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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기 포토칼럼)"소쇠골 사진인생 사진가 김수군의 삶"
![](http://www.pask.net/boards/board/z_hakpyung/upimg/1149382386.jpg)
“소쇠골 사진인생 김수군 의 삶”
경기도 부천은 예로부터 복숭아로 유명한 전원지로서, 소사, 또는 소새, 소쇠골 등으로 불리었다. ‘흰 모래’라는 뜻의 한자말이다. ‘소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금이 있는 ‘석별토질’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옛 특산품 생산지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고자 매년 복사꽃이 피는 5월이면 ‘복사골예술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로 ‘예도부천’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부천의 사진문화 역시 ‘복사골예술제’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영상의 적’을 비롯하여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천지부가 추진하는 시민사진촬영대회와 사진사랑 잔치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행사로 인하여 전국의 사진동호인 들에게는 사진의 고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부천의 지명은 ‘소사읍’이 시로 승격한 1973년부터 부쳐진 이름이며, 1950년대의 국정교과서에도 복숭아의 특산지‘소사’로 기록되어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한생을 살면서 한 방향만 응시하며 외곬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천에서 태어나, 부천에 사진예술의 싹을 틔운 사진가가 있다면, 김수군 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천 사람들은 사진가 김수군 을 ‘토박이 향토작가, 고집불통 외곬인생’ 이라고 부른다. 사진가 김수군 은 1939년 조상 대대로 16대가 삶을 이어온 복숭아의 고장 ‘소사’에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외유를 한 적이 없는 부천토박이 사진가로, 부천에 사진과 인생을 다 쏟아 부은 사진가이다. 그는 부천과 인천의 경계지역이 된 중앙병원 맞은편 (현 인천시 구산동 소재)의 농가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67년간 부천 지킴이로 살아가는 부천사진의 산 증인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그의 어린 시절 집 주변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부터, 농사위주의 생활은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농가 주변에 가게가 들어서고 사진관이 생기는 등 농업과 상업을 병행하는 지역으로 변모해 갈 무렵이었다. 특별한 놀이터가 없던 터라, 어린 시절의 김수군 은 자연스레 사진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고, 그곳은 하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러던 차 1955년경 우연한 기회에 카메라를 접할 기회가 생겼으며, 동네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그것이 취미로 발전 하였다. 그 후 1968년 사진 활동을 좀 더 체계적으로 시작하기 위하여 주변의 몇몇 동호인들을 규합하여 사진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으며, 1969년 4월에 부천 최초로 “렌즈클럽”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사진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천지부의 전신이자 모체로 발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당시의 렌즈클럽의 목적은 사진의 공동연구에 무개를 두고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결성 6개월만인 그해 10월에 6일간의 일정으로 9명의 회원들이 34점의 작품을 출원하여 ‘이화다방’에서 전시를 한 것이 부천 최초의 사진예술의 장르를 열게 된 것이었다. 당시 참여회원으로는 김수군을 포함하여 (김선규. 김수열. 장경내. 김본삼. 김정출. 최영화. 박준서, 홍순갑)과 인천에서 (정중화. 김용수. 정영근)등이 찬조 출품을 하였다고 전한다. “사진이란 예술의 일단을 향하여 입술을 깨무는 각오로 오늘 여기 [렌즈클럽 창립전]을 갖는다. 불모의 황무지에 씨앗을 뿌리고 그 가냘픈 싹을 키워가는 부단한 노력과 인고의 정경, 우리는 그러한 삶의 도정을 필름에 담아, 보다 생활의 멋과 긍지를 향해 언제나 생활 속에 [렌즈]를 열어놓을 것이다. <창립전 팜플렛 중에서>
이렇게 시작된 사진가 김수군의 삶은 결코 사진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그의 곁엔 언제나 카메라가 분신처럼 함께 동행 하였다. 생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한때는 부천역 주변과 서울 반포 등지에서 DP&E점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예술적 고갈을 메워주지는 못하였는지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인간의 삶을 소재로 사진작품 창작에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 하였다. 집안의 아이들의 모습에서부터 성장기의 과정을 담기도 하고, 일터에서 생활을 일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기도 하였으며, 장터로 향하는 상인들의 모습이나, 병실의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간호사의 모습도 담았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삶을 영위해가는 과정의 연속임을 깨달은 작가의 평생작업의 소재임을 간파할 수 있다.
종장에 가서는 평생을 자식과 가족들을 위해 고달픈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영원한 쉼터인, 묘지를 향하는 상여행렬의 표현으로 그의 사진작업의 스토리가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통한 장구한 작업으로 대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사진가 김수군은 사진을 통하여 자전적 삶의 표현을 기록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는 평생의 사진테마를 진행해 오면서 매 1~2년마다 개인전을 실시하여 그의 사진작업의 내용을 세상에 보고 하였다.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은 1985년에 ‘여인’을 주제로 시작하였으며, 두 번째는 1987년에 서울의 모 갤러리 초대전으로, 세 번째는 1989년에‘부천사람 100인 전’으로 출판을 겸한 전시를 하였다. 1990년에는‘사람들’ 로, 1991년에는‘부천의 전원’을 소재로, 1992년엔‘아침풍경’으로, 1994년에는‘삶’ 을 대상으로, 1997년에는‘소나무’로, 1998년에는‘잡초의 의미’를 주제로 지금껏 아홉 번의 개인전을 발표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진 적 열정 뒤에는 묵묵히 가정을 꾸려가는 내조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은 힘겨운 주변 환경이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으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사진 작업에만 열정을 쏟았다. 국내의 이름 있는 예술가들의 생활이 대다수 그러하듯이 청빈한 예술가들의 창작생활은 늘 궁핍함 속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창작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향한 외곬 된 삶을 숙명 같은 것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김수군 에게는 항상 수식어처럼‘고집불통 외곬인생’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장성하여 각자의 길을 가고 있으며, 그중 큰 아들이 사진학을 전공하고 결혼과 동시에 프랑스로 날아가 다년간 세계적 사진조류를 익힌 후 귀국하여 한국과 유럽을 잇는 사진 유통을 위한 일에 투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사진가 김수군 은 사진가 집안으로 대업을 이어가고 있으나, 그는 지금도 카메라를 메고 촬영 소재를 찾아 이른 아침이면 집을 나선다. (2006년 6월 3일 德岩 張漢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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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쇠골 사진인생 김수군 의 삶”
경기도 부천은 예로부터 복숭아로 유명한 전원지로서, 소사, 또는 소새, 소쇠골 등으로 불리었다. ‘흰 모래’라는 뜻의 한자말이다. ‘소사’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사금이 있는 ‘석별토질’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옛 특산품 생산지로서의 명성을 이어가고자 매년 복사꽃이 피는 5월이면 ‘복사골예술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로 ‘예도부천’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부천의 사진문화 역시 ‘복사골예술제’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영상의 적’을 비롯하여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천지부가 추진하는 시민사진촬영대회와 사진사랑 잔치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며, 이러한 행사로 인하여 전국의 사진동호인 들에게는 사진의 고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부천의 지명은 ‘소사읍’이 시로 승격한 1973년부터 부쳐진 이름이며, 1950년대의 국정교과서에도 복숭아의 특산지‘소사’로 기록되어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한생을 살면서 한 방향만 응시하며 외곬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천에서 태어나, 부천에 사진예술의 싹을 틔운 사진가가 있다면, 김수군 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천 사람들은 사진가 김수군 을 ‘토박이 향토작가, 고집불통 외곬인생’ 이라고 부른다. 사진가 김수군 은 1939년 조상 대대로 16대가 삶을 이어온 복숭아의 고장 ‘소사’에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외유를 한 적이 없는 부천토박이 사진가로, 부천에 사진과 인생을 다 쏟아 부은 사진가이다. 그는 부천과 인천의 경계지역이 된 중앙병원 맞은편 (현 인천시 구산동 소재)의 농가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67년간 부천 지킴이로 살아가는 부천사진의 산 증인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그의 어린 시절 집 주변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부터, 농사위주의 생활은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농가 주변에 가게가 들어서고 사진관이 생기는 등 농업과 상업을 병행하는 지역으로 변모해 갈 무렵이었다. 특별한 놀이터가 없던 터라, 어린 시절의 김수군 은 자연스레 사진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고, 그곳은 하나의 놀이터가 되었다. 그러던 차 1955년경 우연한 기회에 카메라를 접할 기회가 생겼으며, 동네 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그것이 취미로 발전 하였다. 그 후 1968년 사진 활동을 좀 더 체계적으로 시작하기 위하여 주변의 몇몇 동호인들을 규합하여 사진 동아리를 만들게 되었으며, 1969년 4월에 부천 최초로 “렌즈클럽”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사진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한국사진작가협회 부천지부의 전신이자 모체로 발전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당시의 렌즈클럽의 목적은 사진의 공동연구에 무개를 두고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으며, 결성 6개월만인 그해 10월에 6일간의 일정으로 9명의 회원들이 34점의 작품을 출원하여 ‘이화다방’에서 전시를 한 것이 부천 최초의 사진예술의 장르를 열게 된 것이었다. 당시 참여회원으로는 김수군을 포함하여 (김선규. 김수열. 장경내. 김본삼. 김정출. 최영화. 박준서, 홍순갑)과 인천에서 (정중화. 김용수. 정영근)등이 찬조 출품을 하였다고 전한다. “사진이란 예술의 일단을 향하여 입술을 깨무는 각오로 오늘 여기 [렌즈클럽 창립전]을 갖는다. 불모의 황무지에 씨앗을 뿌리고 그 가냘픈 싹을 키워가는 부단한 노력과 인고의 정경, 우리는 그러한 삶의 도정을 필름에 담아, 보다 생활의 멋과 긍지를 향해 언제나 생활 속에 [렌즈]를 열어놓을 것이다. <창립전 팜플렛 중에서>
이렇게 시작된 사진가 김수군의 삶은 결코 사진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그의 곁엔 언제나 카메라가 분신처럼 함께 동행 하였다. 생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한때는 부천역 주변과 서울 반포 등지에서 DP&E점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예술적 고갈을 메워주지는 못하였는지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인간의 삶을 소재로 사진작품 창작에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 하였다. 집안의 아이들의 모습에서부터 성장기의 과정을 담기도 하고, 일터에서 생활을 일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기도 하였으며, 장터로 향하는 상인들의 모습이나, 병실의 환자들과 그들을 돌보는 간호사의 모습도 담았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삶을 영위해가는 과정의 연속임을 깨달은 작가의 평생작업의 소재임을 간파할 수 있다.
종장에 가서는 평생을 자식과 가족들을 위해 고달픈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영원한 쉼터인, 묘지를 향하는 상여행렬의 표현으로 그의 사진작업의 스토리가 구성되어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통한 장구한 작업으로 대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사진가 김수군은 사진을 통하여 자전적 삶의 표현을 기록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는 평생의 사진테마를 진행해 오면서 매 1~2년마다 개인전을 실시하여 그의 사진작업의 내용을 세상에 보고 하였다.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은 1985년에 ‘여인’을 주제로 시작하였으며, 두 번째는 1987년에 서울의 모 갤러리 초대전으로, 세 번째는 1989년에‘부천사람 100인 전’으로 출판을 겸한 전시를 하였다. 1990년에는‘사람들’ 로, 1991년에는‘부천의 전원’을 소재로, 1992년엔‘아침풍경’으로, 1994년에는‘삶’ 을 대상으로, 1997년에는‘소나무’로, 1998년에는‘잡초의 의미’를 주제로 지금껏 아홉 번의 개인전을 발표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진 적 열정 뒤에는 묵묵히 가정을 꾸려가는 내조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은 힘겨운 주변 환경이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였으나,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사진 작업에만 열정을 쏟았다. 국내의 이름 있는 예술가들의 생활이 대다수 그러하듯이 청빈한 예술가들의 창작생활은 늘 궁핍함 속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창작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은, 사진을 향한 외곬 된 삶을 숙명 같은 것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진가 김수군 에게는 항상 수식어처럼‘고집불통 외곬인생’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는 슬하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장성하여 각자의 길을 가고 있으며, 그중 큰 아들이 사진학을 전공하고 결혼과 동시에 프랑스로 날아가 다년간 세계적 사진조류를 익힌 후 귀국하여 한국과 유럽을 잇는 사진 유통을 위한 일에 투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사진가 김수군 은 사진가 집안으로 대업을 이어가고 있으나, 그는 지금도 카메라를 메고 촬영 소재를 찾아 이른 아침이면 집을 나선다. (2006년 6월 3일 德岩 張漢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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