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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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원선생 4

[국립철도고등학교 수업광경 1967]

.언제 없어졌는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린 철도고등학교, 고등학교 등록금 월사금을 감당할수 없었던 공부 잘했던 선배 친구들이 치열한 경쟁을 치르고 간 학교였다. 명석한 내 오촌 당숙 한분도 철도고를 나와 금촌역 역장을 지냈다. 명석한 인재들이 열차표를 팔고 검사하고 기차정비하고 몰스부호나 치고 하던게 화가 날때도 있었다. 대학이라도 갈려고 하면 꽁짜로 배운 학비를 물어내라고 해서 대학가기도 두려웠던 철도고. 그런 와중에도 명문대학을 가고 유학을 가고 명문대 교수를 하고 거대한 회사를 운영하는 분들도 나왔다..오랜동안 철도고 교장을 하셨던 배봉수 선생은 원예가인 내부친 방원 선생의 절친한 친구분이셨다. 배봉수 선생의 고결한 인품처럼, 배봉수 선생은 동양란을 집안 가득 키운 분이었다. 제자들이 대학원을 가서 ..

[보안사 박땡땡 사무관(준위?)에게]

1980년 5월 17일 자정, 전북대 학생회관 3층에서 전단지 복사를 하다 금마7공수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이세종 선배의 모습을 지켜보며 그 참혹한 공포 속에 잡혀가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풀려난 이후 나의 19살 이후의 삶은 끔찍하게 뒤틀렸다. .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서울집에 가니 내 아버지 지인이라며 등장한 박땡땡. 내 아버지 방원 이성찬 선생은 부천 원예농장이 도시화로 붕괴한 후 정신줄을 놓아 인사동 한량으로 옥산 옥전 동양화가들과 교류하며 잡기에 화투를 치며 가산을 탕진 중이었다. . 장안의 동양화 가격은 방원선생이 천정부지로 올려놓았다는 농을 들을 정도로 인사동 동양화가 뒤치다꺼리에 남은 인생을 거셨다. 그러다 보니 방원선생 주변에는 유명 화가와 서예가의 그림과 서화를 공짜나 저렴한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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