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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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음의 아름다움/문화일보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3. 2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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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

 

또 아까운 목숨이 졌다. 생의 의지로 온 몸이 가려워야 할 나이에, 시간 시간을 추억의 보물창고에 저장하며 삶을 더욱 견고히 다져야 할 나이에, 스스로 살길을 저버렸다. 유명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잇단 비보들이 명치를 먹먹하게 만든다. 아등바등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것은 분명 값져 보인다. 재능과 젊음과 미모와 팬들까지. 한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던가보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그 귀중한 자산들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희로애락애오욕, 오욕칠정이 주는 그 마술 같은 삶의 염료들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때론 뜻하지 않은 행운이 무료했던 삶을 설레게 만들기도 하고, 눈앞에 난 허방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빠질 수도 있을 터이다. 삶이 수렁에 처박히고, 진창에 굴러도 살아 있는 것만큼 행복한 게 또 있을까. 실연도, 상처도, 사랑의 완성도, 성공도 다 살아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소유의 서열은 존재해 있는 것 다음일 터.

나는 사형선고를 두 번이나 받았었다. 처음에는 스물일곱 살 때였는데, 장티푸스에 걸렸었다. 완치가 된 줄 알고 직장에 나갔다가 덧든 바람에 다시 치료에 들어갔지만 항생제에 내성이 생겨 낫지 않았다. 고열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때 깨달았다. 삶이, 살아 있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비루하게라도 살아 있는 것만이 최고의 선이고, 진정한 가치라는 것을.

두 번째는 10년 뒤에 찾아왔는데, 이유 없이 심장에 통증이 왔고, 의사는 심근경색을 입에 담았다. 그때는 삶을 지루해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내 미래 또한 알량하기 그지없어서, 때로는 죽음을 미화하기도 했고, 죽음을 꿈꾸기도 했다. 눈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죽어야 할 이유는 많았다. 친구들은 나보다 더 똑똑했고, 빛나 보였으며, 잘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사형선고도 살고 싶다는 기도를 끌어냈다. 암흑과도 같은 시절, 속에 펄펄 끓는 마그마가 들어 있는 것처럼 잠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던 혼돈의 시기에 그만 굴복해서는 스스로 삶을 저버렸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나는 살았고, 지금의 내가 있다. 비록 빛나는 삶이 아니어도, 내 기척이 너무 미미해도, 오늘 이 겨울의 추위를 호흡하며 이미 시작된 봄의 기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믿는 대로 된다고 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부정적으로 흐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식물들조차도 사랑과 정성으로 대하면 금세 시든 잎이 활기를 띠며 열매를 맺기 위해 부지런히 물관에 생명수를 실어 나르지 않던가. 하물며 사람이야. 생각 하나, 무심코 내뱉는 말 하나가 스스로에게 주문이 된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만을 꿈꿔야 할 것이다. 새옹지마, 전화위복은 그 불행에 함몰되지 않고, 굳은 의지로 내일을 향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기회인 것이다.

화사한 미소와 재능으로 사람들에게 꿈을 주던 그들의 잇단 죽음으로 생겨날 모방 자살이 새삼 걱정스럽다. 그들의 죽음이 당장의 삶을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길라잡이하는 일이 없기를. 행복은 꿈꾸는 자의 몫이다. 물론 꿈을 꾸는 것만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그 꿈을 위해 얼마만큼 노력하느냐에 따라 그 과실의 크기가 달라질 것이다. 어찌 가보지 않은 길을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지금 삶이 힘들어도 미래의 어느 시기엔가는 살 떨리는 기쁨과 행복이 예비돼 있을지 모른다. 가장 춥고 어두울 때는 해가 뜨기 직전임을 기억하길. 그리하여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의 입자들을 호흡해보길. 미래를 믿어보는 자세가 절실히 필요할 때다.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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