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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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꿈의 대화/문화일보 [2008-06-19]

忍齋 黃薔 李相遠 2008. 11. 26. 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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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꿈의 대화
얼마만큼의 용기가 있어야 30년 가까운 세월의 일상을 한순간에 뒤집을 수 있을까. 지난해 큰언니는 인생의 황금기를 모두 바친 교직을 과감히 정리하고 스스로 실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마치지 못한 공부를 하느라 가족과 떨어져 혼자만의 생활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한숨부터 내쉬셨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팽개치고 나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데 늦은 나이에 그렇듯 홀로 나와 또다시 공부라니,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다달이 받는 연금의 액수도 훌쩍 늘어났을 텐데 그 새를 참지 못하고 서둘러 사표부터 낸 게 못마땅하셨다. 설령 그만두었더라도 편하게 지낼 일이지 공부는 무슨 공부고, 또 그 공부를 한다며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웬일이냐며 마뜩찮아 하셨다.

어머니에게 큰언니는 당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부잣집 딸로 호강하며 지냈지만 여자들이 공부를 많이 하면 오히려 불행해진다는 외할아버지의 신념 때문에 중졸이 최종 학력인 어머니는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며 당당히 살아가는 여성들을 부러워했고, 당신도 그 대열에 서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했다. 어머니는 가슴속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자신을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그 욕망을 딸들을 통해 실현하려 하셨다.

큰언니는 어쩌면 그런 어머니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큰언니에게 당신을 투영시킨 채 당신이 살고 싶은 대로 큰언니가 살아주기를 기대했다. 지극 정성으로 뒷바라지하면서 한 번도 힘들다 불평하지 않으셨다. 보답하기라도 하듯 큰언니 역시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렵다는 학교도 척척 들어갔고, 늘 장학금을 타왔으며, 졸업 후에는 학교 선생님으로서 당당히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큰언니가 어머니에게 상의 한마디 없이 사표를 쓰고 학교를 뛰쳐나왔으니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다. 어쩌면 배신감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키우고 학교 선생님을 만들었는데. 내심 분노도 일었을 것이다.

언니의 소원은 대학교수였다. 소녀 시절부터 갖고 있던 그 소원이 수정되거나 변경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꿈도, 소원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퇴색되고 잊어지련만 오히려 큰언니의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여물어지고 찬란하게 빛났다. 그 꿈은 증식되고 또 증식이 돼서는 중학교 국어교사로 시나브로 늙어가던 큰언니를 괴롭히고 초조하게 만들었다. ‘여우와 신포도’라는 교훈적 우화도 큰언니에게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큰언니에게 교수라는 직업은 여전히 매력적이고 빛나 보였다. 큰언니의 그런 우직함과 항상성이 의연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교사의 신분에서 벗어나 나이든 아줌마로 살아가는 삶이 꼭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주변의 은근한 협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큰언니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고는 사표를 내던지고 룰루랄라 홀가분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하긴 그 속내를 어찌 알겠는가. 아무리 고집이 세고 의지가 굳세다한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지켜온 일상의 습관들을 한순간에 버릴 수 있겠는가. 큰언니 역시 표현은 하지 못하지만 어느 한 구석은 허전할 것이다.

어쨌거나 어머니는 큰언니가 살고 있는 집과 형편을 보고 싶다며 나를 앞세우셨다.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달팽이처럼 살아가고 있는 큰언니는 적당히 외로워 보였고 적당히 힘들어 보였으며 적당히 행복해 보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외로움이 삶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병이겠으나, 어떤 이에게는 그 외로움과 적막함이 지친 삶을 위로해주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언니의 너그러워진 표정을 본 것만으로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 못하셨다. 교수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벌써 늙어버린 딸이 저렇듯 행복해하는데 무얼 더 바라겠는가. 어머니는 그제야 실망과 한숨을 거두고 웃음을 지으셨다. 그래, 늦었지만 한번 해봐라. 격려도 잊지 않으셨다. 큰언니가 그 꿈을 실현할지, 못할지는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생에 꿈이 있다는 건, 오늘 하루를 그 꿈을 위해 투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한데 내 꿈은 무엇이었더라?

[[은미희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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