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5_80년5월18일

장준하 선생의 죽음의 배후는 - 차지철이 전두환을 시켜서 한 일 - 이라는 소문이 무성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4. 27.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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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의 아들, 장호준 목사


휴심정 2013. 04. 26 

 

매일 아침, 커네티컷에서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그는 주말이면 목회자로 강대상에 선다.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10대에 아버지를 잃었다. 정부는 실족사라 발표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1980년 5월 19일에 군에 강제 징집됐지만 살아남았다. 같은 입소 대대 친구 10명 중 2명이 자살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라'는 말 대신 '예수처럼 살자'고 하는 목사, "긍정적 분열을 통해 더 많은 작은 교회들을 만들어 작은 교회들을 통해 세상과 교회 간의 벽을 허물겠다"는 꿈을 가진 목사. 이 모든 설명보다 장준하의 아들로 더 유명한 장호준 목사(유콘스토어스한인교회 담임)를 만났다.


 ▲ 장준하 선생 


지금의 20대에게는 아마도 생소한 이름일 장준하 선생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했고, 일본 학도병의 신분으로 일군을 탈출해 독립군에 입대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임시정부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해방 이후 김구 주석의 비서로 정치를 시작했다. 국민 계몽을 위해 4.19 학생의거의 정신적 근간을 제공했던 <사상계>를 발행했으며, 야당 정치인으로도 활동했고, 박정희 군부 독재와 유신 헌법에 저항하여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후 1975년 등산 중 추락사라는 의문사로 유명을 달리한 시대의 양심이었다. 


2시간이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아버지 장준하 선생의 죽음의 배후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론에 입을 열었다. 또 장준하 선생의 신앙적인 면모, 아버지의 죽음 이후 1980년 5월 19일 강제 징집돼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야기, 스쿨버스 운전사로 일하면서 목회하는 이야기, 한인 교회의 방향에 대한 의견 등을 털어놓았다. 지난 2월 LA를 방문했을 때 인터뷰를 하고 부족한 부분은 이메일과 전화로 보충했다. (글 게재 2013년 4월23일)


장준하 선생 돌아가실 당시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집에서 장준하 선생과 시국 관련 대화를 나누곤 했었나? 


열 살 터울 형님이 계셨다. 선친(장준하 선생)께서는 나와는 그런 이야기를 하진 않으셨다. 선친께서 나에게 보여준 모습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산을 오르는 모습이었다. 형 둘, 누나 둘은 등산을 좋아하지 않아 항상 내가 모시고 갔던 기억이 있다. 선친을 따라서 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선친이 형무소에 계시던 때가 아니면 항상 주말에 등산을 했다. 어떤 경우는 흔히 말하는 산악회, 정치권에서 하는 산악회도 있어서 선친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등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우리 둘이 가는 경우가 많았다. 산이 오르막이지 않나. 올라가면서 아무 말씀도 않으셨다. 


나중에 철도 들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 생각을 해보니 아무 말씀도 없이 산을 오르던 것, 그것은 역사였던 것 같다. 일군을 탈출하신 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임시 정부를 찾아 6,000리 길을 걸으셨던 역사, 자유를 위해 이승만 독재에 항거했던 역사, 민주를 위해 군사 독재에 항거했던 역사, 민족의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민족주의자의 역사, 그 역사를 당신의 발로 걸어 오셨지만 아직도 온 몸으로 걸어야만 했던 민족의 역사, 그 역사의 순간순간을 걸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보고 있었던 민족이라던가 이런 것들은 너무 넓었다. 산에서는 발 한발자국만 보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산에서 보시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아버지라서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 힘든 일제, 2차 세계대전, 임시정부,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등 우리는 쉽게 격랑의 시기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시대를 사셨던 분 아닌가. 이걸 정말 겪은 사람들의 삶을 내가 겪는다고 하면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 장호준 목사 


집안이 전부 기독교였나?


아버지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천주교인이었다. 할아버지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요시찰 대상 목사셨다. 2차 세계대전 말 일제의 발악이 극에 달하게 되자.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가해지는 일제의 탄압과 어머니가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머니와 결혼을 하신 후 본인은 학도병으로 끌려가신 것이다. 해방 후 할아버지와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고, 6.25 이후 할아버지께서는 서울에서 목사로 목회를 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교회에 나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성당에 다녔었다. 


학교를 중퇴한 까닭은? 


학교가 의미가 없었다. 1학년 때 그만 뒀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이야기였다. 아버지께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알아서 해라"라고 말씀하셨었다. 피는 못 속이는지 우리 딸도 중간에 학교를 그만 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 두라고 했다. (장호준 목사의 딸은 컬럼비아대학원을 중퇴를 하고 현재는 하버드대학 동아시아학과에서 대학원을 졸업했다.) 


고등학교 중퇴하고 검정고시를 봤나? 


그렇다. 76년에 대학 입학을 했다. 76년 4.19가 엄청났다. 75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그 사건이 큰 이슈 중 하나였다. 학교에서는 자퇴를 종용했다. 그때만 해도 데모할 때 교수들과 상의하던 때였다. 학교 측 이야기는 '퇴학을 당하면 학교를 옮길 수도 없지만 자퇴를 하면 다른 학교를 갈 가능성이라도 남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퇴를 했다. 그러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먹고 사는 일도 급했었다. 당시 어머니는 보험 외판원 일을 하셨었다. 그래서 포장마차, 가게 점원, 등산 가이드 등 닥치는 대로 했다. 그러던 중 도저히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다른 가족들은? 


큰형님은 결혼을 했고 나머지 둘째 형과, 누나들은 결혼도 하기 전이었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었다. 큰형 스물일곱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 선친의 뜻을 잇기에 우린 너무 어렸었다. 누나 둘은 이대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 집안이 재미있는 것이 아버지가 아들들에는 무관심했다. 큰형 둘은 대학 보내는 일에 관심도 없었고 보낼 돈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어지간한 대학에 자리 만들어 밀어 넣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형들을 대학에도 안 보내셨다. 


하지만 누나들만큼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셨고 대학을 보내셨다. 김옥길 총장이 이대 총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긴급조치 1호가 터지면서 아버지께서 붙잡혀 가고 아무도 집 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할 때였다. 소위 어른들이라는 사람들도 다 외면하고 있을 때 김옥길 총장만큼은 때가 되면 쌀 한 가마니씩 들고 집을 찾아왔다. 


학교를 그만 둔 이후는? 


79년에 중앙신학교에 다시 입학을 했다. 그런데 그때 신학을 하려고 중앙신학교를 간 것은 아니었고 사회사업 쪽이 재미있어 보여 진학을 했었다. 어쩌면 사회사업과 사회 운동 이런 것들의 개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사회라는 말이 들어가니 좋았다. 1년 다니는 동안 성당을 다니며 영세, 견진을 다 받았다. 미사 해설, 주일학교 선생을 하며 골수 천주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군대는 언제 갔나? 


대학을 1년을 다니고 5.18이 나고 나는 5월 19일에 군대로 끌려갔다. 수용 연대(입소 대대) 있을 때였다. 25일 정도 거기서 보냈는데, 전국 각지에서 비슷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끌려와 있었다. 군대 측도 끌고 온 사람이 넘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머리수만 세고 밥 세 끼 먹이고 자기 전에 머리수 세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무도 그걸 통제할 인력이나 프로그램도 없었다. 며칠 밥 먹고 자기를 반복하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뭉쳤다. 그런 곳에 가면 비슷한 사람들 "끌려온 사람들"이 딱 보이지 않나.(웃음) 


눈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입소 대대 안쪽의 온실에 숨어 의식화 교육을 우리들끼리 했다. 그때 난 사회학을 했으니 사회사업학,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각자의 운동 경험을 나누던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그리고 난 다음에 띄엄띄엄 훈련소로 배치 됐다. 그중 둘이 자살을 했다. 하나는 훈련소에서 목을 매었고, 다른 하나는 자대에서 총으로 자살을 했다. 그 당시 잡혀간 사람들이 얼마나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았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훈련 끝나고는 광주로 보내졌다. 충정 훈련을 받았다. 만약 광주민주화운동이 계속 됐다고 하면 나도 진압에 끌려 나가지 않았겠나. 아마 내가 나가게 됐었다면 총부리를 거꾸로 들었겠지만. 충정 훈련을 마치기 전에 광주민주화운동이 진압되었다. 그래서 난 진압에 나가진 않았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참 끝이 없다. 사연이 길기 때문인 것 같다. 


배치 받은 부대는 백마고지가 있는 5사단이었다. 1년이 지나 철책 근무를 섰다. 철조망은 처음 보는 순간 밤새도록 정신없이 울었다. 아버지께서 그토록 추구하셨던 통일의 장벽이 눈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허물어질 수 없을 것 같이 길게 뻗은 철조망.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이 '이 철조망을 세운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너뜨릴 수 있는 이도 하나님이시다'였다. 그래서 제대하고 신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통일을 위해 민족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쳤는데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너무 알고 싶었다. 


그 시대에 깨어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장준하 선생도 장호준 목사도 자기 자신을 많이 희생했다. 아버님은 결국 목숨까지 바치셨지 않나. 


목사가 될 사람한테 결혼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본인이야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가족의 희생이 너무 크지 않나. 내가 싱가포르에서 선교사로 있을 때 6개월은 바깥에 나가 있었는데, 나는 참 좋았지만 가족은 참 힘들어 했었다. 우리 아버지 역시 본인은 희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신은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 민족을 위해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있었다. 자식들은 어떻게 되나? 이제 이 나이가 되어 돌이켜보면 아버님이 쉰여덟에 돌아가셨으니 나는 6년 남은 셈이 된다.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 나이에 <돌베개>를 쓰신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자식들까지도 희생시켜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가신 것이었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아버지는 온 몸을 던지셨다. 어쩌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혼자 죽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바라보고 있었던 모든 희망들이 다 죽어버린 것이었다. 예수를 바라보고 있었던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빵을 가지고 있었던 아이도 죽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그 희망을 다 죽여 가면서까지 얻으려고 했고 바라보았던 것이 인간을 위한 사랑이라고 하면 내 아버지가 자식들까지도 다 희생하면서 바라봤던 것이 민주주의고 통일이었다. 아버지는 "모든 통일은 다 좋다"고까지 하셨다. 


장준하 선생이 가지고 있던 민족의식과 통일, 이런 명제들이 신앙심을 키우는데 큰 역할을 할 것 같다. 


분단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얻은 이득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돈이든 재물이든 권력이든 무엇이든지 통일을 위해 다 포기해야만 한다고 아버지는 생각하셨다. 통일이 과연 무엇이길래 우리가 그 고생을 해야만 했는가를 생각하며 애를 먹었었다. 그랬기 때문에 철조망을 보며 밤새 울었던 것이고 제대를 하고 난 다음에 신학으로 옮기고 아버지에게 민주주의와 통일을 이야기한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신학을 하게 됐다. 


예수와 함께 죽은 줄 알았던 희망과 사랑이 부활했듯, 아버지와 함께 죽은 줄 알았던 민주주의와 통일이 다음해 '3.1 민주 구국선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먼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장준하 선생도 신앙심이 깊으셨던 것 같다. 


목사의 아들이었고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초등학교 4-5학년 때 쯤이었는데 아버지가 나에게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예수가 사람이다. 예수가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울기도 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때는 그게 무슨 소리야 했는데, 아버지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에 대한 그림이 확고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 하에서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사재판을 받던 법정에서 아버지는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군 판사에게 '나는 법 이전의 인간이다'라고 일갈하셨다. 당시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목회를 하면서 그 말씀이 곧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장준하 선생의 죽음의 배후는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데. 


차지철이 전두환을 시켜서 한 일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었다. 증거를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결국 아버지를 테러한 것은 그때 전두환의 짓이었다고 봤던 것이다. 박정희한테는 말을 안 했다는 것이다. 김재규 씨도 사건 후에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말들이 나돌았다. 


만약 타살이라면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보나? 


아버지는 당신이 믿는 민족을 향한 사랑과 백성을 향한 믿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 그랬기 때문에 <사상계>도 하실 수 있는 것이었다.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산다'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백성들이 깨우치면 나라가 산다는 것이 아버지의 믿음이었다. 내가 회중교회를 하며 늘 강조하는 것이 교인들이 깨우치면 교회가 산다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다. 


내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마지막에 대해 유추해보자면 이런 점이 있다. 74년 긴급조치로 구속되었다가 연말에 석방되시고 나서 75년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 옆에서 쫓아다니며 느꼈던 것이 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백성에 대한 믿음과 민족에 대한 사랑, 백성에 대한 믿음은 그 백성들이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믿음이고 민족에 대한 사랑은 내가 죽고 백성이 살면 이 민족은 살고 통일이 된다는 마음이셨다.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은 탈 수 없는 젖은 종이지만 잘 교육시켜서 탈 수 있는 재료가 되고 나는 항상 심지로 불을 붙이면 이 나라가 밝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아버지는 가지고 계셨다. 심지 하나가 창을 밝힌다는 '일주명창'을 아버지는 믿고 계셨다. 


75년 초에 해방 45주년이 되었을 때쯤 돼서는 어떤 면에서는 백성에 대해서 포기를 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리영희 선생도 <대화>에서 박정희 유신 정권의 끝이 보이지 않는 70년대 중반 자살까지 생각을 했다가 베트남에서 싸우는 인민들의 낭보를 외신 부장으로 재직하며 받아보면서 희망의 끈을 다시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75년 아버지는 역사 안에서 아버지께서 느끼셨던 것은 당신이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대상이 자신을 배신한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000만 명의 애인이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아버지는 생각하셨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전략을 바꾸셨던 것 같다. 


당시 정보부 요원들이 흘리듯 전한 이야기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의문사를 당하시던 시기를 즈음해 군대 내 위관 급 장교들 간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 북파 공작원이 남쪽 지역 (포천 이동 – 장준하 선생이 의문사를 당한 지역)에서 변사체로 발견 되었다는 것 등 흩어져있는 많은 퍼즐들을 맞춰보면 희미하게나마 그림이 보인다. 


거기엔 김재규라는 퍼즐도 등장한다. 아버지 형무소 계실 때 면회를 가면 수감자와 우리 사이에 아크릴 창이 있었고 거기에는 소리가 들리라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 구멍 사이로 약 싸는 종이에 무엇인가를 적어 어머니에게 전해주셨다. 그러면 다음날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되기 이전에 어떻게 아는지 까만 지프차를 탄 정보부 요원이 집으로 와서 그 쪽지를 받아갔다. 그 쪽지가 김재규 씨에게 전달된 것이다. 그런 퍼즐을 맞춰보면 아버지께서 박정희 정권은 백성들이 넘어뜨릴 수 있는 정권이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 보인다. 군대를 이용하시려던 것으로 보였다. 


아버지는 그 당시 당신의 수기 <돌베개>의 후속으로 <브니엘>을 집필하고 계셨다. <돌베개>와 <브니엘>은 모두 야곱의 사건에 등장하는 것이다. '돌베개'는 고난이다. 민족을 위해 당신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으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브니엘'은 뭔가? '브니엘'은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리다. 어쩌면 아버지의 싸움은 하나님과의 싸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브니엘>을 집필하면서 당신은 마지막 싸움을 준비 하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그 마지막 싸움을 위해 아버지는 김재규 씨를 연결 고리로 하여 군대 안에서 무언가를 도모하셨던 듯하다. 


살아있는 증인 찾기가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 하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누가 죽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집착은 없다. 예수를 죽인 것은 제사장이나 빌라도가 아니라 결국 백성들이 아닌가? 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 역시 백성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죽음이 예견된 것이었던 것처럼 아버지의 죽음 역시 예견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예견된 죽음을 막을 수 있었던 힘은 백성, 민중에게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중은 오히려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민중이 그 권리를 포기할 때 예언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가 하는 것보다 아버지께서 어떻게 사셨고 무엇을 남기셨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익환 목사님 생전에 찾아뵈면 늘 내게 '네 아버지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어'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백성이, 민중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4.19를 이룬 것도 백성이요, 이명박을 뽑은 것도 민중 아닌가. 


역사적으로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였다. 다시 본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군대 제대하고 목사 안수 받은 후 싱가포르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던데. 


1988년부터 5년간 싱가포르에 있었다.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한신에 계시던 어른 분들이 나를 한신으로 불러들이셨다.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 내가 기장 목사가 될 수 있는 한시적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다. 결국 1988년 한국기독교장로회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어디서 사역했나? 


1994년에 한국에 들어와 이천에서 목회를 했다. 당시 나를 괴롭혔던 일은 설교 중 특정 교인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설교를 하려고 단에 서있으면 앉아있는 교인들 중 사과 상자 가지고 온 사람, 양복해 준 사람, 구두 티켓 가지고온 사람, 속옷 사가지고 온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딱딱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시 그 교회는 장인어른이 개척을 해서 교회당 건축까지 이미 마친 곳이었다. 흔히 말하는 교회 세습의 후계자로 내가 지목되어 목회를 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담임목사에게 그만 두겠다고 말하고 그 다음 주에 사역을 그만 뒀다. 


남들 같으면 그런 일이 생기면 더 열심히 목회를 할 텐데. 


나한테 선물 준 사람들 얼굴만 보이는데 무슨 목회가 되겠나.(웃음) 


그 이후 미국에 들어왔나?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에 대해 사전 지식이 있었나? 


내가 있던 기장 경기노회가 UCC하고 파트너십이 되어 있었다. 이 파트너십은 1986년에 맺은 것이었다. 1986년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 기장 교단이 이 운동에 앞장섰었다. 그래서 UCC의 Justice and Witness Ministry가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인정해서 Justice and Witness Ministry에서 파트너십을 맺도록 추천해줬다.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는 회중교회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 지역 교회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 다른 교단의 파트너십에 비해 하부 구조가 매우 튼튼했다. 그래서 커네티컷 컨퍼런스와 기장 교단 경기노회가 파트너십을 별도로 맺게 된 것이었다. 그 때가 1994년이었다. 미국에서 사람들은 왔는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내가 우연치 않게 통역을 맡게 됐다. 


▲ 장호준 목사 


그 일을 계기로 커네티컷 컨퍼런스에서 다문화목회의 일환으로 나를 초청했다. 5년 동안 월급을 보장하고 일할 공간과 교회 등도 다 제공해주는 구조였다. 커네티컷 컨퍼런스는 커네티컷 주의 수도인 하트포드의 서부 지역에 위치한 교회를 제공했고 집과 차도 마련해줬다. 그 사람들이 보기엔 최고의 장소였다. 그래서 거기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한국 사람들과 목회를 한 것인가? 


아내와 한두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고 2년 반이 지나니 70명 정도 규모의 교회가 됐다. 나는 내심 '나는 부흥사의 자격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70명이라 봐야 두세 가족 그룹이면 채울 수 있는 숫자였다. 출석하는 교인들과 장로 안수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회중교회를 세우기로 했었고 회중교회 정치구조에 따라 장로 제도를 두지 않기로 했다. 나 자신 역시 그런 상하 구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딪힌 이슈는 동성애에 관한 이슈였다. 나에게 "목사님이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신다면 계속 교회에 나오겠다"고 말했다. 나는 "미국에만 3,800여 개의 한인 교회가 있는데 그중 한 개의 한인 교회가 동성애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되나"라고 반문하고 '이 교회 밖에 있는 모든 한인 교회들은 동성애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다른 교회에 가라'고 했다. 그래서 대다수의 교인들이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지금도 일주일에 한 차례씩 만나 예배를 함께 드리고 있다. 


스토어스로 옮긴 것은 그 다음인가? 


유콘스토어스한인교회는 커네티컷 주립대학에 재학 중인 한인 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교회다. 주로 학생들이라 경제적 여유가 넉넉하지 않다. 나 역시 생활비를 벌기 위해 프리스쿨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생들을 나르는 스쿨버스 운전기사를 하고 있다. 미국의 교육제도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에 직접 참여하며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목사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같이 일하는 운전기사들이 신앙이나 가정 문제로 나를 찾는 일이 종종 있고, 매주 월요일은 기도를 하고 일을 시작한다. 중간에 비는 시간도 많아 목회를 하면서 일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 


스토어스교회는 어떤 신앙의 가진 교회인가? 


교회 정치는 회중교회 정치제도를 따르고 있으며 평신도 목회, 무제한적 다양성 수용 그리고 정의 평화 운동 이렇게 세 가지를 목회의 기초로 세워진 교회이다. 모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비기독교인들이다. 더구나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불렀던 사람들도 있다. 이 교회에 나오면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나는 모이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처럼 살자'라고 한다. 


'교회에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내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세상에서 스스로 책임지고 교회답게 돈을 사용하라'라고 말하는 교회이다. 일요일에 교회에 오는 것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다운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하라고 가르치고, 평신도 목회를 위해 목회자가 평신도처럼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목회자만큼 높아져야 한다고 하는 교회이며, 전쟁 반대와 평화를 위해 이라크로 달려가지 못할 것이라면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라도 주우라고 말하는 교회이다. 


항상 부담스럽고 가슴 찔리게 하는 말만 하는데도 열심히 모이는 사람들을 보면 고맙다는 생각과 함께 희망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교회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청빙이 있었을 법 한데. 


여러 군데에서 제안은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부르는 이유가 나를 보고 부르기보다는 대부분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나를 부르는 사람들은 장로들 중에서도 원로 장로들이다. 내 출신을 모르고 나를 사귀어본 사람이 나에 대해 평가를 한 후 '장 목사가 장준하 선생 아들이래'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지만, '장준하의 아들이니 부르자'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번에 대학원을 졸업한 내 딸아이가 한 번은 자기가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먹고 싶은 문방구 앞 불량식품을 사먹지 않은 이유가 '장준하 선생의 손녀'였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어린 가슴에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도 그러냐'했더니 '그렇다'고 하더라. 손녀인 내 딸아이에게도 그럴진대 내게 있어 아버지의 이름은 더 큰 부담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자체가 싫었지만 이제는 내게 채찍이며 자존심이다. 


당분간은 UCC를 한인 사회에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인가? 


UCC를 한인 사회에 접목하는 일을 오래 해 왔는데, 궁극적으로는 한인 커뮤니티가 UCC를 통해서 미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까지 갔으면 좋겠다. 지난 2002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악의 축'이라는 발언을 했던 당시 내가 소속된 커네티컷 컨퍼런스를 통해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 전국총회 (UCC General Synod)에서 6.15 선언 햇볕 정책을 지지하는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결의문'을 통과시켰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나 혼자로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같이 일할 사람들을 키우고 싶다는 것이다. 젊은 목회자들을 잘 키워 동역자로서 미국 사회를 변화 시켜 나가는 일에 동지가 되고자 하는 것이 내 목표이다. 


한인 이민 목회로서의 고유한 신학과 정체성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미국 이민 역사가 100년이 넘었고 한인 교회의 수가 4,000개가 넘었다. 그럼에도 한인 이민 목회에 대한 정체성의 개념조차 정리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저 어떻게든 사람 많이 모이는 흔히 말하는 대로 잘 되는 교회들을 무조건 복사하려는 목회자들이 대부분이다. 


교회는 긍정적 분열을 통해 더 많은 작은 교회들을 만들어야 하며, 작은 교회들을 통해 세상과 교회간의 벽을 허물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 역시 세상과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세상 속에 스며들어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을 이민 교회의 목회 방향으로 잡아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를 위해 교인들이 먼저 깨어야 한다. 

 

글 김 은주

. 빙 햄튼 뉴욕주립대학

. 헌터 칼리지 대학원

. 뉴욕한인 교사협회 회장

. 현 뉴욕 퀸즈초등학교 교사


*이 글은 당당뉴스(www.dangdangnews.com)에 실린 것입니다. 



장준하 3남 재미 장호준 목사 인터뷰


[인터뷰] 장준하 셋째 아들 장호준 목사

"아버지가 싸운 것은 '시대정신'"

2012. 08. 27 


» ▲ 장준하 선생의 셋째 아들 장호준 목사를 <미주뉴스앤조이>가 만났다.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목회 중인 장 목사는 개인·가족사를 넘어 국가와 민족의 비극이었던 아버지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해 냉정히 역사적 의미를 따졌다. ⓒ미주뉴스앤조이 전현진


분노하고 흥분한 상태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차분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싸고 '타살 의혹'이 제기됐지만, 아들은 "직접 유골을 통해 확인한 것 말고는 새로울 것 없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37년 전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이나 가족사를 넘어 국가와 민족의 비극이기에 냉정하게 의미를 따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월 14일 추모공원 이장 과정서 고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에 6㎝ 구멍과 머리뼈 금이 발견돼 '타살 의혹'이 불거졌다. 8월 20일 <미주뉴스앤조이>는 미국 코네티컷 주에서 목회하는 장준하 선생의 셋째 아들 장호준 목사(유콘스토어스한인교회)를 만나 심경을 물었다.


장 목사는 "아버지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며 "누가·어떻게 아버지를 살해했나보다 그 죽음에 담긴 의미를 재조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추모식에는 왜 가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한국으로 와달라는 요청도 있었으나, 아직 떠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했다.


독재자가 두려워한 재야운동가. 장준하 선생의 삶에 담긴 '신앙'과 그를 아버지로 둔 장 목사의 목회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래는 장 목사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일문일답이다.


- 37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 한국이 다시 시끄럽다. 근심하고 있을까 걱정하며 왔는데, 아무렇지 않아 놀랍다.


아버지께서 며칠 전에 돌아가신 것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37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타살'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혀 새로울 것은 없다.


- 독립운동부터 재야운동가까지. 장준하 선생의 삶 속에서 '신앙'은 어떤 역할을 했나.


아버지의 삶은 신앙이라는 기초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는 일본군을 탈출하셨을 때도 성경을 품고 계셨고, 수감 생활을 반복할 때도 성경을 챙기셨다. 아버지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셨다. 결국 민족을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려고 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박정희를 죽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셨다. 자신의 희생으로 민중이 깨어나길 원했던 것이다.


- 장준하 선생의 죽음을 '희생'으로 정의할 수 있나.

그렇다. 아버지의 죽음에서 예수의 죽음을 보게 된다. 예수를 죽인 것은 누군가. 빌라도인가, 가야바인가. 바리새인과 민중들이었나. 모두 함께 죽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를 죽인 것은 그 '시대'였다. 그의 죽음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역사를 위한 제물로 희생된 것이다. 아버지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자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예수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신 것 같다. 희생을 선택하신 셈이다.


아버지를 죽인 것이 차지철이든 전두환이든, 흉기가 망치이든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를 죽인 것은 그 시대의 정신이었다. 그때 돌아가시지 않았어도, 언젠가 희생당하셨을 것이다. 제단에 제물이 필요로 하던 시대였다. 아버지는 그 역사를 향해 제물로 나선 것이다.


장준하 죽인 건 박정희가 아니라 시대정신


- 장준하 선생과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계를 어떻게 보는가.


나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과 역사에 끌려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다. 일본군에 들어갈 수도 있었고, 독립군에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덴노 헤이카 만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칠 수도 있었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 수도 있었다. 충직한 군인이 됐을 수도 있었고,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정부를 장악한 뒤 민정에 이양할 수도 있었고, 독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는 선택의 과정을 통해 역사를 만든 것이다.



아버지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끌려간 사람이다. 아버지가 일본군에서 빠져나와 독립운동을 하고 반독재투쟁을 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그런 삶을 선택하며 결정한 것 같지 않다. 아버지는 역사가 이끄는 대로 가신 것이다. 그리고 '희생'의 삶을 받아들인 것뿐이다.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을 통한 '희생' 없이는 살아갈 수 있는 삶이 아니다.


이번 '타살 의혹'으로 박정희에 의한 '정치적 타살'이라는 말이 다시 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박정희는 아버지를 죽일 수 없다. 박정희는 아버지를 두려워했고, 살아 있는 것도 두려운 상대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누가 아버지를 죽였는지는 밝혀져야 할 문제다. 확실한 것은 박정희는 아버지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아버지는 정반대의 길에서 전혀 다른 역사적 역할을 맡았다. 아버지가 싸운 것은 박정희라기보다, 그 시대를 겪으면서 강화되고 새로워진 역사적 역할과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 장준하 선생이 싸운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그 시대정신이 교회와 신앙에 어떤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나.


역사적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복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에는 '나서지 않고 지도자에 빌붙으면 잘 살 수 있다'는 시대정신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그 시대정신에 기생하는 독재자, 지도자들과 싸운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그 시대정신에서 거듭날 기회가 세 번은 있었다고 본다. 첫 번째가 광복절, 두 번째가 4·19, 세 번째가 10·26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거치면서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지도자만 잘 따르고 아부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겠지', '불의한 모습을 봐도 조용히 있어야 된다'는 식의 시대정신이 일제강점기 때부터 거듭나지 못한 채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시대정신이 교회와 신앙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 예가 국가조찬기도회다. 지도자에게 빌붙어 아부하면 잘 살게 된다는 것이 역사가 남겨준 교훈이다. 교회도 그것을 배운 셈이다. 그 결과 한쪽은 축복을 빌어주는 지도자를 향한 맹목적 믿음을 보여줬고, 다른 한쪽은 현실과 신앙을 등진 채 살아갔다. 전병욱 사건도 이런 시대정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올해 대선이 네 번째 거듭남의 기점일 수도 있다. 이명박을 보면서 이 시대는 두 가지 생각을 할 것이다. 하나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렇게라도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와 교회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두고 볼일이다.


- 대선 예비 후보 가운데 박근혜 씨 지지율이 가장 높다.


박근혜를 향한 인기는 우리 시대 욕망의 투영이다. '이 사람이 나의 욕망을 충족해 줄 것'이라는 기대다. 박정희가 굳건하게 만들어 놓은 구시대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요즘 청년들에게서 아직도 이런 시대정신을 본다. 냉철한 생각과 비판 대신, 인기와 눈앞에 이익을 쫓는 모습 말이다.


희생을 통해 주변을 밝히려는 모습과 전혀 다르다. 우리 시대 젊은이들은 제단 위의 제물이 되기보다, 그 제물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살아가길 원하는 모습은 어떤 삶일까 생각해봐야 한다. 예수가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는 '희생'을 결심한 뒤 두려움 없이 싸울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신앙'으로 낡은 시대정신과 싸워 이겼으면 좋겠다.


버스 운전하는 목사로 살기


- 미국그리스도연합교회(UCC)에서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미국에 오게 되었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군대에 강제 징집됐다. 그때 신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경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싱가포르에 6년 동안 선교사로 나가있기도 했다. 선교지에 있다 보니, 한국교회의 정치 체제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었고, 그 동안 왜곡된 시대정신이 반영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4년 선교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장인어른이 개척해서 건축까지 마친 곳에서 사역을 하게 됐다. 당시 내가 교회 세습 일순위였던 셈이다. 그때는 '세습'이 큰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고, 사례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뒀다.

마침 내가 있던 기장 경기노회가 UCC와 파트너십을 맺은 상태였다.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6년 UCC의 Justice and Witness Ministry가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파트너십을 추진한 것이다.

UCC는 회중교회라는 특징 때문에 지역 교회의 연합체인 '컨퍼런스'가 주도권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교단 사이의 파트너십이 아니라, 코네티컷 컨퍼런스와 기장 교단 경기노회가 파트너십을 별도로 맺게 된 것이다. 1994년 미국에서 UCC 관계자들이 왔는데, 그때 코네티컷에 초청 받아 지금까지 이곳에서 사역하게 됐다.


- 평소에는 스쿨버스 운전기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자비량 사역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번은 '내가 하나님한테 생명을 받았는데, 더 받으면 염치없는 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스쿨버스 운전기사를 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나는 스스로 '삯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삯'만큼만 하자는 것이다. 요즘 목사들 중 자기가 받은 '삯'만큼도 일하지 않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설교 한번하고, 교인들이 사주는 밥 먹으러 다니고 하는 것을 목회로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사명이라고 부르려면 최소한 '삯' 받은 만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유콘스토어스한인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UCC 제도에 따라 회중교회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평신도 중심의 무제한적 수용 등을 기초로 삼는 교회다. 예배는 일요일 저녁에 드린다. 평소 주말 없이 일하는 교민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일요일 예배는 조금 늦은 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헌금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교회에 헌금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복을 달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다. 교회에 헌금하는 사람도 있지만, 평소에 좋은 일에 사용하라고 강조하는 편이다. 그래도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헌금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다.(웃음)


우리 교회를 찾는 교인들은 어디에 가서도 한 자리 차지할 만한 사람들이다. 대학 교수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역사가 만든 시대정신을 깰 수 있는 '신앙'을 전하고 싶다. 그것을 위해 이곳(미국)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정신이 민들레 씨처럼 퍼져나가 온 세계를 덮는 것을 꿈꾼다. 비록 적은 수이지만, 이곳에서 내가 만나고 가르친 자들을 통해 이곳저곳으로 퍼져 갔으면 한다.


전현진 / <미주뉴스앤조이> 기자

 

본 글은 휴심정 벗님매체인  <뉴스앤조이 http://www.newsnjoy.or.kr>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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