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나를 비우는 삶/문화일보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3. 28. 14:30
반응형

<푸른광장>
나를 비우는 삶

 

며칠 전 묵은 짐들을 정리했다. 무겁고 칙칙한 겨울옷들을 안으로 들이고 살랑살랑한 봄, 여름 옷들을 꺼내면서 시작한 짐정리였다. 살림살이나 옷가지 같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도구라는 것이 별게 있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왔지만 구석구석 쟁여진 물건들을 꺼내놓고 보니 만만치가 않았다. 어떤 것은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고, 어떤 것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다 어느날 문득 실증이 나서는 존재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장에 없으면 불편할 것만 같던 물건도 언제 그랬느냐 싶게 처박아 놓고서는 잘만 살아왔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물건들은 그렇게 급작스럽게 밖으로 끌려 나와서는 처량하게 내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것은 디자인이 지금의 유행과 맞지 않아 촌스러웠고, 어떤 것은 빛이 바래 있었다. 꽃꽂이를 배우러 다닌다며 사두었던 전지가위나 다양한 형태의 침봉도 눈에 띄었고, 예쁘다고 사두었던 커피 잔도 눈에 밟혔다. 물건 하나에 감동하고, 감탄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한숨도 나왔다. 행여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존재이지는 않은지. 순간 그런 각성이 들었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 필요했다가도 슬그머니 잊혀버린 사람. 없애자니 아깝고, 가지고 있자니 애물단지 같은 그런 존재. 일을 도와주러 온 올케언니는 그 많은 잡동사니들에 놀라워하며 한심하다는 시선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올케언니에게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가라고 했다. 내게는 필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인다면 그나마 마음이 따듯해질 거였다.

현자들은 무소유를 가르쳤다. 소유하려는 마음이 탐욕을 낳고 집착을 낳는다며 무소유의 지혜를 강조했다. 하지만 누가 얼마나 무소유를 실천할까. 나 또한 얼마나 생의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해 왔던가. 더욱이 가난한 전업 작가의 알량한 지갑은 과도한 지출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풍족한 소비로부터 비켜나 있었던 터였다. 한데 이 산더미 같은 물건들은 무어란 말인가. 내 생이 이렇듯 무거웠을까.

어머니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셨다. 다락이고, 창고고, 마루고 간에 쓸모없는 물건들로 가득 차서는 통행을 방해하고 미관을 해쳤지만 어머니는 잡다한 물건들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소용이 없다고 버리면 이상하게 그 순간 꼭 필요하게 되더라고 변명처럼 말씀하셨다. 게다가 쓸모없는 물건이 어디 있느냐고 하셨다. 심술궂게도 나는 어머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내 눈에 쟁여져 있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다 쓸모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볼품없고 쓸모없는 저 물건들에서 늙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 애잔한 마음에 갖다버리지 못하는 거라고 여겼다. 아니면 노탐이거나. 한데 나도 그런 어머니와 한 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물건에 대한 애정을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하셨다.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고. 나름대로 한 가지씩 잘하는 게 있을 테고, 그게 세상을 제대로 돌아가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그러니 사람을 박대하지 말고,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아직 나는 어머니의 그런 웅숭깊은 깨달음까지는 얻지 못했다.

인생을 잘 살아내는 지혜의 항목 가운데 잘 버리는 것도 들어 있을지 모른다. 생을 더 단출하게, 더 가볍고 명료하게 살기 위해서는 늘 자신의 것을 비우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버리는 것보다 더 현명한 길은 아예 사지 않는 데 있을 터이지만 당장에 내 주변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부터 비우고 버리는 일 또한 삶을 잘 사는 한 방편일 것이다. 짐을 다 정리하고 보니 버려야 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설령 그것들이 다시 내 인생에서 소용될 일이 있더라도 당장에 나는 내 삶을 가볍게 덜어내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에 대한 내 기대치를 줄이고, 내 욕심을 덜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를 점검하고, 내 안의 탐욕을 버리는 일, 그리고 주변의 짐들을 정리하는 일, 이게 앞으로 내가 정기적으로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7-05-1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