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보위부에 호출됐을 때

忍齋 黃薔 李相遠 2009. 4. 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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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에 호출됐을 때
 


현대아산 직원 유모씨가 개성공단에 계속 억류 중이다. 지난 1일 우리 정부 소식통은 평양에서 보위부 소속으로 보이는 참사 한 사람이 유씨를 조사하고 있는데 이번 일을 정치문제화하려는 속셈인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보위부'란 저승사자 비슷한 공포의 대상이다. 그쪽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늘 "어디 가서 '말'조심 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어디 가서 부모가 한 말을 전하다가 가족이 수용소에 끌려간 예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북 철산의 한 학생은 할아버지가 "남조선 태극기를 가지고 있다"고 떠들다가 선생의 신고로 보위부의 가택수색이 벌어졌고 결국 온 가족이 수용소로 압송됐다.

수용소에 끌려온 상당수의 죄수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남조선이 많이 발전했다는 말을 했는데 남조선 '도주' 기도로 보고돼 끌려온 사람도 있었고, 김일성이 '쥐띠'니까 김정일보다는 인민에게 먹을 것을 잘 물어오겠다고 농담한 점쟁이 할머니도 수용소에 끌려와 있었다.

북한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보위부에 호출당해 본 추억이 있다. 마치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보위원 면담 후에 보위부 감옥으로 끌려가면 최소한 수용소행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언젠가 보위부로 호출당했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1990년 초 어느 날 요덕군 보위부에서 인민반장을 시켜 연락이 왔다. 군(郡)행정위원회 어느 방으로 몇시까지 출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런 문패도 없는 그 방은 보위부 전용 비밀 아지트인 것 같았다. 북한에서 보위부 호출을 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이 좌우될 만큼 무시무시한 것이어서 그 전날 밤부터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내가 어디서 무슨 말실수를 한 것이 없는가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그날 담당 보위원은 나에게 "언제 어디서 남조선 방송을 들은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없다"고 하자 탁상을 내리치며 죽고 싶으냐고 협박했다. 그래도 없다고 하자 그는 수첩을 꺼내 들고 내가 친구들과 함께 라디오를 몰래 들었던 그때의 상황을 재연하기 시작했다. "몇시 몇분에 이런 말을 했고, 또 무엇을 먹었고…." 그 순간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는 사시나무 떨 듯했다. 나 자신도 생각나지 않는 모든 것을 보위원은 알고 있었고, 그의 손에 나의 생사 운명이 달려 있었다. 다행히도 뇌물에 눈이 어두운 자여서 돈으로 매수해 풀려날 수 있었지만 일본의 친척들이 보내는 돈이 없었다면 다시 수용소에 끌려가 평생 그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었다.

북한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는 보위부 공포를 체험한 외부 사람도 꽤 있다. 김정일에 의해 납치됐었던 신상옥 감독이 북한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다가 보위부에 붙잡혀 수용소 체험을 했었고,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다가 북한에 끌려간 김동식 목사는 끝내 보위부 감옥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동영상으로 찍어 몰래 외부로 유출했던 탈북군인 강건씨는 북한 내부인과 연계하다가 보위부 덫에 걸려 끌려가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후 생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최근 탈북자들과 북한 내의 열악한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북중(北中)국경을 찾았던 미(美) 국적의 두 여기자와 현대아산의 남측 직원이 북한체제를 음해하고 탈북을 유도했다는 혐의로 보위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다행스럽게도 모진 고문을 받거나 수용소로 끌려갈 위험은 없다. 외부에 노출된 사람에게 자신들의 잔악성을 보여줄 북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을 계기로 보위부에 잘못 걸려 처참하게 죽은 많은 사람에게도 국제사회가 관심을 좀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강철환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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