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0_영어잘하는비법

[영어 잘하는 비법 21] [광주 시장에 출마하는 윤장현 박사를 지지하는 아시아인권위원회 베이질 퍼낸도 와 잭 클랜시]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5. 2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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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대학 언어학 박사이신 김희수 박사님이 최종 교정을 보아 주셨습니다.]

[Basil Fernando and Jack Clancey in support of Dr. Yoon Jang-hyun for Mayor of Gwangju - 광주 시장에 출마하는 윤장현 박사를 지지하는 베이질 퍼낸도 와 잭 클랜시]


0:06 Basil Fernando: The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you know, in the recent years, have been very much influenced by the inspiration of the Gwangju uprising. 아시아 인권위원회는 최근 광주 항쟁에 의해 크게 감화받아왔습니다.

0:24 Jack Clancey: I agree with that, Basil. 베이질, 나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0:25 Basil Fernando: 

In order to develop our ideas of how to be relevant to Asia, we were looking for inspiration. We were looking at the things that are happening in Asia. And the most powerful example we found was the example of Gwangju, particularly the young people who, the day before they were killed, were so profoundly aware that they are going to be killed by opting to fight for democracy, but they decided that that is better than to surrender which would create a huge demoralization in the masses of Korea. So the whole idea of inspiring and avoiding demoralization - this whole theme which is very fundamental to keeping any human rights work alive - was very much a product of our being influenced by Gwangju. 아시아에 적절한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영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아왔고, 가장 강력한 영감을 광주 항쟁에서 찾았습니다. 투항할 경우 한국의 민중들에게 심각한 사기저하를 일으킬 것이기에 그보다는 죽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던 젊은이들에게서 우리는 감동받았습니다.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사기저하를 방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권활동의 핵심이며, 우리가 광주로부터 영향받은 결과인 것입니다.

Now, in bringing this knowledge to us - earlier we were not aware of this, although the Gwangju uprising happened in 1980 - we were not aware of it even in the early 90s. So, few people brought this to our notice. Among them were Dr. Yoon (from Gwangju himself), who brought to our notice, "Do you know what has happened in Korea? In Gwangju? Do you know about [the] Gwangju uprising?" And [he] talked to us about it, gave us books, and got us inspired, and also brought us to Gwangju, and began to influence us. And that was part of his oral work. He was very much involved in trying to get many people to know about the Gwangju uprising and to be inspired by that. Now, I'm sure that you also went to - have been to - Gwangju some time. How do you recall your experience? 광주 항쟁이 1980년에 일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우린 이 일에 대해 모르고있었습니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우리에게 이 일에 관해 알려주었는데, 광주 출신인 윤박사님께서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의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십니까? 광주 항쟁에 대해 아십니까?” 그는 우리에게 광주 얘기를 해주었고 관련 책도 주었으며,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우리를) 광주로 데리고 가기도 했으며, 우리에게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말로써 한 일 중의 일부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광주에 대해 알고 감동받기를 참여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제가 광주에 대해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신도 광주를 갔던 적이 있는데, 그 때의 경험이 어떠셨는지요?

3:00 Jack Clancey: 

Well, Basil, my experience is a little bit different because I began going to Korea in the 1970s. At that time, Korea was under a military dictatorship [under] president Park Jung Hee. I heard people speak of the effects of that dictatorship, that complete lack of any democracy. Workers were forced to work long hours in very unsafe working conditions, and the effect was that there were many injuries. Workers had their hands cut off, their fingers cut off; sometimes they suffered from exhaustion, all to help the factory owners make more profits. And this was done in collusion and cooperation with government officials. The plan was to allow people - some people - to make a lot of money at the expense of ordinary people, particularly the workers. 제 경험은 조금 다른데 저는 1970년대 부터 한국을 갔었습니다. 그 때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군부 독재하에 있었지요. 민주주의가 완전히 부재하는 독재정치의 영향이 어떤 건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지요. 노동자들은 강제적으로 장시간을 안전하지 않은 작업여건에서 일해야했고, 손목 또는 손가락이 잘리기도 했으며, 과로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희생의 결과는 공장주들의 더 많은 이익으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정부 관료들과 회사와의 결탁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 특히 노동자들의 고육으로 일부 사람들이 많은 돈을 벌게 하자는 계획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I heard of six priests and a bishop - Bishop Daniel Chi - who went to prison because they spoke out and asked for democracy in Korea. At that time a poet - Poet Kim Chi Ha - was also imprisoned because he was speaking up and calling for democracy. Many intellectuals and students who were criticizing the government were put into prison for trumped up charges, false charges, as we see in many parts of Asia today. And then, the dictator was killed, there was a brief period of hope of democracy, that things would changes, and then the military came in again. And, at that stage, I first heard of Gwangju, where the people rose up. At that time we didn't have that much information and news, but we knew that people had stood up and chased the military out. And, again, there was hope. And there was a feeling that democracy was being implemented, that people were running this city for a few days. And then the military came in and, as you mentioned, killed a lot of people, mostly young people. 여섯 분의 신부님들과 지학순 주교님도 한국의 민주주의를 외치고 요구하다 감옥에 가셨다 들었습니다. 그 때 시인인 김지하씨도 민주주의를 요구하다 감옥에 갔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많은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거짓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으며, 현재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독재자는 죽임을 당했고 상황이 개선되어 민주주의가 실현되리라는 희망이 잠시 있었지만, 군부가 다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 광주에서 사람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뉴스와 정보가 별로 없긴했지만, 광주 시민들이 일어나 군인들을 내쫓았음을 들었습니다. 다시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광주는 시민들에 의해 며칠 간이나마 운영되었고 민주주의가 이행되고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이 다시 들어와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죽였습니다.

But it was only years later when we originally launched our People's Asian Charter on Human Rights that I first visited Gwangju. I remembered when I first heard of the killings - at that time we called it the Gwangju Massacre - I was crying, and I finally went to the cemetery, and I was able to say a prayer for all those people (now a national cemetery). It was Dr. Yoon, as you mentioned, who gave us all the details. We knew it in general terms, but he showed us videos, he gave us books, and he explained the whole spirit behind what was happening those few days when the people were democratically running the city government. 그렇지만 우리 인권위원회의 아시아 지부를 세운 것은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서이고 그제서야 전 광주를 방문했습니다. 그 많은 살인에 대해 처음들었을 때 – 우린 이제 광주 학살이라 부릅니다 – 저는 울었습니다. 저는 결국 희생자들의 공동묘지를 방문하여 그들을 위해 기도했는데, 지금은 거기가 국립묘지가 되었지요. 당신이 얘기한 것처럼, 우리에게 자세한 정보를 준 사람은 윤박사님이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사실들만을 알고있었지만, 윤박사님께서는 비디오를 보여주셨고 책을 주셨고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또 민주적으로 광주시를 운영하던 그 며칠간 있었던 일들의 배경에 어떤 정신이 있었는지까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5:50 Basil Fernando:
You mentioned something about the Asian Charter. We were invited by Dr. Yoon and his group to have the inauguration of the Asian Charter in Gwangju because they found that the Asian Charter expresses the aspirations of the Gwangju people. 당신이 아시아 지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윤박사님과 그분과 함께하던 일단의 사람들은 “인권위원회 아시아 지부가 광주 시민들의 열망을 표현할 수 있으므로 지부 개설식을 광주에서 해달라”고 초청하셨었죠. 

6:50 Jack Clancey:
I recall that, yes. 네, 저도 기억합니다.

6:52 Basil Fernando:
In fact, it was at the time on the, during the, in May, the period when the Gwangju uprising has been celebrated, that we had also the launching of the Asian Charter. I remember I was invited at the end of the big session, in our session. 사실 그때가 광주 항쟁을 기념하던 5월이었기에 우리 또한 인권위원회의 아시아 지부 개설을 했던 거였지요. 큰 행사 후반부에 우리 행사를 하도록 초대 받았던 걸로 저는 기억합니다. 

8:00 Jack Clancey:
You spoke at a big rally. 당신은 큰 집회에서 연설을 했었지요.

8:29 Basil Fernando:
Yeah, in a huge rally. 네 정말 큰 집회였습니다.

9:32 Jack Clancey:
I remember that night. 저도 그 밤을 기억합니다.

11:08 Basil Fernando:

And I had never spoken [at] as big of a rally as that. 전 그렇게 큰 집회에서 연설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And I saw that thousands of people - almost a hundred thousand or two hundred thousand people - were in the streets celebrating ... 전 수많은 - 십만에서 이십만명 정도 되는 - 사람들이 거리에서 기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They said, "This is the way we build democracy." 그들은 “이것이 우리가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Dr. Yoon and his friend, Yoo-jin, tried to go to different countries. 윤박사님과 그의 친구인 유진씨는 다른 여러 나라에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They went to Sri Lanka, they went to Bangladesh, Thailand, and they were trying to tell people, "You can also do the same thing! You can also make democracy for yourself, but you must stand with the people." 그들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태국 등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여러분들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들의 민주주의를 스스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대중들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라고 말하려고 노력했습니다. That is the message of Gwangju. 그것이 광주의 메세지입니다. These young people understood the unity of the people, solidarity of the people, and they're trying to inspire a movement of solidarity. 이 젊은이들은 대중의 단결 그리고 대중의 연대를 이해했고 연대의 운동을 고무시키려 노력했습니다. That was what I found very inspiring from both Dr. Yoon, and Yoo-Jin Soh, and several other Young people. 그것이 제가 윤박사님과 서유진씨 그리고 여러 명의 다른 젊은이들로부터 받은 영감이었습니다. 

12:22 Jack Clancey:
I remember it, Basil, because Dr. Yoon has strongly recommended a number of people to come here, to work here at the HRC, as interns, as staff members, recommended other people to travel to other Asian countries, and always with the goal of sharing what is happening there, and then coming back and letting him know what is happening in those countries in terms of violations of human rights and lack of democracy, etc. 나도 기억해요 베이질. 윤박사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곳 인권위원회에 인턴으로 혹은 직원으로 와서 일하도록 권유하였고, 다른 이들에게는 아시아 각 국으로 여행하도록 권유하였는데, 언제나 목적은 각 나라에서 인권 유린과 민주주의의 결핍 등과 관련하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보고 와서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3:14 Basil Fernando:
Actually, it's a very, very important message that when, within your country, there had been enormous reports of development, to carry that development to others and inspire them, and to say, "Don't accept being subjugated; don't accept these long hours of work for people and all the oppression against women. 사실 한 나라에서 거대한 발전이 성취되었을 때 그것을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전달하여 고무시키고 “복종하지 말라. 장시간의 노동과 여성 탄압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Don't accept all of this because we learned not to accept this. 이런 것을 받아들이면 안 됨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절대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We were able to defeat a military dictatorship. 우리는 군부독재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That was the idea. 바로 그 점입니다. The whole message was, "We never had democracy."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는 민주주의를 가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That is what they told us, Dr. Yoon and others. 그게 바로 윤박사님과 그 동료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세지입니다. They said, "We, for years and years, for all our history, we didn't have democracy. We have never had the chance to criticize governments. But, see, by this uprising, and the inspiration which was brought by that, later, democracy came into our country, and [now] we can criticize governments. We are no longer in a military dictatorship." “우리는 역사상 민주주의를 가져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부를 비판할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항쟁으로 인해 만들어진 감동으로 우리나라에도 민주주의가 왔으며, 우리는 이제 우리의 정부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군부 독재하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윤박사님과 동료들은 말했습니다.

Clancey:
Basil, one thing I've noted, that I've reflected on recently, and I'll come to that in a minute, was the point Dr. Yoon kept stressing of not being passive, that we have to get actively involved. 베이질, 내가 주목하고 최근 곰곰히 생각해본 것이 있는데, 잠시 후 다시 얘기하겠습니다만, 수동적이 되지 말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라는 윤박사님의 강조입니다. If you have rights, you have to fight for those rights. 권리를 가지려면, 그 권리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If you want democracy, you have to fight for that democracy.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So, Dr. Yoon's point was that people should not be passive, that people should be active, that people should not be just obediently obeying authority and accepting whatever [the] authority said. 그러므로 수동적인 되지 말고 적극적이 되어라, 권위에 순응하거나 복종하지 말고, 권력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아라, 하는 것이 윤박사님의 요지였습니다. Throughout the rest of Korea at that time, people just quietly accepted the military coming in; the people of Gwangju reacted and were not passive. 당시엔 한국 전역에 걸쳐 국민들은 군부가 들어 오는 것을 조용히 받아들였지만 광주 시민들은 반발하였고 수동적이지 않았습니다. I thought of it again recently when we saw the tragic boat ferry sinking, all those young people who died in that sinking. 비극적인 여객선 침몰과 그로 인해 희생된 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저는 최근에 이 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They were told to wait and sit there, and the boat was sinking and water was coming in, and they were told to wait and they waited. 배가 가라앉고 물이 들어오는데, 그들은 가만 있으라는 지시를 받았고, 실제로 그 지시대로 기다렸습니다. They were passive. 그들은 수동적이었습니다. And I thought that, if these were students from Gwangju, this likely would not have happened. 만약 그 학생들이 광주에서 왔었다면 아마도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나는 했습니다. The people of Gwangju...are people of active. 광주의 시민들은 능동적입니다. And I think that's the spirit Dr. Yoon has asked us to think about whenever he comes to our meetings. 그것이 바로 윤박사님께서 미팅에 오실 때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When we have problems, to talk about it, and that people should keep rekindling hope, and to try to do something, and if something doesn't work, to try something else, but not to be passive and accept the situation that is happening, and don't just accept the government telling you what to do. 문제가 있을 때 거기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무언가를 하려면 희망에 다시 불을 붙여야합니다.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수동적이 되거나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거나 정부의 지시를 단순히 따르거나, 이래서는 안 됩니다. You should speak up because you also have responsibility for your country and for your city. 당신은 당신의 나라와 당신이 사는 도시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으므로,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Fernando:
Yeah. That is the same as I heard from Dr. Yoon and all his friends, that democracy means the capacity of the people to participate, people to get involved. A government must listen to people, and there's a huge potential for if that happens. In other words, economic development by itself is not enough. 그렇습니다. 윤박사님과 그의 모든 친구들로부터 저도 같은 얘기를 들었는데, 민주주의란 사람들이 참여하고 관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국민들이 하는 말을 경청해야 하고, 이것이 되는 경우에는 거대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경제 발전 자체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And that was the message and, actually, for that purpose we are very grateful because that message we brought to the Asian Human Rights Commission, and that was because of that that we invited Dr. Yoon to be a director of the board, and he became a director of the board almost in the late 1990s, and remained a director of the board very committed, and coming for all the meetings, and trying to keep other people also encouraged. A be the sense (A leader says? In a sense?, always, that the idea is people's moment (movement?). It should be a people's moment (movement?). And how to build a people's moment (movement?). So in that sense we have a lot to be grateful [for].
그게 바로 인권위원회 아시아 지부에 우리가 가져가고자 하는 메세지였고, 따라서 거기에 대해 윤박사님에게 감사하게 생각하며, 우리가 윤박사님을 인권위원회 아시아 지부의 이사장으로 초대한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윤박사님은 1990년대 말 경에 이사장이 되셨고 아주 헌신적으로 이사장직을 수행해오고 계시며, 모든 미팅에 다 참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십니다. 지도자로서의 윤박사님 생각은 언제나 대중의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여러모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12:22 - Clancey:
Yes, and now we've heard that Dr. Yoon is running for the position of Mayor of Gwangju, and I personally - and I'd like to hear from you - but I personally hope that he's successful because, as you mentioned, I think, as a mayor, he would invite the full participation of all the people of the city to get involved in making the city even more democratic, to try to reach out, I think, to other cities in Asia, to bring hope, as a government-to-government, mayor-to-mayor kind of situation. 그렇습니다. 윤박사님께서 광주 시장직에 출마하신다고 들었는데, 전 개인적으로, 당신의 생각도 듣고싶습니다만, 그가 성공적이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언급한 바와 같이, 제 생각에 윤박사님은 시민들의 참여를 대대적으로 격려하여 광주를 더욱 더 민주적인 도시로 만들 것이고, 다른 도시와 다른 나라들도 고무시키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And perhaps bringing more people from other Asian countries to see Gwangju, to see the hope is there. 어쩌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광주로 데려와 희망을 주실 지도 모르지요. That whole aspect of participation, encouraging people again not to be passive, but to participate in making the situation even better.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상황을 개선시키도록 고무시키는 것 말입니다. 

13:14 - Fernando:
Yes, that is the wish that anybody could have, to have somebody like Dr. Yoon around to remind people that sacrifices have been made for democracy. 맞습니다. 윤박사님같은 분이 곁에 계셔서 민주주의는 희생으로 만들진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주시는 것. 모든 사람들의 소망일 것입니다. And those sacrifices should not be wasted. 그리고 그러한 희생이 헛되이 되지 말아야겠죠. What I felt with Dr. Yoon is the enormous gratitude he feels for those people who fought. 제가 느끼는 바로는, 윤박사님께서는 투쟁한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하고있다는 것입니다. He feels, "It is my obligation. “그것은 나의 의무다. They are no longer alive, but they fought and they died for something. 그들은 더 이상 생존해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과 희생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And it is my obligation to keep on reminding [people] and carrying on that work." 사람들이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고 그 투쟁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나의 의무다”라고 윤박사님은 생각하십니다. So, in that sense I share your wish, and I hope that he'll be around more and that he and his other teams will do what they were doing also for their own city once again because Korea needs to go to a new stage of democracy.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저도 당신과 같은 소망을 갖고있고, 그가 우리와 좀 더 오래 같이 하길 바랄 뿐 아니라, 새로운 단계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하는 한국에서 그가 해오던 일을 광주를 위해 계속 하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The first stage of democracy has been won, and that in that sense is an example to Asia, but then we also realize that there's a lot to be improved. 민주주의의 첫 단계는 성취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한국은? 아시아의 모범사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개선시켜야할 여지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The [Sewol] boat incident clearly shows there's a lot to improve. 세월호는 우리가 노력해야할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So we hope, by all this, there will be a new stage, and in that sense I think we can all wish him well. 그래서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장이 열리기를 바라고, 그런 의미에서 윤박사님의 성공을 소망합니다. 

http://youtu.be/DnHjR7nnI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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