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4_외국이야기

'슬로 비디오' 일본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3. 9. 0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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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비디오' 일본  

 

얼마 전 일본 최고의 클래식 공연장인 '산토리홀'에 간 일이 있다. 놀랐던 것은 니혼필하모니의 공연이 아니었다. 그보다 관객들의 구성이었다. 눈짐작으로 얼추 절반 이상이 노인들이었다. 긴자의 백화점에 가봐도, 전통 온천여관을 가봐도 노인들로 넘쳐난다. 곱게 늙은 노인들이 슬로 비디오처럼 천천히 걸어 다니는 모습이 일본사회의 특징 중 하나다.

 

이게 가능한 것은 물론 돈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행 자금순환통계에 따르면 노인(60세 이상)들은 2007년 말 현재 1157조엔의 금융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전체 금융자산의 70%가 넘는다. 그 가운데 일본의 전후 고속성장 시대를 대표하는 '단카이 세대(1947~49년 출생)' 680여만명이 보유한 금융자산만 130조엔가량이다. 한국의 1년 GDP보다도 많다. 지금도 해외에서 매달 1조엔씩 들어오는 해외자산소득의 대부분이 이들 노인들에게 돌아간다. 이들의 자금력은 1년에 50조엔(국가예산의 56%)이 넘는 국가부채를 국내 시장에서 소화하는 바탕이다.

 

한국의 배구인들이 모두 아는 다이마쓰 히로부미(大松博文·1978년 사망)라는 사람이 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때 금메달을 딴 일본 여자배구팀 감독이었다. 그 2년 전인 1962년엔 자신이 맡고 있는 실업 단일팀을 이끌고 세계선수권에서 우승까지 했던 전설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가 1963년에 낸 책이 '나를 따라오라'였고, 올림픽 직후에 낸 책은 '하면 된다'였다. 과도한 스파르타식 훈련을 강요해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질풍노도의 성장시대를 살아온, 지금의 부유한 노인세대 모두가 기억하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작년에 민영 TBS가 제작한 11부작 드라마 '관료들의 여름'은 일본이 미국에 이어 GDP 세계 2위에 오른 1972년 이전의 10여년을 배경으로 일본의 통산성(通産省) 관료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였다. "나(우리)를 따라오라"고 소리 지르면서, 한 집 한 집 TV와 냉장고를 들여놓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관료들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향수에 젖기도 하고 열광하기도 했다. 일본의 현대사엔,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역사적 이야기'가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선을 지금의 근로 세대로 돌리면 20~30년 후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걱정인 '작은 개인들'이 들어온다. 그들은 열심히 일해도 한 달에 29만엔(근로자 평균소득) 남짓을 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병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언제까지 예측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30세'(요미우리신문 조사)라는 답이 돌아온다. 아예 구직을 포기하고 몇 달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을 모아 여행 다니는 게 전부인 젊은이들이 많다. 외국 유학도, 근무도 기피한다. 경영전략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는 "일본이 점점 내성적인 나라가 되어 간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기성(旣成)세대는 이런 젊은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약해빠져 도전정신도 없고 그저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 못 딴 것도 이 때문이라고 책망하는 사람도 여럿 봤다. 책임이 노인들에게 있는지, 젊은이들에게 있는지, 아니면 그 중간세대에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일본은 꿈의 응축인 '역사적 이야기'를 점점 찾아보기 어려운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 신정록 도쿄 특파원 jr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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