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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거목 김철수의 딸’ 김용화. 숨가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광풍을 정면으로 맞으며 위태로운 삶을 건너온 그이의 가슴 속엔 납덩이 같 은 눈물이 고여 있다. 아버지가 낙향하여 살았던 부안 백산면 대수리 흙집 앞에서. |
ⓒ 김태성 기자
24살 당시의 모습 | ‘상전벽해’라더니, 예서는 바다가 육지가 됐다. 한때는 소금배 드나들며 제법 술렁이던 항구였으나 새만금 간척으로 이제는 쭈그러진 갯마을. 부안 계화면 의복리 돈지마을엔 ‘용화 할머니’라 불리는 이가 산다.
“어느 날 잽혀가서 죽어도 어디로 간지도 모르잖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거목 김철수의 딸’ 김용화(90).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가 이데올로기의 광풍 속을 걸어온 그의 지난한 삶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 준다.
그이 집 문지방은 감시원의 발길에 닳고 달았다. 50년 가까이 꾸려온 ‘삼성약방’이라는 간판이 바랠 대로 바랜 그 세월은 신고간난의 연속이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지만 그이에게 주어진 운명은 쓰기도 쓰거니와 뱉을 수조차 없었다.
“내 호적이 1919년 3월1일이야. 울 아버지가 음력 동짓달 열흘에 난 딸을 기미독립운동의 뜻을 기린다고 3월1일생으로 신고했대요. 사람이 그리 많이 죽은 그 날을 생일로 올려놓아서 내 팔자가 그리도 셌나 봐.”
용화는 스무 살에 아버지를 처음으로 봤다. “갓난애기 때는 아버지가 동경으로 유학가서 못 보고, 사회주의독립운동 시작하고는 숨어다니느라고 못 보고….”
1930년에 체포돼 10년형 선고, 38년 대전형무소 출옥, 40년 재수감, 해방으로 공주감옥 출감. 두 차례에 걸쳐 13년10개월 남짓 옥살이를 할 정도로 치열한 독립투쟁을 한 아버지. 그이는 감옥에서 가까이 지낸 이를 둘째 딸 용화의 사위로 점찍었다. “아버지가 사위를 고른 기준은 엄정했어요. 첫째, 8살 위일 것(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둘째, 자기 힘으로 공부하고 자기 노력으로 사는 사람일 것, 셋째, 공산당원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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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 는 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 아버지 김철수 (오른쪽) 남편 이복기의 사진이 나란한 곁으로 지운선생 생시에 즐겨 입 던 두루마기가 걸려 있다. |
ⓒ 김태성 기자 | 그 3대 조건이 맞았는지 당시 서울의 매일신보 기자였던 이복기와 21살에 혼인을 했다. 남편과는 함북 청진에서 근 2년을 살았다. 그때 ‘남편밥’이란 것을 먹어봤다. 그리고 다시는 한데 살지 못했다. 1950년, 광주에 내려가 남로당 도책을 맡아 지내던 남편을 만나러 오다 차가 전복되면서 용화는 하늘로 솟구쳤다. “죽었다고 거적대기에 여덟 시간을 덮어놨다고 그래. 그래도 용케 버리질 않아서 이렇게 살아 있네요.”
나중에 시조카에게 들은 바로는, 아내가 다쳤다는 말을 들은 남편은 아내의 소식을 물으러 나섰다가 그만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했다. “지금도 가슴이 아파요. 그렇게나 큰 사람을 내 그릇에 넘쳐서 못 알아봤어. 억지 혼인을 했다고 박대를 했어. 그이는 참 다감한 사람이었어요. 어디 잠시 나가면 숲길만 보아도 산책허자고 내 손을 가만 끌어당기던 사람이야. 그걸 그리 매정하게 뿌리쳤을까. 나는 내세가 있었으면 해. 그이를 위해서 꼭 그런 세상이 있었으면 해. 여보 그 세상에서는 부디 훌륭한 여자 만나서 행복하게 사시우, 하고 빌어.”
강철 같은 아버지 아래 태어나 강철 같은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서 그이는 서북테러단을 피해 아픈 몸으로 서울 살던 오빠 자식들을 업고 남으로 내려왔다. 군산 옥구에서 삯바느질로 조카들과 함께 연명하던 중 형부도 총맞아 가고 광주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언니 김금남도 죽어 버렸다. 언니네 다섯 조카마저 고아가 됐다.
“남이라도 그 아이들 거둬주었겠지.” 그렇게 이모 아닌 엄마로 살아낸 세월. 칼바람 같은 공안당국의 감시는 뼛속까지 시리게 했다. “우린 참말 억울허게 살았어. 그렇게 공부를 잘해도 서울대학도 못가. 받아주들 안해. 연좌제 땜에 귀한 인재 하나 썩혔어. 우리 영일이(큰조카)가 그 영리헌 놈이 갈 길이 닫혔어. 영일아 너 그것 안해도 괜찮어, 허고 다독였지만 내 속은 썩어 문드러졌지.”
징글징글헌 세상이었다. “어느 날 잽혀가서 죽어도 어디로 간지도 모르잖어. 어디다 호소도 못허잖어. 갸들이 법인게.” 쉰 몇살 땐가 싶다. “어느날 밤중에 시커먼 차가 왔어. 보안사령부에서 왔다고 헌디 이북에서 온 사람 감추었다고 나를 때릴라고 해. 우리 영일이까지 차에다 실어. 그래서 내가 악을 썼어. 내가 당신네들헌테 시달려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만 우리 영일이는 대한민국 교육받고 물 안든 사람이니 손대지 말라고. 그런 일을 예사로 겪고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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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난의 시대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그 자신과 가족의 안락을 바 쳐야 했던 ‘고고고고(古枯孤高)’의 애국지사 지운 김철수. |
ⓒ 전라도닷컴 |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는 ‘곡귀단(哭鬼團)’ 어쩌면 아버지의 사상의 그늘에서 평생 고통의 삶을 살았던 ‘피해자’지만 그이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가장 옳게 사신 분이거든.” 지난 2004년 선생의 18주기를 맞아 ‘김철수추모사업회’에서 부안백산중고 옆에 세운 추모비문에서 지운(芝雲) 김철수의 한 생애를 읽는다.
<당신은 일제강점기 한·일·중·소 넘나들며 민족해방에 온 몸을 바쳤습니다. 일본에서 신아동맹단을, 국내에서 사회혁명당을, 중국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했으며, 상해임시정부를 개조하기 위하여 전 민족적 국민회의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조국에 돌아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맡았습니다. 생사 넘나드는 옥고 14년에 맞은 해방의 감격 속에서 민족의 단합된 통일조국을 이루려 헌신하였으나 국내외 정세에 환멸을 느껴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했습니다. 겨울 칼바람과 같은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으시면서도 외딴 한 칸 토담집에서 통일의 봄꽃이 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의연하게 이겨냈습니다. 당신은 지조와 청빈으로 평생을 살았고, 조국 한반도를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일제하 가장 치열한 국내항일조직 가운데 하나인 조선공산당 3차 당서기였던 김철수. 그의 독립운동은 북에서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사회주의자로, 남한에서는 공산주의 활동으로 낙인찍혔으나 2005년 건국60돌을 맞아 건국훈장독립장을 추서함으로써 독립을 향한 한평생의 행적을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공식 인정받았다. 1999년 《지운 김철수》자료집을 낸 한국정신문화원은 일제시대 김철수의 활동을 ‘전통적인 유학의 선비사상에 기초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평가했다.
1893년 부안 백산면 원촌리에서 출생, 어려서 군산 금호학교를 다니던 김철수는 단발령이 내리자 머리를 자르면 안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서당을 다녔다. 여기에서 평생 그의 삶의 스승인 서택환을 만난다. “마음은 지란과 같이 향기가 나게 하고 포부는 구름과 같이 멀리 높게 가지라”는 뜻으로 ‘지운(芝雲)’이라는 호를 내려 준 스승은 “우리나라가 다 망해간다. 너희들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가르쳤다.
“내가 독립사상을 가진 것은 서택환씨 덕분이고, 동냥아치 밥 주고 그런 것은 우리 고모님이 나 업고 가서 동냥 주어라 그것이 기본이 된 것 같아” 살아생전 구술한 대로 지운은 유난히 동정심이 많았다. 동냥아치들이 오면 그냥 보내지 못했고, 거지들이 돼지우리 옆에서 밥을 먹으면 같이 먹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던 그 성품이 사회주의 사상으로 이어진 것. 김철수의 꼿꼿하고 결백한 성품은 일찍이 두드러졌다. 18세 때 아버지를 대신해서 어떤 잔치자리에 간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떡을 주어서 먹었는데, 알고 보니 합방을 기념하는 떡이라 했다. 아무리 떡을 토해내려 해도 토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두승산을 바라보면서 서로 싸우기만 하는 당파 때문에 이 좋은 산천이 일본에 넘어가는구나 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는 동안 ‘내 사람’이나 ‘내 당파’를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이 때라고 한다.
와세다대 유학시절,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자는 뜻으로 ‘곡귀단(哭鬼團)’을 만들어 활동했으며, 동경에 온 한국인 도지사가 친일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는 단상에 뛰어올라가 도지사 멱살을 잡았다고 한다. 그의 의분에 감동한 의재 허백련과의 평생 교분이 이때 비롯됐다.
일본, 만주, 중국, 소련 등을 목숨을 걸고 넘나들며 사회주의독립운동을 펼치던 그는 1928년 검거되어 당시 치안유지법 최고형인 10년형을 선고받는다. 고문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였지만 항소를 거절한 것은 “일본의 법률을 시인할 수는 없다”는 뜻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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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국분단의 시대에 ‘이만하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짓고 지운이 기 거했던 두 칸짜리 흙집. |
ⓒ 김태성 기자 | “내 수인번호가 1996. 그때까지 살아 통일을 봐야겠어” 해방이 되고 이승만 초대 내각에 노농부장관으로 발탁되었으나 지운은 “내가 입각하면 나를 따르던 동지들이 어디로 가겠는가”하며, 이를 고사했다.
<왜구를 인근 바다로 쫓아내니/ 남북으로 갈라져 이 나라 사람들끼리 싸우는구나> 그 무렵 그가 지은 시구 속엔 해방정국이 민족분단과 이념 대립으로 치닫는 현실에 느낀 환멸이 드러나 있다. “정치인 김철수는 죽고 자연인 김철수로 돌아간다”는 심정으로 은퇴한 사회주의자 김철수는 1947년 낙향한 후 1968년에는 백산면 대수리 부모 묘소 옆에 손수 흙집을 짓고 살았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에 비하면 ‘이만하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이안실(易安室)’이라 이름지은 두 칸짜리 집엔 부인과 단둘이 생활하였다.
이 곳을 다녀간 의재 허백련이 우물도 없는 집이 무슨 집이냐며 우물 파라고 준 돈을 지운은 선산지기 자녀의 학자금으로 내주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것은 지운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장손 소중씨가 벌목장 사업권을 따낸 것을 알고 지운은 “농사지어서 정직하게 벌어야 한다”며 면사무소를 찾아가 어렵게 따낸 허가권을 취소시켰다. 그렇듯 냉정할 정도의 강직함은 가족들에게는 고통이었다. 손자의 고생을 안쓰러워 하면서도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쌀을 퍼주고 학비를 대주며 “우리보다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어떻게 모른 척 하냐”고 되묻는 이가 지운이었다.
‘공안 1급 감시대상’으로 평생을 보낸 그의 생애는 그 자신 자주 되뇌인 대로 ‘해방 전엔 감옥, 해방 뒤엔 지옥’이었다. “독립운동하느라 부모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며 부모 묘소를 지키며 고요하게 살고자 했던 그, 그러나 세상일에 귀를 닫을 수는 없었다.
“한일협정 같은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수심이 가득하셨어요. 광주항쟁 소식에는 이틀 동안 식사를 못하며 괴로워하셨고…. 병환중에 일본놈들이 독도가 저희 땅이라고 지랄한다는 기사를 오려서 붙여놓고 저런 도적놈들! 저런 죽일 놈들! 하시더니 어느날엔 소리를 내어 우시더라고. 저런 도적놈들을 대포를 걸어놓고 쏴불어야겄다 허시면서. 그래서 병세가 더 악화됐어요.”
‘되찾은 나라가 다시 둘로 나뉜 것’이 평생의 괴로움이었던 지운은 통일을 가로막는 교육을 걱정했다. “어느 마을에 멸공마을이라고 간판을 달아 놓았더라. 멸공이 다 뭐냐. 좌도 있고 우도 있고 보수도 있고 진보도 있어야 발전하는 거지. 통일하려면 좌우 진보 보수 가리지 말고 멀리 보고 강물 흐르듯이 함께 가야 하는 것이여.”
화선지에 글씨를 쓸 때마다 온전한 한반도 모습에 ‘통일’이라고 씌어진 두인(頭印)을 찍었던 지운. ‘통일이 되면, 아히야 뛰어나가 나팔불고 징쳐라’ 라는 손수 지은 시구를 쓰기를 즐겨하던 그이가 되뇌이던 말이 있었다.
“내가 감옥소에 있을 때 수인번호가 1996번이거든. 그때까지 살아 통일을 봐야겠어.” 허나 그는 1986년 94세를 일기로 타개했다. 1996년에도, 2008년 오늘에도 그가 꿈꾸던 통일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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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선지에 글씨를 쓸 때마다 지운은 온전한 한반도 모습에 ‘통일’이라고 씌어진 두인(頭印)을 찍어 통일에의 의지를 다짐했다. |
ⓒ 전라도닷컴 | ‘고고고고(古枯孤高)’의 애국지사 “우리 아버지가 사상운동을 안했으면 대시인이 되셨을 거요.” 소련에서 철새를 연구하기 위해 표식을 붙여 보낸 비둘기가 부안(扶安郡) 행안면(幸安面) 궁안리(宮安里)에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지운은 ‘三安’이란 시를 써서 통일에 대한 열망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자연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졌던 지운은 낙향 후에는 ‘芝雲’을 늦게 밭을 간다는 ‘遲耘’으로 바꾸고 자연과 사람, 꽃과 나무와 더불어 보냈다. “인정이 많아서 지팡이 맨들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꽃나무 죽어간 놈 살려서 나눠주고…”
봄을 알리는 진달래와 종달새를 참으로 좋아하였던 그는 울릉도에 진달래와 종달새가 없다는 말을 듣고는 80세 되던 해 종달새를 안고 걸레배를 타고 몸소 울릉도엘 갔다. 배에 물이 넘쳐 죽을 위험에 처하자 종달새부터 하늘로 날려보내고는 그 나중에 기어이 종달새를 보낸 이가 그의 아버지였다.
“진달래는 장차 우리 국화가 될 것인데 바람 좋고 공기 좋은 울릉도에 심어야 한다고 손주들 데리고 산으로 다니며 가마에 캐서 담아서 보냈어요.” 울릉도에서 아득히 높은 절벽 위에 만고풍상 다 겪어낸 등굽은 향나무를 보고 쓴 휘호가 ‘고고고고(古枯孤高)’. 그 한 그루 소나무에서 ‘오래되고 마르고 외롭지만 드높은’ 그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터이다.
그는 단종이 피눈물을 토했다는 영월 청령포에 가서 그 애절한 두견새 울음소리를 기어이 듣겠노라고 밤배를 타고 건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겸손하기 이를 데 없었던 지운은 젊은이들이 찾아올라치면 항상 따뜻한 아랫목을 양보했다고 한다. 그러한 인품이 감시원의 마음조차 움직였었나 보다. 한번은 맨날 약방 앞을 지키고 있던 감시원 하나가 약방 안에 들어와서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라며 눈물을 흘리더란다.
“나는 우리 아버지를 지대로 앉아서 본 적이 없어. 오시면 사방 데서 온 청년들이 우르르르 둘러앉고. 항시 청년들 속에서 살다 가셨어. 울 아버지는 항시 남의 차지여. 나는 돈 챙겨 드리고 옷 지어드리고 그것이 내 일이야.”
글을 청하는 이들에게 글 써 주기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건강이 안 좋을 때는 지필묵을 감추어 붓글씨를 못쓰게 했다는 용화 할머니는 주기 좋아서 하시던 그것을 못하게 한 것이 지금 생각하니 불효였다 한다.
지운이 잘 쓰던 글귀가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굴원의 <어부사>였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천하를 근심하던 그대 부럽고/ 오늘 온전한 몸으로 남아 있는 네가 부끄럽네>(<어부사> 중) “그런 글을 쓰실 때 울 아버지가 무슨 맘이셨을까 그걸 헤아리면 가슴이 아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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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쌍헌 사람 있으면 기어이 도와주어야 했던 내력’을 물려준 아버지 지운과 딸 용화.(용화 의 환갑잔치에서) |
ⓒ 전라도닷컴 | “고난의 나라에 태어났으니 고난을 받는 것은 반듯이 해야 헐 일” 아버지의 피를 이었는지 용화 역시 어려서부터 시와 음악을 좋아했다. 허나 그가 걸어온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나는 평생 욕으로만 산 사람이야. 만날 그 놈의 형사들하고 실랑이하며 억울한 세상을 살았어. 언제 이 분한 세상이 그칠까. 친일파의 자식들은 오늘도 배 뚜들고 살고 어떤 친일파 딸은 대통령을 꿈꾸는 세상이잖아.”
어떤 친일파의 딸은 호의호식하는데, 어떤 애국지사의 딸은 토담집에 몸 붙인 부모 생계를 돌보느라 황톳길 위에 쌀가마며 소금 가마를 이고 날랐다. “겨울에 얼음 풀리면 신발도 벗어버리고 폭폭 빠짐서 댕겼어.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 적에는 여기가 순 황톳길이야. 그 불편한 데서 사셨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아파” 61년도에 얻은 약종상 면허로 식구들 생계를 꾸려갔던 그이.
“나는 본디 장사가락이 없어. 넉넉한 사람 아니면 내가 덜 받아야 하고 돈이 원체 없는 것 같으믄 그냥 주어 버리고 그랬지. 저기 노류지 사람들이 지금도 만나면 그리 인사를 해. 약방아주머니, 나 돈 없을 때 그럴 때 아줌니가 돈도 안 받고 약주셨잖애요 그래.”
아버지가 그 마음을 물려주셨나 싶단다. “국민학교 댕길 때도 불쌍헌 사람 있으면 도로 들어가서 쌀을 퍼다주고 그랬어요. 그게 울 아버지 내력이겠지.” 아버지 가신 뒤에 아버지 고무신에 묻은 황토흙 씻으면서 울었다는 딸. “이런 고난의 나라에 태어났으니까 고난을 받는 것은 반듯이 해야 헐 일이지. 그걸 못다 하시고 가신 것이 아쉽지.”
얼마 전엔 지운 선생을 찾아왔다던 이가 놓고 간 김남주 시집을 넘겨 읽다 용화 할머니는 그만 밤새 울었노라 한다. <그러나 보아다오 동지여!/ 피의 양분 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보아다오 이 나무를/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민족해방투쟁의 나무를 보아다오/ 이 나무를 키운 것은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 낸 것은/ 그들이 흘리고 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를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 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숨가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광풍을 정면으로 맞으며 위태로운 삶을 건너온 김용화 할머니. ‘공산당원 김철수’라는 그 말을 적지 못한 아버지의 백비(白碑)앞에 엎드려 그이는 되돌아본다.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 울고 있는 것을 잊지 않았던 한 사람의 생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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