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푸른광장> 있는 그대로 보기/문화일보 [2009-07-02]

忍齋 黃薔 李相遠 2009. 7. 8.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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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있는 그대로 보기

 

얼마 전 친구가 얼굴 좀 보자며 나를 불러냈다. 그녀의 음성에 날이 서 있는 것이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액정 화면에 그의 전화번호가 뜰 때 나는 잠깐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당장에 해야 할 일이 많았고, 또 어떤 식으로든 지루할 정도의 고요한 일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친구는 잘 살고 있을 때는 소식이 없다가도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전화를 해서는 이쪽의 사정은 생각지도 않은 채 하소연을 하고 눈물바람을 해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꼭 그 친구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잠시 주저하다 휴대전화의 폴더를 열었다. 친구가 좋다는 게 무엇이던가. 게다가 힘들 때 누군가가 내 편이 돼 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던가. 그 누군가가 필요한 시점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는 당장에 봐야 한다며 나를 불러냈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 한 잔 마실 새도 없이 다짜고짜 하소연부터 늘어놓았다. 남편 이야기에서부터 자식 이야기까지, 그 친구는 가슴에 맺힌 말을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입 다물고 앉아서 그 친구가 하는 말을 듣고만 있었다. 쉬지 않고 제 말만 하는 양이 그 친구 역시 타인의 충고가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쓰레기통이 필요했고, 그 쓰레기통으로 내가 낙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충실히 내게 부여된 쓰레기통 역할을 감수해내고 있었다.

 

이야기인즉, 남편의 요즘 행적이 수상하고, 아이들 또한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친구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들어가며 자신의 의혹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일을 핑계로 남편은 매일 열두시를 넘겨 귀가했고, 아이들은 번번이 학원을 빼먹고 거리를 배회한다고 했다. 그 행방이 묘연한 시간 동안을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구성해내는 친구의 상상력은 놀라웠다. 소설을 쓰는 나보다도 오히려 그럴 듯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사실화했다.

 

한데 친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행여 이 친구가 너무 앞서 생각하지나 않는지…. 남편이나 자식은 그게 아닌데, 이 친구가 매사를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예단하고 있지나 않는지. 왜 그러지 않던가. 한번 잘못 끼워진 단추는 계속 잘못 끼워지며, 한번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 이야기는 자꾸 곁가지를 치고 무성하게 자라 한편의 완벽한 이야기로 탄생이 되지 않던가. 그 친구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생활에 지친 나머지 신경이 예민해져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거기에 나름대로 이야기를 덧대고 윤색하다 보니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이 사실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동안에 부부 사이도 소원해진 듯했다. 아이들도 자꾸만 짜증이 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갈 기회만 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지나치게 본인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쓸데없이 앞질러서 생각하고 판단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친구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심정적으로 동의해 주고, 제 편을 들어주길 바랐는데, 편은 안 들어주고 완곡한 표현으로 나무라니, 내심 서운하기도 했을 터다. 그렇지만 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일러주고 싶었다. 예단의 폐해는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을까. 그 친구의 성급한 짐작에 가족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는 언제나 현상에 무언가 의미를 얹히고,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투쟁의 빌미로 삼는다. 나 역시 나의 잘못된 예단으로 인해 몇 번 낭패를 겪기도 했다. 하긴 자의식이 있는 한 누구도 예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 아이의 시각처럼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도 때론 필요한 일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잃어 버린 게 아닌가.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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