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3_미국이야기

미국유학파 도산 안창호와 이대위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6. 11.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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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중국여권사용을 사용하여 미국에 입국한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정부에 도산 안창호가 공산주의자라고 음해했기 때문이었다.+++]]


[이 한장의 사진] 고종시절 선비들의 존경을 받던 이명직 (http://ko.wikipedia.org/wiki/이명직_(문신)) 대감이 나라 망할것을 예측하고 "똑똑한 자식있으면 해외로 공부하러 보내라"는 사발통문을 보고 도산 안창호 선생은 과거를 접고 미국유학에 오른 이대위 (http://blog.daum.net/enature/15852493) 선생 등과 함께 1902년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차 도미를 합니다. 여러해를 준비했으나 1908년 이대위 선생만 UC 버클리 사회학과에 입학하고 도산 선생은 입학에 실패하여 학업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LA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오렌지 농장에서 일을 하며 교민결집을 시작합니다. 이 사진은 샌프란시스코의 유학준비생활을 청산하고 Riverseide에 있는 Alta Cuesta Orchard 에서 오렌지 수확일을 하던 1911년 찍은 도산 선생의 사진입니다.


1913년 6월 샌프란시스코의 이대위 선생이 브라이언 미 국무장관에게 전보서한을 보내, 대한인국민회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임을 위임받아 1928년 선생이 과로로 인한 폐병으로 돌아가실때까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는 나라 잃은 미주 조선인들의 망명정부였고 영사관이었습니다. (참고1: http://blog.daum.net/enature/15852021, 참고2: http://blog.daum.net/enature/15851235)


이대위 선생에게 쏠리는 교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시셈한 이승만은 신문기고를 통해 공개적으로 일본을 자극하지 말라고 대한인국민회을 폄하하고 본인 스스로 일본인을 자처하며 모든 이민 서류에 일본인이라 기재하였습니다. 그 당시 이승만의 행태는 미주 독립단체를 와해시키는 일본특수요원수준이었다는게 사학자들의 평가입니다. (참고3: http://blog.daum.net/enature/15852198)


도산 안창호 선생은 원래 이대위 선생과 함께 미 서부의 명문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유시버클리) 입학을 목표로 준비하다가 이대위 선생만 사회학과 입학에 성공한 이후, 중국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엘에이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겨 이대위 선생의 대한인국민회와는 다른 흥사단을 조직하는등 독자적인 노선을 걷습니다.


1924년 11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사용한 중국여권 - 미국과 조선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24년 미국 입국을 위해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에게 입국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합니다. 결국 안창호 선생은 중국여권을 사용하여 미국에 입국을 합니다. 당시 서재필 박사와 친한 샐던 스펜서(Selden P. Spencer) 상원의원을 통해 미 국무성에 알아본 바, 조선인 정례정보 보고를 하던 이승만이 보고서를 통해 ‘안창호는 공산당원이다'라고 보고 하였기 때문에 비자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정부의 협조를 받아 중국여권을 사용하여 미국에 입국을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이민서류를 작성했다면 쉽게 해결될수 있었을 겁니다. 오직 자신만 잘나야 하는 한국인의 품성을 이승만과 안창호 선생을 통해 조선인의 미국이민 초기의 자료들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절 무척이나 우울하게 만듭니다.  


민족 개조론을 주창하며, 조선민족을 개조하자고 외쳤던 도산 안창호 선생은 정작 자신은 이대위 선생과 협력하여 미주한인조직을 키우지 못하고 엘에이로 근거를 옮겨 독자적인 조직구성의 우를 범했습니다. 정작 본인은 개조하지 못한 셈이지요. 마치 자신은 읽어보지도 않은 책을 남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는 식이라고나 할까요?


이승만의 파렴치한 행적에 비하면 안창호 선생의 행적은 그리 흠이 될것은 없지만, 1928년 이대위 선생 서거후 대한인국민회를 계승발전시키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울수 밖에는 없습니다.


[제가 도산 선생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했음에도 공개하지 않키로 한데는 그분이 신봉한 근대 친미적 자본주의적 지식인의 세계가 선듯 동의할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분이 주창한 민족개량이 일제가 강요한 내선일체와 도낀 개낀이라고 느껴끼 때문이기도 합니다. 친일매국노 이승만이 국부 운운하는 남한땅에 도산선생에 대한 짱돌 하나 더 던질수가 없어 혀를 깨물며 무더두고 가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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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

1924년 11월 안창호 선생이 미국 입국시 휴대한 중국여권

1924년 11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사용한 중국여권 - 미국과 조선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24년 미국 입국을 위해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에게 입국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합니다. 결국 안창호 선생은 중국여권을 사용하여 미국에 입국을 합니다. 당시 서재필 박사와 친한 샐던 스펜서(Selden P. Spencer) 상원의원을 통해 미 국무성에 알아본 바, 조선인 정례정보 보고를 하던 이승만이 보고서를 통해 ‘안창호는 공산당원이다'라고 보고 하였기 때문에 비자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정부의 협조를 받아 중국여권을 사용하여 미국에 입국을 합니다.


일본인을 자처한 이승만

1913년 6월 샌프란시스코의 이대위 선생이 브라이언 미 국무장관에게 전보서한을 보내, 대한인국민회가 한인들의 가정부(假政府)임을 위임받아 1928년 선생이 과로로 인한 폐병으로 돌아가실때까지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는 나라 잃은 미주 조선인들의 망명정부였고 영사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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