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 인생의 때 / 문화일보 [2010-11-04]
은미희 / 소설가
천하장사도 시간 앞에서는 힘을 못 쓴다고 했으니 참으로 그 말이 진리다. 째깍째깍, 흐르는 시간을 당해낼 게 무어 있으랴. 한여름 그 뜨겁던 폭염의 위세도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 채 슬그머니 꽁무니를 사리는 것이 참으로 장한 게 시간이다. 어느 날은 문득, 그악스럽게 파고드는 한기(寒氣)에 지난 계절의 폭염이 사실이었던가 싶기도 하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게 당연한 이치듯 사람살이에도 다 때가 있다. 늦되거나 이르거나,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 이 중심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인생이고, 인생사인 것이다.
한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그 순리를 따르지 못했다. 남들이 공부할 때 공부하지 못했고, 남들이 결혼할 때 하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습작의 시기도 늦었고, 등단도 늦었다. 무어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지 나는 번번이 대열에서 낙오됐다가 허둥거리며 앞서 간 사람들 뒤를 쫓기에 바빴다. 늦깎이, 지각생. 그 말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된 삶이라 하겠는가. 굳이 이런 내 늦됨을 대기만성이라고 포장하고 스스로 위로도 해보지만 그래도 어딘가 아쉽고 민망하기만 하다.
이러다보니 나는 제대로 사람살이를 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기대도 저버렸고, 모성의 힘도 발현하지 못했으니, 본능 역시 거스른 삶이었다. 그러니 참으로 많은 것을 놓친 셈이다. 어디 가서, 무엇으로 이 부족하고 허수함을 갈음하고 벌충할 수 있을까.
어쨌든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든다. 남들처럼 똑같은 삶을 살아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아니, 오히려 그 평범한 일상에 진정한 행복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남들처럼 결혼해 이런저런 갈등을 겪고, 그 와중에 태어난 아이들이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해 나가는 것을 도와주고 지켜보며 사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인생의 지진아. 그게 바로 나인 셈이다. 사람은 나이가 가르친다고 했던가. 나를 비롯해 천방지축, 철없던 이들도 나이가 들면 시나브로 여물어져서는 사람 구실을 하고, 또 어른 노릇을 하니 참으로 신기하다.
우리 장조카만 해도 그렇다. 장남에 장손에, 자신에게 지워진 등짐이 너무 무겁고 버거워 먼 나라로 이민갈 궁리만 하더니 어느새 제 부모 생일도 챙길 줄 알고, 동생들을 데려다 갈 길을 짚어줄 정도로 속내도 깊어졌다. 하긴 그 장조카에게 아이가 둘이나 되니, 이제야 자신을 길러준 부모의 심정이 어땠는 줄 짐작이나마 할 수 있는가 보다. 그러니, 어찌 가는 시간이 무심하고 헛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한참 어릴 적에는 그 순리를 알지 못했다. 순리에 도전하고, 세상에 반항하는 삶이 젊은이다운 패기라고 생각했고, 삶의 전복을 꿈꾸는 것이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내 삶을 내 임의대로 개척하고 그 꿈을 위해 열심히 매진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나는 처음부터 단추를 올바르게 꿰지 못했다. 그러니 힘이 더 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어른들의 때가 있다는 말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콧방귀를 뀌며 고루하고 진부한 생각이라며 흘려들었다. 한데 세월이 아프게 나를 가르친다. 그러니 늦게 시작하려니 더 머쓱하고, 힘이 들 수밖에. 왜 그러지 않던가. 시기를 놓쳐 핀 꽃은 제대로 환한 빛 한번 품어보지 못한 채 그저 시들어버리거나 맥없이 떨어져버리지 않던가. 사람살이 역시 꽃의 일생과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싫든 좋든 하나의 톱니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가장 현명한 삶은 때를 알고, 그 때에 맞춰 인생을 설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절기와 때에 맞춰 농사를 짓듯 삶도 농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순리대로 사는 것, 순리 안에서 삶을 경작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아도 너무 늦게 알았다. 그러니 말하고 싶다. 공부도 때가 있고, 결혼도 때가 있다는 사실을. 그 때를 부디 놓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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