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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umanities/22_한국역사

문정현/ '남산' 끌려가 문초…동지 지키려 변기 속 '명단' 꿀꺽

忍齋 黃薔 李相遠 2012. 9. 16.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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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현/ '남산' 끌려가 문초…동지 지키려 변기 속 '명단' 꿀꺽

동시대인 20+ 2010/06/21 10:15 오유진


[길을 찾아서] ‘남산’ 끌려가 문초…동지 지키려 변기 속 ‘명단’ 꿀꺽 / 문정현 

길 위의 신부 15  http://www.hani.co.kr/arti/SERIES/185/426531.html 


▲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으로 필자를 비롯한 성직자와 민주인사들이 무더기로 구속되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과 신자들이 3월 중순 서울 명동 성모병원 마당에서 ‘3·1 명동사건’ 구속자 석방과 헌정질서 회복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열고 있다. 


1974~75년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노리고 유명인사들을 반공법으로 몰아붙이면 반발이 심할 것을 우려해 일부러 평범한 사람들을 얽어매 공안정국을 조성하려고 조작한 사건이었다.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가 거세질수록 유신정권의 공포정치는 날로 심해져갔다. 


박 정권에 반대하고 인권운동을 했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와 메리놀선교회의 제임스 시노트 신부에 대한 추방명령도 그 하나였다. 인혁당 조작 사실을 미국 언론에 알렸다는 이유로 오글 목사가 74년10월 추방된 데 이어 시노트 신부도 75년4월30일 끝내 한국을 떠나야 했다. 정부는 다른 선교사들에게도 비자를 내주지 않으려고 했고, 천주교와 시민세력은 거기에 맞서 싸웠다. 









▲  경찰에게 들려나가는 시노트신부 



76년은 겉으로는 민주화운동의 침체기였다. 대학교수 500여명이 재임명 탈락의 방식으로 무더기 해고돼 대학까지 권력의 통제 아래 장악됐다. 그럴수록 민주화에 대한 염원도 더 커졌다. 김지하 시인 구명을 위해 연대했던 가톨릭과 개신교는 각자 3·1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신교에서는 문익환 목사의 주도로 윤보선·함석헌·정일형·문동환·이문영·서남동·안병무·이해동·김대중·이우정이 3·1 구국선언문을 준비하고, 가톨릭에서는 함세웅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이 김 시인과 인혁당 인사들의 석방을 위한 명동성당 기도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서로 계획을 알게 된 가톨릭과 개신교는 함께 뜻을 모아 그해 3월1일 저녁 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를 거행했다. 미사의 강론은 김승훈 신부가 했고, 2부 구국기도회에서는 내가 김 시인의 어머니가 쓴 호소문을 대신 읽은 뒤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다. 마지막으로 이우정 교수가 ‘3·1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했다. 




http://www.kdemocracy.or.kr/ 



그러자 유신정권은 이 3·1절 미사를 ‘3·1 명동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국가전복 내란을 기도했다며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나와 신현봉 신부는 그때 선언서 작성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는데도 잡아들였다.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중앙정보부가 사전에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정은 3·1절의 종교행사를 개신교와 가톨릭의 성직자들을 한꺼번에 탄압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나는 3·1 미사를 마치고 그날로 전주로 내려와 해성학교 기숙사에 있던 숙소에서 이튿날 새벽 연행되었다. 평소 이미 구속을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위축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끌려가 도착한 곳은 서울시경의 남산안가였다.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는데 입구엔 ‘한성무역’이란 간판이 달려 있었다. 


사복경찰들은 도착하자마자 나를 몹시 험하게 다루며, 자기들끼리 “에이(A)급이 잡혀왔다”고 숙덕거렸다. 이후 닷새 동안 그들은 나를 윽박지르거나 회유하며 잠을 재우지 않았다. 내가 조사를 받는 도중 안충석 신부와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 목사도 잡혀왔다. 주로 인혁당 사건과 김지하 석방운동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경찰 조사가 끝나자 남산의 중정6국으로 끌고 갔다. 거기 서는 안기부 요원 3명이 붙어서 계속 잠을 안 재웠다. 옆방에서도 누군가 조사를 받는지 비명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겁이 나기보다는 더 이가 갈리고 용기가 났다. 그러다 군복 차림의 ‘덩치’ 10여명이 들어와 나를 둘러싸더니 “네가 문정현 신부야”라고 했다. 모멸감이 들어 이를 악물고 그중 한명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는 내 턱을 탁 치면서 엄포를 놓았다. “개 패듯이 패버려? 그러면 시끄럽겠지?” 한참 자기들끼리 욕지거리를 하면서 모욕을 주더니 다 나가버리고 한 명만 남았다. 그는 회유를 시도했다. “저 새끼들 막돼먹은 놈들이에요. 저러면 안 되는 건데, 사실은 내 장인어른이 성당 사목회장이에요. 신부님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나는 호통을 쳐줬다. “뭐요? 여기서 사목회장 소리가 왜 나와? 너 장인 팔아서 뭐 할 거야.” 그러자 그는 머쓱해져서 나가고 다른 요원들은 히죽히죽 웃었다. 

  


사진ⓒ노순택  정작 조사받는 내내 나를 불안하게 했던것은 허리춤에 숨겨 두었던 성명서였다. 느닷없이 연행되는 바람에 미처 버리지 못했는데 성명서에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어 신경이 쓰였다. 계속 눈치를 보다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자 조사관 2명이 옆에 붙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성명서를 조각조각 찢어 변기에 넣은 뒤 물을 내렸다. 그런데 종잇조각이 가벼워 다 내려가지 않고 물 위에 떴다. 나는 그 종잇조각을 주워 입에 넣고 삼켰다. 구역질이 나오려고 했지만 마음은 편안해졌다.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지팡이에 의지해 복도를 지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몹시 초췌해 보였다.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사흘 뒤 조서를 꾸민 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됐다. 난생 첫 경험이었다.  구술정리/김중미 작가  



1976. 3. 1 민주구국선언문(3. 1 명동사건) 


오늘로 3,1절 쉰일곱 돌을 맞으면서 우리는 1919년 3월 1일 전세계에 울려 퍼지던 이 민족의 함성,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아우성이 쟁쟁히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것은 구국선열들의 피를 이 땅에 묻어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8, 15 해방의 부푼 희망을 부수어 버린 국토분단의 비극은 이 민족에게 거듭되는 시련을 안겨주었지만 이 민족은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6, 25동란의 폐허를 딛고 일어섰고, 4, 19 학생의거로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슴가슴에 회생시켰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삼권분립은 허울만 남고 말았다. 국가안보라는 구실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가고 언론의 자유,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 당하고 말았다. 


현정권 아래서 체결된 한일협정은 이 나라의 경제를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켜 모든 산업과 노동력을 일본 경제침략의 희생물로 만들어버렸다. 


눈을 국외로 돌려보면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보기도 초라한 고아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에서 UN의 승인을 받은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말도 이제는 지난날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 동,서 양진영 사이에 결정적인 쐐기를 박고 세계사에 새 힘으로 대두한 제3세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서방세계만 의존하다가 서방세계에마저 버림을 받고 말았다. 


현정권은 이 나라를 여기까지 끌고 온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국내의 비판적인 세력을 탄압하다가 민주국가들의 신임을 잃게 된 것을 통탄히 여겨야 하며, 제3세계의 대두와 함께 UN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탓하기 전에 긴 안목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쳐다보지 못한 것을 스스로 탓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비원인 민족통일을 향해서 국내외로 키우고 규합하여 한걸음 한걸음 착실히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이 나라는 1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 야의 정치적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1.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공산주의 정권과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이 마당에 우리가 길러야 할 힘은 민주역량이다. 국방력도, 경제력도 길러야 하지만 민주역량의 뒷받침이 없을 때 그것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다. 


그러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의 나라에서 실천되고 있는 어떤 특정한 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를 형성한 성원들의 뜻에 따라 최선의 제도를 장만하고 부단히 개선해가면서 성원 전체의 권익과 행복을 도모하는 자세요, 신념을 말한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해서'보다는 '국민에게서'가 앞서야 한다. 무엇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좋으냐는 판단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 판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국민을 위한다는 생각만으로 민주주의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으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령과 복종을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일이다. 국민은 복종을 원하지 않고 주체적인 참여를 주장한다. 국민은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할 기본권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 국민의 의사가 자유로이 표명될 수 있도록 집회, 출판의 자유를 국민에게 돌리라고 요구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유신헌법으로 허울만 남은 의회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로이 표현되는 민의를 국회는 법제정에 반영시켜야 하고, 정부는 이를 행정에 반영시켜야 한다. 이것을 꺼리고 막는 정권은 국민을 위한다면서 실은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는 정권이다. 


셋째로 우리는 사법부의 독립을 촉구한다. 사법권의 독립 없이 국민은 강자의 횡포에서 보호받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법부를 시녀로 거느리는 정권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려는 뜻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경제발전이 국력배양에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렇다고 경제력이 곧 국력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정권은 경제력이 곧 국력이라는 좁은 생각을 가지고 모든 희생시켜가면서 경제발전에 전력을 쏟아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 국민경제의 수탈을 바탕으로 한 수출산업은 '74년, '75년 두 해에 40억 불이라는 엄청난 무역적자를 내었고, 그 적자폭은 앞으로 줄어들 가망이 없다. 1975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외채 총액은 57억 8천만 불에 이르렀다. 차관기업들이 부실기업으로 도산하고 난 다음 이 엄청난 빚은 누구의 어깨 위에 메워질 것인가? 


노동자들에게 노조 조직권과 파업권을 박탈하고 노동자, 농민을 차관기업과 외국자본에의 착취에 내어 맡기고 구상된 경제입국의 경륜은 처음부터 국민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의 경제력을 키우면서 그 기반 위에 수출산업을 육성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었다. 농촌경제의 잿더미 위에 거대한 현대산업을 세우려고 한 것이 망상이었다. 


차관에만 의존한 경제체제는 처음부터 부패의 요인을 안고 있었다.이대로 나간다면 이 나라의 경제파국은 시간문제다. 현정권은 이 나라를 경제파탄에서 건질 능력을 잃은 지 오래다. 경제 부조리와 부패는 권력구조의 심장부에서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고 보면 박정권은 책임을 지고 물러날 밖에 다른 길이 없다. 경제파국을 미연에 방지하여 국제사회에서 아주 신임을 잃지 않도록. 차관상환의 유예를 차관국가들과 은행들에 요청하기 위해서라도 정권교체는 불가피하다는 판단이다. 


만약 그럴 겸허와 용기가 없다면 심장이라도 도려내는 심정으로 경제입국의 구상을 전적으로 재검토하라고 우리는 촉구한다. 실정을 정당화하지 말고 솔직히 승인하라. 국민의 국세 부담력을 무시하고 짜여진 팽창예산을 지양하라. 부의 재분배를 철저하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국민의 구매력을 키우라. 그래야 공산주의의 온상이 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부조리 현상이 시정되고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회복될 것이며, 북녘 공산정권에 대해선 민족통일의 주도권을 잡게 될 것이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의 과업이다. 


국토분단의 비극은 해방 후 30년 동안 남과 북에 독재의 구실을 마련해 주었고, 국가의 번영과 민족의 행복과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 동원되어야 할 정신적, 물질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외국의 군사원조 없이 백만을 넘는 남북한의 상비군을 현대무기로 무장하고 이를 유지한다는 일은 한반도의 생산력과 경제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 참을 수 없는 일은 우리의 문화창조에 동원되어야 할 이 겨레의 슬기와 창의가 파괴적으로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민족통일은 지금 이 겨레가 짊어진 지상과업이다. 5천만 겨레의 슬기와 힘으로 무너뜨려야 할 절벽이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민족통일을 저희의 전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이용한다거나 저지한다면 이는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민족통일의 기회는 남과 북의 정치가들의 자세 여하로 다가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 진정 나라와 겨레를 위한다면 변해가는 국제정세를 유지해가면서 때가 왔을 때 이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잡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때에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 있다. 그것은 통일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이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대헌장이다. 다가오고 있는 그날을 내다보면서 우리는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는가, 위축하고 있는가? 


승공의 길, 민족 통일의 첩경은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5천만 온겨레가 새 역사 창조에 발벗고 나서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당한 고생을 살려 민주주의의 진면목을 세계 만방에 드날리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통일된 민족으로, 정의가 실현되고 인권이 보장되는 평화스런 나라 국민으로 국제사회에서 어깨를 펴고 떳떳이 살게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만세! 


1976년 3월 1일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이우정 

문동환, 함세웅, 정태영, 김승훈, 장덕필, 김택암, 안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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