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속을 거닐며 (18) : 군대의 변화 추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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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신 준
- 조회수 : 4
- 08.11.20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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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의 변화추세 소년이 군대에서 생활한지도 어언 30년이 되어갔다. 그 기간은 한국사에서 가장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었다. 그래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군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바뀌어 갔고, 갈수록 그 변화는 빨라지고 있다. 소년이 군을 선택했던 때는 3공화국이었는데, 사관학교에서 생활을 막 시작하고 있을 때 이미 정권이 4공화국에서 5공화국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또 다시 군출신 대통령이 등장하여 정부기관 각 요처에는 군출신들이 활동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들의 지시에 따라 생활해야 했기에 군인들의 인기는 다시 올라갔던 것이었다. 시대 상황변화를 잘 몰랐던 소년이 80년도 생도1학년 시절에 첫휴가를 나갔더니 많은 친구들이 ‘또 군인이 집권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좋겠다’ 며 부러워하기에 처음에는 3공때 처럼 생도들의 인기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다가 집권과정의 많은 사건들을 접해 들으며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막 군생활을 배우고 있었던 소년은 당시 내무생활에 적응하는 것만이 중요하였고 그외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단지 소년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 있다면 당시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이 육사를 방문하여 그때마다 생도들이 그들을 위해 퍼레이드를 해야했기에 쫄병이었던 소년은 아직 제식동작이 서툰 시기여서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또래의 대학생들은 집권과정의 부당함에 대해 시위를 계속하였고, 끝내는 휴교령까지 내려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사관학교의 인기는 올라 이듬해 사관학교 선발시험에는 우수자원이 많이 몰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사관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중도에 그만 둔 몇몇 후배들이 곧바로 소위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것을 보고 소년은 1년전에 비해 학교 선호도가 굉장히 많이 올랐음을 알게 되었다. 임관해서 소대장으로 임지에 갔을때는 그사단 지휘관이 당시 실세라는 ‘하나회’ 출신이어서 소년은 막강한 지휘관의 권한을 경험하게 되었다. 당시 사단장의 지시는 법위에 있었고 반드시 이행해야 할 어명과도 같았다. 그런 시대적 상황이었기에 소년의 부대가 동상사고에 30여명이 발가락이 잘려도 사단장은 끄떡없었고 후에 군의 최고 지위에 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알아서 충성경쟁을 하느라 거의 상부지향적 부대운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시절 소대장을 했던 소년은 일부 상관들이 계급이 높다고 일방적으로 복종을 요구하는 것에 힘들어 했으나 말잘듣는 부하들과는 아무런 어려움없이 근무할수 있었다. 그것은 소년 자신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군대의 리더로서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직선제 개헌이 되면서 6공화국 시대가 되었다. 언론에 비치는 대통령의 모습은 그전과 달리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는 등 권위적인 모습에서 보통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 사람들은 군인들의 강권정치에서 민주화 되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똑같은 군출신 대통령 시대하에서 실세들이 그대로 였기 때문에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여소야대 상황이 되어 5공 청문회가 열리면서 하위직에서 부여된 임무에 충실했던 많은 군인들 조차도 5공 집권과정의 부당성에 연루된 것처럼 비쳐지면서 소년은 갈등하게 되었다. 그당시 많은 사람들이 군인을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은 나쁜 집단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사회 경기는 아주 좋아 소년의 친구들은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중 몇몇 친구들이 ‘네 수준에 왜 군대에서 아깝게 썩고 있느냐’ 며 빨리 전역해서 같이 사회생활을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6공 시절은 군의 가치가 떨어지는 시대였지만 군의 대우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이다. 5년이 지나 드디어 군출신이 아닌 민간 출신의 대통령 시대가 되었다. 그러면서 군대에는 오랫동안 실세로 지냈던 인원들이 대거 물러나는 등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 취임후 곧바로 군 수뇌부가 교체되면서 ‘하나회’로 인식되었던 모든 인원들은 물러나고 그 자리에 그동안 상대적으로 한직에 근무했던 인원들이 대거 승진하여 요직에 중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군을 잘 몰라서인지 군은 그시절 가장 많이 흔들렸고 인기도 최고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시절 육사에는 모집 정원조차 제대로 선발할수 없도록 우수자원이 많이 지원을 안했던 것이다. 군 통수권자가 군 주요지휘관을 임기도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사전 통보없이 즉각 교체하는 식의 인사조치를 하여 군 고위 지휘관의 지위가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군대의 인기가 떨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을 지냈던 분을 포함해 5공화국 탄생에 관련된 군의 상관들이 범법자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직업군인들이 자괴감에 빠졌고, 군인이라는 직업은 국민에게 당당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시절에 5공 집권과정에서 주로 투입되었던 특전부대 감축이 논의 되었는데,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발생했을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상황에서도 최일선에 특전부대가 투입되어 공비들을 소탕함으로써 부대 감축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던 것이다. 호남과 충청권 정계 지도자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국민의 정부가 시작되면서 군도 그지역 출신 장교들이 요직에 중용되었고 후에 연합이 깨어진 뒤로는 호남출신들이 주로 군을 이끌어 갔다. 그기간동안 장교들의 정년이 들어나고 보수도 올라 어느정도 사회인들과 비슷한 수준이 되어 생활여건은 많이 좋아졌다. 그당시 가장 큰 이슈는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 지는 등, 남북은 대립관계에서 화해․협력의 관계로 바뀌었던 것이다. 북과 수시로 대화하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건설 등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북은 더 이상 대한민국의 주적이 아니라는 이념의 혼돈 상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시절 지휘관들이 가장 어려웠던 것은 군대의 존재목적과 역할을 부하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이었다. 북이 주적이 아니라면 대한민국 국군은 누구의 공격에 대비해야 하는지, 그렇다면 군대는 전투를 하는 집단인데 적이 없다면 군대가 필요없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설명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그러다 참여정부가 시작되면서 남북관계는 동반자적 관계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한쪽에서는 미국때문에 그동안 남북관계가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일부 세력들이 반미감정을 부추키게 되어 미군 철수와 작전권 환수 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남북관계의 진전에만 몰두하여 서해교전에서 아군 병력이 사망하는 피해가 발생했는데도 오히려 북의 눈치를 보느라 장례식 조차도 정부와 군의 고위층이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채 초라한 부대장으로 치르도록 하여 유가족에게 한을 남겼고, 그것을 보는 많은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정부와 군 고위층의 태도에 심각한 우려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고 장거리 유도탄을 시험발사하여 미국과 일본을 포함하여 많은 국가들이 국제적인 위협으로 판단하여 강경 대응책을 논의하는 와중에도, 남한의 고위층의 입에서는 북핵은 한반도 안보에 도움이 되고 유도탄도 남쪽으로 발사할 일이 없다는 발언을 하여 군의 역할에 대해 국민들도 혼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소년도 많이 들었던 말이 ‘이제 군도 북의 도발에만 대비할것이 아니라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는 것이었다. 전쟁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니 군도 대폭 축소되어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한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많은 군인들 조차도 더 이상 국가를 위해 목숨바쳐 싸울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 한가지 참여정부시절 크게 변화된 것은 군에서도 인권보장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병사들 상호간은 물론 어떤 상관이라도 인권에 위배되는 지시를 하면 법의 심판을 받도록 바뀌어 더 이상 군의 상관들은 병사들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자신의 정신적․신체적 결함이 있어 제대로 부대생활을 못하겠다고 말하면 편하게 군생활을 할수 있는 여건이 되어 지휘관들은 임무수행을 위해 부하들을 훈련시키는것 보다 문제가 있는 병사들의 관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병 상호간에도 일체의 지시를 할수 없도록 법제화하여 이제 그들은 같은 중대가 아니면 계급과 상관없이 사회인들처럼 서로 ‘아저씨’ 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한 어느 지휘관의 아이디어 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병영내에서 병사들이 샤워를 할 때 여자들이 갖고 다녔던 목욕바구니를 모두가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마 어느 부대의 지휘관이 병사들의 인권 보장 차원에서 병영내에서도 집에서 쓰던 화장용품을 사용할수 있게 한다고 홍보하려고 한것이 이제는 병사들간의 풍습이 되어 전부대에서 모든 병사들의 필수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아무도 들고 다니지 않는 목욕 바구니를. 그렇게 군은 시대가 변해가면서 조금씩 역할과 그모습이 바뀌어 갔다. 따라서 직업군인들도 그에 맞게 바뀌어 가야만 무난하게 생활할수 있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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