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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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韓山李氏/00_直系譜 64

한산이씨 (韓山李氏) 9세 광목공(光牧公) 이숙야(李叔野)

한산이씨 #韓山李氏 9世 8代孫(목은3세,牧隱2代孫) #光牧公李叔野 묘소: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월하능마을)선조님은 #麟齋公李鍾學 선조님의 6남1녀중 장남입니다. 부인은 계성판윤과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봉유인의 딸인 강화봉씨 #江華奉氏 입니다. 광목공 선조님은 사헌부, 사간원을 거처 정3품 광주목사 #光州牧使 를 지내셨습니다. . 우암 송시열이 지은 [광주 목사공 휘 숙야묘표] 승정 횡예엄무년 (1862년)중춘에 은진 송시열 지음. "우리나라가 개국하고 나서 고려조의 대가댁 자손 중에 어질고 뛰어난 자를 뽑아 등용하니,공이 문보에 적을 두지 않고 사헌부, 사간원을 차례로 거처 광주 목사의 벼슬에 이르렀다.부인은 봉씨이니, 합장 하였다. 지금 10대손인 안사 수언이 추모하여 묘석을 세웠으나 워낙먼 조..

한산이씨(韓山李氏) 8세 인재공 이종학

https://youtu.be/BA2fmqPD3rU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23일 임신 2번째기사 -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인재공 이종학 졸기 . 種學字仲文, 韓山伯 穡之次子, 天性英豪。 恭愍甲寅年十四, 中成均試, 僞朝丙辰, 中同進士, 遂拜長興庫使, 積官至密直司知申事。 戊辰, 掌成均試, 陞僉書密直司事。 己巳, 同知貢擧。 時李穡當國, 種學連歲掌試, 人頗譏之。 恭讓君立, 李穡見劾, 種學亦貶。 庚午, 尹彛、李初之獄作, 父子俱在淸州逮中, 以水災, 俱得蒙宥。 壬申, 又貶咸昌。 至是, 興宗至雞林, 欲行脊杖, 門生金汝知方爲判官, 陰戒吏不得行法外刑, 因是僅活。 移置長沙縣, 興宗遣人, 追至茂村驛, 乘夜縊之, 年三十二。 子六人: 叔野、叔畦、叔當、叔畝、叔福、叔畤。 . 종학(種學)의 자는 중문(仲文)이니..

한산이씨(韓山李氏) 5세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 이자성

이자성 선조님은 정읍감무를 지내시던 1310년에 4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한살 아래인 울산출신 흥례이씨와 1278년에 결혼하여 슬하에 세아들 배(培), 축(蓄), 곡(穀)과 따님 한분을 두셨습니다. 맏아들인 배는 과거에 올라 벼슬이 사복서승에 이르렀습니다. 둘째 아들 축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아들인 곡은 국가시험 수재과와 황조제과에 급제하였습니다. 따님은 장씨에게 출가했는데 어머니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남편인 정읍감무 이자성 선조가 죽은 다음 40년간 과부로 절개를 지켰습니다. 자질이 영리 민첩하고 자상하면서도 엄하여, 두 아들의 과거 공부를 뒷바라지해서 모두 출세하도록 하였습니다. 자식 이곡과 손자 이색의 공으로 말미암아 정읍감무 이자성 선조는 고려에서는 도첨의찬성사 원나라에서는 비서감승으로 ..

한산이씨(韓山李氏) 7세 한산부원군 목은 이색

고려 원나라 간섭기에 부친 가정 이곡 선생과 함께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토곤 테무르의 총애를 받았던 목은 이색 선생이 명나라의 등장으로 대국 명나라와 원나라 사이에서 권력투쟁에 골몰한 고려의 사림과 무림 속에서 양다리 외교술을 펼쳐 고려를 지켜내고 이성계의 역성혁명으로 자신도 모진 고초를 치르면서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장남과 차남의 참살함 지켜보기만 했지만 고려든 조선이든 대국의 속국은 만들지 않도록 이끌었다는 것을 이 행장을 통해서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외부의 적보다 사리사욕에 젖은 내부의 시기와 질투와 모함이 가장 큰 위험임을 역사는 언제나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목은 이색 선조의 36세까지의 행장을 살펴보았습니다. 목은 이색 선조의 37세이후의 행장을 살펴보았습니다.

한산이씨(韓山李氏) 6세 한산군 가정 이곡 - 원나라 고려공녀공출을 폐지시킨 주인공

가정 이곡 할아버님의 첫 유언은 "아지자손 백대지친 (我之子孫 白代之親), 내 자손들은 백대를 넘어 일가친척으로 화목하게 화합하고 지내라"였습니다. 이유는 고려에서 한산 백제의 유민으로 차별을 당하고 고려 거자과에 급제하고 수재과에 차석을 하여도 시기와 질시 그리고 차별로 미관말직을 벗어날 수 없었고 원나라의 과거에 차석 하여 고위직을 지내도 고려에만 오면 이구실 저구실로 관직을 깎아내리고 이 트집 저 트집을 잡아 귀양까지 보내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한산이씨 후손들은 시기와 질시로 귀한 사람을 흠집 내는 그런 삶을 살지 말고 한산이씨 후손 만큼은 서로 아끼고 화목하고 화합하라고 이런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위대한 학자의 유언치고는 참 유치하다 생각할 수 있으나 고려에서 천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지금..

한산이씨(韓山李氏) 1세 호장공 이윤경 -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한 한산이씨 호장공 묘지에 관한 전설

https://youtu.be/O8ty1-aCqIo 호장공 이윤경 묘소에 관한 전설의 허구성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고려시대의 행정조직상으로 한산은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는 곳으로 그곳의 유력가문의 장으로 지방관인 호장을 대신하도록 하는 제도를 적용받는 곳이었습니다. 호장공 이윤경에 이어 2세 정조호장 이인간, 3세 봉헌대부비서랑 이효진, 4세 봉익대부판도판서 이창세, 5세 광정대부 도첨의 찬성사로 전북정읍감무를 지낸 이자성까지 5대에 걸처 호장직을 세습했습니다. 하여 전설 속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했다는 것은 근거없는 소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고려호장(高麗戶長)은 마을의 우두머리로 그 마을의 대지주의 역할을 하는 자리인데 “매우 가난하여 근근이 살아간다”는 가설 부터 잘못된 기술입니다. 이는 ..

(1世) 한산이(韓山李)씨 (戶長公)

(1世) 시조 이윤경 (李允卿), 호장공. [조선식민사관 정립을 위한 공작으로 제작 날조한 묘지에 관련된 전설] "고려시대에 한산이씨 시조 이윤경(李允卿)은 몹시 가난하여 고을의 관청에서 심부름을 하며 근근히 살았다. 이윤경(李允卿)은 어느날 관가의 현감이 앉아있는 마루에 널빤지가 매년 조금씩 썩어내려가는 것을 발견하고 습기도 없는 집에 마룻바닥이 녹아내리는 것은 분명히 명당의 지기(地氣)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 이인간에게 자기가 죽으면 그곳에 몰래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다. 유언에따라 어둠을 틈다 관가의 마룻방 밑으로 뻗쳐맺힌 혈장에다 그의 시신을 암장했다. 그 명당에 발복으로 이곡(李穀), 이색(李穡)과 같은 명인을냈다. 이곡(李穀)과 이색(李穡)이 고려말 원나라에서 치르는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했..

(2世) 한산이(韓山李)씨 1代孫 (李仁幹)

(2世) 1代孫 이인간 (李仁幹), 정조호장. 금석문 '경선사금구(景禪寺禁口)'에는 '고려국(高麗國) 용령(龍領) 대정(隊正) 이인간(李仁幹)이 동량(棟梁)이 되었다'고 나온다. 슬하에 장남 충진(忠進)과 차남 효진(孝進)을 두었다. 참고자료: 1. 국가의 눈을 피해 국경에서 일어나는 밀무역은 고려 전시대에 걸쳐 변경지대에서 성행되었다. 예를 들면, 1101년(숙종 6) 정주(定州)의 장금남(長今男)이 관가 창고에 있는 철갑옷 네 벌을 훔쳐서 동여진에 판 경우도 있고, 서북면병마사 이지명(李知命)은 용주(龍州) 창고에 있는 저포(紵布)로 거란사(契丹絲) 5백 속(束)을 교역하여 바치라는 왕명에 따라 국법을 어긴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당시 위로는 국왕에서부터 밑으로는 일반 백성까지 밀무역에 관여할 정도..

(10世) 한산이(韓山李)씨 9代孫 (목은4세, 牧隱3代孫) 망월암공(望越庵公) 이축(李蓄)

https://youtu.be/T_4eSTuSle4 (10世) 9代孫(목은4세,牧隱3代孫) 망월암공 (望越庵公) 이 축 (李 蓄, 1402년태종2년~1473성종4, 묘소: 고양시 덕양구 도내동 은지)은 광목공 이숙야의 1남2녀중 외아들로 자는 윤보(潤甫)입니다. 부인은 이천서씨로 밀직사를 지낸 서원의 손녀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공도공 해화당 서선의 따님입니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셨습니다. 1417년, 16세에 계성전직 제수되고 사선주부 거쳐 광주판관, 사헌부감찰, 호조좌랑 및 정랑, 전농시소윤, 사헌부장령, 지사간원사, 판선공감사, 봉상시사,첨지중추부사 겸 지병조사, 이조참의를 지냈습니다. 1453년(단종1) 황해도 관찰사,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으며 정세가 혼란해지자, 이 해 9월에 ..

(11世) 한산이(韓山李)씨 10代孫 (목은5세, 牧隱4代孫) 안소공(安昭公) 이훈(李塤)

https://youtu.be/cf3yvsFNzoM (11世) 10代孫(목은5세,牧隱4代孫) 안소공(安昭公) 이 훈 (李 塤, 1429세종11~1481성종12, 은지 불천위 사당)은 이축의 외아들로 초명은 서(墅), 자는 화백(和伯), 도옹(賭翁)이고 시호는 안소(安昭)입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사위로 장모는 예성부부인 해주정씨입니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셨습니다. 1439년(세종21) 11세나이로 관직에 나가 수년내에 정3품 제용감•군자감의 판사를 거쳐 판전농시사가 되고, 1460년 공조참의, 1462년 한성부윤•형조참의를 역임하였습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평대장이 되어 적의 진로을 차단하였습니다. 1468년(세조14) 경기관찰사되어 선정을 배풀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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