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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7일 (목) 19:41 한겨레
27년째 ‘80년5월’…주인잃은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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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알아보겄드라고. 그 시계여 ….”
김춘수(75) 할머니는 5·18추모관에 갔다가 1층에서 발길을 멈췄다. 희생자의 유품이라고 전시한 시계 3개 가운데 하나가 분명 막내아들의 것이었다.
아들 박성용(당시 17·조대부고3)은 당시 시위에 참여하고 집에 늦게 들어오곤 했다. 김씨는 “지발 나가지 말고 집에 좀 있어라. 이 에미 말 좀 들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아들은 5월26일 “친구를 찾아보겠다”고 둘러대고 형의 시계를 차고 밖으로 나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들은 5월27일 새벽 옛 전남도청에서 ‘고교생 시민군’으로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싸우다가 배와 다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 김씨는 열흘이 지나서야 아들이 망월동 3묘역에 가매장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들의 유품을 돌려받았지만, 시계는 없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말없이 술을 들이켜던 남편은 2년 뒤인 82년 “아들 대신 내 목숨을 내놓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김씨는 97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로 아들의 주검을 이장할 때, 뼈만 남은 왼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계를 보고 많이 울었다. 태엽을 돌려야 했던 시절의 시계는 날짜가 ‘수/31일’에 멈춰 있었다. 5월30일 희생자들이 시청 청소차에 실려 옛 망월동 묘역에 가매장됐던 날 하루 뒤에 아들의 시계도 정지됐던 것이다.
어머니의 시간은 이때부터 80년 5월에 멈췄다. 평범한 주부였던 김씨는 아들의 시계가 멈춘 이후 ‘오월의 어머니’로 살았다. 폭도로 몰린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일념이 어머니를 거리로 내몰았다. 최루탄을 마시며 숱한 시련도 겪었다. 하지만 아직도 가슴의 응어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용서하라는데 아무도 총 안 쐈다는디 누구를 용서하라는 말인지….”
지난해 자궁암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김씨는 “징한 세월이었오. 시방, 더 말하면 뭣 할 것이요?”라고 되물었다.
또 하나의 시계 주인은 고 전영진(당시 17·대동고3)이다. 이 시계는 ‘수/21일’에 멈춰 있다. 전영진은 5월20일 책방에 가다가 계엄군에게 폭행당하고 들어와 가족들 앞에서 분노했다. 전영진은 21일 몰래 집을 나왔다가 오후 2시께 옛 광주노동청 앞에서 오른쪽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 이후 아버지 전계량씨와 어머니 김순희씨는 아들을 대신해 광주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의 선봉에 섰다. 송영길 열린우리당 사무총장과 강기정 열린우리당 의원은 전씨와 같은 고교를 다녔던 동창생이다.
전시품 중 맨 오른쪽 시계는 고 김안부(당시 35·노동자)의 것이다. 김씨는 5월19일 공사 현장에 일을 나갔다가 돌아오던 중 광주공원 인근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얻어맞아 숨졌다. 김씨는 아내 김말옥씨와 네 자녀를 데리고 ‘부처님 오신 날’(5월21일) 가족 소풍을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걸까? 그의 시계는 아직도 5월22일이다.
글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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