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찌에게 박수 칠 수 없는 이유
베이징올림픽을 4개월여 앞둔 지난해 4월, 베이징 현지에서는 '프레올림픽 마라톤 대회'라는 행사가 열렸다. 중국이 개발한 42.195㎞의 올림픽 마라톤 코스를 세계에 처음 공개하고 실전을 치르는 날이었다. 이 대회 출전자를 점검하다 나이가 40대 후반~50대 중반인 일본인 마라톤 감독 3명의 이름을 발견하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선수들과 함께 올림픽 코스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 출전했다. 이들 세 사람은 폭우를 뚫고 3시간 안팎의 기록으로 풀코스를 모두 완주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같은 경기에 한국 감독은 당연히 아무도 뛰지 않았고, 출전했던 한국 엘리트 선수 한명은 컨디션을 이유로 기권했다. 일본은 감독이 완주하고, 한국은 선수가 기권하는 것. 한국과 마라톤 강국 일본의 차이가 여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일 막을 내린 베를린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마라톤에 출전한 한국의 선수 8명은 전원 30위 이하로 밀리는 참패를 당했다. 한때의 마라톤 강국으로서 고개를 들 수 없는 성적이다. 반면 일본은 여자가 은메달 1개를 따내 긍지를 지켰고, 번외 경기이지만 상위 3명의 기록을 합해 시상하는 단체전에서도 여자 2위, 남자 3위로 시상대에 올랐다. 치밀한 준비로 이뤄낸 개가였다. 이제 한국은 마라톤에서도 일본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마라톤을 포함해 한국 육상은 이번 대회 출전자 19명 전원이 예선 탈락하거나 하위권으로 처지는 망신을 당했다. 차기 대회인 2011년 대구세계선수권을 앞두고 드러난 총체적 부실이며 레드카드를 받아 마땅한 성적이다. 그럼에도 선수와 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별로 못 느끼는 듯하다. 국제무대에 도전할 의욕이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국내 대회인 전국체전이 이들의 중요한 관심사다. "해도 안 될 국제 대회에서 힘을 빼느니 가을에 열리는 체전에서 메달이나 따자"는 안이한 태도가 선수들 사이에 만연해 있다. 체전 메달을 따면 두둑한 포상금이 들어오는 탓이다. 지난 2월 대한육상경기연맹 수장으로 들어온 오동진 회장은 지인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모두 병들어 있는데 아프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순위가 내 생각보다 10등이 뒤져도 울분을 표하는 선수가 없다. 다들 '우리가 원래 그렇지 뭐…' 하면서 태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모습이 더 충격적이다."
육체 노동자와 스포츠맨은 몸을 써야 살아남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육체가 생계의 수단인 반면 스포츠맨의 육체는 도전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도전 정신을 잃은 스포츠맨은 육체로 살아가는 노동자가 된다. 이제 베를린은 끝났고 2년 뒤엔 대구 차례다. 남은 2년간 한국 선수들은 도전자의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만약 대구에서도 베를린 같은 성적이 나오면 한국은 '개최국으로서 141개의 메달 중 단 하나도 못 따낸 나라'라는 웃기는 기록만 세우게 될 것이다.
이에리사 전 태릉 선수촌장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수는 딱 자기가 노력한 만큼만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죽을 만큼 노력하지 않은 선수는 깊이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진짜 도전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물론 스포츠에서 메달이 전부는 아니며 꼴찌들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박수갈채는 깊이 절망할 만큼 최선을 다한 꼴찌, 패배한 뒤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꼴찌, 다음을 기약하며 절치부심하는 도전자 꼴찌들의 몫이다. 한국 육상은 깊이 절망할 만큼의 노력을 한 뒤에 꼴찌를 한 걸까? 이를 생각하면 한심한 성적표를 들고 25일 귀국하는 육상 대표팀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 김동석·스포츠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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