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스크랩] 소설가 `은미희`

忍齋 黃薔 李相遠 2011. 3. 19.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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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비야..

소설가 '은미희'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것은 그리운 얼굴이다.

 

 

광주 21세기 남도포름...주관 소설가 은미희님 초청 문학강연

최근  " 나비야 나비야 "  라는  역사 소설을 출간한 여류 소설가 은미희님 의 문학강연 초청을 가졌다

가운데 분은 "21세기  남도포름" 상임 대표이신 오수열 교수님, 줄무늬 코트를 입으신 분이 작가 은미희님.. 

 

만두빛는 여자,  비둘기 집 사람,  여류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 등 삼성 문학상을 수상 하기도 했으며

문화일보에 고정 컬럼을 쓰고 있다. 

 

가져온 곳 : http://blog.daum.net/jamari0349/10709381

 

 

 

 

 

 

소설가 은미희의 사랑, 너는 무어냐...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늘 허허롭고 시리기만 하던 가슴이 누군가의 무게로 
뻐근하고 묵직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깨닫고 기뻐하게 마련이다. 가만있어도 저절로, 얼굴에는 복사꽃빛

홍조가 머물고 눈가에는 설렘이 깃들며 입가에는 미소가 머문다.

누구나 한번쯤은 그러하고, 그리했겠지만,
나 역시 한때 지독히도 누군가를 사랑했었다.


그가 곧 나였고, 내 모든 것이었다. 내 눈은
그로 인해 멀었고 내 심장은 그로 인해

맹렬히 뛰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미세하게

얽힌 혈관들을 타고 올라와 내 귀에 쿵쿵

울렸다. 때론 과부하에 걸릴 듯 격심하게

펌프질을 해댔고, 때론 멎을 듯 잦아들었다.

그 통증이라니. 아프면 아픈 대로 좋았고,

멎으면 멎은 대로 좋았다.

나는 그를 통해 세상을 보았다. 그의 촉감을
통해 세상을 감지했으며, 그의 눈을 통해

세상을 읽었다. 매 순간순간 그가 나의

지배자였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의 주인은 오롯이
그였다. 그저 나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나의 정신과 나의 육신과

나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그가 폭군일 때도

있었고, 더없이 인자한 아버지일 때도

있었고, 철없는 어린아이일 때도 있었다.

어느 모습이든 좋았다.

나는 마냥 행복했다. 그가 내 안에서 커가면

커갈수록, 내가 그로 인해 무화되면 될수록,

나는, 내 존재는,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얻었다.

 

그가 온전히 내 안에 들어 있는 동안에는 그의 존재와 무게로 나는 비로소 숨을 쉬고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염소였다. 사랑의 제물로 바쳐진 염소. 나는 기꺼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아니, 염소가 된 걸 기뻐했다.

순결한 염소. 사랑의 희생 제물. 사랑의 순교자. 그것은 곧 나였다. 나는 춤을 추었고, 음악을 연주했고,

탄성을 내질렀다. 내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사랑에 바치는 헌사였고, 의식이었다.

어쨌거나 그로 인해 내 삶은 변화무쌍했다. 풍경 또한 사계절의 그것처럼 다양했다. 비록 자연의 사계처럼

일정한 흐름과 주기와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시시때때로 변덕을 부리긴 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니, 끔찍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득한 단애(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 아래로

처박히듯 떨어져 내려왔다가 다시 치솟아 올랐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 살아 있었다.

그 삶이 행복하였던가? 나는 다시 묻는다. 그 삶이 행복하였는가? 행복했던 것도 같다. 아니, 끔찍했던 것

같다. 아니, 아니. 그것도 모르겠다. 어떨 때는 행복했고, 어떨 때는 비참했다. 다만 살아 있었다고,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할 수밖에.

애증이 교차할 때는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고, 삶에 심드렁해 있을 때는 차라리 사랑의 감정이

용암처럼 분출하던 때가 그리웠다.

그와 나는 운명적으로 만났다. 아니, 운명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나는 지독히도

아팠었다. 사는 것에 지쳐 있었고, 글 쓰는 일에 회의를 가졌다. 나도 여느 여자들처럼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주는 남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든든한 배후가 되어줄 그런 사람, 내가 타인과 싸우면

내 편을 들어줄 그런 응원군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가 가져다준 월급을 쪼개고 쪼개 생활하고,

가끔은 영화 한 편 보는 것으로 감정적 여유도 즐기고 사랑싸움도 하며 그렇게 늙어가고 싶었다.

그 사람을 찾는 내 눈은 점점 퀭해져만 갔다. 어디에 있는지. 찾고 또 찾았다. 세상을 뒤지고 뒤졌지만

그 사람은 쉽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사람은 투명 망토를 걸친 채 내 옆과 앞과 뒤를 스쳐

지나갔다. 어지간히 지쳐 있던 무렵이었다. 나는 목사님을 찾아갔다. 지친 내 영혼에 안식을 구하고, 그를

찾느라 핏발이 선 내 눈을 잠시나마 쉬게 해주고 싶었다.

“틀림없이 좋은 남자가 오니 기다려봐요.”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조바심을 치는 나를 나무랐다. 목사님의 기도는 내게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내 그이가 될 사람은 키가 작고, 이제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사람이며, 남자답고, 친절하다는 것.
그러니 차분하게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리리라.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기다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이를 위해서 순결한 몸과 마음으로 그 자리를 비워두리라
마음먹었다. 내 마음속의 시계는 똑딱똑딱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렇게 흘러갔다. 시간마다 댕그렁, 댕그렁, 깊은 울림으로

그이를 만날 시각이 다가옴을 알려왔다.

“안녕하세요?”
어느 봄날 햇살을 후광처럼 두른 그가 인사를 건넸다.

배경에 드리운 햇살 때문에 나는 눈이 부셔 그를 쳐다보지

못했다. 다만 검은 윤곽으로만 그는 내 눈에 밟혔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따라 했다.
가슴속에서 잔잔한 동심원이 일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파문이었고, 그 파문은 이내 격랑으로 뒤바뀌어 나를 흔들어댔다.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음이었다.

 

한눈에 무너져내리는 것.

그때부터였다. 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게 있던 자리는 온전히 그로 채워졌다. 나는 그저 사랑받기 위해

낑낑대는 애완견의 모습을 하고 그의 발밑을 돌아다녔다. 그가 나를 버릴 때까지. 그가 내 가슴에 무참히

칼을 꽂을 때까지. 한 모임에서 그를 만나 헤어지기까지는 일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참으로 많이도 아팠다. 그저 암죽 속을 헤매는 듯 허우적대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꽃은 피고 지고, 시간은 간다….
‘간신히 그립지 않을 무렵’이라고, 한 시인은 말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그리웠을까. 아마 시인의

가슴 한 자락은 그리움으로 물크러졌을 것이다. 시들어 떨어진 꽃잎이 물러지듯 그렇게 까맣게 물러졌을

것이다. 간신히 그립지 않을 무렵…은 참 쓸쓸하다. 사랑이 끝나는 자리이지 않은가.

사랑이 끝난 자리는 한 목숨이 끝나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인연이, 억겁의 세월 동안 묶여 떠돌던

인연이, 이제 풀리는 자리인데,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클까. 윤회의 그 사슬 어딘가에서 만났던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왜, 영원히, 사랑은 찬란하게 빛나지 않는 것일까. 왜, 한 목숨이 끝나는 순간까지 붉게 남아 있지 않는 걸까.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다가도 왜 금방 시들어버릴까.

사랑으로 인해 사는 게 힘들 때는 하루빨리 그 상처에 굳은 딱지가 앉고 새살이 차기만을 바랐다. 그러면

무심하게, 무신경하게, 무감각하게 죽은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렇게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조금은 지루하게, 그저 습관과 관성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상을 내

임의대로 조정하며 이끌고 갈 수 있을 거라 나를 추스렸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새삼 그 사랑이 그립다. 사랑하는 대상이 그립다. 연모하는 사람이

그립다. 그가 그립다. 그 사람은 지금도 내 눈꺼풀 안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용용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임대료도 지불하지 않은 채 함부로 내 눈 속에 집을 짓고는 육신을 부렸고, 내 심장을 양분 삼아

기숙하고 있다. 나에게 미안하다, 사과 한마디 없고, 양해 한 번 구하지 않는다.

좋다. 그 어느 것도 좋다. 사랑했으므로, 사랑의 이름으로 그 모든 것을 허락하고, 그 모든 것을 내주었다.
기꺼이 나를 제물로 바쳤다. 오히려 내 스스로 문을 열고 청해 들였다. 그가 나를 건드려주기를 바랐다.
내가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사랑에 신음을 내지를 수 있도록, 살아 있다는 기척을 낼 수 있도록.

사랑에 빠진 다른 연인들처럼 내 눈이 오로지 그만을 향할 수 있도록 내 목에 밧줄을 걸어두면 좋겠다.

돌아오라고. 다시 내게로 오라고. 하여 내 심장이 다시 돌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토해낸 선짓빛 피로
혈서를 써서는 그에게 바치고 싶다. 그러면 돌아올까… 다시 내 몸에 따듯한 피가 돌게 하고 숨을 쉴 수

있도록 만들어줄까.

그토록 모질게 나를 떨치고 갔는데.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처럼 사박스러운 말로 심장을 긋고 갔는데 돌아
오라고 혈서를 쓴들 돌아올 수 있을까. 발밤발밤 돌아와서는 옛날처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진득한

시선으로 서로를 더듬을 수 있을까.

하나의 절대성, 단 하나의 사랑, 내 영혼을 바치고, 내 일생을 바치고, 내 모든 것을 바칠 그런 사랑이

그립다. 내 누추한 생의 역사와, 내 알량한 마음과, 내 서글픈 삶과, 내 빈약한 사랑의 언어를 받아줄 사람이

그립다. 사람이 그리운 것은 죄가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죄가 아니다.

고베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연녹의 나무와 건물들과 사람들이 비에 젖고 있었다. 투명한 거울처럼,

보도는 하늘을 담고 있었고, 바다는 하늘을 품고 있었다.

고베는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다. 오만하게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던 도시는 밤이 되면 꿈꾸는 도시로
변한다. 해발 100미터가 넘는 곳에 나는 짐을 풀었다. 그곳에서 나는 유령처럼 떠돌았다.
내 삶이, 내가 신기루는 아니었는지 잠깐 어지러움을 느꼈다.

창 너머로 불이 반짝인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차들이 부지런히 멀어져가고 사람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집으로 향했다. 연인이 있는 사람들은 연인의 품속으로 향하겠지. 그 따스하고도 서러운 품속으로. 쿵쿵.

살아 있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지는 그 품속으로.

한데 그 풍경이 왜 그리도 서러웠을까. 집에서 멀리 떠나온 사람의 청승맞은 서글픔이었을까. 해 저문 날의
그 우울함이라니. 또다시 몹쓸 사랑이 비죽이 솟아오른다. 송곳처럼 내 마음을 찌르면서 나를 닦달해댄다.

 

그에게 돌아가라고.


그를 붙잡으라고. 그의 발밑에 엎드려 그의 사랑을 구걸하라고. 전화기도 나를 유혹한다. 빨리 신호를

보내라고. 충실하게 그에게 인도하겠으니 그에게 부여된 암호를 누르라고 나를 유혹한다….

하지만 한 번 떠난 사랑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은 더 이상 옛날의 그 길이 아닐지니. 나는

그저 아플 뿐이다. 후회가 나를 존재의 무게로 짓누른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을 때 오롯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 애련한 마음이 눈앞의 풍경을 더 감상적으로 만든다. 나 또한 그랬다. 사람을 피해 도망쳐 왔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리운 얼굴들이 번들거리는 그 세상에 투영되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던 얼굴들. 애증으로 내 살과 뼈와 피가 말라 들어가게 하던 얼굴들.
하여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얼굴들. 살기 위해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얼굴들.

아무리 해도 도망칠 수 없는 것은 그리운 얼굴이다.

저 멀리 바다가 검은 콜타르처럼 우중충하게 엎디어 있다. 세기의 연인, 윤심덕과 김우진은 현해탄에서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들의 사랑이, 그들의 운명이 하나의 물비늘이 되어 지금도 빛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위대한가? 죽음으로써 얻은 사랑으로 그들은 행복한가? 그들의 사랑은 그저 박제된 사랑

일 뿐이다. 전설로만 살아 숨쉬는 사랑일 뿐이다. 피가 끓고 심장이 벌렁대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

나는 살아 있어 쟁취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사랑은 용감한 자만이 얻을 수 있다. 나 또한 비겁했다. 내 상처가 무섭고 두려워 나는 도망부터 쳤다.

하여 사랑은 얻지 못하였고, 피 뚝뚝 떨어지는 상처만 훈장처럼 가슴에 새겼다. 하지만 훈장도 아름답지

않던가. 나, 사랑 앞에 목숨을 걸지 못했으니 그 사랑을 붙들 자격도 없다.

살아서 사랑하라. 살아서 사랑을 얻으라. 사랑을 함으로써 생명을 얻으라. 삶은 곧 사랑의 연속일지니

사랑 없는 자, 죽어 있는 것과 무어 다르랴. 더불어 아름답고 처절하게 사랑하라. 나중에는 그 추억의 힘으로

살아 갈지니.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기지 않았는가.

사랑, 너는 무어냐!

 

 


[편집 후기]

기자가 전화를 걸었을 때 은미희 작가는 일본에 있었다.
수화기를 타고 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다정했지만, 왠지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낯선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일은 매번 불편하고 떨린다. 한 달에도 수십 번씩 업무상 전화를 거는 일을 하는
데도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다. 낯선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들리는 최대 60초 동안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통화연결음을 설정해놓은 사람들은 미리 그 성향을 가늠하기 쉽다(나는 내 성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통화연결음을 설정해놓지 않았다). “여보세요”라는 짧은 문장에서 나는 재빨리 상대를 파악한다.

그가 상큼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면 통화 내용에 관계없이 기분이 좋아진다. 잠에서 막 깬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이든 꺼내기가 미안하다. 성의 없거나 공격적으로 전화를 받는 사람이라면
말을 하면서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은미희 작가와의 대화도 채 1분을 넘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잘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사랑에 관한 에세이와 “이 봄, 행복하신가요? 같이 행복해지게요”라는

짧은 글귀가 적힌 메일을 통해서. 그녀는 누구에게든 다정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소설가 은미희는

1960년 목포에서 타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2001년 장편소설 「비둘기집 사람들」로
삼성문학상을 받았다. 「소수의 사랑」,
「바람의 노래」, 「만두 빚는 여자」,
「바람남자 나무여자」 등을 펴냈으며, 최근
조선 최고의 여류 시인 이옥봉에 관한 장편
소설 「나비야 나비야」를 발표했다.

■진행 / 두경아 기자 ■글 / 은미희 ■사진 / 경향신문 포토뱅크

◎  출처:  레이디경향 2009년 6월호...

 

가져온 곳 : http://blog.daum.net/kei7420/12376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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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울의칼`이 출판하는 인터넷 잡지
글쓴이 : 사울의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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