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지운 김철수선생 – 좌익 소아병을 극복한 정치인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1. 31.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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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선생 좌익 소아병을 극복한 정치인

 

 

 

2005 8.15 광복의날에 독립장을 추서 받은 지운(遲耘) 김철수(1893~1986) 선생은 사회주의 운동이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보고 실천에 옮긴 분입니다. 선생은 동양3국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며 일본·러시아·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138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독특한 점은 1920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까지 지낸 선생은 혼란스런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북을 택하지 않고 1986년 돌아가실때까지 남한 땅을 지키셨습니다.

 

한국 사회주의자를 연구하는 이들은 “거물급 사회주의자인 선생이 남한 땅에 계속 생존해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1893년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8년 서당을 열고 있던 한학자 서택환의 제자로 들어가 선비정신과 함께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구한말 내장원경과 궁내부특진관을 지내다 친일파의 준동을 보고 나라 망할것을 예견한 이명직 대감이 돌린 똑똑한 자식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라는 사발통문을 접하고 유학을 결심합니다.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로 유학간 뒤 선생은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매진합니다. 1915년 재일본 유학생들과 ‘열지동맹’을 결성하고, 이듬해에는 조선인·중국인·대만인과 함께 ‘신아동맹단’을 결성, 대일 항쟁을 선언합니다. 그때 만난 우범선의 아들, 동경제국대 농학실과생 나가하루우(우장춘)에게 너의 부친은 민황후를 살해하고 도망와 살해된 매국노이지만, 너는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독립과 조선의 발전에 너의 인생을 바치라고 청년 우장춘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시켜 해방후 우장춘 박사가 한국에서 감자, 옥수수, 배추등을 육종하여 농업강국에 이바지 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1920년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선생의 주도하에 동양에서 최초로 조선에 사회주의 결사체인 ‘사회혁명당’을 결성을 합니다. 이듬해에는 이동휘와 함께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재무담당 중앙위원을 맡습니다. 1923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합니다. 1926년에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취임합니다. 다음해 코민테른에 가서 유창한 영어로 조선공산당의 창립을 선포하고, 코민테른의 추인을 받고, 거액의 활동자금을 수령하여 독립운동 제반 단체에 나누어 주는등 사회주의 운동사에 굵직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1930년에 붙잡혀 88개월의 옥고를 치룬 선생은 1940년 다시 감옥에 들어가 해방을 맞아서야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했습니다. 당시 항소를 하자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거부했습니다. 1999년 ‘김철수 자료집’을 낸 한국정신문화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일제시대 김철수 선생의 활동에 대해 ‘전통적인 유학의 선비사상에 기초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평가했습니다.

 

김철수 선생은 여운형 선생이 이필형등 백의사(김구 암살범 안두희도 백의사 단원이다)단원들에게 암살 당한 후1947년 모든 정치활동을 접고 낙향합니다. 좌·우익 대결과 세력 다툼 등 혼란스런 해방 정국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습니다. 해방 이후 선생은 자발적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좌·우익의 통일정부 수립과 모든 파당은 통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늘 주장했습니다. 선생은 상해임시정부로 부터 미주한인 독립운동기부금의 횡령착복과 조직원 살해미수 혐의로 암살 위협에 처한 이승만의 착복금을 코민테른 자금으로 대납하여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이승만과 박헌영의 회담을 추진하는 등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을 자임하기도 했습니다.

 

김철수 선생은 “원래 좌나 우가 같이 필요하다.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라며 당파성을 초월해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박헌영과 당내 갈등을 빚은 뒤 당으로부터 정권 처분을 받은 선생은 별도의 사회노동당 창당에 나섰지만 1947 2월 이승만에 의해 사로당이 해체되자 ‘그만 죽고싶은 심정’이라 토로하고 이승만이 제안한 목숨보존책을 수용했습니다. 선생은 지방일간지에 정치은퇴를 선언하고 부안 백산으로 낙향하여 움막을 짖고 칩거하다 1986년 생을 마치셨습니다. 이승만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보은의 차원으로 해방후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목숨을 보존받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지사라는 의미가 상당합니다.

 

성균관대 사학과 임경석 교수는 김철수 선생에 대한 평에서 “식민지 사회 또 해방 공간에서 민족과 공공의 가치를 개인적 이해 관계보다 앞세워 추구했다”면서 “그는 사회주의운동, 독립운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권력자적인 지위를 갖지 못했다”며 나름데로의 낙향 배경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김철수 선생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전 부안 백산고 교장 고산 정진석 선생은 생전에 선생에 대한 평에서 “그는 좌익 중심의 정치 행태를 극복하려 했다”면서 “비록 통일정부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낙향 뒤에는 자연과 벗하며 농사에 전념했습니다. 선생은 허백련, 오지호 등 지역의 예술인과도 교류했습니다. 선생은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와 남한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선생에 관한 논문을 집필한 정혜경 박사는 선생에 대해 “해방 이후에 북으로 가지 않고 남한에서 사회 개혁을 이루려고 노력했다”면서 “지역에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조봉암 지지 활동을 했으며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시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부안 백산면 대수리 한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잡은 10평 안팎의 초라한 토담집은 선생의 생애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논밭, 뒤로는 소나무숲이 이어진 토담집은 선생이 1968년 손수 지은 것입니다. 선생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통일을 염원하며 작은 고통이라도 나눈다는 자세로 ‘이 정도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김철수 선생의 삶은 그다지 편안하지는 못했습니다. 명백한 독립운동 공적이 잇고 별다른 친북활동의 전력이 없었음에도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정권하에서 1급 감시대상으로 분류돼 한평생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또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민족적이고 유교적’인 성향 때문에 북한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남북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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