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재야 역사연구자' 안형주 선생을 뵙고서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5. 26. 14:25
반응형


'재야 역사연구자' 안형주 선생.



그저께 반가운 손님 한 분이 날 찾아오셨다.
안형주(70, 경기 안산 거주) 선생님이 그 주인공이시다.
안 선생님은 올 연초에 펴낸 <<박용만과 한인소녕병학교>>(지식산업사)를 한 권 들고 오셨다.

90년대 후반 내가 <대한매일>(현 서울신문)에 근무할 때 미주지역 독립운동 관련자료를 가지고
처음 찾아오신 이후로 인연은 계속되고 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뵈었을 때 느낌은 '이런 분이 진짜 역사연구자구나'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역사에 대한 뜨거운 애정, 발로 뛰는 자료수집, 그리고 엄정한 평가 등.

선생은 1956년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간 후 90년대 중반까지, 근 40년간 미국생활을 하였다.
펜실베니아대학 와튼스쿨 졸업(1964) 후 캘리포니아 도밍거스 주립대에서 경영학 석사과정(1976)을,
캘리포니아 풀러턴 주립대에서 역사학 석사과정(1995)을 마치는 등 공부도 정규과정을 마쳤다.
직장생활은 L.A 록히드 항공사와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 사회복지사로 근무하였다.


독립운동가 김호 선생


이런 분이 '역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을까. 그 실마리는 집안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안 선생은 독립운동가 김호(金乎, 1884-1968, 본명 김정진, 미국명 찰스 호 김,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선생의 외손자시다. 1914 미국으로 망명한 후 대한인국민회 활동 등 미국땅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김호 선생은 초기 한인교포들이 미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한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놀라운 것은 지난해 9월 L.A시 교육국 당국이 김호 선생의 이름을 따 관내의 한 초등학교를 '찰스 호 김(Charles H Kim) 초등학교'로 명명한 사실이다. 이는 미국에서도 처음있는 일로, 미국 당국이 김 선생이 미국사회에 끼친 공적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재미교포들에게도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일제 하 미국에서 활동한 거물인사로 흔히 박용만과 이승만을 꼽는다. 안 선생은 이들 가운데 박용만에 주목하여 그간 미국과 국내를 오가며 자료를 수집한 끝에 이번에 박용만의 전반기에 대한 연구서를 펴내셨다. 특히 이 책에서는 박용만이 감독(교장 격)을 맡았던 한인소년병학교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 참고로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선생도 이곳 출신이다)

그간 박용만이나 한인소년병학교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매우 미약한 실정이다.  
업적(활동)이나 그 의미에 비해서는 연구가 태부족인 셈이다.  
거기엔 정치적 이유도 없지 않다. 안 선생은 책 서문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썼다.

"한인소년병학교 출신들은 한국 근대사에서 훌륭한 민족운동가들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광복 뒤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반대파라는 이유로 일시 귀국도 허용되지 않았고, 미국에서 영주한 탓에 그들의 활동은 역사의 그늘에 묻힌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발표된 한인소년병학교 관련 연구논문은 두 개가 있는데..."

박용만이나 한인소년병학교 관련 내용은 다음에 기회가 되면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재야 역사연구자'인 안 선생의 활동을 몇 소개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1956년 미국으로 건너간 후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다니던 안 선생은 92년 '네브래스카 지역 한인사회에 관한 연구'를 시작으로 하여 95년 직장에서 은퇴한 후 본격적으로 재미 한인사회의 역사를 천착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펴낸 책에는 그간 듣도보도 못한 희귀사진들이 수 십 장 실려있는데, 이 모두는 안 선생이 재미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나 미국정부의 문서보관소 등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선생은 그 넓은 미국땅을 비행기로, 때론 본인의 자동차로, 때론 지역에선 렌트카를 빌려서 다니면서 후예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을 설득하여 자료도움을 받곤했다고 털어놨다. 역사연구를 꼭 역사학자들만 해야한다는 법은 없지만 학자들보다 더한 열정과 집념으로 이같은 책을 펴내셨다. (* 박용만 관련 책은 앞으로도 두 권 더 나올 예정이란다)

안 선생의 훌륭한 점은 비단 이런 것만이 아니다.
우리 역사학계의 고질적 병폐 가운데 하나가 '자료독점'이다. 안 선생도 그런 경험을 얘기하셨다.
안 선생은 자신이 수집한 자료 가운데 임시정부, 대한인국민회 관련 전문(電文) 원본, 공문서 등 1,500점을 미국 UCLA 대학에 기증하였으며, 일제하 미국 현지신문에 보도된 한국관련 기사 1만 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제공하기도 하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선생의 활동이 알려지자 국내에서 선생에게 자료수집 도움 요청이 쇄도했다. 선생은 한림대 아세아문화연구소 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와 보훈처의 미주지역 자료조사 위원, 단국대 한국민족학연구소 연구원 등의 신분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현재는 인천시가 추진중인 이민사박물관 해외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 민간 연구자가 우리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우연히 연세를 물었더니 올해 70세(1937년생)라고 하셨다.
절대 헛말이 아닌데, 그 연세보다 선생은 10년은 젊어보인다.
사심없이 열심히 사시는 때문이 아닌가 싶다.

선생은 부인과 슬하에 아드님 한 분이 있는데, 그간 가족여행을 다녀온 것이 단 한 번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인과 아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라고 하셨다.
이제 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노후를 쉬시라고 브탁드리고 싶다.

선생 내외분 부디 건강하시길 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