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2003 최우수작

忍齋 黃薔 李相遠 2005. 5. 18.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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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작

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

나정현(광주시 동구 산수1동)



어느덧, 5․18민중항쟁 23주년이 되었다. 80년 5월, 그 핏빛 도시에서 살아 남은 나에게 그 날의 5월은 그대로 멈춘 채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데, 세상의 시간이 흘러서 한 해씩 연륜을 쌓아가듯 그렇게 5월은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80년 5월, 자식을 잃고 몸부림치던 어머니들의 까맣던 머리카락이 모두 백발이 되어 있었다. 5․18 묘지에서 자식의 비석을 껴안고 있는 어머니들. 23년의 세월로 얼굴에는 깊은 굴곡이 생기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했으나, 그 때의 고통은 여전한 듯 하나같이 울부짖고 있다.


80년, 광주의 어머니들은 하나 같이 고통받고 있었다. 그 어머니들은 처음에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남으로서 어찌할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그들은 광주가 피로 물들어 가자 그들의 방식대로 강해져 갔다. 그들을 움직인 것은 독재도, 민주주의도, 투쟁도 아니었다. 다만, 제 자식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들딸들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80년 5월,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그 무렵, 온 나라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새내기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게 민주주의니, 투쟁이니 하는 것들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담장을 타고 오르는 5월의 장미처럼  화사한 꿈을 꾸고 있던 나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같은 것은 대학생이 되면 한 번쯤 해보고 넘어가야 할 일종의 통과의례쯤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세뇌된 반공 세대였기 때문일까, 갑작스런 비상 계엄령에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어쩌면, 남의 일처럼 무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와 내 가족들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시민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계엄령이니, 내란음모로 김대중 감금이니, 하는 뉴스가 고장난 녹음기처럼 반복해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불교를 믿고 있던 어머니는 절에 갈 준비로 부산했다.


어머니는 동이 트기도 전부터 일어나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한 후, 시주용 쌀 보퉁이를 들고 집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절로 가기 위해서 대문을 나섰다. 어머니를 배웅하러 대문까지 따라나선 내 눈에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에 회색 승복 바지 차림의 어머니는 자식들의 안위와 자비를 구하러 가는 사람답게 평온해 보였다.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의 얼굴은 평정을 잃고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산수동 오거리에서 내가 못 볼 것을 봤다. 벌건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한 길에서 대학생 서너 명을 몽둥이로 개 패듯이 때리더니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차에 던지듯이 싣더라. 아이고, 짐승한테도 그럴 수는 없는데… 오매, 가슴 떨려라. 내 말리지도 못했다. 그 놈들 눈초리가 사람 눈이 아니더라. 너희들 아무도 밖에 나갈 생각 말아라."


어머니의 말을 듣고도 나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다.


"아이고!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이렇게 못 믿겠는데, 누가 말로 했다면 쓰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도 말라고 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직접 보고서도 내내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광주에서는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소식들은 전화선을 타고 왔다. 어머니의 말처럼, 어머니의 경험담이 없었다면 나 또한 전화선을 타고 오는 소식들을 유언비어쯤으로 치부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 날, 모든 광주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와 가족들은 텔레비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끝내 침묵했다. 개에게 물린 사고만 나도 떠들어대던 텔레비전은 입을 꼭 닫음으로써 광주의 하늘과 땅을 핏빛으로 물들어가게 했다.


5월 19일, 나는 등교를 했다. 전날의 일들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침을 먹고, 교복을 챙겨 입고, 같은 학교에 다니는 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거리는 비밀스러운 웅성거림이 곳곳에서 일고 있었으나,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내버스가 다니고, 거리의 상점들은 거의 문을 열었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언니와 나는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묵묵히 학교로 갔다.


교실 안은 전날 일어났던 일들로 온통 들썩이고 있었다. 폭력의 현장에 대한 목격담이나, 전해들은 이야기들이 더해질수록 내 안의 분노도 쌓여갔다. 설마, 설마 하던 것이 목격자가 많아짐으로써 진실이 되어 갔고, 그것을 스스로 진실로 받아들이자, 그 다음에 온 것은 분노였다. 분노는 나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니었다. 교실 안은 반 아이들이 쏟아내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수업이 되지 않았다. 학생들의 제 자리에 앉을 생각도 없이 서성거렸고, 선생님들은 모두 교무실에 모여 있었다.


"저것 좀 봐!"


누군가가 소리치자, 우리들은 소리의 근원지인 복도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학교 앞, 큰길로 군용트럭이 지나가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군용트럭에는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공수부대원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전쟁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항의성 야유를 퍼부으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들이 누구인가,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사리 손으로 존경과 고마움을 담아서 위문편지를 써 보냈던 고마우신 국군 아저씨들이 아닌가! 설마, 그들이 우리들의 피를 원하겠는가!


나는 군인들이 전시가 아님에도 무장을 한 채 시내 도로를 질주하는 것은 치안과 질서 유지 때문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우리는 오전 시간도 다 못 채우고 하교를 했다. 사실, 전혀 수업을 하지 않았으니 등교했다가 그대로 하교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분간 휴교를 할 것 같아요. 모두들 집안에서만 지내세요. 시골이 집인 사람들은 고향에 내려가 있도록 해요."


마른 체형 때문에 다소 예민해 보이는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하면서 말했다. 평소에는 날카로웠던 목소리가 무뎌진 듯 완만하게 들렸다.


"모두들 몸조심해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던 선생님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것은 항상 꼬장꼬장하게 굴었던 수학선생님의 건조한 말투가 아니었다. 위험한 상황 속으로 자식들을 내 보내야만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처럼 습기가 묻어 있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 선생님이 몸조심하라고 하니까…."


계단을 내려오면서 누군가가 말하자, 너도나도 그랬다고 했다. 사실, 습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 무엇인가 거부할 수 없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몇몇 친구들은 도청 앞으로 가보겠다며 금남로 쪽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나는 언니에게 붙잡혀 집으로 왔다.


우리 집은 산수동 오거리에서 철길 쪽으로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쯤에 산수시장이 있는데, 부모님은 그 곳에서 그릇가게를 하고 있었다.


언니와 함께 집으로 가자, 동생들만 있었다. 아버지는 당시 전남대학교에 다니던 오빠를 끌다시피 해서 송정리 고모집으로 피난갔고, 어머니는 가게에 있다고 막내 동생이 묻지도 않았는데 쏟아내듯이 말했다.


어머니는 자주 전화를 걸어서 언니에게 아무도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우리들을 잘 지키라고 했다. 아침 일찍 송정리로 떠났다던 아버지와 오빠는 정오가 넘어서야 도착했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길이 통제되어 어찌어찌 걸어서 도착했다는 것이다. 


나는 언니의 감시망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딱히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적지도 없었다. 그냥 밖이 궁금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위의 중심지인 도청 앞으로 나갈 자신도 없었다.


나는 천천히 산수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황을 봐서 산수동 오거리까지 가 볼 참이었다.


산수시장 입구가 사람들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이고, 이러고들만 있을 것이요! 이러다가 광주의 젊은이들이 다 죽겠소. 우리가 무릎이라도 꿇고 사정이라도 해봐야 할 것 아니요!"


자신의 가슴을 통통 치면서 울부짖는 사람은 산수시장 안에서 한복 가게를 하는 광양댁 아주머니였다.


"우리가 무릎 꿇고 빈다고 해도 들어 줄 놈들이 아니요. 아침나절에 금남로에서 어떤 노인네가 그만 좀 하라고 어깨를 붙잡았는데, 그 놈이 노인네한테 집구석에 뒤진 듯이 있으라고 하면서 확 밀어버렸다고 안하요. 노인네가 길거리 쓰러져 있는데도 시민들은 무서워서 발만 동동 굴렸다고 합디다."


채소가게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 모여 있는 사람들 입에서 한숨과 분노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사람은 제 가슴을 치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발을 동동 굴렸다.


산수동 오거리 쪽에서 신발가게를 하는 영옥이 어머니가 뛰어왔다.


"아주머니들,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예요! 지금 시위대들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고 하네요. 벌써, 사흘째 빵 하나로 버티고 있는 사람도 있데요. 이럴 때 우리가 힘을 합쳐야죠. 모두 자식 같고 동생 같은데…."


영옥이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시장 입구에 모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굴리고 있던 아주머니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좀전의 술렁임이 길을 잃고 막연히 표류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비통함의 울림이었다면, 이번에는 표류한 채 그대로 떠다니지만은 않겠다는 의지의 울림이었다.

        

곧바로 행동개시를 시작한 시장 아주머니들은 특유의 재빠름으로 일을 처리해 나갔다. 앞장을 선 사람은 시장 안에서 선술집을 하는 무안댁 아주머니였다.


"일단, 식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바로바로 떠먹을 수 있는 양동이가 좋을 것 같으니까, 집에 가서 양동이 있는 대로 모두 챙겨 오시오. 그런데 그릇집 아짐은 양동이 한두 개로는 안될 것이요. 밥은 한꺼번에 지으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각자 지어서 소금과 참기름으로 간을 해서 이곳 평상으로 오세요, 모두 모여서 주먹밥을 만들게요. 아- 참, 간한 밥에 식초 두어 방울 떨어뜨리는 것 잊지들 마시고, 급히 먹다가 체하면 큰일이니까…."


걸걸한 목소리의 무안댁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시장 아주머니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릇 가게를 하던 어머니는 가장 큰 플라스틱 양동이를 몽땅 가져다 놓았다. 가게 안에 취사도구가 없어서 밥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물품으로 부조를 한 것이다.


그랬다. 그 순간 시장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였다. 어머니처럼 취사도구가 없는 사람들은 쌀을 내 놓거나, 자신의 가게에서 파는 물건들을 내놓았다.


시장 입구에 놓여있는 두 평 남짓한 대나무 평상은 순식간에 빵이며 음료수, 수건, 김, 식수가 가득 든 양동이, 쌀들로 가득찼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곳곳에서 밥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더니 소금과 참기름으로 간을 한 밥들이 평상으로 속속 도착했다. 밥들은 아주머니들의 손길에 의해서 주먹밥으로 변해갔다. 주먹밥은 어린아이들 주먹만하게 뭉쳐진 밥을 4절로 자른 김에 감싸는 식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아주머니들 틈에 끼어서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때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린 어머니는 한 마디 해주고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묵묵히 주먹밥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다 만들어진 주먹밥은 몇 개의 커다란 바구니 안에 담겨졌다. 주먹밥은 모양과 크기가 만든 사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났지만, 그것에 쏟은 정성은 모두 한결 같았다.


아주머니들은 자신들이 만든 주먹밥과 식수를 들고 산수동 오거리로 갔고, 나는 어머니에게 쫓겨 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전화를 통해서 각자의 소식을 전해왔다. 도청 앞, 시위에 참가했다는 은미는 계엄군에게 쫓겨 골목골목으로 도망 다니다가 겨우 살아서 집으로 왔는데, 부모님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했고, 곡성이 집인 순영은 차가 없어서 동생과 함께 담양까지 걸어갔는데, 담양에 사는 어떤 아저씨가 집까지 태워주었다고 했다.

   

친구들이 전하는 긴박한 소식과는 달리 집안에 감금되다시피 한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내 계엄령과 그에 따른 준수 상황만을 내보내는 텔레비전 또한 광주의 모습들을 외면함으로써 지나치게 평온했다. 방송으로만 본다면 광주 사람들에게는 목숨과도 관계 있는 계엄령이 타지 사람들에게는 단지 통행금지 시간 하나쯤 더 생기는 정도일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이 멈춰진 듯했다. 굳이 시간에 쫓기며 가야할 학교도 없고, 누군가와 만날 약속도 없으며, 심지어 제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일상적인 시간과 질서를 잃어가고 있었다.


밤이 되자, 주변이 온통 불길에 휩싸인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광주의 현실을 외면해버린 문화방송국이 시위대에 의해서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옥상에 서서 화염에 휩싸인 방송국이 맹렬히 타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그 만세소리는 바람을 타고 불길만큼이나 빠르게 번져나갔다. 우리들은 밤새 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고 있는 동안에는, 화르르 타오르고 있는 불길이 모든 상황을 끝내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방송국은 전소되었지만 광주는 여전히 방치된 채 짓밟히고 있었다.


5월 20일, 아버지는 길이 차단되어 오빠와 함께 당분간 송정리에 머물러야겠다는 연락을 해왔고, 어머니는 평소처럼 시장으로 나갔다. 나 또한 언니의 눈을 피해서 시장으로 나갔다.


시장 입구에 놓여 있는 평상에서는 모두 모여 주먹밥 만들기가 한창이었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몇몇의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그들은 시장 주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인데, 자신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동참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중에는 전남대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일주일 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아따, 별 일 없을 것이요! 일주일 전에 나갔다고 하니 어디 안전한 곳에 숨어있을 수도 있고…. 고만 좀 울어라! 주먹밥이 짜서 못 먹겠소!"


연신 눈가를 닦아내는 그 아주머니에게 무안댁 아주머니가 말했다. 무안댁 아주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아주머니들이 한숨과 함께 분노의 말들을 뿜어냈다.


어머니는 주먹밥을 만들고 있는 나를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묵인에 용기를 얻어 산수동 오거리까지 따라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산수동 오거리는 무슨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마치, 무질서의 현장처럼 보이지만,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었다. 대형 버스에 몸을 실은 채 도로를 점령하고 있는 젊은 시위대와 골목 구석구석에서 안타까움으로 발을 동동 굴리던 머리가 허연 어른들. 그들은 각자의 역할대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피를 흘리며 투쟁하고, 또한 자식 같고 손자 같은 젊은이들을 위해서 가슴을 죄고 있었던 것이다.


식수를 든 나는 어머니를 따라서 줄지어 서 있는 대형 버스 앞으로 다가갔다. 대형 버스는 주로 시내 버스였는데, 그 버스들은 앞머리에 각자의 번호표를 붙이고 있었지만, 모두들 노선을 잃은 채 한 곳을 향해 있었다.


우리들이 다가가자, 활짝 열린 차장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청년들이 손을 뻗어서 주먹밥이 든 바구니와 식수가 든 양동이를 받아들면서 고맙다고 했다.


주먹밥과 식수가 공급되는 동안에도 차장 밖으로 몸을 내밀고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땀과 먼지에 절여서 지쳐 보였지만 이마에 질끈 동여 맨 머리띠 아래에 있는 두 눈은 빤짝이고 있었다.


"학생, 밥 좀 먹어. 밥을 먹고 기운을 내야지 전두환도 몰아내지."


어머니가 청년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안타까움이 담겨있는 어머니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청년의 시선이 잠시 어머니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 청년은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먹밥이 들어 있던 바구니는 순식간에 비워져서 밖으로 나왔다. 내가 빈 바구니를 받아들고 있는데, 한 청년이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버스 출입문으로 나왔다.


"아주머니, 이 애 집이 이 근방이라고 하네요. 집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지금, 상황이 너무 안 좋아요. 공수부대원들이 환각제를 먹었다는 말이 있더니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이네요. 학생도 그만 집으로 가! 여학생들도 사정없이 난자 당했다고 하더라고."


청년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남자아이를 무안댁 아주머니에게 넘기더니 나를 끌다시피 해서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후로도 시장 아주머니들의 주먹밥 만들기는 계속 되었지만, 나는 특별 감시 대상이 되어 개학할 때까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외부와의 마지막 연락수단이었던 전화가 끊기자, 침묵으로 일관하던 방송은 광주를 폭도들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광주는 하나의 섬이 되었다.


5․18, 23주년을 맞이하여 당시의 수기를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어머니에게 주먹밥을 만들게 된 동기에 대해서 물었다.


"동기는 무슨, 그냥 마음이 너무 짠하고 분해서 시작한 거지. 벌건 대낮에 몽둥이에 맞고, 총에 맞아 죽어 간다고 하니, 다들 귀한 자식들인데…."


내 질문에 어머니는 짠하고 분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미 반백이 되어 버린 어머니의 기억 속의 80년은 오직 귀한 자식들의 죽음에 대해서 짠하고 분한 것으로만 가득 차 있는 듯 싶었다.


내가 시장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기로 쓰겠다고 하니까, 어머니는 "그 때 그 정도도 안 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수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5월 영령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것은 그날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분분히 일어나 함께 한 우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23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어도 산수시장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날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거의 그런저런 이유들로 떠나갔다. 아직도 산수시장을 지키는 사람은 어머니처럼 반백이 되어 버린 채소가게 아주머니뿐이다.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어야지!"


그때의 심경을 묻는 나에게 채소가게 아주머니는 당연한 것을 물어본다는 식으로 뚝 부러지게 대답했다.


80년 5월, 광주는 사람다운 사람들과 금수같은 사람들만이 존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산수시장 입구에는 대나무 평상 대신에 철재 평상이 놓여 있었다. 평상에는 중년의 여자들이 모여 앉아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화사한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만약에 그날이 다시 온다면 그들 또한 분분히 일어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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