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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아름다운 사람 |
얼마 전 살아가는 문제로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 한 화백을 만났다. 잠자리를 즐겨 그리는 그 화백은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장영일 화백. 그는 자신의 전생은 잠자리였고, 앞으로도 잠자리로 살 거라며 웃었다. 눈망울이 커다란 잠자리. 그의 그림에는 어김없이 잠자리가 날고 있거나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고, 햇빛이 환한 바위 위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고 있기도 했다.
작은 몸피에 단발머리를 하고 표정이 순해 보이는 그 화백은 몇 번이나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었노라고, 해맑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어 집을 나와 방황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했다. 한데 기실은 죽어 슬픈 기억으로 남기보다는 어딘가에서 고운 모습으로 남아 있고 싶다고 고백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는 모든 걸 자연에 맡기고 담담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 의연한 자세에, 무심한 태도에 죽음이 그를 놓아준 모양이다.
그 화백은 아버지의 후배였다. 웃음이 푸진 데다 말소리가 작고 자분자분해 주의를 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놓치고 마는 탓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화백은 이야기 도중에 웃음 띤 표정으로 나에게 야단을 쳤다. 어찌하여 아버지를 그렇게 부끄럽게 여기느냐고. 그간 내가 이런저런 글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이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무명의 화가, 말년에는 중풍으로 반쪽이 마비되면서 거동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붓을 놓았고, 반신불수의 몸을 타인들에게 들키기가 싫어 그렇게 집 안에만 계셨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화단에서 잊어진 존재가 됐다.
한데 내가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겼던가. 무명의 화가.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내가 암암리에 창피하게 여겼던가. 아니었다. 나는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꿈이 좌절된 것에 대해, 아버지의 삶이 쓸쓸한 것에 대해 슬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눈에 그리 비쳤다면 그런 것이다. 말 한마디, 글 한 줄 조심스러운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내 손을 떠난 글들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이 아닌 것이다.
모든 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오독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와는 상관없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온전히 읽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나에게 부끄러웠고,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웠다. 내 존재의 근원인데, 내가 자랑스러워하지 못했으니, 그게 더 부끄러웠다. 그 화백은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일화를 들려주기도 하고, 아버지를 옹호하기도 하며 그 옛날을 그리워했다. 순수했던 시절의 그 열정들이 그립노라고 했다.
그 화백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내게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흔쾌히 도움까지 주기로 한 것이다. 이제까지 열심히 살아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 가상한 각오와 결기가 일었다. 그래, 이제부터 초심으로 돌아가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자, 가슴에 맺히는 각오가 비장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화백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
‘절대 비겁하지 마라, 그러면 최고가 된단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것은 나 자신의 의지란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어떤 격려보다도, 칭찬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비겁했던가. 그랬다. 나는 그간 삶에 참 많이 비겁했다. 싸움이 싫다는 이유로 에둘러 도망쳤고, 적당히 내 자신과 타협했으며,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여우의 신포도였다. 그것들은 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욕이라 하여 내 안의 욕심을 덜어냈고, 탐욕을 경계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속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정직하고자 했다. 그게 이제까지 나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다. 한데 그것 또한 비겁한 일이 아니었을까. 상실감을 무욕의 가벼움으로 미화시키는 거. 가장 위대하고 강한 것은 나 자신의 의지라 했으니 이제부터 비겁하게 살지 말아야겠다.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도, 삶도, 글도, 아금받게 쥐고 살아갈 것이다. 그게 비겁한 게 아니라면….
[[은미희 / 소설가]]
작은 몸피에 단발머리를 하고 표정이 순해 보이는 그 화백은 몇 번이나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었노라고, 해맑게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어 집을 나와 방황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고 했다. 한데 기실은 죽어 슬픈 기억으로 남기보다는 어딘가에서 고운 모습으로 남아 있고 싶다고 고백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는 모든 걸 자연에 맡기고 담담하게 살았던 모양이다. 그 의연한 자세에, 무심한 태도에 죽음이 그를 놓아준 모양이다.
그 화백은 아버지의 후배였다. 웃음이 푸진 데다 말소리가 작고 자분자분해 주의를 하지 않으면 이야기를 놓치고 마는 탓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화백은 이야기 도중에 웃음 띤 표정으로 나에게 야단을 쳤다. 어찌하여 아버지를 그렇게 부끄럽게 여기느냐고. 그간 내가 이런저런 글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내용이 마뜩찮았던 모양이다. 무명의 화가, 말년에는 중풍으로 반쪽이 마비되면서 거동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붓을 놓았고, 반신불수의 몸을 타인들에게 들키기가 싫어 그렇게 집 안에만 계셨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화단에서 잊어진 존재가 됐다.
한데 내가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겼던가. 무명의 화가.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내가 암암리에 창피하게 여겼던가. 아니었다. 나는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아버지의 꿈이 좌절된 것에 대해, 아버지의 삶이 쓸쓸한 것에 대해 슬퍼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눈에 그리 비쳤다면 그런 것이다. 말 한마디, 글 한 줄 조심스러운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내 손을 떠난 글들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이 아닌 것이다.
모든 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오독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와는 상관없이, 내 의도와는 다르게, 온전히 읽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나에게 부끄러웠고, 아버지에게 죄송스러웠다. 내 존재의 근원인데, 내가 자랑스러워하지 못했으니, 그게 더 부끄러웠다. 그 화백은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일화를 들려주기도 하고, 아버지를 옹호하기도 하며 그 옛날을 그리워했다. 순수했던 시절의 그 열정들이 그립노라고 했다.
그 화백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내게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흔쾌히 도움까지 주기로 한 것이다. 이제까지 열심히 살아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 가상한 각오와 결기가 일었다. 그래, 이제부터 초심으로 돌아가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자, 가슴에 맺히는 각오가 비장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화백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한 통 받았다.
‘절대 비겁하지 마라, 그러면 최고가 된단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것은 나 자신의 의지란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어떤 격려보다도, 칭찬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비겁했던가. 그랬다. 나는 그간 삶에 참 많이 비겁했다. 싸움이 싫다는 이유로 에둘러 도망쳤고, 적당히 내 자신과 타협했으며,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여우의 신포도였다. 그것들은 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과욕이라 하여 내 안의 욕심을 덜어냈고, 탐욕을 경계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속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정직하고자 했다. 그게 이제까지 나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다. 한데 그것 또한 비겁한 일이 아니었을까. 상실감을 무욕의 가벼움으로 미화시키는 거. 가장 위대하고 강한 것은 나 자신의 의지라 했으니 이제부터 비겁하게 살지 말아야겠다.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랑도, 삶도, 글도, 아금받게 쥐고 살아갈 것이다. 그게 비겁한 게 아니라면….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9-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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