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나라를 멍들게 하는 공무원들의 '잔머리'
김낭기 논설위원 ngkim@chosun.com
▲ 김낭기 논설위원
입력 : 2011.05.19 23:15
우리는 지난 3월 지진과 해일로 수만 명이 희생되는 대참사가 벌어졌는데도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이 법 규정에만 매달리는 일본 공무원들을 보고 혀를 찼다. 당시 일본은 의사가 포함된 외국 구호대원이 입국하려 하자 '외국인은 의료행위를 할 수 없다'는 규정을 들어 의사를 돌려보냈다. 어떤 나라가 실종자 수색을 위해 구조견을 보내려 하자 자기 나라는 광견병 청정지역이라며 불허했다. 우리가 보기엔 정말 한심한 나라였다.
그러나 요즘 드러나고 있는 금융감독원과 저축은행 비리를 보면 우리나라는 거꾸로 편법에 능한 공직자들이 얼마나 나라를 골병들게 하고 서민을 피눈물나게 하는지 새삼 절감하게 된다. 이번 사태는 금감원이 퇴직자들을 저축은행에 감사로 내려보내는 관행 탓에 감독하는 기관과 감독받는 기관이 유착하는 바람에 터졌다. 그 유착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공직자윤리법을 하루아침에 헌신짝으로 만들어 버린 금감원 간부들의 편법이었다.
부산저축은행 그룹 산하 5개 저축은행 중 4곳의 감사가 금감원 출신이다. 이들은 부산저축은행 그룹이 수년간 120개의 위장회사를 만들어 서민들이 맡긴 돈의 70%인 5조원을 분탕질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있었다. 이를 막기는커녕 불법 대출과 분식회계에 가담했다. 금감원은 2001년부터 10여 차례나 부산저축은행으로 내려가 수십일씩 머물며 감사를 했으면서도 이런 불법을 모른 체했다. 부산저축은행 검사반장이었던 금감원 간부는 "감사원이 곧 감사를 할 것 같으니 잘 감춰야 한다"고 미리 알려주기까지 했다.
지난 4월 현재 증권회사·저축은행·보험사 같은 금융회사의 감사 중 금감원 출신은 45명이다. 최근 10년간 저축은행과 저축은행중앙회에 취업한 기획재정부·금융위원회·금감원·예금보험공사 출신 123명 중 87명이 금감원 출신이다.
공직자윤리법엔 일정 직급 이상의 공직자는 퇴직 전 3년 이내에 소속했던 부서의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영리업체에는 퇴직일로부터 2년간 취업할 수 없게 돼 있다. 퇴직 공직자의 소속 부서 업무와 영리업체 간에 밀접한 업무 관련성이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기준도 자세히 나와 있다. 퇴직 공직자가 소속했던 기관의 장(長)은 퇴직 공직자가 이런 규정을 어기고 영리업체에 취업하면 영리업체에 그 퇴직자의 해임을 요구해야 하고 영리업체는 지체 없이 이 요구를 따라야 한다고 돼 있다.
법 규정으로만 보면 '낙하산 감사'는 어림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금감원 사람들은 곧바로 허점을 찾아냈다. '소속 부서의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이라는 규정이었다. 금감원은 퇴직을 앞둔 간부들을 퇴직 뒤 취업하려는 업체와 '업무 관련성이 적은' 총무국이나 인력개발실 같은 부서로 잠시 옮겨 근무하게 하는 편법으로 이 규정을 피했다. 2008년 금감원 퇴직 뒤 취업한 14명 중 9명, 2009년 24명 중 16명이 이런 편법을 거쳐 금융회사에 취업했다. 이런 편법을 쓴 곳이 금감원뿐이고, 편법으로 법 규정을 무력화시킨 사례가 공직자윤리법 하나뿐이겠는가. 공무원들이 자기들 이익이 걸린 일에는 이렇게 편법에 능해서야 그 어떤 법을 만든들 효과가 있을 턱이 없다.
지금 부산저축은행 피해자들은 하루하루를 피눈물로 보내고 있다. 한 피해자는 "은행이 도둑질을 하는 동안 정부가 보초를 섰다. 국가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차라리 벽창호처럼 앞뒤가 꽉 막힌 일본 공무원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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