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할머니의 5․18 / 2003 우수작

忍齋 黃薔 李相遠 2005. 6. 22.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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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 2

할머니의 5․18


김옥희(광주 남구 양림동)


할머니의 5․18


할머니는 떳떳치 못한 직업을 가졌다. 노름꾼. 할머니는 노름을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우리집에서 판이 벌어졌다. 그때 우리집은 동네에서 몇 남지 않은 초가집이었는데 앞문과 뒷문이 따로 나 있었다. 앞문과 뒷문이 따로 있다는 건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아주 유리한 조건이었다.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급습했을 때 뒷문으로 도망갈 수가 있었으니까.


우리집에서 내가 맡은 일은 선수들(할머니는 우리집에 모여 노름하는 사람들을 "선수"라고 불렀다) 뒷치닥거리와 잔심부름, 밥차리기, 설거지 같은 것이었다. 선수들은 시도때도 없이 밥과 과일과 두통약과 음료수를 주문했다. 나는 할머니한테 교육받은 대로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심부름을 갔다 왔다. 심부름 갔다 온지 얼마 안됐는데 또 심부름 시키는 선수는 정말 미웠지만 바나나 사오라고 시키는 선수는 정말 좋았다. 그 당시 바나나는 먹기 힘든 과일이었다. 바나나 한 번 원 없이 먹어보는 게 소원일 정도였다. 어쩌다 남은 바나나가 내 몫으로 떨어지면 나를 귀찮게 했던 선수들마저 고마워졌다.


1980년 5월. 내 나이 열살이었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갔더니 "휴교"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학교에 온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짝사랑하는 그 애를 못본다는 것이 좀 서운하긴 했지만 학교에 안 가도 된다니 폴짝 뛰고 싶을 만큼 좋았다. 집에 돌아오니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날과 사뭇 달랐다. 담요도 갖다 놓지 않고 화투도 없었으며 그들의 얼굴은 아주 심각했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선수들의 심각한 얼굴은 경찰과 관계가 있었다. 경찰의 습격을 받아 일부 선수들이 붙잡혀 들어갔을 경우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대책을 논의하며 당분간 몸을 사렸다. 그날도 그런 일이거니 했다. 그런데 그날은 사뭇 달랐다. 서울서 군인들이 내려와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잡아가고 옆에서 구경하던 시민들을 때리고 심지어는 칼로 찔렀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학생들 중에 빨갱이가 있어서 그런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북한에서 넘어온 간첩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간첩 잡는다면서 왜 대학생을 잡아가냐고 할머니가 물었더니, 대학생 중에 간첩의 조종을 받고 세뇌당한 불순분자들이 있어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 군인을 보낸 거라고 설명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했다. 선수들은 지금 잘못하다가 군인들에게 붙잡히면 개죽음 할지도 모르니 당분간 모이지 말자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화투라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천지가 개벽한다해도 단숨에 달려올 사람들이 화투를 마다하다니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일제시대 때 소학교에 다녔고 열아홉 살에 6․25전쟁을 겪은 경험을 갖고 있던 할머니는 아주 비장한 얼굴로 고모를 불러 골방 깊숙히 숨겨놓고 아무 데도 못 나가게 했다. 그리고 나와 동생을 불러 두꺼운 솜이불을 주면서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죽은 듯이 있으라고 단단히 일렀다.


할머니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투를 치고 있거나, 돈을 세고 있거나, 증조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거나, 빚쟁이 머리칼을 휘어잡고 악을 쓰며 싸우고 있어야 할 할머니였다. 할머니에게 관심사는 화투해서 돈 잃는 것과 오찌나 개평의 액수에 관계된 것들뿐이었다. 할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었다. 노름쟁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가차없이 달려가 멱살잡이를 하며 "내가 니놈한테 돈을 달랬냐 밥을 달랬냐?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고 화냥질하는 것도 아니고 내 손으로 내가 벌어서 먹고 살겠다는데 니가 뭔 상관이냐?"며 원색적인 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할머니가 누렇게 질린 얼굴로 겁먹은 목소리를 내다니… 할머니한테도 무서운 게 있다니…. 우리 할머니도 어쩌지 못할 일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게 이상했다. 거리 거리에 철모를 쓴 군인들이 넘쳐났다. 어떤 날은 얼굴에 철창을 내려쓴 군인들이 우리집 앞에서 쉬어 가기도 했다. 군인들의 얼굴은 몹시 지쳐보였다. 하지만 눈빛은 섬뜩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시 문을 열어봤던 나는 그들의 섬뜩한 눈빛에 질려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내가 조금만 움직이면 그들 모두 내게 달려들어 몽둥이로 내려칠 것만 같았다. 그 때의 그 눈빛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또렷이 기억난다.


방송국이 불타고 차들이 부서졌다. 이웃집 할머니는 밖으로 나간 손주녀석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눈물바람을 했다. 소문으로는 상무대 앞에 시체들이 산처럼 쌓였다 하고, 애기 밴 아줌마도 칼로 찔러 죽였다고 했다. 택시기사들이 차를 몰아 군인들을 몰아냈는데 그 다음날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들어왔다는 소문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학교에 가지 않아서 좋았는데,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솜이불 뒤집어쓰고 있자니 갑갑하고 심심했다. 평상시에는 귀찮았던 선수들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우리집 가까운 곳에서 대포 소리 같은 게 났다.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나와 동생은 소스라치게 놀라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썼다. 대포 소리는 간간히 들렸다. 우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지를 떨며 "무서워 무서워!"라는 소리만 반복했다. 자꾸만 대포알이 우리집 우리방으로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포라는 게 이런 것이라는 걸 그 때 처음 느껴 보았다.


몇 분쯤 흘렀을까. 대포 소리가 잠잠해지는 듯했는데 갑자기 우리집 대문을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탕탕탕탕 탕탕탕탕 탕탕탕탕….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갈수록 높아지고 속도는 빨라졌다. 나는 도저히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두드리는 소리가 높아지고 빨라질수록 이불을 움켜진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제발 대문 두드리는 사람이 그냥 가기를 바랐다. 우리 집에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다. 조금 있다 큰방 문이 열리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남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할머니 목소리와 남자 목소리가 번갈아서 들렸다. 그러더니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발자국 소리와 큰방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시 우리집은 잠잠해졌다.


이불 밖으로 나와서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할머니가 부를 때까지 방안에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밖의 형편이 궁금했지만 겁도 났는지라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가 부르셨다. 우리는 큰방으로 건너갔다. 큰방에는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손님 밥 차리자고 하셨다. 나는 밖에 나가 상을 차렸다. 평상시에 부엌에 들어오지 않는 동생이었지만 그날은 낯선 남자가 부담스러웠는지 밖으로 나와 상 차리는 일을 거들었다.


밥을 먹었다. 시장에 못 갔기 때문에 반찬은 형편없었지만 할머니는 장아찌를 맛깔스럽게 무치고 시래기 된장국에 새우젓 넣은 달걀찜을 해서 내놓았다. 할머니 음식솜씨는 동네에서도 알아줬다. 대충대충 무쳐 내도 맛이 제대로 났다. 젊은 남자는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우리는 젊은 남자의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오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젊은 남자 앞으로 반찬을 옮겨줬다. 그리고 많이 먹으라고, 힘든 일 하려면 많이 먹고 힘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그렇게 다정하게 구는 모습은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동생과 나는 얼얼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젊은 남자는 대학생이었다. 전남대였는지 조선대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법대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젊은 남자는 군인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도청에서 데모하다가 군인들에게 쫓겨 이곳까지 뛰어왔고 우리집 담장이 가장 낮아서 여차하면 담을 넘을 생각으로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처음부터 데모에 참여한 건 아니었다. 민주화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밖이 시끄러워 집에만 있다가 좀 조용해지는 듯 싶어 학교에 가는 길이었는데 군인들이 피흘리는 시민들을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을 본 뒤 가슴이 쿵쾅거리고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동료들은 도청 안에 들어가 있고 자신은 밖에서 사정을 보며 도청 안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물을 대주고 있던 차에 군인들 눈에 띄어서 쫓겨왔다고 했다.


그 남자는 할머니가 문을 안 열어줬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며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할머니는 아니라며 "광주 사람 살릴라고 목숨 내놓고 쌈헌디 그것도 안하믄 쓰것소. 학생겉이 훌륭한 사람이 죽으믄 안되제. 앞으로 판검사 될 양반인디, 맘 굳게 묵고 꼭 살아서 판검사 되시요잉. 우리야 못 배우고 가진 것 없어 입에 풀칠할라고 어쩌다 본께 노름쟁이가 되고 말았는디. 내가 노름은 해도 남 등쳐먹고 사기치는 추접스런 짓은 안하요. 글고 힘 없고 가난허다고 아무 죄도 없는디 무시허고 무지막지하게 패믄 그것이 사람이다요. 나보다 많이 배운 웃사람들이 왜 가난헌 광주 사람들을 못 잡아묵어서 안달인가 모르겄소. 인공 때도 말이요. 인민군보다는 우리 군인들이 무고헌 촌사람들을 더 무작스럽게 죽였은께. 우리 군인이라고 우리 팬이라고 생각하믄 큰일 당허요. 학생은 꼭 판검사 되야서 가난한 사람 불쌍헌 사람, 저 어린 것들 공부시켜보겠다고 새파란 젊은 경찰놈들한테 빌어가며 손가락질 받아가며 환갑되도록 화툿방에 앉아 있는 나겉은 사람들 좀 구제해 주시요. 그라믄 되제라. 그라믄 내가 밥 한 끼 먹인 사람이 광주 사람 위해서 쌈도 혀주고 판검사까지 되얏다고 평생 자랑으로 여길란께. 그라믄 되지라잉." 하고 말했다.


그날 들었던 할머니의 말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날의 할머니는 지금껏 나와 함께 살았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술 먹고 주정할 때 빼고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배운 것 없고 교양 없고 수치심도 없고 돈밖에 모르는 할머니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할머니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돈 번답시고 속옷 한 장 빨지 않은 바람에 증조할머니와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할머니가 손수 대학생 오빠의 옷을 빨아주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나가더니 무엇인가 한 봉지를 사와 무치고 지지고 볶아댔다. 할머니는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도시락을 꺼내 밥을 싸고 반찬을 담았다. 그러고도 반찬이 남자 뚜껑달린 쇠밥그릇을 모조리 꺼내 그곳에 담은 뒤 고무줄과 노끈으로 꽁꽁 묶어 주었다. 할머니는 선수들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옷 중 가장 좋은 것을 골라 대학생 오빠에게 주고 빨아두었던 옷은 수건으로 싸 따로 담아주었다.


할머니는 대학생 오빠가 더 이상 들고 갈수 없을 만큼 바리바리 싸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큰방 장롱 이불 밑에 숨겨두었던 만원짜리를 꺼내 10개를 센 뒤 극구 사양하는 대학생 오빠를 뿌리치고 주머니에 꼭꼭 눌러 넣어주었다. 그러면서 "학생헌테 주는 거 아닝께. 먹도 못하고 싸우는 사람들 생각혀서 주는 거여. 우리는 여기 있응께 잘 묵어. 글고 이 돈 없이도 산께. 그거 가져가서 꼭 필요할 때 써. 우리가 나서서 데모하든 못혀도 이런 것은 해야제. 너무 고마워허지 말어. 나도 광주 사람인께," 


대학생 오빠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돈을 줄 때는 얼굴까지 붉히며 사양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에 감격한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주는 대로 다 받았다. 할머니는 대학생 오빠가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밖의 형편을 살피고 돌아와 시내까지 가는 골목길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꼭 살아서 판검사 되라는 말을 거듭거듭 이른 뒤 대학생 오빠가 사라질 때까지 뒤에서 지켜봐 주었다.


그 오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이름을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광주항쟁이 끝난 뒤에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5․18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남겨주었다. 5․18이 끝난 뒤로 나는 할머니를 미워하며 무시하지 않게 되었다. 때로는 할머니의 말 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뭔가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술 먹고 잔소리를 할 때도 전처럼 지겹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저 애 할머니 노름꾼이래"라고 놀려먹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 젊어서 남편 잃고, 홀로된 노모를 모시고, 능력 없는 아들이 맡긴 손녀 둘에 나이 찬 딸까지 먹여 살려야 했던 할머니로선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걸 알게 된 까닭이다.


이것이 할머니와 내가 겪은 5․18이다. 할머니는 지금도 그 대학생 이야기를 한다.

"살았으믄 한 번 찾아올 것인디. 아마도 우리가 이사해서 못 온갑다. 살아서 판검사 되았으면 쓰것는디. 꼭 되얏을 것이다. 암. 꼭 되얏제."


나는 할머니의 그 말을 들으면 할머니가 너무 외롭고 가엾어 보였다. 할머니는 내게 "광주 사람"의 자부심을 갖게 해주셨다. 나와 할머니는 그렇게 5․18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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