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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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직 선생 3

일제의 신하들 -정미칠적과 고종의 마지막 신하 - 이명직.이철규 부자

. 위의 사진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맨 왼쪽), 내부대신 임선준, 군부대신 이병무,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정미칠적(丁未七賊: 을사조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또는 정미7조약 -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사람을 가리킴)..

곡귀단(哭鬼團) -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며 결성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이 와세다대 유학시절인 1915년 9월 7일 화성 동탄 석우리(돌머루)에 칩거하며 전국에 똘똘한 자식들을 유학보내 나라 망할것에 대비하라며 사발통문을 돌려 본인 지운 선생과 많은 조선 청년들의 유학을 독려했던 나의 고조부 이명직(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선생이 친일세력에 의해 독살 당하여 돌아가신 소식을 접하자 이에 분연하게 일어나,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는 뜻으로 1916년 곡귀단(哭鬼團)을 만들어 항일 저항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격려차 동경에 온 한국인 도지사가 친일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는 단상에 뛰어 올라가 그 도지사 멱살을 잡고 '같은 조선인으로 어찌 그런..

근대사의 인물들 - 1916년 일본와세다대학 유학인사들

앞줄 중앙 지운 김철수 선생은 나의 고조부 이명직 선생의 '망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유학을 나가라!'는 사발통문에 감화되어 한학을 접고 일본유학을 결행한다. 나의 고조부 이명직 선생이 친일파에 암살당한 1915년, 그소식을 듣고 지운 김철수 선생은 귀곡단을 조직하고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 아래의 사진은 내 부모님의 중매를 했던 인연으로 내가 지운 김철수 선생을 친할아버지 이상으로 접했던 연고로 보관하게 되었다. . 맨 뒤줄 좌에서 3번째는 조선에 식민사관을 뿌리깊게 심어버린 우봉 이병도 선생도 함께 자리를 했다. 당시 이병도는 20살의 나이로 와세다대학 사학과에 유학중이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이병도 ). 1980년도에 작성된 사진 뒷면의 사진인물들의 정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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