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스크랩] 역사주체로서의 민중

忍齋 黃薔 李相遠 2006. 11. 2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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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주체로서의 민중


장광선

<이 글은 2006년 5월19일 필라델피아 한인회관에서 열린 광주민중항쟁 스물여섯 돌맞이 필라동포강연회에서의 이야기를 정리한 것임>




인터넷을 통해서 광주5․18묘역을 돌아봤습니다.

참 아름답게 잘 꾸며졌더군요.

4년 전에 국립묘지로 지정되어서 국가보훈처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금년에는 지방선거가 이달 말에 있어서 지역 정치인들은 물론 중앙 정당지도자들이 모두 몰려들어 광주가 정치의 최대관심지역이 되었으며 아주 5․18민중항쟁을 기리는 성대한 행사를 치렀다는 소식입니다.

거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렀다는 행사소식과 아주 잘 꾸며진 5․18묘역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과연 이렇게 묘역을 잘 꾸민 것처럼, 그리고 성대하게 치러진 각종 행사처럼 민중항쟁에서 희생되신 분들의 정신도 잘 이어받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민중에 대한 이해




정부에서 지정한 공식명칭도 '민중항쟁'이니까 우선 민중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부터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1980년대부터 우리는 민중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왔습니다.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민중을 거들먹이며 자신들이 민중을 대변하는 자라고 우깁니다.

사회학자들은 여러 방면에서 민중을 논하고 정의해주었습니다.

정치가건 사회운동가건 할 것 없이 이제는 모두 민중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민중에 대해 어떤 이해를 하고 있으며 그 이해가 얼마나 타당하고 옳은가를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민중은 인간무리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민중은 상대적인 용어로서 우리 사회 구성원을 대별하여 지배하는 쪽과 지배를 당하는 쪽, 어떤 권력이나 이익을 얻은 쪽과 못 얻은 쪽, 제도화된 교육을 받아 많은 지식을 가진 유식한 쪽과 무식한 쪽으로 구별한다고 할 때, 지배를 당하는 쪽, 권력이나 이익을 얻지 못하는 쪽, 무식한 쪽을 민중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민중의 대칭은 문과 무를 아우르는 양반이었습니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양반이라는 용언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용언을 적용하자면 지식층, 권력층이며 경제적으로 상위층을 망라한 기득권층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일반적으로 가르쳐진 민중에 대한 이해는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우선 민중은 한을 안고 있는 힘없는 무리라는 설명이며

또 하나는 민중은 잡초처럼 밟히고 쓰러져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지난 시대에 민중의 대칭인 양반의 상징으로 사군자를 들었습니다.

소나무, 대나무, 매화 난초를 말하는데 이들의 상징은 강한 기상과 절개입니다.

그리고 민초라고 해서 민중을 길가에 짓밟히는 잡초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 비유를 현대의 정치지도자는 물론 민중을 논하는 모든 사회학자들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두들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민중에 대한 이 두 가지의 설명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런 설명은 민중의 실상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논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민중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왜곡하고 기만하는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민중은 안으로 한을 쌓아 삭이는 힘없는 존재가 아닙니다.

민중은 밟히면서 바람 불면 쓰러지는 잡초도 아닙니다.

한을 안고 있는 이들, 힘없이 밟히고 바람에 쓰러지는 잡초는 결코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역사는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갑니다.




내가 이해하는 민중은 바로 역사의 주체로서 무한히 강인하여 절대로 밟히지 않으며 폭풍우에 쓰러지지 않는 실체가 바로 민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민중은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가고 끊임없이 인류의 진보와 발전을 추동해가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속으로 한을 쌓는 무리들, 폭풍우가 몰아치면 먼저 들어 눕는 무리는 민중이 아니라 바로 민중과 대별되는 지배층이며 기득권자들입니다.

역사를 보면 민중의 실체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침을 당했을 때 나라를 지킨 실체가 누구냐를 보기 위해서 비교적 자상한 기록이 남아있는 근세역사 임진왜란을 본보기로 살펴보십시오.

민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면서 모든 영화를 누린 임금과 당상관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신예 무기인 조총에 죽창으로 맞서며 싸운 것은 오히려 힘없고 무식하다고 조롱당하며 착취당하던 민중이었지 않습니까?

이순신이 어떻게 성웅이 될 수 있었습니까?

바로 민중을 의지하고 민중의 지혜와 대동정신을 따라 민중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장군이 민중에 의지했음을 강강수월래가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행주성의 권률장군은 어떻습니까?

그분은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바 없는 문관이었어도 훌륭하게 성을 지키고 밀려오는 왜군을 물리쳐 첫 승리를 거둠으로써 온 백성에게 열악한 무기와 병력으로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분도 바로 힘없다고 깔보던 민중의 지혜와 대동정신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권률이 민중에 의지했음은 행주치마로 전해줍니다.

그런데 지위도 높고 가진 것도 훨씬 많았지만 민중을 외면하고 무시한 신립장군이나 원균장군은 제대로 싸워본 기록도 없이 패퇴한 기록만 남겨주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민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인한 기상과 굳은 절개를 지닌 것이 민중입니까, 양반입니까?

양반이 사군자가 아니라 바로 민중이 사군자이며 양반은 폭풍이 몰아올 때 스스로 누워버리는, 외세의 말발굽에 힘없이 짓밟히는 잡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던가요?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진보운동의 예로는 갑오농민혁명운동을 들수 있습니다.

갑오농민혁명운동이 한국현대사에 큰 핵을 그은 사건임을 규정하기에 주저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낡은 봉건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와 체제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은 그 시대에 기득권을 가진 무리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세계사도 그렇고 우리역사도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전개된 민중의 투쟁이 바로 역사를 진보시켜 온 것입니다.

물론 민중의 투쟁이 성공하여 정권을 잡은 역사는 없습니다.

어떤 사건이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건으로 인하여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느냐 아니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유사 이래 인류역사를 꾸준히 바꾸어온 거대한 힘은 바로 기득권층이 아닌 민중입니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은 외세로부터 민족자주와 존엄성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이룩해가는 역사적 진보 면에서 한국현대사에 새로운 장을 연 대사건입니다.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민중에 대한 자각과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당시에 민주화를 외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폭발한 것은 광주에서 처참한 학살진압행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학살만행이 서울에서 벌어졌으면 서울민중항쟁이 됐을 것이고, 부산에서 일어났으면 부산민중항쟁이 됐을 것입니다.

즉 민중은 밟을 때 짓밟히고 바람 불 때 넘어지는 힘없는 존재가 아니라 폭압에 저항하여 결연히 일어서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광주민중항쟁기간 동안에 무정부상태에서 경찰력같은 아무런 권력통치기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치안이 유지됐으며 어떠한 파렴치범죄행위나 재산탈취행위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민중이 한을 안고 시름에 겨워있는 무리가 아니라 희망을 안고 있으며 어떤 계기가 마련되면 그 희망을 분출시키는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아름다운 홍익인간, 대동세상의 씨앗을 간직하고 키우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이런 위대한 힘과 꿈을 간직한 민중을 어째서 정치지도자라는 사람들과 학자라는 양반들은 잡초에 비유하고 한을 안고 있다고 비하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민중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왜곡하고 있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보이는 민중의 모습




나는 광주민중항쟁에서 보던 민중의 모습을 오늘도 여전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 가지 경우를 통해 그 모습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지난 대통령선거와 탄핵정국을 통해 보여주던 모습입니다.

대통령선거시에 투표함 뚜껑을 열기까지 아무도 노무현후보가 당선되리라는 기대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언론, 학계, 재계를 통 털어서 기득권층의 절대적 지지 속에 속된 말로 차떼기당으로 표현되는 만큼 엄청난 물량공세와 색깔공세 등 부조리를 어떻게 깨부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지난 대선은 민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민중의 힘에 떠밀려 대통령이 된 노무현대통령은 민중을 잡초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민중의 힘에 의지하기를 기피한 것이지요.

그 이전 김대중대통령에게서도 저는 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김대중대통령도 민주주의의 정착을 갈망하는 민중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지만, ‘민중의 한’이란 말씀을 자주 하셨고 민중을 길가의 잡초에 비유하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인 만큼 그분은 민중에 의지하지도 민중과 함께하는 모습도 보여주지 못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의 원칙을 말할 때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개티스버그에서 한 연설을 인용합니다.

민중(인민)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치이지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은 민중에 의한 대통령이지만 민중의, 민중을 위한 정책을 밀고나가지는 못하였습니다.

반대로 민중과 대치되는 기득권층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한 나머지 ‘대화합’의 명분으로 치장한 타협과 양보에 의한 반민중적 정책으로 일관한 나머지 민중으로부터 배반당하는 형국을 맞이한 것입니다.




다음에 내가 민중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이른바 줄기세포파문입니다.

지식권력과 언론권력 그리고 종국에는 사법권까지 총 동원된 힘으로 한 과학자를 매장시킬 때 이를 보는 민중은 분연히 맞서 일어선 것입니다.

누가 이 민중을 ‘국익에 함몰된 파시즘적 광란’이라 합니까?

지식권력과 언론권력 아닙니까?

민중의 분노는 그들의 조롱처럼 국익에 눈이 멀어 광기를 부린 것이 아니라 납득되지 않는 거짓된 논리에 의해 인류복지향상을 지향하는 과학적 진보를 가로막는 것을 묵과할 수 없는 강인한 민중 고유의 기상과 절개의 표현입니다.

파시즘을 거론한 것은 그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입니다.

파시즘은 권력으로 행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특허권과 맞물리면서 실질적으로 국익과 연계된 사안에서 기득권세력은 자기들의 권력과 이익을 보장 확대하기 위해 민족적 국가적 이득이 될 특허권마저 멀건 눈으로 남에게 넘겨주는 행각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우석박사를 옹호하며 투쟁하고 나선 민중은 이러한 권력의 기만과 횡포, 그리고 외세가 개입하는 특허권사취에의 항거하는 것이지 기득권 지식인의 비아냥처럼 파시즘적 광기를 표출한 것이 아닙니다.

민중의 항거가 파시즘적 광기가 아니라 민중의 의지를 한사코 무시하고 꺾으려는 언론권력과 지식권력 그리고 사법권력이 파시즘적 광기로 민중을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건과정에서 민중이 더 이상 무식대중도 아니며 한을 안고 사는 힘없이 밟히는 잡초가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됐습니다.

아무리 기득권세력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을 보존 신장하기 위해 왜곡과 기만으로 진실과 실체를 덮고 파괴하려 해도 민중은 진실을 파헤쳐 백일하에 들어내 놓을 것입니다.

십 년 전만 같았어도 힘없이 주저앉았을 법한 그래서 일생을 허무 속에 보내고 난 다음에야 드러났을 법한 황우석박사의 진실은 민중에 의해 밝혀지고 국가이익은 수호될 것임을 믿습니다.




광주에서 치룬 5․18민중항쟁 26돌 행사 주제는 ‘5월에서 통일로’라 합니다.

이 주제가 말해주듯 나는 현재 강렬하게 끓어오르는 민중의 실체가 민족의 자주와 평화적인 통일열망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지금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아주 헷갈리는 용언으로 민중을 우롱하는 한반도 전초기지화전략의 일환으로 평택미군기지확장이전에 따른 민중항쟁사건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정부는 온갖 명분을 다 붙여 평택의 농지를 미군기지 설립을 위해 바치는 조치를 집행했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그것은 내세우는 명분과는 달리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주권과 존엄을 양보한 처사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각 중에서도 주한미군이 주둔하기 위해서는 그 넓은 땅이 필요하지 않다, 절반면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견을 내놓을 지경입니다.

정부는 자기 땅을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맨손의 농민에게 군대를 투입, 총부리를 겨누고 철조망을 둘러 격리시켜 폭압에 의한 토지강제수용을 집행했고 기득권세력은 토지수용을 반대하여 투쟁에 나선 민중을 빨갱이라 몰아붙이며 주한미군을 위한 정부시책을 적극 옹호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외세의 압력에 명분없는 이라크전 참전이랄지 자기 땅을 빼앗아 바치는 기득권 세력이 송죽매란에 비유됩니까, 이에 항거하여 민족의 존엄과 사회정의 그리고 세계평화를 옹호하는 민중을 송죽매란에 비유해야 합니까?

과거에 양반으로 불린, 현재는 기득권층으로 불리는 민중에 대칭되는 무리가 바로 잡초요 한에 찌든 무력한 군상입니다.

민중은 바로 폭풍우에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서서 장엄하게 웅웅 소리치는 소나무와 대나무의 기상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고운 꽃을 피워 가꾸는 매화와 란초의 절개에 비유하여 마땅합니다.




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우리는 민중의 삶을 짓누르는 외세의 실체를 깨닫게 됐으며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귀하게 여기에 됐으며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조국통일이 지상과제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항쟁 당시에 아무도 어느 구석에서도 그런 문제가 제기된 흔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항쟁이 남긴 여운과 교훈이 그러함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 우리 민중의 열망과 의지가 바로 민족자주와 존엄의 수호 그리고 평화적인 국토통일을 이루기 위한 투쟁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금년의 광주민중항쟁기념행사의 주제를 ‘5월에서 통일로’로 설정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민중이 거대한 힘으로 역사를 밀고 가는 실체라고 이해한다면 지금 외치는 민족자주와 존엄 그리고 평화적인 국토통일은 기필코 이룩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도 스스로가 민중임을 자각하고 이 민족적 과업에 자신을 합류시켜 하겠습니다.




민중은 바로 투쟁의 현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민중의 실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민중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면 역사를 바꾸고 진보시켜나가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하는 아주 간단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민중을 한을 안고 사는 무리이며 길가에 밟히는 잡초라고 표현하는 정치지도자와 학자들은 민중을 항상 피상적으로 관찰하고 논합니다.

1980년대 초에 나는 어느 투철한 민중학자와 대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의 유려한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민중론을 경청하고 난 후 이런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럼 선생님이 민중으로서 우리 역사를 바꾸고 이끌어가시는 분이라고 해도 좋습니까?”

그러자 그분은 아주 겸손하게 이런 대답을 주셨습니다.

“아니오. 나는 민중이 아니며 결코 민중이 될 수도 없습니다.”

나는 그 대답이 바로 민중학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의 결정적인 오류를 고백해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민중이 아니며 민중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민중을 논하고 민중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중에 의해서 떠밀리듯 권력을 잡게 되었지만 민중의 이익과 요구를 외면하게 될 수밖에 없고,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민중의 힘을 믿지 못하여 민중의 의사와 의지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중에 대한 바른 이해는 자신을 민중과 일체화할 때 가능하게 되며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민중의 위대한 힘에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되고 스스로가 역사의 주인으로 책임을 찾아 이를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당면한 사회적 문제에 여러분이 직접 부닥쳐 자신을 참여시킬 때 여러분은 소속이나 출신성분, 사회적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민중입니다.

여러분에게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외면하고 자기와 상관없는 문제로 관전할 때 여러분은 비록 민중이 이렇니저렇니 논할 수 있을지언정 민중이 아니며 역사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를 민중으로 자각할 때 민중의 위대한 힘을 깨닫고 느끼게 되며 역사를 이끌어가는 소명 또한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5.18 민주화운동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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