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노길남 선생님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곳에 소개를 하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분단된 조국을 가진 한인 동포는 경계인일 수 밖에는 없다. 하지만 통일의 물꼬를 틀 사람들은 우리 재외동포들인 경계인들이다. 그 역할을 끊임없이 하는 동포 중의 한사람인 노길남 민족통신 대표를 인터넷상에서 알아보고자 그분에 대한 관련 글을 이곳에 모아 본다.
[펌] [특별대담-1]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상)
최재영 민족통신 편집위원 / 2014/04/06 ⓒ 자주민보
[편집자 주: 어린 시절 영민하게 빛나는 초롱한 눈망울, 대학시절 영화배우 못지 않은 미남 얼굴 사진 등 노길남 선생의 지난 삶을 보여주는 사진과 대담 내용을 보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사심없이 오직 민족과 인류를 위해 이렇게 열정적으로 일하는 언론인을 배출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상 중 하 짧지 않은 기사이지만 그래서 다 소개합니다.]
▲ [사진]민족통신 대표, 노길남박사 ©자주민보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최재영 편집위원] 2014년4월 초순이 되면 청년처럼 활동해 오던 민족통신 대표 겸 편집인은 칠순을 맞는다. 그리고 금년은 또 민족통신이 창간된지15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가 된다. 그래서 민족통신 편집위원회는 이러한 시기를 맞아 재미동포 인터네트 언론, '민족통신'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노길남 박사, 그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70년 삶을 조명해 보기로 하고3차례(상, 중, 하)에 걸쳐 그의 인생역정을 알아본다. 그중 첫번째 특별대담을 여기에 소개한다.
[사진]노길남 민족통신 대표(왼쪽)가 민족통신 편집위원 최재영 목사와 특별대담하는 모습
[특별대담]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상)
[사진]노길남 대표의 소학교 시절 모습
[사진]노길남 대표의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와 동생
[사진]노길남 대표의 군대시절-성조지 한국지국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
[사진]노길남 대표의 대학시절-심치선 교수 등과 학생회관 앞서 기념촬영
[사진]노길남 대표의 결혼(1973.5.4 명동YWCA 강당)
[사진]노길남 대표의 미국생활 중 10년 전 모습
[사진]노길남 대표의 미국생활-부인과 두딸의 5년전 모습
[사진]손자와 두 손녀들과 2013년 말께 즐거운 시간을 갖는 노길남 대표
[사진]2013년12월 크리스마스휴일에 노길남대표의 댁에서 가족들(처제,처남,조카들,두딸과 사위 등) 선물교환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최재영 편집위원] 2014년 4월초순이 되면 청년처럼 활동해 오던 민족통신 대표겸 편집인은 7순을 맞는다. 그리고 금년은 또 민족통신이 창간된지 15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가된다. 그래서 민족통신 편집위원회는 이러한 시기를 맞아 재미동포 인터네트 언론, ‘민족통신’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노길남 박사, 그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70년 삶을 조명해 보기로 하고 3차례(상,중,하)에 걸쳐 그의 인생역정을 알아본다. 그중 첫번째 특별대담을 여기에 소개한다.
[질문] 민족통신 대표겸 편집인으로 15년 활약해 오시고, 한국일보, 중앙일보, 코리안 스트리트 저널, 월간 뿌리, 라디오코리아 앵커, 크리스천헤랄드 편집국장 등 미국에서만도 40년 세월 지내시면서 아마도 수백, 수천여차례의 인터뷰를 해 오셨을 것입니다. 게다가 1973년 가을 한국서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3년가량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유학차 도미하여 택사스주립대학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까지 받으신 대원로 선배기자인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학오기전에는 연세대학교 영자신문 ‘The Yonsei Annals’ 편집국장을 역임하셨고, 미국신문 ‘The Pacific Stars & Stripes(성조지)’ 한국지국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으셨습니다. 그런분이 후배언론인으로부터 특별대담을 한다는 것이 생소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미동포사회, 해외동포사회는 물론 남과 북의 동포들도 궁금해 하는 점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번에 제가 국내외 모든 독자들을 대신하여 노길남 박사님의 70생신을 맞아 다 벗겨버리려고 마음먹고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해하여 주시고 질문 하나 하나에 간결하게 대답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두 따님들께서 70생신 모임을 마련했다고 들었는데 언제, 어디서 하는지 그리고 그 소감에 대해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답변]취재만 해 온 언론인이 특별대담에 대상이 되니 얼떨떨한 느낌도 듭니다. 그리고 제 두딸이 7순모임을 마련한다고 이야기 듣고도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이 30~40대인줄 착각하고 앞만 보고 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70이 된다는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이 현실이고 사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혼돈된 심정을 느낍니다. 70모임은 4월5일(토) 오후5시30분 로스엔젤레스 시내 용궁식당에서 한답니다.
[질문]노길남 박사님 생년월일과 출생지부터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정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답변]네, 1944년 4월3일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시기 황해도 해주에서 사시다가 1930년대 강릉으로 거처를 옮겨 강릉 시내 임당동에서 ‘형제양복점’을 운영하시다가 강릉의 외곽동네 초당이라는 곳에 사는 소작농의 딸 저의 어머니와 인연이 되어 결혼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제가 4살이되던 직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기억이 아련한 정도입니다. 제 형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는데 여동생은 코리아전쟁시기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 가족으로는 어머님과 남동생이 있는데 어머님을 미국에 초청하여 잠시 함께 살았는데 미국이 재미없다고 동생한테로 돌아가 사시다가 세상을 떠난지 오래되었습니다.
[질문]이번에는 사모님과 자녀들에게 대해서도 들려주시죠.
[답변]제처는 미국유학오기 1년전에 결혼하여 임신 6개월이 된 것을 보고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1973년에는 가족이 함께 외국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유학생이 학교에 등록하고 한학기 다녔다는 기록이나 증명이 있어야 6개월 후에 올수 있었던 시절이고, 유학도 그 당시에는 유학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유학이 가능했던 시절입니다. 제 큰애 진이는 제가 택사스주립대학 대학원 한학기를 마치던 시기인 1974년 여름에 제 처가 안고 미국에 왔고, 둘째 아이는 대학원 졸업하고 로스엔젤레스에 와서 미주한국일보 근무시절인 1977년에 태어나 2세로 자라왔습니다. 두딸이 이젠 어른이 되어 큰 애는 지금 두딸을 낳아 잘 기르고 있고, 작은 애도 아들을 낳아 잘 기르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부모들처럼 잘 해주지 못했는데 이 자식들이 커서 10년전 60생일때에는 자동차를 선물로 사주어 지금까지 잘타고 있습니다.
[질문]한국에서 대학나오고 급료를 많이 주는 좋은 직장에 있었다고 들었는데 왜 유학길을 택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재미동포가 되었는지요?
[답변]사실은 ‘도망성 유학’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20대 박정희 군사정권 시기에 우리세대는 깜깜할 정도로 답답하여 복통이 터질것 같은 시대였습니다. 긴급조치 몇호다 하여 다방이나 공공장소에서 박정희 비판도 못하고 아예 정치이야기를 할 때에는 좌우 앞뒤를 둘러보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망성 유학’길을 택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이 있는 동안 공부나 하고 돌아가자는 마음으로 미국에 왔는데 그 정권이 끝나지도 않았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할 경제사정도 되지 않고하여 졸업후 대학후배가 미주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는 바람에 로스엔젤레스 한국일보에 첫 직장을 갖고 생활하다가 6개월만에 영주권도 받고 그 이후 5년이 넘어 미국시민권으로 국적을 바꾸고 이른바 ‘재미동포’가 되었습니다.
[질문]그렇군요. 1973년에 유학을 와서 재미동포가 되었으면 미국생활도 금년으로 41년째가 되는군요. 제가 알기로는 그 세월동안 직업을 45번이나 바꾸었다고 들었는데 대개 어떤 분야에서 일했고, 그 배경을 좀 설명해 주실수 있겠어요?
[답변] 노동조건이 열악하여 직장을 바꾼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 운동때문에 불가피하게 직업을 바꿔야 했습니다. 대학시절 접시딲기, 주유소 펌프멘, 청소일 등으로 시작하여 미국신문사 윤전기 딱는 일, 미국식당에서 웨이터,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사직분으로 몇년을 일한적도 있고, 건축회사 현장감독, 월드북 백과사전 판매원과 매니저, 자동차 판매원, 청소년 옷장사, 커피숍 운영, 티셔츠 판매원, 통역과 번역일, 그림장사, 다단계 판매원, 묘지 소개업, 청소년 카운셀러, 아시아인 정신질환환자 카운셀러, 미연방정부 재난구조(FEMA) 간사격인 코이네이터 및 신문사와 방송 등에서 일해 왔습니다.
[질문]나는 목사이지만 노길남 박사께서는 기독교 학교인 대광고등교와 연세대학교를 나오신 분으로 교회 집사, 장로도 시무한줄 알고 있습니다. 종교관이나 교회활동에 관한 이야기도 좀 들려 주면 좋겠습니다.
[답변]나는 예수님의 33년 생애가운데 3년의 업적들이 신약에 반영되었는데 이것의 요점은 낮은 곳을 향하여, 고통받는자를 향하여, 애통하는 자를 향한 메시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럽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예수를 정의할때 “예수는 사회정의 운동이다(Jesus is the movement of social justice)”라고 풀이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기독교인, 크리스천 양심 때문에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동포교회에서 집사직을 하였고, 부부가 성가대에 참가하여 착실한 신앙생활도 한 경험이 있었고, 미국교회에서 장로직분을 갖고 활동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에 나가는 일은 졸업한 상태입니다. 종교관을 물으셨는데 저는 지금 초교파적인 입장을 갖고 있고, 초종교적인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 기독교, 민족종교, 지구상에 있는 수천개의 종교들 모두 존중합니다. 또한 어떤 종교든 믿는 사람들이나, 혹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모두 존중합니다. 종교나 철학 등과 관련한 것은 모두 그 시대, 그 문화의 산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질문]그런 입장이라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리고 부활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답변]목사님이시니깐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죽음이라는 것은 움직이지 않고 정체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삶은 또 유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죽음은 영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여기에서 죽음은 또 흙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흙은 두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생명들을 소생시키고, 그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죽은 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자를 가리켜 ‘부활’이라고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사회정치학적인 측면으로 볼때 부활은 정치생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한에서 부활한 정치인들이라면 김구, 여운형, 조봉암 등을 꼽을 수 있고, 최근세사에 와서는 6.15시대와 10.4평화번영 시대를 열어놓은 주역들 속에 포함된 남한의 김대중, 노무현 등을 부활한 정치인들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세월이 흘러도 후세들은 이들의 정신을 잊지않고 지속적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들도 부활하신 인물들로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관련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KNfJI5H4xF8
노길남 박사의 두딸이 디자인하여 만든 배너
4월5일(토) 이날 오후5시30분 올림픽 블러바드와 버몬에 있는 용궁식당 2층에서 생신연회가 열립니다.참석하실 분은 꼭 연락해 달라고 두 따님들이 신신당부합니다.
생신모임 주소: The Dragon Restaurant(용궁식당) 966 S. Vermont Ave Los Angeles, CA 90006
연락전화는 213-458-2245 혹은 minjoktongshin@gmail.com
----------------------------------------------------------------------------
편집실 14-03-28 13:56 답변
독자 및 지인들로부터 보내온 축하 편지를 들어 온 순서대로 소개합니다./민족통신 편집실
.........................................................
커내티커트 장호준 목사:
노길남 박사님.
칠순을 축하드립니다.
비록 몸은 참석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항상 박사님의 건강과 민족 통일 사업의 영광이 빛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축하드리며 통일의 그날까지 늘 건강 하시옵소서.
2014.3.16
장호준 올림
.....................................
김상일 전 한신대교수
한국에 나가는 기간이기에 못참석하여 죄송합니다
축하 합니다.
2014.3.16
.....................................
뉴욕 김수복 선생:
비록 몸은 못 가도 축하합니다. 더 건강해서 좋은 글로 즐거움 주시기 바랍니다, 나도 이틀에 한번씩 수영합니다. 허드슨 대동강 한강과 혹시 와싱턴 포토맥 강까지 금년에 수영해서 건너고 싶지요. 통일에 장애가 되면 수영해서라도 극복해보겠다는 뱃짱으로 합니다. 머리에 조국통일이라는 띠 동여매고 건널려고 합니다. 70생일 기념으로 하고 싶어서 건강관리 열심히 하고 있지요.
다시 한번 노박사 70세 생일 축하합니다.
2014.3.17
..........................................
박찬일 목사:
벌써 칠순이세요? 하긴 저도 어느새 50이 됐으니...
노 선생님과 알게 된 것도 얼추 벌써 30년이 되가네요.
축하드리며 통일의 그날까지 만수무강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럼 4월5일 뵙겠습니다.
2014.3.17
박사무엘 목사
.............................................
조만철 박사:
March 17,2014
ya
you right
he may not look it.
but i know
he sure feel younger.
you wanna bet?
Man Chul Cho, M.D.
.............................................
오인동 박사:
Welcome to the Seventies Club !
You have come to the age of golden time.
그런데 어쩌지요.
나는 4월1일부터 19일까지 전국순회강연회 여행 떠나요.
여기 있으면 이야 물론인데, 여하간 축하드립니다.
오 인동 드림
편집실 14-03-28 14:08 답변
노길남 박사님의 두 따님이 보낸 초청편지를 받고
지인들이 보내온 축하편지들을 이어서 소개합니다.
..............................................................................
이상훈 선생:
노선배님,
정말 놀랍습니다. 세월 앞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늘 젊다는 착각에서 살면서 어언 우리의 청춘이 갔습니다.
그러나 사진에 있는 청년 노길남은 아직도
열정적인 청춘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존경의 념을 보냅니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또 통일후 통일된 조국을 위해서 청년처럼 계속
열정을 다 하시기바랍니다.
건강하게 맞이하는 70순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2014.3.17
이 상훈 올림.
,,,,,,,,,,,,,,,,,,,,,,,,,,,,,,,,,,,,,,,,,,,,,,,,,,,,,,,,,,,,,,,,,,,,,,,,,,,
곽태환 교수(전 통일연구원 원장) :
칠순생신을 축하드립니다
2014.3.17
,,,,,,,,,,,,,,,,,,,,,,,,,,,,,,,,,,,,,,,,,,,,,,,,,,,,,,,,,,,,,,,,,,,,,,,,,,,,
북 유엔대표부 박철 참사:
존경하는 로길남박사선생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아직 여러 날이 남아있어 기다리고 있던중이였는데 두 따님이 마련한 생신축하모임이 있구만요.
참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술한잔 정히 부으며 생신을 축하합니다.
나이를 잊고 늘 사진에 있는 그 모습과 마음으로 계시기 바랍니다.
걸어오신 길도 결코 짧은 길도, 쉬운 길도 아니였지만 아직도 먼길을 걸어가시기 위해 잠간 신발끈을 조여매시는것으로 생신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젊으시고 정력에 넘치십니다.
가족들, 친지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2014.3.17
,,,,,,,,,,,,,,,,,,,,,,,,,,,,,,,,,,,,,,,,,,,,,,,,,,,,,,,,,,,,,,,,,,,,,,,,,,,
전기석 선생:
와우 벌써?
그렇게 안보이시는데…
우선 축하드립니다.
2014.3.17
,,,,,,,,,,,,,,,,,,,,,,,,,,,,,,,,,,,,,,,,,,,,,,,,,,,,,,,,,,,,,,,,,,,,,
박문재 박사:
축하합니다!
그러나 날 딸아오려면 10 년 더 살아야해요!!!
간강히, 심려말고, 맘 푸근히 먹고, 남이 뭐라 해도, 자기소신 지키고,
우리반도 잘 지키고 살면 그게 보람있는 인생입니다.
Again, HAPPY BIRTHDAY!
2014.3.17
박 문재 올림
,,,,,,,,,,,,,,,,,,,,,,,,,,,,,,,,,,,,,,,,,,,,,,,,,,,,,,,,,,,,,,,,,,
이미 접수된 축하편지들은 다음호에 계속 소개하겠습니다.
장민호 14-03-29 05:27 답변 삭제
온갖 편견과 역경을 딛고 민족 정론을 이끄시며 조국통일에 헌신하여 오신,
존경하는 노길남 선생님의 칠순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특별대담-2]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중)
최재영 민족통신 편집위원 / 2014/04/06 ⓒ 자주민보
▲ 민족통신 노길남 선생 ©자주민보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최재영 편집위원] 2014년 4월 초순이 되면 청년처럼 활동해 오던 민족통신 대표 겸 편집인은 칠순을 맞는다. 그리고 금년은 또 민족통신이 창간된지 15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가 된다. 그래서 민족통신 편집위원회는 이러한 시기를 맞아 재미동포 인터네트 언론, '민족통신'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노길남 박사, 그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70년 삶을 조명해 보기로 하고 3차례(상, 중, 하)에 걸쳐 그의 인생역정을 알아본다. 그중 두번째 특별대담(중)을 여기에 소개한다.
[특별대담]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중)
[질문]이번에는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과 관련하여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재미동포 언론인으로서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진영에 참여하시게 되었는지 우선 듣고 싶습니다.
[답변]사실은 고등학교 1학년때 고려대학생 영향으로 우리는 4.19가 일어나기 하루 전인 4.18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었고, 대학에 들어가서부터는 ‘한국문제연구회’ 서클활동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하면서 한일굴욕외교 저지규탄 시위에 참여하며 선배들과 시위도 조직하고, 선동선전 일꾼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공안당국에 쫒기는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대학2학년이었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대학을 마치지 못하고 1965년 말께 군대에 입대해서 복무기간을 마치고 학교에 다시 돌아와 보니 또다시 3선개헌 저지투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 때에 또다시 운동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대문경찰서, 남산의 중앙정보부 등에 연행되어 고초도 겪은바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1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3년이 지나 미국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 와서 고학하며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간신문에 있을 때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무관심 상태였습니다. 1979년 10월16일부터 20일까지 부마사태가 터졌고, 그 후 26일에 박정희가 오른팔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쓸어졌고, 그후 5개월만에 또다시 대형사건, 즉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습니다. 타임지, 뉴욕타임스, 로스엔젤레스 타임스, 헤럴드익재미너지 등 미언론들까지 대서특필로 광주항쟁을 보도했습니다. 그런시기에 카나다 맥길대학에서 제작한 광주항쟁의 이모저모를 기록영화로 보면서 청년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이 자기나라 군인들로부터 대학살을 당하는 역사를 바라보며 차마 맥놓고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제 양심이 그것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질문]한국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조국통일운동으로 전환한 것은 또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요?
[답변]박정희 군사독재반대, 전두환살인독재 반대운동, 다시말하면 한국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정치가 제대로 가지 못하고 퇴보하고 답보하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크게는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한국정치풍토에서 가장 걸림돌이 자주권 부재, 즉 주권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둘째는 분단기득권 세력과 외세가 밀착하여 분단을 영구화하려는 움직임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조금 쉽게 설명한다면 한국이 군사통수권도 스스로 행사하지 못하는 처지이며 주한미군이 한국 땅에서 우리 동포들을 살인해도 치외법권적 입장에서 감옥에도 가지 않고 웃으며 제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막힌 경우들을 많이 관찰하여 왔습니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 뿐만 아니고요. 그리고 주변국 일본과 미국같은 지배세력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긴장과 분단을 부추기며 자기 이익챙기기에 급급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관찰했고, 고찰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분단기득권 세력이 무기로 사용해 왔던 것이 이른바 ‘국가보안법’입니다. 한국의 양심세력을 무차별하게 탄압해 온 것이 이 악법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민간단체 범민련을 죽이려고 그리고 양심정치인들의 세력인 통합진보당을 죽이려는데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민주화운동과 조국통일운동은 선후가 없으며 동시적으로 결합하여 진행한다고 생각하여 왔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들에 참여하여 온 것입니다.
[질문]노길남 박사님의 발자취를 보면 1980년대에는 주로 한국민주화운동에 힘을 많이 기울였던 것 같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조국평화통일운동에 힘을 더 기울여 오셨던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잘 보셨습니다. 나는 1980년 광주항쟁을 통해 역사의 눈이 떴지만 한국민주화운동을 지원하면서도 해외동포로서는 조국의 평화통일운동에 그 지위와 역할이 훨씬 더 높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민주화운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국민들, 특히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양심적인 종교인, 양심적인 지식인, 민족적인 기업인들 등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우리 해외동포들은 지원역량 내지는 보조역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국평화통일운동은 우리 해외동포들이 남과 북과 함께 해외동포들도 당당한 한 주체가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 해외동포 3자연대운동의 기구로서 1990년 제1차 8.15범민족대회를 계기로 역사적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 탄생되었고, 그 이후 역사적인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2005년에 6.15민족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남측, 북측, 해외측에 각각 지역본부들이 조직되어 이른바 광범위한 남,북, 해외 3자연대 상설기구가 창립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나는 범민련 결성을 추진하는 준비위원으로 그리고 6.15해외측 위원회를 결성하는 준비위원의 한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왔던 것입니다.
[질문]그렇군요. 저는 이민온지 이제 10여년 역사로 길지 않기 때문에 해외운동의 흐름을 대충 이해하는 수준이지만 이번 대담을 통해 그 역사의 줄기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포사회 기성 언론들이나 한국의 보수족벌언론들은 해외동포 통일운동진영이나 한국의 통일운동진영을 가리켜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면서 폄훼하여 왔는데 그것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시나요?
[답변]그렇게 매도하지 않으면 분단기득권 세력과 이를 뒤에서 밀어주는 외세가 발붙일 공간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처음 한국민주화운동에 참여할 때에는 민주운동진영이라고 불리웠지요. 그 다음에 민주운동 진영을 반정부 세력, 그 다음에는 반국가 세력, 그 다음에는 친북세력, 그리고 요즘에 와서는 종북세력으로 매도하며 모략하고 있는 것이 애국세력에 대한 호칭 변화과정이었습니다. 그 호칭도 마지막까지 온것 같습니다. 종북 다음에 무슨 호칭을 또 만들어 왜곡할지 아마도 분단기득권 세력은 지금 아주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러한 호칭을 받아 온 사람들은 모두 애국세력이라고 보면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은 분단기득권 세력의 중상과 모략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질문]노길남 박사님은 일반 언론들에서는 흔히 ‘친북언론인’이라고 호칭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며 반응하십니까?
[답변]조,중,동은 물론 연합뉴스까지도 ‘민족통신’을 친북성향 언론, 그리고 나에게 대해서는 친북언론인이라고 칭하며 가끔 다른 언론기관들과 대담할 때 물어보는 기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그럴때, “ 아니요”라고 대답하지 하지 않고 “그렇습니다”라고 반응하면 상대편이 조금 당황하는 표정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당연히 아니라고 할텐데 그렇다고 선뜻 대답하니 기대에 어긋난 대답이라는 뜻이겠지요. 솔직히 말해 친북하지 않고 화해평화가 이뤄집니까? 그리고 북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친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너무나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질문]그러면 남측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답변]남측이 적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친남해야 되지요. 나는 남과 북을 하나의 조국으로 보는 남북관, 혹은 민족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이나 북을 딴나라로 보지 않습니다. 단지 남과 북을 적대화하려는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언론인들, 지식인들을 혐오하고 질타하는 것이지 남과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서로 평화를 만들어가면서 손을 잡고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세력이라면 그가 어느 계층이든 어느 직위에 있건 상관없이 모두가 한겨레, 한민족이 아니겠습니까. 언제, 무엇때문에 우리가 갈라져 살아야 했습니까? 그래서 조,동,중이 대표적으로 욕을 많이 얻어 먹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글만 쓰면 남북화해협력이 아니라 이간하고 분열시키려고 안간힘을 써 왔다는 사실들은 초등학교만 나와도 알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이런 반자주, 반민주, 반평화, 반통일세력을 미워하는 것이지 남북이 화목하게 잘 손잡고 평화통일을 이루자고 하는 세력이라면 무엇때문에 미워하고 분노하겠습니까?
[질문]노길남 박사님께서는 1980년 민중항쟁이 터지면서 전적으로 자주운동, 민주운동, 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해 오셨고, 이런 운동 때문에 40년 미국생활 중에 45차례나 직업을 바꿔야 했잖습니까? 그렇다면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도 많은 시련이 있었을 줄로 압니다. 그 중에 가장 가슴에 맺힌 일들이 있다면 한두가지 듣고 싶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듣고도 싶습니다.
[답변]한가지는 나의 처, 두딸과 한국에 있는 동생과 어머니에게 정말로 미안한 생각입니다. 지금은 홀로 계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지만 나의 가슴에 미안한 마음은 그대로 내 심장 한 구석에 남아 있습니다. 고백한다면 80년 광주항쟁이 터졌을 때 나는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이런데 마음 편하게 살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 다섯식구를 위해 한생을 사는가, 아니면 7천만 겨레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나의 작은 힘이라도 보태며 한 생을 사는가에 대해 한때 무척 고심했습니다. 결국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 결심이후 지금까지 30여년의 세월을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해 앞만보고 뛰어 온 것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지난 시기 많은 시련들이 있었지만 우리민족의 역사가 너무나 기구하였기 때문에 그 같은 시련은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코리안이라면 그가 어디에 살든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해 힘쓰겠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결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결심때문에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은 아직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질문]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든것이 34년째가 되었고, 노길남 박사님께서 직접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신 기간도 무려 27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민족통신의 전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민족연구회’가 12년, ‘민족통신’이 창간된지 올해로 15주년이 되잖습니까? 많은 일들을 해 온 이 두조직을 설명해 주시고 2014년 주요 계획들이 있으면 소개해 주면 좋겠습니다.
[답변]우선 함께 일하다가 먼저 세상을 떠난 유상준 동지와 지금도 27년째 함께 일하고 있는 손세영 동지와 이정호 동지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면서도 ‘한민족’연구회’를 운영할때 재정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많이 지원해 주었던 애국자들입니다. ‘한민족연구회’는 동포중산층 인사들 33명으로 구성하고 실행위원 7명이 1987년 11월11일 발족한 단체인데 이 조직을 만들어 한 일들은 동포사회여론조사, 민족상을 제정하여 통일운동 진영에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는 단체, 인물들을 발굴하여 시상하고, 민족장학생들을 선발하여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지원해 주는 사업들을 운영해 오면서 다른단체들과 연합하여 자주, 민주, 통일의 목소리에 한 목소리를 실어주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12년째 되던 1999년 봄 ‘한민족연구회’를 해체하고, 같은 해에 인터네트 언론, ‘민족통신’을 창간하여 해외동포 통일운동진영의 매체로서 그 지위와 역할을 해 왔습니다. 또한 미국주류사회 평화운동단체들과도 밀접한 연대운동을 벌이는데 한몫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가능하게 한것은 미국의 동부지역, 중부지역, 서부지역, 카나다 지역 등에 후원자들 120명 가량이 헌금하여 주어 지금까지 운영할 수 있었고, 운영위원들과 편집위원들이 월정헌금을 내면서 함께 일해 왔습니다. 돌이켜 보면 ‘민족통신’은 역사에 유례없는 언론매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적같이 느껴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주, 민주, 통일운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니라 많은 분들이 애국헌금으로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지금까지 ‘한민족연구회’와 ‘민족통신’을 사랑해 주시고 지원해 주셨던 여러분에게 심심한 사의를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금년으로 창간15주년이 되는 오는 11월에 뜻깊은 창간기념 행사도 구상중에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관련 동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lp-tEscDIGY
https://www.youtube.com/watch?v=KNfJI5H4xF8
▲ 노길남 선생 © 자주민보
----------------------------------------------------------------------------
편집실 14-03-30 10:23 답변
해내외 동포들이 민족통신 편집실로 보내온 축하메시지를 아래에 소개합니다.(무순)
뉴욕 리준무 우륵교향악단 단장겸 지휘자:
노길남박사의
70회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 다니던 노길남박사가 70을 맞이하신다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세월이 빠른건지 아니면 70을 향해 전진하던 노박사의 걸음이 빠른건지…
언젠가 평양룡악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선물관을 참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들이 정성을 들여 증정한 수천 점의 귀중한 선물들이 정중하게 전시되어 있는 보고가 아니겠습니까? 전시관의 한쪽에는 박근혜 남한대통령이 김정일국방위원장에게 증정한 보석함도 전시되어 있지요.
그런데 선물관의 중앙에 전시된 예술품 한 점이 유난히 눈에 안겨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정성품이 전시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관람자들은 벌써 알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민족통신이 증정한 선물의 가치가 높은 이유도 있겠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그보다는 민족통신의 높은 위상을 인식하고 있는 듯 하였습니다.
북부조국민중이 남과 북으로 나눠져 있고 천지사방에 흩어져 사는 우리민족에게 참다운 언론의 횃불역할을 하고 있는 민족통신과 노길남박사의 업적과 노고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을 표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족통신은 이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을 위한 중요한 진보 언론으로 우뚝서 있습니다. 진보 언론하면 민족통신이고 민족통신하면 자기의 한생을 깡그리 바쳐 세계제일의 민족신문으로 성장시켜놓은 노길남편집인의 업적을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펄펄넘치는 청춘의 기백으로 뛰고 있는 노길남박사의 애국활동에서 더욱 빛나는 성과가 있기를 기대하며 온 민족의 사랑 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민족통신이 더욱 번창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축하의 인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뉴저지에 살고 있는 민족통신 필진의 한사람
리준무드림
2014년 3월 18일
.............................................................
카나다 김신규 선생:
생일(고희) 축하드림니다
저는 밴쿠버에 살고 있어 아쉽습니다. L/A에 있으면 좋은 기회인데…
4월 방북때 평양에서 다시뵙겠습니다.
다시한번 고희 축하드림니다
2014.3.18
………………………………………………………………………
정태일/신은미 선생부부:
노길남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정태일, 신은미 부부입니다.
칠순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오나 저희 부부는 4월 1일 부터 4월 18일 까지 6.15남측 본부의 초청으로 전국 순회강연차 한국에 가게 되어 참석치 못함을 말씀드립니다.
다시 한 번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2014.3.18
정태일, 신은미 드림
………………………………………………………………………..
강은홍 목사:
생일축하합니다. 특히 두 따님들이 아빠의 70생신을 마련하여 친지들을 초대하는 초대장을 받고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렀다고 생각합니다. 두따님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누가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60 줄은 초로(初老), 70 줄은 중로(中老)라 하고
80 줄은 대로(大老)라 하여 어르신 대접을 한다.
인생은 70부터 !
이건 꿈이 아니고 현실이다.
연장전 20년 !
이것도 꿈이 아닌 과학적인 귀결이다.”
몸 건강과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크신축복이 함께 하시기 빕니다. 2014.3.18
강은홍 목사".
………………………………………………
한국의 안영민 민족21기자:
선생님 70회 생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건필하십시오.
나중에 뵙고 회포 풀 날이 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제아들, 인산이도 미국 할아버지께 인사 전합니다.^^
2014.3.18
…………………………………………………………………………
마이클 장:
존경하는 노길남 선생님의 칠순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나이를 잊으신 열정에
젊은 형님 깉아서
칠순 생신이 실감나진 않지만
그리고 부족한 제게 베풀어 주신
배려, 잊지 않겠습니다.
2014.3.18
…………………………………………………………………
서울의 김승국 선생(평화네트워크 운영):
축하합니다.
노길남 선생의 7순잔치에
참석하지 못하여 아쉽습니다.
서울에서 김승국 보냄
…………………………………………………………..
일본 한통련 여성회 김지영 회장:
노길남 선생님 안녕하세요.
벌써 70세 생신이라니,,,.정말 놀랐습니다. 세월의 빠름을 느낍니다.
축하모임을 마련하는 딸들의 마음이 너무 예쁘네요.
직접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한마디 축하 메시지 보냅니다.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4.3.19
김지영 드림
………………………………………………………..
일본 한통련 손형근 의장:
노길남 선생 앞
노길남 선생님의 70세 생신을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오랫동안 노 선생이 한통련에 대해 따뜻한 우정을 가져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몸과 마음이 젊으신 노 선생의 앞으로의 활약과 건승을 빕니다.
2014년 3월20일
일본 도쿄
한통련 손형근
……………………………………………………………………………
일본 민족시보:
자주 민주 통일운동의 오랜 동지인 노길남 선생님의 70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넘치는 젊음과 열정으로 조국통일운동에 앞장서서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앞으로도 조국통일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선생님의 변함없는 활약과 건필을 기대합니다.
2014년 3월 20일
일본 도쿄
민족시보 동지들
………………………………………………………………………..
서울 자주민보 이정섭 대표:
노길남 대표님,
우선 고희를 축하드립니다.
고희의 연세에도 정력적으로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시는 것을 보며 머리가 아려집니다.
사실은 꼭 찿아뵙고 싶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함을 너그럽게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족의 행복을 기원드리겠습니다.
2014년 3월21일
…………………………………………………..
***이미 접수된 축하편지들은 다음에 계속하여 여기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민족통신 편집실
피터 김 14-04-01 01:14 답변 삭제
노 박사님,
한평생을 한길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서 싸워오셨던 노박사님의 칠순을 존경을 담아 축하드립니다.
70이면 거북이는 소년시대를 선인장은 사춘기를 지난다고합니다.
노박사님의 70은 이제 막 남보다 빠른 출발을한 기록을 향해 달려가는 육상선수입니다.
여행중이라 귀중한 자리를 참석못함을 대단히 아쉽게 생각합니다.
김태정 14-04-03 16:42 답변 삭제
조국통일을 위해 먼길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동분서주하시며 귀중한 뉴스와 자료들을 전달해 주시는 친애하는 노길남 박사님의 칠순생신을 충심으로 축하합니다.
위에 무등을 타고 있는 [사진] 제1차 범민족대회 거리행진 모습이 북녘 등대잡지 표지사진에 나(김태정)와 함께 젊은 얼굴사진이 실려 있네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런데 어느듯 노박사님은 칠순을 맞이하고 나는 병석에 누운 쭈굴쭈굴 83세의 노인이 되었군요 통일은 여전히 요원한데 세월의 무상함이 새삼 느껴집니다.
모쪼록 더욱 건강하시고 통일 됀 조국에서 보람찬 나날을 보내며 만수무강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박사님이 늘 아껴주시는 봄호수 드림
[특별대담-3]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하)
최재영 민족통신 편집위원 / 2014/04/06 ⓒ 자주민보
종합편집본 노길남 기자 70년 회고
▲ [사진]손주들도 무척 사랑하는 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 자주민보
[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최재영 편집위원] 2014년4월 초순이 되면 청년처럼 활동해 오던 민족통신 대표 겸 편집인은 칠순을 맞는다. 그리고 금년은 또 민족통신이 창간된지15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가 된다. 그래서 민족통신 편집위원회는 이러한 시기를 맞아 재미동포 인터네트 언론, '민족통신'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노길남 박사, 그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70년 삶을 조명해 보기로 하고3차례(상, 중, 하)에 걸쳐 그의 인생역정을 알아본다. 그중 세번째 특별대담(하)을 마지막으로 여기에 소개한다.
▲ [사진]노길남 민족통신 대표와 특별대담하는 최재영 편집위원(목사) © 자주민보
[특별대담]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하)
[질문]1990년 8.15범민족대회를 준비하는 위원중 한사람으로 그리고 6.15민족공동위원회 조직결성을 위해 활약하면서 첫 방북을 한 이래 금년 2월 60번째 방북취재를 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취재보도 자료때문에 남녘과 해외동포사회가 민족통신을 보는 독자들이 블러그(blog)를 통해, 트위터(twitter)나 페이스북(facebook) 등의 사회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120만 독자들을 유치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북부조국 바로알기운동’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기뻤던 일,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답변]한민족연구회 12년과 민족통신 15년을 돌아보면 꿈만 같이 생각됩니다. 돌이켜 보면 저를 이해해 주는 주변의 동조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동조자 혹은 동지를 얻게 되는 것이 가장 기뻤던 것으로 생각되고, 가장 안타까웠던 일들이라면 같은 지향으로 가는 재미동포사회의 민족민주운동 진영 내부의 불협화음입니다. 왜 서로 포용하며 껴안아 주면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소통하며 두손 꼭 잡고 가지 못할까? 이 문제는 재미동포사회나 남녘사회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질문]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대목으로 생각됩니다. 그 수수께를 풀수 있는 방법들은 없을까요?
[답변]그 수수께끼는 양자 중 한쪽만 준비되어 있어도 다른쪽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자기 나름대로, 혹은 자기조직 나름대로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대중으로부터 검증받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재미동포사회 민민진영 내부간의 불협화음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는데서 비롯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의 심리학 학자인 죠하리가 창안해 낸 ‘창문이론(Johari Window Theory)’이 생각납니다. 사람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의식구조 속에는 4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상식부분(Open or Arena)이 있고,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는 부분(Hidden or Façade Part)도 있고, 나는 모르는데 너는 아는부분(Blind Spot)이 있고, 그리고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부분(Unknown Part)도 있다고 합니다. 소통과 대화가 없으면 이 네가지 부분중 어느 영역에 속하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해’가 발생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오해가 오해인가 사실인가를 풀어야 하는 과학적 검증자세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실확인 없이 타방을 중상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우들이 일반적 사람관계에서도 많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무서운 병입니다. 오해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있지만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미동포사회 민민진영 가운데 사람사업을 위하여 조직내부에서 자기총화, 상호총화를 실시하는 단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또한 평가는 객관에서 찾고, 오류는 주관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지도자들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남의 탓만 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공통적 문제로 되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말하면 민민진영이 일심단결되어 있는가 아닌가의 현상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 재미동포사회 운동의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수준을 높여가면 그 수수께끼는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제 좀 가벼운 질문을 드려 볼까요? 좋아하는 취미와 음식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답변]사실 저는 자주,민주, 통일운동에 참여하기 전에는 다양한 취미를 가졌습니다. 축구, 탁구, 승마, 골프, 스키, 고전음악감상, 독서, 시쓰기, 여흥오락, 사람만나 대화하기 등 다양한 취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취미는 인터네트 자료읽기와 고전음악과 우리민족음악 감상하기, 주말 등산가기, 그리고 민족통신 성원들과 사람들 방문하여 서로 대화나누기이고, 음식은 우리민족 음식을 비롯 중국, 일본, 타이, 유럽 음식 등 다 좋아합니다.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소화하고, 그리고 잘 자고 합니다.
[질문]해외동포 언론인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해외동포 통일운동 지도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노길남 박사님의 활동은 때가 묻지 않고 아주 순수하고, 그리고 대단히 헌신적이고 활동적입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 유럽 등으로 동분서주하셨고, 이 넓은 땅 미국에서도 샌후란시스코, 시애틀, 시카고,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워싱턴 디씨 등…그 뿐인가요. 자동차로 두번씩이나 카나다 뱅쿠버까지 왕복 3천여 마일을 40여시간 운전하고 올라갔다 오시며 방북보고회 등을 하는 등 정말 그 정열에 놀랐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요?
[답변] 글쎄요. 나는 그 힘이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역사의식은 단순히 역사책을 읽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독서와 함께 학습, 그리고 구체적 실천과정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질문]노길남 박사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7순되는 나이에 해당하는 어른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답변]글쎄요. 젊게 생각하고, 젊은이처럼 일하고, 젊은이들과 주로 대화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통일문제를 놓고 대화하면 밤을 새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돈버는 이야기, 좋은 집이나 좋은 자동차를 사는 이야기 등이 대화의 주제가 되면 졸리곤 하였습니다. 내 경우에는 자주, 민주, 통일운동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새벽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합니다. 나도 왜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질문]민족통신은 1년 365일 거의 쉴날이 없으신데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언제 보아도 민족통신 작업을 할 때는 피곤을 모르신것 같아서…? 그리고 민족언론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웹사이트 해킹도 많이 한걸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도 한말씀 부탁합니다.
[답변] 나는 ‘민족통신’과 결혼한 것 같습니다. 앉으나 서나 그저 ‘민족통신’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벽 서너시까지 일한적이 수두룩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꼬박 밤을 새울때도 있었고요. 창간이래 인터네트 테러리스트들로부터 핵킹(공격)도 수십번 받았지요. 극우세력들로부터 시달린적도 수백번도 넘습니다. 아주 악질들은 재판을 통해 단단히 혼내 주기도 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받아내기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질문]실제로는 4월3일이 생신이지만 이제 4월5일이 되면 두 따님이 7순잔치를 마련한다고 하는데 앞으로 민족통신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답변] 바로 이문제가 나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금년 한해에 후비를 꾸리고 이들이 앞장서 해 나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언론생활 마지막 과제이며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족통신 허리가 되는 후비꾸리기에 노력하고 있으나 기대와 생각처럼 순조롭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 내야하는 의지를 갖고 동분서주할 생각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재미통일운동진영, 해외통일운동진영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질문]그 바쁜 중에도 ‘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사’를 포함하여 비핵화 문제 도서 등 저서와 논문들도 여러개 되는 줄 압니다. 조만간에도 두권의 도서를 출판하는 것으로 듣고 있는데 어떤 책들을 출판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우선 5백여 페지가 되는 ‘미주동포민족운동 100년사’는 제가 편집과 기획을 하고 논문도 썼지만 이 도서는 저의 논문과 선우학원박사님 논문, 윤길상 목사님 논문을 담은 공동출판 도서(2009년 12월15일 일월서각 출판)입니다. 나는 또 금년 4월 중순께 그 동안 쓴 방북기들을 중심으로 한권의 도서가 출판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고, 그리고 이어서 지난 10여간 쓴 논평들을 주제별로 나눠 또 한권의 도서출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도서들이 나오면 즉시 요점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그동안 취재한 인물들을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할 계획도 있지요. 그리고 내 인생을 총화하는 의미에서 ‘나의 삶, 나의 꿈’을 마지막 출판도서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남녘의 정서를 고려하여 생략합니다.)
*관련 동영상 보기:
특별대담-1 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othernews&wr_id=4927
특별대담-2 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othernews&wr_id=4933
특별대담-3 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othernews&wr_id=4936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KNfJI5H4xF8
https://www.youtube.com/watch?v=lp-tEscDIGY
-----------------------------------------------------------------------------
이밖에 노길남 박사님에게 축하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Ken Lau/서울 김봉국/서울 김민아/양주시 배용석/수원시 서상용/서울 김경희/고양시 황이수/서울 방철영/서울 최동규/서울 최교진/Teresfa Villgas/미국 이 다빗/서울 조병연/Qurie Lin/온 종합병원 임직원 일동/미국 윤상경/서울 김홍곤/독일의 원효탄/미국 전경배/한국의 조응진/한국 홍성규/한국의 권봉수/한국의 유병서/일본의 김용주 등이 4월2일 축하해 주었습니다.
4월3일에 온 축하메시지는 전남연, 티모티 최, Lucia Zao, Millie Kim, 한용현, Aw Flores, John Lee, 한상호, John X Choe, 남장우, Tong Shin Rafati, Sabina Ha, Gordon Copeland, Mark Keam, Cate Park, Larry Shinagawa 등입니다.
(직접 축하메시지를 보내실 분은 아래 댓글로 직접해 주시만 고맙겠습니다.-민족통신 편집실)
*지난 특별대담 연재때에도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의 70생신을 맞아 보내준 국내외 여러분의 축하인사들을 소개해 드렸는데 이번에도 그 이후 들어온 축하편지 및 축하메시지들을 아래에 소개합니다.-편집실
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선우학원 박사
친애하는 노길남 박사 앞
해외에서지난 15년간 민족통신을 출판하여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 운동에 많은 공헌을 한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족통신'은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 미디아(언론)의 허와 진실을 혼돈하여 보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며 편견없이 사변과 사건을 해설하여 국내외 독자들에게 바른 인식을 가지게 했습니다.
특히북조선에대한방북취재보도들은북의인민생활과그들의현실을있는그대로알려주는데지대한역할을하여왔습니다. 그리하여독자들은민족통신의진실보도들을 접하며 강한 인상을 받아 왔습니다.
이제 70세를 맞이 하면서 몸 건강에 유의하시여 '민족통신'의 역사적 사명을 오래 오래 계속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평화와이웃사랑을믿는사람,
선우코리아평화재단
선우학원드림
(이 편지는 오늘 2014년 4월2일 우편으로 금일봉과 함께 민족통신 편집실에 도착했습니다.)
......................................................................................
스웨덴의 림원섭 선생:
노길남박사님의
생일을진심으로축하합니다.
2014.3.21
다물흙드림
(*림원섭선생은카드에축하문을써서국제우편물로도 축하인사를 보내주었습니다.)
………………………………………………………..
필라델피아 장광선 선생(민족통신 편집위원):
노길남선생님의 칠순을 축하합니다.
선생님이 민족자주 평화 통일의 한길에 찍은 발자욱이 통일조국 역사에 길이 빛나리라 믿습니다.
후배들에게 본을 보이시는 노익장을 과시하시며 더욱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한 장수 누리시기 빕니다.
2014.3.21
……………………………………………………….
김필주 박사(평양과기대 부총장):
노길남 박사님 고희를 축하합니다.
저는3월29일부터는
평양과기대에 가 있을 예정입니다.
생신파티에못 참석하여 죄송합니다.
축복 받으세요.
김 필주 드림
2014.3.21
……………………………………………………….
덴마크 임민식 선생(범민련해외본부 의장):
노길남 박사 70청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세월이 돌고 돌아 70청춘을 맞이하시는 노 박사님을 이제 안도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선 먹기 싫은 나이도 잡수셨으니 싫어도 어른 대접을 받으셔야조.
그동안 민족운동에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갈 길을 찾으신 70 청춘의 노 박사님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관계가 결정적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기서 진리를 찾았으며, 하여 모든 일을 사람과의사업에 첫 자리에 놓으려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진리는 노 박사를 알면서 배운 진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따르기 마련이며 또 사실 따랐습니다. 문제를 찾아내는데 일정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서 자기의 지향하는 목표가 뚜렷하지 못하면 곡절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발상은 결국 둘 다 놓친다는진리입니다.
이제 더 더욱 나이 들 시간이 없을 테니 자기의 목표가 뚜렷해지신 노 박사님께서 언론을 통해 이론과 실천의 행동으로 민족운동의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변치 말고 계속하시기 위해 노익장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를 통해 우리가 만나 함께 했던 먼저 가신 선배님들에게 관심을 두시기 바라며, 부인과 두 따님에게 존경의 인사를 전합니다.
2014년 3월 22일
덴마크에서
임민식 드림.
…………………………………………………………
보스턴 박기식 선생(재미동포전국연합회고문):
노길남 박사의 7순 생신을 축하합니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점입가경(漸入街境)은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되는 것을 뜻하게 됐지요. 이걸 줄여서 가경(街境)이라고도 하잖습니까. 70 고희는 완숙단계에
들어가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새로운 시발점에서 더 많은 일들을 전개해
주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70생신을 축하합니다.
3월29일
보스턴 박기식
…………………………………………………………………..
서울 최지윤:
선생님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합니다.
2014.3.29
…………………………………………………………………….
뉴욕의 이종천 선생(우리여행사 대표)
노길남 대표님의 70생신 축하합니다.
그리고 민족통신 창간 15주년이 되는 해군요.
어려운 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걸어오셨습니다.
건강을 빌며
민족통신의 발전을 아울러 간절히 바랍니다.
2014.3.29
…………………………………………………………………………………
프랑스의 이희세 선생(6.15유럽지역위원회 전회장):
노길남박사님,
70고개를 자랑스럽게 걸어 오는 5일에 칠순잔치를 하신다는데
참가하여 축배를 나누지못함을 안타까히 여기며
정성을 담은 축하의 인사를 이렇게 보내드림을 용서 해 주십시요.
행복한 가정과 함께 장수무강하십시요.
2014년 3월 29일
프랑스 시골에서 이 희 세 드림
………………………………………………………………………..
독일의 리준식 선생(범민련 유럽지역본부 의장):
축시
청춘 노길남!
(기쁜 날을 맞이하는 모든 가족 분들과 기쁜 자리를 더욱 기쁘게 해 주시는 하객 모든 분들께 보냅니다.)
약방의감초당신의칠순을축하합니다
당신이살아온생혼자만의삶을넘어서는
우리 시대의 아픔 광야에서
온 몸을 태워 어둠을 밝혀온 펜
손으로쓴글이아니라눈물로쓴진실
자유의날개민주의불사조로솟아
세상 하늘로 날아오른 세월
자유인의이름은사라지지않는다
정의를목숨처럼사랑하는자
청춘 노길남!
늘 푸른 나무에 나이테는 없어라
2014.3.29
……………………………………………
시애틀 강창중 선생:
평생을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하여 살아오신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 (Kilnam Roh)박사님이 칠순을 맞이하였습니다.
특히 평화적인 통일을 말하고 통일을 위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이 드문데다 남한과 해외 민중의 통일에 대한 꿈마저 시들어진 지금 민족통신을 통하여 지치지 않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운동을 해오신 노길남 박사님께 후배로서 깊은 감사와 찬사를 보냅니다.
부디 더욱 건강하셔서 통일의 그날을 맞아 남북한과 해외 온 민족이 함께 얼싸안고 춤추게 되는 그날까지 통일운동을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노길남 박사님의 통일을 위하여 뿌린 씨앗은 꼭 귀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번 로스앤젤스의 칠순잔치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래 유투브에 노길남 박사님 일생의 사진과 후반부 동영상을 보고서 퍽 인상 깊었습니다. (페이스 북에 이동영상을 소개)
https://www.youtube.com/watch?v=KNfJI5H4xF8
2014년 3월31일
………………………………………………………………………………
독일의 이종현 선생(유럽연대 고문, 민중연대 고문):
7순은 축하합니다.
함께 하지 못하는마음 무척 아쉬운 심정입니다.
노길남 선생하면 3가지 떠오릅니다.
하나는 1990년 제1차범민족대회를준비하기 위해 서울에함께 들어갔었지요. 그 때 정열적으로 활동한 모습이잊혀지지 않습니다.
둘째는 2000년대 초반에 독일후랑크프르트에 방문했을 때운동의 단결과 단합을위해 노력하던 그 모습입니다.
셋째는 2007년 6월 남, 북, 해외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6.15민족공동행사를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벌일때 그당시 한나라당 박계동의원과 동행한 3명의남측 국회의원들이 우리 행사를방해할 때 수천만해내외 동포들이 하루종일행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8시간이나기다려야 하는 그어려운 순간에 마이크도없이 연단에 나와 해외동포들각 지역의 참가자들을 연단에불러내어 즉흥 민족대단결행사를 조직하여 훌륭하게진행하던 그 모습과용감성에 놀람을 금치못했습니다.
아모쪼록 앞으로도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이해 한층더 노력해 주기 바라며
건강을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위해 7순을 마련해 준 훌륭한두따님께 감사의 마음을
아울러 전합니다.
2014.3.31
(이종현 선생님은 국제전화로도축하의 말을 전했습니다.)
…………………………………………………….
일본의 박용 상임부위원장(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 박사님께
존경하는 노길남 박사님께서 생신 70돌을 맞이한데 대해 저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되는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노길남 박사님은 지난 한 생을 오로지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위해 헌신해 오신 해외운동의 저명한 인사이며 해외운동의 유력한 언론기관인 민족통신의 강화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오신 통일원로이십니다.
원래 생신 70돌을 진갑, 고희(古希)라고 하는데 옛날에 인생 50이라고 할 때 70세까지 오래 사는 것은 매우 드물다고 하여 고희라고 하였습니다.
고희를 지내시면 희수(喜壽)까지 건강하시며, 77세인 희수를 지내시면 팔갑, 산수(傘壽)까지 사셔야 하며 팔갑을 넘기시면 미수(米壽)를 바라보시고 백수(白壽), 황수(皇壽)까지 오래 오래 사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통일위업 성취를 위해 계속 분투하시고 통일된 조국강토에서 행복의 여생을 값 있게 지내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노길남 박사님의 생신 70돌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2014년 4월5일
*독일의 이지숙 박사(6.15유럽지역위원회 위원장):
존경하는 노길남 박사님,
벌써 70세이시라니 !
믿어지지 않는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날마나 제일 먼저 열어보는 민족통신 !
감사드립니다.
먼 훗날, 20년후에도 ,
우리들의 눈, 귀, 입을 대신해주시라 믿으며,
직첩 참석하지 못한것 죄송합니다.
독일에서 큰 꽃다발 보냅니다.
이지숙
김익환 14-04-03 14:05 답변 삭제
생일 축하드리며
늘 강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준수 14-04-03 14:09 답변 삭제
서준수 축하올리고 민족얼 동영상 선물로 띄우렵니다. 건안하소서 ...나무아무타불 관세음보살
http://youtu.be/ogslckxTn7E
자유시민 14-04-03 14:14 답변 삭제
노길남 대표 위에 인터뷰서 이렇게 마지막 대답해쑈죠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주석=김정일 국방위원장=김정은 제1위원장은 똑 같이 위대한 영도자라는 것이 저의 숨김없는 소감입니다. 그리고 북부조국(조선)의 미래전망은 최근 방북취재기를 쓰면서 이미 언급했지만 “조선의 미래는 밝고 창창하다”고 전망합니다."""
한국지식층 대개 망할꺼라 하는데 ....
이거 대해 답변 부탁해도 해줄꺼요?
않하며 거짓으로 보겠쏘
나그네 14-04-03 14:19 답변 삭제
ㅋㅋㅋ 재뿌리당가?
편집실 14-04-03 22:46 답변
자유시민님에게,
노 대표님의 대답을 받기 전에 먼저 그의 58번째, 59번째, 60번째 방북기를 차분히 그리고 편견없는 마음으로
읽어보신 다음에 다시 질문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방북기들은 북을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이 될걸로
생각되어 제안드리오니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편집실=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5915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4635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editorial&wr_id=866
KATHY LEE 14-04-04 11:40 답변 삭제
HAPPY BIRTHDAY MR. KEN ROH~
AND HOPE YOUR DREAM-ONE KOREA WILL BE REALIZED SOON.
ONE KOREA-YES, TWO KOREAS-NO
편집실 14-04-04 20:38 답변
민족통신 편집실서 알립니다.
오늘 4월3일 일본에서 제작하는 월간 '통일평론'(최석룡 발행인)에서 아름다운 꽃들을 듬뿍 담은
꽃바구니를 노길남 대표의 7순축하 카드와 함께 민족통신 사무실로 보내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통일평론은 민족통신이 제정한 제1회 민족언론상 수상단체입니다. 민족언론상 개인수상자는
한겨레신문 당시 박해전기자였습니다. 이들 수상자들은 모두 가족들을 대동하고 수상식에 참여하여
뜨거운 통일분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습니다.-편집실)
최상균 14-04-05 15:25 답변 삭제
선배님 더욱 건강하시고
보람넘치시기 바랍니다.
만주에서 상균 드림
최상균 14-04-05 15:27 답변 삭제
노길남 박사님, 고희 생신을 축하합니다.
선배님 더욱 건강하시고
보람넘치시기 바랍니다.
만주에서 상균 드림
민경석 14-04-05 15:29 답변 삭제
노박사님,
초청해주셔서 고맙고, 좋은 따님들 두신 것,
무엇보다도 노박사님의 70회 생신을 축하드림니다.
앞으로도 통일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실 수 있도록 건강하시기 바람니다.
죄송스럽게도 갑작스럽게 꼭 가야야 할 학교행사가 있어서
축햐연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경석 드림[로스엔젤레스=민족통신 최재영 편집위원] 2014년4월 초순이 되면 청년처럼 활동해 오던 민족통신 대표 겸 편집인은 칠순을 맞는다. 그리고 금년은 또 민족통신이 창간된지15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가 된다. 그래서 민족통신 편집위원회는 이러한 시기를 맞아 재미동포 인터네트 언론, '민족통신'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노길남 박사, 그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70년 삶을 조명해 보기로 하고3차례(상, 중, 하)에 걸쳐 그의 인생역정을 알아본다. 그중 세번째 특별대담(하)을 마지막으로 여기에 소개한다.
rohandchoi01.jpg
[사진]노길남 민족통신 대표와 특별대담하는 최재영 편집위원(목사)
[특별대담]노길남 민족통신 대표, 그는 누구인가(하)
[질문]1990년 8.15범민족대회를 준비하는 위원중 한사람으로 그리고 6.15민족공동위원회 조직결성을 위해 활약하면서 첫 방북을 한 이래 금년 2월 60번째 방북취재를 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취재보도 자료때문에 남녘과 해외동포사회가 민족통신을 보는 독자들이 블러그(blog)를 통해, 트위터(twitter)나 페이스북(facebook) 등의 사회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120만 독자들을 유치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북부조국 바로알기운동’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기뻤던 일,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답변]한민족연구회 12년과 민족통신 15년을 돌아보면 꿈만 같이 생각됩니다. 돌이켜 보면 저를 이해해 주는 주변의 동조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동조자 혹은 동지를 얻게 되는 것이 가장 기뻤던 것으로 생각되고, 가장 안타까웠던 일들이라면 같은 지향으로 가는 재미동포사회의 민족민주운동 진영 내부의 불협화음입니다. 왜 서로 포용하며 껴안아 주면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소통하며 두손 꼭 잡고 가지 못할까? 이 문제는 재미동포사회나 남녘사회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질문]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대목으로 생각됩니다. 그 수수께를 풀수 있는 방법들은 없을까요?
[답변]그 수수께끼는 양자 중 한쪽만 준비되어 있어도 다른쪽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자기 나름대로, 혹은 자기조직 나름대로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대중으로부터 검증받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재미동포사회 민민진영 내부간의 불협화음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는데서 비롯되는 경우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의 심리학 학자인 죠하리가 창안해 낸 ‘창문이론(Johari Window Theory)’이 생각납니다. 사람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의식구조 속에는 4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상식부분(Open or Arena)이 있고,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는 부분(Hidden or Façade Part)도 있고, 나는 모르는데 너는 아는부분(Blind Spot)이 있고, 그리고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부분(Unknown Part)도 있다고 합니다. 소통과 대화가 없으면 이 네가지 부분중 어느 영역에 속하게 되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해’가 발생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오해가 오해인가 사실인가를 풀어야 하는 과학적 검증자세도 대단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사실확인 없이 타방을 중상하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경우들이 일반적 사람관계에서도 많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무서운 병입니다. 오해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있지만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미동포사회 민민진영 가운데 사람사업을 위하여 조직내부에서 자기총화, 상호총화를 실시하는 단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또한 평가는 객관에서 찾고, 오류는 주관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지도자들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남의 탓만 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공통적 문제로 되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민족민주운동 진영에서도 예외가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말하면 민민진영이 일심단결되어 있는가 아닌가의 현상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 재미동포사회 운동의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수준을 높여가면 그 수수께끼는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이제 좀 가벼운 질문을 드려 볼까요? 좋아하는 취미와 음식이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답변]사실 저는 자주,민주, 통일운동에 참여하기 전에는 다양한 취미를 가졌습니다. 축구, 탁구, 승마, 골프, 스키, 고전음악감상, 독서, 시쓰기, 여흥오락, 사람만나 대화하기 등 다양한 취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취미는 인터네트 자료읽기와 고전음악과 우리민족음악 감상하기, 주말 등산가기, 그리고 민족통신 성원들과 사람들 방문하여 서로 대화나누기이고, 음식은 우리민족 음식을 비롯 중국, 일본, 타이, 유럽 음식 등 다 좋아합니다. 가리지 않고 잘 먹고 잘 소화하고, 그리고 잘 자고 합니다.
[질문]해외동포 언론인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해외동포 통일운동 지도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노길남 박사님의 활동은 때가 묻지 않고 아주 순수하고, 그리고 대단히 헌신적이고 활동적입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 유럽 등으로 동분서주하셨고, 이 넓은 땅 미국에서도 샌후란시스코, 시애틀, 시카고,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워싱턴 디씨 등…그 뿐인가요. 자동차로 두번씩이나 카나다 뱅쿠버까지 왕복 3천여 마일을 40여시간 운전하고 올라갔다 오시며 방북보고회 등을 하는 등 정말 그 정열에 놀랐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요?
[답변] 글쎄요. 나는 그 힘이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역사의식은 단순히 역사책을 읽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독서와 함께 학습, 그리고 구체적 실천과정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질문]노길남 박사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7순되는 나이에 해당하는 어른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답변]글쎄요. 젊게 생각하고, 젊은이처럼 일하고, 젊은이들과 주로 대화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통일문제를 놓고 대화하면 밤을 새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돈버는 이야기, 좋은 집이나 좋은 자동차를 사는 이야기 등이 대화의 주제가 되면 졸리곤 하였습니다. 내 경우에는 자주, 민주, 통일운동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새벽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합니다. 나도 왜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질문]민족통신은 1년 365일 거의 쉴날이 없으신데 피곤하지는 않으세요? 언제 보아도 민족통신 작업을 할 때는 피곤을 모르신것 같아서…? 그리고 민족언론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웹사이트 해킹도 많이 한걸로 아는데, 이에 대해서도 한말씀 부탁합니다.
[답변]나는 ‘민족통신’과 결혼한 것 같습니다. 앉으나 서나 그저 ‘민족통신’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벽 서너시까지 일한적이 수두룩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꼬박 밤을 새울때도 있었고요. 창간이래 인터네트 테러리스트들로부터 핵킹(공격)도 수십번 받았지요. 극우세력들로부터 시달린적도 수백번도 넘습니다. 아주 악질들은 재판을 통해 단단히 혼내 주기도 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받아내기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질문]실제로는 4월3일이 생신이지만 이제 4월5일이 되면 두 따님이 7순잔치를 마련한다고 하는데 앞으로 민족통신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답변]바로 이문제가 나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금년 한해에 후비를 꾸리고 이들이 앞장서 해 나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언론생활 마지막 과제이며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족통신 허리가 되는 후비꾸리기에 노력하고 있으나 기대와 생각처럼 순조롭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 내야하는 의지를 갖고 동분서주할 생각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재미통일운동진영, 해외통일운동진영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질문]그 바쁜 중에도 ‘미주동포 민족운동 100년사’를 포함하여 비핵화 문제 도서 등 저서와 논문들도 여러개 되는 줄 압니다. 조만간에도 두권의 도서를 출판하는 것으로 듣고 있는데 어떤 책들을 출판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우선 5백여 페지가 되는 ‘미주동포민족운동 100년사’는 제가 편집과 기획을 하고 논문도 썼지만 이 도서는 저의 논문과 선우학원박사님 논문, 윤길상 목사님 논문을 담은 공동출판 도서(2009년 12월15일 일월서각 출판)입니다. 나는 또 금년 4월 중순께 그 동안 쓴 방북기들을 중심으로 한권의 도서가 출판될 것으로 예견하고 있고, 그리고 이어서 지난 10여간 쓴 논평들을 주제별로 나눠 또 한권의 도서출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도서들이 나오면 즉시 요점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그 다음에 내가 그동안 취재한 인물들을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할 계획도 있지요. 그리고 내 인생을 총화하는 의미에서 ‘나의 삶, 나의 꿈’을 마지막 출판도서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질문]이제 특별대담 마지막 질문을 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방북60번을 하면서 1990년 8월에 김일성주석과 접견하시고 식사도 나눴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서거때 방북취재를 가서 금수산태양궁전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며 위로하셨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두분에 대한 소감과 북부조국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답변]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도 김일성주석을 접견하고 느낀바를 이야기한적이 있고, 미국무장관 알브라이트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접견하고 느낀바를 말한 적이 있고, 그리고 미국의 유명한 프로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멘도 김정은 제1위원장을 접견하고 소감을 밝힌바 있었습니다. 이들의 소감은 대체로 좋은 인상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저 역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과 저의 차이점은 조선의 항일투쟁 역사와 분단시대에 이들 영도자들이 그 고난의 시련기를 극복하면서 어떤 정책을 펴 왔으며 북녘 인민들이 자기의 영도자들을 얼마나 떠받드는가, 그리고 북녘의 영도자들이 자기 인민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가에 대해서는 한번 방문이나 몇번 방문하여서는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알다시피 일반 사람들의 관계도 상대적이라고 보는데 북녘사회도 마찬가지라고 관찰하여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도자들이 자기 백성(인민)을 하늘처럼 여기는 ‘이민위천 사상’이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왔기 때문에 북녘동포들도 자기 영도자를 목숨걸고 떠 받드는 사회, 즉 공고한 ‘일심단결의 사회’가 바로 조선이라는 것을 방북 60번을 통해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주석=김정일 국방위원장=김정은 제1위원장은 똑 같이 위대한 영도자라는 것이 저의 숨김없는 소감입니다. 그리고 북부조국(조선)의 미래전망은 최근 방북취재기를 쓰면서 이미 언급했지만 “조선의 미래는 밝고 창창하다”고 전망합니다.
*사회자: 감사합니다. 노길남 박사님의 70생신을 맞아 여러가지를 질문했습니다. 그 대답들을 들으며 사회를 진행한 후배로서도 많은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이 특별대담이 독자여러분에게도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곧 7순잔치를 하시게 되는데 우선 먼저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4월5일(토) 오후5시30분 용궁식당에서 뵙기로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관련 동영상 보기:
특별대담-1 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othernews&wr_id=4927
특별대담-2 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othernews&wr_id=4933
특별대담-3 보기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othernews&wr_id=4936
https://www.youtube.com/watch?v=KNfJI5H4xF8
https://www.youtube.com/watch?v=lp-tEscDIGY
이 동영상은 민족통신 대표겸 편집인 노길남박사가 쓴 글
(1)북이 핵무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
(2)북이 먼저 핵무기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
그리고 (3) 이제 미국은 선택을 해야한다를
북녘의 인터네트 언론’우리민족끼리’가
3부작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동영상-1 보기: 아래를 짤각 눌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Y0bEuiwZbNo&feature=youtu.be
*동영상-2 보기: 아래를 짤각 눌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znd6MRXVfPM
*동영상-3 보기: 아래를 짤각 눌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b1ZbjzrRQzE
vancouver2014-01.jpg
[사진]1500여 마일을 자동차를 몰고 20여시간 달려가 카나다 밴쿠버 동포들과 방북보고회 갖는 노길남 대표
5-russia-leasure05.jpg
[사진]러시아 모스코바에서 열린 해외동포 평화대회 취재를 위해 달려간 노길남 대표
6-armycemetary-36.jpg
[사진]2013년 7.27기념 행사가 열린 평양을 달려가 취재한 노길남 대표
6-armycemetary-44.jpg
[사진]2013년 7.27기념 행사를 취재한 노길남 대표와 최재영 편집위원
8-615meetingbyjpn.jpg
[사진]지구촌 각지역에서 방북한 6.15관계 해외동포들이 재일평통협 주최로 친교시간을 갖고 기념촬영
99chusuk-hong.jpg
[사진]방북취재를 마치고 재미동포 홍동근 묘소가 있는 애국열사릉을 찾아 인사하는 노길남 대표
2014py-airport.jpg
[사진]2014년 2월 60번째 방북취재차 평양에 도착한 노길남 대표
answer-altogether.jpg
[사진]2013년 아리조나주에서 열린 미전국 진보운동단체들 웍숍에 참석한 노길남 대표
Copy (2) of 99event-imojomo-roh.jpg
[사진]노길남 대표가 2012년 4.15태양절 취재차 방북해 김일성광장에서 중국기자(오른쪽),일본기자와 기념촬영
nkchilhost003.jpg
[사진]2014년 2월 방북취재중 평양옥류아동병원에서 어린이들과 인터뷰하는 노길남 대표
nk-yoonhibo.jpg
[사진]방북중 비전향장기수 윤희보 선생 자택을 방문해 청각이 안좋아 글을 써가며 대화나누는 노길남대표
roh-chokm1004.jpg
[사진]민족통신 주관으로 평양서 통일토론회를 마치고 재미동포/카나다동포 참가자들이 기념촬영
5-sohnseyoung01.jpg
[사진]손세영편집위원의 안내로 매주 등산길에 오르는 노길남 대표
answer10years-minjokdotcome01.jpg
[사진]미국평화운동단체 10주년 행사에 초청받아 평화통일 코리아를 호소하는 노길남 대표
rohwnkreporters01.jpg
[사진]2012년 4월 방북기간중 광명성3호 발사관련 기자회견장에서 북녘기자들과 대화하는 노길남 대표
rohatmoranbong.jpg
[사진]방북기간중 모란봉 기슭에 나들이 나온 평양시민들과 담소하는 노길남 대표
roh-imojomo-paksunkyong.jpg
[사진]6.15시대에 남북해외동포들은 평양에서도 자주 만났다.가운데는 남녘의 박순경교수, 오른쪽은 유태영박사
roh-pydance.jpg
[사진]방북기간중 연회장 공연에서 가수들과 청중들이 함께 어울리는 순간, 노길남 대표도 나가 덩실덩실.
노길남 박사의 두딸이 디자인하여 만든 배너
ROH-birthdaybanner.jpg
4월5일(토) 이날 오후5시30분 올림픽 블러바드와 버몬에 있는 용궁식당 2층에서
생신연회가 열립니다.참석하실 분은 좌석마련 때문에 꼭 연락해 달라고 두 따님들이 당부합니다.
생신모임 주소:
The Dragon Restaurant(용궁식당) 966 S. Vermont Ave Los Angeles, CA 90006
연락전화는 213-458-2245 혹은
minjoktongshin@gmail.com
///////////////////////////////////////////////////////////////////
birthday.jpg
birthday01.jpg
이밖에 노길남 박사님에게 축하메시지를 보낸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Ken Lau/서울 김봉국/서울 김민아/양주시 배용석/수원시 서상용/서울 김경희/고양시 황이수/서울 방철영/서울 최동규/서울 최교진/Teresfa Villgas/미국 이 다빗/서울 조병연/Qurie Lin/온 종합병원 임직원 일동/미국 윤상경/서울 김홍곤/독일의 원효탄/미국 전경배/한국의 조응진/한국 홍성규/한국의 권봉수/한국의 유병서/일본의 김용주 등이 4월2일 축하해 주었습니다.
4월3일에 온 축하메시지는 전남연, 티모티 최, Lucia Zao, Millie Kim, 한용현, Aw Flores, John Lee, 한상호, John X Choe, 남장우, Tong Shin Rafati, Sabina Ha, Gordon Copeland, Mark Keam, Cate Park, Larry Shinagawa 등입니다.
(직접 축하메시지를 보내실 분은 아래 댓글로 직접해 주시만 고맙겠습니다.-민족통신 편집실)
*지난 특별대담 연재때에도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의 70생신을 맞아 보내준 국내외 여러분의 축하인사들을 소개해 드렸는데 이번에도 그 이후 들어온 축하편지 및 축하메시지들을 아래에 소개합니다.-편집실
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선우학원 박사
친애하는 노길남 박사 앞
해외에서지난 15년간 민족통신을 출판하여 민주화 운동과 민족통일 운동에 많은 공헌을 한데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족통신'은 부패한 자본주의 사회 미디아(언론)의 허와 진실을 혼돈하여 보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며 편견없이 사변과 사건을 해설하여 국내외 독자들에게 바른 인식을 가지게 했습니다.
특히북조선에대한방북취재보도들은북의인민생활과그들의현실을있는그대로알려주는데지대한역할을하여왔습니다. 그리하여독자들은민족통신의진실보도들을 접하며 강한 인상을 받아 왔습니다.
이제 70세를 맞이 하면서 몸 건강에 유의하시여 '민족통신'의 역사적 사명을 오래 오래 계속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평화와이웃사랑을믿는사람,
선우코리아평화재단
선우학원드림
(이 편지는 오늘 2014년 4월2일 우편으로 금일봉과 함께 민족통신 편집실에 도착했습니다.)
......................................................................................
스웨덴의 림원섭 선생:
노길남박사님의
생일을진심으로축하합니다.
2014.3.21
다물흙드림
(*림원섭선생은카드에축하문을써서국제우편물로도 축하인사를 보내주었습니다.)
………………………………………………………..
필라델피아 장광선 선생(민족통신 편집위원):
노길남선생님의 칠순을 축하합니다.
선생님이 민족자주 평화 통일의 한길에 찍은 발자욱이 통일조국 역사에 길이 빛나리라 믿습니다.
후배들에게 본을 보이시는 노익장을 과시하시며 더욱 건강하시고 가내 행복한 장수 누리시기 빕니다.
2014.3.21
……………………………………………………….
김필주 박사(평양과기대 부총장):
노길남 박사님 고희를 축하합니다.
저는3월29일부터는
평양과기대에 가 있을 예정입니다.
생신파티에못 참석하여 죄송합니다.
축복 받으세요.
김 필주 드림
2014.3.21
……………………………………………………….
덴마크 임민식 선생(범민련해외본부 의장):
노길남 박사 70청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세월이 돌고 돌아 70청춘을 맞이하시는 노 박사님을 이제 안도의 마음에서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선 먹기 싫은 나이도 잡수셨으니 싫어도 어른 대접을 받으셔야조.
그동안 민족운동에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갈 길을 찾으신 70 청춘의 노 박사님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 일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과의 관계가 결정적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기서 진리를 찾았으며, 하여 모든 일을 사람과의사업에 첫 자리에 놓으려고 고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진리는 노 박사를 알면서 배운 진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진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따르기 마련이며 또 사실 따랐습니다. 문제를 찾아내는데 일정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운동을 하면서 자기의 지향하는 목표가 뚜렷하지 못하면 곡절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발상은 결국 둘 다 놓친다는진리입니다.
이제 더 더욱 나이 들 시간이 없을 테니 자기의 목표가 뚜렷해지신 노 박사님께서 언론을 통해 이론과 실천의 행동으로 민족운동의 길을 제시하는 역할을 변치 말고 계속하시기 위해 노익장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회를 통해 우리가 만나 함께 했던 먼저 가신 선배님들에게 관심을 두시기 바라며, 부인과 두 따님에게 존경의 인사를 전합니다.
2014년 3월 22일
덴마크에서
임민식 드림.
…………………………………………………………
보스턴 박기식 선생(재미동포전국연합회고문):
노길남 박사의 7순 생신을 축하합니다. 점입가경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점입가경(漸入街境)은 경치나 문장, 또는 어떤 일의 상황이 갈수록 재미있게 전개되는 것을 뜻하게 됐지요. 이걸 줄여서 가경(街境)이라고도 하잖습니까. 70 고희는 완숙단계에
들어가 새로운 시작을 하는 의미로 생각됩니다. 새로운 시발점에서 더 많은 일들을 전개해
주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70생신을 축하합니다.
3월29일
보스턴 박기식
…………………………………………………………………..
서울 최지윤:
선생님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합니다.
2014.3.29
…………………………………………………………………….
뉴욕의 이종천 선생(우리여행사 대표)
노길남 대표님의 70생신 축하합니다.
그리고 민족통신 창간 15주년이 되는 해군요.
어려운 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걸어오셨습니다.
건강을 빌며
민족통신의 발전을 아울러 간절히 바랍니다.
2014.3.29
…………………………………………………………………………………
프랑스의 이희세 선생(6.15유럽지역위원회 전회장):
노길남박사님,
70고개를 자랑스럽게 걸어 오는 5일에 칠순잔치를 하신다는데
참가하여 축배를 나누지못함을 안타까히 여기며
정성을 담은 축하의 인사를 이렇게 보내드림을 용서 해 주십시요.
행복한 가정과 함께 장수무강하십시요.
2014년 3월 29일
프랑스 시골에서 이 희 세 드림
………………………………………………………………………..
독일의 리준식 선생(범민련 유럽지역본부 의장):
축시
청춘 노길남!
(기쁜 날을 맞이하는 모든 가족 분들과 기쁜 자리를 더욱 기쁘게 해 주시는 하객 모든 분들께 보냅니다.)
약방의감초당신의칠순을축하합니다
당신이살아온생혼자만의삶을넘어서는
우리 시대의 아픔 광야에서
온 몸을 태워 어둠을 밝혀온 펜
손으로쓴글이아니라눈물로쓴진실
자유의날개민주의불사조로솟아
세상 하늘로 날아오른 세월
자유인의이름은사라지지않는다
정의를목숨처럼사랑하는자
청춘 노길남!
늘 푸른 나무에 나이테는 없어라
2014.3.29
……………………………………………
시애틀 강창중 선생:
평생을 조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하여 살아오신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 (Kilnam Roh)박사님이 칠순을 맞이하였습니다.
특히 평화적인 통일을 말하고 통일을 위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이 드문데다 남한과 해외 민중의 통일에 대한 꿈마저 시들어진 지금 민족통신을 통하여 지치지 않고 남북의 화해와 통일운동을 해오신 노길남 박사님께 후배로서 깊은 감사와 찬사를 보냅니다.
부디 더욱 건강하셔서 통일의 그날을 맞아 남북한과 해외 온 민족이 함께 얼싸안고 춤추게 되는 그날까지 통일운동을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노길남 박사님의 통일을 위하여 뿌린 씨앗은 꼭 귀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번 로스앤젤스의 칠순잔치에 참석하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래 유투브에 노길남 박사님 일생의 사진과 후반부 동영상을 보고서 퍽 인상 깊었습니다. (페이스 북에 이동영상을 소개)
https://www.youtube.com/watch?v=KNfJI5H4xF8
2014년 3월31일
………………………………………………………………………………
독일의 이종현 선생(유럽연대 고문, 민중연대 고문):
7순은 축하합니다.
함께 하지 못하는마음 무척 아쉬운 심정입니다.
노길남 선생하면 3가지 떠오릅니다.
하나는 1990년 제1차범민족대회를준비하기 위해 서울에함께 들어갔었지요. 그 때 정열적으로 활동한 모습이잊혀지지 않습니다.
둘째는 2000년대 초반에 독일후랑크프르트에 방문했을 때운동의 단결과 단합을위해 노력하던 그 모습입니다.
셋째는 2007년 6월 남, 북, 해외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6.15민족공동행사를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벌일때 그당시 한나라당 박계동의원과 동행한 3명의남측 국회의원들이 우리 행사를방해할 때 수천만해내외 동포들이 하루종일행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8시간이나기다려야 하는 그어려운 순간에 마이크도없이 연단에 나와 해외동포들각 지역의 참가자들을 연단에불러내어 즉흥 민족대단결행사를 조직하여 훌륭하게진행하던 그 모습과용감성에 놀람을 금치못했습니다.
아모쪼록 앞으로도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이해 한층더 노력해 주기 바라며
건강을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위해 7순을 마련해 준 훌륭한두따님께 감사의 마음을
아울러 전합니다.
2014.3.31
(이종현 선생님은 국제전화로도축하의 말을 전했습니다.)
…………………………………………………….
일본의 박용 상임부위원장(6.15공동선언실천 해외측위원회)
민족통신 대표
노길남 박사님께
존경하는 노길남 박사님께서 생신 70돌을 맞이한데 대해 저는 매우 기쁘게 생각하면서
진심으로 되는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노길남 박사님은 지난 한 생을 오로지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위해 헌신해 오신 해외운동의 저명한 인사이며 해외운동의 유력한 언론기관인 민족통신의 강화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오신 통일원로이십니다.
원래 생신 70돌을 진갑, 고희(古希)라고 하는데 옛날에 인생 50이라고 할 때 70세까지 오래 사는 것은 매우 드물다고 하여 고희라고 하였습니다.
고희를 지내시면 희수(喜壽)까지 건강하시며, 77세인 희수를 지내시면 팔갑, 산수(傘壽)까지 사셔야 하며 팔갑을 넘기시면 미수(米壽)를 바라보시고 백수(白壽), 황수(皇壽)까지 오래 오래 사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도 통일위업 성취를 위해 계속 분투하시고 통일된 조국강토에서 행복의 여생을 값 있게 지내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노길남 박사님의 생신 70돌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2014년 4월5일
*독일의 이지숙 박사(6.15유럽지역위원회 위원장):
존경하는 노길남 박사님,
벌써 70세이시라니 !
믿어지지 않는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날마나 제일 먼저 열어보는 민족통신 !
감사드립니다.
먼 훗날, 20년후에도 ,
우리들의 눈, 귀, 입을 대신해주시라 믿으며,
직첩 참석하지 못한것 죄송합니다.
독일에서 큰 꽃다발 보냅니다.
이지숙
김익환 14-04-03 14:05 답변 삭제
생일 축하드리며
늘 강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준수 14-04-03 14:09 답변 삭제
서준수 축하올리고 민족얼 동영상 선물로 띄우렵니다. 건안하소서 ...나무아무타불 관세음보살
http://youtu.be/ogslckxTn7E
자유시민 14-04-03 14:14 답변 삭제
노길남 대표 위에 인터뷰서 이렇게 마지막 대답해쑈죠
"""그렇기 때문에 김일성주석=김정일 국방위원장=김정은 제1위원장은 똑 같이 위대한 영도자라는 것이 저의 숨김없는 소감입니다. 그리고 북부조국(조선)의 미래전망은 최근 방북취재기를 쓰면서 이미 언급했지만 “조선의 미래는 밝고 창창하다”고 전망합니다."""
한국지식층 대개 망할꺼라 하는데 ....
이거 대해 답변 부탁해도 해줄꺼요?
않하며 거짓으로 보겠쏘
나그네 14-04-03 14:19 답변 삭제
ㅋㅋㅋ 재뿌리당가?
편집실 14-04-03 22:46 답변
자유시민님에게,
노 대표님의 대답을 받기 전에 먼저 그의 58번째, 59번째, 60번째 방북기를 차분히 그리고 편견없는 마음으로
읽어보신 다음에 다시 질문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방북기들은 북을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이 될걸로
생각되어 제안드리오니 노여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편집실=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social&wr_id=5915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tongil&wr_id=4635
http://www.minjok.com/bbs/board.php?bo_table=editorial&wr_id=866
KATHY LEE 14-04-04 11:40 답변 삭제
HAPPY BIRTHDAY MR. KEN ROH~
AND HOPE YOUR DREAM-ONE KOREA WILL BE REALIZED SOON.
ONE KOREA-YES, TWO KOREAS-NO
편집실 14-04-04 20:38 답변
민족통신 편집실서 알립니다.
오늘 4월3일 일본에서 제작하는 월간 '통일평론'(최석룡 발행인)에서 아름다운 꽃들을 듬뿍 담은
꽃바구니를 노길남 대표의 7순축하 카드와 함께 민족통신 사무실로 보내왔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통일평론은 민족통신이 제정한 제1회 민족언론상 수상단체입니다. 민족언론상 개인수상자는
한겨레신문 당시 박해전기자였습니다. 이들 수상자들은 모두 가족들을 대동하고 수상식에 참여하여
뜨거운 통일분위기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습니다.-편집실)
최상균 14-04-05 15:25 답변 삭제
선배님 더욱 건강하시고
보람넘치시기 바랍니다.
만주에서 상균 드림
최상균 14-04-05 15:27 답변 삭제
노길남 박사님, 고희 생신을 축하합니다.
선배님 더욱 건강하시고
보람넘치시기 바랍니다.
만주에서 상균 드림
민경석 14-04-05 15:29 답변 삭제
노박사님,
초청해주셔서 고맙고, 좋은 따님들 두신 것,
무엇보다도 노박사님의 70회 생신을 축하드림니다.
앞으로도 통일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실 수 있도록 건강하시기 바람니다.
죄송스럽게도 갑작스럽게 꼭 가야야 할 학교행사가 있어서
축햐연에 참석치 못하게 되었음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경석 드림
++++
2009/07/18,19, [13:05] 최종편집: ⓒ 자주민보
[편집자 주: 지난 6월 13일부터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가 평양친선병원에서 21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원인은 심장일부와 폐기종, 그리고 빈혈 등과 스테레스로 쌓인 여러 질병 때문이었다. 노길남 대표는 그 입원 경험을 수기로 발표하고 있는데 이북의 주체적인 의료체계와 의료일군들의 정성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이번 첫 수기에서는 그도 들은 이야기이야기라면서 김정운(김대장) 중심의 후계쳬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김일성주석을 빼어닮은 김정운 후계자는 단순히 천재가 아니라 만재라고 할만큼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지략을 갖춘 인물로 알려져있다는 것.
노길남 대표는 또한 북한에 구속된 여기자 중에 '로라 링'이 자신의 큰 딸과 ucla 대학동창이자 친한사이라고 밝히고 딸의 부탁으로 북측에 면회를 신청했다는 사실도 공개하였다.
아마 다음 글에서 그 결과에 대한 내용을 언급할 것 같아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다음은 관련글 전문이다.]
골수암으로 고생하는 재중동포 통일운동가《평양친선병원》에 입원해서 만나게 되었다. 병원 정원에서 그의 담당 의사 김경헙선생, 전운주 간호원과 부인과 함께 기념촬영.
《평양친선병원》서 장기 입원생활 통해 북녘사회 이해(상)
노길남 박사, 건강회복위해 평양서 3주동안 입원치료 받아
2009년 6월13일(토요일)
2009년 6월13일 토요일 오후5시10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첫날부터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 병원으로 가는 길에 만수대 동상에 잠간 들렸다. 안내원의 도움으로 만수대 동상에 들러 6달러를 지불하고 화환을 가지고 동상 앞에 놓여 있는 화환들의 맨 왼쪽에 싱싱한 꽃 한 다발을 증정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갖췄다. 이러한 절차는 북부조국을 방문하는 해외동포들과 외국인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로 되어있다. 외국 대사관들이 꽉 들어 찬 동평양 지역의 대동강구역, 문수2동에 자리잡은 《평양친선병원》에 입원했다. 이미 《민족통신》측이 북측 관련부서와 사전 의논하여 놓은 탓인지 병원 도착 즉시 입원준비 절차는 간소하게 이뤄졌다. 곧 바로 내과 입원실 1동7호실로 들어가 집을 풀고 줄무늬로 된 환자복으로 갈아 입었다.
한금희 과장선생(내과), 오은옥 간호장, 오옥금 간호원과 리영미 간호원 등이 나의 건강을 돌보기 시작했다. 오옥금 간호원에게 앞으로의 하루 일과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하루 일정을 설명해 주며 병원규칙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평양친선병원》리영미 간호원이 시종 정성을 다해 주었다.
간호원들은 거의가 20대 초반으로 나의 딸보다도 어린 나이었지만 모두가 성숙하고 교양을 갖춘 인물들로 생각되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1990년 8.15범민족대회 준비위원으로 방문하였을 때 오옥금 간호원은 3살이었다. 그러니 그의 나이 23살이다. 리영미 간호원은 그 때 한 살이었으니 지금 21살이다. 옥금 간호원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에 입대하여 6년간 복무하고 제대하고 돌아와 이 병원에서 1년째 일한다고 말한다. 영미 간호원은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이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고 소개한다.
간호원은 하루 일과를 알려준다.
아침6시 생명지표관찰(체온,맥박, 분당 호흡수, 혈압 진단)
세면,
8시분—아침 식사
9시-식 후 투약
진찰
오후1시 점심식사
오후 2시 식후 투약
오후 4시 생명지표 관찰
-소변, 대변, 수면시간 등 세어 알려주는 시간
-전신 수기치료
저녁7시: 저녁식사
오후8시 식후투약
-오후9시 부분 수기치료
-오후10시 취침
오후6시30분 짐을 풀고 2층의 내과 환자입원실로 들어갔다. 이 방이 바로 지난 4월28일 긴급하게 입원하였던 방이었다. 나는 오후7시 저녁식사를 하고 일기를 쓰기로 했다.
첫날 저녁 식사는 밥, 무우국, 물김치, 생선구이, 파튀김, 소고기 구이, 더운물을 주었다. 그 후 입원복으로 갈아입고 우선 혈압을 쟀다. 한 팔은 120/80, 또 한팔은 130/80으로 나왔다. 간호원 오옥금 동무와 정원, 그리고 그 주위를 산책했다. 토끼들의 운동장에서 색색의 토끼들이 풀을 뜯어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장미넝쿨 길을 따라 배구장 쪽 옆에 있는 양벗나무(뻐지나무)에서 빨강색 뻐지를 따 먹었다. 약간 신맛이 났다.
한금희 과장 선생이 잠시 들어와 오늘 보도시간에 나온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을 소개하며 서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해외동포 통일운동가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주체사회주의가 꿋꿋하게 걸어 온 역사를 말해준다. 고난의 행군시기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신 업적 등을 돌이켜 보며 70년대 70일전투, 80년대 2백일 전투, 그리고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150일 전투에 의사, 간호원들도 활기차게 동참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그 분들의 노선과 정책이 언제나 옳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의사이면서 정치적 식견이 높은 인물이다.
10시20분께 오은옥 간호장 선생이 수기치료를 시작했다. 한 시간 동안 전신을 흔들어 준 치료였다. 특히 위장 쪽, 만병통치혈(다리부분과 손부분)을 누를 때는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치료받는 도중 밤 늦게 원장선생(장광석 박사)이 들어와 안부를 묻고 간다. 11시30분에 취침에 들었다.
2009년 6월14일(일요일) 흐림
아침 여섯시에 기상하기 전에 서너번 깼었다. 2시, 4시, 5시 경에 일어나 소변도 하고 잠시 있다가 잠을 재촉해 다시 잠들곤 했다. 6시5분전에 일어나 면도, 세면을 하고 체온, 맥박, 혈압을 쟀다. 혈압은 어제 저녁보다 조금씩 올랐다고 오옥금 간호원 동무가 말해준다. 130/90과 140/100으로 나왔다.
병원 정원에 있는 토끼장에서 풀을 주는 장면
아침식사 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산책을 하고 싶었다. 오옥금 간호원이 과장선생에게 여쭈어 본다고 말하며 잠시 후에 와서 “자유시간으로 산책하랍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평양친선병원> 여기 저기를 산책했다. 9마리의 토끼들이 나와 자기 집 위에 올라가 웅크리고 있었다. 풀을 뜯어 칸막이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다가와 풀을 먹으며 나를 반갑게 맞는 표정들이다.
병원주위를 돌며 산책을 즐겼다. 병원 뒤쪽에 150일전투의 구호들과 의사, 간호원들의 업적을 치하 격려하는 구호들이 보인다. 중환자들에게 정성을 다한 의료진, 자료들을 자체적으로 모아 내부를 잘 꾸린 내과근무 성원들, 6.18돌격대 모범 따른 성원이 정성의 테레비죤을 받았다는 소식 등이 담겼다. 리영미 간호원 동무도 <평양친선병원>에서 복무하는 간호원들 가운데 훌륭한 일을 한 간호원으로 세번 추천되었다고 답한다. 그는 이어 “이제 150일 전투기간에도 더 열심히 일하여 모범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다.
병원입구 오른쪽에는 엠뷰런스가 보이고 주차장 위에 설치된 비둘기 집들이 3층으로 지어져 있고 그 주변에 20여 마리의 비둘기들이 아침 해를 맞으며 몸을 추수리고 있다. 정문 관리일꾼은 모이를 줄 때 면 모두 한군데 집합한다고 설명한다.
산책을 하다가 은행나무를 뜯는 한 의사를 만났다. 랜트겐 담당이라고 소개한다. 은행 나뭇잎은 건물 내 바퀴벌레를 쫓는 데 사용한다고 말한다. 나에게 어떻게 입원하게 되었느냐고 묻길래 심장일부와 폐기종, 그리고 빈혈 등과 스테레스로 쌓인 증후군(acute stress syndrom) 때문에 당분간 요양이 필요하다고 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정밀조사 받은 내용들을 설명하니까 그는 <평양친선병원>에는 씨티촬영(ct)과 엠알에이(mra) 시설은 없고 내시경으로 위벽, 위안을 진단하는 시설은 잘 갖추어 있다고 말한다.
아침식사는 밥, 미역국, 김, 멸치볶음, 계란2개, 두릅나물, 물김치, 비타민씨 차 등이다.
아침식사가 끝나고 한금희 과장선생은 지난 번 응급치료 받을 때 간호한 리영미 간호원을 임시 오옥금 간호원과 교체하였다고 설명하며 이번 간호를 전담한다고 소개한다.
리영미 간호원은 지난 번 방북 때 입원했을 때 쓰러져 들어 온 모습과 그 때의 분위기를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때는 하루가 지난 다음에야 안정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돌이켜 보며 당시 몹시 걱정스러웠다고 말한다. 나는 그 때 헤어질 때 찍은 사진들을 카메라 칩에서 발견하고 돌아보았다. 그 사진에는 한금희 내과과장 선생, 의사 전순권 선생, 그리고 리영미와 리성화 간호원들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일요일 오전 11시30분 조선중앙테레비죤 방송은 <영생>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다. 이 영화는 1935년 무성에서 일어난 역사를 반영하는 작품으로 김일성 주석의 친동생 김철주와 중국인 동지 장울화 선생과 얽힌 역사적 내용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제를 향해 반일투쟁을 벌이고 있는데 이것을 반대하는 중국군들의 움직임에 안타까워 하는 김철주 동지와 그를 동조하는 중국군 두령의 입장이 노출된다. 이와는 반대로 부두령(여성)의 반조선인민혁명군 자세 때문에 난관이 조성된다. 중국 보국군에게 간첩으로 몰린 금순이를 구출하러 김철주 동지가 찾아왔다. 무성땅에서 군자금을 대주던 대토호였던 장씨가문의 장손 장울화의 역할이 대두된다(장울화 관련 도서참조). 전편 끝(오후 1시52분) 이어서 2부가 이어진다. 중국 보국군 부두령이 일제 천황폐하로부터 표창 받은 간첩이었고 실명은 요시카와 라는 이름을 가진자로 확인된다..
*점심식사가 들어온다. 명태국, 밥, 쇠고기, 앵두(30여 알) 및 물김치가 밥상에 올랐다.
점심 후 오후2시에는 식후 투약으로 비타민씨 차를 한잔 들고 어린이 아스피린과 피쉬오일 한 알 씩을 들었다.
그리고 리영미 간호원과 정원 주변을 산책했다. 대화 중에 그는 21살로 두 딸 중 차녀, 언니는 요리사라고 한다. 어떻게 간호원이 되었느냐고 묻자, 어릴 때 세계상식을 읽다가 <나이팅 게일>에 대하여 읽고 나서 간호원이 되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이팅 게일 친구(동무)들은 왜 너는 귀족이면서 천한 직업을 갖고 일하느냐고 하였지만 나이팅 게일은 개의치 않고 간호원으로 활약하였다는 일화들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영국과 독일간 전쟁시기에 영예군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것이 퍽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한다.
일요일이라 점심시간 전후에 휴식을 갖고 장기를 두는 의사선생들도 보인다. 복도에서 그 중 한 선생을 만났다. 신경내과 의사 김관길 선생이다. 의학분야에 대한 대화를 시작으로 하다가 국제정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회문제 등 다방면의 대화로 이어졌다. 둘 다 관심이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는 특히 이명박이 자존심도 없는가를 제기하며 그에 대한 자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마음을 털어 놓는다.
오늘 14일 로동신문은 12일 미국의 사촉하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끝내 우리의 2차 핵시험을 걸고 반공화국 <<제재결의>>를 채택하였다고 지적한 외무성 성명을 보도하면서 그 대응 조치로 (1)새로 추출되는 풀루토니움 전량을 무기화한다. (2)우라니움 농축작업에 착수한다. (3)미국과 그 추종세력이 봉쇄를 시도하는 경우 전쟁행위로 간주하고 단호히 군사적으로 대응한다고 선포하고 제재에는 보복으로, 대결에는 전면대결로 단호히 맞서 나가는것이 우리의 선군사상에 기초한 대응방식이다고 천명했다.
*오후4시 생명지표관찰: 체온-36.2도(정상36.5도), 맥박-분당66, 혈압(오른팔)-110/70
*저녁식사는 밥과 배추국, 콩치구이, 감자부침, 쇠고기 접시, 물김치이다.
오늘은 산책도 못한 채 오후9시 수기치료를 받았다. 10시에 곧바로 취침에 들어갔다.
2009년 6월15일(월요일) 흐리고 맑음
오늘 아침은 6시25분에 기상했다. 새벽녘에 설사를 했다. 어제 저녁식사가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것 같다. 운동을 하지 않고 편안하게 쉬다가 밥 먹고 지내니까 소화가 제대로 될 리가 없는 것 같다.
6시30분에 간호장이 와서 피검사를 했고, 새벽에 받아 놓은 소변용기를 갖고 갔다. 그리고 신경내과 의사 김관길 선생이 어제 받은 나의 논문 개요집을 두 번이나 읽었다고 하면서 감명받았다고 되풀이하여 말한다. 우리 사회 밖에서 보는 입장과 관점에 대하여 퍽 흥미롭다고 했다.
이 의사 선생은 남조선 사회의 현주소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 그 시작과 과정에 대하여 몹시 알고 싶어했다. 이승만 정부로 출발 지금까지의 사정들을 있는대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남측 기득권 세력은 남녘 동포들이 북녘동포사회에 대하여 진실을 아는 것을 꺼려왔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그러면서 “그래서인지 해외동포 기업인들이나 인도적 지원활동을 하면서 이곳을 자주 다녀가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우리를 너무 모르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히면서 기분이 몹시 상한 적들이 적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귀띔해 주기도 한다.
아침 7시50분께 장광석 원장이 들려 안부를 묻는다.
*8시에 배추국, 밥, 마늘 짱아찌, 게란 2개, 김, 물김치가 담긴 아침식사를 들었다. 나는 원래 미국생활 하면서 아침식사를 해 본적이 별로 없다. 고작 씨리얼 정도나 커피 한 잔을 하고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그래서 요리사가 섭섭하게 생각할까봐 메모 쪽지에 아침을 거의 안먹었던 사연을 적어 밥상 트레이에 올려 놓고 산책을 나갔다. 한금희 과장선생이 출근하며 인사를 나눈다.
오늘 오전에는 종합적인 진찰과 함께 종합검사를 받았다.
*과장선생 청진기 진찰-숨소리 통해서 건강이상 유무확인
*말초 피검사-백,적혈구, 콜레스톨 농도, 혈당 등
*피검사-g p t (간효소 검사), got(심장효소 검사)
*심전도-심장파 정상인가 여부를 알아 내는 것
*초음파-간, 비장 등 부었는가 여부
*렌트겐(x ray) 등이었다.
9시에 식후 투약하고 정원 앞뒤를 거닐었다. 병원 입구 왼쪽에 있는 비둘기 집에서 강냉이 먹이를 주며 비둘기 12마리와 대화를 주고 받았다.
20세에 월북하여 48년째 이북에서 살고 있는 뜨레즈나크씨(68)
그리고 같은 층 끝 방에 있는 미국인과 잠시 동안의 대화를 나눴다. 이북생활 48년이 된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드레즈나코(james dresnok: 68)씨.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는 이북의 배우이기도 하다. <이름없는 영웅들>에서 인민군을 가뒀던 미군포로수용소의 총책으로도 출연한 인물이고, 김구 선생이 나오는 <위대한 품>에서 하지 중장역으로 출연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북에서 5년 전 나온 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영화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작품은 국제영화제 기록영화부문에서 특등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가 출연한 작품들은 그 밖에도 <5시부터 5시까지>, <대결> 등 무려 27개 작품에 이른다. 유럽계 여성과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3자녀가 평양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큰 아들은 결혼하여 조만간 큰 며느리가 첫 손녀를 낳으려고 하는데 그의 희망은 배우. 그는 배우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최근에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하고 있는데 번역 일을 하고 있고, 막내 아들은 둘째 부인의 자식으로 이름은 토니, 지금 소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그의 조선이름은 ‘홍철수’라고 한다. 그는 조국(북조선을 가리킴)에서 내가 원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나는 내 아들들과 함께 여기서 살고 싶고, 죽을 때 조선 땅에서 묻히고 싶다고 고백한다.
점심시간이 될 무렵 최길호 해외동포사업국 처장, 김무성 부처창, 그리고 안내원 신성 지도원이 함께 병문환으로 다녀갔다. 신덕수 물 한 박스, 쇼빵 한 봉지, 설탕빵 한 봉지, 그리고 밑반찬들(창란젖, 명란젖, 고추장)을 사들고 와 위로해 주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주고 받고 헤어졌다.
*점심식사는 고기국, 볶음밥, 갈치고기, 감자샐러드, 채소무침 등이었으나 어제 저녁 체한 것 때문인지 많이 먹지 못했다. 한금희 과장선생은 오늘 저녁은 죽을 준비하겠다고 건의한다. 나는 해외동포사업국 간부들이 갖고 온 쇼빵과 설탕빵 봉지들을 오은옥 간호장에게 주며 직원들과 나눠 먹으면 좋겠다고 제의했다.
2층에 재중총련 간부겸 단동 경제인으로 재중조선인경제인협회 회장인 이철재 선생이 입원한 것을 발견하고 그의 부인과 함께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주차장에서는 신성하 안내원 동무를 만났다. 자신의 동갑내기라고 하용진씨, 박혜정씨에 대해 안부를 묻는다. 재일동포 할머니 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기다리는 중 짧은 대화를 나눴다.
점심 식사 후 위층 이철재 선생을 만나고 돌아 왔다. 그는 1990년 8.15범민족대회 재중동포 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한 인물로서 그 이후 큰 행사 때 마다 평양에서 만났던 관계이기에 서로 반가웠다. 3년 전 간 이식수술을 받아 그것이 완쾌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최근 걸을 수 없어 다리가 아파 이곳에 긴급요양 치료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부인도 함께 남편의 간병을 도우며 동거 중에 있다. 재중동포들이 많이 위문 차 들리는 모습도 보았다. 그는 입원실에 있으려면 무료한 시간이 있으니 내가 본 9부작 영화 <한 보위일군의 수기>를 보고 돌려 달라고 주문한다.
오늘부터는 오후4시에 수기치료를 받기로 했다. 오은옥 간호장 동무의 치료는 그의 기술 뿐만 아니라 그의 치료하는 손길마다 온 정성이 다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등, 다리, 팔, 어깨, 복부, 목 등 전신의 핵심 핵심들을 모두 손으로 치료하며 수십 년 쌓인 스트레스를 풀어준다. 수기치료는 일반 안마와 달리 이북에서 개발하여 실시해온 독특한 기법의 의학치료 방법이라고 자부한다. 간호장은 3남매의 막내라고 한다. 언니는 음대를 나와 성악가로 활동하고 오빠는 김철주 사범대학교를 나와 중학교에서 <혁명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말해 준다.
*저녁식사는 나의 요청에 의해 죽이 들어 왔다. 반찬은 쑥국, 생선조림, 감자요리, 쇠고기 접시, 오이김치가 같이 놓였다.
2009년 6월16일(화요일): 소낙비/보슬비/흐리고 맑음
세시에 잠이 깬다. 어제 낮에 너무 많이 휴식을 취한 때문인 것 같다. 일어나 컴퓨터를 켜 놓고 밀린 병원 일기를 썼다. 주변환경도 좋고 어딜 가나 깨끗하게 정리된 모습을 본다.
13일자 로동신문 머리기사는 김정일 위원장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한 45돌을 기념한 보도자료들이 올라있다. 14일자 로동신문 머리기사는 150일전투를 전개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과학기술로 경제강국건설의 활로를 열어 제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있고, 15일자 신문 머리기사는 동해바다가 있는 전선동부에 위치한 제7보병사단 지휘부를 현지 지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 기사가 올라있다.
특히 15일자는 5면에서 조국통일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하단에는 2002년 6월13일 미군에 의해 장갑차에 무참히 깔려 죽은 여중생들, 신효순과 심미선의 죽음과 관련하여 <김일성사회주의 청년동맹 중앙위원회 대변인 담화>가 실렸다. 이 담화문(6월13일자)은 여중생의 죽음도,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전례 없는 비극적 사태가 빚어지고 있는 것도 다름아닌 미국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함께 각계 각층 인민들과 굳게 단결하여 60여 년에 걸친 치욕적인 미국강점 역사를 결산하고 신효순, 심미선을 비롯한 우리 겨레가 흘린 피 값을 천백 배로 받아내며 친미사대매국 패당을 쓸어 버리기 위한 투쟁에 과감히 떨쳐 나서리라는 확신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새벽 녘 지난 3일 동안의 신문을 훑고 리철재 선생이 본 영화 씨디를 감상했다.
*오후6시께 대변이 정상이었다. 어저께 설사가 그쳐 다행이다. 맥박은 분당 66으로 그리고 체온은 36.2로 나타났다. 리영미 간호원은 맥박을 짚으며 심장이 건강하다고 말한다.
뜨레즈나크씨와 대화 중 담당 리영미 간호원이 출근하며 함께 촬영
아침 먹기 전 제임스 드레쯔나크 방에 가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1962년 5월 남한 1사단으로 배치받아 갔다가 8월에 월북했다고 말한다. 그는 가난 때문에 미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게다가 독일에 있던 부인과 원만하지 못해 이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시기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미군병사들간의 토론을 엿들으며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끝내는 사선을 각오하고 월북을 단행했다고 말한다. 자신 말고도 몇 명의 미군들이 월북했다고 소개해 준다. 20살 때 월북하여 48년을 이북에서 살았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고아의 처지였기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미군에 입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와의 대화는 주로 영어로 하였지만 드레쯔나크 선생은 우리말도 잘하는 편이다. 그는 유엔상임이사국의 1874호 결의와 관련하여 러시아와 중국도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면서 우리 말로 “장군님의 대외정책은 언제나 옳았다.”고 말한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드레쯔나크 선생은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사회주의를 실시하는 나라는 오로지 조선이라고 꼽으면서 “장군님이 금년 곡식 생산목표를 6백만 톤으로 세워서 그것이 달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외형만 미국사람이고 의식구조는 이북사람이었다.
그는 2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이북서 배우생활 하는 게 재미있었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는 지금은 어렵다고 말한다. 한번에 촬영이 힘들고 서너 번, 어떤 배우들은 한 장면에 16번이나 다시 찍는 경우도 있었다면서 이제는 내 나이에 힘든 직업이라고 설명한다.
*아침식사는 죽, 두릅나물, 게란 한 개, 물김치, 김, 홍차 등이다.
화요일 아침시간에는 간호원들과 의사들이 주변을 청소하는 날이다. 정원주변을 산책하며 이들의 청소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들어와서 위층의 리철재 선생과 만남의 시간을 가진 후 방에 들어와 보던 영화 7부를 감상했다.
**오전10시30분에 의사들 3명, 내과과장, 간호원 등 5명의 의료진들이 들어와 차례로 진찰을 한다. 이것을 <의사회진> 이라고 한다고 말한다. 소화기과 허수길 의사선생이 눈동자 검사를 출발로 순환기과 정창식 의사선생의 진찰로 호흡하며 복부주변을 자세하게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신경내과 김관길 의사선생이 처음에 눈동자 점검을 포함하여 고무 막대기 기재로 팔과 다리를 두두리며 검진하고 누워서 혀를 곧바로 내밀기를 반복요구하고 나서 엎드려 누운 다음 등을 두드리고 긁으며 건강진단을 진행한다.
그후 리영미 간호원과 산책하며 내가 지참했던 카메라를 꺼내 사진촬영도 했다. 오은옥 간호장의 수기치료 자세에서도 느꼈지만 리영미 간호원의 언행 모두에서도 느꼈다. 다정했고, 친절했고, 순수했고,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간호원도 임무수칙이 있겠는데 1조와 마지막 조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1조의 골자는 우리 간호원들이 수령님(김일성 주석)과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충성하듯이 환자에게도 온 정성 다 바쳐 봉사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10조는 깨끗한 양심을 갖고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리영미 간호원은 그러면서 이 양심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람이 양심이 없으면 좋은 봉사를 하기 어렵지 않느냐고 말한다. 21살짜리 간호원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산전수전 다 겪어 도를 닦은 한 도사의 말처럼 느껴진다.
*점심은 밥, 두부국, 감자살라다. 쇠고기 , 물김치, 그리고 <명란 젖>, <창란젖>,<고추장>으로 들었다.
*오후에는 피부과에 가서 검진을 받았다. 피부과 의사는 컴퓨터를 놓고 그리고 피부과에 관한 도서를 옆에 놓고 뭔가 한창 연구에 몰두한 모습이었다. 그러던 순간에 진찰을 받게 되었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진찰하며 피부에 문제없다고 설명하며 종합진단 일지에 기록해 준다.
오후에도 제임스 드레쯔나크씨가 찾아와 대화를 나눴다. 우리 둘은 이미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를 나의 방에 불러서 냉장고에 숨겨 둔 맥주 두 병을 꺼내 심양에서 준비해 온 안주, 그리고 미국서 가져 온 땅콩을 꺼내 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의 꽃을 피웠다. 그는 그의 가정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자세하게 말해 준다. 마지막 부인은 아프리카의 토고 부통령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녀와의 관계는 신통치 않았다는 것이다. 안하무인 막가파 성격이었다고 귀띔해 주며 20살 차이의 관계인데다가 아이를 배었는데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여 머리 아팠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 아이를 낳고 그 이후에 결국 별거하게 되었다고 돌이켜 본다. 그래서 세번 째 아이 <토니>는 지금 9살이라고 말한다. 엄마 닮아서 외형은 흑인 골격인데 얼굴 색갈은 나와 같이 섞여서인지 조선사람과 같은 색깔이라고 말한다.
**병원 측은 정기열 박사선생이 모금하여 보내 준 구급환자 검색기 두 개를 소개해 주었다.
구급환자 검색기로 하나는 biosite 'triage' meter plus 이고, 또 하나는 i-sat potable clinical analizer 기계
하나는 biosite 'triage' meter plus 기계로 이것은 구급환자 일반 심장경색 판별 진단기로서 혈액가스 분석을 진단하는 기계라고 한다. 일회용 칩이 소비제품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필요한 형편으로 느껴진다.
두번째 기계는 피에서 심근검색기로 이것을 통해 효소검색을 한다는 것이다. i-sat potable clinical analizer로서 abbott laboratories inc., i-stat corp., east winsor, nj
특히 이 기계는 9볼트짜리 heavy duty의 바테리가 필요한 것으로 느껴진다.
오늘 16일자 로동신문은 앞면 우측 상단에 <분렬주의세력의 도전을 짓부시고 자주통일의 힘찬 진군을 다그치자>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사설은 김정일 최고지도자의 《조국의 자주통일을 실현하는 데서 우리민족이 들고 나가야 할 기치는 6.15북남공동선언과 10.4선언입니다》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민족대단결이 조국통일을 이루는데 있어 열쇠가 된다고 천명했다. 한편 앞면 하단에는 15일 김일성 광장에서 수십만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유엔안보리 <제재결의>에 대해 규탄 배격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진행되어 대형사진과 함께 보도되었다.
*저녁 식사는 주로 배추국, 물김치와 함께 해외동포사업국 여러분이 보내 준 명랑젖, 창란젖, 고추장으로 먹었다. 나는 조그만한 그릇에 명랑젖, 창란젖, 고추장을 담아 옆방의 제임스 드레쯔나크씨와 위층의 리철재 선생에게 나눠주며 저녁 식사때 다른 반찬과 함께 식사하라고 나눠주었다. 그들은 무척 좋아했다.
오후9시에는 리영미 간호원의 저녁수기치료를 받았다. 그러다가 10시쯤 잠이 들었다.
2009년 6월17일(수요일): 보슬비와 약간 흐림
새벽4시에 깨 어제 날자 로동신문 읽고 입원생활 일기를 정리했다.
아침 식사도 죽을 들었다. 첫 소변을 다시 용기에 넣어달라고 하여 소변을 용기에 넣었다.
6시에 생명지표관찰 시간을 갖고 8시에 식후투약(비타민씨와 피쉬오일), 그리고 10시부터는 오늘부터 3시간씩 <<점적주사=drip injection>>을 실시한다고 한다. 이것은 영양제(포도당과 비타민)가 들어 있는 병에 있는 액체를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아 투입하는 것인데 혈관청소, 영양제 투입, 간 세척 등에 좋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1년에 한 두 번 정도 정기적으로 투입하면 좋다는 것이다.
간호원들과 의사들은 월요일과 토요일 전체회의를 제외하고 매일 오전8시30분부터 9시까지 로동신문 독보를 통해 교양학습시간을 갖는다. 오늘 아침은 어제 16일자 로동신문 2면에 게재된 정론 <세계가 우리를 부러워하게 하라!>는 제목의 글 (1)을 학습한다. 이 정론은 지난 5월에 이어 6월초에 검덕지구 광산들과 단천시내 공장, 기업소들을 현지 지도한 김정일 위원장의 커다란 기쁨에 관련하여 검덕 봉우리에 <백금>광석들이 쏟아져 내려 미래가 창창하다는 전망을 밝히고 있다. 위성발사외 핵 시험 성공 등으로 강성대국을 향하는 북부조국의 미래는 창창하다는 전망이다. 이것은 모두 김정일 위원장이 계시기에 가능하다는 정론이 옹근 한 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다.
*아침 섭섭한 소식이 들렸다. 제임스 드레째나크씨가 양복을 입고 병원을 떠난다고 인사차 방에 들렸다. 23일께 한번 들린다고 말한다. 짧은 시간에 정이 들었던 사람이다.
한편 해외동포사업국의 최길호 처장, 신성 지도원, 그리고 한금실 지도원이 낙지, 땅콩, 참외, 귤, 맥주와 술까지 들고 방문했다. 특히 한금실 지도원은 집에서 손수 만든 김치를 갖고 위문 왔다. 150일전투에 여념이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어 방문해 주어 무척 고마웠다. 이들이 막 떠나고 보니 내가 점적주사를 맞는 동안이라 냉장고 안에 있던 음료수 하나라도 대접하지 못하고 보내서 못내 아쉬웠다.
*나는 오전10시부터 오후2시까지 무려 4시간 동안 <<점적주사=drip injection>>를 맞으며 시간을 보냈다. 한금희 과장선생과 그리고 리영미 간호원이 번갈아 가며 대화를 나무며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간호원 동무는 검정 쉐타 구멍 난 것과 카메라 가방 구멍 난 것을 바늘로 꿰메어 주며 간호원은 때로는 어머니와 같은 직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1살짜리가 마치 어머니 같은 느낌도 들게 하여 감동을 받는다.
오후4시 수기치료를 하고 위층 이철재 선생 방에 올라가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눴다. 부인은 무료했는지 앞 정원에 나가 풀을 뜯어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병원에 둥지를 틀고 있는 20여 마리 비둘기에 매일 아침 먹이주기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나는 리영미 간호원 동무가 집으로 퇴근하는 길을 배웅하면서 비둘기들의 쉼터를 찾았다. 마침 비둘기 관리원이 그곳에 있어 그와 비둘기에 대해 알아 보았다. 20여 마리의 비둘기들 하나 하나를 모두 알고 있는 관리원이다. 비둘기의 수명은 15년. 암놈, 숫놈은 언제나 사람처럼 자기 쌍과의 관계만 한다고 한다. 한 쌍이 교미를 하면 15일 만이면 두 개의 알을 낳는다고 한다. 알을 낳으면 그것은 10일 정도가 되면 알에서 새끼로 태어나 세상구경을 하게 된다고 한다. 비둘기 집 가운에 위치한 티벡이라고 하는 숫놈의 집에는 그의 암컷인 문선이가 두 마리의 새끼를 돌보고 있다. 그런데 수놈이 외출한 사이에 옆집 수놈이 집적거린다. 그 암놈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피하기만 한다. 그러던 중 그 암놈의 수컷인 티벡이가 날라 들어와 옆집 수놈을 위협하며 쫓아낸다. 비둘기의 한 쌍은 정말 다정한 모습이다. 비둘기 집 왼 쪽 끝에는 목이 조금 짧고 굵은 수놈이 암컷을 접근하여 부리로 상대방 부리에 갖다 데고 환심을 사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다가 서로 통하면 같은 집에서 동거를 한다고 관리인은 설명해 준다. 비둘기의 생활이 일정부분은 사람과 유사하기도 하다.
*저녁식사는 한금실 지도원 동무가 주고 간 싱싱한 배추김치, 명란 젖, 창란 젖, 고추장 등으로 잘 들었다. 이것들을 접시에 담아 위층에 리철재 선생에게도 전달해 달라고 새로 근무한 간호원(박설경)에게 부탁했다.
*오후7시30분부터 30분 동안 뜨거운 물로 샤워 겸 목욕을 했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 8시에 식후투약을 받고 중앙테레비죤 보도를 듣는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취침 전에 수기치료를 받았다. 낮 치료와 밤 치료가 조금 다른 것 같다. 치료를 받는 동안 자연스럽게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2009년 6월18일(목요일): 약간 흐림
오늘도 4시에 깼다. 세면을 하고 병원에 와서 찍은 사진들을 컴퓨터에 정리했다. 아침 6시께 한금희 과장선생이 방문하여 안부를 묻고 지난 밤 수면이 잘 되었는지 묻는다. 나는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6시가 넘어서 오은옥 간호장이 와서 생명지표관찰을 했다. 어제 밤에 청년호텔에 왕진을 다녀왔다고 말한다. 근무하다가 해외동포들이나 외국인들 문제가 생기면 왕진을 갔다 오는 것이 비일비재한 것 같다.
7시께 비둘기 집으로 갔다. 카메라를 갖고 정문 수위관리인에게 사진촬영을 부탁하고 창고에 있는 강냉이 그릇을 들고 비둘기에게 먹이를 뿌렸다. 비둘기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먹이를 주는 장면을 정문 수위관리인이 잘 찍어주었다.
8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정원 산책을 하며 리철재 선생 부인을 만나 그의 병세에 대해 주고 받았다. 부인은 그의 병은 ‘골수암’인데 본인은 모른다고 말한다. 중국측 병원 의료진에서는 반년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고, 국제친선병원 측 또한 몇 개월 넘기기가 어려운 상태라는 것을 진단받았다며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답답해 한다. 아들이 얼마 있으면 병원에 문병오는데 그때 그 문제를 타진하고 아버지의 병을 알리든지 아니든지 그의 사업체, 그리고 유언 등을 듣는 기회가 되면 어떨지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나는 9시30분에 포도당과 비타민 점적주사(drip injection)를 12시까지 맞았다. 그 동안 리영미 간호원의 병원생활 3년에 대해 들었다. 이 간호원은 터키 외교관의 위경련 환자치료(일주일 입원)를 비롯하여 재미동포청년의 구토치료(이틀 입원), 중국대사관의 여직원이 마비현상이 와서 열흘간 치료하여 기초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간 이야기 등 그 동안 외국인 환자들, 해외동포들 치료한 경험담들을 들려 주었다.
한금희 과장선생은 점적주사를 맞는 동안 병실을 방문하여 진행상황을 살펴보면서 내일부터는 탕도 함께 들자고 권유한다.
오후1시 점심식사는 야채국, 가재미, 호박전, 상추와 오이, 쇠고기 등이다. 쇠고기 빼고는 전부 먹었다. 처음으로 밥맛이 나온다. 그리고 위층 리철재 선생 부인이 쇠고기 장조림 한 접시를 보냈는데 두 개 정도 먹고 남겼다. 특히 상추와 오이를 쌈으로 먹은 것이 좋았다.
위층 리철재 선생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인생의 4악장을 준비하는 것은 누구나 막론하고 일찍 준비하여 놓은 것이 좋다는 요지로 이야기를 유도했다. 그래서 나도 이곳에 요양여행을 오기 전 《민족통신》성원들과 유언식의 대화를 주고 받았다고 말해 주었다. 조직에 관한 후계문제, 가족들에 대해 사후문제를 이야기하여 둠으로써 만약의 사태에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리철재 선생, 부인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편 북의 후계자 문제를 이야기 하다가 리철재 선생 부부는 이미 북의 후계자로 김정운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들어서 알게되었다면서 이북에서는 요즘 “수령복, 장군복, 인민복 3대복에서 이제는 《대장복》이 하나 더 늘었다”고 설명해 준다. 주체사회주의 3세대 후계체계는 대외적으로 공식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6월초 이북의 직장단위에서는 이미 공식화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동시에 그 후계자가 될 인물은 선군정치를 받들어 그 동안 이뤄 놓은 군사강국, 정치사상강국, 그리고 이제 곧 이뤄 놓을 경제강국 등의 선대 영도자들의 업적에 기초하여 새 시대에 걸 맞는 지도자가 될 것으로 이북동포들은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금년 4.15축포행사 계획과 5.1절 행사로 105층 류경 호텔 중심으로 전개된 화려한 축포행사도 3세대 지도자가 될 인물에 의해 계획되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 3세대 지도자는 모든 측면에서 천재가 아니라 만재로 알려 질 정도로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는 인물로 외모도 할아버지(김일성 주석)를 빼 닮은 것으로 이북동포들의 입과 입으로 회자되고 있으나 이것이 공식적으로 언제 어느날 발표될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 위층의 환자 실에서 부인이 함께 기거하며 남편의 시한부 인생을 지켜보고 있는 재중 동포와 이러 저러한 대화를 나누다가 내일이 6.19 45돌인데 병원입구 입상에 꽃바구니나 꽃 다발을 올리면 어떻겠느냐고 제언하자 둘이 공감하여 한금희 과장선생을 통해 병원측에 부탁했다. 이날은 이북동포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한 날을 기념하여 그의 주체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각종 업적들을 경축하는 날로 새겨 왔다고 한다. 이번의 6.19는 특히 45돌이기에 국내외에서 각종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관계로 각계 각층에서 주문한 경축 꽃들이 쇄도해 온 것 같다. 여러 화원에 알아보았는데 꽃들이 동이 나서 꽃바구니를 주문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정이다. 과장 선생은 그래도 우리들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수소문을 한 결과 꽃바구니는 힘들고 꽃다발을 부탁할 수 있었다고 뒤늦게 알려왔다. 우리는 한 사람이 5 유로를 내기로 했다.
저녁8시 보도시간이 끝나고 9시부터는 북과 사우디아라비아간의 2010년 남아공에서 열리는 월드컵 축구본선진출 자격권을 얻는 최종 마지막 경기가 사우디에서 진행되었는데 녹화된 내용을 방영해 준다. 양팀 득점 없이 끝나 북조선 팀이 남한과 함께 같은 조 1,2위로 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시아 1조에서는 오스트랄리아와 일본이 출전한다.
2009년 6월19일(금요일): 안개끼고 흐림
오늘은 새벽3시30분에 깼다. 세면을 하고 로동신문을 읽고 요양일기 밀린 부분을 정리했다. 새벽5시25분부터 건물 밖에 나가 병원 둘레를 4바퀴 빠른 걸음으로 돌고 나서 비둘기들 밥을 주며 이들과 사귀었다. 수놈은 목이 두껍고 길고, 암컷은 목이 짧은 것으로 구별한다고 관리인이 다시 말해준다. 비둘기의 특징은 또 강을 건너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둘기들은 주로 대동강 동쪽에서만 나들이를 한다고 한다.
6시 생명지표관찰 시간에는 오옥금 간호원이 맥박, 체온, 혈압을 쟀다. 66-35-120/80이 나왔다.
18일(목요일)자 로동신문 머리기사는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선군조선의 빛나는 전성기를 열어나가자>라는 큰 제목에 작은 제목으로는 <현지지도단위들에 대고조의 기상 나래친다>는 소식을 전한다.락원기업련합기업소, 희천정밀기계공장, 흥남비료련합기업소 등에서 150일전투가 한창이라는 말이다. 이날자 로동신문 2면에는 ‘정력적인 현지지도 강행군으로 혁명적 대고조의 새 역사를 펼치시는 위대한 령도’라는 제목의 옹근 한페지 글이 실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 해 12월 강선노동계급을 찾아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봉화를 지핀 때로부터 지금까지 반년도 안 되는 기간에 무려 근 80개의 단위들을 현지지도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는 소식과 함께 이 현지지도 강행군은 후손만대의 영원한 행복의 터전을 굳건히 다지는 성스럽고 보람찬 투쟁의 길이라고 필자 김홍근은 풀이했다.
한금희 내과과장 선생도 이른 아침 정원의 잔디에 난 풀들을 뜯어 토끼에게 먹이를 주는 일을 하고 일과를 시작한다. 야간근무를 한 것 같다. 병동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정원으로 나갔다. 리철재 선생 부인도 산책을 나왔다. 과장선생, 리철재 선생 부인과 아침 대화를 나누며 의학상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암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토끼들은 실험용으로도 이용된다고 한다. 토끼들은 교미하면 한 달에 한번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리철재 선생 부인과 함께 정장을 하고 꽃다발을 가지고 병원 입구 입상 앞에 증정하고 인사를 했다. 병원 측 간부들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문에 나가 기념촬영을 했다.
일주일 한번 정도 간호원들, 의사들의 배구경기가 병원운동장에서 열린다
오늘은 11시30분에 수기치료에 들어갔다. 오은옥 간호장이 치료했다. 그리고 점적주사는 오늘 쉬었다. 12시30분 병원 운동장에는 점심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배구경기가 열리고 있다. 오늘 금요일 경기는 주로 간호원들과 여성관리인들의 경기라고 한다. 선수들 중에 쉬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나도 잠시 경기에 참여했다. 그럭 저럭 경기에 참여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은 되는 것 같다. 내과와 외과 간호원들이 약간의 점수차이로 다른 과들 선수들을 이겼다. 잠시 경기해도 땀이 났다.
한시 쯤 먹었던 점심식사는 맛이 있었다. 상추쌈이 더 먹고 싶어 야채를 더 요구했더니 리영미 간호원은 식당에 가서 더 가져오며 “직접 밭에 가서 야채를 거둬 씻어서 가져 온 것”이라고 말한다. 너무 고마웠다. 배구를 하여 약간의 땀을 흘린 탓인지 밥맛이 아주 좋았다.
오늘은 점적주사를 맞지 않았다. 외출하는 날이기에 쉬자는 뜻 같다. 오후2시 반에 온다던 신성 지도원은 4시가 넘어서야 다른 안내원 박광석 지도원과 함께 도착했다. 사이다, 술, 튀김과자, 생과자, 빵 및 음료수들을 들고 왔다. 늦은 것은 바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해외동포사업국 승용차를 타고 와 그 차로 시내로 나갔다. 우선 병원에 들어와 이모 저모 찍어 놓은 사진들을 뽑았다. 84장에 72달러가 들었다. 큰 사진 하나를 선물로 뽑아달라고 해 하나 만들었다. 의사선생들과 리철재 선생부인 등 6명이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이발소에 가서는 옆머리 염색과 이발비용을 물었다. 12유로라고 한다. 다음에 깎기로 했다. 그리고 2층 커피숍에서 7월4일 방북하는 《민족통신》성원들의 일정을 협의했다. 이미 대략적인 구상을 갖고 있다. 언론사 참관과 언론인과의 대화가 들어 있어 좋았다.
고려호텔 옆 단고기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며 한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 중에 하나는 미국인 여기자의 면회 여부를 타진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어려운 일로 생각되나 내 큰 딸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중국계 여기자 로라 링이기에 잠시나마 면회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들은 캘리포녀 주립대학(ucla)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로 졸업후에도 남편 등 지금까지 가장 절친한 관계로 사귀어 온 친구이기에 필자와도 아는 사이이다. 그런데 문제는 로라 링이 정상통로를 통하여 취재활동을 하지 못하고 브로커에 의해 불법적으로 북측 땅으로 침범하여 들어가 사진촬영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연행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한 내용들이 보도를 통하여 알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결국 북측 사법당국에 의해 12년 노동형 벌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내가 방북 할 때 내 큰 딸이 가능하면 잠시라도 면회 한번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것이 워낙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가능할지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고 고려호텔 입구에서 최순철 참사를 만났다. 다른 참사들은 모두 150일 전투현장에 나가 평양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사무실에는 자기 혼자 밖에 없는 처지라고 설명하며 2012년 강성대국을 향한 이북동포들의 움직임이 모두가 바쁜 실정이라고 귀띔해 준다. 그는 인생말년에 평양에서 운명한 최홍희 선생 유가족들을 돌보고 있는 형편이라고 밝히며 토요일 떠나면 면회를 오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병원에 들어오니 밤9시가 되었다. 리영미 담당 간호원이 무척 기다렸다는 반응이다. 오후6시까지 온다던 환자가 3시간 늦게 들어 왔으나 걱정되지 않을 리 없겠다고 생각하여 잘 설득시켰다.
2009년 6월20일(토요일): 보슬비
아침 3시40분께 깼다. 세면을 하고 밀린 일기를 정리했다. 이른 아침시간에는 어제 찍은 사진들을 포토 숍에 넣어 사진작업을 하여 컴퓨터에 입력하여 놓았다. 6시에 생명지표관찰을 받았다. 체온, 맥박, 혈압 모두 정상이다.
비가 와서 비둘기들이 먹이를 어떻게 먹을 지 궁금했다. 우산을 쓰고 비둘기 집을 가서 먹이 주머니에 있는 강냉이를 한 그릇 들고 나와 구구하며 뿌려 주었으나 비둘기 집에 머리를 내민 비둘기들과 다른 건물 처마 밑에 앉아 있는 비둘기들은 비 온 땅에 떨어 진 강냉이를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건물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 실내 복도에서 몇 차례 왔다갔다하며 걷기 운동을 했다.
오늘은 <평양친선병원>창립39돌이라고 한다. 비가 안 오면 운동경기를 하려고 하였는데 비가 와서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고 리영미 간호원은 궁금해 한다.
8시 아침식사는 처음으로 둥근 빵 두개, 계란 한 개, 뻐터, 잼, 그리고 홍차가 나왔다. 미국생활에서 아침식사를 안 먹어 왔다고 하니깐 간단히 준 것 같다.
<<점적주사=drip injection>>는 9시 반에 시작하여 12시30분께 끝났다. 오늘은 리영미 간호원이 오른 손 혈관에 주사바늘을 넣어 영양제를 넣은 다음 나중에 바늘을 뽑은 자리에 한참 동안 가제에 손을 얹고 주사 바늘에 찔린 자국들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손 등에 주사바늘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간호원은 근 3시간 동안 조용 조용히 방 바닥 청소, 유리창 청소, 화장실 청소, 환자 방의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걸레로 훔치는 일을 매일 상습적으로 한다. 환자의 내복과 양말도 담당 간호원들이 직접 빨아준다. 입원실 그 어디에도 더러운 곳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점심시간에는 위층의 리철재 선생부인이 올라와서 함께 점심을 하자고 권한다. 올라가 보니 특별히 주문한 단고기를 점심으로 대접한다. 아주 맛있게 먹었다. 나는 어저께 맡겨서 찾아온 사진들을 각자에게 돌려 주었다. 한금희 과장선생, 위층의 리철재 선생과 그 간호원 전은주, 나를 치료해 주고 있는 오은옥 간호장, 리영미 간호원, 오옥금 간호원에게 각각 사진들을 나눠주었다. 다들 사진이 잘나왔다고 고마워한다. 그리고 제임스 드레쯔나크씨의 사진은 리영미 간호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식사를 하고 정원을 거닐었다. 간호원들은 휴식시간에 잔디 밭에서 계속해서 풀을 뜯는 장면을 목격했다. 알고 보니 한 간호원 당 2개월 정도 기간에 잔디밭에 나온 씨들을 모아 일인당 50그램을 모으는 것을 자발적인 과제로 주었다고 한다.
20일자 로동신문은 <미제의 사촉하에 조작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결의’를 규탄배격하는 평남, 평북, 자강도, 황해남도 군중대회 진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포함하여 2면에 <조선사람의 본때>, 3면에 <150일전투의 요구에 맞게 당사업을 끊임없이 심화시키자>, 4면에 안영기 비전향장기수 선생의 80회 생일을 맞아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생일상을 받아 안았다는 소식 등을 보도했다.
*오후 시간에는 재중동포 20여명이 버스로 병원을 방문와서 위층의 리철재 선생을 위문하고 돌아갔다. 그 중의 인솔자가 우리 방에 들러 위로하고 갔다. 나는 버스에까지 나가서 그들을 배웅하며 기념촬영도 했다. 리철재 선생이 그들이 떠날 때 눈물을 지었고, 그 부인이 버스가 떠날 무렵 흐느껴 운다. 여기서 요양하고 회복되어 나가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독백하면서 눈시울을 적신다. 남편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 때문이다.
오늘 저녁도 단고기가 많다. 방에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리철재 선생이 권한다. 올라가서 식사를 함께 나누고 내려왔다. 리철재 선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부인은 오늘 손님들이 다녀가면서 가져 온 선물(과일)을 건네주었다. 그 과일과 생과자 쇼빵 등을 간호실에 전해주며 주말 야간근무자들에게 나눠 먹으라고 주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보슬비가 촉촉히 내려서인지 마음이 그리 밝지 못하다. 게다가 주말인 토요일인지라 간호원들 대부부분은 집으로 갔고 주말 야간 근무자들만 남은 것 같다. 병원 입구 접수실에는 고려의 김은희 선생과 한 간호원이 야간근무를 하고 있어 저녁9시 수기치료를 마치고 사이다, 신덕수 샘물과 생과자 한 봉지를 들고 인사 겸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리로 갔다. 부부문제를 비롯하여 정세문제, 세대 차 문제, 미국생활과 북부조국 생활 문제 등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면서 여러 가지를 서로 공부할 수 있었다.
가정에서의 부부 사이의 문제에 있어 위계질서가 분명하다. 남자중심으로 질서가 잡혀 있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이혼은 거의 없었다. 담배 피우는 여성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이 사회의 기풍은 깨끗하다. 애처가라는 말은 있는데 공처가라는 말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공처가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이혼율도 거의 없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가정마다 시부모들과 함께 산다든지 아니면 장인 장모와 함께 사는 것이 일반 가정들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밤 12시가 가까워 온다. 한금희 내과 과장선생이 슬그머니 입구 접수실로 와서 잠시 대화를 함께 나누다가 취침에 들어야 한다고 하여 내과입원실로 와 잠자리에 들었다.
-북, 남측에 미국 핵무기 1천기 이상 배치 주장
기사입력: 2009/07/19 [13:28] 최종편집: ⓒ 자주민보
[편집자 주: 지난 6월 13일부터 민족통신 노길남 대표가 평양친선병원에서 21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폐기종 등 위험한 질병이 발병한 것을 미국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던지 지난수기 상편에서 노길남 대표는 미국 지인들에게 유언까지 남겼다고 밝혔다. 해외동포로서 모든 것을 다 바쳐 조국의 통일과 번영 그리고 북미관계정상화를 통한 세계평화를 위해 일해온 그가 부디 쾌차하기를 바라며 치우침이 없이 개관적으로 북녘사회의 여러모를 소개하고 있어 중편 전문을 소개한다.
이번 중편에서는 상편에 이어 월북한 미군병사 드레쯔나크를 만나 이야기와 월북했다가 북에서 만나 결혼한 일본인 아내와 함께 몇년 전 일본으로 건너온 젱킨스의 왜곡발언에 대한 문제점을 언급하고 있으며, 지난 상반기 2차 핵시험 당시 각지에서 벌어진 반미규탄대회 분위기도 자세히 전하고 있으며 시부모나 장인장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북녘의 가족문화 등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있게 다루고 있다. 글은 정치포털 서프라이즈에서 퍼온 것이다.]
병원 정원에 위치한 장미꽃 길 앞에서 기념촬영
《평양친선병원》입원생활 통해 북녘사회 이해(중)
노길남 박사, 건강회복위해 평양서 3주 병원생활
2009년 6월21일(일요일): 흐리고 맑음
오늘도 새벽4시쯤 깼다. 세면을 하고 베란다 밖을 나가 바라보니 안개가 자욱이 낀 날씨이다. 앞쪽에 보이는 아파트 단지에는 20여 개의 창문들에서 불빛이 흘러 나왔다. 나처럼 일찍이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위층 입원한 환자 리철재 선생이 본 중국연속방송 <진펄을 헤쳐> 8부작을 마지막 부분까지 감상했다. 간호원이 어제 주고 간 비둘기 먹이 콩 그릇을 가지고 6시께 비둘기를 불러 뿌려 주었다. 산책을 하고 아침 6시30분께 생명지표관찰을 받았다. 정상으로 나왔다.
가운데 내과의사 한금희 선생ㅡ 그 왼쪽이 오옥금, 바른쪽에 리영미 간호원
아침식사를 하고 위층 리철재 선생을 잠시 만나고 내려와 내과 간호원 사무실에 비치한 벽시계가 고장 난 채 멈춰있어 그것을 한번 고쳐보려고 내려서 스쿨드라이버로 전부 뜯어 점검하여 보았다. 전지 약과 그것이 연결된 시침, 분침, 초침의 부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그것들을 바치고 있는 밑창 받침대를 바짝 조이는 순간 초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기계 고치는 일은 처음 해 보았다. 다행스럽게 성공하여 흐뭇한 생각이 든다.
오늘 손님들이 선물로 주고 간 술병들이 많다. 그것들을 모두 내과 과장에게 드리면서 의사 선생님들 가끔 필요한 경우에 나눠 드셨으면 좋겠다고 하며 드렸다. 이 술들은 <해외동포사업국> 일꾼들이 문병 차 올 때 가져온 ‘일봉’이라는 소주 열병이었다.
오늘 점적주사는 생략했다. 앞으로는 이틀에 한번 하기로 했다고 알린다. 점식식사 직전에 탕약을 했다. 이것은 어제에 이어 이틀째이다.
*점식식사는 쌈과 고추장, 생선구이, 닭고기로 들었다. 특히 쌈으로 입맛을 돋구었다.
오후에는 산책도 하고 일요일 근무하는 간호원들과 이런 저런 대화도 나누었다. 두 간호원과 생활에 관한 대화, 남녀관계에 관한 대화, 업무에 관한 대화, 재미동포 생활에 관한 대화 등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도 가졌다.
한 간호원은 중학교를 마치고 16살에 인민군에 들어가 6년 근무하고 하사로 제대하고 22살에 이 병원에 간호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북 군대 계급호칭과 남녘 군대 호칭이 달라 그것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병사급은 처음에 병사(빨간 선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졸병), 그 다음이 초급병사(붉은 판에 노란줄 하나), 중급병사(노란 두줄), 상급병사(노란 세줄), 하사(굵은 한줄), 중사(굵은 한줄과 얇은 한줄), 상사(굵은 한줄과 얇은 2줄), 사관장(노랑 t 자)으로 병사칭호는 끝난다. 그 다음은 군관으로 소위(한줄에 작은 별 하나), 중위(한줄에 작은 별 2개), 상위(한줄에 세개 작은 별), 대위(한줄에 4개 작은 별), 그 다음에 소좌(두줄에 한 개 별), 중좌(두줄에 두별), 상좌(두줄에 세별), 대좌(두줄에 4개 별)로 남녘의 위관급과 영관급이 이에 해당된다. 그 다음은 별자리로 장성급에 해당되는데 북에서는 장령급이라고 하는데 소장(노랑판에 흰별 하나), 중장(두개 흰별), 상장(세개 흰별), 대장(4개 흰별)이고 그 다음이 차수, 원수 등으로 되어 있다.
*오늘 오후 5시 수기치료는 리영미 간호원이 해 주었다. 솜씨가 하루 사이에 확 달라진 느낌이다. 어떻게 그렇게 달라졌느냐고 물으니 “선생님이 지도하여 주셔서 그렇다”는 대답이다. 영미 간호원은 아마도 자신의 수기치료에 대해 별도로 연구했던지 아니면 특별지도를 받은 것 같았다. 아무튼 무척 고마웠다. 시작부분과 마무리 부분, 그리고 복부치료 솜씨, 혈맥과 혈맥을 누르는 기법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간호장 수준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탕약도 마시고, 비타민 씨 주스도 따로 마시고, 그리고 하얀 작은 알약도 정기적으로 들었다. 점적주사는 이틀에 한번 하기로 하여 오늘은 하지 않았다.
*오늘은 일요일이어서 테레비죤 통로가 세 개나 열려 방영되었다. 북과 사우디 아라비아간의 월드컵 본선진출 마지막 경기는 또다시 녹화방송을 해 주었다. 북 대표 선수들은 평양에 돌아와 뜨거운 환영식도 받았다. 44년 만에 본선진출을 따낸 성과이기에 그 분위기는 대단했다.
이북사회 가는 곳 마다 조국통일을 갈망하는 구호들과 문귀들이 수두룩하다. 병원내 운동장에도 통일구호가 발견.
*로동신문 오늘자 머릿기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난 45년 동안에 발표한 당 건설과 당 활동에 관한 수많은 노작들과 불멸의 업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하단에는 지난 19일과 20일 사이에 진행된 각 도 소재지들에서의 유엔안보리의 <제재결정>에 대한 규탄집회이다. 평양에 이어 황해북도, 강원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량강도 군중대회도 진행된 소식이 실렸다. 5면에는 이명박 정권이 지난 6일 오산공군기지 사령부를 찾아가 북침전쟁연습을 진행한 내용을 보도한 기사를 포함하여 6면에는 미국의 진보언론 <워커즈 월드>가 지난 4일 사설에서 북조선의 제2차 핵실험의 정당성에 대해 다룬 내용을 요약소개하기도 했다. 한편 조선중앙테레비죤방송은 전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150일전투를 통하여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각계 각층의 들끓는 소식들을 포괄적으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언론들은 각계 각층에서 얻은 성과들과 북녘사회 최고지도자와의 유기적 관계를 신앙고백하듯 하는 테레비존 프로그램과 신문의 기획 글들을 통하여 북녘동포들의 일심단결을 과시하고 강조하기도 했다.
*저녁식사도 내가 좋아하는 쌈이 나왔다. 오늘 저녁은 조용하게 쉬는 날이 되었다.
2009년 6월22일(월요일): 약간 흐리고 맑음
오늘도 아침4시에 깼다. 어제 저녁은 일찍부터 테레비죤을 보다가 잠이 들었다. 누군가 부드럽고 따뜻한 털 담요를 덮어주고 나갔다. 두 시간 동안 어제 날자 로동신문과 밀린 병동일기를 정리하고 산책을 나갔다.
5시30분부터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여 병원 둘레를 6바퀴 돌았다. 약간 땀이 나기 시작한다. 세면을 하고 맑은 기분으로 오늘의 요양을 시작한다.
6시 생명지표관찰에서는 맥박은 72, 체온은 35도7로 나타났다. 아침 운동한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어제 밤에는 아프리카 나이제리아 대사관 성원 중 한 사람이 11시께 입원했다. 당뇨병 환자로서 혈당이 내려가 숨이 차고 견디기 어려워서 입원한 모양이다. 위층에는 시리아 대사관의 젋은 직원이 심장병으로 입원하여 가끔 소리를 지르며 통증을 토로하여 병원 내 모든 사람들이 알 정도로 엄살이 심한 환자로 알려졌다.
<평양친선병원>의 운영목표와 실천방향도 뚜렷하다. 병원 내 벽에는 <3중 3대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전망 결의목표>가 나붙어 있다. 주체96년 2월13일부터 3년 후인 주체99년 6월20일까지의 과업목표가 설정되어 있다. 이 운동의 중심과업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의 요구에 맞게 사상혁명, 기술혁명, 문화혁명을 적극 다그치는 것이라는 뜻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풀이를 전제하고 있다.
이 병원도 사상혁명을 기본으로 틀어쥐고 기술혁명을 지향하고 있다. 한 건의 전염병도 없이 노력하면서 매년 1만6천명의 외래환자, 2백 명의 입원환자를 치료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 밖에도 2010년 6월20일 병원창립 40돌까지 학사12명, 박사2명 양성, 20대의 컴퓨터로 각 부서에 연결하여 모든 사업처리를 컴퓨터화한다는 방침이다. 그리고 해마다 국내약품(400만원상당), 수입약품(1만5천 유로 상당)을 구입하며, 2010년까지 31만원 분의 약을 자체로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이 병원의 문화혁명 목표도 뚜렷하다. 간호원은 처음 무급에서 시작하여 2년 정도 있으면 5급이 된다. 그 다음에는 보건성에서 실시하는 시험을 쳐야 4급, 3급…등으로 진급한다. 이 병원의 목표는 간호원 기술급수를 평균2.2급으로 올리는 것이며, 근로자 기술급수는 평균 6.1급으로, 의사기술급수는 평균3.1급으로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종업원들은 2가지 이상 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태양절, 2.16, 12.24를 맞으며 세포별 예술소품경연을 조직할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 밖에도 150그루 이상 나무들과 꽃 관목을 심으며 50평방미터의 꽃밭조성, 5백마리 토끼 기르기, 3백 킬로그램 콩, 5톤의 남새(야채)를 자체 생산하며 2010년까지 5백킬로 그램의 꿀을 생산하도록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또한 전쟁 시에도 100% 동원되어 지원할 수 있도록 군사사업 훈련도 철저히 병행하고 있다. 4.25, 7.27, 12.24를 맞아 인민군대 원호사업도 성심 성의껏 하자는 결의들이 표명되어 있다.
식전 탕약을 먹고 8시에 아침식사를 했다. 한금희 과장선생이 출근하여 8시15분께 안부를 묻는다. 나는 오래 동안 등의 한 부분이 근육이 뭉쳐서 아파왔다고 설명해 주었다. 자세히 진단해 보고서 그는 아마도 척추신경과 그 부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며 그 부분 렌트겐 촬영을 한번 해 보자고 제언했다. 조사한 결과 척추 중 일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있지 않은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그 부위를 동시에 치료하기 시작했다.
병원 담넘어로 보이는 북녘동포 아파트단지-가정마다 꽃들이 보인다.
오전9시30분부터 점적주사를 맞았다. 오후 1시가 약간 넘어서야 끝났다. 3시간 반 동안 주사를 맞으면서 21살짜리 리영미 간호원과 긴 대화를 나눴다. 이 간호원은 상식과 교양지식도 많다. 국제사회 유명여성들에 대해서도 해박하다. 어려서부터 혁명에 뛰어들어 활약한 러시아의 로자 룩셈부르크, 국제부녀절(3,8)의 창시자 클라라 제뜨긴 여사의 헌신적인 생애를 포함하여 중국의 장개석과 다투며 혁명활동에 헌신해 온 손중산의 부인 손경령이 남편의 혁명위업을 위해 지조와 신조를 가지고 아내로서 내조한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세계 진보역사의 한 획을 그은 칼 맑스의 부인 엔리 맑스의 이야기 등에 대해 읽은 소감에 대해 말해주기도 한다.
손경령은 남편이 때로 실의에 빠져있을 때 “실패에 낙심하지 말고 그것을 경험으로 삼고 승리하라”는 격려와 “밖에도 적들이 여러 명이지만 안에 있는 적 한 명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하며 잘 생각해 보라는 충언, 그리고 좋은 사람 충고에 귀담아 들으라는 말을 남편에게 하여 주어 혁명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맑스 부인 엔리는 결혼하여 가난하였지만 그 생활고를 극복하며 저서 출판에 교정도 해주고, 밤새도록 연구활동에 뒷바라지를 하여 남편이 위대한 혁명가, 철학가가 되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한 여성을 잊지 못한다고 회고해 준다.
1시가 넘어서 점심을 들었다.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쌈이 나왔다. 상추쌈으로 맛있게 먹었다. 야채 국과 호박 요리도 맛있었다.
오후 4시께 수기치료가 끝나는 시간에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최순철 참사가 최길호 처장과 장윤호 지도원과 함께 위문 차 방문하면서 빵과 주스, 물 등을 선물로 사 들고 왔다. 함께 담화를 나눴고, 나중에 최참사와 둘이서 이런 저런 가슴에 묻어 둔 이야기들을 나누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성원들은 150일전투 현장에 나가 이달 말께 돌아 올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일 전에 로스엔젤레스 <민족통신>에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장이 온 내용을 최 참사가 나에게 전해 준다. 오는 7월4일 백승배 민족통신 성원(임시 대표대리)과 손세영 민족통신 운영위원이 평양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 표를 샀다는 소식이다. 그 날이 기다려 진다.
리영미 간호원과 김성화 간호원은 퇴근하고 오은옥 간호장, 박설경, 오인옥 간호원들이 오늘 야근을 한다고 한다. 오늘 저녁은 특히 한금희 내과과장 선생이 집에서 손수 만들어 온 김치가 저녁식사 맛을 한층 더 돋구어 주었다. 병원에서 음식 솜씨가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나 있다. 이 세상 어디에서 환자에게 담당 내과과장 선생이 김치를 담구어 선물로 줄까?
저녁 식사를 하고 내과병원 야근을 하는 김향 의사선생(내과 겸 소아과)과 오은옥 간호장과 간호실 방에서 강냉이 튀긴 것, 참외 등을 나눠 먹으며 가정생활, 직장생활, 미국생활 등에 대하여 서로 묻고 답하는 식의 대화를 나누며 이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고, 그리고 이북동포들이 재미동포들과 미국사회를 이해하는데 일정 정도 도움을 주었다. 대화 중에 늦은 밤인데도 장광석 원장 선생이 잠시 들려 안부를 전하며 대화를 나누다가 떠났다.
재중동포들이 병원을 방문하였다가 병원건물 입구서 함께 기념촬영
나는 대화 중에 이북의 가정생활 중심이 세대주(남편)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애처가는 있어도 공처가가 거의 없는 사회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경제생활은 주로 여성에 의해 운영된다. 남편이나 자식들이 직장에서 월급을 받으면 모두 부인 혹은 어머니에게 주는 것이 상례라고 한다. 가족들이 용돈이 필요한 경우에는 어머니에게 타 쓰지만 남편이나 아들들이 부엌에 들어가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할 정도이다. 서방사회에서는 남자가 밥을 하고 요리를 한다든지 혹은 설거지를 하는 경우가 흔한 편이라고 말하자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다. 이북 여성들은 한마디로 마음이 깨끗하고 용모들이 단정하다. 간호원들이 퇴근할 때 보면 이들의 옷차림 새가 무척 깔끔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초록색 투피스, 빨강 상의에 검정치마, 베이지 색 바지에 노르스름한 자케트, 검은 천에 흰 줄로 된 천으로 서양에서는 패션모델들이 입는 옷 등을 보면서 일상적인 거리에서 보는 옷차림새와 많이 다르다는 점들도 관찰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서방세계에서 볼 수 있는 유행 옷차림(패션)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2009년 6월23일(화요일): 맑음
오늘도 4시에 깼다. 세면을 하고 약간의 몸 운동을 한 뒤 어저께 보지 못한 로동신문 22일자를 살펴보았다.
2012년 강성대국을 향한 총공격전의 서두인 150일전투가 각계 각층에서 한창이다. 로동신문 22일자 머리기사도 사설 <필승의 신념과 락관을 안고 오늘의 총공격전에 더욱 박차를 가하자>라는 제목의 글이 거의 지면 절반을 차지했다. 사설 마지막 부분은 “당 조직들은 당원들과 근로자들에 대한 신념교양을 혁명과업수행과 밀접히 결부하여 다양한 형식과 방법으로 실속 있게 짜고 들어야 한다. 특히 새 세대들 속에서 혁명전통교양, 사회주의 애국주의 교양, 계급교양을 비롯한 사상교양사업을 심화시켜 그들이 혁명적 신념과 락관으로 수놓아진 우리 혁명의 백승의 력사와 전통을 끝없이 빛내어 나가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선군혁명 영도 따라 필승의 신념과 낙관에 넘쳐 강성대국 건설의 최후승리를 위하여 억세게 싸워나가자고 호소하고 있다.
2면에는 옹근 한 페지를 <위대한 정신력을 지닌 인민은 언제나 승리한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은 결론부분에서 “위대한 당의 령도따라 불패의 정신력을 지니고 웅대한 포부와 희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신심 드높이 내달리는 우리 인민의 앞길에는 언제나 승리와 영광만이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되었다. 3면에는 유엔제재결의에 대한 규탄시위가 도청 소재지들에 이어 시 군 단위에서도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담겼다. 5면에는 <평화는 견결한 투쟁으로써만 쟁취할 수 있다>는 글이 실렸고, 그 하단에는 재중조선인총연합회의 유엔제재결의를 규탄하는 대변인 담화문이 실렸고, 6면에는 미국의 무모한 전쟁책동을 포함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심각한 현상에 대한 글들이 담겼다.
*오늘 아침에도 5시30분부터 속보로 걸어 병원 주위를 7바퀴 돌고 마지막 한 바퀴는 느린 속도로 뛰었다. 6시15분께 오은옥 간호장은 <생명지표관찰>시간이 되었다고 찾는다. 맥박은 72, 체온은 35.7로 나왔다.
간호장과의 아침대화는 시부모들과의 관계이다. 시아버지는 음악을 하시는 분이고 남편도 음악인이기에 자신도 피아노를 조금 친다고 한다. 주택은 2층으로 되어 있어 위층에는 시부모, 아래층에는 세대주, 아들 무성군, 그리고 자신이 산다고 한다. 남편이 막내인데도 시부모를 모신다고 한다. 이북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은 반드시 장남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남독녀의 경우 시집가는 경우에는 사위가 장인, 장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북에서 결혼하여도 어른들과 함께 사는 것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가족 구조와는 전혀 다른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내가 입원한 방 전방에는 14층 짜리 아파트들이 나란하게 세워져 있다. 아파트 베란다에는 대체로 예쁜 꽃들을 심어 놓은 화분들이 보이고, 드문 드문 빨래를 걸어 놓은 곳들도 보이고, 나머지는 깨끗하게 정리하여 놓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 온다.
*오전11시 무렵 한금희 내과과장 선생 안내로 위층 렌트겐 방으로 가서 잔등이 아픈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가슴과 등 촬영을 하여 그 원인을 알아 보았다. 등 부위 척추 한 두 개가 제자리에 있지 않고 불룩 튀어 나왔다고 한다.
*오늘 점심 식사는 순두부 국, 물만두, 생선구이, 야채무침, 밥 등이 나왔다.
나는 리영미 간호원에게 어제는 집에 가고 간호장이 병원에서 야근을 했는데 퇴근한 이후 집에서 부모님들과 지낸 하루 밤 일정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와 딸이 집에 온 시간이 비슷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야채국, 멸치 볶음, 계란요리, 소쌔지 무침, 김치, 남새 등을 반찬으로 만들어 주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간호원 셋이서 저녁식사를 나누며 하루 일과를 나눴다고 한다. 그 중에 중심화제는 병원에서 휴식시간에 김성화 간호원과 나 셋이서 시집가는 문제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남자동무를 어떻게 애인으로 만드는가에 대하여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나눴던 내용들이 그의 부모님들에게는 퍽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리영미 간호원의 이야기 중에서 자기 집에는 부모님 방, 자기 방, 언니 방이 있는데 어제 저녁에는 아버지가 요즘에 너무 야간 일들이 많아 집에 오지 못했다고 하며 21살 된 딸을 불러 “오늘은 나와 엄마, 너 다 같이 자자고 했다”고 하여 함께 잤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역시 그는 이런 말을 할 때는 막내다운 모습이다. 아마 아버지가 퍽 다정한 분인 것 같다.
*점심 후 리철재 선생이 정원으로 나왔다. 물론 윌체어에 실려서 나왔다. 그의 부인은 45일만에 밖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의 담당의사, 김경헙 선생, 전은주 간호원, 그의 부인 그리고 나와 나의 담당 리영미 간호원 5명이서 리철재 선생을 위로도 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한 때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 후 위층으로 올라갈 때에는 여러 명의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윌체어를 모두 들고서 계단을 올라 방으로 갔다. 방에 가서도 침대에 옮길 때에는 밑에 깔린 광목 천을 여럿이 들어 올려 침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전은주 간호원이 리철재 선생에게 보이는 지극 정성 또한 이것을 바라보는 나에게는 큰 감동을 주었다.
오후4시30분께 나는 척추교정을 위한 치료 겸 수기치료를 받았다. 오은옥 간호장과 리영미 간호원 둘이서 합동으로 하는 치료를 받았다. 오늘 치료는 다른 때에 비해 특수한 방법임을 여실히 느끼었다.
간호원들과 병원 직원들은 환자들 간호에도 정성을 다 하지만 학습에도 온 열정을 쏟는다. 퇴근 시간이 거의 된 간호원실에서는 외국어를 학습하는 소리가 들린다. 영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영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어 공부도 한다. 요양기간 동안 나에게 영어를 물어보는 경우들이 많았다. 주로 환자들과의 관계에서 주고 받는 대화체 영어 구사어들에 대한 내용들이다. 이들의 발음은 주로 영국식 발음이다. 그러나 미국식 발음과의 차이점들도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외국어를 잘하려면 무엇보다 비위가 좋아야 한다면서 우스개 표현으로 무엇보다 뻔뻔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어가 우리나라 말이 아닌데 틀려도 상관없다는 배짱으로 적극적인 자세로 임해야 된다고 강조해 주었다.
2009년 6월24일(수요일): 맑음
지난 밤은 요양기간 중 가장 오래 잠에 든 것 같다. 10시에 잠들어 아침6시경 일어 났으니깐 무려 8시간 잤다.
리영미 간호원은 6시가 되자 생명지표관찰을 위해 병실로 와 체온과 맥박을 쟀다. 36/65로 나왔다.
오전9시30분부터 점적주사를 시작하여 오후1시쯤 끝났다. 오늘 점심은 상추쌈으로 맛있게 먹었다. 한금실 해외동포사업국 지도원이 선물로 준 김치와 병원 내과과장 한금희 선생이 만들어 준 김치들이 점심 맛을 한층 더 돋구어 주었다.
*오늘은 수리아(시리아)의 한 대사관 직원이 심장, 당뇨 등으로 입원하였으나 요양기간 중 정신질환까지 겹쳐 소리를 지르고 행패를 부리는 불량환자로 돌변했다. 결혼한지 3개월 밖에 안 되는 부인도 환자인 남편의 무례한 행동에 무능했고, 시리아 대사관 대표대리도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정신질환이 심화되어 골치 아픈 환자가 되었다. 그는 또 의처증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원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퇴원하면서도 일부 기물을 부수고 행패를 부리고 병원을 떠나 시리아 대사대리가 구두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그를 위해 정성을 다한 의료진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틀에 한번 정도 방문하던 해외동포사업국 일꾼들이 오늘은 오지 않아서 무척 기다려졌다. 창 밖을 바라보며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내일쯤 편지를 이메일로 부쳐야 할 텐데…하며 궁리하고 있다.
위층에 입원한 리철재 선생의 손녀가 병원에 방문해 할머니와 함께 기념촬영
23일자 로동신문에서 미국과 관련하여 <첨예한 현 위기사태를 몰아 온 책임에서 절대로 벗어 날 수 없다>라고 지적한 글(6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의 자위적인 핵 시험을 걸고 미국이 벌리는 집단적인 대조선 <제재>책동으로 말미암아 조국반도에서는 그 어떤 우발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핵전쟁이 터질 수 있는 험악한 사태가 조성되고 있다고 우려한 글이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무시하고 비행기, 탱크, 함선, 각종 미사일을 포함한 전쟁무력을 남한에 증강 배치했다고 지적하고, 2003년 10월에 당시 미국방장관 럼스펠드가 서울행각시 남한이 “핵 전초기지, 극동 최대의 핵, 미사일고”라고 실토한 점을 상기시키며 1991년에 남한에서 핵무기를 완전 철수하였다는 주장은 완전허위라고 꼬집으며 지금 1천여 개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또 그 동안 핵전쟁을 준비해 온 미국은 부쉬 집권 초기 아시아 태평양지역에는 560개의 미 군사기지와 시설, 전략폭격기를 비롯한 1천여 대의 항공기, 6척의 항공모함, 34척의 핵잠수함, 2백여 척의 함선과 6천5백여 개의 핵무기가 전개되어 있다고 밝혔다. 지금은 이보다 훨 씬 더 많은 무기들이 배치되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미국이 조국반도에 핵전쟁을 도발하려고 시도한 것은 <핵태세 검토 보고서>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고 설명한다. 이 보고서는 미국이 북을 핵 공격대상으로 지명하고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어느 때든지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공식화하였다는 것이다. 이번에 미국이 사촉하여 유엔안보리에서 <제재>를 결의한 것도 결국 유엔의 이름을 도용하여 북을 침략하고 그 다음에 동북아시아에서 저들의 군사적 경계선을 중국과 러시아에로 접근시키려 하고 있다고 이 글은 분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은 앉아서 바라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자위적 조치를 펼치며 선군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2009년 6월25일(목요일): 맑음
오늘 아침은 4시에 깼다. 세면을 하고 어제 24일자 로동신문을 훑어 보았다. 2012년 강성대국을 향한 150일전투를 세차게 벌리면서 동시에 노동자, 농민들의 반미시위가 23일 진행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평양에서는 프에불로호를 정박한 대동강 기슭에서 <불패의 국력으로 반미대결전에서 최후승리를 이룩하자>고 강조한 시위가 전개되었고, 개성에서는 “미제에 의해 우리 민족이 흘린 피 값을 천백 배로 받아내자!”, “철천지 원쑤 미제침략자들을 소멸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미시위가 가열차게 진행되었다는 소식이다.
특히 5면에 나온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정책의 범죄적 본질>에 대한 글은 조국반도 문제의 근원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의 일환으로서 대북적대시 정책, 조국반도 분열정책 등에 있다는 사실들을 조리 있게 해설해 주었고, 6면에 나온 미국은 <군비경쟁, 평화파괴의 주범>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은 스웨덴의 스톨홀륨 국제평화연구소가 발표한 수치를 소개하면서 미국은 전 세계 군사예산 전체의 42%나 되는 엄청난 돈을 군비에 지출하고 있다는 점과 2010년 회계연도 군사비가 무려 5,340억 달러로서 이 액수는 세계에서 군사비가 많은 나라들 25개 나라들의 군비를 모두 합친 것 보다 많은 액수로서 2009년 예산대비 4% 증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글은 또 미국은 대량살육무기 전파의 장본인이라고 꼬집는다. 미국은 자기 하수인인 이스라엘레 1980년 부쉬1세 행정부에서 1,500여 개의 핵무기 개발용 설비를 비공개리에 제공했고, 1990년에는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국제적 압력을 막아 주겠다는 담보까지 해 주어 결국 이스라엘은 세계 제6위의 핵무기보유국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 무기상인으로서 2007년 세계100대 무기군수업체들 가운데 44%가 미국의 소유라는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지적하고 미국은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평가했다. 이에 대처하여 북이 자위적 핵 억제력을 강화하는 것은 천만번 정당하다고 강조하며 이것은 그 누구도 시비할 수 없는 북의 생존권 문제이며 자주권과 안전을 수호하기 위해 선군의 기치 밑에 전쟁억제력을 더욱 튼튼히 다져 나갈 것이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아침 조회시간 직전에 신경내과 의사 김관길 선생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갖고 있는 통일신보 2009년 5월16일자의 아름다운 소행에 관한 이야기 <한 영예군인 대학생을 위해>에 대한 기사가 담겨 있는 신문을 발견하고 잠간 빌려 보자고 요청했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북사회가 갖고 있는 동지사랑, 이웃사랑의 한 면을 엿볼 수 있는 미담이 실려있다.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3학년 학생 조영우(33)를 지원하는 병원측과 음대측 교수진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담긴 신문보도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 3학년 학생 조영우(33)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영예군인으로 공장과 농장벌들에 나가 손풍금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을 고무하였고 또 자체로 편곡한 수십 편의 손풍금 반주곡을 내놓았다. 이 인물이 이 음악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을 때 이에 대한 처리과정에 대해 황민영 교수 박사선생이 소개한다. 이 학생이 입학신청을 냈을 때 학교 교수진은 논의를 거듭했다. 이에 대해 리일남 학장은 《전화의 나날 세상에 없는 영예군인학교까지 내오고 영예군인들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는 우리 조국이 아닙니까. 그를 대학에 입학시킵시다.》 그래서 이 대학 교수진은 <특별과정안>을 작성하여 그를 교육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에 있던 조영우 학생은 그의 집이 강의실이 되었다. 교수들은 그의 집을 방문하여 교육시키면서 때로는 그가 혼수상태가 되어 업고서 병원을 가기도 했다. 대학교원들은 스승이기 이전에 그의 친부모, 친 혈육 같았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놀라보게 발전했다. 40곡의 손풍금 반주곡을 묶은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는 또 <평양친선병원>의 김관길 의사 선생을 위시하여 간호원들의 조력에 의해 지난 4개월 동안 하반신 마비를 회복할 수 있는 치료를 받고 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그의 집을 방문하여 온 정성을 쏟아 왔다. 조영우 학생의 음악적 재능도 천재적 수준이지만 불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농민들에게 바친 희생 정신은 이북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특히 이북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피아노 선물까지 받는 영광을 받아 안았다고 측근은 귀띔해 준다. 리영미 간호원은 그의 성격에 대해 쾌활하고 밝고 신심에 찬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오늘 오후4시 생명지표관찰에서는 35.7체온, 72맥박, 110/80혈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어제 해동사업국 성원들이 오지 않아 너무나 궁금했다. 150일 전투가 한창이라 위문 오는 것도 간단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오후 시간은 나도 모르게 지도원 성원들이 기다려진다. 그리고 방북하는 <민족통신>성원들에게 전할 내용도 있어 호텔에 가서 이메일을 보내야 하는데 아직 아무 소식이 없어 궁금하다. 내과과장 선생에게 해동사업국에 연락을 부탁해 놓은 상태이다.
오후6시가 되어서야 해동사업국 석복순 지도원이 왔다. 바로 고려호텔로 가서 민족통신 성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2유로(3달러)의 비용이 들었다. 잔돈이 없어 석 지도원이 내 주었다. 운전수와 석 지도원과 셋이서 고려식당에서 단고기를 저녁으로 하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단고기 값은 셋이 먹고 13달러를 지불했다.
밤에는 내과 허수길 선생(소화기 전문의), 김관길 선생(내과 전문의), 오은옥 간호장, 오옥금 간호원 등과 사이다와 빵, 어포를 나눠먹으며 이런 저런 생활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허 선생은 90년대 러시아에 강습 갔을 때 체험담을 이야기 해 주었다.
2009년 6월26일(금요일): 흐리고 맑음
아침은 5시45분에 깼다. 6시에 생명지표관찰에서는 체온이 35.7, 맥박이 70으로 나왔다.
세면을 하고 맑은 아침공기를 마셨다. 병원주위를 돌며 뒤편에 위치한 국수공장에서 국수 만드는 장면도 감상했다. 강냉이, 밀가루, 감자가루로 만드는 국수공장이다. 주로 병원에서 사용하는 국수들을 생산하지만 일반 인민들을 위해서도 봉사한다고 일꾼들이 설명한다.
병원정문에서 일하는 수위실 접수원은 언제나 내가 비둘기 먹이를 주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오늘 아침은 치료결과는 어떠냐고 안부를 묻는다. 처음보다 얼굴 빛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문 담벼락에 7~8개 살구나무들에서 익은 살구들을 따서 먹으라고 준다. 그 자리에서 하나를 먹었다. 맛있었다. 나머지 살구들은 야간근무를 한 오은옥 간호장과 오옥금 간호원에게 주었다. 그리고 야근을 한 허수길 의사선생과 김관길 의사선생과 기념사진을 간직하기 위해 내 카메라에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아침 식사 후에는 위층 리철재 선생 병실에 올라가 이런 저런 이야기 하는 가운데 중국관리들의 부패상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25개 성 고위급 관리들이 거의 자리에서 쫒겨 났다는 것이다. 부정부패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에 나와 있던 북 경제부문 일꾼들의 경우도 그런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 점적주사는 9시30분에 시작해 1시에 끝났다. 그 동안 해외동포사업국의 최길호 처장과 어제께 잠깐 들린 석복순 지도원이 함께 빵, 우유과자, 사탕, 주스, 복숭아, 그리고 각종 음료수들을 사 들고 점심 무렵 방문했다.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오늘은 내과과장 한금희 선생이 과로로 병이 생겨 내과 입원실 10호 방에서 약을 먹고 누어 있는 바람에 마음이 아프다. 복숭아 몇 개와 과자를 들고, 그리고 꽃 한 송이를 물병에 꽂아 위로 해주었다. 자신은 일없다고 말하나 얼굴 표정이 몹시 과로한 모습이다.
저녁 근무조는 리영미 간호원과 윤미 간호원 그리고 김관길 의사선생이 오늘 내과 입원 실 당번이다. 나는 해동사업국 성원들이 선물로 가져온 간식들을 조금씩 나누어 입구 접수처 야간 근무자들, 위층 외과 야간근무자들, 그리고 내가 입원한 내과 근무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간식으로 드시라고 권유하였다.
어제 25일자 로동신문은 <6.25 미제반대투쟁의 날>이라는 제목으로 10만 여명의 평양시민들이 김일성 광장에 모여 미국의 침략정책과 대북 압살정책과 함께 이에 추종하는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는 시위를 진행했다고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3면에는 이날 행사에서 연설한 박병종 평양시인민위원회 제1부위원장의 연설이 실렸다. 요지는 “우리 군대와 인민은 <제재>에는 보복으로, 전면전쟁에는 전면전쟁으로 대답할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한편 이 날자 로동신문 5면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25일자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이명박 정권의 특등사대매국 정권에 대한 역겨운 추종과 매국행위에 대해 규탄하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 신문은 또 재일조선인총연합회가 24일 도꾜에서 진행한 이명박 규탄 중앙집회 내용과 재중조선인총연합의 최은복 제1부의장의 19일 발표한 유엔안보리 상임이사회의 제재결의에 대한 규탄담화 등을 보도했다.
저녁 먹고 산책하며 병원 건너편 보통 사는 사람들의 아파트 단지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뛰어 노는 장면들이 보인다. 장겜 봉을 하며 둘이 한편이 되어 몇 걸음 씩 전전하여 빨리 돌아오는 놀이이다. 또 다른 어린이들은 뜀박질하며 놀고 있다. 아파트 단지 창 밖에는 거의 꽃 화분들을 올려 놓았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몇 일 전 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2009년 6월27일(토요일): 흐리고 맑음
아침은 3시45분 깼다. 어제 저녁은 맥주를 한잔 먹어서인지 수기치료를 받는 동안 잠이 들어 버렸다. 일어나 세면을 하고 어제 날자 로동신문을 살폈다.
전 세계에서 이북동포들처럼 똘똘 뭉쳐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북동포들은 그 누구도 우리를 굴복시키지 못한다고 긍지높게 외친다.
그리고 《인민보건》이라는 주간지 6월17일자(누계1154호이며 금년들어 24번째 발행된 보건계 신문)을 살펴보았다. 머리기사는 <위대한 령도자를 높이 모시여 존엄높은 조선로동당>이라는 정치사상 교양 기사이고 그 다음에는 거의가 보건관계 기사들이다. 신독감(a(h1n1)에 대한 예방에 대한 자료를 비롯하여 지역병원들의 의료봉사, 약초관리소에서 약초채취에 힘을 넣고 있는 기사, 150일 전투에 참가한 근로자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문제, 2면에는 사회주의 보건제도의 우월성, 시와 수필, 보건일군들과 정치사상관계 기사, 3면에는 뇌혈관 질병의 초기진료 기사를 포함하여 평양시 제3병원의 렌트겐 컴퓨터와 실현, 청진화학섬유공장병원에서의 <실험검사의 과학화 수준은 높여>라는 제목의 기사, 강원도 고려병원에서 <고려치료로 중증 뇨붕증을 완치시킨 증례>, 여러가지 피부화 농성염증을 치료, 장간막 혈전증 진단증례, 간경변성복수치료에 디곡신을 적용, 김만유 병원에서 <내침이 있는 복강천자침>을 새롭게 창안한 사례 등 보건전문 소식들을 다뤘고, 4면에는 <그 어떤 주사도 능숙하게>라는 제목의 글로 각종 주사를 잘 놓은 방법을 포함하여 <근육줄기 세포에 대한 개념, 특징, 골격근위성 세포, 연구과정> 등을 다룬 기사, 머리외상과 혈압변동, 낭포신의 역학, 고혈압치료에 많이 쓰이는 <안기오텐신 전환효소 저해제와 안기오텐신 ii 접수체 차단제> 등에 관한 전문기사들이 실렸다.
*오늘 아침 생명지표관찰은 체온 35.7, 맥박 60으로 나타났다.
8시에 아침식사로 둥근 빵 2개, 계란 한 개, 오차로 간단히 하고 9시에 식후투약으로 비타민 씨를 넣은 차와 물고기 기름(fish oil)을 먹었다.
그리고 10시부터는 내과, 외과 의사들, 간호원들, 행정일군들 등이 토요일 오전 정원가꾸기와 송충이 벌레잡기 시간을 갖는다. 특히 살구나무에 침투한 송충이 벌레들을 잡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도 이들과 함께 두 시간 동안 벌레잡기에 참여했다. 땀이 흐르고 보람을 느끼게 된다.
*12시께 계정민 지도원과 운전수 두 분이 위문 차 방문했다. 새봄 단설기빵, 인절미 떨(하얀식과 쑥덕), 둥근 단설기 빵 500g, 그리고 포도 탄산산물, 사과, 복숭아 탄산산물 등을 사들고 위문방문을 했다. 정말 고맙고 반가웠다.
나는 이것들을 나누어 병원건물 입구 접수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밤참을 하라고 했고, 위층 리철재 선생 병원층 외과 의료진 야간 근무자들에게도 전달하고, 나머지는 내가 있는 내과 병실 야간근무자들과 나눠 먹었다.
*제임스 드레쯔나크씨가 이번에는 콩팥에 돌이 들어있어 통증을 느껴 오늘 오후에 또다시 입원했다. 바로 옆방 8호실에 들었다. 나는 지난 번 찍은 사진들을 그의 장남 며느리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이번 기간에는 서로가 가까운 친구가 된 관계에서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그는 역시 외모만 미국인일 뿐 의식구조와 생각하는 내용이 이북사람이나 같았다.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일부 공무원들의 관료주의 성향을 비롯하여 주체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동양태에 대한 점들도 다소 지적해 주었지만 공화국(이북을 의미)은 전체가 하나로 일심단결, 혼연일체가 되어 있어 그 어떤 나라도 다치지 못하는 강국이라고 자신 있게 증언한다. 그도 학습과 교양을 통하여 이북사회의 이모 저모를 궤뚫고 있고, 이북 사람들 누구에게서 느끼는 이른바 <경애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의 충직한 전사>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는 또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젠켄스라는 미국인이 자기 일본계 부인이 일본 당국에 의해 공화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도 일본으로 가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고 소개하면서 이들이 공화국에서 여러 가지로 혜택을 받고 살아 왔는데 공화국을 왜곡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27일자 로동신문 머리기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쉼 없는 현지지도 강행군 길을 따르자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김정일 위원장은 지난 해 12월24일 천리마의 고향 강선제철을 찾아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봉화를 올리고 온 나라에 타번지기 위한 현지지도 강행군 사업을 내디뎠다는 소식이다. 그 때로부터 6개월 동안 100여 단위에 현지지도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면 하단에는 25일과 26일 전국 도 소재지에서 열린 <6.25미제 반대투쟁의 날>을 기념하여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 미제침략자들을 천백 배로 복수하자”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2면에는 송미란 기자의 정론 <강성대국 포전에로 가자>가 한 면을 가득 메웠다. 3면에는 각 지역의 활발한 농사활동을 담을 기사들로 차있었고, 4면에는 새 세대들 속에서 반미교양의 도수를 높이는 기사들로 차있었고, 체육, 보건관계 소식들이 담겨 있다. 5면에는 6.15선언북측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리명박 정권의 진보적 언론과 교원들에 대한 악랄한 탄압책동을 규탄하는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을 규탄하는 글들로 차있다. 6면에는 진보적 나라들의 각종 소식들이 담겨있다. 특히 최근 아메리카국가기구는 1962년 미국주도로 쿠바를 이 기구에서 제명한 때로부터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서야 회복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남미외교의 실패인 동시에 이 결정 하루 만에 70살이 넘은 마이어즈 부부가 그 무슨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해외동포사업국 최길호 처장과 석복순 지도원이 선물들을 사들고 병실로 위문차 들렸다. 이 부서에서는 바쁜중에도 이틀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병실을 방문해 주며 위로해 주었다.
++++
[[통일운동가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두분의 생각이 담긴 글과 소개를 나누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지탄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2. Humanities > 26_北韓과中國'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I / 강산 (0) | 2014.11.22 |
---|---|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 / 강산 (0) | 2014.11.22 |
[펌] 푸른 눈의 평양 시민 (2006) - 다큐멘터리 (0) | 2014.10.01 |
북한에 납치당한 한국계 미군 로이 정 (Roy Chung) (0) | 2014.10.01 |
월북한 미군 5: 제리 웨인 파리쉬 (Jerry Wayne Parrish) (0) | 2014.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