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살풀이

忍齋 黃薔 李相遠 2009. 6. 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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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살풀이

 

 왜 이리도 하늘은 맑고 화창한지. 하늘은 맑되 땅은 검고 마음은 우울하기만 하다. 하긴, 그 땅의 물결이 어찌 다 같은 검은빛이었으리. 저마다의 스펙트럼에 따라 그 빛이 다 다른 것을. 살아서는 그토록 외롭게 하고 미워하더니 죽어 이 무슨 호들갑이란 말인가.

 

 그토록 그를 미워했던 자와, 그토록 그를 두려워했던 자와, 그토록 그를 따르던 자가 한 자리에 나와 나란히 앉아서는 무슨 애도를 하고 무슨 추모를 한단 말인가.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람이 무슨 염치와 얼굴로 그 죽음을 애통해한단 말인가. 골방에 숨어 잘못을 빌고 분노에 찬 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음 길을 찾아야 할 것을.

 

 이것은 음모다. 그의 죽음을 박제화 시키려는 또 다른 음모다. 식순에 따라 헌화하고 분향하는 것으로 왜 우리들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받으려 하는가. 이것은 그 죽음의 무게와 의미를 희석시키려는 음모다.

 

 이러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생전 그를 외롭게 했던 것처럼 그렇게 보내야 했다. 조금은 그를 비난하며 좀 더 영악하지 못한 그를 원망하며 그렇게그렇게 그를 외롭게 보내야 했다. 힘겹게 써내려갔던 유서 그대로 조용히 치렀어야 했다. 죽어서 그렇게 한줌 재와 자그마한 비석으로 남아 오래토록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혀야 했다. 노무현 이름을 대할 때마다 가슴에 박힌 가시로 살아 그렇게 아프게 만들어야 했다.

 

 헌데 이 무슨 살아있는 자들의,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살풀이란 말인가. 그가 벗어놓고 간 그 가시면류관을 살아있는 자들이 쓰고 한평생 괴로워해야 하는 것을. 나또한 그 죽음에 일조를 한 죄인이니, 어찌 얼굴 들어 이 죽음을 보낼까. 그의 죽음을 그대로 보내지 못하는 우리는 여전히 비겁하나니 또 다시 부끄럽고 애통할 뿐이다. 

 

 서울광장 앞의 저 자유로운 결집에 눈물이 돈다. 노랑과 검은 물결의 저 도저한 아름다움이라니. 부끄러움이라니. 비겁함이라니. 한 사람이 모여, 모여, 커다란 강을 이룬 저 사람의 강이, 저들의 노래가, 권력을 지닌 자들의 엄숙한 묵념보다 더 위대하다.

 

 그 군중들의 머리 위를 노란 풍선이 홀씨처럼 떠돈다.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가벼이 날아다닌다. 그의 넋이 노란 풍선처럼 우리 위를 떠도는 것 같다. 사랑은 저런 것이다. 막아도 막아도 막힘이 없는 대기와 같은 것.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는 것이다.

 

 진즉에 그랬어야 했다. 죽어 보내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살아 그를 응원해야 했다.

 

그가 말한다. 그가 웃는다. 이제 죽어 영상으로만 남은 그가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바보가 좋다고, 바보라는 별명이 좋다고. 그래, 그는 바보가 맞다. 바보여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집 딸과 결혼했고, 바보라서 험한 길로만 뛰어들었고, 바보라서 죽어야 했다. 바보라서 우리가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우리가 바보가 되자. 미안해하지 마라, 원망하지 마라, 하였지만 미안해하고 원망하련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무기력함을 자책하고 당신의 죽음을 받아들일지니, 당신은 편히 쉬시라. 당신의 그 당부에도 우리는 정치적 치매와 거짓 약속의 환상에서 벗어나 당신이 걸어 온 그 길을 되새기련다. 죽음으로 지키려 한 당신이 꿈꾸는 세상을 이으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하였으니, 당신은 이제 그곳에서 편히 쉬시라. 이승에서 당신이 할 일은 다하였으니, 이제 당신은 편히 쉬라.

 

 다만 이 애도열기가 일회적 감상이 아니기를. 또다시 잊고 마는, 몽매한 슬픔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가 다시 사는 길은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다. 잘 가시라. 잘 쉬시라. 우리의 애도를 길라잡이 삼아 부디 좋은 세상으로 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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