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안산 김씨]
세월호 참사로 지구의 반대편에 사는 나도 출장길에 마음이 편치 않았고 우울한 기분이 영 가시질 않는다. 안산 하니 떠오르는 분들이 있다. 일찌기 작고하신 내 친할머니는 3자매셨다.
할머니의 막내 자매분이 '안산 김씨'와 혼인하여 내게는 아저씨벌 되는 안산 김씨들이 제법있다. 어린시절엔 안산 노리울이라는 곳에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것도 기억이 난다. 안산 김씨의 특징은 타성씨 유입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타성씨의 유입은 원래 성씨가 없던 분들이 이런 저런 경로로 실시된 호적신고제로 순수 혈통체계와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생긴 것을 이야기 한다. 나의 한산 이씨만 하여도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치며 시조인 호장공의 형님의 집안이라 자처하는 권지공계가 나타나는 바람에 4만의 종씨가 10만을 넘어서 버렸고 아직도 진실 다툼을 벌이고 있다.
조선후기나 구한말에 족보를 위조하거나 1909년 민적법을 시행할때 성씨가 없던 돌쇠, 개똥이들이 원하는 성씨를 마음껏 신청해 가졌는데 대부분 모시던 주인의 성씨와 본관을 신청하였다고 한다.
한가지 집고 갈것은, 이때 왕족의 성씨였던 이씨, 김씨, 박씨 등 당시 유명하면서 흔한 성씨가 인기가 많았고 지금의 성씨와 본관 자체로 다른 집안의 귀천과 명문가를 구분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어느 종가 웹페이지에 "현재 품성과 생김새가 천한데 성씨로 양반이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양반집의 돌쇠이였거나, 그 마을 개똥이였을 확률이 높으니, 그 사람의 품행으로 양천을 판단해야 된다"는 글을 본적이 있는데 이는 개소리임을 집고 넘어가면서 ...
원래 철종전까지는 백성의 3% 만이 족보를 가진 양반가 였다는데, 일제시대에는 족보가 본보(本譜)와 별보(別譜)로 구분하여 갑오경장이전족보(甲午更張以前族譜)에서 가계의 확인이 불가능한 것을 별보라 했는데 별보의 분량이 본보의 몇 배가 되면서 전 백성의 양반화의 서곡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국민의 양반화는 6.25이후인 1955년부터 57년사이에 대부분의 족보가 다시 만들어 지면서 이루어진다. 전쟁으로 없어진 족보와 친인척 확인목적으로 시작하여 여러 이권이 겹치면서 本譜와 別譜의 구분이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다.
그 이후 한국에서는 성씨없는 개똥이 소똥이 돌쇠는 영원히 찾아볼수 없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신기하게도 '안산 김씨'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족보를 지켜내서 혼란기에 갑작스런 성씨 유입을 당하지 않은 종씨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던 모습들이 기억이 난다. 현재 통계청 자료에도 안산김씨는 4만명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안산의 단원고 학생들이 줄 초상을 당했다. 고고한 '안산 김씨'들이 터를 잡고 살안던 곳이라 이번 참사를 굳건하게 이겨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힘내라! 안산 시민들이여!
++
반응형
'1. Dr. Sam Lee > 15_80년5월18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찮게 여겨지는걸 넘어 온전하지 끝나지 못할껍니다 (0) | 2014.04.25 |
---|---|
< '선동(煽動)'과 '의도'에 대하여/김희수 박사 > (0) | 2014.04.25 |
동티모르라는 나라를 아시나요? (0) | 2014.04.11 |
[동티모르라는 나라를 아시나요?] (0) | 2014.04.04 |
5.18 광주, 세계 평화의 축제의 장으로 (0) | 2014.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