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8_FaceBook_Twitter

2013년 10월22일 Facebook 이야기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10. 2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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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청우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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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 통하는 친구의 가족과 맛있는 식사도 하고 재미있는 볼거리도 보고 아이들 어울리는 모습도 보는것이 삶의 큰 기쁨일게다. 이번 한국여행중에는 영등포에서 (주)영등포자동차정비검사소를 운영하며 성실하게 살고있는 이청우(이청우남)사장의 가족과 어울려 보낸 시간이 그런 기쁨이었다.
    마음 통하는 친구의 가족과 맛있는 식사도 하고 재미있는 볼거리도 보고 아이들 어울리는 모습도 보는것이 삶의 큰 기쁨일게다. 이번 한국여행중에는 영등포에서 (주)영등포자동차정비검사소를 운영하며 성실하게 살고있는 이청우(이청우남)사장의 가족과 어울려 보낸 시간이 그런 기쁨이었다.  
     
    더군다나 청우는 나와 정치적성향도 비슷하여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고 그분들의 집권에 큰 도움을 주었던 친구이기도 하다. 또 라이언스 클럽활동도 활발히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장학사업도 하고 있는 한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그런 친구이고, 더군다나 나와 한국의 소통로인 페이스북에서도 나와 내 소신과 의로운 외침을 귀 기우려 들어주고 열열히 지지해주는 동지이기도 하다.  
     
    또 경상도 출신의 어여뿐 제수씨도 남편인 청우를 믿고 따르며 온 몸과 마음으로 청우를 지지하는 이시대에 보기드문 열정적인 부창부수의 표본이라 여겨진다. 청우 부부가 있기에 우리의 후세가 불편부당없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가리라 믿는다.  
     
    [광고] 자동차 고칠 페친들은 나의 친구 이청우 사장이 영등포에서 운영하는 (주)영등포자동차정비검사소에 가면 잘해줄겁니다. 여러모로 자랑스런 나의 친구 이청우 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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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지도 지금 낙원상가에 있는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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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ㅋㅋ 이날 정말 즐거웠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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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우(Pineapple Jason Park) 화이팅!] 아마존 유통채널 확보 국내中企 수출길 연다
    파인애플일렉트로닉스 “5년 내 1억 달러 돌파”
    최종수정 : 2013-10-21 16:20 서지희 기자

    [사진설명] ▲박재우(사진 왼쪽)-우지형 파인애플 일렉트로닉스 공동대표가 지난 14일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방인권 기자

    “한국 중소기업 제품이 미국 시장에 진출해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목표입니다.”

    파인애플일렉트로닉스의 윤민석·박재우·우지형 대표 ‘3인방’이 세계적인 유통종합채널 ‘아마존(Amazon)’에 도전장을 냈다. ‘소매 판매가 가능한 제품은 모두 아마존을 통한다’는 명성을 활용해 자사는 물론 한국의 중소기업 제품으로 글로벌 유통시장에서 한 획을 긋겠다는 각오다.

    지난주 이투데이 본사에서 만난 박 대표와 우 대표는 “5년 내 매출 1억 달러 돌파”라는 비전과 함께 파인애플일렉트로닉스의 성장 가능성을 힘주어 말했다.

    이 회사는 2009년 친구 사이인 박 대표와 우 대표, 선배 윤 대표가 합심해 만든 회사다. 파인애플일렉트로닉스 자체 브랜드 제품을 유통하면서 미국 시장에 관심이 높은 한국 중소기업의 유통 채널 역할을 하고 있다.

    5년여 동안의 노력 끝에 파인애플일렉트로닉스는 현재 아마존 하우스 브랜드인 ‘아마존 베이식스(Amazon Basics)’의 ODM(제조업자개발생산)으로서 8개 제품을 납품하고 있다. 현재 아마존의 ‘글로벌 ODM 밴더’ 자격을 얻은 곳은 전 세계에서 14개 업체뿐이며, 한국 업체로는 파인애플일렉트로닉스가 유일하다. 이 회사는 한국의 중소기업 제품을 중심으로 총 100개 제품을 아마존에 공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 월마트, 마이크로 센터 등으로 유통망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시련도 많았다. 우 대표는 “최초 미국 내 대형 전자제품 유통업체인 프라이즈일렉트로닉스에 골전도 이어폰을 납품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판매 대금 미지급, 제품의 잦은 반품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면서 “프라이즈와 거래를 끊고, 아마존을 통해 유통을 시작해 높은 호응을 이끌어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스타일러스펜의 경우 주머니에 꽂는 클립을 잡아당겨서 10파운드(약 4.5kg)를 3초 동안 견뎌야 한다는 방식으로 제품을 까다롭게 테스(12,750원 ▽250 -1.92%)트, 자신있는 품질을 각인시켰다”고 설명했다.

    파인애플일렉트로닉스는 향후 수출 중소기업을 위한 정부 정책에 적극 참여할 계획이다.

    우 대표는 “미국 내 인기 태블릿인 ‘킨들파이어’에 e북 형태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방안을 지방기관과 논의 중”이라며 “환경이 열악한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기관과 협업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 대표는 “수치에 연연하는 매출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며 “파인애플일렉트로닉스를 통해 미국시장에 정착하고 자리를 잡는다면 해당 중소기업의 브랜드 가치는 지금 예상하는 것보다 더 높게 변모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ref)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808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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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우왕~~ 박재우형제님 화이팅이요!! :)) 파인애플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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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 간부나 하위직이나 지저분한 애정문제가 아주 고질적인 풍토구나 쯔쯔쯔 http://durl.me/689ash
    media.daum.net  
    [한겨레]둔기로 중상 입힌 뒤 달아나경찰관이 평소 알고 지내던 30대 여성을 둔기로 때려 중상을 입힌 뒤 달아났다.21일 경기지방경찰청의 설명을 종합하면, 20일 저녁 6시4분께 안양시 만안구 ㄱ(36·여)씨 집에서 서울 강서경찰서 지구대 소속 윤아무개(44) 경사가 강씨의 머리를 둔기로 때리고 달아났다. 다친 ㄱ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 불명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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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땡큐, 기세. 넌 한국에서 잘 하고 다시 돌아와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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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Pineapple Jason Park 네~~ 다음에 다시 연락 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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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려잡자 살인마! 처형하자 전두환!]
    media.daum.net  
    전씨·김선용씨 질문 방식 놓고 여야 논란(서울=연합뉴스) 최이락 홍국기 기자 = 국회 기획재정위원의 21일 국세청에 대한 국정감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3남인 선용씨의 역외탈세 여부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가 이어졌다.재국씨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 블루 아도니스를 설립해 역외탈세를 했는지를, 선용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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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선배님, 앞으로 자주 뵈요. 술도 좀 사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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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이 대한민국 국민을 죽이고 있다?!]
    media.daum.net  
    [오마이뉴스 선대식 기자]▲지난 14일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공개한 '2012년 S그룹 노사전략' 문건.ⓒ 심상정 의원실삼성의 노조와해문건 <​ 2012년 "S그룹" 노사전략 > (이하 노사전략)을 두고 삼성이 문건을 만들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있는 가운데, 이 문건의 내용이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드러났다.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이 문건과 삼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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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후원을 우리는 '비원'이라고 부른다. 비원은 늘 예약을 받고 인솔자가 인솔을 하면서 구경을 했는데 아직도 여전히 그 전통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좀 일찍 도착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을 둘러보았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창덕궁(昌德宮)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고,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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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부슬부슬 내리다보니 창덕궁 해설사는 나와 내각시만을 데리고 그야말로 VIP투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동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계동 13번지가 본적이라하니 남편분의 본적지도 종로란다. 더구나 남편분이 같은 한산이문에 인제공파 ... 아저씨 뻘이다. 그러니 숙모님의 해설을 들으며 창덕궁 관람을 한 셈이다. 한산이문이 정부통계상 한 10만정도 되고 정통이라 주장하는 우리 호장공(戶長公) 이윤경(李允卿)을 선조로 하는 한산이문은 5만이 체 않된다고 하니 본관만 같아도 일가친척이나 진배없다. [참고: http://blog.daum.net/enature/15851553 ]
    창덕궁의 역사: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지었다. 1408년 태조는 이 궁에서 죽었다. 태종 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 
     
    인조 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 25년 1647년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한편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숙종 30년(1704년)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07년 에는 순종이 고종의 퇴위 후 이곳으로 이어하여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 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강녕전과 그 앞의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개조·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출처: 위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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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린시절, 창경원은 거의 1년에 한번 이상은 왔던것 같다. 그리고 비원도 창덕궁도 한번정도는 왔었을 것이다. 이상하게 경복궁 덕수궁은 자주 갔었는데 창덕궁은 자주 온 기억이 없다. 비원은 몇차례 더 가려했지만 그 옛날에도 예약을 해야만 관람이 가능했기에 굳이 따로 시간을 만들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번 창덕궁 관람은 내가 왕이되고 내각시가 왕비가 되어 본 기분이랄까 ...
    돈화문과 주변: "돈화문(敦化門)은 창덕궁의 정문이다. 조선 태종 12년(1412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지금의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 40년(1607년)에 재건하여 원년에 완공한 것이다. 이때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어,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으로 유일하게 정면이 5칸 규모로 되어 있다. 1963년에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었다. 돈화문은 궁궐의 정문이나 창덕궁 서남쪽 모서리에 있는데, 그 이유는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이다. 궁궐 정면에는 북악의 매봉이 연결되어 있고, 이곳에는 조선의 가장 신성한 공간인 종묘가 있어 창덕궁의 정문이 들어설 수 없었다. 또 정궁인 경복궁과 위치상 가까우며, 옛부터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 보이지 않도록 배치하는 기법과도 관련이 있다. 
     
    돈화문은 화려하게 단청된 이층집으로, 남쪽으로 길게 뻗은 두 단의 월대(月臺,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돌로 쌓은 널찍한 대)위에 서 있다. 문 좌우로 궁궐 문을 지키는 수문장청(守門將廳)을 두었다. 돈화문 월대 앞에는 임금이 가마를 탈 때 딛고 올랐던 노둣돌이 두 개 놓여있고, 가마를 올려 놓는 목마 두 개가 버티고 있었다. 계단을 밟고 월대에 오르면 임금의 길인 어도(御道)가 돈화문까지 한가운데로 뻗어있다. 궁궐의 정문을 크고 화려하게 지은 까닭은 문이라는 기본적인 기능과 더불어 이곳이 궁궐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원래 돈화문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날마다 정오와 인정 때에는 종을 울리고, 파루 때에는 북을 쳤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지금의 돈화문 밖 모습은 옛 모습과 많이 다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도로가 거듭 포장되면서 우선 돈화문 월대는 그 앞을 지나는 율곡로에 막혀 있는데다, 월대 앞 지반을 높게 돋워 도로를 내는 바람에 월대는 도로면보다 낮아 마치 땅에 파묻힌 모습이다.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가르는 도로는 1912년 일제가 계획하였으나, 종묘가 훼손될 것을 우려한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고,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곧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 또 돈화문 양 옆에 궁궐 문을 지키는 관청인 수문장청이 있는 행락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돌담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 궁궐에서 빠져나온 금천의 시냇물이 문 오른쪽 담장을 따라 흘러 나왔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창덕궁 서쪽 담장을 따라 남쪽에는 금호문(金虎門), 북쪽에는 경추문(景秋門)이 있는데, 돈화문은 임금의 출입이나 국가의 큰 행사 때 쓰이던 상징적인 문이었으므로 평소에 신하들은 금호문으로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추문은 평소에 닫혀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에만 쓰였다. 금호문은 1926년에 금호문 의거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돈화문으로 들어서면 창덕궁의 첫 번째 마당이 나오는데, 마당 서쪽으로는 금호문을 중심으로 행랑이 늘어서 있고, 동쪽으로는 진선문(進善門)과 그 행랑, 북쪽으로는 내각(內各)과 옥당(玉堂)의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금호문을 중심으로 한 서쪽 행랑은 궁궐 외부와 경계를 이루며 의장고(儀仗庫), 무비사(武備司), 수문장청, 위장소(衛將所), 남소(南所), 훈국군파수직소(訓局軍把守直所)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의장고는 의식에 쓰이는 물건이나 병장기를 보관하는 곳이며, 무비사는 궐내 순찰을 담당한다. 위장소와 남소는 군사를 지휘하여 궁내를 순시하거나 조정에서 연회나 경축 행사가 있을 때 그 주위에 정렬하는 오위장이 숙직하는 곳이며, 훈국군파수직소는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숙직하는 곳이다. 이렇듯 궁궐의 첫 번째 마당에서 외부와 접한 행랑은 주로 궁궐의 호위 임무를 맡은 장수와 군사가 머물렀으며,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는 완충 공간으로서 기능하였다. 
     
    진선문과 연결된 동쪽 행랑에는 결속색(結束色), 정색(政色), 전설사(典設司)가 마당쪽으로 들어서 있었다. 결속색은 임금이 행차할 때 주변을 경호하여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끔 막으며, 정색은 무관, 군사, 잡직을 임명하는 일 등을 담당한다. 전설사는 나라의 제사 때 필요한 장막을 공급하는 일 등을 맡았다."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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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일제가 식물원 동물원을 궁에 지어 궁을 창경원으로 훼손시켜 버렸지요. 우리 나이 어릴적 창경궁인지 모르고 동물원을 구경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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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각시와 함께한 창덕궁(昌德宮) 관람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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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원시절 식물원장을 지낸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하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내고 해방 뒤 치안국장을 지냈던 윤우경 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이 창덕궁 재산을 빼돌리고 발각될까 두려워 증거를 없애기 위해 창경궁에 있던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을 고의 방화하고 미국으로 도주하였다 한다. 친일역적 모리배는 아직도 세계 구석구석에 숨어 대한민국의 발목을 붇들고 있다. 인터넷으로 윤우경이를 검색하여 보니 관련 2006년 10월 24일 주간동아 557호 p28~29 기사가 하나 있다. 따로 올리겠으니 많이들 봐라.
    창경원시절 식물원장을 지낸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하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내고 해방 뒤 치안국장을 지냈던 윤우경 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이 창덕궁 재산을 빼돌리고 발각될까 두려워 증거를 없애기 위해 창경궁에 있던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을 고의 방화하고 미국으로 도주하였다 한다. 친일역적 모리배는 아직도 세계 구석구석에 숨어 대한민국의 발목을 붇들고 있다. 인터넷으로 윤우경이를 검색하여 보니 관련 2006년 10월 24일 주간동아 557호 p28~29 기사가 하나 있다. 따로 올리겠으니 많이들 봐라. 그리고 전책보와 윤우경이가 한국전쟁이후 창경원을 재건 했다는 회고도 하나 있다. " ... 1954년 전택보 천우사 사장과 윤우경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이 주도해 동식물원재건위원회가 발족됐고, 같은 해 7월 15일 창경원의 동식물원이 다시 일반에 공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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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나쁜 사람이군요. 세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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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한 평 안 남기고 공중분해 - 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의 화재사건

    [[창경원시절 식물원장을 지낸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하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내고 해방 뒤 치안국장을 지냈던 윤우경 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이 창덕궁 재산을 빼돌리고 발각될까 두려워 증거를 없애기 위해 창덕궁을 고의 방화하고 미국으로 도주하였다 한다. 친일역적 모리배는 아직도 세계 구석구석에 숨어 대한민국의 발목을 붇들고 있다. 인터넷으로 윤우경이를 검색하여 보니 관련 2006년 10월 24일 주간동아 557호 p28~29 기사가 하나 있다. 따로 올리겠으니 많이들 봐라.]]

     

    [커버스토리|대한제국을 許하라?] 주간동아 2006.10.24 557 호 (p 28 ~ 29)

     

    땅 한 평 안 남기고 공중분해

    황실 재산 1954년 국유로 전부 편입 후 야금야금 훼손 … 현재는 5개 궁 13개 능이 전부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의 화재사건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만약 일부의 바람대로 대한제국 황실이 재건된다면 당장 관심사로 떠오를 것은 옛 황실의 재산 문제다. 한일병합, 8·15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 근·현대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황실의 재산은 어디로 갔을까? 황실이 재건된다면 그 재산을 되찾을 길이 과연 있을까? 

     

    이미 쇠잔한 왕조일지라도 일제강점기 황실의 재산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당시 황실의 재산을 관리한 기관은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곳. 일제강점기 말까지 이왕직이 관장한 황실 재산 중 임야, 대지, 전답의 총면적만 해도 1억5519만8532평에 달했다[월간 ‘신동아’는 1968년 8월호에서 국회도서관에 보관된 ‘이왕가세습재산유서조(李王家世襲財産由緖調)’ 등 기타 마이크로필름을 근거로 이같이 보도했다].

     

    1960년 의문의 화재로 재산목록조차 없어

     

    그러나 이 같은 황실 재산은 광복 후 공중분해되어 사라졌다. 재산목록조차 남아 있지 않아 추적 또한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된 데는 1960년 발생한 의문의 화재사건 탓이 크다. 당시의 신문 보도를 보자.

     

    6일 새벽 창경궁 내에 있는 구황실재산관리총국 안에 벼란간 불이 일어나 청사(목조 2층·80평)와 중요 서류, 집기 등을 전소하고 아침 5시 10분경 진화되었는데 △방화 △누전 △숯불의 세 각도에서 화재 원인을 수사 중에 있는 경찰은 6일 정오 현재 방화에 가장 유력한 수사 관측을 내리고 있어 앞으로의 수사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동아일보’ 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을 전소… 농후한 방화 혐의’)

     

    구황실재산관리총국(혹은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이하 총국)은 광복 후 황실 재산의 관리를 도맡아온 기관이다. 이왕직으로부터 관련 서류를 모두 이관받아 보관하고 있던 이곳에서 화재가 발생했으니, 황실 재산의 마지막 증거마저 화염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이 화재가 방화로 의심받은 까닭은 당시에 총국 직원들의 재산 부정 유출에 대한 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황실 재산은 1954년 구황실재산처리법이 제정됨에 따라 모두 국유로 편입됐다. 이는 영친왕을 정치적 라이벌로 여긴 이승만 대통령이 황실의 ‘힘’을 빼버릴 목적으로 취한 여러 조처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국가 소유가 된 황실 재산의 상당 부분은 알게 모르게 처분돼갔다. 이에 1960년 새로 총국장으로 임명된 오재경 대한여행사 이사장은 당시 문교부 국장으로 있던 이창석 씨를 초빙해 황실 재산 상태를 면밀하게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창석 국장은 곧 어려움에 직면한다. 관련 서류가 부실해 제대로 조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의 서류는 더욱 불충분했다. 간신히 재산목록을 만들어 정리에 착수하려고 할 즈음에 화재가 발생하고 만 것. 이 국장은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구황실 사무처에 가보니, 신빙 서류가 하나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누가 무엇을 어떻게 속여서 해먹었는지 알 수 없어서 놀랐습니다. 그나마 조사를 해서 대강이나마 증거서류를 만들어놓으니까 화재가 나서 다 타버렸으니, 그것은 분명히 방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영친왕’, 김을한 지음)

     

    부정 반출된 황실 재산 중 ‘대표’ 격으로 거론되는 것은 서울 성북구 월곡동에 위치한 배재대학 대지. 조사에 착수한 검찰은 모두 7만5000평의 땅이 이승만 대통령의 모교인 배재대학에 불과 평당 250환씩에 불하됐다며, 윤우경 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에 대한 형사처벌을 검토했다.

     

    그러나 윤 전 국장은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항변한다. 윤 전 국장은 1968년 월간 ‘신동아’ 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1958년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배재대학에서 땅을 불하해달라고 하니 현장을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술회했다. 대통령의 모교를 위해 조선 황실의 죽은 왕자도 자리를 옮겨야 했다. 배재대학에 불하된 땅에는 왕자묘(王子墓)와 귀인묘(貴人墓)가 있었는데, 대학 건물 착공을 위해 경기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 땅은 반환 소송으로까지 이어진 최초이자 최후의 황실 재산이다. 그러나 역시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황실의 품으로 돌아오는 데 실패하고 만다. 1964년 대법원은 이 토지의 불하가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구황실 재산을 민간에 불하할 때는 구황실 재산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하지만 이 경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조선 황실에 대해 연구해온 서울교대 안천 교수는 “그러나 심의를 거치지 않고 불하된 황실 재산이 2000여 건에 달했기 때문에 천문학적 액수의 소송이 줄줄이 이어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 대통령은 배재대학 땅 문제를 정치적으로 무마해버렸다”고 말했다.

     

     

    빼돌려진 황실 재산은 ‘투기’에도 활용된 듯하다. 1964년 4월30일 ‘동아일보’는 ‘구황실재산 14만 평 무연고자에 불하 … 주민들 진정으로 수사’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경기 양주군 구리면 매갈리와 사노리의 황실 재산인 동구릉 임야를 농림부가 연고가 없는 삼중건설(대표 신규식)에 개간 사업을 이유로 불하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중건설은 유령회사였다. 이 회사는 평당 5원에 불하받은 이 땅을 제삼자에게 평당 35원씩 받고 5만 평을 팔아치웠다. 나머지 9만 평은 불하 당시 ‘공작비’ 조달을 맡은 한 개인에게 법적 수속 없이 분배했다고 한다.

     

    “재산 복원 과정 자체가 역사 바로 세우기”

     

    이런 식으로 해서 황실 재산은 야금야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1963년 문화재 보호 재원 확보를 목적으로 황실 재산의 처분이 단행되기 시작했을 무렵, 황실 토지재산의 총면적은 1억141만여 평이었다. 일제강점기 말 1억5519만여 평이었으니 광복 후 18년 동안 5378만여 평이 처분된 셈이다. ‘신동아’(1968년 8월호)는 “자유당 시절의 재산 처분 경유를 짐작컨대 대개 규모가 큰 것은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고, 작은 것은 사무총국 단독으로 처분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썼다.

     

    63년 이래 영구보존재산 행정재산을 제외한 잡종재산의 처분량은 2817만1107평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구황실 소유의 토지재산은 총 7364만4000평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문제 되는 것은 건국 이후 60년경까지 자유당 치하의 구황실재산사무총국에서 처분했다고 볼 수 있는 5378평 중에는 서울 시내 도처에 산재해 있던 구황실 재산의 노란 자위라 할 수 있는 대지 1만399평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 원남동, 와룡동, 정동, 명동, 원서동, 안국동, 청파동, 회현동, 제기동, 종암동, 휘경동, 성북동 등지에는 영구보존재산인 각 궁궐과 행정재산 이외에도 상당한 황실 소유의 대지가 있었다. 이 중 1만399평이 광복 후부터 4·19까지의 기간에 행방불명됐다. (‘구황실재산’, ‘신동아’ 1968년 8월호)

     

    뿔뿔이 흩어지고 남은 토지재산 7000여 평마저도 1989년 관리 주체가 문화재청에서 재정경제부로 넘어가면서 거의 처분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화재청 고도보존과 관계자는 “현재 문화재청이 관리하는 황실 재산은 서울에 있는 5개 궁과 전국 13개 능밖에 없다”면서 “재경부로 이관된 7000여 평의 잡종재산은 민간에 매각되는 등 모두 처분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광복 후에 권력자와 모리배들에게 털려먹은 황실 재산은 몰락한 황실과 닮은꼴이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이정재 사무총장은 “황실 재산은 이미 국고로 다 넘어갔기 때문에 되찾아오는 데는 한계가 있다. 찾으려고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리황실사랑회의 전종현 위원장은 “황족 개인에게 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황실 재산을 복원해내는 과정 자체가 역사 바로 세우기이기 때문에 숨겨진 황실 재산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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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 한 평 안 남기고 공중분해 - 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의 화재사건: [[창경원시절 식물원장을 지낸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하 황해도 송화서.. http://t.co/9ma4ORZq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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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원시절 식물원장을 지낸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하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내고 해방 뒤 치안국장을 지냈던 윤우경 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이 창덕궁 재산을 빼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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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아프지만 베어내야할 종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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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영등포면 왠지 제 나와바리 냄새가ᆢ ㅋㅋ 왠지 든든하네요. 서울서도 아는 정비검사소가 있다는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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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 그냥 그러고 사세요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안하고.. :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지난 5월 미주동포사회를 멘붕상태로 몰고간 윤창중 .. http://t.co/l6z7B1ff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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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지난 5월 미주동포사회를 멘붕상태로 몰고간 윤창중 사태를 바라보며, 페이스북에서 교육적이고 바르게 마음을 정리할수 있는 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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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역사책엔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이렇게 자세히 알려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한국의 근대사를 이해하고 자녀들에게 꼭 알려줄 수 있는 진귀한 자료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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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 "그냥 그러고 사세요"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안하고..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지난 5월 미주동포사회를 멘붕상태로 몰고간 윤창중 사태를 바라보며, 페이스북에서 교육적이고 바르게 마음을 정리할수 있는 돋보이는 두 개의 게시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페이스북 친구이신 계명대의 이재성 박사님이 게시글을 통해 극우보수의 본성(Integrity)을 간단 명료하게 설명하셨군요. 

     

    『윤창중 사태가 진실공방으로 점입가경이다. 윤씨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억울한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이 자기정당화를 위해 기자회견을 하는 것이나 이남기 홍보수석의 반박 기자회견이나, 한마디로 박근혜 정권의 맨얼굴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민 앞에 부끄러운 줄은 모르고 대통령 개인에게만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들만 청와대에 들어앉아 있으니 이번 사태는 어쩌면 이미 예고된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극우보수의 무도덕성과 본질을 분명히 확인한 셈이다. 어쨌거나 이 사태가 극우보수세력 해체와 청산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저는 한국이 오랜 역사속에서, 서로 다른 나라로 분활 독립할 지언정, 오로지 일편단심 중앙집권체제만을 유지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봉건주의 시대”를 거치지 않은 국가라는 역사이해에 공감을 합니다. 일제가 식민사학자 이병도를 통해 억지 춘향식으로 조선왕조를 봉건주의 왕조라며 거짓말을 하는데, 조선왕조는 엄연하게 중앙집권 왕조였지요. 일본처럼 미개한 나라나, 중앙정치가 미치지 못하여 지방 영주들이 활개를 치는 봉건주의 시대가 존재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근현대 한국에서 군부독재정권과 극우보수정권의 지도층이 보이는 양상은 지방영주들의 반인간적인 황포가 활개를 치는 봉건주의 시대를 방불케한다는데는 동의를 합니다.  올 여름 제주도를 자전거로 일주하며 많은 볼거리와 제주의 이야기를 페이스북으로 전해주고 LA로 돌아오신 또 한분의 페이스북 친구 Hyung Lee 선생님이 느끼신 작금의 코메디 같은 한국의 사건 사고를 봉건주의 영주가 저지르는 반인간적인 형태로 설명 하셨는데 너무 공감이 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해결책으로 “살인마 전두환이의 처형”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아!   드디어 깨닳았다.  이 모든 소동들...  빵회장부터 라면상무, 남양유업사태에 이어 윤창중에 이르기까지...  이거 사실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이 중 두건은 미국의 사법당국이 개입되지 않았으면 사건화조차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사람들이 대한항공이 한국행이었다면? 윤창중이 한국에서 여대생 엉덩이를 허락없이 주물렀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대한민국에서 소위 지배세력을 형성하는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은 여전히....  봉건질서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빵회장은 L호텔의 주차관리요원을 대감집에서 일하는 하인 취급한 것이며, 포스코의 왕상무는 대한항공 스튜어디스를 여종으로 생각한 것이고, 남양의 관리소장은 대리점주를 자신의 논을 붙여먹는 소작농으로 대했고, 윤창중은 인턴 여학생을 하룻밤 수청을 들어줄 여자로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박근혜의 당선도 다를 것이 없다.   국민을 가난에서 구해주신 '성군' 박정희의 여식으로서 당연히 왕권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의식이 많은 국민들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멍청한 여인을 이 복잡한 세계 질서 속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나갈 수장으로 뽑을 수 있나?

     

    대한민국에서 부와 권력은 대부분 세습된다. 부는 세습이 쉽지만 권력은 그렇지 못하므로 조선시대에 과거에 매달리듯, 죽기살기로 대학입시에 매달리고 대학조차도 취업과 고시로 학문의 전당으로서 그 기능을 잃은지 오래다. 대부분의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 아니라 시험공부를 하는 곳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러고 보면 언제 한번 시민세력이 완전히 승리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4.19는 5.16으로 짓밟혔고, 광주항쟁은 군부의 총칼로 짓밟혔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마치 시민혁명이 필요없다는 듯 주저하거나 자만하여 스스로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한국에 갈 때마다 조금씩 느끼던 불편함의 실체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뿌리깊은 봉건성....  이걸 뿌리뽑지 못하는 한 이런 일은 계속되겠지.  정권 교체만으로 시민혁명이 가능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화신이라고 할 자본세력마저 '거래'보다는 '하청'을 좋아하고, '판매'보다는 '밀어내기'를 더 좋아하는 나라에서는... 법을 엄중히 지켜야 할 사법세력이 스스로 법을 부정하는 '전관예우'를 당연시 하는 상황에서는...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서는 대책이 없어 보인다.  "그냥 그러고 사세요"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안하고..  

     

    "우리 힘을 합쳐 어떻게 좀 해봅시다"라고 하기엔 그들의 세력이 너무 강고하고, 그들이 세뇌시킨 사고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 내재화되어 있다. 

     

    아 빌어먹을... 답이 안나온다.』

     

    http://blog.daum.net/enature/15851296

     

    정답이 있습니다. 국민여러분! 손에 몽둥이나 야구방망이 그리고 또 한손에는 짱돌 하나씩 움켜쥐고 연희동으로 몰려가 살인마 전두환이를 주살하여 사지를 사대문에 내어 걸면 대한민국의 이 모든 병든 문제는 일시에 해결됩니다!

     

    정답은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라!!!] 입니다.

     

    +++

     

    전두환의 군사정권시절 한국을 떠나와 한국을 향해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습니다. 하여 군데군데 맞춘법이 틀린것에 대하여 읽는 분들의 깊은 이해와 하해와 같은 양해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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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우리나라는 밝혀야할 진실이 너무 많다. 정부가 잃혀지기를 원한는 역사가 점점 산재해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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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강한자는 더 많이 가지려고 안달하고 그들은 그것을 능력이고 수완이라 하고,약한자는 자기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그들은 그것울 반항이고 테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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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단두대로~개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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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이런 관심들이 나라 바로 세우기에 도움이 될것이다. 낙동강 다 뒤집어 놓고 골재 팔어먹고 녹슨 준설선 기름유출,.. 인허가 해준 넘들 핑게만데고 참으로 안타깝다.조선시대 태형을 도입하여 잡어다가 몽둥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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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오히려 우리가 봉건사회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주의도 이렇게 어려운 게 아닌가 잠깐 생각해 봤습니다.
    봉건사회의 문제점도 많지만, 어떻게 보면 무조건 중앙에 복종하고 행동하기 보다는 각 지역의 자치세력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제도라는 부분에서 말이죠. 오히려 그것이 중앙집권주의보다는 더 민주주의와 가까워 보입니다만... (물론 봉건제도와 민주주의는 아주 거리가 멀지만요.) 중앙집권주의 사회에서 수십세기를 지내다 보니 갑을 무조건 따르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된 건 아닌가 싶습니다. 결국 그런 것이 갑이 맘대로 설치고 다녀도 을은 꼼짝 못하는....
    한 예로 저는 프랑스의 중앙집권적인 민주주의보다는 독일의 (미국 사회는 제가 잘 몰라서 예에서 제외...) 연방 민주주의가 더 민주주의의 본질에 가깝다고 보는 데, 이와 같은 맥락이죠. 물론 글 읽으며 짧게 한 생각이라 제대로 알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긴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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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그리 생각 할수도^^
    난 중앙의 오야붕이 지방 봉건영주에게 무소불위의 전권을 주기에 그점을 강조하다보니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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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이상원 선배님 말씀도 옳습니다. 저는 봉건주의, 중세역사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중앙이 마음에 안 드면 그 틀에서 나올 수 있고, 중앙을 엎을 수도 있는 부분을 더 봤죠. ㅎ 너도 나도 왕처럼 행세하는 점에서는 선배님 말씀이 더 현실에 가깝기도 하네요. 웃을 수 없는 현실이죠.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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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고마워 이박사, 자네 가족과 함께한 기쁨 오래오래 간직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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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두 인간
    발 팔찌 채웠나요? 채워야 합니다.
    무슨 일을 또 저지를지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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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답1994’ 서태지 찍었더니 전두환 前 대통령이? 알고보니 실화 : 동아닷컴 http://t.co/pWltzVbqQ4 via @dongamedia
    news.donga.com  
    서태지인 줄 알고 사진 찍었더니 알고보니 전두환 前 대통령?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tvN '응답하라 1994' 1회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엔딩에선 서태지의 광팬인 조윤진(도희 분)이 잘못 찍힌 사진에 분노, 끝내 욕설을 터뜨리는 장면도 방송됐다. 어찌보면 다소 황당한 내용일 수도 있는 이 장면에 숨겨진 사연은 뭘까. 서태지인 줄 알았더니 전두환 前 대통령이더라 일화는 서태지 팬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한 일화다. 11일 방송된 tvN '응답하라 1994' 속 주인공 성나정(고아라 분)은 당시 신드롬을 일으켰던 연세대학교 농구부 이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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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백아흔세 번째 이야기-2013년 10월 21일 (월)]

    무덤 속의 뼈가 어찌 사람에게 복을 주랴

    요즈음 '관상(觀相)'이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900만의 관람객을 넘어섰다고 하며, 이 기세로 가면 1,000만 관객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크게 흥행에 성공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화 자체의 치밀한 구성과 뛰어난 촬영기법, 연기자들의 탄탄한 연기 덕분일 것이다. 그중에는 '관상'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주는 묘한 호기심도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일조하였다.

    이 영화로 인해서 때 아니게 호황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뛰어나다고 하는 관상가들이다. 그들의 집에는 관상 한번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관상가를 한 번 만나 볼 수 있다고도 한다. 또 요즈음 각종 언론 매체를 보면, 이른바 관상의 대가라고 하는 분들이 나와서 관상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이들은 말한다.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난 관상만 보면 그 사람 일생의 길흉화복을 미리 점칠 수 있다고. 비단 관상가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주(四柱)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만 알면 그 사람의 운명을 점칠 수 있다고 한다. 풍수가(風水家)들은 또 조상을 길지(吉地)에 잘 모시기만 하면 부자가 되고 자손이 번성한다고 한다. 그런데 의심스럽다. 이들의 말은 과연 사실일까? 정말로 관상이니 사주니 풍수니 하는 것들이 사람의 운명을 정하고, 또 정해진 운명을 바뀌게 하는 것일까?

    혹 술가(術家)의 풍수설(風水說)에 미혹되어 함부로 선묘(先墓)를 옮기거나 기간이 지나도록 장사지내지 않는 자는 당연히 규계(規戒)할 일이다.

    만일 어쩔 수 없는 뚜렷한 사정이 있어서 천장(遷葬)한다면 우선 논하지 않지만,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술사(術士)의 꾐에 빠진 것이다. 무릇 신도(神道)는 고요함을 기본으로 하니, 이미 안장해 놓고 분묘를 함부로 옮겨 조선(祖先)의 혼령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거듭 불효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묘를 옮긴 가문에서 복을 구하려다가 복은 얻지 못하고 도리어 재앙만 불러온 경우가 많은 것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풍수에 현혹되는 데는 두 가지 부류가 있다. 무식한 자는 다만 말하기를, “산소를 쓴 자리가 좋지 못하여 자손들이 이처럼 가난하며 과거에 급제하는 자도 나오지 않으니, 응당 길지(吉地)를 구해서 복을 구하여야겠다.”라 하고, 조금 아는 것이 있는 자는 번번이 말하기를, “산소를 쓴 자리가 좋지 못하여 신위(神位)를 불안하게 하였으니, 자손 된 자의 마음에 등한시할 수가 없다.”라고 한다.

    효성스러운 자손들의 마음에 일단 불길하다는 말을 듣고 나면 마음가짐이 이렇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열에 하나도 보기가 어렵고, 태반은 부귀와 복록과 장수를 바라는 마음에서 먼저 좋은 묏자리를 찾는 것이다.

    대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운명이 이미 정해지는 것이므로 사람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또 풍수에 관한 설이 매우 아득하고 세상에 신안(神眼)이 없어진 지 오래이다. 그러니 세속의 술사들이 말하는 길지(吉地)라는 것이 도리어 흉지(凶地)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속담에, “복 있는 사람이 길지를 만난다.”고 했는데, 이것은 이치에 통달한 속담이다.

    만일 추호라도 복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분묘를 옮긴다면, 이것은 도리어 사사로운 마음에 속하는 것이다. 하늘의 도리는 지극히 공평하므로 이런 사람에게는 절대로 복을 내려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或惑於術家風水之說。妄遷先墓及過期不葬者。亦當規戒。若以顯然不得已之故而遷葬。則姑不論已。餘外盡爲術士所蠱耳。夫神道主靜。旣已安葬。而妄遷墳墓。使祖先神靈不安。是重不孝也。是故遷墓之家。求福不得而反致殃者多。必然之理也。惑於風水者。其說有二。其無知者。直曰墳山不佳。以致子孫貧殘。或科甲不生。當求吉地。以祈福利。其稍解知識者。則輒曰墳山不吉。致神位不安。子孫之心。不可恝然矣。孝子順孫之心。一聞不吉之言。或有處心如此者矣。然如此之人。十難得一。而太半富貴福壽之意。先爲之兆也。夫人墮地之初。禀命已定。非人所可力圖。且風水之說。甚爲茫昧。世無神眼久矣。俗師所稱吉地。安知其非凶乎。諺曰福人逢吉地。是俚語之達理者也。若有一毫冀福之望而爲之。則反涉私意。天道至公。必不降福於此等人明矣。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광주부 경안면 2리 동약(廣州府慶安面二里洞約)」 『순암집(順菴集)』

    [사진설명] ▶왼쪽은 풍수가들이 방위를 잡는 데 필수적으로 사용된 윤도(輪圖)이고, 오른쪽은 명당자리를 알아보는 데 쓰인 풍수지리서이다.『한국의 박물관』, 한국박물관연구회 저, 문예마당에서 인용.

    이 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인 순암(順菴) 안정복이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 덕곡리(德谷里) 텃골에 살면서 같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향약(鄕約)을 만들어 시행할 적에 만든 향약규례 가운데, 상례(喪禮)에 관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순암은 이 글에서,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기 위하여 묏자리를 가려서 잡는 것은 괜찮지만, 자신이 복을 받기 위하여 부모님의 혼령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세상에는 신안(神眼)이 없어진 지 오래여서 제대로 풍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풍수설을 믿을 것이 못되며, 천도(天道)는 공평하여 부모님에게 불효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절대로 복을 주지 않으니, 풍수설을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순암만이 풍수설에 대해서 비판한 것은 아니다. 우리 선인들이 대부분 다 풍수설에 대해서 허탄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풍수론(風水論)」이라는 글에서 “말라비틀어진 무덤 속의 뼈가 제아무리 산하(山河)의 좋은 형세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기의 후손(後孫)을 잘 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복을 받기 위하여 좋은 무덤 자리를 찾아다니는 세태에 대해 직설적으로 질타하였다.

    풍수설에 대해서 아주 단순한 의문이 있다. 이 세상에는 우리 민족처럼 조상을 장사지내면서 무덤을 만들지 않고 화장(火葬)을 하거나 풍장(風葬)을 하거나 하는 풍습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런 풍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묏자리의 좋고 나쁨은 아예 따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또 풍수설을 믿는 중국의 경우를 보면, 서쪽 산악 지방은 그야말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조차 따질 수 없는 험준한 산만 이어져 있는 곳도 있다. 중원 평야 지대나 남쪽 평야 지대는 1,000리를 가도 조그마한 동산조차 보이지 않아, 안산(案山)이니 조산(祖山)이니 하는 것을 아예 말할 수조차 없다.

    그런 풍습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길지(吉地)와 흉지(凶地)에 따라 복을 받고 재앙을 받는다고 하는 풍수설은 아예 논할 수조차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 가운데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자손이 번성한 사람도 있고 가문이 영락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해서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으며, 복을 받는 사람도 있고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인가? 만약에 풍수설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풍수설은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다.

    풍수설만이 아니다. 관상술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는 우리 한민족이 속한 황인종뿐만이 아니라, 백인종이나 흑인종 등 여러 인종이 살고 있다. 그런데 관상술이라는 것은 유독 중국인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만 있으며, 백인종과 흑인종에게는 아예 없다. 그 신묘하다는 관상술이라는 것이 중국 사람과 우리나라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 백인종이나 흑인종은 외계 사람이라도 되길래 그 술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사주가 기구하고 관상이 형편없는데, 부모를 장사지내면서 아주 좋은 길지(吉地)에 모셨을 경우,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복을 받지 못할 것인가? 복을 받는다면 사주팔자나 관상은 별 볼일이 없는 것이며, 복을 받지 못한다면 풍수라는 것은 별 볼일이 없는 것이다. 반대로 사주팔자가 좋고 관상이 좋은데 부모님을 길지가 아닌 곳에 장사지냈을 경우,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인가? 복을 받지 못할 것인가? 복을 받는다면 사주나 관상이 영험한 것이며, 풍수설은 엉터리이다. 사주와 관상과 풍수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영험한 것인가? 모두 영험한 것인가? 아니면 모두 엉터리인가? 참으로 모를 일이다.


    땅 있으면 어디에고 백골 묻을 수 있나니, 有地可能埋白骨
    애를 쓰며 이산 저산 찾아다닐 필요 없네. 不須勤苦覓靑山
    어찌하면 풍수 책을 모조리 다 태워 없애, 何緣火得靑烏集
    온 천하에 상 치르는 어려움을 없게 할꼬. 天下終無送死難

    이 시는 퇴계(退溪)의 고제(高弟)로서, 임진왜란 때 진주(晉州)에서 순절(殉節)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당대 사람들이 장사지내면서 이른바 길지라는 좋은 묏자리를 찾기 위하여 이산저산 헤매고 다니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지은 「축종 상인(竺宗上人)의 시축(詩軸)을 차운하여 제(題)하다」라는 제목의 시이다. 축종 상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마도 당시에 풍수설에 뛰어난 승려였던 듯하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이처럼 발달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관상술이니 사주팔자니 풍수설이니 하는 것들이 여전히 성행하고 있으며, 이런 것들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어째서 그런 것일까? 아마도 예전부터 전해져 온 의식이 너무나 깊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어서일 것이다. 또 개개인의 삶이 너무나 팍팍해서 이런 허황된 것들에게나마 의지하여 위안을 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사주가 맞는 것인가, 관상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풍수가 더 맞는 것인가? 실제로 그런 이치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제아무리 사주가 좋고 관상이 좋고 묏자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성실한 삶을 살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일생을 허비하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악을 행하여 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한다면, 큰 복이 오히려 재앙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 이런 것들을 지나치게 신봉하면서 거기에 의지한다면, 삶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되는 점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 점 명심하고 삶에 임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정선용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주요저역서
    -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그리오』, 일빛, 2011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해동역사』, 『잠곡유고』, 『학봉집』, 『청음집』, 『우복집』, 『삼탄집』,『동명집』 등 17종 70여 책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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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흔한 번째 이야기-2013년 10월 17일 (목)]

    달밤에 찾아온 벗
    꽃마을 언덕 위로 달 떠오를 때
    산골 노인 일어나 옷을 여미네
    또다시 찾아올 귀한 손님 계시니
    아직은 사립문을 닫지 말고 있어야지

    嶺月來花社
    山翁起整衣
    重來有好客
    且莫掩柴扉

    - 권상하(權尙夏, 1641∼1721)
    「임대중(任大仲)의 시에 차운(次韻)하다」
    『한수재집(寒水齋集)』

    이 시의 저자인 수암(遂庵) 권상하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잇는 대표적인 기호학파(畿湖學派) 성리학자입니다. 저자의 문집에서 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산골 마을의 풍경과 벗들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담긴 작품이 많습니다. 위의 시 또한 한적한 산촌에서 벗을 만난 심정을 노래한 작품으로, 동문(同門) 임방(任埅)의 시에서 차운해 지은 것입니다.

    시인이 사는 곳은 꽃 피는 산골입니다. 여간해선 찾아오는 이 없는 산중이니, 아침저녁으로 사립문을 열고 닫는 것은 그저 하루를 시작하고 정리하는 일상적인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달밤에 찾아오기로 한 손님이 있어 옷을 챙겨 입고 사립문을 열어둔 채 그를 기다립니다. 꽃이 핀 산골의 밤 풍경을 혼자 누리기엔 아까웠는데, 좋은 벗이 찾아온다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문밖을 내다봅니다. 친구는 지금 산속 어디쯤을 달빛 아래 걸어오고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수에 이어 두 번째 수에서는 찾아온 친구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꽃향기 속에서 이렇게 마주 앉으니 對坐花香裏
    밤이슬에 옷이 좀 젖은들 무슨 상관이겠나 何嫌露濕衣
    내일 아침 그대를 떠나보내고 나면 明朝分手後
    사립문 닫힌 채로 적적할 텐데 寂寂閉山扉

    꽃향기가 가득한 산골의 밤을 느끼기에는 방 안 보다는 꽃이 핀 한가운데 자리하는 게 좋았을 것입니다. 달밤에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꽃향기를 맡으면서 실눈이 되어 마주 보고 웃었겠지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나간 이런저런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읽다 느낀 점을 주고받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밤은 깊어지고 옷은 이슬에 젖어 축축해졌지만, 그것이 오래간만에 만나 대화하는 꽃자리를 파할 만한 이유는 못 됩니다.

    이때 시인은 감흥에 젖어 말로 하기 어려운 마음을 시를 지어 고백합니다. 친구가 오지 않아 사립문도 걸지 않고 기다렸노라고. 이슬에 옷이 젖어도 함께하니 즐겁기만 하다고. 짧은 시간 함께한 후 내일이면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무척 허전하다고.

    꽃이 핀 자리, 달 뜨는 시각을 잡아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시를 주고받던 옛 풍경이 멋스럽습니다. 그 시절엔 자연스럽던 풍경들이 다 어디로 가고 없는 것일까요?

    글쓴이 : 하승현(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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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백아흔한 번째 이야기-2013년 10월 7일 (월)]

    행위로 관상을 보다

    관상과 관련된 영화가 인기를 끌고 있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을 관상술사와 연관하여 풀어낸 내용이다.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후사를 정할 때 관상에 자손 복이 없는 넷째아들 태종(太宗) 대신에 자손 복이 많은 손자 혜제(惠帝)를 황태손(皇太孫)으로 삼는 바람에 숙부가 다시 조카의 제위(帝位)를 찬탈하는 역사적 사실이 영화의 내용과 흡사하다.

    언제부터인가 미신적인 요소로 치부되면서 우리 곁에서 멀어졌던 관상술이지만, 실은 오랫동안 생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일종의 경험 과학이다. 그러나 관상은 단순히 얼굴 생김새만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정확도가 많이 떨어진다. 왜 그런지는 사기꾼의 상당수가 멀쩡하게 생긴 인상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관상을 보는 방법도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면상(面相)은 배상(背相)만 못하고, 배상은 심상(心相)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심상도 미진한 바가 있다고 생각되므로, “심상은 행사상(行事相)만 못하다.”라고 하겠다. 면상의 길흉은 결국 행사로 드러나고, 배상의 길흉도 또한 행사로 드러나며, 심상의 길흉은 반드시 행사에 드러난다. 행사를 버려두고 사람의 상을 살피려고 하면, 이는 곧 마무리하지 못한 문기(文記)인 셈이다.

    전날의 행사는 이미 경험한 상이고, 지금의 행사는 바야흐로 시험하는 상이고, 장래의 행사는 경험하기를 기다리는 상이 된다. 이 세 가지 상 중에서 그 두 가지 상을 안다면 그 나머지 하나의 상은 사례에 비추어 추측할 수 있다. 앞의 일을 미루어 뒤의 일을 추측하는 데는 변통(變通)하는 방법이 있고, 이것을 들어서 저것을 밝히는 데는 손을 쓰는 방도가 있다.

    면상과 배상, 심상은 모두 행사의 상에서 참고하여 검증할 수 있다. 면상에는 근거를 댈 수 있는 단서가 있고, 배상에는 바로잡아 밝히는 단서가 있고, 심상에는 지향하는 실제가 있으니, 모두 쓸 만한 상이 된다. 행사에서 참고하여 검증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방 안에 있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방구석에서 세상사를 안배하는 것과 같다.

    古人云。面相不如背相。背相不如心相耳。竊想心相尙有未盡。故曰心相不如行事之相。面相之吉凶。畢竟著行事。背相之吉凶。亦著於行事。心相吉凶。必著於行事。捨行事而欲相人。乃未磨勘之文記也。前日行事。乃已驗之相。在今行事。乃方試之相。將來行事。爲待驗之相。於此三相。知其二相。則其餘一相。可比例而測之。推前測後。有變通之術。擧此明彼。有容手之方。面相背相心相。皆參驗於行事之相。面相有引據之端。背相有訂明之緖。心相有指的之實。皆爲可用之相。若不參驗行事。譬如房闥之內人所不見處。排布世上事也。

    - 최한기(崔漢綺, 1803~1877), 「행사상(行事相)」『인정(人政)』 권4, 「측인문(測人門)」

    [해설]

    관상, 즉 상을 살피는 방법은 다양하다. 얼굴의 구성을 살피는 면상(面相)이 있고, 뒷모습이나 골격을 살피는 배상(背相), 또는 골상(骨相), 마음을 살피는 심상(心相)이 있다. 그중에서 옛날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심상(心相), 즉 마음의 상이었다.

    얼굴이나, 골격 등도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마음이 어떠냐에 따라 길흉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관상이 좋지 않았던 사람이 선행을 베푼 뒤에 다시 보니 좋은 상으로 바뀌어 있더라는 이야기는 흔히 들을 수 있는 전설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괜히 나온 말이겠는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과학자인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는 이론에 따라 외면을 살피는 방법을 상법(相法)이라고 하고, 이론에다 관상가의 직관이 더해져서 내면을 살피는 방법을 상술(相術)이라고 하면서, 상술의 어려움에 대해 논하였다. 상법은 기존의 이론서를 통해 터득할 수 있지만, 상술은 고도의 신통력을 지녀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고 보았다. 그만큼 마음을 읽기가 어렵다는 것이리라.

    그는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보완적 방법으로 행사상(行事相)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모든 상(相)의 길흉은 그 사람의 행위로 드러나기 때문에, 들여다보기 어려운 심술을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실제 행사로 나타난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선진(先秦) 시기의 순자(荀子)가 설파했던 “형태를 살피는 것은 마음을 따져보는 것만 못하고, 마음을 따져보는 것은 그 처신하는 방법을 가려보는 것만 못하다. [相形不如論心 論心不如擇術]”는 말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면상, 배상, 심상은 전문가의 영역이라고 하겠지만, 행사상은 일반인도 특별히 배우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을 듯하다.

    초(楚)나라 때 관상을 잘 보는 사람이 있었다. 임금 장왕(莊王)이 그를 찾아가 상법(相法)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신은 사람의 상을 잘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잘 관찰하고, 그 사람의 벗을 잘 관찰합니다.”

    일상적으로 보이는 처신이나, 교유 관계를 통해 그 사람의 관상을 보았는데, 그것이 거의 들어맞더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인지상정(人之常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느냐의 여부가 그 사람의 선악과 길흉을 판단하는 주요 요소인 셈이다.

    송(宋)나라 때 사람 채경(蔡京)이 아직 존귀하지 않았을 적에 해를 쳐다보면서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가 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간관으로 명성이 높았던 진관(陳瓘)은 다르게 보았다.

    “그의 정신(精神)이 이와 같으니, 훗날 반드시 귀한 신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타고난 자질을 뽐내서 감히 해에 대적하니, 이 사람이 훗날 권세를 잡으면 필시 사욕을 부려 임금도 무시하고 방자하게 굴 것이다.”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모진 심성을 지녔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믿지 않았으나, 과연 그의 말대로 채경은 훗날 권력을 잡고 사마광(司馬光) 등 구법당(舊法黨)을 몰아내고 전횡을 일삼아 ‘육적(六賊)’에 포함되는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불과 몇십 년 전, 어느 대기업의 총수가 신입사원 면접 때 관상을 보고 당락을 결정하던 일이 있었다. 현실적 이익에 밝은 기업인이 관상을 중시했던 것은 나름대로 상당한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일반인들이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만, 관상을 본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처신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글쓴이 : 권경열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사업본부장
    주요역서
    - 『국역 갈암집』공역,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국역 오음유고』,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국조상례보편』공역,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 『국역 매천집 3』, 한국고전번역원, 2010
    - 『국역 가례향의』, 국립중앙도서관, 2011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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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각시와 함께한 창경궁(昌慶宮) 관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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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원시절 식물원장을 지낸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하 황해도 송화서장을 지내고 해방 뒤 치안국장을 지냈던 윤우경 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장이 창덕궁 재산을 빼돌리고 발각될까 두려워 증거를 없애기 위해 창경궁에 있던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을 고의 방화하고 미국으로 도주하였다 한다. 친일역적 모리배는 아직도 세계 구석구석에 숨어 대한민국의 발목을 붇들고 있다. 인터넷으로 윤우경이를 검색하여 보니 관련 2006년 10월 24일 주간동아 557호 p28~29 기사가 하나 있다. 따로 올리겠으니 많이들 봐라.
    위키백과에 의하면 "창경궁(昌慶宮)은 서울시에 있는 조선 성종 때에 건축한 궁궐이다. 창경궁은 서쪽으로 창덕궁과 붙어 있고 남쪽으로 종묘와 통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하였는데,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붙어 있으면서 서로 보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 후 성종 14년(1483년)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일 등 크고 작은 궁중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 박물관이 들어서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1963년 1월에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고, 1983년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이름도 창경궁으로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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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땅 한 평 안 남기고 공중분해 - 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의 화재사건: [[창경원시절 식물원장을 지낸 나의 부친 방원 이성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하 황해도 송화서.. http://t.co/9ma4ORZq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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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좋은 공부가 됐네요~맘가짐을 다잡게해주네요~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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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Jinhee Park 제수씨 제가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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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일욜에 풍석원가서~친구들이랑 행복했었어요~사장님이 페북올라온거 되게 기뻐하시더라구요~막걸리는 놀루오라했는데 대답만하구 안오네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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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막걸리가 자주 놀러가야 하는데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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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누구도 피할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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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MG! Shame on YOU!} South Korean Military Agency’s Headquarters Raided in Growing Scandal http://t.co/RoRr3Y5cZr [아~ 또하나의 국제적 망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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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fficials with the Cyber Warfare Command were said to have posted messages backing President Park Geun-hye during last year’s election campa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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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muel Lee 군부가 정치에 엄정 중립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더이상 기대할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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