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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사모곡 |
언제부터 잎이 무성해졌을까. 무심코 바라본 앞산은 온통 연두색 세상이었다. 고개 들면 바로 보이는 산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산을 보았겠지만 나는 달라진 세상을 미처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빛이 포실해지고 뜨겁다고 느낄 만큼 기온이 올라갔어도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사는 일이 이렇다보니 종종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도 한다. 주변의 사람을 살핀다거나 내 일을 엽렵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 생각을 했다. 봄에 노인들은 맥없이 세상을 떠난다는데 어머니는 지금 무얼 하고 계시는지.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통화를 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하루에도 두어 번씩 어머니는 내 음성을 듣지 않으면 걱정하셨다. 통화가 되지 않는 날이면 어머니의 상상력은 지나치게 앞서 가서 온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전화로 가족들에게 혹여 내가 정신을 잃고 있는 탓에 전화를 못 받는 건 아닌지 가서 확인해보라고 성화를 부리셨다. 어쨌거나 어머니의 상상력 때문에 여러 번 곤욕을 겪기도 했고, 야단도 맞았다. 그리고 어머니의 그 관심이 얼마간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머니의 노파심을 알기에 미리 나 이렇게 잘 살아 있고 건강하게 있으니 염려 마시라고 전화를 드리는 편이었지만 어쩌다 보면 가끔 놓치기도 하는 것이다.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음성이 힘이 없었다. 이제 일흔여덟. 아직 내부에 짱짱한 생기를 갖고 계셔야 옳을 나이지만 어머니는 오랫동안 당뇨를 앓으셨던 탓에 다른 어르신들에 비해 활력이 없으셨다. 어디 편찮으시냐는 물음에 극구 아니라고 답하셨다. 어머니의 유일한 낙은 연속극을 보는 것이어서 낮에 텔레비전 앞에 계시다가 당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잠에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아예 주무실 채비를 하고 계셨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낮에 이부자리 펴고 누워 있는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절대 이불을 꺼내 덮지 않으신다. 그러고는 꽃잠을 주무시는데, 그게 문제였다. 이번에도 그럴 터였다. 노인은 하루 한 시가 다르다는데, 어머니의 음성이 밝고 힘이 넘칠 때도 늘 조심스러웠는데, 그렇듯 힘이 없는 음성으로 전화를 받으실 때는 덜컥 겁부터 났다. 나는 어머니에게 당신 몸을 당신 스스로 돌보고 조심하는 게 자식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일인데 왜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하시냐며 사뭇 짜증스러워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감기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끝내 우기지 못하셨다. 끊고 나서 자분자분 말씀 드릴 걸 하는 후회를 했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라도 오래 살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앞선 탓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어머니는 서운하셨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감기 기운으로 육신이 힘든데 자식까지 그 일로 타박하니 어디에다 속내를 털어놓지도 못하고, 또 아프다고 마음 편히 자리에 눕지도 못하셨을 것이다. 난 늘 이 모양이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생각의 미욱함 때문에 제대로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 전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는데, 어머니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노쇠하셨다. 한 걸음 옮기는 일도 힘에 벅차하셨다. 젊었을 적의 그 당당하고 주변을 서늘하게 만들던 혈기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와 나는 서로를 미워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야단을 치셨고,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영정에 대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내가 돌봐드리기로. 내가 먼저 마음을 여니 어머니는 더 이상 자애로울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 어느 자식보다 나를 더 믿고 의지하신다. 왜 진작 그 이치를 알지 못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한번도 부모님이 내 곁을 떠나시리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어머니도 내 곁을 떠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말이 공손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지만 오래오래 내 곁에 남아달라고. 어머니가 가시면 나는 고아라고. 햇빛 찬란한 이 봄, 내 마음이 든든한 이유는 아직 내 곁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은미희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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