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 안녕, 2010년 / 문화일보 [2010-12-30]
게재 일자 : 2010-12-30 13:45
은미희 / 소설가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어느 대선배 작가의 신간 에세이집을 읽는 것으로 번다한 송년 술자리를 대신했다. 그 책은 인생을 반듯하게 살아온 대선배가 막 세상에 내놓은 따끈따끈한 에세이집이었는데, 편하게 읽히는데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듯해지는 것이 나가지 않고 책을 읽기를 잘했지 싶었다. 평소의 선생님답게 글의 내용이나 문장이 참으로 격조가 있었다. 재미가 있되 경박하지 않고, 쉽게 읽히되 단조롭지 않은 것이 그간의 우리글에 대한 허기와 갈증을 시원하게 달래 주었다. 오랜 세월 다져지고 다져졌을 대선배의 문장은 정감어린 우리말과 한자어의 조합이 서로 적절하게 어울려 요즘 젊은 작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락과 정취가 배어 있었다.
곧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이니 원로라는 표현을 써야 할 터이지만 그래도 원로라는 단어로 굳이 대선배를 나이든 작가로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그 대선배는 누구보다도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고, 또 사람 냄새 나는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작가로서 건재하시니 현역 작가이자 선배로서는 나름의 문학청년인 셈이다.
여하간 그 에세이집 안에는 선배가 지나쳐 왔을 사람과 시간들이 오롯이 들어 있었다. 시대와 맞물려 혈기는 서슬 푸르게 빛났고, 열정과 방황의 순간들은 차라리 아름다웠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았고, 하 수상한 시대였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았다. 페이지들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대선배가 살아온 지난날들이 눈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그 선배의 눈빛은 유난히도 순했고 웃음은 선했다.
그 시절은 그렇게 사람의 날들이었고, 사람의 시간이었으며, 사람의 세상이었다. 엄혹한 검열 시스템 속에서도 사람들은 오히려 타인을 걱정하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놓을 줄도 알았다. 그 속에서 대의와 공의는 더욱 공고히 다져지고 사람들은 그 대의와 공의를 소중히 여기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다. ‘적어도 그렇게 산 세월이 추잡하지는 않았고, 옹졸하지 않으려 피차 애썼다’는 선배의 회상은 새벽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낭랑하다.
지금은 그런 낭만적 풍경을 찾아보기 어렵다. 풍자나 해학 또한 찾을 수 없고 그저 진검으로 승부를 가리듯 칼을 휘두르며 상대가 항복하기만을 기다린다. 그래서 그런지 뾰족한 칼날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다. 행여 내가 실수하면 어떨까, 누군가 내 가슴에 비수를 꽂지나 않을까, 늘 전전긍긍 조바심이 난다. 그저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시선을 조심하며 걷는 게 상수다. 그게 오늘을 잘 살아가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어찌 훈훈한 세상일 수 있겠으며, 어찌 사람의 시간, 세상일 수 있을까.
그 대선배는 자신을 가리켜 푼수라고 했다. 오란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은 푼수. 그 푼수라는 단어가 사람을 참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푼수. 사전적 의미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래도 그 의미는 썩 좋은 게 못된다.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대선배는 당신을 스스로 낮춰 푼수라고 자칭했다. 하지만 왠지 그 푼수라는 말의 울림이 더 정답고 넉넉하다. 선배의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 푼수라는 단어를 접하면서 세상에 선배 같은 푼수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악스럽게 자신의 것을 찾지 않고 좀 모자란 듯 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훨씬 더 따듯하고 인정이 넘치는 세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는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다. 양보하고 뒤로 물러나면 왠지 손해 보는 듯하고 반편이 취급을 받기 일쑤다. 십인십색, 모두가 각기 제 목소리를 내고 제 이익을 위해 사박스럽게 덤벼드는 통에 세상이 시끄럽고 모지락스럽다. 어찌 그 세상에 대의와 공의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정말 모자라서가 아니라, 조금쯤 자신의 것을 손해 봐도 모른 척 넘어가는 푼수로 살았으면 좋겠다. 사생결단 내듯 덤벼들어 시시비비를 가리고 제 몫을 챙기기보다는 슬그머니 넘어갈 줄 아는 아량이 있는 푼수가 많았으면 좋겠다. 2011년에는 푼수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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