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간첩의 추억????

忍齋 黃薔 李相遠 2009. 10. 6.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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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사죄해야 할 조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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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의 추억(3)- 유신권력에게 피맛을 알려준 최종길 교수 살해, 80년 광주학살의 씨앗을 뿌리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최근 과거사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도 연일 여러 가지 얘기를 토해내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아버지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하더라도 ‘유신 소녀’가 아니라 지천명을 넘긴 야당 대표라면 할 말 못할 말은 좀 가려서 했으면 하는 소망을 품어본다. 과거의 친북·좌경·용공도 같이 조사하자는 말에는 한편으론 소름이 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군사반란으로 태어난 공화당부터 친다면 집권 경력이 30여년이 넘고 국회의원만 수백명을 거느린 거대 야당의 대표 주변에 저런 얘기하는 것 놔두는 참모들밖에 없단 말인가? 좌경세력 색출한다고 별의별 사람들을 다 잡아들인 나라에서 이제 무얼 더 조사하자는 얘기인지 알 수가 없다. 반공을 국시로 삼아온 대한민국에서 빨갱이짓 하고 진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은 남로당 군사부 프락치 박아무개가 숙군 당국에 불지 않아서 살아남았다가 그와 더불어 출세한 몇몇 억세게 운 좋은 사람들 아닐까? 과거 청산이 이제 와서 그런 운 좋았던 사람 조사할 만큼 한가한 일은 분명 아니다.
 

△ 의문사위가 공개했던 최종길 교수의 주검에 대한 현장검증 사진. 그의 동생은 중앙정보부원이었으나, 그런 사람조차 예외없이 간첩으로 조작되는 악마의 시대였다.(사진/ 연합)

 
친북·좌경·용공은 너무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너무 가혹하게 처벌한 게 문제였다. 지금 한국 사회가 직면한 과거 청산 문제 중에서 민간인 학살이라든가 군사독재 시기의 각종 의문사와 조작간첩 사건들은 대개 친북·좌경·용공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다가 발생한 일들이다. 그런데도 친북·좌경·용공을 더 조사하자고 하니 얼마나 더 많은 의문사를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얘기인지 늦더위에도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다.
 
진심 어린 사과라면 한번이면 족하다   
 
여기저기 수도 없이 사과했는데 무슨 사과를 또 어떻게 하냐고 한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저 유명한 ‘통석의 염’(痛惜의 念) 발언을 비롯하여 숱하게 사과를 받아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과는 받으면 받을수록 화가 난다는 것이다. 정말 진심 어린 사과라면 한번이면 족하다. 아버지가 한 일을 딸이 사과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뭐가 잘못된 것인지 진실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전에 사과했잖아라고 나오는 것은 정말 피해자들의 가슴에 두번 못질을 하는 것이다. 지금 박근혜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박근혜라는 개인이 딸로서 아버지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 아니다. 공화당-민정당으로 이어진 한나라당의 대표로서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의문사와 각종 인권유린에 대해 사죄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과거를 정리하는 것은 역사학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역사학자를 부각해준 것에 대해 현대사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맙게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가해자로서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을 책임지는 것이 과거 청산일진대, 아무리 역사학자들이 오지랖이 넓다한들 국가의 책임을 대신 질 수는 없지 않은가?
 

△ 생전의 최종길 교수. (사진/ 연합)

   
  지금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박정희가 3선 개헌으로도 성이 안 차 유신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짓밟을 무렵 최종길이라는 촉망받는 법학자가 있었다. 한국 최초로 독일에서 법학박사를 받아와 10년째 모교인 서울대 법대 교수로 제자들을 키워내고 있었다. 데모하는 제자들을 달래다가 사제간에 부둥켜안고 울었다고도 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에 이어 4일에는 법대생들이 유신 반대 데모에 나섰다. 경찰의 강경 진압에 대해 그는 교수회의에서 스승으로서 모른 체 해서는 안 된다면서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마침 그의 동생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제자가 잡혀갈 때 “중정에 가면 성하게 나오는 사람이 없다던데 어쩌냐”며 눈물을 흘렸다던 최 교수는 동생의 안내를 받아 남산에 갔다가 다시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들은 시신도 없는 빈소를 자택에 만들지도 못하고 동생 집에 차려야 했다. 의사인 부인도 부검에 입회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의 죽음이 알려지면 장례를 치르지 못할 것이라 협박했다. 주검은 관에 봉해진 채 마석 모란공원의 장지에서 가족들에게 인계됐다. 관뚜껑을 열고 얼굴이라도 마지막으로 보며 엉엉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건만, 따라온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오열조차 못하게 했다. 최 교수의 조카는 “가족들은 중정 직원들의 살벌한 감시 속에서 석고처럼 하얗게 굳어가고 있었다”라고 추모 문집에 적었다. 북을 ‘동토의 왕국’이라 즐겨 불렀지만, 우리들의 ‘겨울공화국’에서 판검사 제자가 즐비한 법학자는 이렇게 묻히고 있었다.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인 유신 1년 뒤에 흔히 의문사 1호라고 불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최종길 교수가 이렇게 묻히고 4일 뒤인 1973년 10월25일 중앙정보부는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이 발표를 한 자는 중앙정보부 차장 김치열이었는데, 그는 한달 반 정도 뒤에 검찰총장이 되고, 또 법무장관이 되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의하면 최종길 교수는 일찍이 독일 유학 중에 평양에 가 노동당에 입당한 간첩으로 자신이 간첩임을 자백한 뒤 조직을 보호할 목적으로 중앙정보부 청사 7층 화장실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것이다.    
 
 1973년 10월이란 시점을 주목해보라   
 
당시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던 김근태였지만, 최종길 교수가 간첩이라는 발표를 듣고는 뭔가 “꼬투리가 잡혀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파렴치한 유신 독재지만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밑바닥에는 사실을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간첩이란 말이 지닌 무게. 중세 말 근대 초기 마녀사냥의 시절에 마녀를 변호하면 마녀가 되는 것처럼 간첩은 그런 존재였다. 김근태는 “간첩 혐의라고 권력이 발표한 문제에 관심을 표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무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나였지만 새로운 차원의 결심이 필요했고,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라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 가족들조차도 이 발표를 대놓고 부인하지 못했다. 최 교수의 부인은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집에까지 찾아와 큰소리로 당신의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타살된 것이 아니냐며 물었을 때,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바로 옆에 지켜 서서 감시하는 가운데, 그저 돌아가달라는 말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침묵 속에서 최종길 교수는 죽어서 간첩이 되어버렸다. 김영삼 정권 시절 수구세력의 사상 공세의 표적이 되어 물러난 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은 “요컨대 우리가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 사건을 막지 못했고, 또 그것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방치해온 우리 모두의 무관심과 무능이, 그 이후 이 땅에서 그렇게도 많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온 권력기관에 의한 의문사를 초래케 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저들도 최종길 교수를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소문으로는 전기고문을 하다가 기계의 오작동으로 너무 강한 전류가 흘러 사망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었으니 당연히 중앙정보부에서도 감찰실을 통해 자체 조사를 했다. 그 결과는 수사관 둘만 “신병관리 소홀”을 이유로 가벼운 징계를 받았을 뿐이다. 저 악마의 시대에 저들의 반성은 기계 오작동 따위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고문기술자’를 키워내는 것이었나 보다.  
 
우리는 유신 쿠데타 이후 최초의 의문사 사건인 최종길 교수 고문살해 사건이 일어난 1973년 10월이란 시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때는 중앙정보부가 어쩌면 의문사 1호가 김대중이 되었을지도 모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곤욕을 치를 때였다. 이로 인해 중앙정보부 내에서 이후락은 명목상의 부장으로 전락하고 김치열 등 검사 출신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들은 김대중 사건에 대한 국내외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유신 1년이 채 안 되어 대학가에는 반유신 투쟁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이런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그들은 뭔가 큰 사건을 만들어내야 했다. 2002년 의문사위 조사에서 밝혀진 것이지만, 중앙정보부가 최 교수를 조사한 것은 ‘공작’ 차원에서 그를 중심으로 간첩단 사건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나는 바람에 이미 조사가 끝난 상태에서 발표 시기를 저울질하던 유럽거점간첩단 사건에 끼워넣은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10년 동안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있으며 많은 판검사들을 키워낸 법학자, 그것도 동생이 중앙정보부원인 사람조차 간첩으로 조작되는 그런 악마의 시대였다. 최종길 교수가 죽고, 사법살인 인혁당 사건이 일어나 8명이 한꺼번에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재야의 대부인 영원한 독립군 장준하는 일본군 출신 박정희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로 워낙 깨끗이 청소한 탓에 한동안 다른 나라에 비해 피를 덜 흘리던 한국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권력이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한 것, 광주는 하루아침에 터진 것이 아니었다.   
 
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 그러나 봄은 오지 않았다. 1980년 ‘광주 사태’라는 이름하에 남도에서 ‘폭도’들이 총을 들고 난동을 피웠다. 나라에서 시키는 일이라면 두말 없이 따라하던 착한 백성들이 어쩌다 ‘폭도’가 되어 총을 들었냐고? 학살자와 그 앵무새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독침 간첩!” 독침 사건은 두 군데서 터졌다. 5월24일 계엄사는 “광주 사태를 무장폭동으로 유도하고 반정부 선전 및 선동을 위해 남파된 북괴 간첩 이창룡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시민군이 장악하고 있던 광주의 전남도청에서 독침에 맞았다며 장계범이란 자가 쓰러지고, 상처의 독을 입으로 빨아주던 정형규란 자 역시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중에 이 사건은 도청 내부를 교란시키기 위한 분열 공작으로 밝혀졌지만, 도청은 큰 혼란에 빠졌다.  
 
80년대, 공안기관 버릇 더 나빠지다   
 
광주 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시대에는 1970년대에 비해 저항이 거세졌다. 광주에서 사람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저항세력도 목숨을 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저항이 거세질수록 간첩도 많아졌고, 유형도 다양해졌다. 1970년대에는 재일동포 사건이 조작간첩 사건의 대종을 이루었다면,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재일동포 사건이 여전히 강세인 가운데 일본 관련 사건- 국내 인사가 일본에 갔다가 총련이나 한민통 계열 사람과 접촉했다가 간첩으로 만들어지는 사건- 이 부쩍 늘어났고, 납북 어부들도 간첩이 되었다. 유럽 유학생들이 몸조심을 한 탓인지 미국 유학생을 중심으로 구미유학생 간첩단도 만들어졌다.  
 
현재 밝혀진 조작간첩 사건의 통계나 자료들은 대개 1980년대에 투옥된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1970년대와의 비교가 힘들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서 더 힘없고 더 억울한 사건들이 많이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한마디로 공안기관의 버릇이 더 나빠진 것이다. 군사독재의 입장에서 정국이 어려울 때 간첩 사건을 터뜨린다는 공식이야 변함이 없었지만, 이런 ‘큰’ 목표가 아니더라도 간첩은 꾸준히 만들어졌다. 계급 정년에 걸려 신경질이 늘어난 과장의 승진을 위하여, 하는 일 없어 보이면 예산이 깎이니까, 막대한 포상금과 해외연수의 기회를 위하여…. 그리고 여기에 일부 반공정신이 투철한 ‘애국시민’들도 가세했다. 경쟁자의 사업이 좀 잘되어도 간첩으로 몬 사례가 있고, 조선대학의 경우는 학내 분규에서 자신의 처남을 간첩으로 신고하기도 했다. 남편에게 살해당한 수지 김도 최종길 교수마냥 죽어서 간첩이 되지 않았던가?  
 
자백은 증거의 왕!   
 

△ 간첩으로 몰렸던 납북 어부 김성학. 기적처럼 무죄 판결을 받아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이 처벌을 받았다.   

 
조작간첩 사건의 피해자들은 대개 두세달씩 불법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다. 고문하면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맹신을 갖고 있는 수사관들 앞에서 고문을 견뎌낼 장사는 없다. 고문하다 죽으면 의문사고, 살아남으면 간첩이 된다. 나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조차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수사기관의 지하 밀실에서 저승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 같은 놈 하나 여기서 죽어 나가도 눈 하나 깜짝할 사람 없다.” 누구는 월북하려다가 총 맞아 죽은 것으로 해버린다고 하고, 누구는 교통사고로 죽은 것으로 처리하면 그만이라고 하고, 좀 솔직한 놈은 ‘심문 투쟁’하다가 죽었다고 하면 시말서도 안 쓰고 끝난다고 하고…. 그 자신이 중앙정보부의 고문 피해자였던 김영삼의 오른팔 최형우도 내무부 장관이 되어서는 간첩은 고문해도 괜찮지 않냐고 했다. 납북 어부 김성학은 “버둥거리는 통에 눈가리개가 벗겨진 사이로 내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볼 때는 제발 죽여달라고 울부짖었다”라며 몸서리를 쳤다.
 
간첩은 당연히 교육을 받는다. 그가 짝퉁 간첩인지 진짜 간첩인지 가려내는 방법은 그가 어디서 교육받았는지이다. 김성학은 수사관들의 계속되는 추궁에 “알아야 말을 하지요”라고 답했고, 수사관들은 “네가 재북시 북에서 받아온 지령을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을 못하는 모양인데”라며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이렇게 달달 외운 것을 검사 앞에 가서 부인하면 큰일이 난다. 검사는 왜 수사기관에서 부인하지 내 앞에서 하느냐며 다시 수사기관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재교육! 자백하고 전향하면 선처해준다는 검사의 말 앞에 대개 굴복하고 만다. 수사기관에서의 자백은 증거 능력이 없지만, 검사 앞에서의 자백은 증거 능력이 있다. 난수표도, 그 흔한 독침도 없는 조작간첩 사건에서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국가보안법의 고무찬양죄나 이적표현물소지죄는 조작간첩 사건의 설거지를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다.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물건’을 만들다 불량품이 난 경우 그냥 곱게 내보낼 수는 없다. ‘도깨비 빤스’의 고무줄보다 더 신축성 있는 고무찬양죄가 있는 한, 그리고 큰 책방에 가면 수십권씩은 버젓이 팔리는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있는 한 국가보안법 불패의 신화는 이어져왔다. 물론 예외는 있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조차 어떻게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던 기적과 같은 김성학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이 무죄가 나면서 고문기술자 이근안 등이 처벌을 받았다.  
 
박홍이나 황장엽이나 정형근 같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한국 사회에서 암약하는 고정 간첩이 5만이요, 3만이요라고 떠든다. 진짜 간첩이 그렇게 득시글거린다면 왜 잡지 않는 걸까? 간첩 한명에 포상금이 얼마인데….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 것 같다. 한국 사회가 어쩌다가 간첩 잡는 애국자가 간첩에게 쫓겨다니게 되었냐는 ‘우국충정’ 철철 넘치는 장탄식을 <조선일보>에서 보았다. 이게 무슨 얘긴가 깜짝 놀라 알고 보니 서경원 전 의원이 자신의 방북 사건을 수사했던 정형근을 그냥 두지 않겠다고 벼른다는 얘기였다.  

△ 80년대 들어 유럽 유학생들이 몸조심을 하면서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만들어졌다. 그 피해자인 강용주, 황대권씨(왼쪽부터). (사진/ 하종강)   

 
조작간첩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간첩’ 서준식이 비전향으로는 처음으로 살아서 옥문을 나서면서부터이다. 민가협에서 조작간첩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서 사람들은 ‘아하, 간첩이란 게 북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도 하는구나’ 하는 것을 힘들게 깨달았다. 양심수 석방의 요구에서조차 빠져 있던 간첩들, 그래서 “나는 이대로 소리 없이 죽어야만 하는가? 나는 한평생 한평짜리 독방에서 법무부 교화자료나 뒤적거리며 살아가야 하는가”- <야생초 편지>로 이제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해진 황대권의 독백이다- 라는 탄식을 해야 했던 조작간첩들은 대개 석방됐다.  
 
‘상습간첩’ 민경우를 석방하라  
 
그러나 아직도 몇몇 ‘간첩’들은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이라는 송두율 교수도 풀려났건만, 아직도 옥중에 있다. 북은커녕 해외에도 한번 못 나가본 전 범민련 사무처장 민경우는 벌써 두 번째 간첩죄로 투옥되어 있다. 이 ‘상습 간첩’은 범민련이 이적단체라는 이유로 모든 남북 행사에서 철저히 배제된 탓에 서울에서도 북쪽 사람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는 “검찰의 주장대로라면 본인은 공안기관이 도청하는 통신공간에서 지령을 수수하고 동일한 방식으로 기밀을 전달하는 전대미문의 해괴한 간첩이 되는 것”이라고 최후 진술에서 항변했지만, 여전히 그는 국가보안법과 공안기관이 살아남기 위해 ‘간첩 리철진’보다 더 어설픈 간첩이 되어야 한다. 이 연재물의 소제목을 ‘간첩의 추억’이라 이름 붙였지만, 민경우와 양심수후원회의 간사로 동분서주하는 그의 부인 김혜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분단된 조국에서 간첩을 추억이라 얘기하기에는 너무 조급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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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나?"

“아직도 사상검증?...그렇게도 ‘간첩의 추억’이 그리운가”
“내년이면 분단 60년...통일운동이 제2의 독립운동"..."이제, 분단의 그늘을 걷어내야”
2004년 12월 22일 (수) 09:21:43 평화뉴스 pnnews@pn.or.kr
   
간첩의 추억이 그리운 분들

온통 세상이 ‘간첩 천국’이라고 걱정들이다.
누가? 소위 ‘나라걱정’하시는 어르신들이다.
이들은 김대중 정부때부터 ‘그 많던 간첩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느냐’며 왜 김대중 정부는 간첩을 잡지 않느냐고 호통치던 분들이다.
이들은 언제부터인가 TV를 켜면 나오지 않는 간첩들이 무척이나 그리운가보다.
하기사 그렇다.
TV만 켜면 무시무시한 ‘간첩’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동백림 유학생 간첩단 사건’, ‘남매간첩단 사건‘, ’인혁당 사건‘,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 등등등......,
70-80년대는 그야말로 간첩천국이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조작 간첩들인 것이다.
군부독재에 저항해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불러다 온갖 고문과 위협으로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 순순히 인정하면 말 그대로 ‘간첩’이 되는 것이고 끝까지 부인하면 잘 훈련된 ‘간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독재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세주처럼 나타났던 그 간첩이 갑자기 TV화면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왜? 조작간첩으로 정통성 없는 정권을 유지했던 자들이 권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바로 97년 정권교체가 되고 민주화가 진전되었기 때문.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 탄생한 민주적인 정권하에서는 더 이상 조작간첩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여전히 과거의 반공반북의식에 젖어있는 많은 어르신들은 그시절 그때가 그리운 모양이다.
늘 익숙한 화면과 사건이 TV에서 사라지니 말이다.
그런데 이분들말고도 여전히 간첩의 추억이 그리운 분들이 있다.
바로 다름아닌 반통일세력들이다.

낡은 무성영화를 틀어대는 반통일세력

반통일세력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그들은 남과 북의 화해협력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노력에 끊임없이 딴지걸기를 시도하는 자들이다.
한나라당과 조.중.동이라 불리는 수구언론이 대표격이다.
그들은 기어코 ‘간첩의 추억’이라는 낡은 무성영화를 틀어댔다.
지난 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론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60%의 국민들이 보기 싫어한다는 그 ‘간첩의 추억’을 무리하게 이들이 틀어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만큼 그들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연 이은 집권의 실패로 정치권력을 잃은 그들에게 국가보안법은 마지막 남은 생존의 ‘동아줄’인 것이다.
그들이 상상하기도 싫은 국가보안법 폐지가 현실화 된다면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었던 냉전분단체제 - 반공군사독재체제 - 는 그 뿌리채 뽑혀 더 이상 이땅에 발붙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론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법사위 상정을 온몸으로 원천봉쇄하고 있는 것이며 마침내 치밀하게 준비한 ‘이철우 간첩 암약설’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마치 박쥐가 햇볕을 싫어하듯이 그들은 영원히 분단의 그늘에 살고 싶은 것이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으로 성큼 그들의 눈앞에 다가온 평화와 통일이라는 햇볕을 거부한 채로...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나?

그들이 분단의 그늘에 몸을 숨기고 숨 죽인채 살아간다면 그나마 덜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와 통일의 시대를 열기 위해, 독재를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던 이들에게 ‘사상검증’이라는 돌을 던져대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군부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던 폭압기구에 봉사했던 자들이다.
정통성 없는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해 일으켰던 온갖 간첩조작사건을 기획하고 조작된 간첩들을 고문하고 구속하고 폭력으로 짓밟았던 자들이다.
그들이 이제와 민주화와 통일을 꿈꾸었던 사람들,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고민했던 자들에게 ‘네가 가진 사상을 밝혀라’라며 사실상 ‘너 아직도 빨갱이지’라고 읍박지르고 있다.
참으로 염치없는 자들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조에서 22조까지 양심, 종교, 언론,출판,집회,결사, 학문의 자유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지난날 기본적 자유민주적 헌법질서마저 무시한 채 총칼로 권력을 잡은 이들에게 봉사했던 자들이 바로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자들의 사상을 검증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누가 누구의 사상을 검증한단 말인가?
사상이란 본래 양심의 자유란 것을 진정 그들은 모른단 말인가?
사람 머릿속의 사상마저 검증하겠다고 나서는 그들에게 과연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오히려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외려 독재정권하에서 폭압기구를 유지하는데 봉사했던 그들에게 물을 말이다.
‘당신들은 진정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신봉하고 있느냐고’
외려 바로 그 독재정권에서의 경력으로 평생을 출세가도를 달렸고 지금도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물을 일이다.
‘아직도 민주화운동을 탄압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정작 사상검증을 받아야 할 자들은 따로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해방 60년! 분단 60년! “이제는 달라져야”

내년이면 일제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민족사의 최대비극인 남과 북이 분단된지도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우리의 시계가 낡은 무성영화 시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분단의 그늘을 이제 온전히 걷어야 할 때이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한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시급하고도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단의 그늘을 벗어내는 일은 단지 갈라져 있는 국토를 재통합하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근현대사의 민족적 과제인 ‘자주적 통일국가’건설의 의미가 분단의 극복에 있다.
바로 통일운동이 제 2의 독립운동인 이유이다.
해방 60주년이 되는 2005년에는 ‘조작 간첩’은 이제 그만 사라지게 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남도 사랑하고 북도 사랑하는 ‘진짜 간첩’(?)이 되자.
통일을 위해 북으로 잠입하여 북녘사람들과 회합하고 인터넷으로 교신하며 민족의 통일을 함께 모의하는 2005년을 꿈구어 보자.
다시금 분단의 그늘에서 평화와 통일의 햇볕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그들에게 고발당할지라도...

김두현(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
* 1968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두현 사무처장은, [내일신문] 기자를 거쳐 [반부패국민연대 대구본부] 사무국장과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을 맡고 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해 젊음을 바치고 있으며, 이 꿈을 함께 이뤄갈 짝(?)을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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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 칼럼]은
매주 수요일마다 실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2004.12.22(수) 권혁장(참언론대구시민연대 활동위원, 대구참여연대 시정개혁센터 실행위원)
2004.12.29(수) 김동렬(대구KYC(한국청년연합회) 사무처장)
2005.1.5(수) 권미혜(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원)
2005.1.12(수) 조근래(구미경제정의실천시민운동연합 사무국장)
2005.1.19(수) 김두현(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국장)

대구경북 인터넷신문 PN <평화뉴스>

(2)

간첩의 추억/ 김명인

2004년02월18일 제497호

지금 한 재외 학자가 가족을 모두 이끌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서 “해방 뒤 최대의 간첩”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남한 사회에는 간첩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인간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 김명인/ 문학평론가 · 인하대 강사

내가 처음 글을 깨친 대여섯살 무렵, 그러니까 60년대 중반에는 관공서, 학교 등 거의 모든 공공기관의 담벼락에는 예외 없이 흰색 페인트 고딕체로 ‘반공방첩’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 단 네 글자의 표어는 아마도 내 언어중추가 그 의미도 모른 채 철수, 영이, 바둑이보다도 먼저 학습한 말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간첩 식별 요령과 “자수하여 광명찾자”로 대표되는 수많은 간첩 관련 표어와 게시물을 접하고부터 그 ‘방첩’은 전(前) 의미 단계를 벗어나 일상적 의미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엘뤼아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 위에다가 ‘자유’라고 썼고 김남주는 자기가 아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썼지만 1960년대부터 심지어 2000년대에 들어서까지도 중정-안기부-국정원, 그리고 경찰, 보안사-기무사 등에 근무하던 수많은 ‘공안시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 위에도 ‘방첩’이라고 썼다. 그 중에는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같은 희대의 걸작들도 종종 발견되었다.

 

내가 간첩이 아님을 증명해야 했던 시절

 

간첩은 누구인가? 간첩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나는 어린 시절 내내 그게 궁금했다. 누군지 알 수만 있다면, 내가 간첩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여지없이 신고해서 거액의 포상금을 받아 어려운 집안 살림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눈물겨운 생각으로 간첩 잡는 무용담의 상상 속 주인공이 되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당신을 미치도록 만나고 싶었습니다”였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간첩은 주로 신문 1면에 조직 계보도와 함께 실린, 너무 험악해서 비현실적인 사진들로 다가올 뿐이었다. 그때 그 사진들의 하나같이 험악한 모습들을 보고 어린 마음에 ‘간첩은 이렇게 낯설게들 생겼구나’라고 생각했다. 검거되어 오랜 육체적·정신적 고문의 통과의례를 마치고 구속 기소되기 직전에 찍힌 사진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처참한 몰골들임을 아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간첩들이 득시글거린다고 했는데 나는 어린 시절을 다 보내기까지 한번도 간첩을 내 눈으로 가까이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내가 대학 시절 반유신투쟁에 앞장을 서고 있던 중에도 여전히 간첩은 포상금 몇천만원과 등치되는 일확천금의 꿈속에 종종 등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낯선 타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바로 그 간첩이라고 강변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서울시경 대공분실을 거쳐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34일이라는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나를 간첩으로 확정지으려는 그들에 맞서 내가 간첩이 아님을 목숨을 걸고 증명해야 했다. 다행히 그 증명은 성공해서 나는 간첩 누명은 벗었지만, 수사가 종결된 이후에도 그들은 최소한 내가 간첩과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혐의를 지우지 않았다.

 

‘간첩’은 현재진행형이다

 

교도소에 가서야 나는 공식적으로 간첩으로 판명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기엔 ‘간첩’이라는 말에 꼭 부합되는, 이른바 남파간첩·고정간첩들이 꽤 여럿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의외로 단순명료했다. 그들은 확고부동하게 ‘이북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북한의 대남정책을 수행하는 일종의 국가공무원들이었다. 남한의 중정이나 안기부 요원도 남한의 대북한정책을 수행하는 특수직 국가공무원들 아닌가.

 

그들이 남한에 대하여 ‘명백하고 현존하는’ 체제위협 요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위협도 사실은 간첩과 관련한 수많은 위기담론들과 대중적 상징조작들보다는 훨씬 덜 위협적이었다.

 

남한의 역대 군사독재 정권들과 천민자본가들과, 그 두 세력에 기생했던 남한 사회의 모든 악한 것들은 그 ‘간첩에 관한 풍문’에 의지해서, 그 풍문을 한정 없이 부풀림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회의하는 모든 사람들은 간첩이거나 간첩의 동조자나 간첩의 사주를 받은 사람으로 낙인찍혀 이 체제로부터 추방되거나 거세되었다. 그러면서 남한 사회는 들큼하게 멍들어간 것이다.

 

지금 한 재외 학자가 가족을 모두 이끌고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서 “해방 뒤 최대의 간첩”이 되었다. 나는 이것을 어처구니없어함과 꼭 같은 정도로 지금도 남한 사회에는 간첩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인간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한때 ‘간첩’ 동조자쯤으로 취급받거나 자처하던 사람들이 이 불행한 ‘간첩’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천연덕스럽게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인의 추억’이 사실은 현재진행형이듯, ‘간첩의 추억’도 이처럼 끔찍하게 현재진행형이다.

 

(3)

 

‘추억의 간첩보도’ 부활할까

[비평] ‘탈북자 위장 간첩사건’ 조중동 보도, 익숙한 낯뜨거움?

2008년 08월 28일 (목)

정영은 송선영 기자 hands@mediaus.co.kr

오늘(28일) 대다수 일간지들은 모두 1면 머릿기사로 ‘탈북자 위장 간첩 사건’을 다뤘다. ‘10년만의 남파 간첩 체포’라 그런지 각 신문들은 지면을 대폭 할애하며 경쟁적으로 떠들썩한 보도를 내놓았다.

 

‘한국판 마타하리’, ‘미녀간첩’, ‘성 로비’ 등의 시선을 끄는 제목 아래에는, 그 옛날의 <선데이 서울>에서나 볼 수 있던 눈 모자이크(혹은 검은 띠) 사진으로 피의자의 얼굴이 붙어있다. 피의자 원씨의 30여년 인생 스토리도 함께 소개됐다. 언론사들이 영화 ‘쉬리’에 비교해가면서 구구절절 다룬 피의자의 한·중·일을 오간 연애사 등은 기사 내용처럼 마치 한편의 영화와 같아 보인다.

 

  특히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은 이번 간첩사건과 관련, 자기 매체의 본색(?)을 드러내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마치 간첩보도의 정통 혹은 절대 강자를 다투는 것 같기도 하다. 

 

  선, 햇볕정책 10년 탓하며 ‘안보 불감증’ 강조…한나라 논평과 ‘쌍생아’   

  

 
  ▲ 조선일보 8월 28일치 4면.       
 
  우선 조선일보는 28일자 A1면 기사 <위장탈북 女간첩 검거-북 공작원 원정화, 군장교 등 사귀며 기밀 빼내>에 이어 A3면 전면을 털어 <‘탈북 위장한 간첩’ 첫 적발 충격-‘한국판 마타하라’…장교들 포섭, 정보요원 암살 노렸다>, <女간첩 원정화는 누구>, <원정화 붙잡기까지> 등의 기사를 게재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A4면에서 <女간첩 충격 - ‘햇볕 10년’에 軍도 안보불감증> 기사를 통해 “이번 사건은 지난 10년간의 남북 화해무드 속에서 우리 사회가 ‘안보 불감증’에 깊숙이 중독돼 있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또 익명의 검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햇볕정책 등으로 지난 10년간 우리의 대공(對共) 시스템은 사실상 작동정지 상태였다”며 지난 정권에 책임을 돌리고 나서 눈길을 끌었다.
 
이날 조선일보 기사의 요약판은 같은 날 한나라당이 발표한 논평에서도 찾을 수 있다. 차명진 한나라당 대변인은 간첩사건과 관련 논평에서 “이것도 10년 좌파정권의 적폐다…간첩도 잡아야 하지만 친북용공풍토도 잡아야 한다”라며 ‘잃어버린 10년론’을 꺼내들어 맹비난했다.
 
중앙 “미모 여간첩” 운운…상업적 선정주의 ‘우세’
‘삼성계’ 중앙일보는 역시 상업주의적인 보도에서 한수 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오늘자 1면 머릿기사 <30대 미모 여간첩 장교 4명 ‘성포섭’-탈북 위장…군사기밀 북으로 빼내>에 이어 2면과 3면을 할애해 <군부대 맘껏 활보…장병에 북 찬양 강연 52회>, <원정화 “난 북한 보위부 소속이다” 중위 알고도 신고 안해…“사랑했다”> 등의 기사를 통해 피의자의 외모와 연애사에 집착(?)하면서 매우 선정적인 보도 행태를 선보였다.
 
중앙일보는 3면 기사 <아연 5t 훔치다 총살형 위기 / 북 "대담하다"…공작원 훈련 - 원정화 인생 34년>에서 피의자 원씨에 대해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장교들을 미인계로 농락했던 독일 스파이 마타하리의 활동과 흡사하다"면서 "그는 한국으로의 입국, 정착, 군사 기밀 수집 등 중요한 순간마다 애정 관계를 매개로 남성들을 이용했다"며 "합동수사본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다소 살이 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전형적인 북한 미인형의 얼굴"이라며 외모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이어 해당기사에 '소령의 연인, 중위와 동거, 경찰관과 사귀기도'라는 중간제목을 달면서 피의자 원씨의 여러 남자와 관련된 연애사에 대해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군인들은 모두 7명에 이른다"고 자세히 다루기도 했다.
 
동아, ‘반공’과 ‘선정성’ 동시에…조·중 따라잡기?
▲ 동아일보 8월 28일치 4면.
 
동아일보는 일단 조선의 '반공 정신'과 중앙의 '상업 정신' 모두를 따라가려 한 듯하다. 동아일보는 4면기사 <동거 20대 장교 "간첩인줄 알았지만…">에서 익명의 군 고위관계자의 말을 빌어 "군을 책임질 장교들이 여간첩의 성 농락에 놀아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은 지난 좌파정권에서 주적 개념 삭제 등으로 대북 안보관이 해이해진 것도 원인"이라는 발언을 통해 '좌파정권 책임론'을 내세우며 동아일보의 정치색을 드러냈다.
 
또 5면기사 <탈북자 신분 역이용 대북무역 벌여/ 공작금 스스로 벌고 휴대전화 지령>에서는 북한 대남간첩 조직변화'를 그래픽 기사로 다루면서 추억의 '조직도'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이어 자극적 기사 제목을 뽑아내며 여과없이 선정성을 나타냈다. 다음은 동아일보의 관련 기사 제목이다.
1면 <위장탈북 30대 女간첩 검거>
4면 <장교들에 性(성)미끼로 軍(군)기밀 수집 ‘한국판 마타하리’>
4면 <동거 20대 장교 “간첩인줄 알았지만…”-사랑에 속은 ‘원씨의 남자들’>
5면 <“장교가 여간첩에 놀아나…” 당혹한 軍>
결국 일관된 공통점은 조선일보가 원조인 “공산당이 싫어요”식 보도, 즉 ‘공안 선정주의’ 혹은 ‘안보 상업주의 보도’다. 물론 이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그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는 저널리즘’이 밑바탕되어야 빛을 발하게 된다.
 
더욱이 이번 사건은 지난해 신정아 게이트를 통해 보여준 ‘연애담’ 집착적인 보도 행태에, 시뻘건 ‘반공’까지 합체된 셈이다. 그야말로 언론에는 확성기 볼륨을 한층 높여야 하는, 더할나위 없는 ‘장날’이 온 것이다.
▲ 한겨레 8월 28일치 9면.
이 가운데 한겨레는 유일하게 피의자의 사진을 넣지 않고, 수원지검 검사의 수사결과 발표 장면을 실었다. 28일자 사회면(9면) 기사 <‘탈북자 위장 여간첩 검거>와 <여간첩 어떻게 살았나> 등을 통해 한겨레는 “중요기밀 유출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경찰 조사를 보도했다.
 
한겨레의 이날 보도는 합수부 조사 일부 내용과 관련, 의문을 제기해 여느 매체 보도들과 차별성을 나타냈다. 해당 기사<‘탈북자 위장 여간첩 검거>에서 “3여년 전 간첩혐의의 꼬리를 잡고도 이제야 구속기소해 의문점도 생겨나고 있다”면서 “원씨가 (북핵은 자위용 등) 공작원으로서 대담한 발언을 하고 다녔다는 점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 미디어스(http://www.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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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의 추억 - 첫비-
흑장미 (blackrose010) | 12.0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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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곤의 세상 이야기

 추억의 교과서, '그때 그 시절' 생각나네.

 

어제는 오랫만에 '메일 청소'를 했습니다.

제게는 생활의 지혜나 경영정보나 사진자료들을 정기 메일로 보내주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시는데, 그 메일들 중에 보기 힘든 사진이나 귀한 자료들이 담겨 있을 때는 삭제하지 않고 놓아 두었습니다. 그것들이 너무 많이 쌓여서 필요없는 메일을 지우는 청소를 한 것입니다.


청소를 하다보니 고등학교 동창이 보냈던 <추억의 교과서>란 제목의 메일이 눈에 띄어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2006년 2월에 보냈으니 3년도 더 지난 메일이고, 약 30년 전의 초등학교 1학년 바른생활 교과서에 대한 글이군요.

아마 저도 그 교과서로 공부했을 듯해 제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그 무렵 우리 사회의 모습도 볼 수 있는 귀한 내용도 들어 있어 블로그에 소개합니다.

친구의 사진과 글은 손질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 실었습니다.

* 추신 : 글이 올라가고 나서 '윤태'님으로부터 댓글이 왔군요. 알고보니 제 친구가 올린 글이 아니라 윤태님이 올린 것을 퍼 온 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원저자를 윤태님으로 수정하고, 그 분의 주소를 올려드리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원작자에게 피해를 끼친 점 사과드립니다.

'추억의 교과서 윤태'  또는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0059499

 

 
▲ 25년 전 바른생활 1학년 1, 2학기 교과서.
25년 전 ‘국민학교’ 1학년 1, 2학기 바른생활 교과서 표지입니다. 이 표지 보면서 그때 그 시절 추억이 떠오르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아련한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1학년 1학기 바른생활 교과서의 맨 처음 본문입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날아다니고 파란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네요. 오후 다섯시만 되면 어김없이 울려 퍼졌던 애국가를 들으며 벅차오르던 가슴에 손을 얹었지요. 그땐 그랬습니다.

▲ 서로의 목숨을 구해준 개미와 비둘기
물에 빠진 개미가 허우적거릴 때 비둘기가 나뭇잎을 떨어뜨려 구해 주었지요. 사냥꾼이 비둘기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때 개미가 사냥꾼의 다리를 물어 결국 비둘기를 구해 줬지요. 미물이지만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지요.

▲ 토끼와 거북이.
토끼와 거북이입니다. 빠르다고 해서 자만할 것도 없고, 느리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도 없겠지요. 결국 토끼와 거북이는 사이 좋게 어깨동무를 하며 산을 내려오게 되지요.

▲ 개미와 매미 이야기.
개미와 매미입니다. 여름내 노래만 부르며 놀던 매미의 표정이 정말 씁쓸해 보입니다. 반면 개미네 집은 아주 든든해 보이지요? 그런데 개미와 매미가 맞나요? ‘개미와 배짱이’로 배운 것 같은데 교과서를 자세히 보니 개미와 매미입니다.

▲ 한국전쟁 이야기.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는 것이 글의 요지.
한국전쟁에 대한 내용이 1학년 1학기 교과서에 나와 있습니다. 반공 교육 차원에서 그때는 그랬지요. 글과 그림을 보니 삐라를 주우러 다니던 기억도 납니다. ‘모의 간첩’의 뜻도 모르고 간첩을 신고한다며 산속의 묘지를 탐색하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는 대한민국-새마을 운동.
열심히 일한 농부는 큰 수확을 올리고, 그러지 않은 농부는 쭉정이만 들고 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새마을 운동에 관한 것입니다. 농지 정리, 도로 포장, 철로 신설 등 당시의 상황을 교과서에 아주 잘 실었습니다.

▲ 북한은 못 살고 우리 나라는 잘 산다며 반공 교육에 열 올리던 그 때 그 시절.
집단 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는 북한 주민과 먹을 게 없어 굶주리고 있는 그곳 주민들을 그렸습니다. 그땐 그랬습니다. 북에는 자유가 없고 못 먹고 못 사는 반면 남한은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반복해서 가르치곤 했었지요. 역시 반공사상 때문이었죠.

▲ 중동 국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우리 나라 건축 기술자들.

이 글을 읽다보니 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 오더군요. 



저는 1959년에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일본 제국주의 냄새가 나는 국민학교였고, 흰 칼라가 달린 교복을 입고, 아침마다 운동장에서 '차렸' 자세로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들어야 했습니다.

청계천변이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일 때이니 '상전벽해(뽕나무 밭이 바다가 되다)'란 말이 실감 나지요?



아래 사진은 제 고향 전주의 1959년 자료 사진입니다. 사진의 뒤쪽에 보이는 '풍남문'은 전주의 남쪽 관문으로 지금은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입니다.



저는 전주 초등학교 운동장 한쪽에 세워진 천막교실에서 가슴 설레는 1학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마 아래 사진에 나오는 소녀들처럼 교과서를 펼쳐 들고 열심히 선생님을 따라 글을 읽었겠지요.

  
아! 얼굴도 어여쁘고 맘씨도 인자하고 저를 무척 아껴 주셨던 1학년 담임선생님도 그리워지고, 운동장을 뛰놀고 달음박질도 함께 하던, 그러나 지금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 어린 벗들도 미치도록 그리워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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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추억의 테이블게임을 알려주마

2000.11.08.수요일
딴지 엽기고증부 백수광부

지난 23호에 <추억의 테이블게임을 알려주마>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개구리 따먹기, 책받침 축구, 동전 농구 등 학원체육의 기틀을 다져준 이들 테이블 게임은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미처 싹을 틔워 보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게임은 가도 추억은 영원한 법..

한 때 열렬한 테이블 게임 매니아였던 20-30대 독자들과 전국 각지의 재야 게임 연구가들은 자신들의 경험 및 수집한 게임사료을 보내왔고, 본지도 지난 기사에서 미처 다르지 못한 게임분야에 대한 연구에 착수, 드디어 추억의 테이블 게임 2탄을 내보내게 되었다.

지난 기사에서는 개구리 따먹기 등 자작 테이블 게임을 다뤘고, 딱지에 관해서는 별도의 기사로 내보낸 적이 있으므로 이번에는 문방구에서 판매했던 종이게임, 이른 바 페이퍼 테이블 게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뱀주사위 놀이

뱀 주사위 놀이.. 이 단어만 들어도 갑자기 소시적 추억이 스멀스멀 마구 또아리를 틀려고 하지 않는가? 보통 종이게임의 경우 인형놀이, 야구게임 등 남녀 종목이 확연히 구분되지만 이 뱀주사위 놀이만은 남녀 구분없이 누구나 즐기던 놀이였다.



4절지 크기의
뱀주사위 놀이 원형



인기를 끌자 공책 뒤에
축약형 게임으로 등장하기도..

어떤 방식으로 하는 지는 척 보면 아시리라. 절라 간단하다. 그냥 100까지 먼저 도착하면 이기는 거다. 그러나 어느 번호에서는 윗 칸으로 점프를 할 수 있고, 어떤 번호에서는 아래로 뚝 미끄러져 내리기도 하기 때문에 절대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게임이다. 또한 후발 게이머는 앞 게이머의 말이 있는 번호에 안착하게 되면 앞 게이머는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전통 윳놀이 방식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잘못을 저질러 추락할 때는 뱀을 타고 미끄러지고, 선행을 해서 점프할 때는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 간다는 사실이다. 뱀과 고속도로. 뭔가 핀트가 맞아 떨어지는 조합이 아니잖아..

점프시에 고속도로를 사용한 것에는 당시 시대상황이 한 몫을 했다. 원래 뱀주사위 놀이판의 고속도로는 원래는 용으로 디자인된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용을 타고 올라가고, 나쁜 일을 하면 뱀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온다는 전통적인 개념을 가지고 디자인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이판 발매 직전, 당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당시 고속도로 건설이 불필요한 국가재정의 낭비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박통은 고속도로 건설을 밀어 붙였고, 비판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고속도로의 유용성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73년경 대통령 비서실, 문화공보부 등에 의해 용이 고속도로로 바뀌었고, 정권의 필요성에 의해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국민오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관제게임'의 성격이 강했던 뱀주사위 놀이는 또다른 측면에서 정권의 홍보수단으로 충실히 그 역할을 다했다. 즉 고속도로를 타고 위로 올라가거나 뱀을 타고 미끄러질 때 각각의 번호에는 어떠한 행동이 그림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착한 일을 하면 위로 올라가고 나쁜 일을 하면 아래로 미끄러지는 식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많이 상승하는 것은 간첩을 잡아서 14번칸에서 66번칸으로 상승하는 것이고,  가장 많이 하락하는 것은 간첩신고를 하지 않아서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를 범하여 74번칸에서 20번칸으로 무려 54칸이나 하락하는 것이다. 아.. 무서븐 국가보안법.
 

       

  간첩을 잡으면 고속도로를 타고 52칸 상승을 하고..
간첩 허위신고시에는 54칸하락의 쓴맛을 보고..  

 

학교 담벼락에서부터 애덜 공책까지 반공방첩이 넘쳐났던 시절,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이룩하자 유신과업'따위의 삭막한 구호가 일상적인 70년대에는 애들 놀이에까지 반공 이데올로기가 깊숙히 침투했던 것이다.



테이블 축구

다음으로 소개드릴 것은 이미 지난 기사에서 소개한 바 있는 축구게임이다. 그런데 지난번 고증기사에서 이 축구게임을 책받침 축구라고 보도했는데 사실 정확한 명칭은 테이블 축구 혹은 마분지 축구가 되겠다.

테이블 축구의 주재질은 비영구적인 마분지로 되어 있어 보통 20-30여회의 게임을 치루면 종이잔디가 너덜너덜해지곤 했다. 허나 종이로 되어 있는 만큼 아폴로나 쭈쭈바 정도와 비슷한 싼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딴지일보 졸라 스페셜>의 부록으로
본지가 재현해 낸 7,80년대 마분지축구
 

게임판을 사면 이쁘게 그려진 플라스틱 축구공을 두 개 주는데 게임을 하다보면 그 축구공을 모두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축구판과 공은 한 묶음으로만 판매하였기에 이 축구공을 따로 구입할 수 없었으니,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얼라들은 축구공 재질과 유사한 책받침을 잘라 만든 자작 축구공을 만들기도 했다. 멀쩡한 책받침이 축구발전을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이빠진 책받침을 끼우고 필기를 하다가 연필이 축구공을 따낸 구멍에 들어가서 공책이 찢어지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묶음 판매라는 어른들의 상혼에 애꿏은 공책만 찢어먹었던 것이다.

     

축구게임판을 보면 선수들의 포지션에 따르는 명칭이 요즘 보는 명칭과는 조금 다르다.  레프트인너 라이트인너. 레프트하프, 라이트하프...

테이블축구의 포지션을 전술적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공격 5명 수비 5명 골키퍼 1명이다. 요즘과 같은 미드필더 개념이 없다. 이 포메이션은 W-M 포메이션이라는 것인데 1925년 잉글랜드의 프로명문 아스날이 세계최초로 만들어낸 축구전술이었다.

W자 모양으로 수비수의 5명의 포지션을 정하고 M자 모양으로 공격수 5명의 포지션을 정해놓고 체계적인 전술을 펼치는 것이다.  W-M포메이션은 이후 20~30년간 세계 축구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이 포메이션의 주된 전술은 윙과 윙백이 띄워 올린 공을 센터포워드가 받아넣는 차 넣은 방식으로 유럽식 힘의 축구의 전형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은 얘기지? 이게 바로 지금 우리나라 축구가 수십년째 써먹는 그 전술이다. 남들은 한창 4-4-2니 3-5-2 류의 미드필더를 강화하는 전술과 토탈 싸커 등 새로운 축구전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을 때, 우리는 테이블 게임의 후진적인 W-M 포메이션을 고수하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마분지 축구게임이 있었던 거고..

그렇기에 한국 축구가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주전 선수를 유럽으로 보내고, 잔디구장을 늘리는데만 신경쓸 게 아니라, 새로운 포메이션의 신형 마분지 축구를 보급하는데 더욱 노력해야 할 줄로 본다.

모 이건 그냥 그렇다는 얘기고, 그럼 우선 예전의 추억을 되살려 재미있게 테이블축구를 즐겨보자.  테이블 축구게임의 방식을 설명하자면..

 상대 골대에 골 넣으면 골인이다.
 (골대는 미리 잘려진 부분을 세워 놓음으로써 3차원 입체게임이 가능하다)

 공은 샤프나 볼펜의 끝부분, 또는 손톱을 이용하여 끝부분을 살짝 튕겨주면서 움직인다.

 공이 상대편 선수에게 닿거나 지정된 경기장을 벗어나게 되면 바로 상대편에게 공격권이 넘어간다.

 공은 골에어리어 선 안까지 몰고들어갈 수 없다.  골에어리어 선 밖에서 슛을 쏘아야 한다.

 핸드링은 없다. 골키퍼 아니라도 손을 사용해도 무방하다.


이상은 테이블 게임의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 경우 승부욕에 사로잡힌 일부 유저들이 공을 살짝살짝 조금씩 수도 없이 튕기면서 드리블을 하는 꽁수를 부리는 폐단이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고학년들은 드리볼을 2-3회로 제한하고, 그때까지 패스나 슛을 쏘지 못하면 근처의 상대편 선수에게 공을 넘기게 하는 룰을 적용하기도 했다.

 

 테이블 야구

우리나라 대중스포츠의 양대산맥은 야구와 축구다. 당시 차붐의 활약을 등에 업은 축구와 고교야구의 열기를 앞세운 야구는 막상막하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나 테이블 게임에서 있어서는 테이블 야구가 테이블 축구의 인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테이블 야구는 야구공의 재질에 따라,  그리고 가위로 오릴 때의 단면의 모양에 따라 공이 지나치게 잘 튀는 경우가 많아서 공정한 게임을 치루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홈플레이트 부근에서 볼펜끝으로 공을 튀기기 때문에 이 곳만 빨리 헤져 버려 오래 사용할 수 없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테이블 게임은 공격자가 펑고볼을 때리듯 홈플레트 위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야구공을 올려놓고 볼펜이나 샤프끝으로 튕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때 야수의 몸에 공이 닿으면 아웃, 빈 공간에 떨어지면 안타 식으로 게임이 진행됐다.

실제 야구와 다른 점은 아웃선이 있어서 (보통 투수 앞에 그어져 있었음) 그 안에 떨어지면 아웃이 되고, 2루타 선과 홈런 선도 있었다.  
  

 종이인형 놀이

마지막으로 종이인형놀이!  종이인형은 테이블게임은 아니지만 놀이의 일종으로서 마분지를 가지고 논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어서 여기서 잠깐 같이 소개한다.  

 

자! 보시라.  여성독자님들아 기억이 나시는가? 7,80년대 대한민국의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 쯤은 해보았을 종이인형놀이. 본 우원도 어린 여동생이 문방구에서 인형놀이판을 사오면 가위로 인형을 정성스레 오려주곤 했던 기억이 난다.

여동생이 어리다보니 가위질, 손놀림이 정교하지 못해서 대신 인형을 오려주었는데 인형을 오릴 때의 핵심뽀인트는 까만테두리선을 잘 살리는 것이다. 까만테두리선이 일정한 폭을 유지하도록 오려야 인형이나 옷이 이쁘게 보인다.

빨간 부분을 잘 오려내는게 진정한 노하우.

그리고 인형의 목부분과 옷의 걸개부분이 구부려지지 않도록 잘 오려야한다. 너무 얇게 오리면 쉽게 너덜너덜거려 지고, 너무 굵게 오리면 때깔이 안 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형놀이를 하다보면 꼭 인형 목부분이 부러지고 흐늘해지다가 떨어져버린다. 인형을 버리고 새 인형을 사면 될 텐데 그동안 인형에 정이 든 애덜은 그렇게 쉽게 바꿀 생각을 못하고 울고 만다. 그럴 때면 뒷면에 목과 몸통에 테이프를 붙여서 연결한 성형수술로 인형을 살려주면 되었다.

그리고 인형놀이를 하다보면 파티는 빠질 수 없는 부분.. 여자애들은 이 파티를 위해 화려하고 많은 레이스가 달린 초호화 드레스를 모으기에 여념이 없다. 이러다 보니  인형놀이판에는 초호화 드레스, 공주복, 파티복같은 옷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평상복은 거의 소품수준이다.

좀 나이가 있고 그림재주가 있는 여자아이들은 인형과 옷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고 그것을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기도했다. 이러한 인형놀이로 감각을 키운 20대 중후반들은 이제사회을 끌고 나갈 주역으로 성장하였으니 패션디자인 강국으로서 명성을 드높일 날도 멀지 않았다.


이로써 두 차례에 걸쳐 테이블 게임에 대해 살펴 보았다. 변변한 놀이 기구 하나 갖지 못했던 어린 시절, 우리는 소박한 테이블 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우정을 쌓아 갔다. 수입된 외국의 테이블 게임인 카지노 게임이 열풍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문득 추억이 서린 축구나 야구같은 토종 테이블 게임이 그리워 지는 건 나혼자만의 생각일까?

 

딴지일보 엽기고증부 자문위원 겸
인터넷전문신문 뉴스보이 논설위원 백수광부
(shlee@newsbo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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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삐라의 추억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 2008.11.14

워낙 나라가 복고풍으로 돌아가다 보니 매일 신문 지상에서 케케묵은 낱말들을 다시 보게 된다. ‘백골단’, ‘불온서적’, ‘이적단체’, ‘좌익척결’ 등. 그러더니 며칠 전에 급기야 주책없이 ‘삐라’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듣자하니 우익단체에서 북한을 향해 삐라를 매단 풍선을 날려보내고 있단다.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것이야 존중해야 할 하나의 견해라 쳐도 그 견해를 실천하는 방식의 그 아득한 원시성이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 30년은 뒤떨어졌을 낙후한 북한사회와 똑같은 시간대를 사는 이들이 바로 대한민국 우익. 어쩌면 수준이 그렇게 똑같을까?

21세기에 주책없이 튀어나온 ‘삐라’를 추억하려면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던가? 우연히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를 한장 주웠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파출소에 들고 갔더니, 경찰 아저씨가 기특하다고 칭찬하며 상으로 얇은 연필 한 자루와 만화책 한권을 준다. 만화는 손오공이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을 잡는 내용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 종이 쪼가리 하나가 지닌 이 막강한 교환가치는 어린이의 심성에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중요한 정보는 모름지기 공유하는 것이 공동체 성원의 도리. 다른 아이들에게 얘기했더니, 저 멀리 들판에 나가면 도처에 널린 게 삐라란다.

다음날 우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의 논과 밭을 뒤져 무려 86장의 삐라를 주웠다. 그것은 곧 연필 86자루와 만화책 86권을 의미했기에, 그 추운 겨울날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춥지 않았다. 벌판에서 주운 노다지를 들고, 우리는 함께 파출소를 찾았다. 그런데 경찰 아저씨의 태도가 하룻밤 사이에 돌변했다. 연필과 만화책을 주기는커녕 외려 꿀밤을 주며 야단을 친다. “너희는 공부는 안 하고 만날 삐라만 주우러 다니냐?” 얼마나 황당한가. 아무튼 이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생이란 단순한 수학으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행동반경은 넓어졌고, 그럴수록 삐라를 볼 기회도 많아졌다. 하지만 이제 삐라로 연필과 만화책을 얻을 수는 없음을 알기에 삐라의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야 했다. 마침 당시는 우표 수집이 크게 유행을 하던 시절. 삐라의 종적 다양성을 연구하는 차원에서 벌판에서 주운 삐라들을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삐라의 수집을 시작하면서 벌판에서 삐라를 보는 나의 안목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오로지 양만 추구했다면, 이제는 삐라의 질적 가치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표 수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역시 디자인의 독창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다.

‘춥고 배고픈 설날’, ‘박정희 역도’, ‘김일성 수령 동지 만수무강 하소서’, ‘양키 고우 홈’, ‘남조선은 미국의 52번째 주’, ‘발전하는 평양의 모습’ 등. 시간이 갈수록 앨범은 내용적으로, 형식적으로 풍부해져만 갔다. 하지만 나의 이 고상한 취미는 오래 가지 못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서 내 앨범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 살벌하던 시절, 자기 집에서 다량의 이적표현물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갖다 불살라버리라고 하셨다. 결국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나의 컬렉션은 너무나 허무하게도 화염 속에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고 말았다.

30년 만에 다시 접한 ‘삐라’ 얘기. 남에서 북으로 보내는 삐라에는 연필이나 만화책 대신 간간이 달러나 위안화가 붙어 있다고 한다. 남쪽의 도발에 북쪽에서는 작정이라도 한 듯 이같은 행태가 계속될 경우 개성공단의 경협까지 중단하겠다고 위협하고 나섰다. 대책없이 설치다가 통미봉남에 걸려 북한의 눈치를 살피는 정권에 이게 적잖이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우익단체에서 하는 일, 촛불 때려잡듯 때려잡을 수도 없잖은가. MB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은 대한민국 우익. 잘한다, 파이팅.

글 : 진중권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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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대공계 형사의 추억
(2006. 2. 13)



제 선배들은 물론이거니와 얼치기였던 저보다 열심히 살았던 동기나 후배들은 ‘대공계’ 형사들하고의 인연이 한 자락 걸쳐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대공계 형사라면 어려서 열심히 보던 드라마 ‘추적’이나 ‘113 수사본부’에서 영웅적으로 그려졌던 형사들 외엔 별 기억이 없습니다.  물론 학교 앞에서 등굣길의 저를 날카롭게 검문하고 가방에서 나온 조국통일 머리띠를 들고서는 일장 훈계를 했던 사람도 대공계일 것이고, 가끔 학교 앞에서 선배들이 ‘저게 오 형사야.’라고 일러주던 반백의 신사도 학교를 담당했던 형사였겠지만, 어두컴컴한 방에서 그들의 취조를 받거나 혹여 제가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정도로 ‘큰 인물’이었던 적은 다행히도 (불행히도?) 없었습니다.

그렇듯 순진한 민간인(?)으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도 선량한(?) 시민으로 살고 있는 제가 과거의 이 ‘대공’ 형사들을 경향 각지로 찾아다니며 면접할 일이 있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얘기입니다만 요즘은 아예 ‘대공계’ 또는 ‘대공과’라는 이름이 아예 사라졌더군요.  즉 보안과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디다.  제가 만난 형사들 가운데 인천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년퇴직을 1년 앞둔 형사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과 하루 종일 서울과 인천을 쏘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었지요.  고 박종철씨의 죽음을 덮으려 했던 박모 치안감이 얼마나 유능한(?) 간첩 잡이 전문가였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고문에 가담했던 조 아무개라는 사람은 대구에서 날고 기는 대공형사였는데 서울로 스카우트(?)된 지 몇 달만에 신세를 조져 버려서 인생만사 새옹지마의 실례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운동권 총동원령이 내려졌던 86년 5월 3일의 인천의 생생한 기억들..... 이른바 한때 ‘적의 심장부’(?)에서 활동하던 늙은 수사관의 회고를 듣는 것은 색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아득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범인 문 아무개가 지금 뭐하고 사는지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끌러도 풀어도 다하지 않을 것 같은 베테랑 대공 형사의 이야기 보따리 끝에 제가 툭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간첩 잡아 보셨어요?”
“.......  심문은 해 봤죠.”  
“아니 수십 년 동안 많이 잡으셨을 거 같은데.”
“학생들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  

별 뜻 없이 하신 말씀이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분의 짤막한 말, “학생이나 위장 취업자들은 잡아 봤지만 걔들은 간첩은 아니고.....”에서 다양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공적(?)을 과장하거나 불려서 늘어놓고 계신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대적했던 사람들에 대해 약간의 연민을 지닌 듯 보인다는 것.  

제 다음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젤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과연 그 입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저는 궁금했습니다.  왕년에 박노해를 길렀노라 기염을 토하다가 지금은 참말이지 보면 토 나올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김 아무개 의원님이나 인천에서 오래 생활했을 노회찬 의원이나 그 외 지금은 쟁쟁한 기라성이 되어 버린 사람들의 옛날 이야기가 흘러나오지 않을까 적지않이 기대를 하기도 했지요.
“하나 있네요.  그런데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네. 조.... 뭐였는데 서울대 79인가 80인가, 아니 훨씬 더 아래일 수도 있고.....”  

서울대 법학과 출신의 조 아무개 학생은 학교를 마치지도 않은 채 인천의 어느 공단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여 암약(!)하다가 공장주의 신고로 결국 이 형사님한테 덜미가 잡혔답니다.  어쩌면 지금 제 앞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지 않는 이 형사님도 당시엔 저승사자같이 무서운 몰골로 그 학생 앞에 섰을 수도 있겠고 맛 좀 보라고 고춧가루 그득 탄 물을 코에 들이부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짐짓 소름이 돋았습니다.  한 개인의 인간성 따위는 처참하게 망가지는 시대의 첨병들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기억 나시죠?”
“밥을 주니까, 왜 그 천주교인들이 성호를 긋잖아요?  그런데 걔는 구호 외칠 때 팔 뻗는 거, 그걸 세 번 힘 있게 내지른 뒤에 밥을 먹더라고.  내가 데리고 있었던 내내 그랬어.  구호를 외치는 것도 아니야.  그냥 척 척 척 세 번 딱 하고 밥을 먹어.”
“그리구요?”
“말도 없는 놈이었어요.   샌님도 그런 샌님이 없었어.  주변 조사해 보니까 뭐 의식화같은 걸 시도하지도 못했더구만.  그렇게 수줍어했대.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더라고.  위장 취업이라는 것도 좀 붙임성이 있고, 사람들하고 사와리가 좋아야 뭐 하는 거 아니우.  그런데 녀석은 영 아니더라고. ”
“그리구요?”
“잡혀 온 놈들 중에 말 잘하는 놈 참 많았거든.  그런데 걔는 진짜 말 한 마디 안 했어.   취조할 때도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그게 다였어.   하지만 그런 느낌 있잖아. 아 이놈은 진짜구나. 겁도 안 먹을 것 같고, 눈치도 안 볼 거 같은 놈.  밥 먹으면서 걔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팔을 뻗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그 샌님이 무섭더라고.  좀 말을 시켜도 한 마디도 안해.  마치 벙어리처럼.”

단지 그 이유로 기억에 남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싱겁다 싶었습니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눠 보지 못한 사람이 형사 인생 수십 년에 제일 큰 기억으로 남았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지요.  서울 법대를 나왔다니 그래도 고시라도 봤을 것이고 어느 동네에선가 인권 변호사 쯤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싶어 지금은 뭘 하는지 아시냐면서 심드렁하게 물었을 때 형사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죽었어요.”
“네?”
“집행 유예로 나왔거든.  그런데 다른 공장에 또 갔다는 건 들었어요.  어느 날 부평역 앞에서 녀석을 우연히 만났지. 그래 역 앞에서 한 1시간 동안 붙잡고 훈계, 아니 하소연을 했어.  너 제발 이렇게 살지 말아라.  녀석은 강원도 태백인가가 고향이었어.  아버지는 광부였고.   그 아버지가 얘가 서울 법대 갈 때 얼마나 좋아했겠어.  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 거야.  막장 인생에서 용 난 거 아냐.  그런데 그런 자식을 내 손으로 잡아 넣었고, 또 그런 일을 한다고 하니까 내 가슴이 다 아프더라고요.  빌었다니까. 걔한테..... 나중에 너 잘 된 뒤에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 되는 거니까, 제발 학교로 돌아가라구요. ”

그 만남이 있은 지 달포가 지났을 때 형사님은 동료가 전하는 조 모 학생의 비보를 들었습니다.  위장 취업 중이던 공장에서 밤샘 작업을 하다 깜박 졸았고 그예 컨베이어 벨트에 말려 차갑고 무거운 기계의 금속성 밑에서 그 젊은 피를 쏟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형사님은 그때 자기가 강원도 태백의 고인의 아버지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봐요. 태백에서 서울 법대 간다고 했을 때 그 아버지 얼마나 좋아했겠어.  모르긴 해도 동네 잔치를 3박 4일 했을걸......  그런데 그 아이가 공장 컨베이어 벨트에서 죽었다......”

그분의 한숨 섞인 회고에 함께 어깨를 늘어뜨리며 지금 살았더라면 그래도 좋은 세월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하고 한 마디를 덧붙이자 그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걔는 그런 깜냥도 없었을 거예요.   그럴 놈이면 그 추운 날 길거리에서 자기 잡아넣은 형사 얘기를 1시간 동안이나 듣고 있겠어?  뿌리치거나 그냥 가버리면 되지.......  지금도 궁금해.  걔가 내 얘기를 듣고 있었던 이유가.......  겁나서 그랬던 건 분명히 아니고......”
        
조 모 학생은 그 1 시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렇다고 형사에게 대들거나 무시하지도 않은 채 묵묵히 형사의 훈계성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다지요.   “차라리 이 독재자의 개새 끼야 뭐 이런 욕이나 하고 가 버렸으면” 그렇게 맘에 아리지도 않았을 텐데 며칠을 라면으로만 때운 걸 증명이라도 하듯 얼굴은 붓고 손목은 말라버린 채 그는 한 형사의 넋두리를 묵묵히 들어 준 뒤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한 뒤 헤어졌다지요.  

지금 어렵사리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신 분의 항소 이유소의 한 구절, “가장 온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를 만들어' 냈던 시대를 살았던, 정년퇴직을 앞둔 전 대공계 현 보안과 형사는 자신이 잡아 넣었던 한 젊은이, 밥 먹기 전 세 번 팔을 뻗으며 뭔가를 다짐했지만 그 다짐을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강원도 출신 젊은이의 짧았던 젊음을 토로하며 여러 번의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한숨에 실린 듯 멍하니 있다 보니 궁금해지는 게 있었습니다.  
“그럼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신 건 없네요? 또 기억나는 건?”
“그렇죠.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하고...... 유치장에서 걔가 부른 노래가 있었는데....  시끄러운 투쟁가 뭐 그런 건 아니었고......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였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요?”  
“그 노래는 걔가 죽은 뒤에 나왔지. 하여간 뭐 그런 노래였어.”

집에 돌아와서 아내가 손톱을 깨끗이 깎아 준 김에 기타를 잡고 뚱땅거리다가 문득 형사가 채 기억해 내지 못했던 고인의 노래가 머릿 속에 들어섰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 세상 사는 동안”이라는 노래였던 것 같습니다.  C 코드로 시작하는 그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를 실로 오랜만에 읊조리면서 저는 근 20년 전 인천 한 공장의 기계 속에서 생을 마감했던 한 사람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불렀을지 모르는 노래를 1,2,3절까지 다 불러 보았습니다.  원래 1,2절은 찬송가였습니다만 3절은 고인과 비슷한 삶을 선택한 누군가가 덧붙였다고 했지요.  

그 후렴구입니다.... “너와 나 함께 손을 잡고 이 길을 걸으며...... 죽어도 뺏지 못할 생의 자유를 되찾자.”  


http://bob.jinbo.net/album/down.php?table=albumpiece&no=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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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여담>
개혁의 추억

 

영화 ‘살인의 추억’이 히트한 이후 무슨 말에 ‘추억’이라는 명사를 접합시키면 아주 근사해 보인다. 요즘 개혁이란 말이 다시 유행하니까 ‘개혁의 추억’이란 제목을 화두로 삼아 보면 어떨까. 개혁과 반개혁, 보수와 진보, 중도와 급진 등 이른바 개혁 노선을 둘러싼 말의 성찬이 펼쳐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1982년 1월 5일 통행금지가 해제됐다. 통행금지가 있을 때는 밤 12시가 되면 전국에 사이렌이 울려 퍼진다. 사이렌은 위험을 경고하는 확성기(擴聲器)다. 날카롭고 요란한 소리만 내면 되는 간단한 장치다. 주로 선박, 경찰차, 소방차, 공습 경보 등에 쓰이니까 이 기계의 못된 성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자정에 이것이 ‘애엥-’하고 울면, 미처 집에 당도하지 못한 취객들, 허둥지둥 귀가하던 야근자들은 모두 경찰에 체포 아닌 체포를 당한다. 체포를 면하려면 골목길에 숨어야 한다. 거리는 정적에 잠기고 사람들은 숨을 죽인다. 파출소에 연행된 사람들은 훈계를 듣고 새벽 4시 풀려난다. 통행금지는 밤의 저승사자와 같다.

야간 통행금지는 광복 직후 1945년 9월부터 37년간 실시됐었다. 생활 속에 젖어든 이 제도를 없앤다고하자 그 때의 보수 꼴통들이 들고 일어났다. 도둑이 들끓고 간첩과 오열이 암약하는 지금 그것을 폐지하면 어떡하나. 그래도 통행금지 폐지는 단행됐다.

1983년 1월부터는 해외여행시 외환휴대 한도가 대폭 상향 조정됐다. 그때까지는 500달러를 갖고 나가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해외여행자들은 달러를 짐 속에 숨기고 양말 속에도 숨겨 나갔다. 그 한도를 일거에 3000달러로 높였다. 달러 한푼이 아까운데 어떡하려고 그러느냐는 보수 꼴통들의 걱정은 일축됐다. 1983년부터는 전국의 중·고등학교 교복 착용이 자율화됐다. 근대 교육이 도입된 이래 무려 85년간 입었던 중·고교의 획일화된 제복이 사라졌다. 후일담이지만 여행경비 확대와 교복 자율화는 너무 성급한 개혁으로 판명됐다. 여행경비는 다시 축소됐고 교복 자율화는 서서히 교복 착용으로 선회했다.

당시의 개혁 주도세력은 자유화 민주화를 탄압한 반란·내란 세력이다. 지금으로치면 원조 보수 꼴통들이다. 그런데 지금 개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개혁만 생각한 사람들이고, 해외 나들이를 제집처럼하는 세계인들이다. 한국인의 도약과 웅비를 약속하는 개혁이 기대된다.

[[김성호 / 논설위원]]



기사 게재 일자 200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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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되살아난 '궐기대회의 추억'
[고태진 칼럼] 사랑·은혜 대신 불신·증오의 언어 토해낸 사람들
04.10.05 11:09 ㅣ최종 업데이트 04.10.05 14:27 고태진 (ktjmms)

▲ 개신교내 보수단체인 한기총과 극우단체인 반핵반김국민협의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수호 국민대회'가 4일 오후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렸다.
ⓒ 권우성
장년층 이상의 연배라면 누구나 '궐기대회'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주로 간첩사건이나 '북괴'의 만행이 있었던 시기면 전국적으로 벌어지곤 하였다. 큰 운동장이나 광장에서 '상기하자 6.25', '때려잡자 김일성', '박살내자 북한괴뢰' 등의 수많은 펼침막이 동원되었고, 늘 등장하는 연사들은 과장된 비분강개를 토해냈고 청중들은 판에 박힌 구호들을 목청껏 외쳐댔다.

주로 청중들은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이 많았고, 각 동이나 직장별로 동원된 시민들이 나머지 자리를 채웠다. 물론 공산당과 '북괴'라면 치를 떠는 자발적 참가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인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꼭 등장하는 게 혈서쓰는 순서였고 '김일성 화형식'이었다. 손가락에 상처를 내 '멸공'이나 '승공'의 구호를 흰 천에 쓰는 장면은 궐기대회의 절정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땐 참 살벌한 시기였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때려잡고 절멸시켜야 할 철천지원수로 대하던 시대였다. 또한 북한은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당장에 쳐내려와 대한민국을 집어삼키려 호시탐탐 노리는 무서운 존재였다. 독재 정권의 안보를 위해 '악마의 제국' 북한은 충실히 이용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권 타도를 위해 북한이 이용되는 시대인가?

이제는 정권타도를 위해 북한이 이용되는 시대?

21세기 디지털 세상은 '궐기대회'의 시대와는 엄청나게 변했다. 남북관계도 참으로 큰 변화가 있었고 지금도 그 변화는 진행중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가는 시대의 물결을 거슬러 한사코 예전의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다. 수구이고 시대착오적 사람들이다.

10월4일, 서울의 한 복판에서 '궐기대회의 추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집회가 열렸다. 일부 개신교 인사와 보수 인사들이 주도한 '대한민국수호 국민대회'가 그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20-30년 전 궐기대회에서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단골로 등장하는 극우 인사들이야 항상 그러려니 하더라도 사랑과 은혜를 중시하는 기독교 인사들의 토해내는 언어는 그들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조용기 목사는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조국과 민족을 공산주의의 침략에서 지켜달라고 부르짖기 위해 모였다.", "북한 김정일은 원자탄과 미사일을 준비하고 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불바다에 처할 지 모르는 위기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용기 목사는 하늘에 계신 주께서 국보법을 폐지하지 않게 이끌어달라고 하고, 신신묵 목사는 하나님에게 친북좌익세력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특정 정파를 위한 해결사라도 된단 말인가? 기독교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이념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 집단이더라도 이런 식으로 불신과 증오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기본적으로 국민들을 불신하고 감시하는 법이다. 오히려 국가보안법 폐지가 더 하나님의 가르침과 맞는 것이 아닌가?

▲ 집회를 마친 뒤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시도하며, 저지하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는 보수단체 회원들.
ⓒ 권우성
'못 바꿔'로 무장되어 있는 '21세기판 궐기대회'

'21세기 판 궐기대회의 추억'은 '못 바꿔'의 주제로 무장되어 있다. 국가보안법도, 사립학교법도, 왜곡된 과거사도 바꿔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껏 편안히 누리던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건드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보수적 기독교 단체인 한기총이 뜬금없이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2의 강의석 군을 두려워하는 반증이 아닐까?

'20세기 궐기대회의 추억'은 그나마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키겠다는 순진한 결의라도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궐기대회 현장'에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시대를 한사코 막아서는 기득권들의 추한 몸부림밖에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신도들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독교 일부 단체가 과격한 정치적 주장을 펼치고 종교인의 본분을 잊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정치적 사안에까지 뻗치려고 하는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과거 독재정권시절에 그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노력했는지, 아니면 독재정권을 위해 기도했는 지를 먼저 되돌아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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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내 유년의 기억 속에 그 이름은 다름아닌 '빨갱이의 수괴'였다.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는 엄청나게 많이 있다.

그렇게 나는 김대중이란 이름을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우리집에서 구독하던 조선일보와 방송에서 간간히 보고 들었고 여지없이 '내란'이나 '간첩활동'이란 수식어와 함께 그 이름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기사들은 6하원칙에서 뭔가가 하나 이상씩은 빠진 방식으로 서술되었던 것 같았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에는 세상도 조금은 바뀌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행동하는 양심'이란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접하게 됐다. 박정희 때만 해도 말할 것도 없고 전두환 때만 하더라도 불온서적으로 금서가 될 책이었지만 어쨌던 정식 출판물로 나온 책을 그 때 봤다.

당시까지만 해도 선입관 때문에 뭔가 무시무시한 내용이 담겨져 있을까 했는데, 읽어보니 이건 그냥 신념을 굳게 지킨 한 사람의 비망록이었다. 아무리 봐도 내란을 일으켜 남한을 적화통일 시키려다 적발된 사형수의 글로는 보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내 선입관을 지우고 재탄생을 하게 되었다.

딱히 사회정의를 갈구하던 대학생도 아니었고 참여하는 시민정신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이후 대선이 되면 김대중 후보에게 표를 던졌고 마침내 내가 치른 두번 째 대선에서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리고 그는 이미 난파한 대한민국의 혹독한 경제시련의 최전선을 지휘하게 된다. 그의 취임사를 다시 보면 그가 이미 30년 전에 정당한 방법으로 얻었어야 했던 정권을 다시 부여 받으면서 얼마나 비장한 각오로 나섰는 지를 알 수가 있다.

주변에 소위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나 그럭저럭 고등교육을 받아 온 사람들은 김대중의 당선을 비아냥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는 그가 뭔가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속에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직장생활도 하고 그렇게 살아갔다.

김대중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경제시련의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 해결책은 무엇인지, 그로 인해 희생되는 것은 또 무엇인지. 이를 단순히 김영삼이 혼자 다 말아먹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김영삼이 몰라서 잘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97년의 경제사태는 국제 금융재벌의 아시아 정벌의 일환이었다는 것이 본질에 더 가깝다.

수구들이 빨갱이라고 폄훼했던 김대중은 지금까지 세계 현대사에 있어 국제 금융재벌의 마수를 뿌리치고 극복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50년간 꽁꽁 얼어 붙어만 있었던 남북관계에 평화를 향한 일대 전환점을 수립한 지도자였기도 했다.

그랬던 김대중은 오늘 영결식을 갖고 영원한 역사의 기록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우리에게 김대중은 어떤 의미일까.

동시대에 살았던 많은 이들은 김대중의 가치를 모르고 평생을 살다가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정신과 업적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조금도 의심받지 않는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지도자를 내 손으로 추대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자부심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살아생전, 그리고 떠나시는 그 날까지도 국민을 아끼고 걱정하셨던, 또 한 분의 진정한 국민의 대통령.
그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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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의 추억

 

“안전그물망 사이에 벌어진 틈 보이지. 내 친구가 그 틈 사이로 발을 헛디뎌서 몇 미터 아래로 떨어졌어.”
“그물망 위로 삐죽 올라온 철근 보이지. 내가 아는 사람은 넘어져서 그 철근에 찔렸어..”

하이닉스 건설 현장


이들은 죽지 않고 다리가 부러진 것이 다행이고, 철근이 장기를 찌르지 않아 죽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들 덧붙인다. 다리가 부러지고, 대수술을 해야 한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섬뜩함이 묻어나는 이들의 대화는, 안전조치를 위반한 건설현장의 사진을 보며 나눈 대화의 일부다. 건설 현장에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당했던 ‘산재의 아린 추억’이 떠오른 것이다.

이들은 평범한 노동자들의 눈으로 산재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들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허술한 안전조치’는, 관리감독 권한을 가진 날카로운 전문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지난 6개월간 무려 3명이 산업재해로 죽어간 하이닉스 건설현장

연 이은 사망사고 발생에도 불구하고 뒷짐져왔던 노동부는 비난여론이 거세지자 공사중지 명령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공사명령을 조속히 해제하라는 청주시장, 충북도지사 등 지자체 단체장과 상공회의소 등의 ‘압박정치’에 굴복해 공사중지 명령은 닷새만에 해제되고 만다. 철저한 현장조사를 통해 안전조치 위반 항목을 모두 시정했기에 공사중지 명령을 해제했다는 노동부의 발표와 함께...
하지만, 공사중지명령 해제 이후 촬영된 사진은 여전히 ‘안전조치 위반 사례’가 널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부의 거짓부렁이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연이은 산업재해 사망은 건설자본의 지나친 ‘돈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보다 공사기한 단축만이 최선이라는 건설자본의 욕심이 화를 불러온 것이다. 3건의 사망사고 모두 굴지의 건설자본인 현대건설이 안전조치에 필요한 비용을 투자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6개월이 넘게 ‘백야(白夜)’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대건설은 하이닉스의 공사기간을 단축하겠다며 24시간 철야 공사를 강행했다. 어둠이 존재하지 않는 ‘하얀밤’이 지속되면서, 피곤함을 호소하는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의 하소연도 높아지고 있다. 건설현장이 다른 노동현장보다 노동강도가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생체리듬을 무시한 채 밤샘 노동에 시달린 건설노동자들의 피로는 산재로 연결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장에서 근무했던 노동자의 증언도 충격적이다. 재해 방지를 위해 안전담당자가 작업 중지를 요청해도, 건설사에서 밀어붙이기식으로 공사를 강행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명보다 돈벌이를 선택한 현대건설의 ‘과욕’이 죽음의 건설현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현대건설은 사망사고 1위 기업으로 악명이 높다. 작년 노동건강연대와 매일노동뉴스에서 뽑은 ‘2007 사망재해 최악의 기업’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2006년도에만 1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의 끝없는 돈욕심이 노동자를 사지로 내모는 것이다.

산재의 추억이 잊혀지려면 보다 엄격한 규제와 관리감독이 필요하다. 당선인이 꿈꾸는 선진국에서는 산재사망을 ‘기업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실제 영국에서 산재사망사고를 살인죄로 규정하고 처벌한 사례들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비상하는 ‘747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솜방망이 처벌을 넘어선 엄중한 처벌이 산재사망사고를 줄일 수 있는 길이다. 여기에 상시적인 안전조치 위반 관리감독도 병행되어야 한다. 노동부는 인력부족을 이유로 관리감독이 불가능하다고 항변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인력부족만 항변하는 노동부

여기에 대해서 민주노총은 해법을 제시한 바 있다. 산업재해 예방활동을 주 임무로 하는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 하이닉스 공사현장에서 안전을 점검하도록 조치하라는 것이다.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노동부가 위촉한 사람들이다. 노동부를 대신해 감독관으로 위촉된 노동자들이 재해예방 활동에 심혈을 기울여 철저한 관리감독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이다.

그러나 인력부족을 운운한 노동부는 일언지하에 이 제안을 거부하고 말았다. 중대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관리감독 소홀 지적에 대해 앵무새처럼 인력부족을 항변할 뿐이다.

 

2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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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형 칼럼]달콤한 공안정국의 추억

2008-09-01 오후 1:08:07 게재

달콤한 공안정국의 추억
이경형 (언론인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1988년 6공의 노태우정권이 출범했으나, 여소야대 국회의 5공 청산 소용돌이 속에 ‘물태우’로 전락했다.
거리는 학생, 노동자, 각종 이익집단들의 욕구 분출과 시위 깃발로 가득했다. 1989년 들어 동구, 소련의 몰락과 3저 현상의 소멸로 인한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 약화를 계기로 노태우정권은 법과 질서를 내세워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이후 1990년까지 3당 합당으로 정국 장악력을 확보해나갔다. 초반의 수세 국면을 공안정국을 활용하여 공세 국면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이명박정부는 출범 6개월여 동안 고유가 물가고 등 대내외 경제 불안 속에 거리의 촛불파워에 밀려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촛불시위가 잦아들고 때마침 ‘베이징 올림픽 개가’에 힘입어 바닥을 친 지지도가 올랐다. 차제에 ‘집토끼’ 보수층을 결집하고 내친 김에 추석 민심까지 잡겠다고 보수 정책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제도권 정치가 감당 못해 삐져나온 ‘거리 민주주의’에 검찰·경찰권으로 강력히 대응한다고 해서 정권이 안정되고, 국가보안법의 칼을 마구 휘두른다고 해서 국가안보가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 죽이기’ 본격화되나
자유민주주의는 공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념적으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화와 설득, 타협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다.
사상·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강점은 유연성과 포용성에서 나온다. 이것은 자신과 이념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협하거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파괴하지 않는 한 용인하는 것을 뜻한다.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론화를 통해 서로 소통하여 해소하는 것이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길이다.
지난주 경찰이 오세철 교수 등 사회주의노동연합 회원 7명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이 기각한 것은 이같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에 관한 깊은 성찰과 천착에서 나온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사법기관의 법 적용 추세는 특히 국가보안법 적용 해석에 엄격해졌고, 사회주의 성향의 조직사건 관련자들을 무조건 구속하던 5공 식의 관행에서도 크게 바뀌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경찰이 무리하게 수사를 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현 정부가 국정을 장악해나가기 위해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신공안정국을 조성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일단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한다. 야당이 이미 지적했듯이 쇠고기 촛불시위대 체포와 일부 참가자 구속, 조중동 광고중단 운동 네티즌 구속, 방송PD 수사, KBS 사장 교체, 그리고 오 교수 체포에 뒤이어 나온 탈북 위장 여간첩 사건과 군 침투 간첩용의자 대대적 수사 및 군내 좌익세력 척결 등 일련의 흐름이 ‘진보 죽이기’전초전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이번 정기국회를 통해 좌파정권 10년 동안에 만들어진 좌편향 법률을 청산하겠다고 공언했다.
여권의 공안·보수 드라이브가 정치적 소수자를 억압하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정기 국회를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자칫 장내 정치판이 깨질 수도 있다. 여권의 강공에 밀린 소수가 장외로 뛰쳐나가 ‘거리 직접민주주의’와 결합한다면 그 동안 임계점을 향해 부풀어오르던 이념간 갈등은 거리에서 폭발할 수도 있다.
과거 5공 정권은 공안정국 조성을 통해 4·13 호헌조치를 밀고나가려 했으나 시민항쟁에 부딪쳐 결국 6·29선언으로 항복했다. 그때와 민주화된 지금의 상황은 같지 않지만 웬만한 거리의 정치는 잘 훈련된 공권력으로 뭉개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화를 자초하는 길이 된다.

타협공존의 민주가치 지켜야
지난 10년 간 진보정권의 집권을 통해 한국사회의 이념적 스펙트럼은 크게 확장되었다. 이것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잘 된 일이다. 이념의 스펙트럼이 좁으면 좁아질수록 그 사회는 결국 전체주의로 회귀한다. 자유민주주의 아래서도 숫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면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게 되고, 자본주의도 시장지상주의로 갈 때는 전체주의가 되고 만다.
좌파극단주의는 배격해야겠지만 그 마저도 국가 존립을 직접 위협하지 않는 한, 사상이 공개된 자유 시장에서 논쟁할 수 있어야 한다. 극단주의일수록 공개 토론장에서 논의되어야 그들이 지하화하고 테러리스트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공안정국 조성은 국가 정책을 보수·우파 노선으로 일대 전환하는 데 유용한 정치 환경을 만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큰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잃게 된다는 점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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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희가 돌아왔습니다. 115명을 죽게 만든 테러범이 ‘왜 자신을 간첩으로 인정하지 않느냐’며 큰소리를 칩니다. 매우 도착적이면서도 오싹한 장면입니다.

“오직 자유민주주의만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다고 이 연사, 강력하게 외칩니다!!”

부끄러운 기억입니다. 어린 시절 웅변대회에 출전해 세뇌교육에 가까운 반공교육의 성과 한 자락을 우렁차게 늘어놓던 그 때. 저를 포함해 학교 대표로 나가기로 했던 친구들 몇몇은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 선생님의 특별지도를 받곤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미그기를 몰고 남쪽으로 넘어온 이웅평 씨를 소재로 했던 기억만은 또렷합니다. 사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때 민방위본부에서는 공습경보를 발령하며 인천이 폭격당하고 있다고 “지금은 실제 상황입니다”를 연발하는 해프닝을 벌였다는군요.

아무튼, 그 시절 반공교육의 끝자락도 어지간했습니다. 폭력성에 대해 꾸준히 ‘청소년 보호'를 명목으로 영상물, 게임, 도서, 가요 등에 대해 지치지도 않는 검열을 해대는 나라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신체절단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하드고어한 영화를 무삭제판으로 보여주는 만행을 감행하기도 했지요. 네, 이승복 말입니다. 우리는 먼지 풀풀 나는 학교 강당에 줄지어 앉아 짐승같은 공산당이 어린아이의 연약한 입을 사정없이 잡아 찢는 끔찍한 장면을 도리 없이 지켜봐야했습니다. 마음약한 몇몇 여자아이들은 그 소름끼치는 폭력성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지요. 심지어 몇 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다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게 현실을 그대로 기록한거겠구나 싶은 생각으로 저 역시 두려움에 몸서리쳤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에 대해 조작 논란이 있지만, 사실 여부를 제쳐두고라도 교육을 빙자해 아이들에게 피비린내 나는 영화를 강요한 건 국가차원의 범죄에 가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김현희가 돌아왔습니다. 115명을 죽게 만든 테러범이 ‘왜 자신을 간첩으로 인정하지 않느냐’며 큰소리를 칩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매우 도착적인 상황입니다. 그녀가 이제와 다시 “나는 가짜가 아니다”라고 큰 소리로 주장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저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족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살고 싶다”며 KAL기 폭파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에 한 번도 응하지 않은 그녀가 이제 와 ‘좌파정권’의 핍박을 받았다고 폭로하며 나서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번 기자회견은 납북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일본정부가 각고의 노력을 들여 성사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한국정부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었다면 진행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일본정부와 한국정부가 짝짜꿍을 맞추었습니다. 김현희를 주연삼아 양국의 국민들에게 한바탕 쇼를 보여줄 요량인 듯합니다. 한류스타 못지 않은 김현희씨, 온갖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한일 우파동맹의 결성이라고 규정하더군요.

일본에서는 납북자 문제가 매우 중요한 외교적 이슈임에도 이번 김현희의 기자회견에 대해 ‘닳고 닳은 수법’이라는 비판 여론이 일고 있는 모양입니다. 한국에서도 냉소적인 시선들이 많습니다. 반면,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펄떡이는 분들도 물론 계시지요. 참 재밌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좌파정권’으로 인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기 위해서라지만, 그토록 혐오하며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던 북한이 길러낸 테러리스트를 옹호해야 하는 상황이 스스로도 아이러니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이분들께는 ‘적의 적은 동지’라는 이항대립쌍만 존재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마저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는 까닭은 더더욱 알 수 없지만 말이죠. 지난 정부의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KAL기 폭파 사건이 '간첩' 김현희의 범행인 것을 조사를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

다만, 당시 조사의 결론에는 "당시 정부가 이를 노태우 후보가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 유리하게 활용하는 데에 급급해 국가로서의 책무를 저버렸다"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위해 사건의 실체적 진실규명에 노력하기 보다는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에만 급급했다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당시 정부 문건에는 안기부 주관 하에 내무, 국방, 문교, 문공, 상공, 교통, 서울시, 치안본부, 반공연맹 등으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 설치 운영 등의 내용이 담겨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부부처가 총동원되어 사건을 적극 활용한 셈이지요.

KAL기 폭파사건이나 아웅산 폭파사건을 두고 끊임없이 조작설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디 이 두 사건 뿐일까요. 선거 때면 제갈공명이라도 초빙한 듯 불어오던 북풍도 그렇지요. 정부에 불리한 사건만 터지면 또 다른 대형 사건이 어느새 매스컴을 가득 채우던 일이 비일비재했더랬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해 정부가 마치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이라도 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이용하는 자세를 보였던 탓에 음모론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보를 쥐고 있는 이들이 진상규명은 제쳐두고 기다렸다는 듯이 공작정치를 펼치는 행태를 보고 있으면 없는 음모론도 솟아나지 않을까요. 언젠가 지인들과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아웅산 폭파사건 때 나라의 중요하고 유능한 분들이 한꺼번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라는 웃지 못할 농담을 나누었던 기억도 납니다.

반공교육과 공작정치가 지난 시절의 추억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웅산 폭파 사건이나 칼기 폭파 사건, 이승복 사건 등을 두고두고 우려먹었던 이전 정권들의 행태가 여전히 이 정부에서도 그대로 겹칩니다. 김현희의 귀환이 상기하는 어린시절의 씁쓸한 추억을 곱씹다가, 연쇄살인범을 활용해 용산참사의 진실을 덮으려 했던 청와대를 생각하고 다시 오싹한 기분이 드는 건 저 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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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고통이요 추억은 슬픔이요 희망은 공포였다
1985년 이른바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체포돼 사형 판결을 받고 13년 2개월 동안 사형수로 살다가 1998년 석방된 김성만씨가 ‘사형수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내왔다.
[76호] 2009년 02월 23일 (월) 14:59:41 김성만 (연세대 박사과정)
   
1997년 12월30일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사형수의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유족. 이날 이후 한국에서 사형 집행은 없었다.
나는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미국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밟다가 재미동포의 소개로 유럽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해 그들과 민족 문제를 놓고 이런저런 토론을 한 것이 전두환 정권에 포착되어 간첩죄로 기소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무런 간첩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사실은 외국과 인권운동가 사이에서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국무성·국제사면위원회 등이 긴급히 사형 집행을 보류할 것과 사건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철옹성 같은 독재 정치를 펼치는 전두환 정권은 주권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만 여기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아래서 정치범에 대한 사형선고는 그저 한번 해보는 협박이 아니었다. 1986년 5월 서울구치소 강당에서 재소자와 함께 예배를 보면서 다른 정치범 사형수 사이에 앉게 되었다. 나이가 젊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그분들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예배를 보았는데 그로부터 사흘 후 사형집행이 있었고, 내 양옆의 사형수는 그날 이슬처럼 사라졌다. 내가 서울구치소에 입소하고 나서 1년 사이 사형 집행이 두 번 있었는데 정치범 7명을 포함해 20여 명이 사형집행을 당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순서로 보아 두세 번째 대기 순서로 사형 집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1987년 6월 민주화의 함성이 온 거리를 뒤덮으면서 정치범에 대한 사형 집행이 중단되었고,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사형수의 삶은 우선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온갖 눈에 보이는 현상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다 슬픔을 자아낸다. 가족이 면회를 와서 우는 모습을 보는 일, 같은 죄수이지만 단기형을 받고 이감하면서 희망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일, 감방 안에 갇혀 있다가 짧은 운동 시간에 푸르고 싱그러운 하늘을 보는 일, 이 모든 일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슬픔을 자아낸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추억의 사람, 추억의 장소가 생각나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고, 그 장소로 달려가고 싶어 몸살이 난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접고 그 감정을 누르면서 교수형을 기다려야 하는 사형수에게는 머릿속의 추억이 모두 슬픔일 뿐이다.

사형수는 회개하지 않는 악인인가


사형수의 삶의 또 하나 특징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오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세계, 그 미지의 세계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사형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사형수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 무섭다. 마음을 놓고 있다가 돌연 ‘죽음의 순간이구나!’ 하고 느꼈을 때 귓전을 때리는 그 심장의 고동소리와 생각이 정지하는 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사형수는 교수형 집행당할 때에만 죽는 것이 아니다. 집행 날짜는 예고가 없다. 아침에 운동 시간이 지났는데 소내에서 운동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든가, 이유 없이 각 사동의 소지(청소 출역수)들이 모두 호출되어 사라진다든가, 평소와 달리 소내가 너무도 조용해 정적이 감돈다든가 하면 오늘이 그날인가 하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사형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죽는다’는 말이 교도소에서 회자된다.

사형 집행일이 되어도 집행 대상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날은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한데 한쪽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숨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이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크게 울리는 소리가 있다. 교도관이 사형수를 끌어내기 위해 몰려다니는 발자국 소리다. 그 발자국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다가 방 앞에서 멈추면 죽음이요, 지나쳐 가면 삶인데, 한번 지나간 발자국 소리는 20분쯤 후 다시 시작된다. 한번은 집행장으로 끌려가던 사형수가 교도관들에게 소원을 이야기하기를, 절친했던 동료 사형수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해 그 사형수를 잠시 끌어내었으니 그 동료 사형수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순간이었을까.

   
13년 2개월간 사형수로 살다 나온 김성만씨.
사형수의 고통은 정신적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24시간 수갑을 차야 한다. 낮에는 앉아 있으므로 수갑이 덜 고통스럽지만, 밤에 누워 있을 때에는 팔목과 어깨가 보통 아픈 것이 아니다. 반듯이 누우면 팔에 무게가 실리므로 저절로 팔이 내려가는데, 그러면 수갑의 날카로운 금속이 팔목을 파고든다. 팔목이 아파서 모로 누우면 누운 쪽 어깨가 잠시 후 저려오고 수갑에 매인 다른 쪽 팔도 아파온다. 결국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밤을 보내야 한다. 사형수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 중에서는 가장 불쌍한 존재이고, 나보다 더 불쌍한 존재는 짐승 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슬픔과 고통, 죽음의 공포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형수는 누구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왜 나는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일까?’ 정치범의 경우는 확신범으로서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 사형수는 교육 수준, 지능, 인성에 관계없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고, 자기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스스로 자신의 문답 속에서 절절히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과 회한은 교수형 집행의 순간까지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사형수는 특별한 존재일까? 일반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 정신적·병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코 그렇지 않다. 사형수 수십 명과 호형호제하며 지냈고 그들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내가 얻은 결론은, 사형수는 사형선고 이전까지는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존재다. 그러다 사형선고를 받고 절절한 고통 속에 들어서고 나서야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법을 어기지 않음으로써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 생기지만 이미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교수형뿐이다. 그들이 집행장에서 남긴 절절한 유언은 이러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다.

사회에서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반 사람은 어떠한 생각 속에서 법을 지킬까? 무엇보다도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형수들이라고 유독 별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기의 인생과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인 것이다. 사형선고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철저한 반성이 불가능했을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완화된 고통 속에서 한동안 자신의 미련함을 많든 적든 고집스럽게 붙잡고서 떨쳐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사형선고가 아니더라도 반성의 깊이와 속도가 결국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는 없다. 현재 무기수가 사실상 15~20년 복역 후 석방되고 있으므로 사형 대신 종신형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20~30년의 복역 기간이 지나야 석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세월의 무게라면 개심(改心)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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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간첩' 김양기씨 23년만에 누명 벗어
입력시간 : 2009. 07.30. 11:26


"이번 판결이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출발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군사정부 시절 대표적인 조작사건으로 알려진 '김양기 간첩사건'의 피해자 김양기씨(59)에 대해 법원이 23년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광주고법 제1형사부(부장판사 장병우)는 30일 재일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북한을 찬양.고무한 혐의로 징역 7년을 확정받은 김씨에 대한 재심에서 "간첩이라는 혐의를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김씨에 대한 수사는 감금상태에서 가혹행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뤄진 만큼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으며, 검찰과 원심법정이 '과장된 진술'을 그대로 믿어 (간첩죄를 씌운 만큼) 증명력도 인정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어 "북한예술단의 공연을 보고 편안하고 소박한 소회를 밝힌 것을 북한 찬양으로 엮은 것 또한 증명력이 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고, 재일공작원의 지도나 지시에 의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공작원과의 관련성도 없음에도 이를 유죄를 인정한 것은 원심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재판장의 뼈있는 한마디도 이어졌다.

장 부장판사는 "간첩으로 낙인찍힌 김씨가 그동안 겪었을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럼에도, 여러 정황과 증언을 종합해 볼 때 국가기관이 존립 기반인 국민의 신체의 자유를 속박하고 공익의 대변인인 검찰과 법원까지도 공허한 증거가 만들어낸 허상만을 믿고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며 무죄 취지를 밝혔다.

20여분간 이어진 선고공판 결과, 무죄가 선고되자 숙연하던 법정에서는 만세소리와 "재판장님 고맙습니다"라는 사의어린 구호가 연거푸 터져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무죄 선고가 믿기지 않은 듯 잠시 고개를 떨구던 김씨도 "진실의 힘 만세"라는 짤막한 말로 23년간의 한(恨)을 토해냈다.

간첩 혐의로 기소돼 7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김철씨(77)도 "뒤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져 다행이고, 꿈만 같다"며 연신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법정에는 '간첩의 아내', '간첩의 자식'이라는 누명을 쓰고 한많은 삶을 살아온 김씨의 가족과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 회원, 이른바 '조작된 간첩' 등 20여명이 김씨의 무죄 판결을 지켜봤다.

김씨는 1986년 2월21일 재일공작지도원 김철주로부터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수집하고 북한을 찬양.고무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군 과거사위는 이후 진상조사 결과 "수사 당국이 갖은 구타와 가혹행위로 허위 자백을 받아냈을 개연성이 높다"고 결론냈고, 진실화해위원회도 이를 존중해 법원에 재심을 권고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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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1 11:07
카테고리 : 나의 이야기story

 

 

 


반공단체가 북한으로 삐라를 보낸다
개성공단 입주자들이 통일부 장관에게 항의한다
이산가족들이 유엔 반기문 총장을 찾아 눈물로 탄원한다
우리 행정부 대빵은 늘 뭔가를 기다리기만 한다
개미 한마리 남북을 오갈 수 없다
대신 미국은 비자없이도 잘도 간다
위성통신 시대에 전화선마저 뚝 끊겼다
금강산 길에 관광버스 춤도 끝났다

호랭이 담배피던 아주 먼 옛날
최전방 지오피 철책에서 썩고 있을 때
불에도 안타고, 물에도 젖지않는
특수 코팅된 불온삐라를 주워오면
삼박사일 포상휴가 티켓을 줬다
남들 다 가는 그 흔한 포상휴가 한번 못갔다

"간첩신고 삼천만원" 문구가
전국 담벼락을 도배할 때도
그 놈의 간첩 하나 잡지 못했다
그 많던 간첩들은 누가 다 잡아 갔을까?
간첩은 늘 안기부에서만 나왔다

"신고하는 엄마, 간첩잡는 아빠"
그리운 그 시절로 이제 다시 돌아가려나?
그간 접었던 간첩 잡아 출세하는 꿈을
다시 꿔도 되려나?


맨위: 11월 21일 완도군 완도읍 대신리 담벼락
아래: 10월 21일 완도군 군외면 원동리 완도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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