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9_遲耘(金錣洙)

김철수 책임비서 시기의 조선공산당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1. 3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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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김철수 책임비서 시기의 조선공산당

김철수 중앙의 출범과 인적 구성
김철수 중앙과 당통일운동
정우회 선언과 민족협동전선 추진
1. 김철수 중앙의 출범과 인적 구성

세 달 동안 계속된 제2차 조선공산당 탄압사건은 조선공산당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1926년 6월 6일부터 7월 25일까지 체포된 자가 2,000명을 넘을 정도였다. 8월 말까지 체포된 사람들은 3,000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물론 이들이 모두 당원이거나 공청원은 아니었지만 당과 공청의 핵심 성원이 검거의 광풍을 피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김철수에 따르면 당은 이 사건으로 130명의 당원을 잃었다. 註1)이 숫자는 그해 3월 초 조선공산당 당원 총 146명 가운데 89%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당원과 후보 당원을 합한 숫자는 265명이었는데 註2)그 가운데 피검자는 49%였다. 괴멸적 타격이었다. 당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검거를 피한 중앙집행위원 김철수 註3)가 후보위원 원우관·신동호, 그리고 경성부 간부 오희선이 당 조직을 추스르기 위해 처음으로 만난 것은 9월 3일이었다. 이들은 이날 모임에서 5명의 새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김철수가 강달영에 이어 책임비서로 취임했고, 후보위원 두 사람은 정식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의원 출신이자 화요파 성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고 조선공산당 경성부 집행위원을 지낸 오희선도 중앙집행위원으로 보선되었다. 네 사람 외에 중앙집행위원으로 보선된 것은 공청 책임비서를 새로 맡은 고광수였다. 원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이던 권오설이 체포된 뒤 책임비서에 취임한 것은 전정관이었다. 註4)그런데 전정관도 7월 19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래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출신의 당원으로 경성부 제2구 야체이까에 배속되어 조선노동당 안에서 프랙션 활동을 벌이던 고광수가 전정관의 후임으로 공청 책임비서가 된 것이다.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


이렇게 하여 김철수 중앙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처음에 5명으로 출범한 김철수 중앙은 곧 7명으로 늘어났다. 경찰에 구금되어 있던 강달영 중앙의 중앙집행위원 홍남표와 중앙집행위원 후보 구연흠이 증거 불충분으로 9월 중순 무렵에 석방되었기 때문이다. 구연흠과 홍남표는 김철수 중앙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로써 김철수 중앙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당

간부의 구성이 수시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중앙집행위원을 그만 둔 것은 공청 책임비서를 겸임하고 있던 고광수였다. 후술하듯이 공청은 1926년 8월에 서울파의 고려공산청년동맹과 통합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통합된 고려공청의 책임비서가 된 고광수는 이해 9월말 국제공청과 연락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여기에 이미 강달영 중앙의 비밀문서가 일제경찰에 압수된 상태였으므로 아직 체포되지 않은 김철수는 물론이고 일시 석방된 홍남표와 구연흠이 언제 경찰의 검거망에 걸릴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남표와 구연흠은 해외로 망명하기를 원했다. 전남 광주에서 올라온 신동호도 망명하겠다고 나섰다. 실제로 홍남표와 구연흠이 1926년 9월과 10월에 각각 상해로 망명함으로써 註5)김철수 중앙에는 다시 빈자리가 생겼다. 1926년 11월에는 중앙집행위원 원우관도 상해로 떠났다. 상해의 코민테른 원동부 및 조선공산당 구 중앙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김철수 중앙은 세 차례에 걸쳐 중앙집행위원을 보선했다. 첫번째 보선은 고광수의 후임을 정하는 것이었다. 고광수에 이어 공청 책임비서가 된 것은 북경에서 당통일운동의 임무를 띠고 귀국한 뒤 통합된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으로 있던 양명이었다. 양명은 당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김철수 중앙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두번째 보선은 1926년 10월에 이루어졌다. 이때 김철수가 낙점한 새 간부는 안광천이었다. 일본에서 사상단체 일월회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6년 여름 귀국한 뒤에는 조선공산당의 표면단체인 정우회에서 뛰어난 이론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던 인물이었다. 註6)더욱이 국내의 분파투쟁

에 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당시 진행되고 있던 당통합운동에도 적임자로 간주되었다.

세번째 보선은 원우관이 상해로 떠난 뒤에 이루어졌다. 11월 중순 이미 서울파 성원들이 대거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뒤였다. 서울파 출신을 간부진에 적절하게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김철수 중앙은 당 통합에 적극적이던 서울파 성원의 일부를 중앙집행위원으로 보선했다. 권태석과 김준연이 바로 그들이었다.

특히 김준연은 동경제국대학과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귀국한 뒤에는 서울파에 들어가 고려공산동맹 책임비서로서 서울파의 조선공산당 입당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김철수는 김준연을 중앙집행위원으로 보선한 것을 가리켜 ‘일꾼’을 얻었다고 기뻐할 정도로 새 중앙집행위원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10-5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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