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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겨울나기 / 문화일보 [2010-12-02]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12. 17.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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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겨울나기 / 문화일보 [2010-12-02]


은미희 / 소설가


날이 차다. 겨울은 추워야 제 맛이고, 다음해 농사 또한 풍년을 기약할 수 있다지만 그래도 뼛속 깊이 파고드는 추위는 어쩔 수 없이 싫다. 하긴 난방비 걱정 없이 하루종일 보일러를 고온으로 틀어 놓고 훈훈하게 살 수만 있다면야 겨울의 추위는 한 계절의 정취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 서민들의 살림살이가 겨울의 추위를 즐길 만큼 여유가 있는 것이던가. 다들 빠듯한 형편에 웬만한 추위 정도는 인내하며 살아야 잘 산다 하지 않는가. 그러니 추위가 강할수록 시름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모든 생물들은 탈바꿈을 한다. 나무들은 가장 가벼운 몸으로 겨울을 맞고, 동물들은 촘촘하고도 치밀한 털로 털갈이를 마친 채 겨울을 맞는다. 또 어떤 동물들은 기나긴 겨울잠으로 빠져들고, 어떤 생물들은 숨을 죽이고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그만큼 겨울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혹독한 계절이다. 사람살이 역시 마찬가지다.


한데 가만히 내 안의 추위를 들여다보니 정작 기온이 주는 한기보다는 심리적인 한기가 더 큰 것 같다. 마음이 추우면 몸이 더 추운 법. 내 추위의 정체는 심리적 한기인 것이다. 하긴 이게 어디 나만의 일일까.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 느낄 터이다. 그러니까 이 심리적 추위라는 것이 어수선하게 돌아가는 요즘 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벌써 한 해의 끄트머리라는 점이 그렇고, 뒤를 잇는 흉흉한 소식들이 내 안의 한기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올해의 세밑 풍경은 여느 때와는 좀 다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가슴 따듯하게 들려오던 소식들이 올해는 없다.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이웃을 도우려던 갸륵한 온정은 한 사회복지단체의 방만한 경영이 알려지면서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래서였을까. 광장에 등대처럼 우뚝 서 있던 사랑의 온도탑도 올해는 조용하게 세워졌다. 신문과 방송 등을 통해 소개되던 요란한 제막식도 없이 설치됐으니 행여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지지나 않을까 염려되기도 한다.


사람살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을까마는 그래도 요즘 같으면 사는 일이 참으로 팍팍하다. 그 형세에 세밑 즈음에 가져볼 만한 차분한 반성이나 미래에 대한 설계는 어딘지 사치와 치기처럼 여겨져 사뭇 비장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연일 불안하게 들려오는 연평도 소식은 이 겨울을 더 춥고, 을씨년스러운 계절로 만든다.


연평도 포격 도발이 있던 날, 지하철 안에서 두 명의 청년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대학생인 듯했고, 자신들의 처지를 참으로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내용인즉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면 다시 군대로 돌아가야 할 테고, 그렇다면 내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짧지만 살아온 세월이 참으로 아쉽다고 했다. 지금껏 코피 나게 공부하고, 군대 갔다왔다가 다시 엉덩이에 종기가 나도록 취업 준비하느라 세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이 무슨 얄궂은 운명이냐며 자신들의 청춘을 한탄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일찌감치 도망치듯 해외로 나간 또래의 친구들을 부러워했다.


힐끔 그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 겨울, 그들에게 있어 청춘은 참으로 무거운 듯했다. 하지만 어쩌랴. 좋아도 내 나라, 싫어도 내 나라인 것을. 어떻게든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을. 나무들처럼 저를 비우고서라도 살아 남아야 하는 것을. 비록 많은 곳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나라만큼 살기 좋은 곳도 없다. 내게 뼈와 정신을 준 대한민국이 그대로 오롯이 나인 셈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태어난 나라, 탯줄을 묻은 나라를 떠나 잘 살 수 있을까. 싫든 좋든 이 땅에서 복닥거리며 살 수밖에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드는 생각인데, 이 나라 이 땅 위의 사람들이 다 잘살았으면 좋겠다. 이 겨울도 따듯하게, 없으면 서로 나누고 함께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더 갖기 위해 아금받게 욕심 부릴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나누고 덜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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