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지운 김철수(遲耘 金隋(綴)洙) 선생을 만나다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2. 2.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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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遲耘 金隋洙,金綴洙를 잘못 기억했을 듯) 선생을 만나다

修菴 金徹重

 

 

   나는 이 하숙집에서 지운 김철수 선생을 처음 만나 뵈었다. 어느 날 하숙집에 한복 두루마기에 중절모자를 쓰고 탐스러운 수염이 넉넉하게 나신 청수한 노인 한 분 이 오셨기에 이 댁의 어느 시골에 사는 친척이겠거니 하였더니 인사를 드리고 보니 말로만 들었던 독립투사요 조선의 초기 공산당을 이끌었던 ‘원천리 독립투사 김철수’ 바로 그 분이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주인 주인식씨의 고종 4촌 형님이었던 것이다. 지금 계화면의 돈지에 사는 지운 선생의 둘째 따님 김용화 여사도 이 무렵에 이집에서 처음 뵈었다. 그 후로는 변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김용술 아저씨가 부안읍내에 문방구점을 개업한 이후 그곳에서 자주 만나게 되었고 우리들이 결성한 산악회에도 고희의 나이를 무릅쓰고 참여하시어 지리산이며 태백산, 울릉도 등 높고 낮은 산이며 계곡 등을 누비는 산행도 함께 하였다.

 

 

 

   내가 처음 지운 선생님과 만난 때가 1954년경이었으니 이때 선생께서 갑년(甲年 :환갑의 해)을 넘긴 무렵이다. 온화하고 청수한 용모에 지극히 소탈하시어 스스럼이 없이 쉽게 가까이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지운 선생은 원래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부친 광산김씨 김영구(金永九)씨와 모친 신안주씨(新安朱氏 :주인식 씨의 고모) 사이에 5남매 중 맏이였다. 부친이 농토를 꽤 소유한 소지주이기도 하였지만 군산에서 미곡의 위탁판매업(米豆 :현물 없이 미곡을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적인 영업)을 하였다고 하며 그래서 군산의 금호학교(錦湖學校)를 다녀 일찍 신학문에 눈을 떴는데, 1912년 인촌 김성수(金性洙)의 권유로 일본유학도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인촌의 부친도 군산에서 미두를 하여 부를 이루었다고 하므로 그런 인연으로 두 집에 세교가 있어 인촌과는 일찍부터 친하게 지냈으나 해방 후로는 서로의 길이 달랐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하였던 애국지사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지운 선생도 끝내는 부유했던 재산은 다 없어지고 형제들과 자식들

 

 

 

 

 지운 김철수 선생

 

 

 

 

 

 

김철수 선생 추모비 제막식 때 딸 김용화 여사(왼쪽 두 번째)와 손자 김소중 씨와 함께

 

은 모두 좌익운동으로 흩어져 생사를 모른다. 장남인 용선(容鮮)씨만이 고향에 남아 있었을 뿐이요, 용일과 용덕 두 아들은 일찍 월북했고 큰 딸 금남은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돌아와 이 사건에 깊이 뛰어들었다 하며 여순반란사건에는 남편과 같이 관여했다가 이 일로 남편은 총살되었고 금남 여사는 그 때 고문 당한 후유증으로 큰 병을 얻어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 한다. 그리고 둘째 딸 용화 여사는 결혼 2년 만에 남편 이복기씨가(남노당 전북 조직부장) 6·25 전 월북하여 생사가 불명이며 하서면의 바닷가 돈지에서 삼성약방을 하며 언니가 남긴 조카들을 모두 데려다 자식으로 길러 가르치며 어렵게 살았다.

 

   지운 선생이 오시면 내 하숙방에 머물기 때문에 나는 공연히 들떠 신이 났었으며 이것저것 시시콜콜 묻기를 좋아하여 그 분의 동경 유학시절의 이야기며 함께 공부하고 나라 찾는 일에 뜻을 같이하며 사귀었던 인사들에 관한 이야기와 신익희, 김성수, 송진우, 나용균(1930년이후 배신), 장덕수 등에 대한 이야기들을 주로 많이 묻고 들었다. 특히 처음 고려공산당을 같이 조직한 이동휘(李東輝)의 인품과 애국심에 대한 이야기가 감명을 주었다.

 

   그 후 산을 좋아하시는 지운 선생께서 우리 산악회 회원이 되어 태풍 사라호를 맞으면서 3 4일의 지리산 종주등산도 하고 설악산 대청봉을 내려오다 길을 잃어 밤늦게까지 산을 헤매기도 하였고 울릉도 성인봉에도 오르는 등 고희를 넘긴 어른이 연세도 잊고 젊은 우리들을 앞지르며 노익장을 보여주었었다. 길을 걸을 때, 산을 오를 때, 쉴 때를 막론하고 지운 선생은 언제나 우리들의 좌장이요,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다. 선생의 두 동생 광수(光洙), 복수(福洙)씨도 사회주의 운동을 한 분들인데 월북하여 그 중 광수씨는 북조선에서 초기 내각의 요직(산업상?)을 맡았었다고 하며 이복동생 창수(昌洙)씨만이 노선을 바꾸어 자유당의 이승만 독재정권시 정읍 을구의 자유당 국회의원을 했었다.

 

   이에 대하여는 “지운 선생께서 이승만 대통령과 내밀한 손잡음이 있어 공천을 하여주었을 것이다.”라는 일부의 오해도 있었고 또 “선거사무소에 앉아서 선거운동의 득표 지휘를 하고 있다.”는 설도 있었으나 이는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몇 사람들의 오해였다고 한다. 좌익운동을 하다 체포 구속된 아들의 석방운동을 간곡히 요구하는 며느리의 애절한 요구도 변절하는 자식으로 오해될까 염려되어서 거절하였던 지운 선생의 인품이나 지조를 중하게 여기신 평소의 몸가짐으로 보아 그 분들의 과민한 오해라는 것이다.

 

   6·25의 그 험난한 전란에도 살아남은 선생은 이후로는 광주 무등산을 자주 찾아 지기지우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화백과 다담(茶談)의 향을 나누며 서화에 심취하고 꽃다운 시절을 인고의 세월로 살고 있는 돈지의 따님 용화 여사 집에 들리는 일과 백산의 정진석(鄭振奭) 교장, 부안의 광문당 김용술(金榕述) 등을 만나는 일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또 화초를 좋아함이 소녀 같아서 항시 이집 저집 지인들의 집에 화초를 나누어 심어주고는 때때로 오시어 이를 보며 화사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에서 낭만적인 소녀 같음을 느끼게 하였었다.

 

   지운 선생은 조선공산당 초기 당서기를 지내고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전후 14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시며 반평생을 사신 분이다. 이런 거물이 1946 3당 합당 때 박헌영의 독선에 반대하다 무기정권처분을 받은 후 사회노동당을 창설 중앙위원을 끝으로 1947 2월 정계를 은퇴한 이래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는 하나 해방 전후의 격변기를 거쳐 6·25전쟁을 겪으면서 가혹한 반공 멸공정책으로 일관한 남한땅에서도 살아남아 천수를 다하신 일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말년에는 생활이 매우 궁핍하여 백산면 대수리(大水里) 선산 모퉁이에 토담집을 짓고 이안실(易安室)이라 당호하고 살았지만 광주에서 많이 지냈으며 1985년 노환이 점점 깊으니 무등산의 의재 허백련의 제자 근원 구철우 등 연묵회 회원들이 전남대 병원으로 입원시켜 가료 중 1986 3 16 94세의 천수로 타계하여 토담집 넘어 선산에 안장하였다.

나는 이때 주인식씨 집에서 얼마 동안 하숙을 하면서 지운 선생 외에도 주씨의 백형 되시는 주남식씨도 가끔 뵈었다. 지운 선생과 일본에서 같이 유학하며 젊은 시절 뜻을 함께 한 분인데, 이 분은 후에 폐인이나 다름 없이 살다 가셨다.

 

 

 

상해 고려공산당 창당의 주역들 - 앞줄 왼쪽부터 현정건, 이동휘, 박진순, 김립; 뒷줄 왼쪽부터 김철수 계봉우, 이증림

 

 

 

 

 

 

 

 

 

 

좌측이 방원 이성찬 선생이고 우측이 동남갈포 장인 어른이다.

 

석난 장금순 여사의 난초 그림

 

장금순의 난초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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