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아는 지인 한 분이 꽁지머리를 공개하란다. 다른 사람이 뭐라면 늘 무시를 하곤 했는데, 그 지인이 보길 원하니 잠시 고민하다 과감하게 공개를 한다. 대학 일 학년때, 1980년 5월, 보안대의 고문담당 중사가 죽일 것 같은 광기로 '살려달라!'는 나에게 스스로 흥분하여 미친놈처럼 날뛰었다.
'살려달랄 질 뭐 하려 했냐?'라며 수송부에서나 볼듯한 5파운드 쇠 파이프로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그리곤 나는 죽었다. 거적때기로 씌워 놓은 내가 정신을 차린 건 하루가 지난 뒤였다. 뻐개질 것 같은 아픔이 남아있었지만, 정신을 차린 것을 그자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깨어나지 않은 채로, 이대로 영원히 쉬웠으면 여한이 없을 지경이었다.
각설하고, 딱 고자리다. 머리통 깨진 자리이고, 아직도 흉측한 흉터가 남아있다. 몇 년에 한 번씩 심하게 아플 때면 CT 촬영을 해보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단다. 하지만 시려서 꽁지머리를 하지 않았을 때는 늘 모자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식당이고 어디를 가도 구석 자리에 앉아 모든 풍경이 내 앞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질 않으면 누가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두려움에 떤다. 언젠가 점잖은 한국의사 한 분이 꽁지머리를 하고 천연덕스럽게 멋지고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용기를 얻었다. 두툼하게 그 자리를 보호하니 모자를 뒤집어쓸 필요가 없어 그만이다.
미국은 연방차별금지법에 의해 뚱뚱해도, 꽁지머리를 해도 뭐라 하는 사람들이 없다.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뚱뚱해도 타박이고, 꽁지머리를 해도 타박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가세한다. 내가 꽁지머리 할 용기를 얻은 그 의사양반도 결국 꽁지머리를 싹둑 잘라버렸다.
사실 머리 긴 거 관리하기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살인마 전두환의 졸개들이 칼로 쑤시겠다고 수천 번도 넘게 협박을 했는데, 미국에 산다지만, 꽁지머리로 표적이 될까도 두렵다. 하지만 시린 뒷머리의 상처를 감싸주니 이처럼 고마운 게 없다.
나에게 여러 관심 보이고 사랑해주는 분들께 감히 부탁한다. 내가 튀려거나 고상해서 꽁지머리 한 게 아니다. 살인마 전두환이의 졸개들이 빠개놓은 내 뒤통수의 상처를 보호하는 것일 뿐이라는 걸 이해하시고 그저 그러려니 그냥 흘려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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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겁이 나서 밖으로 떠들 용기가 없었습니다. 이제 좀 겁대가리가 없어져 이런 이야기도 하지만 세세한 이야기는 아직도 감당 되질 않습니다. 제 각시에게도 말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하고 나면 어찌 감당할지도 막막합니다.
(2) 한국에 있었으면, 뒷골목의 젖은 집단 타듯, 투덜 투덜거리다, 속 터지면 연약한 마누라와 자식들 두들겨 패다, 이혼당하고 술에 절어 살다 요르단 강 건너갔겠지요. ......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이들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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