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 고향의 소 돼지와 닭들 / 문화일보 [2011-01-27]
게재 일자 : 2011-01-27 14:12
은미희 소설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깨닫는다. 식물들도 혹독한 가뭄이 올라치면 서둘러 더 많은 열매를 맺고는 다음 시간을 기약한다. 하물며 제 발로 걸어다니는 동물들이야 말할 나위없다.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제 몸을 내놓는 가축들이 마지막 순간을 감지하고는 울짱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짱짱하게 버틴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실제로 그런 광경을 목도한 적이 있다. 오래 전 지인의 문상을 갔었는데, 마당 한 편에 송아지 한 마리가 매여 있었다. 그 옆으로 타닥타닥, 불땀 좋게 장작불이 타고 있었다. 한데 그 송아지 앞을 지나치려는데, 양쪽 눈머리 밑으로 검은 줄이 길게 나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송아지의 눈물이었다. 동그랗고도 순해 보이는 송아지의 눈망울에도 눈물이 감돌고 있었고 한번씩 고개를 쳐들고 구슬피 소리내 울고 있었다. 송아지는 미구에 닥쳐올 자신의 운명에 대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육식을 피했다. 머루처럼 까만 그 송아지의 순한 눈이 내내 잊히지 않았고, 그 눈물이 내 식욕을 앗아갔다. 심지어는 떡국에 들어 있는 고기를 이유로 설날 아침, 떡국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아버지에게 심하게 꾸지람을 들은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내 기억 속에 음울한 초상으로 남아 있던 그 송아지를 마음 편하게 바라보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사냥을 통해 기본적인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유목민들이 내 마음 속의 그늘을 걷어준 것이다.
그들은 사냥감을 잡으면, 그 죽음에 예를 갖춰주고, 내세의 복을 빌어주는 일련의 의식들을 행함으로써 그 존재의 존엄성을 지켜준다고 했다. 뿔이 있는 짐승은 살아생전의 위엄이 흐트러지지 않게 뿔을 바로 세워주고,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순간에 절명시킨다고 했다. 그리고 부디 극락왕생을 주문한다고 했다. 인간의 먹잇감으로 생을 마감하는 동물들이 유목민들의 그런 의식을 이해할 수 있을까마는 그래도 아니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긴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간들 역시 종국에는 자연으로 되돌아가 그들에게 알뜰히 내놓는다. 이 세상은 그렇게 순환의 고리 속에서 영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제역과 조류 인플루엔자 감염 동물들을 매몰 처분하는 것을 볼라치면 아린 가슴을 달랠 길 없다. 생매장되는 그 생명들도 목적과 용도로써 구분되는 사물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 있는 목숨들이다. 어떤 경우든 살아 있는 것들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한 어미소가 젖을 빠는 새끼를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서 있다가 그 갓난 송아지가 젖꼭지에서 입을 떼자 이내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눈물샘마저 자극한다. 참으로 그 모성애가 장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희로애락, 기본적인 감정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정하고도 몰인정한 일부 인간의 어미보다도 낫다. 그래서 그런지 그 숱한 생명들이 마지막 순간에 느꼈을 공포와 비탄과 몸부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위령제를 지내 그들의 짧은 이승에서의 목숨을 달래주었다지만 그 업을 다 어떻게 할까. 또 그 현장에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람들의 심리적 충격과 상처는 어떨까. 화분에 키우던 화초가 말라죽어도 마음이 상하거늘, 하물며 펄펄 살아 뛰는 짐승들의 생명을 앗아야 하는 그 심정은 오죽할까. 참으로 모질고도 모질다.
설날 대이동을 앞두고 역병이 확산될까 저어되는 마음에 노부모들이 대처에서 아들딸들이 고향 오는 것도 만류한다고 한다. 수많은 소와 돼지와 닭들이 아슬아슬 부지하고 있는 목숨을 위해 이번 설 명절 연휴는 여느 해보다 조용할 듯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렇게라도 해서 십이간지 속의 동물들을 지켜줄 수만 있다면야 조금은 인간이 양보해도 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이며, 그 순환의 고리 가운데 하나의 고리일 뿐이다. 가장 큰 축복은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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