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7일전남도청 과
2008년 4월 20일 전남도청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80년 5월 27일 충정작전 결과보고에는 무장난동자 사살 17명,
화기수거 3천1백3정 , 체포 2백95명, 피해 전사 2명, 부상 12명으로 기록돼있다.
(전교사 작전일지) 계엄사의 발표대로 이날 작전으로 숨진 시민군이 17명밖에 안 될까.
당시 도청안에 있었던 시민군은 최소 2백70명선(전교사 蘇俊烈사령관의
국회청문회 증언). 全南도청에 있다 버스로 상무대에 연행된 사람은 1백50~2백명선
(45인승 버스 3대로 연행해 갔음). 蘇씨의 증언대로 도청에는 2백70명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버스에 실려 연행된 사람은 최대 2백명. 계엄군이 주장하는
사망자 17명을 뺀다 하더라도 약 50여명의 행방이 묘연하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시민군 기획위원 尹江鈺씨는 『내가 본 시체만도
30여구가 넘었다. 또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 포위하고 공격을 해 왔기 때문에
나는 날아가는 재주가 없는 한 도청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당시 도청에 남은 사람은 약 3백명이었고 상무대에 연행된 사람이 약 2백명이었다.
계엄군이 도청에 재 진입했을때 최소 1백여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 한다』
며 계엄사의 17명 사살 발표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실록- 5.18 항쟁사- 81회 계엄군 진압작전중에서)
도청건물로 들어서면 열려진 문옆에 닫혀있는 접수창구만 덩그러니...
한국의 아우슈비츠 상무대 영창. 총기를 탈취하고 光州교도소를 습격하는등 무장폭도화하여 교전한 李금영등 30명. 무기를 휴대하거나 기타 무기를 가지고 군.경과 대항, 살상을 감행한 申만식(22)등 174명. 세무서 방송국 등 공공건물을 방화하고 중요 시설 및 재화를 약탈한 梁승희(20)등 33명. 악성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 면서 악질적인 배후선동을 한 全春心(31)등 10명. 기타 기물파괴 및 시위적극 가담자 75명이라고 밝혔다.
이들 375명은 상무대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한 신군부의 사전각본에 따라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보안부대 수사관들이 신군 부가 이미 짜놓은 각본에 맞추기 위해 이들에게 가혹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의 아우슈비츠 상무대 영창. 505보안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해직되는 비운을 맞았던 宋基淑 全南大 교수는 전시의 포로들도 이같은 대접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연행자는 물론 대학교수들에게까지 몽둥이 찜질등 무자비한 고문을 가 했다. 수사관들은 교수들에게 전두환 정권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문이외에 화장실에서 밥먹게 하기, 팬티만 입게하기등, 주로 수치심을 유발하는데 혈안이 됐다』 고 당시를 회상했다.
상무대에서 자행된 가혹행위는 다양했다. 곡괭이로 찜질을 하는 구타를 비 롯, 손목에 수갑을 채워 천장에 매달아두기, 물고문, 손톱밑 바늘로 찌르 기, 백열등을 이용한 고문등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기술이 총동원됐다.
고문에 못이겨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속출한 것만 보아도 합수부 의 고문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것이었는가는 짐작할수 있다.
내란수괴를 몰린 鄭東年씨는 화장실에서 스푼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항쟁지도부였던 尹江鈺씨와 金영철씨는 자살하기 위해 벽에 머리를 부딪쳐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뿐아니라 당시 수사관들은 임신부에게도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임신4 개월의 몸으로 합수부에 끌려간 李모씨(41)의 증언. 『 배를 발로채이고 아랫도리를 각목으로 꾹꾹 찌르는등 인간으로서의 아픔뿐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인권과 모성이 말살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나는 나은편이었다.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모씨의 경우, 수사관들의 파렴치한 성고문으로 아이를 낳을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이런 고문을 자 행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연행자들에 대한 고문수사는 항쟁초기에는 광주 505보안부대가 전담 하다가 후반에는 27일 창설된 합수부 광주사태 처리 수사국에 의해 진행됐다. 수사국은 보안대를 비롯, 안기부, 검찰, 육국범죄수사단등 수사진 80여명 으로 구성됐고 수사국장은 보안사 기조처장 崔禮燮준장, 부국장 崔경조대령이었으며 徐의남 505 대공과장, 金기준 광주지검 공안검사 등이 주요간부 였다. 이들은 3개과 1개반으로 구성돼 1과는 재야, 2과는 학생, 3과는 폭도를 담당했으며 1개반인 특명반은 국보위의 지시사항을 수사했다.
특히 특명반은 5공 창출과정에서 부정축재자, 대학교수, 언론인 숙청과 언론 통폐합, 삼청교육, 공무원숙청 등을 자행했다.
이와중에서 여러 가지 가혹행위가 이뤄졌고 이를 못견딘 상당수가 자해하 기도하기도 했다(당시 505보안부대 許壯煥 상사의 양심선언)
수사국은 항쟁가담자들을 내란 국사범으로 전원 치안본부 컴퓨터에 입력한 뒤 80년 8월29일 해체했다. 이같은 조직적인 가혹행위를 받은 뒤 군사재판에 넘겨져 상무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형이 확정된 사람은 洪南淳씨등 재야인사 13명, 학원사태( 내란)관련자로 지목된 鄭東年씨등 20명, 역시 학원사태(소요 및 포고령 위반)관련자 文석환씨등 35명, 도청수습위(내란) 金宗培등 10명, 기동 타격대 尹석주씨등 29명, 靈岩지방관련자 24명, 木浦지방 관련자 22명, 궐기대회 및 투사회보팀 10명등 모두 421명이나 됐다.
수사국은 제2의 학살을 자행하며 光州를 잠재우고 5공 정권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진실의 승리를 믿는 의지 하나만으로 모진 고문을 견대냈던 연행자들. 그들에게 남은 것 폭도라는 멍에뿐이었다.
(실록- 5.18 항쟁사- 82회 상무대 영창)
1980년 5월의 모습(안내도)
2008년 4월 자유공원
2008년 4월 자유공원
2008년 4월 자유공원 그렇게 보존된 감옥밖 모습...
|
'1. Dr. Sam Lee > 15_80년5월18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KBC 광주방송 윤사현 정책.심의실장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입니다! (0) | 2008.05.13 |
---|---|
[5.18 민주화운동 80518] - 5.18성지순례 연대모임 (0) | 2008.05.13 |
[스크랩] 2. 일곱번째 5.18성지순례- 열사들의 긴 기다림 (0) | 2008.04.24 |
[스크랩] 1. 일곱번째 5.18성지순례- 가슴속 말을 남긴채 (0) | 2008.04.24 |
[스크랩] 성지순례 참여단 모습들- 02 (0) | 2008.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