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자이신 강산 선생님과 동행하신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두 분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곳에 소개를 하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어제는 시애틀에 사시며 "25년 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를 운영하시는 웹페이지 "사람 사는 시애틀 한마당"에 2014년 9월 24일부터 2014년 11월 18일까지 총 25차례에 걸쳐 게시하신 강산 선생님이 페이스북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그분의 페이스북을 방문하니 통일운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도와드릴 만한 게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통일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강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그분의 방북기를 제 블로그에 제 게시합니다. 강산 선생님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볼드체는 원문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6 14-10-03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6
평양호텔에 짐을 풀다
비행기에서 평양에 내려 공항청사까지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했다. 청사에 내려서 짐을 찾으려면 한참 걸려야 한다면서 노박사 님이 냉커피를 사서 건네주신다. 자주 오가는 선배님이 25년만에 찾아와 낯설어하는 후배를 챙겨주시는 마음이라 참 고맙다. 느긋하게 앉아서 짐이 나오길 기다렸다. 공항 밖을 나오니 바로 오른편에 아주 크게 새로 공항 건물을 짓고 있다. 지금 규모의 몇 배가 될 듯하다. 곧바로 마중나온 안내원이 반갑게 우릴 맞아준다. 여성 안내원인 김미향 선생이다. 저쪽에서 대기중이던 차로 향했다. 짐이 많았지만 모두 들어갈 만큼 트렁크의 공간이 넓었다. 승용차의 운전사는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김영호라는 분이다.
공항 주변은 농촌 풍경에 여기저기 옛 건물들이 그대로지만 시내로 들어오면서 점점 새 건물들이 눈에 띈다. 카메라를 꺼내어 달리는 차 속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노 박사님은 김미향 안내선생과 오랜 구면이라 편안한 사이지만 처음 만난 내가 창밖으로 보이는 기념물이나 건물들이 무엇인가고 물어보는 것도 아직은 쉽지 않다. 나중에 오가는 길에 자세하게 설명해줄 것이니 지금은 그저 사진을 남기면서 평양의 풍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으리라.
차가 주차장에 닿고 노 박사님과 대화를 나누던 안내선생이 입구에서 꽃을 구입한다. 여기가 어디라고 말하지 않아도 숙소로 가기 전에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니 당연히 북부조국의 서거하신 두 지도자를 찾아 인사하게 되는 것이구나하고 깨닫는다. 약간 오르막 길을 오르는 동안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오르는데 마침 신혼 부부와 그 지인들이 내려오는 것을 마주쳤다. 알고보니 북에서는 신혼부부들이 결혼식 전이나 후에 꼭 두 지도자의 동상을 찾는다고 들었다.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면서 더욱 조국과 이웃에 힘을 다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리라는 다짐을 하는 것이리라.
두 지도자의 동상 앞에 꽃을 바치고 잠깐 묵념을 하는 동안 참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오고 간다. 두 지도자에 대하여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동안 그 얼마나 비방하여 왔던가? 아직도 남부조국에서는 두 지도자를 사실 그대로 묘사해도 국가보안법에 위반될 수 있다. 북부조국 인민들이 이다지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두 지도자를 바로 알려면 두 지도자와 온 인민이 합심하여 미국의 끊임없는 전쟁위협과 경제제재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이곳 북부조국을 어떤 사회, 어떤 세상으로 만들어놓은 것인지를 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나 또한 이 방문기를 완성할 때쯤이면 좀 더 두 지도자에 대한 이해가 커질 것 같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또한 오랫동안 외부로부터 주입된 두 지도자에 대한 평가에서 보다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 북한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위하여 사는 곳이란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거꾸로 두 지도자가 어떤 분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묵념을 마치고 살펴보니 두 분의 동상 뒤로 가을 하늘이 장엄하게 펼쳐져 아주 신비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양옆으로는 항일투쟁 시기의 인물들의 조상이 새겨져있는데 내가 25년 전에 방문했을 때도 이 모습이었던 것 같다. 북부조국은 김 주석의 권총 두 자루에서 시작한 항일무장투쟁과 그 투쟁에 동참한 수많은 인민들의 투쟁과 그 흘린 피에서 세워진 나라다. 그걸 잊지 않고 새기고 되새기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맞은 편으로 평양 시가지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러고보니 두 분의 동상이 늘 내려다보는 평양이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그런 인민을 위한 지도자가 있고, 온 민중이 그 지도자를 사랑하고 함께 호흡하고 일심동체가 되는 나라와 그 사회는 복받은 곳이다. 내가 조금 전에 본 탑에 새겨진 글귀 그대로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는 구호로 그치지 않음은 북부조국 모든 인민들이 두 지도자의 유지를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받들어 나가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언덕을 내려가 차를 타고는 숙소로 향했다. 평양호텔이다. 1970년대에 지어진 곳으로 대동강에서 두어 블럭 정도 떨어진 곳에 당시로서는 아주 잘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5층에 노 박사님과 같은 방을 쓰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미국의 웬만한 방 하나짜리 콘도미니엄 구조로 생긴 고급 방이다. 복도에서 들어서면 작은 화장실과 옷장이 있고 넓은 응접실로 연결되어 있는데 커튼을 여니 바로 아래로 큰 길이 펼쳐져있다. 응접실에서 방으로 들어가니 침대 두 개가 있고 거기서도 아래로 같은 전망이 열려 있다. 방엔 아주 넓은 목욕탕 겸 화장실이 따로 달려 있었다. 노 박사님은 응접실의 책상을 쓰기로 하고, 나는 방의 화장대로 사용되는 책상을 사용하기로 했다.
잠시 후 김미향 안내선생과 우리가 머물 동안의 일정에 대하여 의논하기 위해서 5층의 휴게실로 향했다. 여러 곳을 답사하고 인터뷰하는 일정을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내가 꼭 보고 싶은 것을 아무래도 말해야겠다. 애국열사릉의 홍동근 목사님 묘소를 찾는 일과 이곳 인민들의 생활을 깊숙히 알고 싶고, 또한 농촌을 좀 더 알기 위해서 협동농장을 답사하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미향 선생은 북을 방문하기 위하여 신청할 때에 미리 그런 사항을 제시하였으면 잘 준비해서 안내할 수 있는데 갑자기 요청하는 일이라 노력은 해보겠지만 준비가 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그래 이건 북부조국을 바로 알리는 일이고 또한 통일운동과 관계있는 일이니 잘 되도록 부탁드렸다.
우리를 환영나오신 다른 한 분과 함께 평양호텔의 식당에서 내가 대접하기로 하고 저녁 식사를 하였다. 나는 첫 음식부터 냉면을 찾는다. 냉면의 색깔이 칡냉면처럼 짙은 밤색인데 남쪽처럼 길고 질긴 냉면을 가위로 잘라주는 서비스는 없다. 대동강을 바라보며 처음 먹어보는 평양호텔의 냉면은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냉면과는 좀 다른 맛이다. 이것이 원조 냉면의 맛이로구나 생각하고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먼저 돌아와 쉬려는데 방의 전화벨이 울렸다. 담배 한 대 태우고 오시겠다던 노길남 박사님이 아무 옷차림으로라도 좋으니 어서 나와보라는 것이었다.
호텔의 아침식사 시간에 다시 만난 로금순 조선신보 기자.
노길남 박사님과 로금순 기자
9.9절 연회에서 다시 만난 김숙미 기자와 함께
로금순 기자와 함께 9.9절 연회에서
대동강변의 조각상
노길남 박사님이 그 군인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이렇게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나도 좀 배워야 할 것이다. 북부조국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몇몇이나 있는가? 아무 지인이 없는 이곳에서 누가 내게 대화를 청하기를 기다린다면 내가 몇 사람이나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이곳에까지 와서 무엇이든 많이 보고 배우려면 대화로 소통해야만 한다. 우리말로 소통할 수 있는 곳이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그렇지만 아무래도 사교적으로 타고나거나 아니면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라날 때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오히려 침묵은 금이라고 배우기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까지 편안하게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어려워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 이번 기회에 언론사의 기자는 어떻게 대화를 터나가는지 지켜보면서 나도 배워보리라.
그런데도 아침 산책길의 첫 대화가 인민군이어서 그렇게 편안한 마음이 아니어서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노길남 박사님께는 정말 귀중한 사진이 될 줄이야 당시엔 아무도 몰랐다. 사실 이번이 62번째 방문길인 노 박사님은 이미 북에서 준비해둔 방문할 곳들 외 처음부터 취재하고 싶어한 두어 가지를 김미향 안내원에게 요청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었다. 그중 한가지가 인민군대를 방문하여 북의 인민군대에서 구타가 있는지를 취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남한에서 당시 윤일병 구타 사망사건 직후의 시점이라 기자의 입장으로 북의 인민군대는 어떤 곳인지를 취재하여 보도하고 싶어한 것이다. 한데 노길남 박사님의 그 요청은 어떤 이유에선지 실현되지 못했었다.
실제로 인민군대를 방문할 수만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사실 인민군대에 구타가 있느냐의 문제는 인민군대를 찾지 않아도 며칠을 지나면서 쉽게 해결되었고 그래 박사님도 그 요청을 철회했다. 왜냐하면 새벽 산책길에서 만나 인터뷰한 군인처럼 우리가 가는 곳곳에서 종종 인민군인들을 만난데다 군대를 오래전에 제대하였거나 막 제대한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접할 수 있었기에 구타나 자살에 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며칠만에 완전히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래 노길남 박사님이 숙소에서 인터넷으로 바로 그 기사를 민족통신에 올렸었다. 구타나 군대에서의 자살이 인민군대에선 있을 수가 없으며, 그런 단어 자체가 인민군대에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기사였는데 그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하기로 하자.
대동강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인민군인과 즉석에서 인터뷰하는 노길남 박사
한편 노 박사님이 그 기사를 올릴 때 바로 내가 찍었던 이 한 장의 사진을 머리 사진으로 잘 활용하였는데 여기 첨부하는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다. 박사님은 자신이 인터뷰할 때 누가 사진을 찍어주지 않아 많은 경우 귀한 장면들을 놓치곤 했다면서 이 사진을 찍은 것을 아주 고마워했다. 그래 오늘은 내가 평생 꿈도 꾸지 못했던 사진기자의 노릇을 멋지게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데 그 사진 또한 내가 뭘 몰랐기 때문에 찍게 된 것이기도 하다. 북에선 우리에게 촬영하는 일에 대해서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내가 며칠을 머무르는 동안 되도록이면 인민군은 촬영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남북이 아직은 대치하는 상황에서 인민군의 사진을 함부로 찍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도 피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내가 남한의 군인들의 사진을 찍어서 북에 유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건 상식인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 만나게 되는 인민군들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컷다. 무엇보다 정복을 입은 젊은 남여 인민군인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냥 스치고 지나치기엔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여러 인터뷰를 통하여 인민군대엔 구타나 자살이 전무하고, 오히려 친 가족처럼 서로 돕고 사랑하며 지낸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박사님이 말씀해주셨을 때 내가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노 박사님은 정말 인민군대에 구타가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 그걸 직접 취재를 통하여 확인하려 한 것인지를 물어보니 정말 모르셨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기합도 세게 받은데다 구타도 당해보면서 군대를 제대한 박사님이 구타가 없는 군대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듯하다. 그래 박사님은 자신이 올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하신다. 그만큼 이 북부조국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회인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노 박사님과 함께 대동강을 향하여 계단을 내려가는데 음악소리와 함께 사오십 명 정도의 나이 든 여성들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우리 춤 비슷한 동작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 곁을 지나치는데 춤을 모르는 나도 어깨가 으쓱으쓱 제법 신나는 가락이다. 박사님이 매일 이렇게 운동을 하시냐고 한 여성에게 물어보니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이만한 곳이 어디있냐고 하신다. 운동에 방해를 하지 않으려 멀찍이 떨어져서 사진 몇 장을 남겼다.
대동강변에서 아침운동을 하는 여성들
대동강변에서 휴식하는 사람들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강가에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산책 후 쉬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운동복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한 젊은 여성에게 노 박사님이 말을 건네니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 민족통신의 노길남 박사를 이제 북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여성은 6년제 체육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6년제라면 대학원과 같은 격인 듯하다. 현재 22살로 그 학교의 6학년인데 ‘수영연구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수영선수인줄 알았는데 선수가 아니라 수영연구사라고 하니 참 생소하다. 그래 수영연구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하고 물어보니 수영 선수가 더 나은 기록을 세울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뒷받침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꿈을 꼭 이루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대동강변에서 만난 수영연구사가 희망인 여성 대학원생
노 박사님은 젊은이들이 걸으면서 그냥 길을 가지 않고 대부분 손에 노트나 책을 들고서 공부를 하면서 걷는다고 해서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북의 젊은이들이 길을 걷는 시간까지 아껴서 공부하는 것이 어쩌면 아주 오래된 관습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25년 전에 원산 시내에서 만났던 중학생 세 명도 당시에 영어 교과서를 손에 들고 바람을 쐬고 있어서 반갑게 만나 대화를 하다가 그 영어 책을 읽어보라고 하니 줄줄 읽고 그 뜻을 해석도 정확하게 했던 것이 생각났다.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있으니 이 나라의 미래는 밝고 환할 것이다. 그 공부가 특별히 스스로를 위한 공부이면서 또한 이웃과 조국에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한 공부이지 않은가.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9 14-10-10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9
대동강변에서 만난 사람들 (2)
새벽에 약간 끼었던 안개가 걷히면서 대동강 너머 동평양의 건물들 위로 아침해가 떠오른다. 아주 찬란한 태양이다. 오늘은 아주 맑은 날씨가 될 것 같다. 보통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내가 일찍 일어나 일출 모습을 관찰하는 일은 평소엔 거의 불가능한 편이지만 이렇게 북부조국을 여행하다보니 일찍 일어나 새벽산책까지 하게 되어 귀한 평양의 일출 모습을 보는구나 싶어 사진으로 남겼다.
대동강의 일출 모습
부근에 뱃머리에 용을 장식하여 거북선을 본딴 듯한 유람선이 정박중인데 원한다면 시간 맞춰서 저 배를 타고 대동강을 유람할 수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둘러보는 평양의 모습도 볼만할 것 같았지만 오전 오후 두 번 배가 나간다는데 평양에서의 일정이 그렇게 한가하지를 못해서 그 배를 탈 새가 없었다. 유람선 주변엔 낚시꾼들이 빼곡하게 모여있다. 무슨 물고기를 낚느냐고 물어보니 납지러기라고 한다. 보통 여기선 제법 큰 고기들이 낚이곤 했는데 근래엔 큰 고기들은 물지 않고 새끼들이 주로 잡힌다고 한다. 낚시꾼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와서 여기서 자리를 잡은 듯 한데 아마 날이 새자마자 낚싯대를 던지기 시작했을 것 같다.
대동강의 유람선과 주변의 낚시하는 모습
조금 떨어진 곳에선 낚싯대를 사용하지 않고 줄낚시를 여러 개 던져서 줄을 팽팽하게 하여 작은 요령을 달아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낚시를 무지 좋아하기에 이런 낚시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오랜 옛날 고향 저수지에서 사촌 형들이 종종 사용하던 방법이다. 추를 달고 낚시에 지렁이 혹은 떡밥을 달고는 휘휘 돌려서 멀리 던져 가라앉게 한다. 그러고는 줄을 팽팽하게 고정하고 저렇게 요령을 달아놓으면 고기가 입질을 할 때 딸랑딸랑 소리가 나서 줄을 챌 준비를 하고 있다가 입질이 세게 올 때 잡아채는 방법이다. 낚싯대가 필요 없고 여러 개의 줄을 던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점이라면 줄을 당길 때 낚싯대와 릴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바닥에서 줄이 헝클어질 우려가 있다. 내가 만일 제대로 준비된 장비가 없이 오지에 고립된다면 이런 방법으로 낚시를 해서 고기를 낚을 것이다. 실제로 옛날 중학교 시절에 낙동강에서 이 방법으로 낚시를 했는데 장어 한 마리를 낚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수십 년만에 이렇게 낚시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주 큰 고기를 낚았으면 했는데 이 강태공도 아직은 피래미같은 고기만 몇 마리 낚았을 뿐이었다.
줄낚시를 설치해놓은 모습. 납지러기 생선.
유람선 선착장 주변에서 손에는 공책을 든 두 남학생을 만났다. 북의 십대 학생들이다. 운동복 차림의 자유롭게 옷 입은 모습이나 얼굴 생김이 남의 학생들이나 별 다름이 없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이라고 했다. 한 학생은 스스럼없이 대답을 하고 다른 학생은 낯선 사람이라 편하지 않은지 약간 시선을 외면한다. 어떤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으니 고급중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고급중학교라면 우리의 고등학교다. 북은 2년 전에 11년제 의무교육이던 것을 12년제 의무교육제로 바꿨다고 한다. 고등학교까지 아무런 등록금이 없을뿐 아니라 국가에서 교복도 주는 나라다. 따로 돈을 들여 과외수업이나 개인교습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나라다.
고급중학교에 다닌다는 두 학생과의 대화
12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그저 예사로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잠깐 기억을 되살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된다. 내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중학교에 바로 진학하여 공부할 수 있었던 친구들은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의무교육이던 초등학교마저 매월 쌀 한 되 값의 기성회비를 내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던 급우들이 여럿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절반 이상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이미 북에서는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당시엔 북이 남쪽보다 더 잘 살았으니 가능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의지의 문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제공하려는 나라의 의지와 또한 자녀들을 돈 없어도 교육시킬 수 있도록 그 부모들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나라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부모된 마음으로 그 사랑하는 아이들을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어도 돈이 없어 보낼 수 없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세대에 내 주위에 형이나 누나가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하여 힘들게 번 돈으로 동생이 겨우 공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너나 할것 없이 대부분의 부모가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했던 시절을 기억한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실시해온 북의 의무교육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히 크게 점수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거기서 소 팔고 논 팔아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 곧 모든 인민을 이 나라가 어떻게 사랑하고 대우하는 나라인지를 오래전부터 나라 살림이 풍족하지 못하면서도 의무교육을 실시해온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남한의 아이들에게는 한국의 교육제도가 지옥이다. 과외수업 비용으로 돈도 많이 들지만 엄청난 경쟁 가운데 공부해서 대학에 가야만 한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어렵지만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불이익이 크니 누구나 대학을 가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순간부터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 능력이 닿으면 아이들을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보내서 교육받게 하는 가정들이 수없이 많다.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곳을 떠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남한의 교육제도는 바뀔줄을 모른다. 남한의 사회 자체가 지금의 교육제도와 맞춰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공부시킬 수 있다는 제도 자체로는 내가 사는 미국도 북과 마찬가지로 12년제 의무교육이다. 한데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북은 학생들이 전문학교나 대학교로 진학하게 될 때도 등록금이 없다고 한다. 이건 어느 나라보다 월등하게 좋은 제도가 아닌가? 미국의 대학이나 대학원의 등록금은 웬만한 가정의 반년치 수입과 맞먹기 때문에 제법 수입이 좋은 부모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에도 살림살이가 휘청거리게 되고, 그렇지 못한 부모여서 학자금을 부담할 수 없는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큰 빚을 지면서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 취직을 하자마자 학자금 빚을 갚기에 바쁘다.
부자 나라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가난하다고 알려진 북의 재정으로 무료교육을 완전히 시행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12년제 의무교육을 마치면 원하는 분야에 바로 뛰어들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전문학교에서 무료로 직업교육을 더 받은 후에 직장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 부분은 따로 북에서 대화한 것이 있으니 이후에 좀 더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노길남 박사님이 두 학생들에게 학교의 성적은 어떤 방식으로 매기는지 물어보았다. 수 우 미 양 가, 혹은 A B C D F,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성적을 매기는지 물어보니 5 점이 최고 점수고 4점, 3점, 2점 순으로 매기는데 2점부터 낙제라고 한다. 그래 2점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고 물어보니 다시 공부해서 재시험을 치룰 수 있다고 한다.
잠깐의 만남이지만 헤어지는 두 학생들이 내 아들처럼 사랑스럽다. 그래, 우린 한 민족 한 핏줄의 동포다. 저 아이들이 군대로 가고 남쪽의 동포들, 내 친구과 친지들의 아이들이 군대로 가서 서로 총을 맞대는 이 비극을 이젠 끊어야만 한다. 바로 평화통일이 그 답이다. 우리 모두가 다시금 통일을 외쳐야만 한다. 통일을 이룰 때까지 그 외침이 멈추지 않아야 한다.
옅은 안개 가운데 주체사상탑이 우뚝 서있는 모습
필자와 김책공업대학생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한 장
산책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 이제 아침 7시의 길거리는 출근길로 사람들과 차로 붐비기 시작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 인민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활기찬 발걸음들이다. 노 박사님이 여성 교통보안원 옆을 지나치면서 “수고하십니다”라고 하니 뭔 일인가하고 바라본다. 이어서 “예쁩니다”라고 하니 활짝 웃어준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해도, 그리고 교통보안원이라 해도 여성들에게 아름답다고 하면 기분좋아하는 것은 세상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노길남 박사님이 "이쁩니다"라고 하자 활짝 웃어준 교통보안원이 멀리 보인다.
활기찬 발걸음의 평양 시민들의 출근 모습.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1 14-10-14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1
평양 사투리인가 평양 표준말인가
평양호텔의 대식당은 2층 긴 복도를 지나서 있는데 내가 묵는 호텔의 객실과는 반대 방향이다.아침식사 시간에 맞춰 들어가니 천정이 아주 높고 멋진 샹들리에가 장식되어 아름다운 궁전처럼 보이는 넓은 방인데 전면에 대형 금강산의 폭포 그림이 걸려 있어 운치를 살려준다. 규모로 보아 2층도 있어서 한 번에 이백여 명 이상 쉽게 수용할 수 있을 듯하다.
이미 여기저기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중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에서 온 동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우리가 식사할 자리는 안쪽이었는데 부근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있어 말을 걸어보니 일본에서 온 조선대학교 학생들이다. 오늘 오후에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현재 63명 가운데 30명이 생존해있다고 한다. 북부조국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들의 아파트엔 우리도 이후에 방문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은 나중에 서술하기로 하겠다.
아침식사는 양식으로 나왔는데 토스트에 버터, 잼, 달걀프라이, 야채절임, 그리고 팟죽이 나왔다. 우린 음식을 가져다준 봉사원에게 미국식으로 식사때 커피도 함께 마실 수 있도록 주문했다. 첫날의 달걀프라이는 손잡이가 달린 프라이팬에 담긴 그대로 식탁에 올려줘서 따끈하게 먹을 수 있었는데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아침을 먹지 않는 습관을 지켜왔는데 그건 옛날 함석헌 옹의 책을 읽고 1일 2식을 실천에 옮겨왔기 때문이다. 그래 심한 노동이나 운동을 하지 않을 경우엔 하루 두 끼만 먹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실천해왔는데 이번 여행에선 워낙 일찍 잠이 깨는 바람에 에너지가 더 필요하기도 하였지만 북부조국에서 여행하면서 만날 수 있는 맛난 음식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접대원 한 사람이 다가와 노길남 박사께 인사를 한다. 노 박사님이 자주 오시다보니 이미 구면이 되어 반가워서 찾아온 것이다. 이곳에서 일한 지 11년이 되었다고 하니 벌써 여러차례 노 박사님과 만났을 것이다. 이름표를 보니 최목란 접대원이다. 이곳 접대원들 가운데 제법 오래되어 관리직에 있는 듯하다. 노 박사님이 최목란 접대원에게 남한의 여배우를 닮은 접대원이 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다. 여배우 누구를 닮았을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노 박사님과 대화하다보니 영화배우 문근영이다. 내일은 나온다고 하니 얼마나 닮았을지 사뭇 기대가 된다.
노 박사님을 반갑게 맞이한 최목란 접대원
첫 아침식사를 봉사해준 김은주 접대원과의 대화
우리에게 음식과 커피를 가져다준 사람은 김은주 접대원이었다. 노 박사님이 추석때 제사를 지내느냐고 물어본다. 앞으로 나흘 후면 추석인데 북의 인민들이 추석을 쇠는 방법을 노 박사님은 어느 정도 아시는 듯하다. 김은주 접대원이 묻는대로 대답해준다. 추석날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 방법이 참 특이하다. 추석 전에 유골보관소에서 조상들의 유골함을 찾아서 집으로 가져온다고 한다. 그리고 추석날 아침에 준비한 음식과 함께 그 유골함을 놓고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유골함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이미 널리 자리잡은 것으로 볼 때 북부조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통의 경우라면 묘지를 사용하지 않고 화장을 하는 것 같다. 유골보관소에서 조상의 유골을 찾아 온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내 몸을 낳아준 조상의 뼈를 담은 함을 추석날이나 제삿날에 어루만지면서 그 조상에 대해서 더욱 깊은 마음으로 옛날을 추억하고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것에 감사할 수 있으리라. 종이에 쓴 지방보다 오히려 유골함을 제삿상에 놓는 것이 훨씬 더 후손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남한에서 이렇게 북한처럼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지방마다 그 방법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어렸을 때 내 고향에서는 명절때 제일 큰 집에 모두들 모였었다.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라 나도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나갔기 때문에 절을 하지 않고 멀찌기서 지켜만 보았다. 큰아버지들과 사촌 형들이 마루에 주욱 늘어서서 조상께 올리는 밥과 국을 몇 차례씩이나 바꿔가면서 절을 하였다. 아마 몇 대 선조들의 제사를 같이 지낸 것 같다. 제사가 끝나면 나이 든 몇몇 어른들은 미리 벌초해서 단장한 산소를 찾아뵙고 우리들은 이웃의 친지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추석날 아침을 보냈다.
조상들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기독교 신앙에선 피하도록 하였지만 내 어머니와 나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음식은 그저 음식일뿐이라 여기고 아무 거리낌없이 먹었다. 그래도 보통의 음식과는 달리 제사 음식에서는 향냄새가 배어들기도 해서 약간 야릇한 기분으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고향의 친지들과 명절에 한 자리에 모였던 것은 내가 미국 이민으로 남한을 떠나오기 전의 일이니 벌써 서른 일곱해나 되었다. 가끔 방문을 하여도 명절에 맞춰서 가기가 어려웠고 지금은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도시의 사촌 집에서 지낸다고 하니 그 규모와 방법이 많이 달라졌으리라.
평양호텔 의무실의 김금석 의사와 노길남 박사
김금석 의사의 응급진료가방
식사를 마치고 2층 복도의 반대편으로 돌아오는데 의무실이라는 방이 있어 그곳을 잠깐 들렀다. 노 박사님이 문을 두드리신다.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호텔의 의무실이란 어떤 곳인가해서 들른 것이었다.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김금석 의사였다. 평양의학대학을 나온 후 17년째 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전공이 고려치료라고 하는데 남한의 한의사와는 좀 다른 것 같다. 호텔에서 24시간 이 의무실은 문을 여는데 주로 가벼운 환자들의 1차 진료를 여기서 하고, 중환자들은 2차 진료소로 보낸다고 한다. 북의 많은 의사들이 해외에서 봉사를 하는데 김금석 의사 본인도 방글라데시에서 2008년에 4년간 의료기술협조를 하였다고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어떻게 일했느냐고 하니 영어로 소통하였다고 했다.
김금석 의사와의 대화
대화를 하는 동안 김금석 의사의 이름을 적다가 한참 애를 먹었다. 김굼석이라고 발음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몇 번을 물어보니 굼은보석할때 굼이라는 것이다. 아, 이건 내가 종종 겪는 문제였다. 금으로 발음할 것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조심하지 않으면 검으로 발음하게 된다. 평양에선 그 금을 굼으로 발음하게 되는가보다. 이 발음이 평양 사투리가 아니고 평양에선 굼으로 발음하는 것이 표준 발음이라고 우긴다면 어쩔 수 없다. 굼으로 발음하는 것을 내가 익혀서 알아듣고 가끔 사용하기도 하면 될 문제다. 무엇보다 북부조국의 수도는 평양이 아니던가. 진료소 한쪽에 어항이 있어 살펴보니 금붕어와 열대어로 보이는 물고기 세 마리가 있다. 따로 김금석 의사에게 금붕어를 발음해보라고 하지 않았지만 "굼붕어"라고 발음하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속으로 크게 웃었다.
금붕어를 평양에서는 '굼붕어'로 발음하는지 나는 모른다.
5층의 숙소로 돌아오는데 숙소 부근의 작은 휴게실에서 웅변을 하는 듯 두 여성들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차에 박사님이 그쪽으로 향하여 인사를 하니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들려준다.
조선대학교의 옛스승과 연극배우가 된 제자 사이라는 두 여성을 만남
젊은 여성은 이곳 국립연극극장의 연극배우인데 일본에서 찾아온 조선대학교의 옛 스승을 만난 것이다. 예전엔 스승이었지만 지금 북부조국에 찾아와서는 옛 제자로부터 조국에 대하여 강습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북에 와서 옛 제자와 반갑게 만나 제자로부터 북부조국을 배우는 것이 그렇게 행복해보일 수 없다. 좋은 시간 보내시라고 했다. 같은 호텔에 머무는 동안 자주 만나게 된 조선대학교의 스승과 제자들의 친가족같은 모습은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었다. 좋은 스승에 좋은 제자들이 나오는 법이다. 모두 북부조국 학교의 전통을 일본의 동포들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리라. 이후에 사진과 함께 그 부분에 대하여서도 쓰게 될 것이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2]가 시작되는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II / 강산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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