부터 보내 온 「해외학술연구신청서」에 한국 측 연구원의 인적사항과 연구계획을 첨가하여 보냈다. 한국 측에서는 나와 조경제, 민병미 교수가 참여하고, 일본측에서는 구리하라 교수, 기구찌(菊地永祐) 조교수, 스즈끼(鈴木) 조수, 다께다(武田 浩) 연구원(이상 도호꾸대), 요시다(吉田勝一) 교수(도호꾸치과대학) 및 기무라(木村眞人) 조교수(나고야대학)가 참여하였다.

 

공동조사 팀은 87년 9월 22일~10월 11일의 3주 동안 화성군 남양면 청원리(야목) 앞 간석지, 태안시 남면 달산리와 당암리의 간척지 및 낙동강 하구 간석지를 조사하였다. 도호쿠대 팀은 서울의 클로버 호텔에서 유숙하고, 우리 일행은 봉고차를 세내어 현지를 왕래하며, 채취한 자료를 서울대 생태학실험실에서 처리하였다. 낙동강 하구의 조사는 비행기로 서울-부산 사이를 왕래하고 자료를 인제대 생태학실험실에서 처리하였다. 서울대 팀은 식물과 규조류를 도호쿠대 팀은 동물과 토양 자료를 분석하여 정리하였다.

 

이 공동연구의 조사 결과는 88년 8월 16일~17일에 도호쿠대 간료가이칸(艮陵會館)에서 발표회를 가젔다. 발표회에 앞서 나와 조경제 교수는 8월 10일~15일에 일본 센다이(仙台)에 가서 아오바야마성(靑葉山城)에 있는 도호쿠대학을 견학한 다음 기꾸찌 조교수의 안내로 삽포로(札榥)에 가서 북해도대학, 북해도개척기념관, 이시가리천(石狩川) 변의 식생을 관찰하고, 비행기로 아오모리(靑森)로 와서 다께다 박사와 합류하여 도호쿠대 아사무시임해실험소(淺蟲臨海實驗所)를 방문한 다음 학코다산(八甲田山)에 있는 도호쿠대 식물연구소를 방문하였다. 학코다산에서는 모찌다(持田)박사의 안내로 설전(snow patch), 황기공원(黃氣孔原) 등의 특이 식생을 관찰하였다.

 

조사 결과의 발표회가 끝난 다음 도호쿠대 생태학연구실에서 오랫동안 연안 연구를 해오던 현장, 곧 가모후(浦生) 간석지를 견학하였다. 과거에 여기에서 많은 연구를 하고, 특히 구리하라 교수의 「장場의 이론」을 도출했던 현장인데 그곳이 너무 좁고 초라함에 놀랐다. 그들은 500평 즘 되는 해안 간석지 그것마저도 일부는 인위가 가해진 해안을 대상으로 수많은 연구논문을 냈던 것이다. 그 정황으로 보아 일본에는 간석지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국내 학회활동 (제92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나는 1957년에 대한생물학회의 준회원(대학원생)으로 가입하여 석사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해는 대한생물학회가 한국생물과학협회로 개편되는 마지막 회기였다. 11월 30일~12월 1일에 고려대에서 학회가 열렸는데 무척 추운 날이었다. 종전에는 동․식물 발표를 한 곳에서 했는데 이 해부터 분리하여 발표하였다. 회무 발표가 길고 발표건 수가 많으며 도중에 단전되는 등으로 밖이 어두워서야 나는 발표하였다.

 

한국생물과학협회는 1958년부터 한국식물학회와 한국동물학회로 분리하였고 나는 자연히 식물학회 회원으로 소속되었다. 이 때부터 나는 40여 년 간 한국식물학회 회원으로 활동한다. 나의 석사논문은 58년에 생물학회보 2권 1호에 전문全文이 게재되었고, 이어서 61년부터 식물학회지에 투고하여 78년에 한국생태학회지가 발간될 때까지 계속해서 투고하였다.

한국식물학회에서는 공주사대에 부임하던 58년과 서울대로 전임하던 69년을 제외하고, 해마다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처럼 적어도 1년에 1편의 논문은 발표하겠다는 것이 나의 굳은 의지였다.

나는 한국식물학회에서 71년~80년에 이사로, 69년~80년에 편집위원으로, 81년~82년에 부회장 겸 편집위원장으로 그리고 83년~84년에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내가 한국식물학회 회장으로 봉사할 때 강영희 교수와 임양재 교수가 부회장으로, 조경제 선생이 총무간사로, 강경홍 선생이 회계간사로, 홍영남 교수가 편집간사로 수고해주셨다.

나는 학회에 대한 당면한 두 가지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하나는 흩어져 있는 식물학회지를 합본하는 일로 제1권(1958년)부터 제25권(1982년)까지를 5권으로 합본하였다. 이 사업은 낙질을 보충하고 국문 목차와 국․영문 색인을 작성하여 각 권 앞과 뒤에 붙이는 등 많은 노력勞力이 들었는데 총무간사인 조경제 선생이 기꺼이 해주어서 잘 마무리되었다. 200질을 합본하여 50질을 학회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희망자에게 분양하였다. 이 사업을 위하여 한국식물학회 재정위원회에서 200만원의 특별지원금을 받았다.

 

또 하나의 사업은 학회가 주최하여 심포지엄 및 워크샵을 여는 일이었다. 이 사업은 처음이어서 미리 앙케이트를 돌려 회원들이 흥미를 갖는 테마를 수렴하였다. 그 결과 분류학자들의 종 다양성에 관심이 가장 컸고, 다음이 생리분야에 모였다. 그래서 1차 년도에는 「한국의 희귀 및 멸종위기 식물에 관한 워크샵」(1983. 3. 17.~18.)를 서울대 약대에서 개최하였다. 이 워크샵은 이유성 교수(충북대)가 조직을 맡았고, 정영호(서울대), 임양재(중앙대), 이우철(강원대), 이영노(이화여대), 이창복(서울대) 교수가 발표자로 수고해 주셨다.

 

▲ 도호쿠대학 생태학연구 팀과의 간척지 공동연구(1987. 9. 26.). 왼쪽부터 기구찌 조교수, 필자, 민병미 교수, 스즈끼 박사, 다께다 박사

 

2차 년도에는 「식물과 빛」(1984. 7. 2.~7. 3.)에 관해서 제1일은 강연회(연세대)를, 제2일은 워크샵(서울대)을 하였다. 이 행사는 권영명 교수(서울대)가 조직을 맡았고, 정 진(서울대), 이진범(동의대), 차영일(경희대), 채 쾌(충북대), 임양재(중앙대) 교수가 발표하였고, 권영명(서울대), 이진범(동의대), 이순희(연세대), 김준호(서울대), 홍영남(서울대) 교수가 워크샵을 맡았다. 이렇게 두 번에 걸친 세미나와 워크샵이 동기가 되어 그 후 식물생명공학 심포지움으로 발전하여 해마다 큰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

한국식물학회장으로 봉사할 때의 한국생물과학협회장은 김창환 교수(고려대)였는데, 가을 총회는 83년에 서울대에서, 84년에 충북대에서 열었고, 봄 학술발표회를 83년 4월에 공주사대에서 열어 최두문, 윤권상 교수를, 84년 4월에 경상대에서 열어 김정석, 허문회 교수를 특별연사로 초청하였다.

한편 한국생태학회는 76년 5월에 창립총회가 열렸을 때 나는 창립 회원으로 참가하였고, 77년에 한국생태학회지 창간호가 발간되었을 때 논문을 투고하기 시작한 이후 꾸준히 이어왔다. 따라서 식물학회에 투고하던 논문을 70년대 후반부터 주로 생태학회지로 옮기게 된 것이다.

나는 한국생태학회가 창립될 때부터 이사와 편집 위원으로 봉사하였고, 84년~88년의 4년간은 편집위원장으로, 86년~88년에는 부회장으로, 88년~90년에는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내가 편집위원장으로 봉사할 때 편집간사인 이호준 교수(건국대)와 함께 학회지의 편집, 특히 참신한 도표의 편집방법을 쇄신하였다.

생태학회장으로 봉사할 때 김철수 교수(목포대)와 최현섭 교수(경희대)가 부회장을 장남기 교수(서울대)가 총무간사를, 민병미 교수(단국대)가 편집간사를, 조강현 교수(인하대)가 재무간사를 맡아 수고해 주셨다.

이 기간에 한국식물학회와 공동으로 심포지엄 및 워크샵을 개최하였는데, 89년에는 「식물과 토양」에 관해서 장남기 교수가 기획하여, 연사로 이희선(서원대), 송승달(경북대), 길봉섭(원광대), 문형태(공주대) 교수가, 워크샵에 문형태(공주사대), 민병미 교수가 수고하셨다.

90년에는 「식물과 환경오염」에 관하여 최현섭 교수가 기획하여, 심포지움에 김준호, 이수욱(충남대), 배정오(환경연구원), 유순호(서울대), 한기학(농기연), 장남기 박사가, 워크샵을 배정오․고강석 및 김준호․유태철(서울대) 선생이 담당하였다.

한국생태학회장으로 봉사하는 동안 마침 일본(요꼬하마)에서 제5차 국제생태학회가 열렸으므로 회원들에게 홍보하고, 여행사에 단체로 교섭하여 많은 회원이 참가하도록 하였다. 이 기간에 한국생물과학협회장은 정용재 교수(이화여대)였고, 총회는 89년 10월에 목포대에서, 90년 10월에 강원대에서 성대히 열었으며, 봄의 학술강연회는 89년 4월에 배재대에서, 90년 4월에 서원대에서 열었는데 그 대학 교수들이 잘 협력해 주어 무사히 마쳤다.

한편 나는 한국생물과학협회에 이사 또는 대의원으로 봉사하여 오다가 93년 11월~94년 10월의 1년 동안 협회장으로 봉사하였다. 한국생물과학협회는 1958년에 대한생물학회에서 계승된 학술 단체로서 한국동물학회, 한국식물학회, 한국미생물학회, 한국육수학회, 한국생물교육학회, 한국생태학회, 한국동물분류학회, 한국유전학회의 8개 학회를 회원 학회로 관장하는 연합체이다.



태평양과학회의-1 (제93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협회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이영록 교수(고려대)와 하두봉 교수(서울대)가 부회장으로, 김상구 교수(서울대)가 총무간사로, 이종섭 교수(서울대)가 편집간사로 수고해 주셨다. 이 협회는 회원 학회에서 내는 약간의 회비로 운영하며 정부 지원이 없는데도 총회, 심포지엄, 요지록 인쇄 등 경비 지출이 많았다. 그 경비를 자체 조달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마침 학술 담당 부회장인 하두봉 교수와 총무 간사인 김상구 교수가 협의하여 국내의 생물학 관련 기기․시약회사들에게 총회 기간(94. 10. 21.~22.)에 맞추어 전시회를 열도록 주선하였다. 충남대에서 열린 총회와 심포지엄은 성대하였고, 여기에 소요되는 경비는 전시회에 참여한 상사들의 협찬으로 머릿수를 맞출 수 있었다. 경제와 경영에 무뢰한인 나로서는 협회에 적자를 내지 않고 사무 인계를 하게된 것이 다행이었다.

 

학회장이나 협회장으로 봉사하는 동안 1주일에 적어도 2시간은 맡은 학회의 발전을 위하여 생각하였으며, 회원들에게 경제 부담을 최소로 줄이고 회원을 위하여 최대로 봉사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다른 학회에서 회비를 인상하더라도 그것을 가능한 한 억제하였다.

 

이상의 학회에 깊이 관여했을 뿐 아니라 나는 한국육수학회, 한국식물분류학회, 한국임학회, 한국환경농학회, 환경생물학회의 일반 회원으로 학술지를 구독하여왔다.

 

나는 75년부터 현재까지 영국생태학회(British Ecological Society), 80년부터 미국생태학회(Ecological Society of America) 및 93년부터 복원생태학회(Society for Restoration Ecology)의 회원에 가입하여 학술지를 구독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학회에 참가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나는 제11차와 제16차 태평양과학회의에 두 번 참석하였다. 제11차 학회(1966. 8. 22~9. 10.)는 토쿄에서 열렸는데 이 때가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는 기회였다. 이 무렵에 외국에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힘이 들었다. 더구나 그 당시 국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에 가는 것은  힘들었다. 외국돈을 바꾸기 어려운 것은 차치하고 외무부 여권과에서 여권을 내주지 않았고 또 일본 대사관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옆 나라에서 학회가 열렸으므로 이민재 교수님 등 학술원의 원로 회원들이 창피를 무릅쓰고 교섭을 벌여 겨우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이민재 교수님이 공주사대에 근무하던 나에게 주신 편지 내용으로 학회 참석이 어려웠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 이민재 교수님의 편지 (1966. 7.22)

 

『김준호 군金俊鎬君. 제번除煩. 그 동안 장마철에 집안식구들도  무고無故한지 궁금하구료. (중략). 태평양과학회의太平洋科學會議에 관해서는 어떤일인지 식물학회원植物學會員과 동물학회원動物學會員에게는 정식초청장正式招請狀(대회의장 도모나가 교수朝永敎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초록抄錄도 못받았다 하여 고의적故意的인 행동이 아닌가 하여 타전打電하고 국제전화國際電話를 걸고 야단법석 중이요. 상경하면 자세仔細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지요. (후략). 1966년 7월 22일. 이민재李敏載.』

이때에는 단기간의 외국여행인데도 친가와 처가의 친척들이 공항에 나와서 장도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는 등 법석을 떨었다. 그리고 문교부의 높은 관리가 공항에 나와서 우리 일행을 환송을 하였다.

 

3주일에 걸쳐 도쿄에서 열린 이 회의에 참석한 다음 참가기를 공주사대 학보(1966. 10. 10.)에 투고하였으므로 다음에 그 내용을 요약한다(p.   참고). 대회의 명예 총재는 일본 황태자(현 천황)이고, 대회 의장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이며 도쿄대 총장인 도모나가(朝永振一郞) 박사였다. 개회식은 무도관에서 각 국의 대표가 다수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발표회와 각 종 회의는 대부분 도쿄대학에서 진행되었다. 회의에는 외국 학자 2,300명, 일본 학자를 합해서 5,900명이 참가했다고 전하는데 조직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었다.

 

회의는 ①기상학, ②해양학, ③지구물리학, ④지질학 및 토양과학, ⑤생물학, ⑥농업․임업․축산 및 보존 ⑦어업, 해수 및 담수과학, ⑧영양, 공중위생 및 의학, ⑨사회학, ⑩인류학, ⑪지리학, ⑫과학정보 및 박물관의 12개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위의 여러 분과에 걸쳐 60명 이상의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이 중에서 생물학자가 가장 많았다.

 

그런데 초록을 미리 제출했는데도 한국 대표들의 참석 여부가 결정되지 않아서 학회 회보에는 한국 대표가 대부분 빠져 있어 발표 제목을 프린트한 낱장으로 배포하는 것이었다. 각 분과마다 첫 주에는 심포지움을 가졌고 제2주에는 일반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주말에는 관광 여행과 박물관, 식물원, 연구소 등의 견학을, 제3주에는 몇 코스의 장거리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첫 주에 나는「태평양 육상지역의 생태계 대사 및 생물생산성」심포지움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8월 30일(화)에 「한국 인삼의 생산성」을 발표하였는데 좌장을 소련의 Kuznetsov와 미국의 Inger 박사가 맡았다. 나의 발표가 끝난 후 Inger 박사는 ‘인삼에 대한 광선 이외에 다른 실험을 하지 않았는가?’ 라고 질문하기에 ‘다른 요인들은 다른 논문에 발표하고 여기에서는 광선에 포커스를 맞췄다’ 고 대답하였다. 나는 이 때 처음으로 국제학회에서 영어로 발표하였으므로 무척 긴장하였다. 이 회의 중에 도쿄대학은 영자신문을 발간하였는데 나와 홍순우 교수(별세)의 논문에 대하여 기사를 크게 써주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아마도 내 논문이 몬지 교수의 관심사였기에 기사화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태평양과학회의-2 (제94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도쿄대학의 몬지(門司正三) 교수와 사에끼(佐伯敏郞) 교수, 이 밖에 이와기(岩城英夫), 토오쓰가(戶塚 績) 조수 등은 종전에 문헌을 통해서 알았을 뿐인데 이 회의에서 만나 다정하게 지냈다. 몬지 교수는 나와 연구원들에게 푸짐한 식사를 대접했고, 사에끼 교수는 나를 자택에 초청하여 만찬을 대접하였다. 이 회의 때 문헌을 교환했던 기라(吉良龍夫) 교수와도 첫 대면을 하였다. 그리고 제3주에는 도쿄대의 실습 현장(서양미역취의 실험을 하던 도네가와(渡利川) 변과 잔디의 생산성을 연구하던 밭)을 안내 받았다.

 

이 무렵 도쿄대의 생태학연구실과 농학부의 구무라(玖村敦彦) 교수는 식물의 물질생산과 광합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구무라 교수의 실험실을 안내 받았을 때 그는 웃옷을 활짝 벗어 던지고 혼자서 광합성을 측정하고 있었다. 그는 실험 방법의 know how를 빼앗길까 염려하여 경계하는 눈초리였고"서양에서 온 학자라면 보여주지 않겠는데 한국 학자이니 보여준다"고 씁쓸한 말을 남겼다.

 

나는 도쿄대 생태학연구실에서 많은 문헌을 복사하고, 미쳐 복사하지 못한 문헌을 체크해 놓으면 복사해서 보내주겠다는 사에끼 교수의 언질을 받았다. 실제로 몇 달에 걸쳐 체크한 문헌들을 모두 받게 되었다.

 

이 회의 기간에 최기철 교수님의 전갈을 받고 지정된 장소에 나가보니 옛날 청주사범 시절의 은사님들과 동창생들이 모여 있었다. 20여 년만에 만난 은사님이나 동창들이 나를 알아볼 리 없지만 아무튼 반가웠다. 농업선생이던 노기시 선생이 건설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며 한턱 푸짐하게 내는 것이었다. 한국 측에서는 최 교수님, 이택준 교수(중앙대)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일본측에서는 가마쓰카 교장, 노기시 선생, 하기노 교관과 몇 명의 젊은 동창생이 참석하였다. 가마쓰카 교장은 미리 준비한 자신의 저서 「교육학 원론」을 우리들에게 주었다.

 

귀국 길에는 나가노현 기다미마끼무라(長野縣北御牧村)의 특용작물시험지에서 인삼재배 현황을 견학하기 위하여 우에노(上野)역에서 기차를 탔다. 기다미마끼무라에서는 미야자와(宮澤洋一) 기사의 안내를 받았고, 또 일제시대에 개성전매국에 근무하며 인삼 연구를 했던 오구마(大隅敏夫) 씨 집에 안내되어 밤이 새도록 나의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인삼에 관한 정보교환을 하였다.

 

다음 날은 도쿄교육대학 임산연구소를 방문하고 또 고령지高嶺地농업으로 이름난 스가다히라(管平)의 부촌을 구경하였다. 이 마을은 본래 해발 800~1,000미터의 고지에 있는 한촌寒村이었는데 채소 묘를 여름에 평지에서 기른 다음 고령지로 옮겨 재배하는 이른바 리레이 농업에 성공하여 비철기에 비싼 값으로 판매함으로써 부촌으로 탈바꿈하였다고 한다. 나는 1960년대의 한국 농촌과 일본의 스가다이라 마을을 비교하여 부러움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나를 안내한 분은 이 마을의 기술지도를 맡은 고바야시(小林) 씨였는데 그는 나가노현에서 선발한 우량한 호두를 한국에서 재배하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어 아쉬웠다. 돌아오는 길에 교토대학에서 공부하던 박일현 교수(성균관대․나의 사촌처남)를 만나 하룻밤 쉬었다가 귀국하였다.

 

▲ 제16차 태평양과학회의 리셉션에서. 앞줄 왼쪽부터 요다(依田恭二․별세) 교수(오사카 시립대), 필자, 임양재 교수(중앙대)의 대담.(서울 롯데 호텔, 1987. 8. 20~30.)

 

한편 제16차 태평양과학회의(1987. 8. 20~30.)는 한국에서 주관하여 서울(롯데호텔)에서 열렸다. 학술원 회장인 신태환 박사가 대회 의장이었다. 이 회의는 3 분야의 일반 심포지엄과 15 분야의 연구발표회 및 포스터 전시로 구성되었다.

 

일반 심포지엄: ①태평양 국가들의 과학기술 발달, ②태평양 지역의 인구와 식량, ③태평양 지역에서의 주요 자원의 전망.

 

연구발표: ①생태학, 보존 및 환경보호, ②고체지구과학, ③지리학, ④박물관과 유사기관, ⑤해양과학, ⑥산호초, ⑦식물학, ⑧임학, ⑨담수과학, ⑩곤충학, ⑪사회과학과 인종학, ⑫경제학, ⑬공중위생과 의학, ⑭영양학, ⑮과학정보와 교육학

 

나는 연구발표의 분과 ①과 전문여행에 깊이 관여하였다. 연구발표 분과 ①은 다시 ⓐ생태계 내 오염물질의 경로(접수논문 수, 8편), ⓑ육상생태계의 생산과 관리(7편), ⓒ생물지표와 환경탐사(12편), ⓓ재생자원의 보존(5편), ⓔ복원과 붕괴된 생태계(11편), ⓕ오염기상학(3편) ⓖ도시계획에 있어서 환경배려(2편), ⓗ환경교육과 연수(1편), ⓘ환경보존에 관한 지역협력(3편), ⓙ국립공원, 생물권 및 자연보호 지구의 관리(4편)로 구분되었는데 나는 ⓔ분과의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내가 맡은 「복원과 붕괴된 생태계」분과는 미리 펜실베니아 주립대의 W.E. Sopper 교수에게 편지로 좌장을 위촉하고, 발표 당일에 참석자에게 발표자의 주소와 논문제목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나와 이승우 및 김종원 선생은 공동으로 「한국 도시 주변 그린벨트의 식생 복원 개관」을 발표하였다. 발표 당일은 발표장이 초만원을 이루어 열띤 토론이 이루어졌다. 특히 총회 강연에서 발표했던 하와이대 Muller-Dombois 교수가 참석하여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나는 연구발표가 끝난 뒤 Sopper 교수를 청하여 대학로를 보여주고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다. 이 학회에는 인삼 연구로 종전부터 지면이 있던  W.G. Bailey 교수(카나다)가 지리학 분과에서「인삼: 부릿팃쉬 코럼비아 건조 내륙의 새 농경 산업」을 발표하였다.

 생태학 관련 전문여행은 다섯 분과(설악산, 낙동강 하구와 한려수도, 광릉, 속리산 및 제주도)로 나누어 진행됐는데 나는「낙동강 하구와 한려수도」를 맡았다. 이 여행을 준비하기 위하여 약 1년 전에 거제도와 한려수도를 답사하였다. 열심히 준비한데 비하여 이 여행을 신청한 손님이 한 사람도 없어 자못 섭섭함을 금치 못했다.

 

이 회의 중에 대만의 주창홍周昌弘 교수와 일본의 구로이와(黑岩澄雄) 교수 그리고 카나다의  W.G. Bailey 교수를 모시고  DMZ 안에 들어가 인삼밭을 구경시켰는데 그들은 인삼밭에도 매료되었지만 삼엄한 DMZ에 들어갈 수 있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두고두고 그 때를 회상하고 있다. 주창홍 교수는 여권을 마침 호텔에 놓고 왔기 때문에 DMZ에 들어가기가 어려웠지만 나의 교섭으로 출입이 무사 통과되어 더욱 인상에 남는 듯 하였다.

 

한국에서 주최한 큰 회의인 만큼 한국 학자들의 고생이 컸지만 2,000명의 외국 학자와 700편의 논문을 발표하게 되어 성공적이라는 평이었다. 이 회의에서 조직위원장에게 준 기념접시를 나는 아직 간직하고 있다.



국제생태학회-1 (제95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이 학회는 제1차 회의가 1974년에 Hague(네덜란드)에서 열렸고, 나는 제4, 5 및 6차 회의에 3번 참석하였다. 제4차 국제생태학회에 참석한 다음 한국생태학회(1986. 11. 1.~2. 한양대)에서 참가 보고를 하였으므로 그 내용을 다음에 옮겨 놓는다.

 

제4차 국제생태학회는 미국의 State University of New York(SUNY)와 Syracuse University에서 1986년 8월 10일~16일에 개최되었다. 국내의 생태학도들을 위하여 그 학회 내용을 자세히 기술한다.

 

본 학회는 INTECOL(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Ecology), ESA (Ecological Society of America) 및 ISEM(International Society of Ecological Modeling)이 공동 주관하고,  SUNY의 College of Environmental Science and Forestry의 개교 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치한 것이다.

 

학회 참석 인원은 줄잡아 2,000 명으로 추산되며, 약 1,200 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소장 학자들이 대부분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6 분야로 구분되었다. ①plenary, ②symposium, ③contributed paper, ④poster, ⑤workshop, ⑥field trip.

 

(A). 총회 강연(plenary)은 전 회원이 한 회의장에 모여서 매일 오전에 30분씩 진행되었는데, 그 주제는 현대 생태학의 새로운 관심사이고 장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며, 생태학의 선각적 연구자들이 장기간에 걸쳐 수집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참신한 학설 또는 방법론을 제시하였으며, 그 발표자는 해당분야의 원로급 학자들이었다.

 

①F. Bourliere., Tropical ecology: its origins, problems and constraints,  ②T. Rosswall, Prospects in microbiology,  ③G.P. Patil, Statistical ecology from a theoretical and applied perspective,  ④W. Grodzinski, Industrial stress on ecosystems,  ⑤A. Naveh, Landscape ecology: an integrative and multidimensional approach,  ⑥J. Blondei, From biogeography to life history theory: a multithematic approach, ⑦O.T. Solbrig, Coevolution and adaptation,  ⑧H.A. Mooney, Global connections in ecology.

 

(B). 심포지움은 주관 학회인 INTECOL(22 주제), ESA(11주제) 및 ISEM(4주제)에서 도합 37 주제가 발표되었는데 각 주제마다 5~7편의 논문이 약 3시간에 걸쳐 열띤 발표와 토의를 하며 진행되었다. 그 중의 한 예를 들면, INTECOL symposium의 한 주제인 「Reductionism and holism in ecology」에서는 생태계의 철학적 배경인 환원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하여 과거에는 이론에만 치우쳤는데 이번 학회에서는 식물, 동물, 미생물, 진화, 수학(통계학) 등 각 분야에서 얻은 실험 결과를 근거로 생태계의 창발성 원리(emergent property principle)를 실증함으로써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밖에 본인이 흥미를 가진 심포지움의 제목은 ①Ecological processes in coastal zones, ②Ecological management of coastal zones, ③Ecological evidence to assess acid deposition, ④Modeling complex systems, ⑤Nutrient cycling in intensive managed ecosystems, ⑥Optimal control theory 등이었다.

 

(C). Contributed paper session에서는 649편의 논문이 55 분과에서 발표되었다. 현재 한국 생태 학도는 관심이 적지만 외국 학자들에 의하여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분과의 예를 들면, Seed dispersal and seedling survival, Ecological modeling, Plant demography, Agroecology and agroecosystem, Plant reproductive ecology, Toxicity testing and environmental monitoring 및 Urban ecology 등이었다.

 

▲ 필자의 연구실을 방문한 외국 교수들. 왼쪽부터 조강현 군, 이승우 군, 구로이와 교수(교토대), 필자, 주창홍 교수(대만 과학원), 서계홍 군

 

(D). 포스터 분과는 미국 국내 학자들에게 권장한 탓인지 5일 동안 매일 99~125편, 합계 540편의 많은 논문이 전시되었고, 연구 결과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여러 기술이 동원되었다. 이 포스터들은 (1) 육상식물, (2)수중(습지)생물, (3)육상동물(천이, 모델링 등 포함), (4)식물개체군(천이, 생리생태학, 응용생태학 포함), (5)농경생태학(경관, 식생, 인류생태학 포함)으로 분류되어 하루 동안 전시되었는데, 13:00~14:30 사이에 전시자와 관람자 사이에 토론하도록 계획되고 있었다. 포스터 분과에서 주목되는 내용은「Microcosm responses to Daphnia mortality(by Taub, F. B. et al.」로서 환경오염물질을 microcosm에 처리하여 simulation한 방대한 data로 complex ecosystem에서 오염물질의 작용 기작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E). 웍크샵은 제3․4일째에 14개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분과에서는 거대 생태계의 평가, 생태계 관리, 농경생태계의 에너지, 물질 및 수확량의 상호관계, 수중의 먹이망에 대한 미생물의 역할, 자원개발, 자연보존에서 생물지화학환의 중요성 및 열대 생태계 등이 다루어졌는데 주로 새로운 개념정립, 방법의 개발에 대한 주제 발표와 토론이 있어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F). 이 밖에 30개 코스의 길고 짧은 야외 여행이 계획되었는데 반나절의 여행은 활발했지만 장기간(2~3일 또는 15일)의 여행은 참가자가 적어서 취소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미루어 참가 학자들이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없는 듯 하였다.

 

(G). 본 학회에 한국에서는 길봉섭 교수(원광대)와 본인, 그리고 현지에 유학중인 생태학 또는 환경학 전공 학도 3명(조도순,홍욱희,최영돈 씨) 등 모두 5명이 참석하였다. 본인과 민병미(단국대) 군은 「해안염습지의 개간 후 식물종과 토양의 관계」를 발표하였다.

 

(H). 한국에서 참가한 겨우 두 명의 초라한 참가자 수에 비하여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20명(여자 1명) 이상의 학자가, 중공에서도 약 20명(여자 3명)의 학자가 당당하게 참가하고 있었다. 특히 중공 학자들은 과거에 보이던 집단 행동이 아닌, 자유스럽고 의젓하게 개인 행동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중공 학자 중에서 Yang, Hang-Xi 박사가 장백산(백두산)의 침엽수(잣나무)-활엽수 혼효림의 천이를 발표하여 그 쪽의 정보를 다소 입수할 수 있었다.

 

(I). 다음에 열리는 제5차 국제생태학회는 이번 회기 중에 일본 학자들이 INTECOL에서 맹렬히 유치 운동을 벌린 결과 요코하마에서 1990년 8월 4-10일에 개최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들은 요코하마 학회를 위하여 80만 불의 예산을 편성하고 있었다. 다음 요코하마 학회에서는 우리 젊은 생태 학도들이 다수 참석하여 훌륭한 논문을 발표하여 당당하게 국제생태학회에서 우리의 업적을 빛낼 것을 기대한다.

 

이 학회 중에 쉬는 날을 골라 미국 유학 중 회의에 참가했던 조도순 선생(현 가톨릭대 교수), 홍욱희 선생(현 한전기술연구원 부장) 및 최영동 선생(현 미국 퍼듀대 교수)과 함께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였다. 미국에서 여름에 열리는 국제 학회는 숙식을 대학 기숙사에서 제공하기 때문에 경비가 절약되어 좋았다. 귀국 길에는 뉴욕에 거주하는 박종욱 박사(현 서울대 교수)의 안내로 이틀 동안 뉴욕 시내의 명소를 구경하였다.



국제생태학회-2 (제96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제5차 국제생태학회는 1990년 8월 23일~30일에 일본 요코하마 (Prince hotel)에서 열렸다. 이 학회의 공동의장은 Dr. F.B. Golley와 Dr. H. Kawanabe이고, 의제는 「21세기를 위한 생태학 전망의 개발」이었다. 생태학계의 최고 권위자들이 다음 제목으로 8 분야에서 매일 30분씩 총회 강연을 하였다.

 

①F.B. Golley, Develepment of the ecosystem concept: a search for order, ②Y. Ito, Development of ecology in Japan, ③W.D. Hamilton, Ecology of sex, ④H.W. Levi, Chernobil fallout and its radiological impact in Europe, ⑤T. Kira, Forest ecosystems of east and southeast Asia in global perspective, ⑥J.I. dos R. Furtado, Ecologically-based strategies for conservation and development in the tropics, ⑦J.S. Steele, The role of physical processes in marine ecology, ⑧R.M. May, Species diversity and community stability.

 

심포지엄은 109분야로 나뉘고, 1 분야 당 5~23편, 모두 622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어떤 심포지엄에서는 미리 조직위원장이 개론을 발표하고 논문 발표를 끝낸 뒤 일반 토의와 폐회 인사의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포스터 분과는 30 분야로 나뉘어서 모두 1,133편의 논문이 전시되었고, 워크샵은 3 분야에서 비교적 단출하게 개최되었다.

 

나는 조강현 군(현 인하대 교수)과 공동으로「수생생태계 내 원소의 생물지화학환」분야에서「한국 팔당호에서 영양소 수용원으로서의 대형수생식물의 역할」을 발표(연사는 조강현 군)하였는데 조직위원장인  Hultberg 박사가 ‘한국에는 정화시설이 없어서 수초로 물을 정화하려고 하는가?’ 라고 질문하여 ‘상수원에 적용하려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정연숙 교수(강원대)와 공동으로 식물의 개체군생태학 분야에서「산조풀의 공간생장과 라멧의 동태」를 포스터 분과에서 발표하였다.

 

이 학회의 개회식은 주최자의 연설 중간과 끝머리에 가나가와 교향악단이 장엄한 합주를 하여 매우 인상적이었다. 어느 국제 학회에서나 있기 마련인 연회(banquet)가 밤에 열렸는데, 일본의 큰 술통을 터트리며 나무로 만든 입방형 술잔(우리 나라의 되)을 나눠주고, 요코하마시 주민들로부터 기증 받은 골동품, 그림 등을 경매에 부쳐서 높은 값을 부른 학자에게 나눠주는 기발한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의 사회를 INTECOL 회장인 Golley 박사가 맡았는데 그 분의 원맨쇼가 아주 재미있었다.

 

▲ 제6차 국제생태학회(1994. 8. 21-26. 영국 만체스터) 대회 의장인 J. Lee교수 댁의 만찬에 초대된 한국 학자들. 왼쪽부터 김철수 교수(목포대), Lee 교수(Manchester 대), 필자, 김철수 교수 부인, 이점숙 교수(군산대), Barbara 여사, 아내, 앞줄은 임병선 교수 아들들

 

일본은 물가가 비싸서 회의 기간 중 호텔에서 생활하기가 어려웠는데, 종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미야와끼(宮脇 昭) 교수의 주선으로, 어느 기업의 영빈관(guest house)에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이 영빈관은 회의장에서 가까워서 걸어 다녔다. 그러나 함께 참가한 국내 학자들이 원거리의 불편한 숙소에서 통근하는 것이 무척 민망하였다.

 

이 학회가 열리던 해에 나는 한국생태학장을 맡고 있었으므로 많은 회원이 참가하도록 일찍부터 홍보하고, 항공권을 싼값으로 사도록 여행사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서 58명의 생태학자들이 참석하였고, 내 연구실 출신들도 여러 명이 참가하였다.

 

이 학회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은 일본 천황과 그의 둘째 아들을 만난 것이다. 8얼 25일에 공동 의장인 Kawanabe교수가 한국생태학회 회장을 찾는 게시가 붙어 있어 그를 만나보니 내일 정장 차림으로 오후 4시에 본부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사유를 물으니 어물어물하면서 천황을 만날 예정인데 매스컴이 알면 따라붙을지도 모르니 비밀로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튿날 본부에 모인 사람들은 각 대륙에서 온 한 사람씩과 일본에서 셋 그리고 이웃 나라 한국에서 나, 모두 열 명의 학자였다.

 

콜택시에 분승하여 요코하마에서 궁성(토쿄시 소재)을 행한다. 궁성 안의 현대식 건물인 영빈실에 안내된다. 천황은 사진에서 보던 전형적인 일본 사람형, 그의 둘째 황태자를 대동했는데, 미남형이다. 천황은 영국식 발음의 영어가 유창하다. 젊었을 때 영국에서 공부했다고 자기 소개를 한다. 천황과 아들은 다같이 물고기 전문 학자여서 물고기의 이야기를 많이 하였고, 천황은 한국의 물고기 학자 전상린 박사(상명여대 교수)의 안부를, 황태자는 한국의 메기에 대하여 묻는다. 천황에게 언제쯤 한국에 오겠느냐고 묻자 외무성 소관이니 나는 모른다고 잘라 말한다. 사진 촬영은 일체 금물, 그래서 아쉬웠다.



국제생태학회-3 (제97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제6차 국제생태학회는 INTECOL과 BES(British ecological society)가 공동 주관하고, J.A. Lee 교수(Manchester 대)가 대회 의장이 되어 1994년 8월 21일~26일에 영국 Manchester대학에서 개최되었다. 이 학회의 주제는 「환경 변화에 대한 도전의 총 전진」이었다. 개회식은 Manchester시의 Free Trade Hall에서 열렸는데 Williams Fairey Engineering Band가 영국 전통 음악을 합주하고, 몇 사람의 환영사에 이어 BBC 방송사에서 젊은 생태학자상을 주는 시상식이 있어 특이하였다.

 

이 학회는 3 분야의 주제 심포지움을 각각 세 학자들이 발표하였다. 첫째 주제는 「과거로부터의 배움」이고, 여기에는 ①S. Conway-Morris, Ecology in deep time, ②J. Salo, Long-term environmental instability and the biodiversity of the upper Amazon, ③J. Menken, Population growth and fertility change: lessons from the past about the future. 둘째 주제는 「우리 경험 밖의 예측」이고, 여기에는 ①R. May, Predictions and dynamics of natural and managed populations, ②D. Pauly, Making predictions and managing multspecies communities. ③C. Prentice, Prediticting vegetation change at the global level. 셋째 주제는「관리의 변화와 불확실성」이고, 여기에는 ①J. McGlade, Integrated management and governance of natural resources, ②J. Sarukhan, Priorities and actions for conservation in a megadiverse developing country, ③M.K. Tolba, Understanding the environment.

 

이상의 주제들은 과거에 한국 생태학자들이 접근하지 않았던 내용이었고, 또한 세계의 정상급 생태학자들이 45분간씩 발표하여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청중들은 학회 주최국인 영국의 높은 차원이 엿보인다고 평가하였다. 일반 심포지엄은 열다섯 분과로 나뉘고 각 분과는 다시 4~6개의 소분과로 나뉘어서 모두 973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①Population dynamics and conservation(접수된 논문 수: 78편), ②Communities and ecosystems(79편), ③Plant ecophysiology and climate change(71편), ④Biodiversity and evolution(58편), ⑤Ecological management(69편), ⑥Landscape ecology, conservation and restoration(77편), ⑦Pollution and ecotoxicology(39편), ⑧Cold-land ecosystems(60편), ⑨Forest ecology(74편), ⑩Wetland ecology(58편), ⑪Aquatic and microbial ecology(70편), ⑫Ecology and society (52편), ⑬Ecology of the human environment(64편), ⑭Techniques in ecology(64편), ⑮Other symposia(60편).

 

포스터 분과는 다섯 분야로 나뉘어져서 807편의 논문이 전시되었다. ①Population dynamics and conservation(177편), ②Plant ecophysiology and environmental change(158편), ③Pollution and ecotoxicology(153편), ④Ecological management(162편), ⑤Cold-land ecosystems(157편).

 

▲ 제14차 국제식물학회 회의장 앞에 선 필자 (1987. 7. 24. 서베를린)

 

나는 포스터 분과에서 「보리수나무 개체군의 동태와 생장」에 대하여 김경범, 유영한 군과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주제 심포지엄 중의 둘째 주제에 참석하여「개체군과 군집의 변화 예측」에 대하여 궁금했던 내용을 들었으며, 일반 분과에서 주로 Plant ecophysiology; responses to elevated CO2,, Controled ecosystems, Pollution; source, effects and assesment 등을 들었다.

 

학회 주관의 여행은 두 곳에 참가하였다. 8월 25일에 계획된 UCPE TIGER Harpur Hill 코스는 조직위원장인 J. Grime 교수가 자신이 연구하는「식물생태학 및 지구온난화연구센터」에 안내하였다. 그 곳은 Manchester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비스듬한 언덕인데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 자외선 증가 및 기온 상승에 따른 식물 종의 변화와 반응을 실험하는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그곳의 시설을 찍은 슬라이드를 한국생태학회에서 소개하였다(1994. 10. 21.~22. 충남대). 8월 26일에는 하루 동안 북 Wales 지방의 한 자연보호지구에서 식물과 양이 어우러져 사는 모습과 heath 군집을 볼 수 있는 Snowdonia를 여행하였다.

 

이 학회는 준비가 다른 나라에 비하여 뒤떨어졌고, 미국 학자들이 대거 불참하고 주로 유럽학자들이 참석하였다. 특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대회 의장인 Lee 교수와 그 부인인 Barbara 여사가 우리 부부, 김철수 교수(목포대) 부부 및 임병선․이점숙 교수(군산대) 가족을 바쁜 와중에도 불구하고 자택으로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어 주셨다. 그 집의 정원은 Manchester 주변의 야생화, 특히 여러 종류의 heath가 꽃을 피워 인상이 깊었다. 나는 그 만찬에서 너무 기분이 좋아서 만취했기 때문에 다음에 이은 학회 연회(banquet)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학회 첫째 날 Manchester 대학의 Whitworth Hall에서 등록할 때 나는 등록 서류를 들고 무심히 줄서 있었다. 그런데 종전에 여러 국제학회에서 만났던 미국, 유럽, 일본 학자들이 Dr. Kim!을 부르며 다가오지 않는가. 나도 반가워서 인사를 나누었다. 이 광경을 본 아내는 나중에 ‘당신은 외국학자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 참 좋겠소. 나도 학자의 아내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국제 생태학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한국 생태학자들은 단체로 유럽 여행을 하였다. 8월 12일에 김포를 출발하여 로마(이태리), 아테네(그리스), 파리(프랑스,), 런던(영국)을 거쳐 21일에 회의장에 도착하였다. 이 여행 중에 로마의 바티칸 박물관에서 인파에 밀려 일행의 한 부인이 길을 잃음으로써 전원이 곤혹스러웠고, 아테네의 에게해에 산재하고 있는 히드라 섬-폴로스 섬-애기나 섬을 항해할 때 최현섭(경희대) 교수가 이태리 관광객들과 어울려서 한국 민요와 이태리 민요를 합창하는 모습은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이루었으며, 파리에서는 루브르 박물관, 몽마르뜨 언덕, 베르사이유 궁전 등을 보았고, 런던에서는 큐 식물원과 대영박물관을 빠트리지 않으며 Oxford 대학과 Eton school을 방문하였다.

이 여행에는 우리 부부, 김철수 교수 부부, 길봉섭 교수 부부, 김상준 교수 부부, 최현섭 교수, 김창환 교수, 이인숙 교수, 이옥경 교수 등이 참가하였다.



국제식물학회 (제98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나는 제14차와 15차 국제식물학회에 각각 참석하였다. 제14차 학회는 1987년 7월 24일~8월 1일에 서 Berlin(독일)에서 개최되었다. 대회 의장은 K. Esser 교수. 이 학회에서는 24과제의 특별강연과 7개 분야의 일반 발표가 있었으며, 각 분야는 다시 소분과로 나뉘어 모두 2,887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국내의 식물학도를 위하여 학회 내용을 자세히 기술한다.

 

일반 발표는 ①Metabolic botany(62소분과․530편), ②Developmental botany(46소분과․328편), ③Genetics and plant breeding(41소분과․328편), ④Structural botany(40소분과․342편), ⑤Systematic and evolutionary botany(75소분과․595편), ⑥ Environmental botany(79소분과․672편), ⑦General symposia and sessions(12소분과․92편)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 밖에 밤에 독일 시민을 위하여 독일어로 식물학 강연이 열려서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었다. 이 학회의 특징은 학회에 앞서 나흘간 식물 종명 규약에 관한 회의가 열렸었다.

 

이 학회는 새로 지은 국제회의센터에서 열렸는데 개회식장의 연단 앞을 독일의 야생화로 빽빽이 장식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개회식은 Westfälisch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브람스의「대학축전 서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의장이 짤막한 개회사를 하고, 와그너의 웅장한 「뉘른베르그의 명가수 전주곡」이 연주된 다음 베르린 시장이 환영사를 하며, 다시 베토벤의「레오노레의 서곡」이 장엄하게 연주되고 이어서 국제생물과학연맹 부회장이 인사말을 한 다음, 쉬만의「3번 교향곡(라인강)」이 울려 퍼진 뒤 독일 식물학회장이 환영사를 하고, 또 다시 R. 스트라우스의 「돈주앙」이 연주되며 마지막으로 독일 식물학사를 발표한 뒤 J. 스트라우스의 「박쥐의 서곡」이 연주되어 개회식이 끝났다.

 

사회자나 가슴에 꽃을 꽂은 연사가 없이 두 시간에 걸쳐 개회식은 물이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참석자들은 모두 숨을 죽이며 차원 높은 교향악단의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때마침 중동에서 국제 테러가 일어나서 유럽은 온통 긴장 분위기였고, 대회장 출입에 엄격한 신분증 조사가 있었다. 그래서 아내가 대회장에 출입할 때 내 명찰을 달고 다닌 촌극이 벌어졌다.

 

나는 7월 25일에 「한국 소나무림의 자연재생 특히 유묘 보충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는데 카나다와 일본 학자들이 와서 문헌을 요청하였다. 한국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합해서 모두 12명이 참석하였다. 영국에 유학중인 김준철 박사(현 강원대교수)를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웠고, 오용자, 강빈구, 소웅영, 조덕이, 최관삼 교수, 본인 등 몇 사람이 휴게실에서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이 학회에 나는 아내와 함께 참가하였는데 독일이 통일되기 전이기에 Frankfrut에서 서 Berlin까지 밤차로 동독 영내를 관통하였다. 남녀가 따로 침대차를 탔고, 차표를 검사할 때 사놓았던 침대차 표를 찾지 못하여 차장이 동독 땅에 내리라고 위협하는 바람에 침대차표를 두 번 사는 아니꼬움을 당했다. 나중에야 찾은 차표를 가지고 차장에게 물려달라고 했지만 거절하는 것이었다. 아마 나의 영어 회화가 서툴고 차장의 영어 실력도 부족하여 의사 소통이 안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 베를린 장벽을 구경하는 필자 부부(1987. 7. 27.)

 

휴회하는 날(7월 28일)에 우리 부부는 베르린 식물원, 부텐베르그문,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진 베르린 장벽 등을 견학하였다. 학회가 끝난 뒤 우리 부부는 약 2주간 기차(유레일 패스 이용)를 타고, 브르셀(벨기에)-암스테르담(네덜란드)-뮌헨(독일)-인스브르크-비엔나(오스트리아)-쮜리히-베른-제네바(스위스)-파리(프랑스) 등 서부 유럽을 여행하였다.

 

제15차 국제식물학회는 1993년 8월 28일-9월 3일에 일본 요코하마 (Pacifico Yokohama)에서 열렸다. 이 학회의 회장은 M. Furuya 박사이고 명예회장은 나루히토 황태자였다. 이 학회는 2개의 총회 강연과 8개 분야에서 특별강연을 가졌다.

 

특별강연은 ①H.H. Iltis, The evolution of Zea mays: the catastrophic sexual transmutation theory, 10 year later, ②H.A. Mooney, The development of global ecology, ③P.B. Green, Pattern formation in flowers and shoots: a biophysical mechanism, ④D.J. Morre, Regulation of membrane traffic, ⑤M.H. Zenk, Activation of defense systems of plants by jasmonates, ⑥Y. Anraku, Genetical and cell biological studies of vacuolar morphogenesis and vacuolar acidification in Saccharomycetes cerevisiae, ⑦W.J. Peacock. The molecular basis of vernalisation and the initiation of flowering, ⑧R.N. Beachy, Application of biotechnology to agriculture: promises, realities, and responsibilities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심포지엄은 8개 분야에서 215 소분과로 나뉘어 논문 2,205편 (실제로는 1,663편)이 발표되고 포스터 2,183편이 전시되었다.

 

심포지엄은 ①Systematics and evolution(32소분과․논문 200편, 포스터 371편), ②Ecology and environmental botany(34소분과․논문 195편, 포스터 414편), ③Structure and its dynamics(27소분과․논문 157편, 포스터 197편), ④Phytochemistry and natural products(26소분과․논문 140편, 포스터 230편), ⑤Metabolism and bioenergetics(16소분과․논문 87편, 포스터 149편), ⑥Growth and development(23소분과․논문 118편, 포스터390편), ⑦Genetics (26소분과․논문 139편, 포스터 172편), ⑧Biotechnology and productivity (27소분과․논문 129편, 포스터 260편),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나는 Ecology and environmental botany 분과에서「삼림 쇠퇴의 원인 요인과 돌로마이트 산포에 의한 복원」을 발표하였는데 영국의 M.R. Ashmore 교수(Imperical College of Science and Technology and Medicine)가 질문하고 문헌교환을 제의하였다.

 

이 학회 중 나는 경비를 아끼느라고 무척 고생하였다. 송승달 교수(경북대)가 내 숙소를 애써서 물색하였는데 값싼 곳이어서 1 평 반 정도의 좁은 방에 접는 나무침대였고, 숙소가 차를 타기에는 가깝고 걷기에는 먼 거리에 있어 회의장까지 다니는데 무척 힘이 들었다. 요즈음 일본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서 국제학회를 열을 경우 외국인에게 봉사하느니보다 돈을 우려내는데 주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국제 식생학회 및 조사 여행-1 (제99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이 회의는 주로 유럽과 일본의 식생학자들이 마치 한 가족처럼 친숙하게 교유하는 모임이다. 식생학의 태두인 Braun-Blanquet와 그 학맥을 이은 Tüxen의 제자들이 주로 모이기 때문이다. 나는 ‘84와 ’92(제 35차) 국제식생학회에 두 번 참가하였다. ‘84 학회는 나와 일찍부터 알고 지내던 미야와끼 교수(요코하마국립대)가 주관했기 때문에 그 분이 임양재 교수(중앙대)와 나를 특별 초청하여 약간의 경비를 받으면서 참가하였다.

 

‘84 국제 식생학회는 1984년 8월 1일~16일에 일본 각지의 보존 식생과 인위 식생의 조성․구조․역사․분포․형성 원인․발달 및 입지 조건과 인위 조건의 관계를 외국 학자들에게 보여주고 비판을 받은 다음 17일~19일에 도쿄에서 연구발표를 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84 식생학회 조사 여행의 여정旅程은 다음과 같았다.

 

8월 2일: 요코하마(橫濱)-히라쓰카(平塚)․에노시마(江之島)와 쇼난해안(湘南海岸)견학-오다하라(小田原)-하꼬네산(箱根山)-고텐바(小天場)-후지시(富士市)

8월 3일: 후지시-후지산(富士山) 등정-시즈오카(靜岡․고고꾸진자 경내의 식생 관찰)

8월 4일: 시즈오카-구노산(久能山) 식생 관찰-미쓰이노모리(三井の森) 천연림 관찰

8월 5일: 미쓰이노모리-시마가레야마(縞枯山) 등정-야고다께(八岳)-다데시나 고원(𥲿科高原)-키리가미네(霧峯) 고층습원 답사-미쓰이노모리

8월 6일: 미쓰이노모리-마쓰모토(松本)-오마찌(大町)-다테야마(立山) 등정-쿠로베(黑部)댐 도선-미다가하라고원(三田原高原) 등정-도야마(富山)

8월 7일: 도야마-후쿠이(福井)-쿠치기(朽木)

8월 8일: 구치기-비와호(琵琶湖) 도선-오오쯔(大津)-나라(奈良)-아사히노모리(朝日の森)

8월 9일: 아사히노모리-가시하라(樫原)-사까이(堺)-다나가와(田乃川)-오사카만(大阪湾) 도선 -고베(神戶)

8월 10일: 고오베-로코산(六甲山) 답사-희메지(姬路․히메지성 견학)-오사카(大坂) 야간 열차 승차

8월 11일: 사카다(酒田) 하차-도가이산(島海山) 등정-사카다

8월 12일: 사카다-하구로야마(羽黑山․삼나무림 견학)-사가에-야마가다(山形)-다가하다(高畠․민박)

8월 13일: 다가하타-요네자와(米澤)-히바라호(檜原湖)-고리야마(郡山)-이마이찌(今日市)-니코(日光)-난타이산(男體山)통과-가타시나(片品)

8월 14일: 가타시나-오제가하라(尾灝ケ原) 고층습원 답사-오이가미(老神․ 온천욕)

8월 15일: 오이가미-누마다(沼田)-마에바시(前橋)-도쿄(東京)-치비(千葉)

8월 16일: 치바-기미쑤(木更津․도쿄 유가우라 화전 및 신일본제철 회사의 인위 식생 견학)

8월 17일-19일: 심포지움(도쿄)

 

▲ `84 국제 식생학회(일본) 조사여행 중 오제가하리 고층습원을 조사하는 필자(1984. 8. 1.4.)

 

이 조사 여행은 약 90명(일본학자 포함)의 학자가 버스․기차․배로 순회하는 복잡한 여정이었지만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후원하여 일각의 오차도 없이 잘 진행하였고, 일본의 생태학자들이 총 동원되어 자기 고장의 식생과 생태학적 특징을 소개하여 참으로 부러웠다.

이 조사 여행 중에서 특히 인상에 남는 사항은 쇼난해안에서 태평양의 센 바람에 저항하는 방풍림시험장(8월 2일), 후지산 중턱까지의 등산(8월 3일), 다테시나 고원의 넓은 산지초원과 작은 유목幼木에서 키 큰 성목을 거쳐 죽어 가는 침엽수의 줄줄이 겹친 띠(帶)가 한 산을 덮은 사마가레야마의 특이한 식생(8월 5일), 일본 알프스(해발 2,450m)의 식생 보존을 위한 도로리버스․케이불카․산악버스의 연결에 의한 관광객의 수송(8월 6일), 나라의 동대사東大寺의 1천3백년 묵은 목조건물의 웅장함(8월 8일), 다가하다시에서의 민박과 하구로야마에서의 3백년 전에 식수한 585개의 삼나무 수림(8월 12일), 니코의 아름다운 식생과 난타이산 아고산대의 식생 복원 현장, 가타시나(片品)온천의 온천욕(8월 13일) 및 오제가하라 고층 습원의 목도木道에 의한 보존(8월 14일), 도쿄 주변의 유가우라(紬浦)화력발전소와 신일본제철회사의 성공한 인위 식생(8월 16일) 등이었다.

 

심포지엄이 시작되는 날 저녁에는 Braun-Blanquet 생신 100주년(1973. 8. 3. 96세에 사망)과 Tüxen 타계 추모 행사가 있어 유럽 학자들의 스승을 기리는 숙연한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이 여행을 통해서 나는 유럽의 여러 학자들과 친숙하게 지냈다. 특히 H. Lieth 교수(독일), H. Ellenberg 교수(독일), S. Pignatti 교수 부부(이태리), E. Hübl 교수(오스트리아), A. Skogen 교수(노르웨이), C.H. Gimingham 교수 (뒤에 영국에서의 임병선ㆍ이점숙 교수의 영국 내 연구 생활을 의론함), F. Klötzli 교수(스위스) 그리고 수많은 일본 학자들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다.

 

사까다(酒田)시에 들렀을 때(8월 11일) 나는 시민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가졌다. 연설에 앞서 이 고장은 동해에서 부는 센 바람을 막아주는 소나무 방풍림이 해안 사구에 조림되어 있었는데 그 소나무림 속으로 아까시나무가 침입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연설에서 방풍림 속으로 침입하는 아까시나무를 2.4-D를 이용하여 제거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소나무가 죽는다고 경고하였다. 몇 달 뒤에 사까다시의 한 공무원으로부터 아까시나무를 제거하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달라는 편지를 받고 답장을 한 적이 있다.



국제 식생학회 및 조사 여행-2 (제100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이 조사 여행 중에는 머무는 고장마다 각 지방 자치 단체에서 향연을 베풀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8월 12일에는 다가하다(高畠)시에서 하구(羽偶) 씨 집에 민박을 하였는데 그들은 양력으로 추석을 쇠고, 집안에 큰 신주神主를 모시는 특이한 일본 풍속을 간직하고 있어 한국과 다름을 알게 되었고, 유럽학자들도 일본 문화에 흠뻑 녹아드는 듯이 보였다.

 

‘92(제 35차) 국제 식생학회는 1992년 9월 21일~10월 5일에 상해上海(중국)에서 열렸다. 이 학회는 상해 화동사범대학華東師範大學의 송영창宋永昌 교수가 초청하였다. 처음 이틀 반 동안 상해국제교육회관에서 연구발표회가 열리고, 다음 하루 반 동안 상해 주변의 관광 명소를 견학한 다음 9월 26일-10월 5일에 상해 남쪽의 저장성淅江省, 안휘성安徽省 등 약 450 킬로미터 거리를 여행하였다.

나는 9월 23일의 도시생태계분과에서 A. Vogel 박사(독일)와 공동 의장을 맡는 한편, 「한국의 도시 근교에 보존된 그린벨트의 복원과 취약성」을 발표하였다.

 

상해 주변에서는 송영창 교수가 연구하던 정산호淀山湖를 답사하는 중에 홍루몽紅樓夢을 견학하고, 중국공산당이 힘써서 조성한 시범 농촌인 기충촌문화중심旗忠村文化中心과 관광지 예원豫園을 방문하였다. 학회 후 조사여행(post-excursion)으로 중국 남부의 조엽수림대照葉樹林帶를 답사하였는데 그 여정은 다음과 같았다.

 

▲ `84 국제 식생학회 조사 여정 중 사까다(酒田)시 (山形縣)에서 강연하는 필자(1984. 6. 11.)

 

9월 26일: 상해-항주(抗州․서호西湖 유람)

9월 27일: 운계(云溪․영은사靈隱寺 주변의 석회암식물 관찰, 중국차엽연구소 방문)-저강호텔淅江賓館 투숙

9월 28일: 저강호텔-소흥(紹興)-상우(上虞)-영파(寧波)-천룡사(天龍寺․화동사대생태학연구소 방문)-육왕루호텔(育王樓飯店) 투숙

9월 29일: 육왕루호텔-천동선사(天童禪寺․저강성중점문물보호지역 탐방)-육왕루호텔 투숙

9월 30일: 육왕루호텔-영파寧波 경유-여비余妣-항주抗州-구여항旧余抗-임안臨安-천목산호텔(天目山賓館․과기관科技館 견학 ) 투숙

10월 1일: 천목산(天目山․국가자연보호지구․천연림 답사․은행나무 자생지 등 답사)-천목산호텔 투숙

10월 2일: 천목산호텔-창화昌化-삼조三阻-대부大阜-흡현歙縣-황산호텔(黃山大廈) 투숙

10월 3일: 황산호텔-황산(黃山․세계 자연보호지구 등정․케불카)-서해호텔(西海飯店) 투숙

10월 4일: 서해호텔-황산 하산-잠구민택(潛口民宅․명나라 시대의 고건축물박물관 견학-둔계屯溪-욱양호텔(昱陽山莊)

10월 5일: 욱양호텔-광덕廣德-사안泗安-장흥長興-호주湖州-상해 도착

 

이 학회에도 유럽 학자가 대부분이고 영․미학자가 적었으며, 일본 학자가 5~6명, 한국에서는 나와 일본에 유학 중인 홍성기 선생이 참석했지만 그는 조사여행에 참가하지 않았다. 학회 전 여행(pre-excursion)에 유럽 학자들은 백두산 답사를 이미 맞추고 있어 그 화제가 종종 대화에 올랐다. 그리고 아시아에 처음 온 유럽학자들은 중국 문화와 집약 농업에 감명을 받은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중국 남부의 조엽수림대 식생(제주도의 조엽수림대가 상해남부를 거쳐 히마라야 산록으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 농업(사탕수수, 뽕나무, 차, 벼 등) 및 풍속(2층 주택과 분묘)을 흥미롭게 개관하며 부지런하고 소박한 중국인의 생활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특히 천목산(10월 1일)에서 본 은행나무 자생지, 높이 75 미터에 달하는 유삼柳杉(Cryptomeria fortunei), 56 미터에 달하는 Liquitambar formosa 등은 한반도에서 화석으로만 발견되는 종속으로 지질시대에 남하한 것으로 해석되어 흥미로왔다.

 

이 여행 중에 중국의 여러 학자(蔡仕偉, 王希華 박사, 史美中 선생 등)와 M. Tanhe 박사(벨기에), A. Fischer 교수(독일), A. Otte 박사(독일), S. Pignatti 교수(이태리), 미야와끼 교수(일본), 이토(伊藤秀三) 교수(일본) 등과 깊이 교유 하였다.

 

특히 안개와 화강암 절벽, 소나무로 절경을 이룬 황산에 인위적으로 100킬로미터 이상의 돌길을 매끈하게 다듬는 중국인들의 끈질긴 의지와 백년대계질량제일百年大計質量第一, 안전제일예방위주安全第一豫防爲主라는 구호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귀국 길에 올랐다.



UNESCO 지역세미나 (제101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이 회의는 UNESCO가 주관하여 여러 지역에서 당면하는 과제를 가지고 토의하는 모임이다. 나는 UNESCO 세미나에 두 번 참가하였는데 첫 번째는 MAB (Man and biosphere)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11월 13일~16일에 도쿄에서 개최된 「해안 및 하구 생태계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을 주제로, 두 번째는 도시문제의 일환으로 1990년 12월 5일~8일에 서울에서 개최한 「도시생태계의 비교」를 주제로 한 세미나였다.

 

‘84 회의에는 태국, 인도네시아, 중국, 말레이지아, 필리핀, 호주, 미크로네시아, 뉴질랜드, 파프아 뉴기니아의 학자들이 초청되었다. 이 세미나에는 서강대의 오계칠吳桂七(별세) 교수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는 데 나는 한 분과 회의에서 C. Vashrangsi 교수(태국) 및 M. Monsi 교수(일본)와 함께 공동 좌장을 맡았으며 「한국의 하구생태계의 구조와 기능」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이 세미나에는 일본의 저명한 생태학자들이 모두 참석하여 활달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대회 의장인 다카이(高井康雄) 교수는 오 교수와 나를 만찬에 특별히 초청한 다음 안경점에 함께 가서 쇼핑을 도와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중국 과학원 부원장인 Yang Hang-Xi 박사도 참석하여 「중국의 망그로부 생태계」에 대하여 발표하였는데 그는 그 해 8월에 열렸던 ’84 국제 식생학회 때 함께 모여 다니는 중국학자들의 우두머리였다.

 

▲ UNESCO MAB 회의(일본 도쿄) 중 대회 의장인 다카이(高井康雄) 교수(도쿄대학)와 함께(도쿄대학 해양연구소의 단세이마루(淡靑丸) 선상에서 1984. 11.16.)

 

그래서 나는 ‘봄이 되면 중국에서 한국과 일본으로 날라 오는 황사에 대하여 공동 연구할 뜻이 없는가’라고 제의하자 그는 ‘학자들의 뜻대로는 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주최측에서는 환영만찬 때 외국학자와 일본학자를 교대로 앉도록 좌석 배치를 하여 우의를 다지도록 배려하였고, 마지막 날에는 도쿄대학 해양연구소 조사선인 단세이마루(淡靑丸)에 태워 도쿄만을 일주하면서 해양 실습 광경을 보였는데 그 시설이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훌륭하였다.

 

90 UNESCO 지역 세미나(1990. 12. 5.~8.)는 서울(타워호텔)에서 열렸고, 한국(6명), 중국(2명), 인도네시아(1명), 일본(1명), 말레이시아(1명), 필리핀(1명), 태국(1명) 등 모두 13명의 단출한 모임이었다. 6편의 특별 발표가 있고 나머지는 각국이 안고 있는 도시문제에 대하여 국가 발표를 하였다. 나는 특별 발표에서「서울의 기후, 식생 및 야생동물의 변화 개관」을 발표하였다.

 

도쿄에서 열렸던 UNESCO 지역회의에는 저명한 일본학자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서울에서의 지역회의는 특별발표 시간을 제외하고 한산한 회의를 진행하게 되어 아쉬움을 느꼈다.



국제도시생태학회 (제102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이 학회는 1991년 7월 5일~10일에 Izmir(터키) Ege 대학의 M.A. Öztürk 교수가 주관하여 Didim에서 개최되었다. Didim이란 Izmir에서 약 3시간 거리에 있는 어느 재벌회사의 연수장이었다. Didim에 가기 전 후에는 Ege 대학의 영빈관에서 머물렀다.

 

이 학회에 참석한 동기는 제5차 국제생태학회(1990. 8.23.~30.) 때 터키 학자가 한국생태학회장인 나의 신원을 파악하고 간 데서 비롯되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이 해 5월에 초청장을 받고 급히 발표준비를 하였다. 터키 학자 이외에 유럽학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영국, 호주, 일본 및 한국에서 각각 1명씩 참석하였다. 동양의 한국과 일본에서 학자를 참석시키기 위하여 고심한 흔적이 엿보였다. 일본에서는 누마다(沼田 眞) 교수가 참석하여 친숙하게 지냈다.

 

이 학회에서 발표된 44편의 논문 중에서 27편(60%)이 중금속 또는 오염물질과 관계되는 논문이었다. 그 이유는 중금속을 연구하는 영국 Bradford 대학 M.R.D. Seaward 교수가 이 학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데 있었다. 나는「한국 서울 수도권 생태계: 기후, 식생 및 야생동물의 변화」를 발표하였다.

 

회의 기간 중 나는 논문 발표하는 이상으로 지중해연안의 식생에 깊은 흥미를 가졌다. 회의가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주변의 식생과 풍속을 보며 사진을 찍었다. 지중해성 기후(겨울에 비가 내리고 따뜻하며 여름에 건조함)에서 생기는 경엽저목림硬葉低木林(macchie)이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생기는 차파럴(chaparral)과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큰 소득이었다. 그 지역의 식물을 채집하여 식물분류학자인 이스라엘 Hebrew 대학의 A.l. Danin 교수에게 동정을 받는 귀중한 기회도 가졌다.

 

▲ 터키의 고대도시 에페서스에서 현지 생태학자와 함께

 

7월 9일에는 모든 참가자가 세 유적지를 관광하였다. 먼저 디디마(Didyma)라는 고대 신전神殿을 견학하였는데 규모는 과히 크지 않지만 기원 전 6세기에 완성되고, 기원전 5세기초에 페루시아 인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 1960년대에 발굴된 아포로 신전으로 거대한 이오니아식 원주가 숲처럼 서 있어 옛사람들의 신앙을 짐작케 하였다.

 

다음은 프리에네(Priene)라는 고대도시. 이오니아 인이 기원전 7세기~8세기에 건설한 프리에네는 기원전 5세기초에 페루시아 인에 의하여 파괴된 뒤 아테네의 원조로 재건되어 무역도시로 발달했지만, 로마 후기에 쇠퇴의 길을 밟았다고 한다. 바둑판처럼 정연히 구획된 도시에는 요소 요소에 아테네 신전, 극장, 의사당, 시공회당 등이 대리석으로 건축되어 고대의 영광을 한 눈에 보는 듯 하였다.

 

마지막에 에페소스(Ephesus)라는 고대 영광의 도시. 이 도시는 기원 전 16세기~11세기에 이주해 온 그리스인이 건설한 거대 도시인데 알테미스 신전을 중심으로 번영하였지만, 기원 전 7세기에 킨메리아 인에게 파괴된 뒤 다시 로마시대에 로마의 5대 도시의 하나로 번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항구가 얕아져서 폐허가 되었다가 1869년에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도시에는 신전과 함께 음악당, 대극장, 의사당, 아고라(광장과 시장), 시공회당, 도서관, 공중목욕탕, 공중변소, 창녀관 등이 밟기에 민망할 정도의 대리석으로 축조되어 있었다.

 

귀국할 때는 이스라엘의 Tel Aviv 대학 Y. Waisel 교수와 동행이 되어 이스탄불에서 역대 오스만 터어키 국왕이 거처한 도쁘카프(Topkapi) 궁정 내의 눈부신 보물과 도자기 그리고 철저히 비밀이 지켜졌던 왕녀들의 방(harem), 여름궁전의 넓은 카페트 등을 보스포로스 해협에 걸린 조교弔橋를 오가며 견학하고, 소녀들이 정신을 집중하며 한바늘 한바늘 결어나가는 카페트 공장도 구경하였다.



그 밖의 국제학술행사 (제103회) -  제15장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유

 

국제호소 및 하천환경 심포지움

 

이 심포지움은 강원대학의 조규송曺圭松 교수와 일본 신슈대학의 사꾸라이(櫻井善雄) 교수가 공동 의장이 되어 오랫동안 이끌어온 한일 간의 모임이다. 나는 제5, 6, 7차 심포지엄에 조규송 교수의 권고로 각각 참석하였다. 제5차 국제호소 및 하천환경 회의는 1990년 9월 3일~5일에 일본 신슈대학에서 주관하여 그 대학의 호소연구소가 있는 수화(諏訪)시에서 열렸다. 이 심포지움은 제5차 국제생태학회(1990. 8. 23.~8. 30) 뒤에 이어서 열리기로 되어 한국 학자들은 요코하마에서 회의가 끝난 후 곧바로 수화로 행하였다.

 

본 회의까지는 3일 간의 여유가 있어 수화호소연구소의 영빈관에 여장을 풀고 주변의 관광명소를 구경하였다. 그 첫째 날은 󰡑84국제식생학회 때 답사하였던 시마가레야마(縞枯山), 기리가미네(霧峰) 고층습원 등을 다시 보았고, 둘째 날은 후나고시(船越眞樹) 선생의 안내로 일본 북알프스의 노리구라다께(乘鞍岳)의 끝없이 계속되는 눈잣나무(Pinus pumila) 숲을 답사하였다.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했던 후나고시 선생은 구후「노리구라다께」라는 책을 보내주었는데 작년에 젊은 나이로 별세 하였다니 여기에서 애도를 표한다.

 

이 심포지엄에는 약 50명의 학자가 24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한국과 일본 이외에 인도네시아, 폴란드, 핀란드, 미국 등에서 각기 1명씩 참석한 오붓한 모임이었다. 나는「한국의 팔당호에서 영양소 저장원으로서 대형수생식물에 의한 수질개선의 전망」에 대하여 발표하였고, 개회식 때 한국생태학회장으로서 축사를 하였다. 특별 초대되었기 때문에 체재비와 여비를 받았는데, 심포지엄이 끝나고 돌아올 때 수화시의 골동품가게에서 조선자기를 발견하여 받은 돈으로 사오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한국 학자들을 포함하여 외국 학자들은 수화호소연구소 소장 오끼노(沖野外光軍夫) 교수의 자택으로 초대되어  푸짐하게 대접받았다.

제6차 호소 및 하천환경 심포지엄은 1992년 7월 2일~6일에 강원대학에서 주관하여 춘천에서 열렸는데 나는 시민들을 위한 강좌에서 「치산이 되어야 치수가 된다」라는 주제로 영어로 개요를 말한 다음 우리말로 강연하였다.

 

제7차 호소 및 하천환경 심포지움은 1996년 4월 9일에 강원대학에서 개최되었는데 나와 조강현 박사는 공동으로 「대형수생식물에 의한 상수원 수질의 개선: 팔당호의 연구 사례」를 발표하였다.

 

▲ 제5차 국제호소학회 때 오끼노 교수 댁에 초청받은 외국 학자들(1990. 9. 5.)

 

제3차 한일환경회의

 

1990년 5월 13일~15일에 서울에서 개최된 이 회의는 환경부가 주관하는 한-일 간의 국제 연례모임이다. 이 회의에서는 수질뿐만 아니라 대기, 토양 등 여러 분야의 환경문제를 다루었다. 나는「영양소 저장원으로서의 대형수생식물에 의한 수질개선: 한국의 팔당호의 사례 연구」를 발표하였다. 이 회의는 동시 통역으로 언어장벽을 해소시키려했지만 나의 영어발표에 통역이 따라오지 못해서 단절 단절로 이어져서 효과가 적었다.

 

육상생태계에 미치는 염류 및 산성강하물의 영향에 관한 중․일간 심포지움

 

이 회의에는, 나의 산성비연구를 알고 있던 일본의 도쓰카 교수 (戶塚 績․도쿄농공대학)의 추천으로, 중국학술원(북경)의 특별초청을 받아 1994년 11월 3일~5일에 참석하였다. 조직위원장인 Z. Feng 교수(북경대)가 먼 거리의 비행장까지 마중 나오는 친절을 베풀었다. 회의는 염류집적분과와 산성강하물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내가 속한 후자에서는 17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나는「서울수도권의 산성비, 특히 리기다소나무 쇠퇴림의 복원」에 대하여 발표하였다. 나의 발표에 대하여 Uppasala(스웨덴)의 스웨덴농업과학대학 F.O. Andersson 교수가 쇠퇴림 복원에 돌로마이트를 사용하는 것은 지하수를 오염시킬 염려가 있으므로 화석연료에서 황을 제거하도록 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 회의에는 주로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고 이밖에 스웨덴(1명)과 한국(3명)에서 참석하였다. 재정후원자는 일본으로서 일본은 중국 공업도시 주변의 대기오염과 사막화 방지에 기술과 재정지원을 하며 연구해왔는데, 이번 회의가 두 번째라 하며 나의 체재비와 여비도 일본에서 나오고 있었다. 마지막날은 참석자가 모두 만리장성과 명 13능(明 13陵)을 견학하였다.

 

제1차 국제대기과학 및 대기질에의 적용 회의

 

이 회의는 한국의 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가 주관하여 1985년 5월 20일~24일에 서울(조선호텔)에서 개최되었다. 회의는 11개 분과로 나뉘어 121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와 박봉규 교수(이화여대․별세)는 공동으로 제8분과에서「한국의 농촌과 도시 지역의 산성비 개관」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발표한 논문은 1980년부터 5년간 서울과 전남(농촌)에서 측정한 빗물의 pH를 정리한 결과였다. 이 논문발표로 서울에 산성비가 내린다는 것을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알리게 되었다.

 

나는 10여 년간 모두 18회에 결쳐 국제 학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논문을 발표하였다. 처음에는 호기심에서 시작한 국제학회 참가였지만 참가횟수가 늘다보니 세계 학계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으므로 나 자신의 학문 발전은 물론이고 내가 지도하는 대학원생과 낙후된 국내 학계에 자극을 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나 혼자만의 소유로 간직하지 않고 국내 학회를 통해서 널리 알리는데 힘을 기울였다.



1995년 2월 28일의 회포 (제104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날이 의미 없는 평범한 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정년퇴임하는 날이기에 나에게는 깊은 뜻이 있는 날이다. 나는 오전 10시에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정년퇴임식에 참석하였다. 아내와 식물학과의 여러 교수와 전주사범학교 동기인 김은전 교수(국어교육과)가 자리를 함께 하였다. 김 교수는 우리 부부의 퇴임 기념 사진을 찍어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돌아온 뒤 나는 여러 가지 회포懷抱에 잠겼다. 공직에서 물러나는 마지막날이기 때문이다.

 

57년 4월에 공주사대 전임대우강사로 취임하여 95년 2월 28일에 서울대학교에서 퇴임할 때까지 39년간을 공직에 몸담았다. 나는 깊은 반성과 감회와 감사에 싸이면서 밤 12시까지 흥분하여 홀로 앉아 있었다.

 

한 세상을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의 생애는 영광이라고 규정하였다. 나같이 허약한 건강을 가지고 정년을 맞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 하지만 정년 이전에 타계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일제시대의 영양실조와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하였고, 그 후의 4․19, 5․16, 12․12 등 수많은 정변에도 다치지 않았으며, 80~90년대의 바쁜 생활에도 그런대로 건강을 유지하며 맡은 임무를 완수하였다.

 

공직자 중에는 물욕을 갖거나 일시적으로 오판誤判을 하거나 좋지 않은 동료를 만나거나 하여 명예스럽지 못하게 퇴임하는 사람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직장은 물욕과 거리가 멀었고 생활이 평탄하고 전통이 서 있어 오판할 여지가 없었으며 최고봉의 지성들만 모인 대학이기에 좋지 못한 동료가 섞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일생을 지낸 것이 또 하나의 영광이다.

 

나는 많은 시간을 학생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조사 여행을 하였다. 반드시 길이 좋거나 교통수단이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위험한 일을 당해서 학생에게 고통을 주거나 못 볼 꼴을 본 일이 없었다. 다만 1986년 여름에 군사교관들과 휴전선을 답사하였을 때 트럭이 뒤집혀서 학생들이 밑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었다. 그렇지만 내 책임 하에 있는 생물학도가 아니었으므로 안도하는  여유를 가졌었다.

한편 야외 실습 중에는 학생들이 독뱀과 독충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그러한 위험에 한번도 직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험실에서의 안전사고도 항상 도사리고 있었지만 위험한 일을 한번도 당하지 않고 퇴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영광이다.

 

▲ 필자의 정년퇴임식장에 왕림하신 생물학과 교수 부부

 

여천생태연구회 회원들이 한국의 생태학 발전의 견인차가 되고 있음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부지런히 더욱 깊고 넓게 연구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나의 연구를 뛰어넘고「생태학의 징검돌」의 건너편 언덕에 이르기를 바라며, 더 나아가 학문과 함께 원만하고 성숙한 선비의 길을 당당히 걷기를 바란다. 나는 훌륭한 제자를 자랑하는 스승의 행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이 더 큰 소망이다.

 

내가 근무한 직장들은,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일생을 보장받는 대학사회였다. 따라서 학과의 분위기는 개개인 교수의 생활에 깊고 넓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원만한 분위기는 교수들을 연구와 교육에 전력투구하게 하지만 껄끄러운 분위기는 교수들의 신경을 쓸데없이 소모시키며, 모두를 불행에 빠뜨릴 수 있다.

젊었을 때 나는 급한 성질로 말미암아 학과의 분위기를 껄끄럽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공주사대 생물과 교수들은 나를 원만하게 감싸주었다. 나이 들어 합류한 서울대 식물학과(또는 생물학과)에서는 학과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미력이지만 노력하였다. 매사를 공평하게 처리하고 한 발 양보하면 학과의 분위기는 흐려지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아무튼 큰 불화 없이 정년 퇴임하게 됨을 감사드린다.

 

더구나 생물학과 교수들이 성대한 퇴임식을 해 주어 더없는 영광이었다. 퇴임식과 아울러 학과 교수의 경조사 등 이제까지의 좋은 전통을 계승하여 화기애애한 학과가 되기를 기원한다. 한국에서는 연구가 중요할수록 학과의 인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때때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다. 절이나 예배당이나 병원에 갈 기회가 적고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하다 보니 죽음을 접하지도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와 몇몇 어른의 죽음을 접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의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다.

 

인생은 유한하니 반드시 죽는 날이 온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자손이나 이웃에 보이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면 참으로 좋겠다. 죽음을 앞두고 후회하지 않으면 더 좋겠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죽는 날까지 착하게 살고 싶다. 내가 중병에 걸리면 처음에 최선을 다하여 진찰과 치료에 응하겠지만 현대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가볍게 생을 단념하려고 한다. 그리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말아야하겠다.

나의 성격은 외강내강外剛內剛이었으며 학문에 지나치게 엄격하였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교실이나 실험실에서 제자들에게 너무 경직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직성은 오래 끌지 않고 곧 풀렸으며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재임 중에 제자 주에서 혹시 학문 이외의 섭섭한 대접을 받았다면 오늘을 기하여 풀어주기 바란다.



논도강서 하는 누거 (105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나는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으며 살아왔다. 초등학교의 친구로부터 사범학교와 대학의 동기와 선후배, 그리고 은사님들과 직장의 동료들, 육친과 친척들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다. 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주로 경제면에서, 그 이후로는 정신면에서 은혜를 입었다.

 

그러나 나는 이분들에게 작은 보은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은혜를 입은 분들은 대부분 지금 내 곁에 없으니 그분들에게 보은할 기회마저 없어졌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보은의 길을 찾아야 하겠다. 국제봉사기관인 국제로타리 생활을 해보았지만 마음으로부터의 봉사가 미흡하였다. 이제부터의 인생은 마음에서 우러난 보은의 길을 걸어야 하겠다. 베풀면서 사는 인생을 꿈꾸어 본다.

 

정년 퇴임식날을 끝으로 나는 자유인이 되었다. 공직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공직으로 말미암아 하고 싶었던 일들을 부득불 미루어왔다. 이제 나는 제2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강의와 연구와 사회봉사는 진정한 내 인생이 아니었다. 자유스럽게 글을 쓰고 틈틈이 책을 읽으며 건강을 위하여 시간을 내고 여행을 즐기며 살아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의 강의를 중단하고 그 밖의 모든 시간 제약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늙어서 욕심 부리는 노탐老貪이 추함을 느껴왔으니 나는 욕심 부리지 말고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겠다.

 

▲ 사색에 잠겨서 / 65세 때다

 

나는 퇴임하는 달 양재동에 작은 연구실을 차렸다. 이름이 연구실이지 큰 방이 아닌 작은 누거陋居이다. 내가 책 읽고 글 쓸만한 공간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집에 서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생리가 집에 머물면 건강이 나빠지기 때문에 밖에 방을 마련한 것이다.

 

연구실이 좁아서 학교에 있던 책 중에서 학술잡지만 옮기고 단행본은 집 서재로 옮겼다. 퇴임식 날 최기철 교수님의 축사 말씀에 양재동 연구실은 사랑방이 아닌 진정한 연구실이 되기를 바란다고 정곡正鵠을 찌르셔서 나는 그렇게 하기로 작심하였다. 실제로 양재동 연구실에는 TV도 바둑판도 소파도 없으니 친구들의 사랑방 구실을 못한다.

 

양재동 연구실에는 벽이 대부분 책으로 채워졌고, 서가가 모자라서 책을 옆으로 쌓아 놓고 있다. 책 크기가 달라서 쌓아 놓은 모양이 들쭉날쭉하여 볼품이 없으므로 요즈음은 같은 분야의 책을 모아 끈으로 묶어 놓는 꾀를 부린다.

 

연구실은 건물 숲에 싸여 있으므로 녹색 숲을 바라보며 피로한 눈을 회복시킬 환경이 못 된다. 그래서 좋아하는 자기瓷器 몇 점을 멀거니 바라보는 것으로 눈의 피로를 풀고 있다. 그리고 대학 연구실에 걸렸던 논도강서論道講書라고 쓴 장전거사長田居士의 휘호를 양재동 벽으로 옮겨 놓았다. 이 글귀는「옛 사람의 길을 논하고 옛 글의 뜻을 강론한다」라는 뜻인데, 학생이 없으니 이따금 나 혼자서 그 뜻을 음미하고 있다.



몸을 닦고 집안을 가지런히 (106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나는 지난 날 바쁘게 살다보니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할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더구나 뚜렷하게 종교 생활을 하지 않았으니 마음과 행실의 정도正道가 무엇인지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유교도덕의 기준에 따라 살아왔을 뿐이다.

 

이제부터는 몸을 닦아 집을 가지런히 하는 이른 바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다. 옛날의 선비들은 일생을 수신으로 지내왔는데 나는 70세에 비로소 수신을 하겠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죽는 날까지라도 최저의 마음을 가지며 욕심부리지 말고 남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폐를 끼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로 가지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한편 집안을 바르게 다스리는 일, 곧 제가齊家는 직장동료 사이의 화목和睦보다 훨씬 중요하다. 제가의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사이에 우애, 곧 효제孝悌가 이루어지는 집안은 저절로 제가가 이루어지므로, 집안을 평화롭게 하여 가족들의 웃음꽃이 항상 집 밖까지 활짝 피게 하는 일이 제가라고 믿는다.

 

요즘처럼 사회의 도덕률이 해이해지는 과정에서는 한 집안의 연장자를 구심求心으로 하여 젊은이들이 효제를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집안이 화평하고 제가가 잘 이루어질 것이다. 제가는 반드시 부유한 경제, 높은 교육, 심오한 지식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모든 가족 구성원이 의지를 가지고 협심協心하여야 이루어진다. 가족 구성원 사이에 의타심과 이기심이 배제되고 협동과 칭찬이 교환되어야 제가의 길이 열린다. 제가는 뛰듯이 서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발 한발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제가는 가족들 앞에서 설교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무언無言 중에 암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평소에 제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검소하고 예의바른 생활태도를 실천해 보였다. 아이들도 대학교육을 마쳤고 30세의 입지立志할 나이를 넘었으니 스스로 알아서 제가하는데 협력하고 있다. 다만 가족 구성원의 종교가 각각 달라서 염려한 바 없지 않았지만 이제까지는 대가족(우리 가족과 출가한 딸들 포함하여)의 제가를 무난히 이뤄내고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

 

▲ 필자 부부

 

우리 집 가훈家訓은 효경․입지․박학을 표방하고 있다. 효경孝敬은 동양의 전통 가정에서 행하는 웃어른에게 효도하고 존경하는 예의 범절을 지키자는 뜻이고, 입지立志는 성년이 될 때까지 스스로 뜻을 세워서 자기의 할 일을 찾자는 뜻이며, 박학博學은 넓고 깊은 학문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자는 뜻이다. 보통 사람이 어찌 이 세 가지를 모두 이룰 수 있을까마는 거기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자는 취지이다. 우리 집에 이러한 가훈이 있다는 것만 아이들에게 알렸을 뿐 한번도 다그쳐서 설명하거나 강요한 바는 없다.

 

제가의 성패는 한 집안의 주부에 달려 있다. 우리 며느리(李政恩)는 우리 집안이 제가를 하는데 주부의 구실을 너무나 잘해내고 있다. 심성이 곱고 현모양처로서 나무랄 데가 없다. 며느리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이지만 불제자인 아내 사이의 고부간 조화를 잘 이루고, 유교 양식의 선조 제사에도 잘 동화하여 협력적이며 가족관계를 원만하게 이루어나가고 있다. 우리 부부는 이러한 며느리에 대하여 참으로 만족한다. 출가한 딸들도 모두 시댁 식구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듯 싶다. 아이들은 근검 절약한 생활의 결과 95년~96년에 모두 자기 집을 마련하여 생활 기반이 안정됨으로써 우리 부부를 안도시키고 있다.

 

내가 퇴임한 뒤 아이들이 서둘러서 아내의 회갑연을 열었다. 아이들이 회갑연을 제의하였을 때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회갑연은 효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95년 6월 12일에 롯데월드에서 100 명 가량이 모여 조촐한 연회를 열어 이제까지 은혜를 입은 친족과 처족들에게 보은하는 기회를 가졌다.

 

나는 아내의 유아시절부터 60평생의 중요한 기록 사진을 확대하여 전시하고 아이들에게 어머니의 은혜를 새삼스럽게 인식하도록 하였고, 38년 전에 결혼 반지를 마련하지 못하여 약혼 반지로 대용하였던 빚을 갚고 또 나의 건강을 지켜주고 내가 학문에 전념하도록 가사를 도맡아 준 보답으로 회갑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에 앞서 89년 9월 2일에 신라호텔에서 나의 회갑연을 열었다. 이 때는 아이들이 어렸고 차녀가 미국에 가 있었으므로 친척들에게 체면치레를 하는 정도로 회갑연을 하였다. 생신잔치나 회갑잔치는 어른에 대한 필요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기회에 어른의 건강을 확인하고 친족들이 모여서 친목 하는 기회를 갖는 뜻에서 미풍양속임에 틀림없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가정이 화목하여 남다른 제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나도 여생을 제가하는데 더욱 힘쓰려고 한다.



건강하게 살고 파 (제107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싫어하였다. 더구나 일제 말기인 초등학교 시절은 웃통을 벗고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였는데, 그것은 몸이 밀대처럼 야윈 내가 운동을 싫어하는 원인이 되었다. 요즈음처럼 재미있는 운동경기가 없었으니 운동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사범학교 때 연식 정구를 잠깐 했을 뿐 축구, 농구, 육상 등을 한 적이 없다. 따라서 체육 성적이 늘 좋지 않았다. 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키가 작은 편이어서 교실의 앞자리에 앉았고 체중도 미달이었다. 내 키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인 6․25동란 중 큰누님 댁에서 피난 생활하는 동안에 껑충 자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소화기가 약해서 소화불량에 시달리거나 설사를 자주 하였다. 특히 여름에 입맛이 없고 소화가 안 되어 쓴맛 나는 익모초 즙을 자주 마신 기억이 난다. 사범학교 저학년 때에는 늑간신경통이 생기고 고학년 때에는 좌골신경통의 증세가 생기며 또 폐침윤을 앓아서 약물치료를 받았다.

 

신경통은 활동적으로 운동하고 충분히 영양분을 섭취했더라면 안 생겼을 지도 모른다. 일제 말기의 학질(말라리아)과 영양실조, 그리고 광복 후의 기숙사 생활은 나에게 건강을 호전시키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대학원 시절에는 고된 실험실 일과 밤잠을 설치는 독서와 자료 분석으로 과로가 겹쳐서 뒷목이 뻣뻣해지는 근육통이 생겼다. 요즈음 같으면 그러한 증세의 대증 요법으로 목과 어깨 운동을 하여 풀었을 터인데 그 때는 운동을 무시하였다.

 

사십대 중반에 나는 안면마비를 앓았다. 이 무렵 내 건강은 총체적으로 부진하였다. 그 증거로 미달하던 체중이 더 가벼워졌다. 그래서 뒤늦게 탁구를 배우고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타며 주말마다 등산을 하였다. 주말의 등산은 반드시 아내가 선두에 서야 내가 마지못해 따라 나섰다. 등산 장비를 갖추고 맨 처음에 등산 한 곳이 운악산(현등사)이었고, 그 다음에 서울 주변의 북한산․도봉산․백운산․천마산 등을 두루 다녔다. 78년 여름에는 가족들과 함께 설악산(대청봉)으로 원정하여 오색-대청-소청-양폭-비선대-신흥사-설악동 코스를 하루에 주행하는 만용을 부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3~4년 간 운동을 하니 건강이 다소 좋아졌다. 건강이 회복되니 운동 기피증이 다시 되살아나고 다시 연구와 씨름하게 되었다.

 

평소 나는 감기에 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40대 중반에 몹시 심한 감기를 앓은 후 며칠 동안 많은 담이 나오다가 그치더니 약간씩 혈담이 섞여 나오는 것이었다. 항생제를 먹으면 그쳤다가 끊으면 다시 나오기를 3~4년이나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기관지에 염증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석회를 허파에 주입하는 고역스러운 검사를 받았지만 원인이 밝혀지지 않다가 내시경 검사로 기관의 일부에 염증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항생제 이외에는 특별한 치료약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통증이 없으므로 항생제도 쓰지 않고 방치하였더니 4년쯤 뒤에 저절로 나았다. 몸에 저항력이 생겨서일까.  허파 검사 때 석회 주입으로 양쪽 허파에 마치 결핵을 앓은 환자의 X선 사진처럼 흰색 상像이 5~6년 동안이나 남아 있었다.

 

우리 6남매 중에 천식을 앓은 분이 셋이나 있는 것으로 보아 기관지가 약한 유전이 내려오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기관지 보호에 각별히 조심하고 있다.

 

▲ 나의 건강 유지(단전호흡과 물구나무서기)

 

나는 50대부터 심한 오십견五十肩 증세가 왔고, 퇴행성으로 뒷목뼈(頸椎)에서 석회가 빠져 나와 뒷목이 뻣뻣해져서 연구생활이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오십견은 등 쪽 근육을 경직시키고 몸의 유연성을 감소시키며, 걸을 때 몸이 굳어졌고 왼쪽 어깨가 아파서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과감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연구 생활도 생명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제자들의 학위 논문 등 일은 산더미처럼 밀려 있어 정신적 압박은 커지기만 하였다. 이 때 나이 62세였다.

 

몸이 허약한 나는 건강 유지에 항상 조심하며 살아 왔다. 내일의 활동을 위하여 오늘의 피로를 경계하였다. 저녁에 맑은 정신으로 책을 읽다가도 내일을 위하여 책을 덮는 판별력을 길렀다. 나의 생활에 무리는 절대 금물이었다. 다행히 우리 가계는 술 못 마시는 유전을 타고났고, 나는 어려서부터 우연히 담배를 피우지 않았기 때문에 고희가 넘을 때까지 살게 되었다고 믿는다. 나의 가슴둘레는 작고 폐활량도 적어서 담배를 피웠더라면 아마 일찍이 요절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얻은 병은 나이 들면서 점점 깊어지는 것 같다. 소화불량은 나의 체질이나 직업과 관계가 있는 듯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 노년기에 이르도록 고생한 지병이다. 나는 위장과 대장이 좋지 않아 식사 후 가스(트림)가 생기는데 그 이유는 위장이 나빠서이고, 매운 음식을 먹은 뒤 왼쪽 창자가 아픈 이유는 대장이 나빠서라고 판단된다.

 

소화기와 신경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나의 소화불량은 예민한 신경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소화기계에 분포하고 있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는 뇌신경을 지나치게 쓰므로 그들이 부조화不調和를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내 소화기계 내의 대장균도 문제가 있다. 대장균 수가 부족하거나 정상분포가 자주 교란되거나 균주의 질이 나쁘거나 한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은 새로 개발되었다는 신경안정제와 특이한 균을 장기간 복용하여 상당히 효과를 얻고 있다. 그러나 복약을 중단하면 얼마 뒤에 다시 도지기 때문에 나의 체질이려니 하고 체념하기도 한다. 나의 체질로 말미암아 외식을 싫어하게 되고 외식을 안 하니 친구가 적어서 편협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62세가 되었을 때 몸의 근육이 굳어지는 등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으므로 획기적으로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만사 끝장이라고 생각하던 차에 이웃에 사는 박희인 박사(현 지질학과 명예교수)가 요가와 단전호흡을 권한다. 이 나이에 요가를 할 수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로 도장에 나가 본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살 길은 이것 뿐이라 여기고 매트 위에서 사범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흉내낸다.

 

서고 앉고 눕고 엎드린 자세로 온 몸을 꼬고 비틀고 감고 펴고 오므리는 동작을 하루 1시간씩 하기를 넉 달. 몸의 경직이 조금씩 풀리고, 굳은 목이 움직이며 요지부동인 왼팔이 뒤로 돌아가는 효과가 나타난다.

 

금년은 요가와 단전호흡의 경력이 9년째이다. 이제는 물구나무서기를 최대 20분까지 하게 되고, 몸의 유연성이 운동하지 않은 사람의 50대 나이로 돌아왔다. 몸이 유연해지니 자세가 곧아지고 단전호흡을 하니 정신이 집중되어 내면 세계에 들어가는 듯 하다. 나는 요가와 단전호흡으로 건강을 찾았으니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하려고 한다.



때 늦은 교유 (제108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나는 많은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다. 많은 벗을 사귀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지 않는 한 대학 교수는 벗 사귀기가 어렵다. 각자 독립된 연구실에 갇혀서 일을 하고 여러 사람이 어울릴 기회가 적으며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교수 중에도 많은 벗을 가진 분들이 있어 부럽기만 하다.

 

초등학교 때는 한 마을 친구가, 사범학교 때는 생물부원과 기숙사생이, 대학 때는 생물과 학생들이 중요한 벗이었다. 특히 생물과 입학동기인 모경환, 박만상, 윤석인, 김종목 형 등과는 친하게 지냈지만 졸업 후 먼 거리의 직장과 바쁜 시간 탓으로 소원하게 되었다. 대학원 입학 동기인 강만식, 이영록 형, 1년 뒤에 입학한 하두봉 형과는 반세기에 가까운 교유가 계속되고 있으며, 같은 학문분야를 걸어온 김철수, 조규송 형 등도 오랫동안 교유하여 왔다.

 

그림을 좋아하는 나는 몇몇 화가들과 사귀었지만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성년이 된 뒤에 사귄 벗이라도 사후관리를 잘하면 지속되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하였다.

 

▲ 낙산로타리 클럽에서의 교유 / 왼쪽부터 필자, 이민재 박사(별세), 이영노 박사, 임억규 박사(1993. 5. 롯테호텔 36층)

 

퇴임한 뒤에 초등학교 친구들과 50년만에 모임을 가져보니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1년에 한두 번씩 전주사범 동기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 그 시절의 회포가 되살아난다. 또 한달 걸러 한 번씩 사범대 동기생들과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세상사를 이야기하면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어쩌다 생물학과 교수들을 만나면 옛정이 되살아나지만 그 분들의 바쁜 시간을 잘라내기 민망하여 얼른 내가 먼저 비켜간다.

 

나에게도 50년의 우정을 간직한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이영노 박사이다. 이 박사님은 동향이어서 초등학교와 사범학교의 선배이고 사범대학의 동창이며 전공 학문이 비슷하다. 나는 부산 피난 대학 시절부터 식물채집을 따라 다녔고, 환도하던 해에 그 댁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사모님을 다른 방으로 내모는 몰염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나의 중매를 서주셨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 늘 방패의 구실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 박사님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고 건강을 빈다.

 

▲ 5인 교수 모임 / 왼쪽부터 이택준 교수(중앙대학), 이석우 교수(고려대학), 최임순 교수(연세대학), 정용재 교수(이화여대), 필자

 

양재동 생활을 시작한 뒤에 정용재 교수(이화여대)와 이택준 교수(중앙대)가 후배인 나를 찾아 주셔서 무한한 영광을 느끼며 감사하였다. 그 후 최임순 교수(연세대)와 이석우 교수(고려대)를 모시고 매달 한 번씩 만나서 학문과 건강과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모임에서 나는 벗이라기보다 선배를 모시는 막둥이의 자세이다. 복잡한 대학 생활을 홀홀 털어 버리고 순진무구한 청소년 같은 기분으로, 그러나 최고의 지성다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 모임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나에게 벗이 많지 않은 원인은 술을 마시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며 좋은 건강을 누리지 못하고 능숙한 화술이 없는 데 있었을 것이다. 흔히 술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친구를 갖는 것은 부럽기만 하다. 나의 불건강은 외식을 기피하고 친구들과 긴 시간을 대면하기가 짜증스러워 벗을 잃기 일쑤였는데 건강한 벗들은 나의 불건강을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범대 생물과 동문회장을 2년간 맡았고, 재경 전주사범․교육대 동창회 부회장을 8년간이나 맡았지만 내가 의식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으니 벗이 사귀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시간도 있고 건강도 웬만큼 찾았으니 벗을 사귀는데 노력을 기울이려 한다.



KEDO 조사단에 참가하고 (제109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북한 여행을 두 번이나 하였다. 제1차는 96년 7월 4일~23일이고, 제2차는 98년 7월 20일~8월 1일이었다. 그 연유는 북한에서 핵 폭탄을 만들 조짐이 보이자 미국이 외교력을 동원하여 흥정을 하였다. 그 결과 북한이 핵 에너지 개발을 중지하는 대가로 한․미․일․기타 몇 나라가 공동으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orean Energy Development Organization, KEDO)를 구성하여 북한에 100 만 kw급 원자로 2기를 지어주기로 합의한다. 이에 앞서 북한은 소련이 붕괴되기 전인 1989~90년에 소련과 합작으로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여 그 기초조사를 한 바 있었다.

 

나는 제1차 여행 때 북한과 소련이 원전 건설을 위하여 공동으로 기초조사를 한 보고서를 인수하러 갔었다. 종전부터 국내의 원전과 화전의 환경 조사를 해 오던 인연으로 한국전력공사와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가 나에게 북한 조사를 위촉한 것이다. 국토가 양분된 상황에서 내 생애에는 북한 여행을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별안간 전화를 받고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하였다.

 

제1차 조사 때는 북한에 입국하기 위해서 북경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북한 비자를 받았다. 북한 비자를 여권에 찍지 않고 종이 쪽지에 찍어 주었으니 여권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평양에서 원산을 거쳐 목적지인 금호지구(함남 신포 강상리)까지는 야간열차를 탔는데 450 킬로미터 거리에 11시간이 걸렸다.

 

북경 공항에서는 진기한 분위기를 보았다. 꽃다발과 화환을 가진 북한 사람들이 고려항공(북한 비행기)의 기내에 들어왔다. 뒤를 바라보니 스튜어디스들이 사람은 앞자리에, 꽃다발과 화환은 뒷자리에 정리하였다. 그 꽃들은 사람과 함께 평양비행장에 내렸고 김일성 주석의 동상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 날이 7월 6일이라 주석의 1주기였다.

 

내 상식으로는 국제간의 생물유통은 검역을 받아야 하고 생화는 살아있는 꽃이니 마땅히 검역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주석에 대한 충성으로 검역을 안 하는 듯 하였다. 만약 꽃에 해로운 병균이 붙어 있다면 그 피해가 어디에 미칠지 마음이 졸여졌다.

 

우리 일행이 묵었던 숙소는 수 년 전 원전의 기초조사 때 소련 학자들이 묵었던 영빈관(guest house)이라 하였다. 기초 조사 자료를 넘겨받는 마라톤 회의가 열린다. 자료를 넘겨줄 듯 보여주기만 하고 복사를 허용하지 않는다. 어느 천재가 그 방대한 크기의 보고서 내용을 머리 속에 기억할 수 있는가. 미국 워싱톤의 KEDO 본부에 전송이 몇 번 왕래한 다음에야 복사가 이루어진다. 며칠 동안의 끈질긴 줄다리기 회의는 성질 급한 나같은 사람이 할 일이 못되었다.

 

▲ 북한의 핵 발전소 부지(함경남도 신포)의 생태조사를 마치고 평양에 들러 대동강변의 을밀대에 올랐다 (1996. 7.21.)

 

보고서를 복사하여 가져오는 것이 우리의 여행 목적이었다. 미리 한국 측에서는 복사기와 종이와 약품(토너)이 든 짐짝들을 비행기에 싣는다. 그런데 전압을 170 V로 맞춘 복사기를 가져간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북한의 평상시 전압이 200V인데 전기 사정이 안 좋아 그렇게 맞춘다는 것이다. 일요일에 복사를 하려고 기계를 조작하니 찍히지 않는다. 마침 그 일요일은 노동자를 위한 국경일로 공장이 쉬는 날이어서 전압이 정상으로 되어 기계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막상 복사한 자료를 검토하니 동물명은 학명이 없는 북한명으로 되어 있어 쓸모가 없다. 평양에 급히 연락하여 동물학자를 오게 하여 학명을 조사시킨다. 북한에만 있고 우리 나라에 없는 동물의 학명은 그들의 도움 없이 학명을 밝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넘겨받은 자료의 미비점을 확인하기 위하여 현지 사정을 점검하기로 한다. 처음에 원전 예정 부지 주변의 천연기념물을 조사하는 데 3․1밤나무, 원조 사과나무 및 조상 사과나무가 지정되어 있어 학술연구용이 아닌 천연기념물임을 알게 되었다.

3․1밤나무는 1930년대에 심은 밤나무 단지를 3자와 1자 모양으로 남겨 놓고 나머지 주변 나무들을 벌목하여 멀리에서 3․1자로 보이게 한 것이고, 사과나무는 사과 과수원 옆에 보존된 약 100년쯤 되는 재배 품종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이들 밤나무와 사과나무들 옆에는 김일성 주석이 왕림해서 직접 교시함으로써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제1차 조사에서 돌아와 육상과 해양 분야의 생물학 자료를 영문 설명문을 붙여서 KEDO 본부에 제출하였다. 이것은 한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방대한 작업이었다.

 

제2차 조사는 북경과 평양을 경유하여 선덕까지 비행기로, 선덕에서 금호지구까지 버스로 갔다. 마침 낮에 버스를 탔기 때문에 연도의 도시와 농촌 풍경을 잘 볼 수 있었다. 이번 조사 목적은 원전 부지를 중심으로 반경 4킬로미터 내와 주요 하천의 생물상과 환경을 조사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 범위 내를 구석구석 빠짐없이 답사하였다.

 

생태반에는 조경제 교수(인제대)와 이규송 교수(강릉대)가 동행하였다. 이번에는 북한의 전문학자들도 나와서 동행하였다. 논물에 차축조가 많고 벼메뚜기가 벼 잎을 뜯어  먹은 것으로 보아 화학비료와 농약(제초제)을 쓰지 않는 이른바 청정재배를 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귀국 후에 국문과 영문의 방대한 환경영향평가서를 제출하여 마무리를 지었다.

 

북한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먼 거리감을 가지는 곳이다. 비료 결핍 증조가 보이는 벼의 생육 상태와 농약을 치지 못하여 병해충이 붙은 과수원을 보아 식량 사정을 짐작할 수 있고, 길과 자동차를 보아 교통사정을 짐작할 수 있으며, 전깃불을 보아 공장을 돌리는 에너지 사정을 짐작할 수 있고, 산림을 보아 주민의 연료사정을 짐작할 수 있고, 평양시를 벗어난 농촌을 보고 일제 말기의 우리 고향이 연상되었다. 두 번의 북한 여행을 하는 동안 동족애를 절실히 느꼈으며, 그곳에서 가장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비료, 농약, 농사기술 등을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보내주기를 소망하였다.



학술원 회원 피선 (제110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일생 동안 열심히 학문한 학자로서 학술원 회원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도 60세가 넘으니 학술원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옛말이 있듯이 여러 가지로 부족한 내가 학술원 회원이 될 가망은 없었다. 그런데 요행히도 96년 7월 12일에 회원에 피선된 것이다. 나는 열심히 학문한 보람을 느꼈고, 나보다 훌륭한 선배 학자들에게 송구(悚懼)함을 느꼈다.

 

이 날은 한반도에너지기구(KEDO) 사업으로 북한에 체류(96. 7. 4.~23.)하던 중이었다. 이에 앞서 한국생물과학협회에서는 나를 후보자로 학술원에 추천해주었다. 그러나 후보자에 대하여 학술원에서는 두 번의 엄격한 투표를 하고 총회에서 선출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므로 마음 졸이며 북한에 갔었다.

 

귀국하는 7월 23일에 북경 공항에서 집으로 건 전화로 비로소 회원 피선을 알게 되었다. 국내의 일간지에 이미 소개되었겠지만 정보가 단절된 곳에 있었으므로 뒤늦게사 알았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제2분과 회의에서 투표하기 전에 내 학문을 알고 계시는 김준민 교수님께서 소개하는 수고를 해주셨다고 한다.

 

8월 중순에 학술원 권이혁 회장으로부터「회원 당선장」을 받고, 회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들었다. 공식명칭은「대한민국 학술원」이며 회원이라는 칭호를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세계의 학술원에 대해서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상을 시상하는 권위, 프랑스 학술원 회원이 입는 2만 불 상당의 화려한 제복, 일본의 학사원과 중국의 사회과학원 등의 명칭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다.

 

▲ 야외 조사 활동하는 필자

 

학술원은 예술원과 함께 문화보호법(법률 제248호)에 근거하여 54년에 50명(인문 25명, 자연 25명)으로 개원하였다고 한다. 회원 정원은 80명으로 증가되고, 60년에 100명으로 그리고 현재 150명이다. 59년에 삼청동에 학술원 청사를 마련하였고 65년에 신문로(대산빌딩)로, 71년에 경복궁(석조전)으로, 마지막으로 87년에 반포동의 신축 청사로 이전하였다.

 

대한민국 학술원에서는 학술진흥에 관한 정책 자문과 건의, 학술연구와 그 지원, 국내외 학술 교류와 학술 행사 개최, 대한민국 학술원상 수여, 기타 학술진흥에 관한 사업을 하고 있다.

 

학술 행사로는 국제 학술 강연회(현재까지 제28회), 학술원 학술 대회(28회), 학술 세미나(매년), 회원 학술 세미나, 정책 토론회, 학술 간담회, 월례 세미나, 학술원 회지 발간 등을 하고 있다.

 

조직은 회장, 부회장 밑에 인문․사회과학부와 자연과학부를 두고 전자는 6개 분과로, 후자는 5개 분과로 나눈다. 자연과학부의 경우 제1분과는 물리․화학․천문․기상분야, 제2분과는 생물․지질․가정․체육분야, 제3분과는 공학분야, 제4분과는 의학․약학분야, 제5분과는 농학․수산학 분야가 소속된다.

 

나는 자연과학부 제2분과에 속하여 식물학과 생태학 및 환경문제의 발전과 정책 자문을 하고 있다. 나는 98년 5월 14일에「지구온난화와 한국의 온실가스 발생 현황」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하고, 그 원고를 학술원회지(자연과학 편 제 37집, 1998.)에 투고하였다.



선조님을 생각하며 (제111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선조님을 모시는 자손들은 대대로 전해오는 장례문화(葬禮文化)를 따라야 할지 거역해야 할지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다. 우리 나라의 장례 문화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지난 500년 도안 극히 일부 불교계에서 화장火葬을 하였을 뿐 보통 매장(埋葬)하여 왔다. 그런데 묘지가 삼림을 잠식하여 자연보호에 위배되고 대대손손 묘지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화장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의 처리는 그 나라의 자연환경과 관계가 깊다. 추워서 땅 파기가 어려우면 조장(鳥葬)을 하고, 물이 흔하면 수장(水葬)을 하기도 한다. 좁은 국토에 인구가 많아지니 우리의 장례 문화도 자연환경에 맞춰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화장한 뒤에 남는 유골을 물에 띄우느니 산에 뿌리느니 고민하는 말들을 듣는다. 이것은 어느 경우나 자연 보호에도 법에도 어긋나는 처사이다.

 

유골을 함부로 자연에 뿌리면 그 속의 무기물이 자연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에서도 유골을 1미터 깊이에 묻도록 규정하고 있다. 유골을 흙 속에 묻을 바에는 아주 작은 봉분을 만들거나 유골 위에 납작한 묘비를 세워 망인(亡人)의 아들 또는 손자 대까지 만이라도 보존하는 것이 자손들의 정신위생에 좋을 듯 싶다. 앞으로 묘지를 60년간 보존하기로 규정한 개정 묘지법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으며 합리성이 있다고 본다.

 

신식 장례문화에 따라 화장한 후 분묘를 쓰지 않은 것은 각자의 자유로 돌리자. 수 백년 보존해 온 조상의 무덤도 이제부터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이는 홀가분해서 잘 되었다고 하겠지만, 다른 이는 선조님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 편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후자는 대대로 선조님 받들기를 믿음으로 여겨왔기 때문이다. 기존의 분묘를 모두 파 없앤다면 대대로 이어온 가족과 더 나아가서 사회의 질서가 흩어질지도 모른다. 전통적 유교사회에서는 분묘의 보존과 효 사상이 한 축의 수레바퀴처럼 구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의 장사(葬事)는 대대로 매장하여 왔다. 옛날에는 선조님의 묘를 분명히 산에 모셨을 터인데 마을이 확장하고 산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만든 결과 묘소가 밭이나 마을 속 또는 도로 옆에 위치하게 되고,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게 되었다. 유교 사상에 젖은 우리 형제들은 선조님의 묘소를 볼 때마다 민망하여 자괴심(自愧心)이 생겼다.

 

흩어진 묘를 한 곳으로 천장(遷葬)할 선산이 있었지만, 묘를 옮길 만한 좋은 자리에는 맨 윗선조(나의 8대조)의 묘가 가장 아래쪽에 위치하였으므로 그 후손들의 묘를 옮기지 못하였다. 여러 해 궁리 끝에 8대 할아버지의 묘를 높은 위치로 옮길 것을 생각하니 흩어진 묘를 선산으로 옮기는 일이 술술 풀려나갔다. 이렇게 해서 88년 4월에 나를 기준으로 하여 고조부모(4대)부터 8대조부모까지의 5대 선조의 묘를 선산의 한 곳에 옮기고 석물을 설치하였다. 이보다 한 해 앞서부터 친척들의 성금을 받아 선조를 위하는 제1차 사업이 무사히 끝났다.

 

후손들에게 참고하기 위하여 천장하기 전에 흩어져 있던 묘소의 상황을 기록해 놓는다 (나를 기준으로 선조님의 대를 표시함).

 

△ 8대조부 휘 석삼錫三과 8대조비 함안 조씨: 합분, 뒷재의 왼쪽 묘. △ 7대조부 휘 우장禹章: 묘는 지장암 뒤에 있었음. △ 7대조비 제주 고씨: 묘는 윗터의 대밭 옆에 있었음. △ 6대조부 휘 정서晶瑞: 묘는 고아원 앞에 있었음. △ 6대조비 전주 최씨: 묘는 수박재 공동묘지에 있었음. △ 5대조부 휘 사윤泗允: 묘는 사망동 길가 산소의 왼쪽에 있었음. △ 5대조비 담양 전씨: 묘는 뒷재의 오른쪽에 있었음(8대조부모 묘의 옆). △ 고조부 휘 정규鼎奎. 고조모 담양 전씨: 합분, 묘는 사망동 길가 산소의 오른쪽에 있었음. △ 증조부 휘 재식載植: 앞산 산소 현 위치(천장 안함). △ 증조모 평산 신씨: 묘는 유흥식 씨 밭에 있었음, 앞산 산소로 천장함. △ 조부 휘 용선容宣. 조모 탐진 최씨: 묘는 현 위치(천장 안함).

 

한편 나의 9대조부터 15대조(14대는 나포면 옥곤리에 묘가 있으므로 제외)까지는 다른 선산의 한 곳에 묘가 모여 있었다. 그런데 약 50년 전에 사초를 하였기 때문에 잔디가 퇴락하고 석물이 없었으므로 제2차 선조를 위하는 사업으로 1998년 3월에 산소의 사초를 하고 석물을 설치하였다. 이때에도 집안 여러 분들이 헌성금을 내주어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1999년 4월 29일에는 부모님 산소를 사초하고 석물을 놓아 정화하였고 그 앞에 작은 가족 묘지를 만드는 일로 제3차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 유교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조상을 정성드려 섬긴다 / 1997년 5월 시조님의 시제 때 초헌관을 맡았다

 

장례문화에 대해서 나는 보수적으로 매장을 선호하고 아내는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장을 선호하여 왔다. 그런데 약간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98년 6월 17일에 형님들의 권유에 따라 고향 선산에 우리 부부의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 아내가 마음으로부터 승복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아무튼 우리가 죽은 뒤 아들의 수고를 덜어준다고 생각하면 홀가분한 기분이다. 시대 사조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선조를 위하는 사업을 끝낸 뒤 자손의 도리를 다했다는 위안을 가지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나는 종친회와도 관계를 맺어왔다. 1984년 당시 조직 없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던 서울거주의 상산김씨 영중추공파 종친들이 영사회(永思會)를 조직하여 내가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 무렵에 나는 대학과 한국식물학회의 업무로 몹시 바빴고 종친회에 경험이 없었으므로 조직과 중요한 종사(宗事)를 총무부장인 김봉호(金琫鎬) 씨가 맡아서 처리하였다.

 

서울종친회에서도 몇몇 부장을 맡았지만 나는 유명무실하게 지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97년 5월에 상산김씨 대종회 회장의 종무를 맡게 되었다. 대종회는 전국 11개 지회를 관장하며 종친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선조님을 위하는 사업을 하며 선조님의 얼을 후손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주요 목적으로 되어 있다.

 

본래 재주 없고 운영능력이 부족한 나인데 설상가상으로 임기가 시작되자 곧 IMF위기가 닥쳐와서 대종회 종무가 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 분위기를 돌보지 않은 채 새 종사를 일으키려는 몇몇 임원의 의사를 무마하는 것이 부득불 나의 임무여서 개운하지 못하다. 선배 회장들이 수행한 대제(大祭)와 청소년하계연수회를 차질 없이 치르게 되어 다행스럽다.

 

회기 중에 종보(宗報)와 청소년하계연수 교재인「보학독본」을 한글로 쉽게 풀이하고 어려운 용어에 각주를 붙여 해석함으로서 청소년들이 선조님의 얼에 성큼 접하도록 하였음이 진일보라고 하겠다. 2000년 5월 5일에 대종회장 임기를 마칠 때까지 최선을 다하여 봉사하려고 다짐한다.



무취미의 취미생활 (112회) -  제16장 조용한 제2인생

 

나는 사범학교 때 같은 시내에 있는 북중의 김가전 교장을 존경하였다. 그 분은 교육자이며 종교가였다."교장 선생님 저희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씀을 해 주세요"하는 우리들의 요청에,"여러분들은 젊어서부터 꼭 취미 하나씩을 가져라. 나처럼 늙으면 책을 읽기도 어렵고 글을 쓰기도 어려우며 즐길 만한 취미를 갖기도 어려우니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나는 초등학교 시절 가토 교장의 다양한 취미 생활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도 교장의 취미를 따르지 못하였다.

 

막상 나에게는 내로라 하는 취미가 없다. 술 담배를 안하고 노래도 부를 줄 모른다. 바둑이나 장기도 화투나 트럼프도 할 줄 모른다. 젊었을 때 영화를 자주 보았지만 요즈음 극장에 간 지도 오래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취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뜰이 있는 집에 살 때에는 정원에 잔디 가꾸고 꽃 심으며 나무 가지 자르는 것이 취미였다. 그러나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는 그 취미마저 잃었다. 얼마 동안 고심한 끝에 분재를 기르기로 마음먹고 분재의 소재(素材)를 몇 그루 구입하였다.

 

책을 뒤적이며 어린 소재를 노목(老木)의 자태가 나도록 손질하는 방법을 몇 년 걸려 터득하고 있다. 어떤 분재는 철사걸이를 할 나이가 되었지만 그것을 내가 할 자신이 없어 전문업자에게 부탁해서 철사걸이를 해 온다. 처음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길렀지만 분재는 베란다의 환경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1층의 뜰을 빌려서 겨우 환경을 맞춰주고 있다.

 

▲ 울릉도의 나리분지, 너와집 앞에서 / 좌로부터 정용재 교수(이화여대), 이석우 교수(고려대학교), 최임순 교수(연세대학교), 필자(서울대학교)

 

옛날 일본 동북대학의 교수로 초빙된 독일인 생태학자 Molish 교수는 일본의 분재 기술을 터득하여 유럽에 전파했다고 한다. 분재는 식물의 특성에 통달해야 높은 경지에 달할 수 있는 것이다. 줄기의 밑 둥이 굵고 가지가 늘어지며 전체의 모양이 위가 좁고 아래가 넓어야 어린 나무라도 늙어 보인다.

소나무류의 가지를 짧고 많이 가지치기하려면 어린순을 곰솔(해송)은 6월 하순에, 오엽송은 7월 초순에 끊어야지 그 시기를 놓치면 실패하고 만다. 아무튼 분재는 끈기를 요하는 예술이다. 나는 겨우 10여 개의 분재를 가지고 있을 뿐이므로 취미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나는 어려서 화가가 되려는 꿈을 가진 적이 있었다. 꿈은 잊지 않았지만 그림을 그릴 줄은 모른다. 다만 그림을 보고 좋아할 뿐이다. 그래서 값싼 그림을 한두 장씩 사 모으기도 하고 아는 화가들로부터 그저 얻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접하기 쉬운 동양화를 좋아하여 그것을 모았지만 요즘은 서양화에도 손을 대고 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에 빠져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어려운 그림은 이해하지 못하고 나 자신이 그림을 못 그리며, 몇 점 안 되는 그림으로 만족하고 있으니 그것도 취미인지 의심스럽다.

 

나는 도자기를 좋아한다. 유약(秞藥)을 바르지 않은 도기(陶器)도 좋아하고 바른 자기(瓷器)도 좋아한다. 그러나 나는 흙을 다룰 줄도 물레를 돌릴 줄도 모른다. 다만 남이 만든 그릇을 보고 즐길 뿐이다. 도자기는 흙과 불과 색의 종합 예술이다. 그리고 그림이 평면 예술이라면 도자기는 입체 예술이다.

 

가야나 신라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보존된 미술품이 도자기이다. 선대(先代) 어른들의 혼과 인지(人智)를 도자기에서 읽을 수 있다. 몇 점 안 되는 도자기를 보며 넋을 잃은 채 그 아름다움에 빨려들기도 하고 그 소박함에 옛 선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도자기 명품의 도록(圖錄)을 보며 만족하는 것이 내 취미라고 할지.



학술 조사의 발길-1 (제113회) -  제17장 [부록]역마살 붙은 자유인

 

나에게는 다분히 역마직성(驛馬直星)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재임할 때는 국제 학회에 참석하는 일을 빼고 유람(遊覽)으로 외국에 갈 수 없었다. 나는 한 달을 연구실에 묻혀 있으면 좀이 쑤셔서 국내 여행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다. 그런데 자유인이 된 지금은 그 직성을 외국 여행으로 풀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외국 여행은 그 지역의 식생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지만 요즈음의 여행은 식생과 함께 문화에 관심을 갖기로 하였다. 요즘은 거의 대부분 패키지 여행이라서 편하게 다닐 수 있어 좋다.

 

가. 학술 조사의 발길

 

(1) 이리안 자야(인도네시아)의 토양 조사

이 여행의 목적은 인도네시아의 이리안 자야에서의 ‘대두, 카사바, 카카오, 등의 수확을 위한 잠재 농업 연구 계획’(research and investigation of potential farming project in Irian to harvest soybean, casava, cacao, etc.)을 하기 위여, 인도네시아의 P.T. Porodisa사(무역과 국내 항공사)의 Sumendup 회장의 초청을 받았다. 한국측에서는 모 회사가 알선하여 한국농민 500 세대를 이리안 자야의 Arguni에서 농사를 짓게 하여 그 농산물을 한국에 수입하려는 계획이었다.1 이 여행은 1983년 8월 4일~20일에 임웅규 교수(서울대 농대)와 민병미 군이 동행하여 다음의 경로를 밟어 이루어졌다.

 

서울-Jakarta(자바섬)-Ujung Pantang(수라베시)-Ambon(세람)-So-rong(이리안 자야)-Fakfak-Kaimana-Arguni-Adi 섬.

 

Jakarta에서는 시간 여유가 있어 4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Bogor 식물원을 견학하였는데 이것은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개원하여 옮겨 심은 지 150년이 넘는 열대식물들로 장관을 이루었다. 1848년에 이식한 팜기름야자, 1870년에 이식한 문둥병 약을 추출하는 Shorea leprosia, 20년이면 거목이 된다는 Eucalyputus alba , 열대 콩과식물만 모아 놓은 거대한 수목원, 벼의 원종으로 생각되는 Oryza loarthii  등 볼거리가 많았고,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 하였을 때 먼저 식물에 눈독들임을 여기에서도 확인하였다.

 

인도네시아는 13,67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동쪽의 이리안 자야(Irian Jaya=서New Guinea)에 들어가려면 경찰청의 국내 비자를 받아야 하였다. 우리 일행은 Jakarta를 출발하여 Ujung Pandang(수라베시 섬)과 Ambon(세람섬)에 기착했을 때 넓은 논과 못자리로부터 수확하는 벼까지를 보았다. 이리안 자야의 북서쪽에 있는 Sorong에서는 밤에 안내자(Tomberng 씨)가 운전하는 트럭을 타고 드라이브하는데 길 위를 지나는 큰 뱀 위를 넘어 마치 큰 요철을 지날 때처럼 차가 요동치는 경험을 하였다. Sorong에서 Fakfak을 거쳐 Kaimana까지는 10인승의 프로펠라 경비행기에 탑승하였고 비행장에 내려보면 활주로가 아스팔트가 아닌 맨 땅이어서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경치는 바다에 배가 전혀 없고, 육상에 길도 차도 없는 태고의 고요가 깃들여 있었다.

천연 항구가 있는 Fakfak은 다윈과 함께 진화론을 제창한 Wallace(영국)가 체류하며 생물학을 연구했던 곳인데 길거리에서 만난 파푸아 족인 곱슬머리의 상업고등학생들은 이방인에 대하여 친절하고 또한 야심 찬 미래상을 이야기하며 영어를 잘 구사하였다.

 

파푸아 족 중에서 고산 계는 지금도 사람을 잡아먹을 만큼 흉폭하지만 해안계는 유순하다고 한다. Waho 마을의 인부들에게 아들이 무엇 하느냐고 물으니 거의 외지에 보내서 공부시킨다고 대답하였다.

 

▲ 고용된 이리안 쟈야의 Waho 마을 원주민 노동자들(1983. 8. 17. Arguni에서

 

Fakfak에서는 조사에 필요한 보급물자를 조달하였다. 제1진에 음식물 등 버급물자 250킬로그램을 비행기에 실어 보내고, 한국인 3명과 안내책임자(Alex E. Tendean 씨)는 제2진으로 출발하였다.

 

Kaimana 비행장에서 Arguni까지는 작은 발동선으로 이동하였다. 접안 시설이 없어 배를 타려면 신발을 벗어야 했으므로 나는 원주민의 등 신세를 지게 되었다. Arguni는 집도 마을도 없는 텅 빈 해변이었다. Arguni에 도착하기 전에 Waho라는 해변 마을을 지났는데 여기에는 원주민 40가구 200명이 살고 있으며 교회 첨탑이 보였다. 이 마을의 원주민 8 명을 인부로 고용하여 함께 배를 탔다.

 

Arguni에서의 캠프는 벽이 없이 지붕만 있는 텐트에서 잠자고 모든 음식물을 기름에 튀겨 먹으며 방뇨와 배변은 적당히 처리한다. 캠프 옆에 Waho 마을의 원주민이 가꿔놓은 밭이 있는데 멧돼지 침입을 막기 위하여 튼튼한 울타리가 쳐져 있고 그 옆에 멧돼지가 후벼놓은 진흙땅이 보인다.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데도 모기가 없는 것이 신기하다.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은 펄럭이는 텐트 소리로 잠을 설친다.

 

Arguni의 토양 조사는 이번 조사를 위하여 3년 전에 길을 뚫어놓은 것을 빼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원시림 속에서 이루어졌다. 높이가 40~60미터이며 둘레가 20미터가 넘는 나무의 원시림이다. 숲 속에서는 사진이 플래시 없이 찍히지 않는 밀폐상태. 다행히 원주민들이 기다란 칼(트럭의 스프링을 개조한 칼)로 덤불을 후려치며 길을 내 준다. 토양은 100미터 간격마다 표본을 채취한다.

 

해안에서 출발하여 ㄷ 자를 따라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해안으로 나와서 기다리는 배를 타기로 약속되어 있다. 그런데 예상 밖의 변고가 생긴다. 해안을 600미터 남겨 놓고 망크로부림이 나타난 것이다. 망크로부 나무는 줄기의 약 1미터 높이에서 우산살처럼 뻗은 뿌리를 흙 속에 박는 성질이 있다. 뿌리 위를 걷기에는 높고 밑으로 지나기에는 너무 낮으며 엉켜져 있다. 얼마쯤 걷고 나니 다리가랑이에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다. 망크로부림을 빠져 나오는 데 꼬박 2시간이 걸린다.

 

Adi 섬에서 Spin boat로 접근해야 하는데 그것이 고장이 나고 키잡이가 미숙해서 해안에 닿기 전에 홀랑 뒤집힌다. 사람과 짐이 물텀벙이가 된다. 그러나 Adi 섬에는 Sumendup 회장의 영빈관이 있어서 편안하게 잠을 잔다. 5킬로미터 길이의 Adi섬은 Sumendup 회장이 정부에서 임대한 개인 땅인 듯 열대 우림이 깡그리 벌목되어 농장으로 변하고 개량된 신품종의 농작물이 가꿔져 있다. 이곳의 토양 조사에는 친절하게도 무장한 경찰관의 호위를 받았다.

 

이번 여행은 토양 조사라기보다 마치 탐험과 같았다. 열대의 원시림과 망크로부림을 관찰하고 열대림 벌목의 현장을 목격하는 귀중한 여행이었다. 토양 분석한 결과와 재배할 수 있는 열대 농작물에 관한 소견을 곁들여서 보고서를 제출했건만 농업 이민이 실현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마도  Arguni 농장 예정지의 경사가 너무 큰 데 원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학술조사의 발길-2 (제114회) -  제17장 [부록]역마살 붙은 자유인

 

(2) 키나발루산(Sahba주, 말레이시아)의 식물 조사 

90년대에 문민정부가 서고 사회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며 공무원의 해외 여행이 자유화됨에 따라 1990년 1월 30일~2월 8일에 키나발루 산(Mt. Kinabalu․사라와크, 말레이지아)의 식물 조사를 계획하였다. 키나발루산은 높이가 4,101미터이고 북위 4도에 위치하며,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열대 고산이다. 이 여행에는 이영노, 김윤식, 이우철, 오용자, 김두영, 김태욱, 이희선, 길봉섭 교수가 참가하였다.

 

열대 고산의 공통된 특징은 산허리에 1년 내내 구름이 끼여 습한 운무대(cloud zone)가 걸려 있는 것이다. 키나발루산의 운무대는 1,500~2,200미터 높이에 걸려 있다. 키나발루산의 토양은 대부분 화강암이지만 유독 2,800~3,200미터 높이는 강알칼리성인 황색 사문암砂紋岩 토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강암 토양은 많은 빗물에 영양소가 씻겨 내려서 척박해지므로 벌레잡이 주머니를 가지는 식충식물(Nepenthes)이 자란다.

 

키나발루 산은 평지에서 1,600미터 높이까지 40~60미터 높이의 열대우림을 이룬다. 운무대에 형성된 상록성 참나무류의 숲 속은 열대 난, 선류(예: 키가 1미터의 Dawsonia), 나무고사리(키 15미터) 등이 지면과 줄기․가지에 빽빽이 붙어 있어 특이한 군락구조를 형성한다. 3,200~3,800미터에는 키 작은 소나무류가 군락을 형성하고 3,800~4,101미터는 큰 바위 덩어리로 되어 있는데 계곡에는 월귤류-진달래류의 고산성 관목림과 화본과 식물로 이뤄진 고산성 초지가 형성된다. 키나발루산에서는 등반증명서를 발행하는데 정상을 정복한 분은 4,101 미터의, 나처럼 산장까지 오른 이는 3,353미터의 증명을 받는다.

 

키나발루산의 식물은 140과 8,000 종이며, 난과 식물만 72속 400종에 달하고, 식충 식물인 Nepenthes 가 여섯 종이 자생한다. 일행이 귀국한 뒤 이영노 교수와 나는 뒤에 남아서 세계에서 가장 큰 꽃(직경 1미터)인 Rafflesia(포도과 식물의 뿌리에 기생)의 자생지에서 막 피려는 것을 관찰하는 행운을 누렸다.

 

열대식물림의 종을 모두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번 조사 여행에서 열대 고산, 특히 운무대의 식생과 환경 및 특이 토양인 사문암 식생을 관찰한 것은 큰 소득이었다.

 

(3) 알마아타(카자흐스탄)의 식물 조사

1990년 7월 7일~16일에 알마아타(Alama Ata, Kazakhstan) 주변의 식물 조사를 한 뒤 모스크바에 들러 구경할 기회를 가졌다. 이번 조사 여행에는 이영노, 김철수, 이희선, 길봉섭, 오용자, 정연숙, 김태욱, 김영식 교수가 참가하였다.

 

▲ 소련의 고산(3,500m)에서 폭설에 조난 당할 뻔한 한국 식물학자들 (1990. 7. 11. 알마아타 Kyzylsaj에서)

 

소련 비행기는 시베리아의 투명한 하늘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여덟 시간 동안 난다. 동 시베리아는 길도 농경지도 사람도 없이 오직 녹색의 숲이, 평지는 진록색으로 경사지는 암록색으로, 펼쳐진다. 자원이 유한하다는 말은 동 시베리아에서는 해당되지 않나 보다. 숲 가운데를 뱀이 지난 듯이 짙은 청색의 강이 구비쳐 흐른다. 강 옆에 붉은 흙의 농경지 조각이 조금씩 붙어 있다.

비행기가 낢에 따라 서 시베리아의 풍경이 눈에 비친다. 큰 강가에 황갈색의 범람원이 보이고 원형의 호소가 여기 저기에 흩어지며 담황색의 넓은 습지 끝에 사행천이 이어지고 강 옆에 짙은 녹색의 삼림 조각이 모여 있다. 비행기가 우랄 산맥을 숨막힌 듯이 5분 동안에 뛰어 넘는다. 산맥에는 계곡마다 하얀 잔설이 남아 있고 담황색의 식생이 이채롭다(이것이 툰드라가 아닌지?). 우랄산맥의 서쪽은 반듯한 길이 뚫리고 마을이 보이며 농경지가 드넓다. 어찌하여 산맥을 경계로 하여 동쪽의 시베리아와 서쪽의 러시아가 이렇게도 다를까?

 

모스크바의 음울한 Sheremetyevo 국제 공항에서 2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안내자가 나타나서 Domadedovo 공항으로 안내한다. 저녁밥을 굶은 채 12시에 알마아타 행 비행기에 오른다.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외국 여행객이 돈을 쓰게 할 줄 모르나 보다. 그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겨우 6개월 전에 218개 도시를 외국인에게 개방하였다는 것이다.

 

알마아타에서는 시내에서 1시간 거리의 높은 산 중턱에 있는 Chimbualk 호텔을 정해준다. 우리는 고려 족인 모스크바 공과 대학 에드워드 김 교수와 등산으로 영웅 칭호를 받은 Studenin Boris 씨의 안내를 받았다. 이처럼 유명 인사를 안내자로 붙여주는 것은 여행사(Intrurist)가 한국의 식물학자들을 각별히 배려한 것 같다.

 

우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알마아타에서 25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Charyn에 내려 사막식물을 조사하고, 이어서 30킬로미터 거리의 Kyzylsai 지방에 있는 천산산맥의 지맥인 Molodaia 봉(4,395 미터)과 Gvardai 봉(4,340미터)의 3,400~3,500미터 높이에 내려 고산식물을 조사하는 행운을 누린다. 이 식물 조사에는 이 지방의 식물분류학자인 알마아타대학교 Baikenov Myslin Smailovich 교수가 동행하여 사막식물과 고산식물을 자세히 분류해 주신다.

 

일행은 고산에서 헬리콥터를 보내고 3시간 동안 조사한 다음 오후 5시에 헬리포트에 모이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모처럼 고산식물에 접한 일행은 식물을 채집하고 사진을 찍으며 한대지방의 지질구조를 관찰하는 등 무아도취 한다. 그런데 5시를 얼마 남겨 놓고 센 눈보라가 치며 안개가 눈 앞을 가려서 헬리콥터가 접근하지 못한다. 마침 얼마 떨어진 곳에 Kyzylsai 산장 간이관측소가 있어 관측원이 조난 당한 우리 일행을 맞아 준다. 그는 우리에게 커피를 끓여주고 유숙시킬 요량으로 침대를 꺼내서 조립하는 등 바쁘다. 그런데 3시간 40분 뒤에 어둠 속에 굉음을 내며 헬리콥터가 눈앞에 나려 앉는다. 이렇게 해서 낯선 땅의 고산에서 하룻밤을 떨지 않고 무사히 알마아타로 돌아왔다.

 

일행은 알마아타 식물원을 방문하였다. 여기에는 카자흐스탄 공화국에 자생하는 5,600 종류가 보유되며 이 중에서 600 종류가 고유종이라고 한다. 그리고 Medeo의 숙소(Chimbualk)에서 리프트를 타고 표고 3,000미터까지 오르내리며 식물의 수직분포를 조사하였다.

(4) 미국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산화적지의 재생 관찰

98년 8월 10일~9월 2일에 막내딸(주원)이 거주하는 미국 Missouri주 Columbia에 2주일 동안 체류한 다음 L.A.를 거쳐 Wyoming 주의 Yellowstone 국립공원을 구경하였다. Yellowstone 국립공원에서는 10년 전에 산불로 전소된 삼림의 회복과정을 사진으로 찍고 또 그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곳에서는 산불 뒤에 인위를 가하지 않고 자연에 맡긴 채 회복시키고 있었는데 불나기 전에 떨어진 종자가 싹터서 유림幼林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서운 힘으로 분출하는 수증기의 기둥은 지질학의 교과서를 보는 듯 하였다.



바깥 나들이 (제115회) -  제17장 [부록]역마살 붙은 자유인

 

(1) 알래스카-캐나다 여행

95년 8월 7일~15일에 북미의 록키산을 중심으로 여행하였다. 알라스카에서는 Ressulation 만의 유람선 상에서 물 위에 치솟는 고래 (humbach whale) 등 풍부한 야생동물을 보고, Mckinly산의 빙하퇴(glacial till)와 그 주변의 침엽수 원시림 위를 경비행기로 날면서 태고의 신비를 체험하였다. 캐나다의 Bancuver에서는 여권을 도난당하여 일시적으로 소동이 벌어졌지만 다행히 되찾았다. 로키산을 이루는 Yoho 국립공원(1886년 설립), Banff 국립공원(1887년), Jasper 국립공원(1907년), Kootenay 국립공원(1920년) 등의 원시림과 야생동물(들소 등)에 접하면서 Columbia 빙원을 특수 버스로 답사하였다.

 

(2) 호주-뉴질랜드 여행

95년 12월 7일~14일에 뉴질랜드-호주를 여행하였는데 뉴질랜드에서는 Auckland-Rotorua-Waitomo를 거치면서 화산지대의 온천과 개똥벌레 동굴 그리고 마오리 족의 민속춤 등을 구경하였다. 이 여행 중에 남반구 사람들의 환경보존 의지가 뛰어남을 인식하였다. 호주에서는 Brisbane의 Gold coast와 Sydney의 아름다운 항만, 현대식 건축미를 자랑하는 오페라 하우스, 블루마운틴의 유카리림을 보았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농촌 풍경은 영국의 것과 흡사하여 각 인종의 생활 습관이 환경을 바꾸고 있음을 실감하였다. 이번 여행은 계획에 없었는데 어느 날 급작히 막내딸(주원)이 근무하는 B.M.S.사의 김성기 사장님의 호의로 가게 되어 감사를 드린다.

 

(3) 대만 여행

95년 10월 23일~27일과 97년 6월 28일~7월 1일에 두 번 대만을 여행하였다. 대북 시내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 공묘(孔廟), 중정기념당, 화련(花蓮), 야류(野柳) 등과 양명산국립공원을 돌아보았다.

 

(4) 인도 문화 기행

96년 2월 2일~12일에 New Dehli-Varanasi(Ganga강)-Khajuraho-Agra-Taj Mahal-Jaipur를 거치면서 힌두 문화에 흠뻑 젖었다. 새벽의 Ganga 강에서 인도인들의 기도와 목욕과 빨래와 장례를 보며 그들의 깊은 내면 세계를 보는 듯 했고, 16세기에 95년 걸려서 건축한 웅장한 Agra 성에 거주한 악바르왕은 세 명의 첩―힌두교, 이슬람교 및 기독교 신자―을 두고 인도를 통일하여 전 국민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Khsajuraho에서 육신의 생생한 조각상으로 건축한 고대사찰에서 고대 힌두교에 접하는 듯 했으며, 17세기에 22년간에 걸쳐 건설한 세계에서 제일 아름답고 세계 7 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진 Taj Mahal 영묘를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인도는 나라가 크고 (한국의 33배) 인구도 많으며 문화가 깊음을 짧은 시간에 간산주마 격으로 체험하였다.

 

▲ 미얀마 Yangon의 Shedagon대금탑 앞에서 필자 부붜

 

(5) 베트남 여행

96년 11월 26일~12월 2일에 Hanoi-Hue-Huchimin-CuChi 터널을 돌아보았다. Hanoi에서 호지명 대통령의 검소한 생활과 Huchimin(사이공)에서 월남 대통령의 무절제한 생활이 비교되었고, CuChi턴넬에서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30년간에 걸쳐 판 250 킬로미터의 땅굴 속에서 항전한 베트콩의 저항에 탄복하였다. 베트남인들은 오랜 전쟁과 사회주의 체제 하에 있으면서도 명랑하고 자존심이 강함을 보여주었다.

 

(6) 지중해 4 개국 여행

97년 2월 24일~3월 5일에 스페인-이집트-그리스-터키를 순회하였다. 스페인에서는 Madrid와 Toledo를, 이집트에서는 Cairo-Luxor-Gaza를, 그리스에서는 Athene를, 터키에서는 Istanbl을 구경하였다. 문화가 서로 다른 근대 미술(Madrid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된 Goya: 1746-1828의 그림 등), 고대 건축(Luxor의 카르나크 신전과 Athene의 파르테논 신전 등)과 기원전 4000년의 이집트 문명, 기원 전 100년의 그리스 문명, 그리고 근세의 이슬람 문명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너무 방대하고 복잡한 문화에 비하여 시간이 짧아서 소화시키기 어려웠다. 스페인의 정열적인 플라멩고 춤과 터키의 조용한 배꼽춤이 인상에 남았지만 투우를 보지 못해 아쉬웠다.

 

(7) 미얀마-태국 여행

1999년 2월 24일~3월 1일에 미얀마(버어마)의 Yangon-Mandalay-Minkun-Pagan 등지와 태국의 Bankok 인근에 있는 Bangpain 궁전-왓 야이치 몽골-왓 푸라마타 사원 등지의 불교 유적을 돌아보았다. 미얀마는 가는 곳마다 불교 유적과 불승이 보이며, 특히 Shedagon 대금탑은 18만 평 넓이의 대지에 휘황찬란한 탑이 7톤의 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Pagon은 편평한 평야지의 8 × 8 킬로미터 넓이에 2,700 개의 pagoda가 숲처럼 서 있었다. 대금탑과 Pagon은 UNESCO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었다. 미얀마는 국민 소득이 300 불 밖에 안되지만 불교가 생활화된 특이한 나라로서 종교가 지나치면 마약과도 같다는 회의를 가지며 귀국에 올랐다.

 

(8) 동유럽 6 개국 여행

99년 5월 25일~6월 3일에 독일(Berlin)-체코(Praha)-오스트리아(Wien, Baden, Brno)-헝가리(Budpest)-슬바키아(Banska Bystrica)-폴란드(Warschowa, Krakow)를 버스로 순회하였다. Praha, Budapest 및 Krakow에는 중세의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볼거리가 많았지만 그밖의 도시에는 이차대전 중의 파손을 수리했거나 현대식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독일에서는 조용한 서Berlin에 비하여 한참 건설에 열중하고 있는 동Berlin의 모습을 보고 한반도의 통일 후 모습을 연상하였다. Krakow에서 본 Auschwitz 유태인 수용소의 내부는 너무 비참해서 숙연해졌다.

 

이 여행 중에 예상하지 않았던 소득은 오스트리아의 Brno에 들렀을 때 유전학의 원조인 Mendel의 초상을 볼 수 있었다. Stare Brno에 있는 그 초상의 소재지를 물었을 때 젊은이들은 알지 못했지만, 노인이 가르쳐 주어서 택시로 달렸다. 성당 옆에 세워진 초상은 우거진 나무그늘에 덮여 있고, 옛날의 완두콩 밭으로 예상되는 앞뜰은 잔디밭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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