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김성숙 선생님>이 회고하는 1980년 5월 18일의 전주

忍齋 黃薔 李相遠 2009. 8. 1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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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 선생님>

 

“그날의 일을 ‘해석’하는데만 20년이 훌쩍 지나갔어”

 

김성숙씨는 박정희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순진했던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80년 5월 초, 대규모 시위에 참여했다가 박정희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인 공포를 경험합니다.

 

‘사람이 이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그날의 경험은 그녀를 전북대 농성장의 학생들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시위 학생들의 밥을 해주기 시작했습니다. ‘조직’이나 ‘사상’ 같은 것은 잘 몰랐습니다.

 

단지, 고생하고 있을 학생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5월 18일 자정을 전북대 농성장에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 ‘그날’ 함께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때까지 그녀는 ‘그날’의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무서워서 감히 입 밖에 꺼내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시와 압화와 신영복이라는, 그녀가 말하는 ‘내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를 통해 서서히 그날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고 있습니다.

 

<약력>

1977년 성심여자 고등학교 졸업

1979년 전북대학교 문과대 국어 국문학과 입학

1980년 5월 2일 도청집회 참여

1980년 5월 시위 현장에 참여

1980년 5월 18일 새벽 전북대 농성장에서 연행

1980년 6월 7일경 풀려남

1982년 졸업

2000년 5.18 유공자 4차 선정

현재 전주시 효자동에서 김성숙 논술학원 운영

 

“박정희가 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였어요”

 

저는 성심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했으면 77학번이어야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79학번으로 전북대 문과대에 입학합니다.. 대학에 갔고, 대학 생활 시작하고 굉장히 어색하고 그런 대학 생활을 1년 하다가 10월 달에 박정희가 죽죠. 굉장히 놀랬어요.

 

박정희가 죽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였어요. 그냥 영원히 대통령 할 줄 알았거든요, , 18년 동안 대통령 했으니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대통령이었거든요. 그 충격에 대한 건 굉장히 좀, 박정희가 죽자 갑자기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됐어요. 박정희가 죽은 다음 이 세상은 그럼 어떻게 될까 그런 거 있잖아요.

 

박정희 죽으면서부터 11월 되면서. 그래서 대학교, 어렵게 들어간 대학교 1학년 10월 달부터 11월부터 우리는 계속 노는 거야. 나중에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정리가 다 되고서. 그니까 수업도 없고 아이들도 만나지도 못하고 우리같이 가난하고 이런 대학생들이 제일로 가기 좋은 곳이 도서관이잖아. 도서관에 가면 잡지 있지 비싼 책들 많이 있잖아. 그런 책들 보는 게 우리들의 취미생활이야. 그래서 도서관에서 모였어요.

 

근데 그러면서 2학년 되고 굉장히 사회가 어떻게 될까 불안하고 궁금하고 자연스럽게 시사를 다룬 신문을 유심히 보게 되고 세상 돌아가는 거 그러면서 눈뜨게 되는 거예요. 사회에 대해서 내가. 박정희 죽음 때문에. 그동안은 그저 사회라는 건 안정된 곳이었어요.

 

내가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못 갔거든요, 그때 유신헌법 때문에. 그때도 나는 대학생들이 데모한다, 이런 말 들을 때 그것은 먼 아득한 저쪽 그림 이야기였는데, 그때부터 눈 뜨게 됐어요, 사실은. 나중에 들어보니까 고등학교 데모도 하고 그랬다는데 난 전혀 그러진 않았고 박정희 죽음으로 이 사회가 과연 어떻게 될까 관심을 갖고 그러면서 3월에 대자보들이 막 붙게 돼요.

 

80년 3월에 2학년이 되어 학교에 가니까.

“80년 3월에 전두환이는 잘 몰랐어”

그때 내가 2학년. 공부도 안하고 올라간 거야, 2학년. 학교는 수업하러 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술렁술렁하고 대자보 큰 정말 이따만한 흰종이 엄청난 사연들, 전두환 얘기도 나왔고 좀 웃겼던 것은 누가 3.15 부정선거, 신현학. 신현학 국무총리였어요.

 

생각해 보면 지독한 거야. 신현학 씨가 죽은 지 몇 년 안돼요, 2,3년 밖에 안돼요. 오래 살았더라고. 근데 우리 구호가 신현학 물러나라, 왜냐면 전두환이 팍팍 올라올 때가 아니야. 국보위의 어떤 장교고 윗선에서는 알 수 있어도 우리 같은 일반 학생들 입장에서는 시대를 못 읽으니까 그냥 전두환보다는 박정희 시대 때 원흉들 있잖아. 그들 물러나라 이런 구호도 참 많이 외쳤어요, 그 당시에.

 

신현확 씨가 3.15 부정선거의 주역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 당시에 신현학 물러나라 그런 구호를 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면서 그렇게 4월을 보내요. 근데 4월도 뭐가 있었냐면, 그 동안에는 학생회장을 전부다 ROTC들이 했어요. 학생들이 안 뽑았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학생회장을 우리가 뽑았어요.

 

그때 당선된 게 김희수씨예요, 전주고. 내면적으로는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어쨌든 간에 학생이 뽑은 김희수씨가 4월 며칠인가 당선되자마자 바로 며칠 지나고 구속돼요. 그게 어떻게 보면 약간 기폭제가 돼요. 회장이 구속되었다. 김희수씨는 사실 학생회장이 되고 별로 학생회장으로서는 뭘 하지 않고 바로 구속되고 그 뒤로 학생회장이 없는 상태에서 전북대 데모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건 나중에 안거야.

“학생들이 막 도청으로 모여라”

나 같은 사람은 대자보 열심히 읽고 학생들 앞에서 구호 외치는 사람들 이광철씨 연설 듣고 주변에서 참여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5월 2일인가 굉장히 큰 데모가 있었어요.

 

도청 앞에 정말 그 장면이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학생들이,... 이런 얘기 하면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항상 그래요, 참 이상하지. 학생들이 막 도청으로 모여라,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전부 다 도청으로 가서 전부 모여 앉아있는데 그때는 그 장면이 그 공간이 너무 넓었어요, 그때 기억으로는. 근데 지금 가보니까 넓지도 않아.

 

옛날 도청 앞에. 거기에 모였는데 경찰들이 저쪽에 페퍼포그를 딱 세우고 있는 거야. 경찰들이 우리 주위를 어느 순간 보니까 싹 감싸고 오는 거예요. 굉장히 두려웠어요, 그때. 광장에 앉아있는데 저쪽에 페퍼포그차가 와있고 우리를 주변으로 슬금슬금 경찰들이 곤봉 이따만거 들고 파란색 옷 있잖아, 경찰옷. 경찰이 우리 주변을 도는데, 아 이 상황에서 이거 정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구나.

 

굉장히 두려웠어요. 그동안 데모는 그런 두려움은 없었어요. 그냥 길거리에서 스크럼 짜고 하니까. 그때 위성으로 사진 찍으니까 모자를 써라, 이런 말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까. 길거리에서 남도주요소에서 스크럼 짜서 나가고 하는 그런 과정은 그렇게 두렵지는 않았어요.

 

근데 그 날 도청에 앉아있는데 굉장히 두려웠어요. 공권력이라는 것이 우리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자 페퍼포그 앞에 남학생둘이 누웠어요. 이걸 페퍼포그가 올거면 우리를 깔아뭉개라, 근데 거기서 나오는 완전 매운 가스 때문에 누워있을 수가 없는 거야, 그 남학생들이. 우리도 마찬가지고. 가스가 팍팍팍 나오면서 순식간에 광장을 메워버리는데 그 가스가 보통 최루탄 가스는 우리가 많이 맡아봐서 알잖아요.

 

눈까지 매우고 정말 지독한 가스였어요. 그래가지고 우리도 모르게 그 많은 학생들이. 그러면서 경찰들이 때리면서 오는 거야, 조여 오는 거야. 우린 도망가야 돼, 우리는.

“아 이렇게 죽는구나 사람이”

근데 거기 생각해봐. 갇혀 있잖아. 도망갈 데가 어디 있어. 독안에 든 쥐였어요. 그래가지고 그때 정말 전북대 많은 애들이 실려 갔어요.

 

잡혀가고 맞아서 실려 가고. 근데 나 같은 경우는 그날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뛰었죠. 뛰었는데 쫓아가니까 도착해서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어서 누워버렸는데 거기가 강당이야. 상무대 강당이라고 해, 난 나중에 알았는데. 그 뒤에 상무대라는 경찰들 훈련하는 그런 강당이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목적 없이 앞사람 보고 뛰었는데 상무대 강당인데 내가 그 강당에 누워버렸어요. 아 이렇게 죽는구나 사람이. 이런 생각이 들면서 뛰었죠. 뛰었는데 너무나 독한 가스 때문에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서 누워 있는데 그때 누워있는데 천장에 학생들이 매달려 있는 거야.

 

근데 어떤 학생이 와가지고 여기 있으면 지금 경찰한테 잡힌다 빨리 도망가야 한다 그래가지고 다시 또 학생들이 점프해가지고 철문 있잖아, 철문으로 막아 놓은 데를 위로 올라가서 건너가지고 나중에 천변 쪽으로 도망을 가서 집에 왔어요, 그날.

 

굉장히 정말 나한테는 특별한 경험이었어. 아 이렇게 쫓길 수 있구나, 많이 쫓겨봤죠, 사실은. 하지만 정말 구체적으로 쫓겨본 건 그 날 경험이에요. 그런데 그 날 소문이 김성숙이 맞아서 병원에 입원했다 소문나고 나 아는 애들은 전북대병원도 가보고 그랬다고 그래요, 나중에. 보니까 병원 복도에 학생들 맞아가지고 피 흘리고 그때 얘기를 하더라고.

 

“얘들은 밥을 어떻게 먹나 궁금해서 한 번 들여다봤어요”

 

그러고서 5월 2일 날 농성하는 학생들 밥은 어떻게 먹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말하자면 총학 말고 앞에서 지도하는 학생들 농성을, 계속 저희들은 학생회관에서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얘길 하거든. 그런데 그런 말이 한 번도 내 귀에 내가 한번 들여다봐야지 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냥 그건 그걸 하는 애들이고 나는 이 정도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5월 2일 날 그렇게 하고 와서는 도대체 얘들은 밥을 어떻게 먹나 그러면서 한 번 들여다봐요, 주방을. 학생회관 주방을. 학생회관 1층. 농성장은 2층인가 3층이었고 그 아래 1층이 학생회관 식당이 있었어. 그래서 데모하고 농성하는 애들이 거기서 밥을 먹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나중에 안거야. 나는 대체 쟤네들이 어떻게 밥을 먹고 일하지 궁금했어. 그런 것이 궁금하면 안됐는데 궁금한 거야.

 

그래서 친구하고 둘이 주방에 가니까 주방 꼴이 어쨌냐면 정말 아줌마하고 여학생회장하고 둘이 하는데 그 당시에는 여학생회가 선거가 있었잖아. 여학생회는 알뜰하게 뭔가 하는 줄 알고 사소하게 도와주러 간거에요, 그냥. 그런데 여학생회 학생들이 하나도 안 나온 거야. 여학생 회장 혼자서 정신이 없고 아줌마 하나하고 주방 아줌마.

 

일을 하는데 설거지가 정말 산같이 쌓여있는 거야. 왜냐면 학생들이 와서 계속 밥을 먹어야 되잖아, 걔네들. 그때 그 상황에서 설거지를 하게되요. 그냥 나올 수가 없는거지 왜냐면 눈에 일이 보이잖아.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우리 집이 법원 앞이니까 전북대하고 가깝잖아. 법원 앞에. 지금도 거기 살아. 전북대하고 가까우니까 아침밥을 할 수 있잖아. 얼마나 했는가는 기억이 안나. 아무튼 5월 17일 밤저녁과 18일 아침을 내가 맡았어.

 

“말은 학내시위지만, 그것도 민주화시위였어”

 

5월 2일 날 구체적으로 집회가 촉발되게 됐던 어떤 계기나 그 날 구호는 내가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간에 민주주의 일정을 확실하게 하라 그게 그 당시 학생들의 굉장히 중요한 일이였어요. 왜냐면 국보위나 이런 애들이 민주주의 일정을 내놓지 않는 거야. 걔네들은 이미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계획을 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일정이 나올 수가 없었잖아요.

 

근데 우리 학생들은 그게 두렵잖아요. 민주주의 일정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일정을 빨리, 예를 들어서 언제 뭘 하고 언제 총선하고 이런 거 있잖아요. 박정희가 없으니까 지금. 그 일정을 내놔라 이런 것이 중요한 거였고 그 당시에 다른 대학은 학내 시위가 많았어요, 원대나. 학내 비리가 많잖아. 독재자 밑에서 기득권자들이 얼마나 비리를 많이 저질렀겠어. 독재자가 죽으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부글부글 올라온 거야.

 

사실은 그러니까 말은 학내시위지만 그거 자체도 민주화 시위에요, 내가 볼 때는. 그래가지고 원광대, 전주대 그 다음에 공전, 전주공전이라고 하는 대학 이런데 학생들 알게 되는데 그들도 학내시위를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학내시위, 이사장 물러나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독재에 대한 반기라고 생각을 해요. 박정희 시대 때는 그런 말을 못했어. 이사장 권위에 도전을 못했잖아요. 그러면서 온 사회가 다 그렇게 부글부글 끓었던 거죠, 그때. 굉장했죠.

 

“17일 밤, 정말 좋았어요”

 

서클활동이라고 하면은 SBF라고 대학생 성경읽기선교회였는데 1학년 때 거기를 열심히 나가다가 겨울방학 때쯤 해서 또 이렇게 기도만 하고 이런 거에 대해서 나를 보상하기가 어려웠어요. 서클 이런 것은 나하고 안 맞았어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태에 밀려서 데모하다가 주방과 함께 아 이 사람들 설거지라도 도와줘야겠다, 라고 하면서 그냥 5월 17일 밤을 맞이하는 거예요.

 

굉장히. 17일 밤 날씨가 정말 좋았어요. 또 학생들이 5월 15일 엄청난 데모가 있었고 우리는 고급정보가 없으니까 그런 건데 이미 서울대나 이런데 서울 애들은 이미 전두환이 한번 온다, 언제 저들이 꼭 온다, 한번 들어온다 이런 것이 다 있었다고 해요. 우리는 그런 걸 전혀 모르고 그냥 무작정 내 책임감으로 하는 거야.

 

5월 17일 밤. 그러면서 그 날 저녁에 상추쌈이야 뭐야 맛있게 먹었어요. 그러자 남문교회에서 김치를 한 수대 갖고 왔더구만 그때는 수대라고 그랬어요. 이렇게 이렇게 긴 이런 게 있었어요. 수대. 우리가 수대라고 손으로 드는 어떤 지금은 물통 같은 개념인데 그때는 거기에다가 김치도 담아왔고 중부교회 그 당시에 기장교회들 있잖아, 기독교장로회. 기장교회들이 그런 식으로 교회에서 왜냐면 학생들 김치 먹어야 되잖아요. 그런 장보기를 하고 그랬죠.

 

그러면서 17일 밤에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그날 죽은 이세종이 중부교회 합창단이에요. 그래서 이세종이 노래도 잘하고 음감도 있고 그런 애야. 그런데 방송부에서 내일 쓸 데모가를 녹음할 테니까 몇 명 좀 같이 가자해서 나 같은 애들은 데모하는 남자들과 전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냥 저녁에 끝나면 농성장에 있을 아무 이유가 없어요,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야 농성장에 있거든.

 

그럴만한 의식이나 이런 건 좀 없었던 사람이고 난 내 할 일을 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런데 그 녹음을 좀 하자, 그래서 한 8,9명이 녹음실을 가요, 전북대. 그 녹음실을 가서 데모가를 녹음을 하죠.

 

“세종이가 빨리 도망쳐라 지금 군인이 오고 있다 그래요”

 

녹음실이 우리가 1층 밥 먹었으면 2층인가 거기 있었어요. 그러니까 전북대학교 방송부. 방송부가 있었잖아. 지금도 방송하더만. 거기 녹음실에 가서 한 8,9명이 녹음을 하는데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그런 노래를 많이 불렀어요. 굉장히 사납게. 그런데 이세종이가 나와 가지고 이걸 사납게만 부르면 안된다, 이러죠. 그래서 이세종을 기억해요.

 

그 전엔 전혀 몰랐죠. 나중에 다 안 이름이에요. 이렇게 사납게만 부르지 말고 2부 합창으로도 한 번 불러보자. 왜냐면 데모가지만 그래도 녹음을 해서 내보내는 거니까 조금 잘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세종이가 나와서 해요.

 

나도 같이 녹음을 했어요. 녹음을 끝내고 나는 이제 가서 자야 돼, 여학생회장실에서 자기로 했어. 그 밤에 자려고 하는 사람은 나 같은 사람밖에 없었어요. 다들 모여서 얘기하고 근데 이세종이 노래를 다시 하고 다시 하고 해서 녹음을 마쳐요. 그러면서 내가 걔를 기억을 하죠.

 

나는 이세종 말이 옳다고 생각했어요. 데모가지만 화음을 넣어서 잘 불러야 한다, 생각하고 이제 우리는 여학생회장실로 자러 갈게 뭐 이렇게 얘기하면서 그때 회장실이 내 기억으로는 3층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간에 자러 가요. 그때 한 12시 넘어서 시간은 정확하지 않은데 12시 넘어서 계엄이 확대되고 바로 군인들이 들어왔다고 그래요.

 

근데 이 정도 공간에서 우리가 의자를 놓고 혜숙이하고 나하고 성길인가 셋이서, 둘이서. 김혜숙과 김성숙. 둘이서 자고 있었을 거야. 나하고 김혜숙이하고. 그런데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그런 소리가 나요. 그래서 내가 일어나서 문을 열어봐요. 잠 안 들었을 때니까.

 

그러니까 세종이가 “빨리 도망쳐라 지금 군인이 오고 있다”, 그래요. 근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도망을 어떻게 가요, 사지가 덜덜 떨리고 얼어붙어 있는데. 그래가지고는 걔네들하고 같이 그때 성길이도 있었는가봐. 서성길, 정확하지 않아, 서성길은.

“내가 과연 여기에서 우리 집으로 갈 수 있을까”

 

그래가지고는 그 안에 농성장으로 내려가요. 남학생들 있는 농성장으로 갔더니 그때 붉은 카펫이 깔려 있던 게 참 지금도 특이한데 붉은 싸구려 카펫 같은 거 있잖아. 보통 초록색을 많이 쓰죠.

 

그때 빨간색을 깔아놨던 것 같아. 빨간 카펫위로 소파 어지럽게 있고 학생들 자다 일어나고 오합지졸 같이 생긴 그런 사람들이 밝은 불 밑에서 한 20, 30명이 있었어요, 꾸물꾸물 하면서. 군인이 온대, 이러면서. 그런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잘 몰라요, 사람들이.

 

그런데 그 중에 수배자인 김운주 씨가 있어가지고 수배자였던 김운주, 지금 우리치과 하고 있어요. 근데 그 김운주 씨가 와도 돼, 어쩌고 하면서 굉장히 나는 정신적으로 너무 긴장돼가지고 이 상황을 한 번도 예상해보지 못한 상황 앞에서 내가 우리 집에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당시 전두환 하면 우리가 다 알고 있을 때거든요. 전두환 정권 앞에서 나 같은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을까 내가. 잡히면. 이런 어떤 두려움이 순간적으로 확 와요. 내가 과연 여기에서 우리 집으로 갈 수 있을까. 이런 거, 두려움.

 

그리고 엄마한테는 이런 걸 전혀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는 내가 혜숙이네 집에서 자는 줄 안단 말이야, 지금. 엄마한테는 이런 얘기 전혀 하지 않으니까. 그런 가족에 대한 두려움이 오죠. 그러자 김형근이라고 지금 국보위 구속된 김형근씨 있잖아요. 김형근씨가 그 당시 빼빼했어요.

 

말도 참 잘하고. 똑똑하고 그때 교육학과 학생인데. 그 사람이 거기 있다가, 괜찮아, 우리가 다 두렵잖아. 이럴 때는 소주를 마셔야 한다, 그러면서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서 소주를 내가 사오마, 그래요. 그래가지고 돈이 없어. 이백 원, 삼백 원씩 다 줘.

 

그 짧은 순간이지만 김형근이 그 돈을 가지고 나가고 바로 군인들이 따다다닥 소리가 나면서 정말 순간적으로 이정도 우리보다 좀 더 큰 공간에 우리 숫자만큼 군인이 들어오면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하는 거야. 엎드려, 손 올려, 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우리는 완전히 1,2분이겠지만 2,3분이겠지만 우리가 완전히 혼이 나가버리는 상태가 돼요. 우리가 제압이 돼버리는 거야, 순간적으로. 무섭죠. 거의 뭐 그냥 콱 죽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들죠.

 

왜냐면 내가 서울에서 여학생들이 데모하다 잡히면 약간 불안한 거 있잖아, 성추행이랄지. 그런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했지만 여성으로서의 두려움 같은 게 굉장히 컸어요, 그때 내가. 학생으로서의 두려움 보다, 사실은. 군인이란 존재가, 이런 것들이 있어가지고 잘 모르니까.

 

그때 서울에 여학생 잡혔을 때 철장 안에 있으면 여학생들 그때 경찰들이 긴 막대기 같은 걸로, 야 이년아 너 뭐 하러, 이렇게 놀리고 그랬다는 얘기를 들었었어요. 그런 것들이 떠올라서 굉장히 두려웠어요. 근데 이제 김형근이 바로 나가자마자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얘가 피가 팍 터져버린거야”

 

나는 그 상황에서 김형근이 걱정이 되더라고. 과연 군인들한테 잡혔으면 맞아죽었을 텐데 어떻게 됐을까 걱정이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김형근씨가 내려가자마자 군인이 오니까 자기는 사대부고로 해서 잘 도망을 갔더라고요, 두렵지만. 도망 생활했더라고. 그렇게 해가지고 우리가 다 손을 들고 이러고 있는데 정말 베레모에 총에 칼 들고 들어왔죠.

 

그럼요, 착검도 했죠. 너무 무서웠어요. 그러면서 그 들이 그 당시 뭐라 구호를 외치면서 왔어요. 이 간첩새끼들, 간첩 어쩌고. 그러면서 이제 희선이가, 문희선이라고 여학생회장이 옆에 있었는데 문희선씨가 내 옆에, 걔가 키가 커요. 앉은키가 나보다 훨씬 커, 원래 키가 크니까. 내려찍는 거야. 내려찍으려고 총 밑에 있잖아 납작한데 이걸로 한명씩 찍으려고 걔를 탁 찍은 거야.

 

그런데 얘가 피가 팍 터져버린거야, 머리에서. 내가 그 옆에 있는데 얼마나 그때 긴장되고 두려웠으면 사람들이 피가 터진 소리는 들었는데 돌아보질 못했어요. 그럼 나 죽여 버릴 것 같애. 손을 목뒤로 하고 움직이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피가 철철 나니까 , 계속 찍어가려고 했던 군인이 걔는 졸병인데 대장이 그만하라고 하고 피가 철철 나니까 나더러 이걸 싸매주라고 그러는 거야. 그런데 거기에 뭐가 있어야지. 더러운 수건 있잖아, 왜. 남자들 아무렇게나 썼던 더러운 수건, 그런 것밖에 없어.

 

그래서 일단 그걸로 라도 걔를 이렇게 해가지고 묶어줬어요, 더러운 수건. 굉장히 불안하죠, 이게 피가 계속 번져 나오니까. 그러자 너희들은 어쩌고저쩌고, 우리를 간첩으로 용공분자로 모는 것 같은 그런 말을 하면서 우리를 둘둘씩 해가지고 싹 묶어요.

 

근데 그때 박병화 씨가 그때, 이런 이름도 나중에 안거에요. 한 사람이 너무나 세게 묶은 거야. 그래가지고 내가 맨 앞에 서서 이렇게 가는데 내려가가지고 어떤 차에 우리를 싣는데 내가 맨 앞에 섰기 때문에 맨 뒤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속에 제일 먼저 들어가니까. 내가 맨 앞에 섰기 때문에 차로 들어가니까 내가 저 끝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약간 공포증 같은 게 있거든, 막힌 공간에 대한. 그 순간 숨이 안 쉬어지는 것 같고 그니깐 그 순간 그 전에는 못 느꼈었는데 그 공간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순간 산소가 부족한 것 같은 그런 거 있잖아.

 

“아 차라리 우리 이렇게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갑자기 숨이 막혀버리고 내가 저기에 가서 숨을 쉴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 잠깐이지만. 그러면서 내 기억엔 천장이 낮았던 차 같은데 뭔지를 모르겠어, 밤이라. 들어가서 차곡차곡 거기에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기 시작해요. 난 맨 뒤에 있었는데 다행히 거기에 창문이 눈에, 막아놓은 창문이 있더라고. 그런데 창문이라는 것 자체도 굉장히 위로가 되는 거야, 내가. 그래가지고 창문 뚫린 데다 코를 대고 내가 숨을 쉬었어요. .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4시간 반쯤 있었는데 내가 막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거 있죠. 갑자기 막 조여 오는 것 같고 내가 막 팍 어느 순간 터져버릴 것 같은 굉장한 그런 두려움 같은 거. 그러면서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하면서 스스로 아 우리 이렇게 확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을 해요. 너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너희들은 다 광주 상무대로 갈 거야”

 

그리고서 군인이 너희들은 다 광주 상무대로 갈 거야 이런 말을 해요. 그때 광주 상무대로 간다는 건 정말 최악의 장소로 간다는 그런 거였거든요. 데모한 애들이 다 거기다 모아놓고 상무대,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중에 전북대 그 정도에서 차가서면서 오른쪽으로 가면 광주고 왼쪽으로 가면 전주경찰서에요.

 

신호등 앞에서 딱 세우는데. 지금 구정문, 신호 딱 세우는데 사람들이 다 거기서 다들 초조하게 거기서 과연 이차가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딱 왼쪽으로 가는 거야. 아 광주로 가지 않는구나. 전주에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좀 안심이 되잖아.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전주경찰서 지하에 정보 2과안에 있더라고, 우리가. 그 정보과, 사무실. 거기 가니까 조금 뭐랄까 뭔가 좀 한 단계가 넘어간 것 같잖아요. 거기서 꼬박 일주일을 먹고 자고 하면서 조사를 받죠.

 

“계속 때리면서 그렇게 조사를 했어요”

 

주로 조사내용은 간첩, 정보과, 정보 2과가 간첩 잡는 과라고 해요. 한명씩 올라가서 니가 한 행동을 말해라, 이렇게 해요. 나는 조직이 없으니까 숨길게 없잖아. 근데 거기에는 조직원들이 많았어요. 조직원들을 숨겨야 되잖아. 그러니까 더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니까 형사들은 어떻게 이런 새끼들이 데모한다고 왔어, 이러는 거야.

 

예를 들어서 전단지가 뭐에요, 이렇게 무식하게. 그 전희남 씨, 군산민주노동당하고 진보신당하는 전희남씨 같은 사람은, 정말 일단 경찰들 남자들 조사할 때는 때리면서 조사를 했어요. 난 참 정말 그거 보면서, 야 이 새끼야 넌 이름이 뭐야, 이런 식으로. 너네 아버지 이름은 뭐야, 여자들은 안 그랬어요. 그런데 계속 때리면서 그렇게 조사를 했어요. 한 명 데려다 놓고 또 하고.

 

전희남씨 같은 경우는 그 당시 무슨, 내가 알기로 아무튼 지하조직 이런 거였어요. 그래서 계속해서 엉뚱깽뚱하게 얘기하고 아 저런 새끼들이 데모한다고 한심하다 이렇게 경찰들이 생각하게끔. 이렇게 무식하게 왜, 나 돈 받으러 갔어요, 넌 거기 왜 갔어 그러면 아니 친구가 잘데 없어가지고 거기서 밥도 주고 한다고 해서 거기 가서 잤어요,

 

이렇게. 이런 식으로, 한심하잖아 경찰들은. 실컷 잡아왔더니 이런 웃기는 놈들이 참 거기서 엄한 소리 팅팅 하고 농담하고 이러니까 어이구, 경찰들이 그러는 거야. 우리는 참 우습잖아요. 그래가지고 그때 전희남씨는 거기서 나오자마자 바로 또 데모했어요. 또 잡혀갔죠.

 

나는 그래도 그 사람 참 위대하다고 생각해. 말하자면 눌리지 않은 거잖아. 나는 너무 나는 거기 한 번 갔다 온 것만으로도 20년 동안 말을 안 해버렸잖아, 5.18에 대해서. 너무 무서워서.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살아요. 아무도, 우리 엄마도 묻지도 않고 나도 말도 안하고 그렇게 살아요. 근데 경찰서에서 그렇게 일주일 있고. 그 다음에 일주일인가 열흘인가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요. 적어놓질 않아가지고 우리가. 그냥 한바탕 있었어요, 오랫동안.

 

“너희들은 지금 역사가 판단을 못 내리고 있다”

 

있다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 밥을 경찰서에서 준게 아니라 콩나물 국밥 같은 게 왔거든요. 뭘 먹었는가 기억이 안 나는데 아침에 콩나물 국밥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 당시 교육학과 교수 중에 한 분이 이름은 지금 잊어버렸네. 빵하고 우유도 갖고 오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렇게 해서 교수님께서. 그것도 먹고. 그래가지고 다시 또 헌병대 감방으로 옮기죠, 우리가. 거기서 일주일 동안 있다가.

 

그때 정보2과 그 계장님이라고 하나 그 분이 우리한테 우리를 다 모아놓고 자네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네, 그런 말을 해요. 굉장히 비감이 들었어. 뭐랄까 우리가 꼭 역사 속에 어떤 좌표를 잃어버린 어떤 그런 사람들 같은.

 

그 분 말도, 삼오사단 소장도 그런 말을 했어요, 우리 데려다 놓고. 너희들은 지금 역사가 판단을 못 내리고 있다, 너네가 전두환이 정권을 잡으면 역적이고 예를 들어서 민주화가 정권을 잡으면 너희는 제대로 대접받는 거다, 너희들에 대한 판단을 지금 현재는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그 안에 있을 때 광주사태가 났어요, 광주혁명이. 근데 경찰 정보과장님이나 삼오사단 그 사람도 잡아는 놨지만 우리를 해산할 시기는 아니었어요. 근데 그 사이에 전두환이 잡는 거야. 우리에 대한 해석이 나온 거지. 얘네는 처야 돼. 그렇게 된 거에요. 그 과도기에 있었어요, 우리가. , 그 삼오사단 밥은 정말 먹을 수가 없었어요.

 

말하자면 죄수들 주는 밥을 주는데 여학생 일곱 명을 한군데로 몰아넣는데, 밥을 그 찐덕찐덕한 진밥에다가 카레 국물 같은걸 확 찌크려서 줘요. 그러면 우리는 굶어지더라고. 뭐랄까 정말 먹기가 너무 힘들더라고. 근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남학생들은 그것도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은 , 적응했는데 나 같은 경우는 거기서 나올 때 8kg가 빠졌어요.

 

“광주에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소장이, 헌병대 소장이 우리를 한번 불러내요. 불러내가지고, 광주에 진압군이 들어가면서 이 소장도 생각이 참 많았던 것 같아요, 우리 학생들을 보면서. 설명을 하는 거야. 지금 현재 군인이 광주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우리한테 이해를 구하는 거예요. 어쩔 수가 없다,

 

저렇게 폭도들이 저러니 군인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얘기를 해. 우리는 상상을 못해, 광주에 대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전혀 뉴스를 접하지 못하니까. 어쨌든 간에 광주란 도시가 뭔가 타깃이 되었구나, 광주가 굉장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라는 생각만 해요.

 

그리고 이제 그러고 있다가 거기에서 또 한 열흘이나 있었나. 그러고 있다가 조사해보니까 우리 같은 사람 아무 조직도 없고 그냥 말하자면 중요인물이 아니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은 내보내요, 1차로. 보안대로. 그때 보안대가 있었거든요. 엄마를 그리로 오라고 했더라고요, 가보니까. 미리 부모한테 각서를 받았더라고. 나하고 같이 각서를 쓰는 거야, 더 이상 데모를 하지 않겠다. 이런거. 도장 찍고 그리고 나와요.

 

그리고 나오는데 그러면서 나오면서 나는 5.18에 대해서는 너무 두려웠어요. 그러면서 계속 뉴스와 관심은 갖지만 그 이야기를 누구와 할 수 없어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잖아. 전두환이 이제 자리를 잡았잖아요. 광주를 그렇게 한바탕 때려 엎어버리고 사람을 죽이고 나서 얘는 그 피를 흘렸기 때문에 정권을 안 잡으면 안 되는 거야. 정권을 안 잡으면 피 흘리는 거에 대해 대가를 해야 되잖아요. 그 사람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정권을 잡아야 돼. 잡았잖아요.

 

“81년 5월이 딱 됐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꽃이 피고”

 

아무튼 전두환 정권아래서 우리는 대학을 다니면서 사복경찰들이 득실 하는 상황에서 전북대 내가 2학년 수업을가니까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았어요. 물어보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김성숙이가 잡혀갔다는 소문이 났잖아, 국문과의 이유숙하고 둘이 잡혔어, 그 당시에. 이유숙 지금 안산에 있거든.

 

둘이 잡혔는데 어떤 학생 하나도 나에게 묻지 않았어. 언니 그때 어떻게 됐어 아니면은 어떻게 그렇게 잡혀갔어 물을 수 있잖아요. 그만큼 그때 분위기가 그런 것을 물어보면 안 되는 분위기 였던 거야.

 

그런데 다시 81년도 봄이 왔잖아요. 대학교 3학년이 됐죠. 봄이 왔는데 5월이 딱 됐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꽃이 피고 정말 그때 마음이 너무 이상했어. 이 학생회관이 작년에는 일 년 전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고 이세종이가 그렇게 죽고, 이세종이가 죽었다는 건 경찰서에서 그 다음날 바로 알아요, 우리가. 한명이 죽었다고 그렇게 타살이란 소리도 듣고. 공수부대 자기들 끼리 나중에 그 안에 어제 한명이 죽었어, 그런 얘기도 들리고 그게 세종이라는 거 나중에 알게 됐죠.

 

예수병원 그 뒤로 부검을 했는데 그 사람도 그때는 타살이라고 안하고 지가 떨어져서 죽었다 이렇게 부검을 해요. 나중에 양심선언을 해요. 타살로, 그때 내가 억압에 못 이겨서 그렇게 말했지만. 그래가지고 이세종이가 광주 민주 희생자로 되고 지금 현재 광주 묘로 가는 그런 계기가 마련이 되잖아요. 그런 얘기를 해서. 근데 어쨌든 그러고 와서 아무도.

 

이세종이는 그 당시에는 농학과 3학년인가 그랬을 거예요. 농학과, 농대. 그런데 5월 17일 날 그렇게 하고 이세종이는 죽잖아요, 떨어져서.

 

끝나고 나왔어. 나와서 대학에서 아무도 분위기, 대학 분위기 정말 조용하고 서로 말 안하고, 서로. 이렇게 지나가다가 보면 쟤랑 나랑 잡혔거든. 같이 잡혔었는데 굉장히 반갑고 할 말이 많을 것 같잖아. 근데 전혀 그냥 모른 척 하고. 그렇게 세월을 보내요. 20년이 지나요.

 

“그때 세종이가 바로 그냥 농성장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면”

 

이세종이는 어떻게 죽냐면, 학생회관 안에 방마다 등사하는 애도 있고, 그때는 등사. 등사도 하고 곳곳에 박혀 있잖아. 지들끼리 또 모여서 뭔 얘기도 하고. , 세종이가 그 당시에 걱정이 된 거야, 군인은 온다고 하지 여학생회장 자러간 애도 있지, 얼른 가서 그 말 해주고 또 나와서 또 여기도 가서 쳐다보고. 그러다가 복도에서 군인과 만난 거예요. 그때 세종이가 바로 그냥 농성장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면 우리와 같은 어떤 길을 걸었을 지도 몰라요.

 

근데 사람이 따다다닥 그 군인소리, 지금도 나는 기억나거든. 걔네들 따다다닥 올라오는 소리. 그 소리를 복도에서 만나가지고 세종이가 옥상으로 올라간 거야. 옥상으로 올라가니까 당연히 따라가지. 학생이 뭔가 소리가 인기척이 나니까.

 

지금 학생 잡으러 왔는데, 안에가. 군인들이 쫙 우리한테 들어오면서 나머지 일곱 명 정도가 세종이 따라서 올라가는데 그때 등사실에 있던 이상원이라고 지금 미국에 있는 이상원이 나오면서야 군인들이 뒤따라가는 걸 봐요. 이건 나중에 경찰서서 모여서 우리끼리 한 얘기야. 그렇게 해서 안거야.

 

뒤쫓아서 가니까 얘가 그때 옥상에 문을 열고 나가잖아. 넓은 공간이 있는데 얘가 뒷모습을 보는데, 군인들이 한 아이를 때리는 걸 본거에요. 거기까지 보고 두려워서 바로 이쪽으로 오죠.

 

그게 세종인지 뭔지 구분은 없이 그냥 왜 군인들이 그쪽으로 또 가지, 그러면서 그 군인들은 나중에 말을 들으니까 그때 아름회장이라고 양기해씨가 있었거든. 아름회라고 있어요, 그림 그리는. 아름회 회장인 양기해씨가 그때 거기서 자기들은 아름 동아리 방 옥상에 있었어. 낮에 데모하고 농성장에 안 있고 그 아름 동아리 가서 자고 있었던 거야. 집도 군산 그 정도고 이러니까.

 

“따로 한명씩 잡힌 사람은 정말 많이 맞아요”

 

그러다가 군인한테, 내가 보니까 이세종이를 뚜드린 그 군인들이 그렇게 하고 거길 뒤진 거예요. 방이 거기 있으니까. 거기에서 잡혀 내려오죠. 따로 한명씩 잡힌 사람은 정말 많이 맞아요. 우리는 그렇게 한 30, 40명이 잡혔잖아. 그리고 희선이가 피가 나버리니까 스톱 된 거잖아. 그래가지고 맞았죠, 당연히. 처음에 다 맞았죠, 근데 그래도 개별적으로 그렇게 하나하나 작살나게 맞지는 않았는데, 양기해는 우리는 죽은 줄 알았었죠.

 

우리가 차를 타는데 나중에 양기해씨하고 지금은 잘 아는 서로 교류도 하고 하는데 그때 자기는 그 꼭대기서부터 내려올 때까지 맞으면서 내려왔대요. 맞으면서 내려와 가지고 차 옆에서 정말 깨구락지(개구리)가 딱 엎어져 있는 사람이 하나 그러고 있더라고. 우리는 올라타면서 쟤는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양기해였어요,

 

나중에. 참. 그 사람도 얘기 들어보면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참 슬픈 일이죠. 그래가지고 나중에 타요. 경찰서에서 양기혜가 내 옆에 앉아있어요. 일주일간. 나하고 양기해는 서로 몰라. 데모만 같이 했지 뭐 통성명, 그 자리에서 네 이름 뭐냐 내 이름 뭐다, 이런 말 할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서로 그냥 앉아있는 거야, 하루 종일. 양기해는 그림을 참 잘 그렸잖아. 아름회. 흰 종이만 있으면 거기다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고.

 

그림을 그리는데 내 개인적인 얘기하면 그 날 양기해가 너무 맞아서 피가 범벅이 된 옷을 입고 있었어요. 근데 나만 해도 우리 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왔었거든, 아버지가. 그래가지고 엄마가 와서 근데 참 자식이라는 게 웃기는 게 그 상황에서 도망간 김형근이는 걱정이 되는데 이런 소식을 들을 우리 엄마는 하나도 걱정을 안했어요,

 

“엄마는 직감적으로 성숙이가 저기 있다 딱 느낌이 오더래요”

 

사실. 참 웃기잖아요, 이게. 걱정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나중에 십몇 년 지나서 엄마가 돌아가시게 생겼어. 엄마가. 내가 보기에 우리 엄마가 오래 못살 것 같아, 2,3년. 병이 든거야. 그때 엄마, 내가 엄마한테 물어봐요. 엄마 그때 나 잡혀갔을 때 엄마는 어떻게 했어, 그 때사. 참 웃기잖아요.

 

그때사 물어보니 엄마가 아침에 뉴스를 켰는데 난리가 났다는 걸 듣는 순간 난 분명히 엄마한테 혜숙이네 집에서 자고 온다고 말했거든요. 엄마는 직감적으로 성숙이가 저기 있다 딱 느낌이 오더래요. 그래가지고 엄마가 전북대를 가봤대. 갔더니 군인들이 못 들어가게 하더래. 그래서, 얘네들 어디 갔소, 물어봤나봐. 근데 다들 알려주지 않잖아 군인들이 아줌마 말에. 그니까 엄마가 아버지한테 얘기한 거야.

 

아버지가 그 당시에 법률신문사를 했었어요. 법률신문이라고 아버지가. 법률신문사 지사장을 하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전북일보나 이런데 다 연결이 되잖아. 해서 걔네들이 전부다 전주경찰서 와있다 이걸 알아낸 거야. 그래가지고 엄마가 온 거예요. 엄마를 보고 참 놀랍죠. 엄마가 그렇게 해서 두세 번 오셨어요.

 

“엄마 용수 입는 티셔츠 하나만 갖고 와”

 

근데 그때 내가 엄마한테 그래. 양기해를 보니까 피 묻은 옷을 입고 있는데 다른 애들은 가족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이렇게 옷도 갈아입고 하는데, 근데 양기해는 그 옷을 못 갈아입는 거야. 뭐 오형제, 육형제 다섯 번째고 엄마아빠는 시골서 농사짓느라 바쁘고 봄날이잖아. 저 잡혀갔다고 연락해서 올 엄마 그런 분위기가 아니니까. 그냥 혼자 견디고 있는 거야.

 

며칠 지나도 옷을 안 갈아입고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 내가 엄마가 왔길래, 엄마 용수, 우리 남동생 있어, 전북대 농구부하는. 용수 입는 티셔츠 하나만 갖고 와 다음에 올 때, 그랬더니 엄마가, 우리 엄마가 좀 허름한 걸 가져와야 하는데 우리 엄마 옛날 분들은 그렇잖아, 남을 준다고 하면 좋은걸 주잖아요.

 

우리 남동생 입는 유일한 맥그리거 그 당시에 메이커 티 하나있어요. 딱 한 개야, 내가 알아 노란 색. 라운드 티. 걔가 귀하게 입는 옷이거든 그걸 갖고 온 거예요, 엄마가. 누굴 준다니까. . 그래가지고 내가 양기해보고 이걸로 바꿔 입으라고 그래. 피 묻은 옷을 벗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에요, 사소하게. 근데 양기해는 굉장히 그게 고마웠었는가봐. 지금 양기해씨가 미국특허도 내고 전주시에서 잘 나가는 중소기업 하잖아요. 물을 정화하는 세계 특허를 냈잖아. 그 사장이에요, . 근데 그 사람이 인터뷰할 때마다 그 얘기를 해.

 

김성숙 씨가 그때, 예전에 라디오 인터뷰에서도 그 말 하면서 눈물이 글썽해지더라고. 내가 살면서 그때 참 나는 티셔츠 하나 별 생각 없이 그렇게 했는데 또 그 일을 저 양반이 저렇게 고맙게 생각하는 거 보면. 그거 말 안하면 모를 일이잖아요. 본인이 고맙게 생각해 주대. 고맙게 생각해 주는 마음이 나는 도 고맙고..그런거지.

 

그렇게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그 다음해 양기해씨도 대학교에서 우연히, 가끔 지나치죠. 그런데도 서로 이야기를 한다던가 모임을 가진다던가 전혀 그러지 않았어요. 그 만큼 전두환 정권이 분위기가 무서웠어요. 일사 분란했어, 전부다. 일사분란이 무서운 거잖아. 소리 없이 어떻게 될까봐. 그때는 다방에서 정권 욕하다가 잡혀가는 일이 있었어요, 실제로 우리 주변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근데 20년 뒤에 성공회 교회서 우리가 만났어요”

 

그랬고, 그래서 나 같은 경우는 그 뒤로 전혀 데모와 관련 없이 지냈어요. 그리고 이제 그 대신 5.18 문제는 이런 얘기는 정치권 이런 건 관심은 있지. 그런 개인사가 쭉 진행이 되다가 20년이 지나고 2000년에 우리가 만나요. 보상 때문에. 생각하면 그 날 정말 우리들의 모습이 뭐랄까 남루하다 그럴까. 근데 나는 군인이 학생회관을 습격했을 때 군인들은 제복에 총에 칼에 이러고 왔는데 학생들은 오합지졸처럼 보이는 이 학생들을 잡으러 이 무장한 애들이 온 거야. 너무 안 맞는 거야, 격이. 그런 선명한 비교가 됐었거든요, 내 눈에는.

 

근데 20년 뒤에 성공회 교회서 우리가 만났어요. 그 당시에 내가 대학교 이광철이라는 멀리서 보는 정말 선동가, 웅변가 이광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날 이광철이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봤어요. 지금은 이러지만 20년 만에 처음으로 이광철이를 가까이, 이광철이가 몸이 왜소해져서 검은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데 민주화 운동이나 5.18의 의미가 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가라는 느낌이 단적으로 내가 봐버렸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

 

“그 날 정말 우리들의 모습이 뭐랄까 남루하다 그럴까”

 

노태우 정권이나 김영삼 이런 애들이 5.18가지고 찔끔찔끔 보상을 해줬거든요, 돈으로. 그래서 그 5.18때 수많은 사람이 의롭게 일어난 그 어떤 쟁취한 것들에 대한 가치를 훼손시키면서 보상을 해줬어요. 근데 돈처럼 사람을 추잡스럽게 만드는 게 없잖아요. 그니까 다 같이 데모를 했는데 얘네는 신청한 것이 허락이 되고 얘네는 안되면 깨지는 거 아녜요.

 

너하고 나하고 같이 조직원 이어서 했는데 나는 신문에 이름이 났다고 보상을 해줘, 몇 천만 원 해줘. 얘는 정말 똑같은 조직원인데 얘는 그 당시에 수배자 명단에 안 껴가지고 같이 신청했는데 얘는 안 돼. 그러면 아무리 큰마음으로 보려고 해도, 그리고 거기다 생활이 어려워. 예를 들어서 그래봐. 그러면 거기에서 뭔가, 그래 보상받은 놈들 너네끼리 한편해라 이런 생각 들 수 있잖아.

 

이런 식으로 분열되게, 광주가 그래서 지금 광주의 고통이잖아, 그게. 그런 거에 나도 합류하게 되는 거야, 20년 후에 보상신청을 하죠. 그러면서 처음으로 4차 신청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우리가 4차가 되는 거야. 1,2,3차는 운동권, 조직원들 주도했던 사람들이 했고 우리 같은 사람도 보상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4차 때 우리 같은 사람이 한 거야. 아무 조직원도 아니고 그냥 단순하게 잡혀서 한 20일 구금됐다가 나온 사람이잖아요, 재판도 안 받고. 신청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신청한 거야, 4차. 그러면서 처음으로 그들과 만나게 되는 거예요, 20년 만에.

 

“20년이 지나고서야 너는 왜 그때 거기 있었냐”

 

근데 만나고보니까 정말 잘사는 사람 하나 없고 다들 그냥 다들 뭐 그렇게 살아요. 어떻게 보면 김운주 우리치과. 그 사람도 옮겨 다니다가 다시 치과를 들어가, 치대를. 아까 그 수배자였던. 그러면서 이제 그들과 2000년부터 내가 총무를 하면서 그 사람들을 쭉 엮어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1년에 모임을 36번, 내가 한 번 적어봤어. 그 4차 신청과 4차가 보상을 받게 하면서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데 사람들이 모이자고 하면 안모이잖아요. 그러면서 4차 모임을 만들어내요, 우리들이. 이제 자연스럽게 그때 사 20년이 지나고서야 너는 왜 그때 거기 있었냐, 나는 이래서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웃기죠.

 

그러면서 5.18모임이 만들어지고 나 같은 경우는 세종이가 그 비석이 큰 플라타너스 밑에 이렇게 있어요. 항상 어두워요. 근데 이세종이가 1997년도에 광주 쪽과 연결돼서 인제 이세종이가 법적으로 말하자면 유공자로 되고 다 했는데도 아직도 비석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습한 곳에. 그 비석이 유래가 많은데 그건 딴 다른 사람들에게 들으시고, 나는 2004년도인가 이세종 비를 좀 옮기자, 햇빛 있는 곳으로라도. 우리가 그것 좀 하자. 전북대 총장 두재균씨하고, 그 전 총장은 우리를 안 만나줬어요.

 

그래서 두재균씨가 총장이 되면서5.18추모비 이전 팀이 만들어지고 이광철 이흥복 김성숙이가 두재균 총장을 만나서 우리가 이런 계획을 하는데 전북대 쪽도 어떻게 생각하냐 했더니 아주 좋대. 자기들이 그 장소, 선생님이 원하시는 장소로 만드시라고 그래서 서로 비용부담하자..해서 시작한거지.

 

“내가 만약 세종이었다면,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었을 것 같어”

 

기단을 세우고 지금 현재 그 이세종비가 올라가 있어요. 이제 기단을 세우니까 여기 앞에 글을 하나 써야되잖아. 그러면서 나더러 하나 만들어 오래. 그래서 내가 ‘아 민주주의여’ 하고 ‘이세종 열사 추모비’하고 그 다음에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 내가 세종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생각하니까 다시 살고 싶은거야, 그렇게 죽은 이세종인데.

 

그때가 세종이가 죽은지 24주년인가 그럴때에요. 24살이면은 정말 지금 저렇게 돌아다니는 대학생이잖아. 내가 그 자리에서 정말 세종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 생각하니까 다시 살아서 자기도 쟤네들처럼 저렇게 돌아다니고 싶고 이런 마음이 들것 같애. 그래서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 이걸 세 개를 갖고 운영위에 넣었어요.

 

세 개를 써와서 선생님들이 결정을 해라, 나는 개인적으로 다시 살아 하늘을 이걸 쓰고 싶다, 그랬더니 그때 이광철씨가 회장을 할때라 추진위원장이였어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로 결정을 해요. 글을 또 써야 되잖아. 근데 나는 이상하게 여태명 글씨가 안어울린다는 생각을 해요.. 거기 그런 말에는 여태명씨의 어린아이 같은 그 체 있잖아. 전주, 축제 이런 것들.

 

이광철씨도 여태명씨를 잘 아는 모양이더라고. 전주는 여태명씨 써야지 그래. 근데 내가 왠지 여태명씨를 쓰고 싶지 않은거여. 내 개인적인 생각이라. 그래서 에이 그냥 컴퓨터로 뽑읍시다, 내가 그랬어요. 이런 글씨는 즐거움, 축제 이런건 참 어울리는데 뭔가 일탈하고 파격이 좋은데 나는 여기는 그런 일탈과 파격이 아니고 뭔가 좀 정성이 들어간 그런 글씨를 모시고 싶단 말이야.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써주는게 좋겠다”

 

그런데 누가 그러는 거야, 어떤 분이 신영복 선생님한테 한 번 얘기 해봐라, 그래. 근데 내가 신영복하고 아무 연관이 없어. 그 당시에 전태일을 따르는 노동대학이라는 사이버 노동대가 있어요. 거기에 내가 등록을 해서 거기는 뭐 사이버대니까 그냥 누구나 돈만 있으며, 그때 십만원이었어. 십만원만 내면 그 온라인 강좌를 들을 수 있어요. 가끔씩 오프라인으로 교수가 한명씩 와서 하거든요.

 

내가 의식화가 안된 사람이잖아. 더 구체적인 걸 알아야 겠구나 생각이 들었어, 그때. 그래서 박승호씨라고 성공회대 강사로 오셔가지고 수업을 하는데 누가 신영복 교수님께 이메일로 문의해보라고 하는데 성공회대 하고 연결된 분이 그분밖에 없는거야. 내가 박승호씨한테 전화를 해요. 그분도 나를 잘 모르고 서로 그럴 때지.

 

제가 이말 저말 해서 신영복 선생님께 연락할 일이 있는데 혹시 방법을 아시냐 그랬더니 사회과학부로 전화해서 이메일을 알려달라 해라 그렇게 알려주더라고.

그래서 내가 선생님한테 편지를 보내요. 그때 나에게 신영복 교수님은 연예인 같은 존재였어, 어떻게 보면. 어떻게 신영복 교수하고 나하고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거, 책이나 좋아하고 그럴 때잖아.

 

선생님한테 내가 편지를 써요. 선생님 저는 이러이러한 사람입니다, 저희들은 이러이러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이 시간이 되시면 글을 써주면 저희들은 정말 고맙게 받겠다,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요.

 

근데 내가 예를 들어 10시에 보내면 선생님이 12시에 답장을 한거야. 써주겠다, 가로 세로 센치를 적어서 보내달라, 나는 그 답장이 너무나 큰 위로가 됐어. 말하자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아무도 뭐랄까 국가에서 유공자 이렇게 했다지만 기쁘고 흔쾌한 게 아니야, 이게.

 

정부 자체가 어떤 단호함이 없잖아요. 그냥 마지못해서 준거잖아요. 축제가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우리 국가가 아 그때 잘못됐다 전두환을 완전 부정하고 그 당시에 그렇게 일어선 학생들에 대해서 학생 개개인이 잘해서가 아니라 그런 저항정신에 우리는 깃발을 꽂아주겠다 라고 하면서 흔쾌하고 기쁘게 정말 축제처럼 5.18을 우리가 만들어 내지 않고 있잖아요, 지금.

 

“신영복 선생님이 우리를 위로해주는구나 하고 느껴져”

 

그냥 시끄러우니까 떡 주듯이 입막음 하듯이 이렇게 보상이 된 것에 대한 너무나 슬픈 그런 존재들이었는데 신영복 교수가 딱 그 말을 하는 순간 아 선생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는구나 라는 그런 위로를 받는 듯한 나는 그렇게 느꼈어요, 선생님에 대해서. 너무나 고맙고 위로가 됐어요. 선생님한테 글씨가 왔어. 그래가지고 그 온 것을 이광철씨가 탐을 내. 이광철씨가 탐을 내는 사람이 아니야.

 

근데 아 김성숙씨, 그거 진짜 나 갖고 싶다, 그래. 근데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 그 말이 무서운 말이잖아. 죽은 자가 하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때 뭐 국회의원 나가네 마네 이광철씨는 안나온다고 하고 옆에서는 나가라 하고 그럴때야. 이광철이 국회의원되면 드린다고 내가 그랬지. 이광철씨가 국회의원 된다 이런 생각조차도 별로 안할 때니까. 그랬던 에피소드가 있네요.

 

그리고 일을 잘 치렀어. 다 만들었어. 신영복 선생님께 보고를 해야할 거 아니오, 신영복 선생한테. 그래서 내가 그 추모비 사진도 찍고 해서 선생님한테, 5.18 회비로 살수도 있었지만 회비를 받고 하기가 좀 그래. 내 개인 돈으로 전주 한지를 . 선물로 학교로 보내드렸어요. 그랬더니 정말 고맙다고 이러면서 선생님이 거기다 글씨를 써가지고 두 점 보내주신거야. ‘처음처럼’ 하고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그 두 개를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처음처럼’ 하나는 나에게 신영복 교수한테 해보라고 .하신 분께 드리고 하나는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그건 내가 가졌어요. 왜냐면 이건 개인 돈으로 내가 보낸거잖아. 만약 5.18 기금으로 보냈으면 5.18에 줘야지.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 너무나 좋잖아요, 말이. 그래서 그걸 표구해서 우리 집에 걸어놨는데 나만 보잖아. 나만 본다는 게 또 아까워. 그래서 그것을 지금 현재 양사제 거기다 걸어놨어요. 양사제, 향교 옆에.

 

"열린모임에 오시지 않던 신영복 선생님이 딱 들어오시는 거야"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 개인얘기에요. 그래가지고 선생님한테 두 점을 받았잖아. 너무 고맙잖아. 그래서 내가 서울에 ‘더불어 숲’이라고 신영복 선생님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이 있어요. 선생님은 워낙 바쁘고 그런 분이니까 선생님을 만난다는 건 상상을 못하고 선생님을 좋아하는 ‘더불어 숲’에 한 번 가봐야겠다, 내가 그 당시에 아버지를 이렇게, 병든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내가 세 끄니 다 나한텐 문제야. 그래서 내가 어디를 갈 수가 없어. 근데 그때 독일에서 있던 여동생이 왔어. 그래서 내가 하루 시간을 내서 저녁시간에 그 ‘더불어 숲’ 모임을 갔어요.

 

근데 참 우연인 게 내가 ‘더불어 숲’ 열린모임에 갔는데 그때 열린모임에 온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야. 나하고 내 친구하고 둘밖에. 그니까 ‘더불어 숲’에 열린모임이라고 한 달에 한 번씩 사람들 오는 시간이 있는데 그 주최하시는 분 둘하고 나하고 내 친구 넷만 있는 거야. 너무 황당한 모임이죠. 그렇게 넷만 있었으면 재미없이 내려왔을 거예요. 근데 그 날 한 번도 열린모임에 오시지 않은 신영복 선생님이 딱 들어오시는 거야.

 

그래서 나하고 만나요. 선생님하고 나하고는 이메일만 주고받았잖아. 근데 내가 선생님을 만나는 순간 선생님께 이제 인사를 해야 돼서 선생님한테, 선생님 저는 전주에서 온 김성숙이에요, 선생님도 기억을 하죠. 아이구 그러냐고, 그래가지고 그렇게 해서 다섯, 여섯 명이, 이제 신영복 선생님도 어떤 사람 하나 하고 같이 왔지, 학생 하나하고. 여섯 명이서 세 시간 이야기를 해요.

 

선생님하고 온갖 얘기를 하지, 선생님 어쩌고 어째요. 선생님하고 인연을 트는 거예요. 그게 2004년도 여름쯤인가 내가 선생님한테, 선생님 전주 한번 오셔야죠, 그 말하기 시작해요. 그래서 한 다섯 번 올라가요. 신영복 선생님이 절대 뭘 강제로 하는 사람이 아니죠. 근데 선생님한테, 선생님 전주에서 선생님 기다리는 사람 너무 많아요 언제 한번 오셔야죠 오셔야죠, 그걸 하면서 대여섯 번 올라가요. 그러면서 여기서 준비 모임을 시작을 해요, 선생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모임. 그래서 정말 기분 좋게 선생님을 한 번 모시고 싶었어요, 전주에서.

 

“정말로 따뜻하고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한번 모셔드리고 싶었어요”

 

왜냐면 나는 선생님이 5.18모임에 흔쾌히 그렇게 글씨를 써주신 것처럼 신영복선생님을 20년 동안 그렇게 통혁당 사건으로 무리수의 세월을 보낸 거에 대한 우리 그 당시에 내가 한번 선생님을 정말로 따뜻하고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한번 모셔드리고 싶었어요. 그냥 형식적이고 겉치레가 아니라 마음을 다해서 선생님을 그런 자리에 있게 하고 싶었어요.

 

그래가지고 나는 사실 돈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없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이 이야기를 누구와 상의를 할 것인가. 돈이 좀 들어가니까 의사들도 껴야하고 그렇게 저렇게 해가지고 준비모임이 한 열댓 명, 변호사도 끼고 전북대 학생회, 전주대 학생회 해가지고 너무나 의미가 확산이 되고 참 좋았어요.

 

그래서 신영복 선생님이 2005년인가 3월 19일 날 오세요, 전주에. 전주 삼성문화회관에서 그 일을 전북일보 여자 분이 취재를 하죠. 신영복 선생님이 전주에 오시는데 어떻게 하면 좀 더 알뜰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할까, 고민해가지고 선생님이 그 비전향장기수 있잖아요. 그 어른들과 점심을 먹게 해요, 제가. 점심을 먹게 하고 그 돈은 개인이 지불하죠. 한 명당 만 원짜리 백반을 먹는데 나한테는 사실 일을 추진하는 돈이 문제였어요, 내 입장에서는. 내가 탁 낼 수 있는 그럴 사람이 못되잖아. 그러면 그 돈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어 낼 것인가 기쁘게.

 

추가 비용이 들어가는 거야. 점심식사비가,그것만 해도 삼십만 원이 넘죠. 한 명당 만원이니까. 그 삼십만 원을 또 이걸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 하는데 다행히 어떤 친구가, 언니 그건 내가 부담하고 싶다, 그래서 흔쾌히, 그래, 하고 넘어갔고 아무튼 그 전체 하는데 450만원 들었어요. 왜냐면 삼성문화회관 빌린다고 백만 원 이상 줬거든요. 그리고 선생님 오셔서 장기수들과 선생님과 그니까 선생님도 출소하고 처음 만난거야. 정말로 소중한 자리였죠. 그리고 삼성문화회관에서 강연하시고 그 다음에 콩나물 국밥집 가서 오는 사람 전부다 다 같이 콩나물국밥을 먹었어요. 거기서 한 사십만 원 나왔어요. 4,50만원.

 

그리고서 전통체험관으로 가요, 김병수씨 하는. 내가 김병수씨를 준비위원에 넣었어. 김병수씨가 하루 빌리는데 50만원 해가지고 전체를 통으로 빌려서 선생님 그 넓은 그 방 있잖아. 거기에 서운한 사람 다 와라 해서 다 앉아서 또 하룻밤 놀아요. 그리고 우리가 음식 좀 준비하고. 그리고 선생님 주무시게 하고 우리는 빠졌다가 다음날 아침에 만나지.

 

“전주하면은 신영복 선생님 출소한 곳이잖아”

 

이런 과정들이 선생님이 정말 어느 지역에서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은 지금도 전주하면은 선생님 출소한 곳이잖아. 대전인가 15년 있다가 전주에서 5년 있으면 출소한, 전주하면 자기가 출소한 햇살 가득한 8.15때 저 앞에는 자기가 보고 싶은 사람들이 쫙 있는 그런 기쁨의 고장인데 거기에서 또 좋은, 대부분 선생님 대전 강의 할 때는 KTX로 왔다 KTX로 가세요.

 

근데 전주 오셔가지고 그렇게 해서 주무시고 갔고. 내가 처음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할 때부터, 선생님 오시면 하룻밤 주무셔야 합니다, 이 말을 계속 했어요. 그래가지고 일정 쫙 써서 보내고 해가지고 선생님하고 인연을 키웠죠 그리고서 이제 사람들이 그 준비모임 이런 것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더 불어숲, 전주 모여서 책읽기 모임을 하자, 해가지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었어요. 그리고서 그게 한 3년 지나니까 선생님 책을 다 읽었잖아. 지금은 신영복 선생님 신간이 나올 때까지 잠시 쉬고 우리끼리 얘기를 우리끼리 그냥 번개하고 그러고 있어요.

 

“내 기억 속에는 5.18이 똬리를 딱 틀고 있고”

 

내 기억에는 말하자면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잖아요. 그게 5.18이. 한 똬리로 딱 있고. 아무하고도 결혼했는데 그 남편한테도 말 안했어요. 현재 이혼한 상태고. 그니까 결혼을 하면 중매로 만났는데 나를 나에게는 그 기억이 가장 어떻게 보면 또와리처럼 뱃속에 있는데 이 남자는 그런 걸 말하는 관계가 아니어야 할 것 같애, 그 정도로 5.18이라는 것이 무슨, 말을 하면 당연히 얘기가 됐겠죠. 나 스스로가 꽉 닫아놓은 기억이었어요, 5.18을.

 

그리고서 결혼을 했는데 나는 미국에 가서 애를 낳았어요. 근데 아이가 핸디캡이 있는 아이를 낳았어요. 그래가지고 미국에 있다가 다시 한국에 와서 12년 동안 결혼생활하고 2000년도에 이혼을 하고 2월 16일 날 전주에 와요. 근데 2000년도 2월 19일 날 5.18로 만나자고 연락이 와요. 그래서 참 묘하게 나의 전주생활이 5.18과 함께 시작돼요.

 

그러면서 나의 해석 그니까 나의 행동이 해석되지 않은 것에 대한 미진함이 있었잖아. 나의 그 대학생활에 잡혀가고 한 것이, 우리 사회가 그걸 해석하지 않으니까. 말하자면 전두환이란 사람과 그 뒤에 이어진 노태우 그리고 그 정권 때 저질러진 수많은 일들이 재판, 재판, 재판을 통해서 아주 정말 축소, 축소, 축소 해가지고 시원하게 뭔가 되는 게 없이 그냥 찌질찌질 이렇게 돌아가는 과정을 쭉 지켜보잖아요, 우리가.

 

그리고 보이지 않게 정권을 위한 그들은 그 세력들과 힘을 합치잖아요. 살살 힘을 합치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그 기억을 흔쾌하게 내놓을 수 없게 되죠. 나는 그게 우리 사회 큰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동학 같은 경우도 그렇고 뭐랄까 흔쾌하지 않게 그냥, 김종필 정권이 끝까지 이 정권 저 정권과 붙어가는 것처럼 항상 그런 식으로 일이 이어져 왔잖아요.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은가 이런 생각, 정신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큰소리 칠 수 없는 거야 저항세력이. 그런 것들. 안타깝죠. 그런 것을 쭉 보면서, 보면서 오는데 그러면서 2000년도에 전주에 와서 그때는 이런 학원 하지 않고 애들 집으로 다니는 그런. 사람이 인생에 절망할 때가 있잖아요. 아래로 막 꺼질 때. 그때 내가 또다시 5.18과 만나는 거예요, 2000년도에.

 

“이건 너 개인에게 돈을 주는 게 아니다”

 

5.18과 만나면서 나는 내 인생에 새로운 해석을 자꾸 하려고 해요. 그러면서 이제 내가 전에도 썼던 글에 나오는데 나의 해석이 좀 완결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죠, 내 해석이. 그게 뭐냐면 내가 참여한 일에 대한, 그날도 내가 참여를 계속 단절할 수도 없었어요, 내 의식이. 끊임없이 사회의 현상에 대해서 관심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럼으로 해서 어쩌면 신영복 지금 여기까지 오는 거예요. 나의 착륙점.

 

나를 어쨌든 광주가 유공자로 만들어놨고 어쨌든 그 일에 대해서 국가가 해석을 내렸잖아요. 그니까 사람들이 유공자 되는 거 보상금 타는 거에 대해서 쭈뼛거리는 거야. 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이건 분명히 어떤 해석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이건 너 개인에게 돈을 주는 게 아니라 국가가 자기들이 한 행동에 대한 자기들의 국가의 해석을 내리는 과정에서 너에게까지 보상금이 간 거지 너 개인에게 돈을 준 것이 아닌데 우리가 쭈뼛거릴 필요가 없다, 라는 해석을 내가 끄집어내요.

“내가 의미 있고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내가 과연 어떻게 사회참여를 할 것인가 라고 할 때 나는 내가 현재 신영복 선생님의 책읽기 모임을 한다든가 아니면 아이들과 시 한수 얘기를 하면서 내가 시를 선택해서 아이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든가 하는 이런 일들이 5.18과 이어진 사회참여라고 생각해요. 쭉 그러면서 하고 있고 그러면서 5.18 모임 나가고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그리고 이제 어쩌면 신영복 선생님이 말하는 그런 글의 내용이 우리 사회의 소수잖아요. 이게 다수가 되는데 조금 내가 노력을, 그니까 전혀 돈벌이와 관계없는데도 열심히 하는 거야. 내가 지금 돈을 벌어야 돼, 난 돈이 없으니까. 근데 그렇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의미 있고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거예요. 신영복 선생님 글로 글단풍을 만들어서 나눠준다던가 이런 일로 나는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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