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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뜻밖의 위로 |
며칠 전에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거실 바닥에 닿았다 살처럼 튀어오르는 눈부신 햇빛에 멀미를 일으키고 있던 오후였다.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헝클어진 기분에 속절없이 마음만 다치고 있었을 것이다. 일을 해야 하는데 여러 가지 핑곗거리들이 그 일을 가로막으면서 심란해하고 있었다. 시작에 앞서 나는 늘 그런 식이었다. 예전에는 시작이 반이라고, 시작만큼은 힘차고 의욕이 넘쳤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러질 못하고 도망부터 쳤다. 그날도 그랬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자꾸만 미루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받은 친구의 전화는 어쩔 수 없이 심드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세상 것에 대해 흥미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듯 축 가라앉은 친구의 음성 때문에 마음부터 먼저 무거워졌을 것이다. 친구는 세상 다 살아버린 사람처럼 한숨부터 길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했다. 그 나이의 여자들이 갑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갖거나 사는 것에 흥미를 잃고 우울증을 앓기도 하는데, 친구 또한 으레 그러려니 생각하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 들었다. 그리고 이유를 물었다. 굳이 이유를 듣고 싶어 물은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가슴에 맺힌 것들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다보면 어느 정도는 맺힌 게 풀릴 테고, 풀리다 보면 또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터이므로 나는 잠시 동안 그녀에게 나를 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건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채근에 주절주절 털어놓기 시작했다. 남편은 일과 친구들밖에 모르고, 하나 있는 딸은 저 혼자 큰 것처럼 비밀을 간직한 채 간섭을 싫어한다는 거였다. 키워놓으니까 이제는 부모의 관심을 거추장스러워하며 손톱 세우고는 말대꾸한다는 거였다. 어쩌다 자신의 존재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그동안 무엇 때문에 그리 아등바등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저도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즐기며 살걸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지나간 날들을 후회했다. 감정에 겨워 어느 순간에는 코맹맹이 소리까지 냈다. 그녀가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빈한하지만 기개만큼은 드높은 가문으로 시집가 손톱 닳도록 일을 하고, 애면글면 푼돈 모아 작은 집 장만하고, 부모 봉양하며 나이 먹어온 친구였다. 한데, 그 친구가 새삼 삶의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오늘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형편이 여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다달이 딸의 학원비를 걱정하고, 푼돈까지 계산해 생활비를 만들고, 당장에 치러내야 할 집안 대소사에 머리가 무거운 친구였다. 그 친구의 신세 한탄은 계속됐다. 사는 게 참 무섭다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 이야기도 해줄 수 없었다. ‘응’이나 ‘그래’라는 추임새 같은 대답만 간간이 섞을 뿐. 내가 무슨 말로 그녀의 삶을 위로해주고 그녀의 삶을 충고해주며 그녀의 삶을 간섭하겠는가. 나 역시 아직 제대로 된 길을 찾지도 못하고, 새로운 시작 앞에서 망설이고만 있는 것을. 어쨌건 나는 그녀가 나에게 속말을 다 뱉어냄으로써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말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게 삶이 아니겠느냐고. 처음부터 정답을 알면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으며, 무슨 설렘이 있고, 호기심이 생기겠느냐고. 그러니 어둠 속에서 길을 더듬어 나가듯 그렇게 더듬더듬 살아보는 게 삶이 아니겠느냐고. 그러다 보면 예기치 않았던 선물도 받고, 아니면 허방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지 않겠느냐고. 그게 아름다운 삶이 아니겠느냐고. 늙어 내 삶은 찬란했었노라 자랑삼아 이야기하지 않겠느냐고. 그게 살아 있는 존재가 치러내야 할 숙제가 아니겠느냐고 말해주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의 음성이 차분해졌다. 나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녀의 힘듦이 내 삶의 엄살을 바로 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삶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위로를 받는 거. 그래서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거. 그러니 어떡하든 살아지는 모양이다. 그녀의 내일 또한 분명 어제와는 다를 터이다. [[은미희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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