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의 문화적 재해석
장광선
1981년 5월, 당시 Broad Street에 있던 필라델피아한인회관에서 광주민중항쟁 제1주년 기념식 및 희생자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그 때에는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공개하는 것만도 엄청난 방해와 박해를 받던 때였기에 한인회관에서 그 기념식과 추모행사를 갖는다는 것은 동포사회의 조국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에 대한 관심도가 절대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전 세계 동포사회를 통 털어 한인회관에서 이런 행사를 갖기는 필라델피아가 유일한 도시였습니다.
그 23년 후인 오늘 광주민중항쟁 제24주년 기념행사를 다시 한인회관에서 갖게 되니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지금은 광주항쟁의 진상에 대하여 모르는 한국인이 없을 것입니다.
24년의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을 이어간다는 명분을 내세운 민주정권이 세 차례나 교체되었고 당시 희생되신 분들을 모신 묘역은 성역화 되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엄청난 학살만행이 누구에 의해 명령 지시되었고 그 명령이 어떤 계통으로 전달되었으며 어느 세력이 이를 뒷받침하였는지 등 핵심적인 몇 가지 문제는 아직까지 밝혀지질 못하고 있어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을 계승하자는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며 또한 희생하신 영령들께 부끄러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과연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이란 무엇입니까?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이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여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대통령이 그의 수족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됨으로써 18년 군사독재의 막을 내렸습니다.
국민들은 이제야말로 한국땅에 민주주의의 참된 기틀을 잡아가게 되기를 기대했지요.
그러나 국민들의 여망을 짓부수고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의 12ㆍ12구데타가 일어났고 전두환이 스스로 국가보위위원장에 취임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정가는 다시 얼어붙게 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대학생을 위시하여 민주제도의 확립과 전두환국보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게 되었지요.
5월17일 신군부는 자기들의 집권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모든 정치인들을 구속하고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하며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민주화요구대모를 주도하던 대학생들이 유혈사태를 염려한 듯 시위를 자제하자고 호소했고 이 호소에 응하여 격렬하던 시위가 누그러졌습니다.
광주라고 다른 지역과 다를 바가 없었지요.
대학생을 중심으로 전두환국보위원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그리고 즉각적인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가 진행되었을 뿐 치안을 염려할 상황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군인이 투입되어야 할 아무러한 상황도 아닌 상태에서 군 최 정예부대인 공수특전단이 은밀하게 광주로 이동했지요.
다음날인 5월18일, 투입된 무장공수특전단이 시위대를 상대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공수특전단의 무자비한 학살만행은 시위를 진압한 것이 아니라 광주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생업에 지장을 받는다면서 대학생들의 시위를 달갑지 않게 보아오던 버스 운전사들과 택시 운전사들이 일제히 버스와 택시를 몰고 공수특전단의 공격선을 향해 돌진했으며 시장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공장에서 일하던 공원들도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거리로 몰려나왔습니다.
5월19일 공수특전단은 민중들에 밀려 시외로 철수하여 광주를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광주를 고립시켰습니다.
민중들은 자위의 수단으로 텅 빈 경찰서의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들고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부르며 자국민를 학살하는 반역반민족군대에 맞서 저항했지요.
이날부터 5월27일 도청을 사수하던 마지막 시민군이 장렬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광주는 9일 동안 완전히 국가권력의 공백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광주민중항쟁은 주도세력이 버스와 택시 운전사, 시장 상인들과 공장 노동자들과 같은 최하층민중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항쟁을 이끌어내고 지도한 의식화된 조직이나 봉기 또는 항쟁에 대해 이론적인 당위성을 역설하고 설득할 지도자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세력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며 명망가 또는 대학생을 포함한 지식층 구룹이 함께했지만 항쟁을 주도하지는 않았고 그들 중의 대부분은 수습위원회에 가담하여 항쟁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보다는 군부정권의 요구를 항쟁민중이 받아들여 무기를 반납하고 군민대치상황을 해소하자고 역설했습니다.
그 항쟁을 주도한 세력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 민주주의의 혜택을 전혀 입지 못한 사람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배워보지 못한 최하층민중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시민군은 군사독재정권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다 구금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의 석방 그리고 박정희의 양아들로 자처하며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국보위원장의 퇴진과 그가 선포한 계엄령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이러한 뜻이 관철되어 대한민국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틀이 마련되기까지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군사독재정권이 퇴진하면 그분들의 일상생활이 윤택해질 거란 보장이 있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까?
그때 외친 민주주의란 시민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광주항쟁을 주도한 민중들이 시민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기나 했단 말입니까?
시민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어떤 해택이 그들에게 주어지는지 기대라도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군사정권이 타도되고 민주주의가 이룩된다면 엘리트층과 정치인들에게야 말할 나위 없이 자신들의 지위와 삶이 1백80도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이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야말로 민주주의란 목숨을 걸고 쟁취할만한 당위성이지요.
그러나 엘리트층과 정치인들은 목숨이 더 귀중했기에 계엄령이 선포되면 자중하고 집안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뀌어 봐야 자신들의 삶에는 변화가 없을 하층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씀입니다.
아귀같은 공수특전단을 몰아내고 열흘 동안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대동세상의 표본을 보인 분들은 전두환이 물러나고 민주주의 제도가 실현된다할지라도 덕 볼게 하나도 없는 최하층 민중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의식을 한 덩어리로 뭉쳐 거대한 화산처럼 폭발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까? 무엇이 그분들로 하여금 목숨을 바쳐 싸우게 한 것이었습니까? 그 정신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합니까?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우리 민족의 얼속에 응어리 져 있는 민족의 의식, 민족의 사상, 민족의 문화를 통해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건설에 대한 설화를 기록한 삼성기에 의하면 천재한님께서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나라를 여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뚜렷한 인본주의 이념을 가지고 나라를 열었다고 하는 민족은 이 지구상에 우리 민족 밖에 없습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이 무엇이냐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나는 이것을 만민평등사상이며 또한 대동세상사상이라고 해석합니다.
홍익인간 즉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만민평등사상입니다.
만민평등이란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태어나고 살아가는 조건과 환경에 따라 인간은 원천적으로 서로가 불평등한 지위와 상황으로 삶을 시작합니다.
좋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태어난 사람을 우리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라 표현합니다.
좋은 조건과 환경을 부라고 표현할 때 부라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은 그 부를 이용하여 보다 더 많은 부를 획득하고 축적하게 되며 부를 갖지 못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살기 위해 더 고생하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불평등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를 평등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홍익인간 사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지배 착취당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가진 사람들,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나누어줌으로써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홍익인간 이념으로 나라를 열었다는 말은 바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을 못 가진 사람들과 기득권을 빼앗긴 사람들을 위해 양보하고 나누어줌으로써 불평등한 조건과 환경을 개선하도록 통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홍익인간 이념으로 나라를 연 우리 민족은 개천 이래 수 천 년을 그런 사상으로 살아오면서 이것이 의식 속에 응어리져서 그런 문화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홍익인간 사상에 배치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욕심이겠지요.
자기 것을 포기하고 남에게 나누어주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포기하고 나누어주기는커녕 조금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거기다가 더 갖고자 하는 욕심이 홍익인간 사상을 뒤덮고 맙니다.
그래서 통치행위가 지배행위로 바뀌고 지배행위가 착취행위로 바뀌게 됩니다.
피지배 피착취민중들의 의식 속에 응어리 진 홍익인간, 모든 사람이 고루 덕을 입는 세상을 바라는 욕구는 억눌리다 억눌리다 어느 순간에 폭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민란인 것입니다.
민란은 정변이나 구데타 같은 것과는 아주 성격이 다릅니다.
정변이나 구데타는 설령 홍익인간을 구실로 내세운다 할지라도 기득권의 이전을 획책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확실한 조직과 지도체계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민란은 기득권을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에 억눌린 욕구가 폭발한 것이기 때문에 조직과 지도체계를 가지지 못하고 간혹 우발적으로 일어납니다.
민란은 사전 계획에 의한 봉기라기보다는 터진 후에 또는 그 와중에서 지도자를 선출하고 투쟁하면서 구체적인 목표와 전술을 수립해가기 마련입니다.
정변이나 구데타는 실패할 경우 목숨을 잃는다는 각오를 하고 시작하겠지만 사전에 충분한 계획과 전술을 수립하고 검토하여 승산이 있어야 시작하며 또 성공하면 기득권을 쟁취합니다.
민란은 기득권에 대항할 만한 힘이나 조직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이면 백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시작하며 그래서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일어서는 것입니다.
백에 하나 민란이 성공한다 해도 그것으로 자기들의 기득권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기득권세력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기를 요구하는 선에서 매듭을 짓습니다. 즉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라는 요구가 민란의 목표지요.
정변이나 구데타가 자기욕구에 의해 출발한다고 할 때 민란은 자기희생에 의해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목숨보다 귀중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대도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일어서는 민란이 우리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홍익인간 사상이 우리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응어리져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홍익인간이 대동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은 함께 어울려 사는 속에서만이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는 정치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웃의 어려움을 올바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웃에게 유익하도록 자기 것을 나누어주는 일이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겠지요.
우리 민족은 동고동락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 괴로워하며 서로 돕고 살아간다는 즉 공동체생활의 다른 표현이지요.
이 동고동락이라는 말도 역시 타 민족 특히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서구문화 세계에는 생소한 말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표현했듯이 어느 민족 어느 국가 할 것 없이 모여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속성으로서 모여서 사는 것과 우리 민족의 공동체생활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문화의 공동체생활은 내가 남의 처지가 되어 함께 어울리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남을 위해 자기가 희생됨을 감수하는 사회지요.
이웃의 처지에 대한 배려를 곧 사는 도리요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 우리 문화입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남에게 잘 나누어주는 사람을 덕있는 사람이라 하고 또 공덕을 쌓는다는 것은 가난하고 불행에 처한 이웃을 잘 도와주는 삶을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기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우리문화입니다.
서구문화의 공동체는 자기를 위주로 남의 도움과 협력에 의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자는 것이지요.
이웃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되지 않고 내가 이웃에게 어떤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이웃과의 관계가 잘 성립되지 않는 사회가 바로 서구문화권 사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처럼 닭을 잡아 죽을 쑤었을 경우에 이웃집에 한 그릇 떠다 주면서 먹어보라 합니다. 이것이 덕이지요. 이것이 이웃에 대한 배려이며 함께 사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미국에서 무슨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고 이웃집에 가져다 줘보세요.
무슨 거지 취급하느냐고 노발대발 할 겁니다.
너에게 맛있고 특별한 음식이지 내게도 그게 해당되겠느냐는 거지요.
나는 그게 아무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을 가져오면 강요가 되고 푸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미국사회에서 가장 소중하게 취급되는 것이 푸라이버시 아닙니까?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할 우리말이 없다는 점에서도 서구문화에서의 개인과 우리문화에서의 개인의 개념은 매우 다릅니다.
우리역사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문화적 공동체생활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웃과 사회가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고서는 자기 목숨을 바치고자 일어설 수 없는 것이지요.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역사에 도도히 흐르는 민란의 줄기입니다.
한국에서 1960년대부터 ‘잘살아보자’는 구호아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횟수를 거듭하며 추진되었지요.
경제개발 와중에 당시까지만 해도 인구의 80%에 이르던 농어촌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공동체생활의 붕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 주변에 공단이 들어서고 노동력 공급을 위해 농어촌의 젊은이를 대량 흡수해 갔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게 되어갔고 개인주의 사상이 건전하지 못한 방향으로 농어촌까지 확산되어 갔습니다.
이와 아울러 가치관의 엄청난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제까지 우리 문화에서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덕 즉 남을 위한 희생과 나눔이 무가치하게 되어버립니다.
인품과 가치판단의 주요한 기준이 되어오던 덕은 금전 즉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좁은 텃밭에서 가꾼 푸성귀까지 이제는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이 되어야 가치를 얻게 된 거죠.
광주의 문병란시인은 이 무렵 ‘팔려가는 진달래’라는 시로 이러한 세태의 변화를 아쉬워합니다.
무주공산의 진달래꽃까지 돈으로 환산하여 팔고 사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들이 서구사회의 봉건주의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전처럼 단계적이며 장기적으로 진행된 게 아니라 급속하고 졸속하게 진행됨으로써 의식의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급속한 졸속자본주의사상은 우리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민중들의 의식 속에 잠재한 홍익인간 이념은 위축되고 압박을 받게 된 것이지요.
잃어버린 것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이것을 찾고자하는 욕구 또한 비례적으로 강하게 마련이죠.
압축이 크면 클수록 폭발하는 힘도 비례적으로 커지고요.
홍익인간 이념으로 구축된 우리문화 사회가 천박한 자본주의문화에 억압되고 압축된 것이 민주시민학살이라는 도화선을 만나 대폭발한 것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나는 해석합니다.
국가권력 즉 오랜 기득권통치력이 완전히 공백상태가 된 광주의 열흘간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바로 만민평등과 대동세상으로 풀이되는 홍익인간 이념의 사회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밝혀진 모든 자료와 증언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어느 누구의 호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 한마음으로 움직여 한솥밥을 지어 나누면서 투쟁에 동참했습니다.
광주로의 모든 진입로가 군부대에 의해 차단되는 바람에 보급품의 유입이 철저하게 막혀버렸고 모든 통신수단까지 단절되어버린 완전고립무원지경에서 오히려 광주 시민들은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열흘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찰도 없었지만 시민들은 민주사회의 모범적인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허위조작과 중상모략으로 광주시민을 욕보이고 분열을 조장하는 등 악랄한 파괴적 보도를 일삼던 방송국 한 곳을 제외하고 시민군에 의해서 파괴되거나 손상된 공공기관은 물론 일반가택은 단 한 곳도 없었다고 합니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자가 병원마다 대오를 이루었다고 하며 밤이든 낮이든 노약자나 부녀자나 어두운 골목을 걷는데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그 어떤 파괴도 약탈도 절도 폭행치사 강간과 같은 파렴치범죄, 사기 공갈 협박과 같은 사회범죄는 단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모두들 증언하고 있습니다.
상점 주인들은 팔아야 할 물건들을 내다 나누어주고 쌀이 있는 집은 쌀을 가져와 김밥을 말아 나누어주고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신음하면서도 자기보다 더 심하게 다친 이를 위해 병상을 내어주더라고 합니다.
이러한 증언이 우리에게 깨닫기를 바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얼과 의식 속에 응어리진 홍익인간 사상의 분출이며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외래사상과 외래문화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라고 나는 해석합니다.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의 계승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그것은 우리민족문화의 얼과 의식을 찌덕찌덕 덮고 있는 개인이기주의사상을 벗겨내는 작업이며 인본주의 이념을 배제하는 모든 잡다한 이념 사상 문화의 때를 벗겨내는 작업이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식 깊숙이 잠재되어있는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야 말로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의 계승이며 구현이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민족이 문화적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다는 미국에 삶의 터전을 잡고 있습니다.
이 다문화사회에서야말로 우리 배달겨레문화가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문화의 근간은 홍익인간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다문화 모자이크사회이면서도 극도로 발달한 개인주의 사회입니다.
각기 다른 문화가 서로 자기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치닫는다면 이 사회는 치열하고 살벌한 경쟁과 다툼의 암울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병패를 치유하고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고루 덕을 베풀어 모든 사람이 유익하게 하는 홍익인간 사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훌륭한 이념과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민족입니다.
불행하게도 지난 수 십 년을 외세의 압제와 사대매판 정권의 왜곡된 의식교육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의식은 사대주의적이며 이기적 개인주의문화의 두터운 때로 덥이고 말았습니다.
사대주의는 힘이 세고 등치가 큰 남의 것을 열심히 흉내 내면서 정말 보존해야 할 자신의 숭고한 정신을 비하하여 열등의식에 잠기게 하며 그러다보니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합니다.
사대주의로부터 형성된 열등의식은 반대급부로 자기보다 약한 자를 깔보고 업신여기며 횡포를 부림으로써 열등감을 만회하려 합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는 형제와 자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체 자기성취와 만족에만 매달리게 합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는 치열하고 살벌한 경쟁을 초래하면서 아울러 시기와 질투를 동시에 수반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번영하기 위해서는 이 땅의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이웃들이 꼭 필요로 하여 붙잡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서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보다 적게 가진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이웃을 위해 포기하는 그리하여 나와 이웃의 삶이 공평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만민평등의 사상,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아파하고 이웃의 즐거움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대동세상의 사상을 늘 일깨우며 산다면 우리는 문화적 모자이크사회의 조화를 이루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 인정될 것이며 이 땅에서 우리의 후손이 존중받고 번영할 것입니다.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치, 탐욕과 억압 착취로 찌든 독재를 물리치는 피나는 싸움에 동참하는 어렵고 험한 길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의식에 두텁게 덥힌 탐욕과 이기적 개인주의 문화를 씻어내고 수 천 년 이어받은 숭고한 민족문화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며 살려는 노력 또한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을 이어받는 것임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필라델피아 5ㆍ18광주민중항쟁 제24주년 맞이 동포강연회, 2004년 5월15일>
장광선
1981년 5월, 당시 Broad Street에 있던 필라델피아한인회관에서 광주민중항쟁 제1주년 기념식 및 희생자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그 때에는 광주민중항쟁의 진상을 공개하는 것만도 엄청난 방해와 박해를 받던 때였기에 한인회관에서 그 기념식과 추모행사를 갖는다는 것은 동포사회의 조국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에 대한 관심도가 절대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전 세계 동포사회를 통 털어 한인회관에서 이런 행사를 갖기는 필라델피아가 유일한 도시였습니다.
그 23년 후인 오늘 광주민중항쟁 제24주년 기념행사를 다시 한인회관에서 갖게 되니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지금은 광주항쟁의 진상에 대하여 모르는 한국인이 없을 것입니다.
24년의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을 이어간다는 명분을 내세운 민주정권이 세 차례나 교체되었고 당시 희생되신 분들을 모신 묘역은 성역화 되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엄청난 학살만행이 누구에 의해 명령 지시되었고 그 명령이 어떤 계통으로 전달되었으며 어느 세력이 이를 뒷받침하였는지 등 핵심적인 몇 가지 문제는 아직까지 밝혀지질 못하고 있어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을 계승하자는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며 또한 희생하신 영령들께 부끄러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과연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이란 무엇입니까?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이 사건이 어떻게 발생하여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대통령이 그의 수족 김재규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됨으로써 18년 군사독재의 막을 내렸습니다.
국민들은 이제야말로 한국땅에 민주주의의 참된 기틀을 잡아가게 되기를 기대했지요.
그러나 국민들의 여망을 짓부수고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의 12ㆍ12구데타가 일어났고 전두환이 스스로 국가보위위원장에 취임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정가는 다시 얼어붙게 되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대학생을 위시하여 민주제도의 확립과 전두환국보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게 되었지요.
5월17일 신군부는 자기들의 집권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모든 정치인들을 구속하고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하며 위협했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민주화요구대모를 주도하던 대학생들이 유혈사태를 염려한 듯 시위를 자제하자고 호소했고 이 호소에 응하여 격렬하던 시위가 누그러졌습니다.
광주라고 다른 지역과 다를 바가 없었지요.
대학생을 중심으로 전두환국보위원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그리고 즉각적인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가 진행되었을 뿐 치안을 염려할 상황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군인이 투입되어야 할 아무러한 상황도 아닌 상태에서 군 최 정예부대인 공수특전단이 은밀하게 광주로 이동했지요.
다음날인 5월18일, 투입된 무장공수특전단이 시위대를 상대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 것입니다.
공수특전단의 무자비한 학살만행은 시위를 진압한 것이 아니라 광주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생업에 지장을 받는다면서 대학생들의 시위를 달갑지 않게 보아오던 버스 운전사들과 택시 운전사들이 일제히 버스와 택시를 몰고 공수특전단의 공격선을 향해 돌진했으며 시장 상인들이 가게 문을 닫고, 공장에서 일하던 공원들도 일제히 일손을 멈추고 거리로 몰려나왔습니다.
5월19일 공수특전단은 민중들에 밀려 시외로 철수하여 광주를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함으로써 광주를 고립시켰습니다.
민중들은 자위의 수단으로 텅 빈 경찰서의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들고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부르며 자국민를 학살하는 반역반민족군대에 맞서 저항했지요.
이날부터 5월27일 도청을 사수하던 마지막 시민군이 장렬한 최후를 마칠 때까지 광주는 9일 동안 완전히 국가권력의 공백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광주민중항쟁은 주도세력이 버스와 택시 운전사, 시장 상인들과 공장 노동자들과 같은 최하층민중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항쟁을 이끌어내고 지도한 의식화된 조직이나 봉기 또는 항쟁에 대해 이론적인 당위성을 역설하고 설득할 지도자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치세력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며 명망가 또는 대학생을 포함한 지식층 구룹이 함께했지만 항쟁을 주도하지는 않았고 그들 중의 대부분은 수습위원회에 가담하여 항쟁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보다는 군부정권의 요구를 항쟁민중이 받아들여 무기를 반납하고 군민대치상황을 해소하자고 역설했습니다.
그 항쟁을 주도한 세력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 민주주의의 혜택을 전혀 입지 못한 사람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배워보지 못한 최하층민중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시민군은 군사독재정권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다 구금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의 석방 그리고 박정희의 양아들로 자처하며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국보위원장의 퇴진과 그가 선포한 계엄령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이러한 뜻이 관철되어 대한민국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틀이 마련되기까지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과연 군사독재정권이 퇴진하면 그분들의 일상생활이 윤택해질 거란 보장이 있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까?
그때 외친 민주주의란 시민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
광주항쟁을 주도한 민중들이 시민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기나 했단 말입니까?
시민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어떤 해택이 그들에게 주어지는지 기대라도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군사정권이 타도되고 민주주의가 이룩된다면 엘리트층과 정치인들에게야 말할 나위 없이 자신들의 지위와 삶이 1백80도로 전환되는 계기를 맞이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야말로 민주주의란 목숨을 걸고 쟁취할만한 당위성이지요.
그러나 엘리트층과 정치인들은 목숨이 더 귀중했기에 계엄령이 선포되면 자중하고 집안으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뀌어 봐야 자신들의 삶에는 변화가 없을 하층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씀입니다.
아귀같은 공수특전단을 몰아내고 열흘 동안 가장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대동세상의 표본을 보인 분들은 전두환이 물러나고 민주주의 제도가 실현된다할지라도 덕 볼게 하나도 없는 최하층 민중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의식을 한 덩어리로 뭉쳐 거대한 화산처럼 폭발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까? 무엇이 그분들로 하여금 목숨을 바쳐 싸우게 한 것이었습니까? 그 정신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합니까?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우리 민족의 얼속에 응어리 져 있는 민족의 의식, 민족의 사상, 민족의 문화를 통해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건설에 대한 설화를 기록한 삼성기에 의하면 천재한님께서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나라를 여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뚜렷한 인본주의 이념을 가지고 나라를 열었다고 하는 민족은 이 지구상에 우리 민족 밖에 없습니다.
홍익인간의 이념이 무엇이냐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나는 이것을 만민평등사상이며 또한 대동세상사상이라고 해석합니다.
홍익인간 즉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만민평등사상입니다.
만민평등이란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태어나고 살아가는 조건과 환경에 따라 인간은 원천적으로 서로가 불평등한 지위와 상황으로 삶을 시작합니다.
좋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 태어난 사람을 우리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이라 표현합니다.
좋은 조건과 환경을 부라고 표현할 때 부라는 기득권을 가진 사람은 그 부를 이용하여 보다 더 많은 부를 획득하고 축적하게 되며 부를 갖지 못한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살기 위해 더 고생하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불평등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를 평등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홍익인간 사상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지배 착취당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가진 사람들,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나누어줌으로써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홍익인간 이념으로 나라를 열었다는 말은 바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을 못 가진 사람들과 기득권을 빼앗긴 사람들을 위해 양보하고 나누어줌으로써 불평등한 조건과 환경을 개선하도록 통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홍익인간 이념으로 나라를 연 우리 민족은 개천 이래 수 천 년을 그런 사상으로 살아오면서 이것이 의식 속에 응어리져서 그런 문화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홍익인간 사상에 배치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욕심이겠지요.
자기 것을 포기하고 남에게 나누어주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포기하고 나누어주기는커녕 조금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거기다가 더 갖고자 하는 욕심이 홍익인간 사상을 뒤덮고 맙니다.
그래서 통치행위가 지배행위로 바뀌고 지배행위가 착취행위로 바뀌게 됩니다.
피지배 피착취민중들의 의식 속에 응어리 진 홍익인간, 모든 사람이 고루 덕을 입는 세상을 바라는 욕구는 억눌리다 억눌리다 어느 순간에 폭발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민란인 것입니다.
민란은 정변이나 구데타 같은 것과는 아주 성격이 다릅니다.
정변이나 구데타는 설령 홍익인간을 구실로 내세운다 할지라도 기득권의 이전을 획책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확실한 조직과 지도체계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민란은 기득권을 획득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에 억눌린 욕구가 폭발한 것이기 때문에 조직과 지도체계를 가지지 못하고 간혹 우발적으로 일어납니다.
민란은 사전 계획에 의한 봉기라기보다는 터진 후에 또는 그 와중에서 지도자를 선출하고 투쟁하면서 구체적인 목표와 전술을 수립해가기 마련입니다.
정변이나 구데타는 실패할 경우 목숨을 잃는다는 각오를 하고 시작하겠지만 사전에 충분한 계획과 전술을 수립하고 검토하여 승산이 있어야 시작하며 또 성공하면 기득권을 쟁취합니다.
민란은 기득권에 대항할 만한 힘이나 조직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이면 백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시작하며 그래서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일어서는 것입니다.
백에 하나 민란이 성공한다 해도 그것으로 자기들의 기득권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하는 기득권세력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기를 요구하는 선에서 매듭을 짓습니다. 즉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라는 요구가 민란의 목표지요.
정변이나 구데타가 자기욕구에 의해 출발한다고 할 때 민란은 자기희생에 의해 출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 목숨보다 귀중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대도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일어서는 민란이 우리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홍익인간 사상이 우리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민족의 의식 속에 응어리져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홍익인간이 대동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은 함께 어울려 사는 속에서만이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는 정치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이웃의 어려움을 올바로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이웃에게 유익하도록 자기 것을 나누어주는 일이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겠지요.
우리 민족은 동고동락이란 말을 자주 씁니다.
즐거운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 괴로워하며 서로 돕고 살아간다는 즉 공동체생활의 다른 표현이지요.
이 동고동락이라는 말도 역시 타 민족 특히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서구문화 세계에는 생소한 말이 아닌가 합니다.
사람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표현했듯이 어느 민족 어느 국가 할 것 없이 모여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렇지만 사회적인 속성으로서 모여서 사는 것과 우리 민족의 공동체생활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문화의 공동체생활은 내가 남의 처지가 되어 함께 어울리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남을 위해 자기가 희생됨을 감수하는 사회지요.
이웃의 처지에 대한 배려를 곧 사는 도리요 인품을 가늠하는 척도로 여기고 있는 것이 우리 문화입니다.
자기의 가진 것을 남에게 잘 나누어주는 사람을 덕있는 사람이라 하고 또 공덕을 쌓는다는 것은 가난하고 불행에 처한 이웃을 잘 도와주는 삶을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기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삶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우리문화입니다.
서구문화의 공동체는 자기를 위주로 남의 도움과 협력에 의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자는 것이지요.
이웃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되지 않고 내가 이웃에게 어떤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이웃과의 관계가 잘 성립되지 않는 사회가 바로 서구문화권 사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처럼 닭을 잡아 죽을 쑤었을 경우에 이웃집에 한 그릇 떠다 주면서 먹어보라 합니다. 이것이 덕이지요. 이것이 이웃에 대한 배려이며 함께 사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미국에서 무슨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다고 이웃집에 가져다 줘보세요.
무슨 거지 취급하느냐고 노발대발 할 겁니다.
너에게 맛있고 특별한 음식이지 내게도 그게 해당되겠느냐는 거지요.
나는 그게 아무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을 가져오면 강요가 되고 푸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지요.
미국사회에서 가장 소중하게 취급되는 것이 푸라이버시 아닙니까?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할 우리말이 없다는 점에서도 서구문화에서의 개인과 우리문화에서의 개인의 개념은 매우 다릅니다.
우리역사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문화적 공동체생활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웃과 사회가 당하는 고통을 외면하고서는 자기 목숨을 바치고자 일어설 수 없는 것이지요.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역사에 도도히 흐르는 민란의 줄기입니다.
한국에서 1960년대부터 ‘잘살아보자’는 구호아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횟수를 거듭하며 추진되었지요.
경제개발 와중에 당시까지만 해도 인구의 80%에 이르던 농어촌은 엄청난 변화를 경험합니다.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공동체생활의 붕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 주변에 공단이 들어서고 노동력 공급을 위해 농어촌의 젊은이를 대량 흡수해 갔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게 되어갔고 개인주의 사상이 건전하지 못한 방향으로 농어촌까지 확산되어 갔습니다.
이와 아울러 가치관의 엄청난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제까지 우리 문화에서 소중하게 간직해오던 덕 즉 남을 위한 희생과 나눔이 무가치하게 되어버립니다.
인품과 가치판단의 주요한 기준이 되어오던 덕은 금전 즉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좁은 텃밭에서 가꾼 푸성귀까지 이제는 시장에 내다 팔아 돈이 되어야 가치를 얻게 된 거죠.
광주의 문병란시인은 이 무렵 ‘팔려가는 진달래’라는 시로 이러한 세태의 변화를 아쉬워합니다.
무주공산의 진달래꽃까지 돈으로 환산하여 팔고 사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들이 서구사회의 봉건주의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전처럼 단계적이며 장기적으로 진행된 게 아니라 급속하고 졸속하게 진행됨으로써 의식의 엄청난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급속한 졸속자본주의사상은 우리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민중들의 의식 속에 잠재한 홍익인간 이념은 위축되고 압박을 받게 된 것이지요.
잃어버린 것이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이것을 찾고자하는 욕구 또한 비례적으로 강하게 마련이죠.
압축이 크면 클수록 폭발하는 힘도 비례적으로 커지고요.
홍익인간 이념으로 구축된 우리문화 사회가 천박한 자본주의문화에 억압되고 압축된 것이 민주시민학살이라는 도화선을 만나 대폭발한 것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나는 해석합니다.
국가권력 즉 오랜 기득권통치력이 완전히 공백상태가 된 광주의 열흘간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바로 만민평등과 대동세상으로 풀이되는 홍익인간 이념의 사회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밝혀진 모든 자료와 증언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어느 누구의 호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 한마음으로 움직여 한솥밥을 지어 나누면서 투쟁에 동참했습니다.
광주로의 모든 진입로가 군부대에 의해 차단되는 바람에 보급품의 유입이 철저하게 막혀버렸고 모든 통신수단까지 단절되어버린 완전고립무원지경에서 오히려 광주 시민들은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열흘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경찰도 없었지만 시민들은 민주사회의 모범적인 질서를 유지했습니다.
허위조작과 중상모략으로 광주시민을 욕보이고 분열을 조장하는 등 악랄한 파괴적 보도를 일삼던 방송국 한 곳을 제외하고 시민군에 의해서 파괴되거나 손상된 공공기관은 물론 일반가택은 단 한 곳도 없었다고 합니다.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자가 병원마다 대오를 이루었다고 하며 밤이든 낮이든 노약자나 부녀자나 어두운 골목을 걷는데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다고 합니다.
그 어떤 파괴도 약탈도 절도 폭행치사 강간과 같은 파렴치범죄, 사기 공갈 협박과 같은 사회범죄는 단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모두들 증언하고 있습니다.
상점 주인들은 팔아야 할 물건들을 내다 나누어주고 쌀이 있는 집은 쌀을 가져와 김밥을 말아 나누어주고 총에 맞고 칼에 찔려 신음하면서도 자기보다 더 심하게 다친 이를 위해 병상을 내어주더라고 합니다.
이러한 증언이 우리에게 깨닫기를 바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얼과 의식 속에 응어리진 홍익인간 사상의 분출이며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외래사상과 외래문화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라고 나는 해석합니다.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의 계승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나는 그것은 우리민족문화의 얼과 의식을 찌덕찌덕 덮고 있는 개인이기주의사상을 벗겨내는 작업이며 인본주의 이념을 배제하는 모든 잡다한 이념 사상 문화의 때를 벗겨내는 작업이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식 깊숙이 잠재되어있는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야 말로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의 계승이며 구현이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민족이 문화적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다는 미국에 삶의 터전을 잡고 있습니다.
이 다문화사회에서야말로 우리 배달겨레문화가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문화의 근간은 홍익인간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다문화 모자이크사회이면서도 극도로 발달한 개인주의 사회입니다.
각기 다른 문화가 서로 자기의 우월성을 내세우고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치닫는다면 이 사회는 치열하고 살벌한 경쟁과 다툼의 암울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병패를 치유하고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고루 덕을 베풀어 모든 사람이 유익하게 하는 홍익인간 사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훌륭한 이념과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민족입니다.
불행하게도 지난 수 십 년을 외세의 압제와 사대매판 정권의 왜곡된 의식교육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의식은 사대주의적이며 이기적 개인주의문화의 두터운 때로 덥이고 말았습니다.
사대주의는 힘이 세고 등치가 큰 남의 것을 열심히 흉내 내면서 정말 보존해야 할 자신의 숭고한 정신을 비하하여 열등의식에 잠기게 하며 그러다보니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합니다.
사대주의로부터 형성된 열등의식은 반대급부로 자기보다 약한 자를 깔보고 업신여기며 횡포를 부림으로써 열등감을 만회하려 합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는 형제와 자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체 자기성취와 만족에만 매달리게 합니다.
이기적인 개인주의는 치열하고 살벌한 경쟁을 초래하면서 아울러 시기와 질투를 동시에 수반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번영하기 위해서는 이 땅의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이웃들이 꼭 필요로 하여 붙잡는 존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서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보다 적게 가진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 이웃을 위해 포기하는 그리하여 나와 이웃의 삶이 공평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만민평등의 사상,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아파하고 이웃의 즐거움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대동세상의 사상을 늘 일깨우며 산다면 우리는 문화적 모자이크사회의 조화를 이루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 인정될 것이며 이 땅에서 우리의 후손이 존중받고 번영할 것입니다.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정치, 탐욕과 억압 착취로 찌든 독재를 물리치는 피나는 싸움에 동참하는 어렵고 험한 길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의식에 두텁게 덥힌 탐욕과 이기적 개인주의 문화를 씻어내고 수 천 년 이어받은 숭고한 민족문화 홍익인간 이념을 구현하며 살려는 노력 또한 5ㆍ18광주민중항쟁정신을 이어받는 것임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필라델피아 5ㆍ18광주민중항쟁 제24주년 맞이 동포강연회, 2004년 5월15일>
출처 : 5.18 민주화운동 80518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
'1. Dr. Sam Lee > 15_80년5월18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회, 국가범죄 공소시효 특례법안 처리해야 (0) | 2006.11.27 |
---|---|
[스크랩] 역사주체로서의 민중 (0) | 2006.11.22 |
[스크랩] 아시아 문화 포럼을 돌아보며 (0) | 2006.11.17 |
전두환씨 비자금 은닉 무기명채권은 (0) | 2006.11.14 |
5.18 관련단체, 불법시위 사과성명 (0) | 2006.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