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I / 강산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11. 22.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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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이신 강산 선생님과 동행하신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두 분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곳에 소개를 하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어제는 시애틀에 사시며 "25년 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를 운영하시는 웹페이지 "사람 사는 시애틀 한마당"에 2014년 9월 24일부터 2014년 11월 18일까지 총 25차례에 걸쳐 게시하신 강산 선생님이 페이스북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그분의 페이스북을 방문하니 통일운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도와드릴 만한 게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통일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강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그분의 방북기를 제 블로그에 제 게시합니다. 강산 선생님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볼드체는 원문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5

고려항공 여 승무원과의 대화

아침이 밝아 호텔에서 조선식으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였다.  간단한 반찬 몇가지지만 밥과 국이 제공된다. 노 박사님이 음료수 하나를 가져와 마셨기에 내가 계산하려는데 우리말을 모르는 종업원 아주머니가 쓰웬이라고 말한다. 무슨 일인가하고 바라보다가 아하 4원이라는 소리구나하고 지갑을 열어서 내어주니 다시 쓰웬이라고 말하면서 부족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래 아 10원을 달라는구나하고 내어주니 맞단다.  아주 옛날 '이얼싼쓰우류찌파쥬쓰'하면서 중국어를 공부한 적이 있는데 그때 4와 10을 우리 말로 하면 똑같은 것 같아서 헷갈려했는데 이렇게 그것 때문에 실제로 중국 땅에서 애를 먹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 다시 4와 10을 어떻게 발음하는지를 배워보려 했는데 다들 웃으면서 뭐라 하는데 여전히 어렵다.  10을 발음할 때 더 강하게 하는 것 같긴 한데 다시 알려달라해도 잘 가르쳐주질 않는다.  이다음에 또 실수하게 되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아는 중국어가 몇 마디나 된다고 저 발음 하나 배운다고 더이상 뭐가 달라지랴.

어제 만났던 노길남 박사님의 동생은 우리와 헤어져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고 한다.  아, 내가 그분도 우리와 함께 평양으로 간다고 잠깐 동안 착각을 했었다.  지금은 한국 국적으로 북한에 가기 어려운 시절인 것을 깜빡하고는 함께 만나 대화하고 식사하면서 우리와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었다.  두분 형제가 공항에서 다시 작별을 고한다.  두 분은 세상의 어떤 나라라도 갈 수 있을 것인데도 북부조국만은 형제가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 함께 찾아 여행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단의 아픔을 또 느끼게 된다.

이제 고려항공 JS156기로 평양으로 들어간다.    선양에서 평양행 비행기는 한 주에 두 번이 있다 한다.  카운터 앞은 벌써 여러 줄이 늘어서있다.  동포다! 우리 동포들이 볼일로 이곳 중국 땅에 나왔다가 지금 나와 같이 북부 조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함께 타기 위해서 기다리는 것이다.  커다란 박스들이 사이사이에 늘어서 있다.  무엇이 들었을까?  북부조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나 부속품들을 여기서 구입해 가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개인이 필요한 물건이기보다는 소속해있는 기업소 (회사)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가는 것이리라.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장으로 가는 동안 오후 1시 25분의 고려민항을 타기엔 시간이 있어 로 박사님과 함께 탑승장 입구의 중국 음식점에서 눈에 띄는 짜장면과 비슷한 사진의 맛있어보이는 국수를 시켰다.  과일 음료와 함께 나온 그 면은 중국 된장 맛만 날 뿐 우리 입맛에 도저히 맞질 않는다.  대부분의 중국음식은 내가 잘 먹는데 이건 정말 아니다. 사진만 보고는 맛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 잘못이다.  그래, 평양의 맛있는 냉면을 곧 먹게 될 것이니 참아야지.

평양행 비행기는 200여 명 이상 태울 수 있어 보이는 러시아 산 제트기였는데 자리가 모두 찼다.  비상구 옆의 자리에 앉게 되어 조금 멀찍이나마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노 박사님이 나를 배려하여 앉게 하신다.  손을 뻗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채 직접 기념 사진을 찍었다.

비행기가 출발하려는데 내 오른편 비상구 옆에 세워져있던 제법 높은 의자를 펴서 한 승무원 여성이 앉아 약간 나를 내려보는 자세로 목례를 한다.    이렇게 북부 조국으로 들어가면서 이번엔 북의 여성 승무원이  바로 곁에 앉아서 비행기가 이륙하여 안정될 때까지 대화나눌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노 박사님이 기자정신을 발휘하여  바로 말을 건넨다.  명찰을 보고는 “한성심 동무, 얼마나 오래 승무원 일을 했소?”   그 질문에 약간 웃음을 띤 모습으로 “ 이제 1년 조금 더 됐습니다.”  “승무원이 되기 위해선 어떤 학교를 나와야 합니까.  전문학교를 나오면 됩니까?”  “네, 학교에서 배우고, 또 실습으로 직접 일을 익힌 후 일하게 됩니다.”  “한성심 동무, 어제 우리가 선양 목란각에서 한 접대원 동무를 만나 어떤 질문을 던졌는데 동무도 같은 질문에 대답해 주면 좋겠소.” “네, 뭐든지 물어보세요.”  이렇게 대답하는 한성심 승무원,  약간 둥글며 반듯한 그 얼굴은 같은 비행기 속의 여러 승무원들 가운데  전형적인 북부조국의 미녀형이었다.  아직 너무도 어리고 순수한 그 모습을 내가 바로 곁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 너무 미안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노 박사님이 그런 와중에 설핏 찍은 역광으로 나온 사진이 있어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해주니 참 다행이다.

노 박사님이 이제 날더러 어제 노 박사님이 했던 그 질문을 해보라고 권하신다. 내가 물었다.  북부조국에서 남녀 사이에 연애와 중매결혼의 비율이 어떠한가고  묻자 본인은 아직 그런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잘 모르지만 대략 50:50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해준다.  그래  어제 그 접대원은 대략 30:70 정도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하더라면서 주변에 언니나 친지들은 어떻게 결혼하던가를 물어보니 오빠가 있는데 아직 미혼이라 잘 모르겠다고 한다.  나이 21세면 이제 성인인데도  아주 꿈많은 소녀같은 앳된 모습이다.  내친김에  결혼 상대자로서 어떤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역시 얼굴을 붉히면서 본인은 아직 어려서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래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해준다.

"결혼을 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사람됨됨이 즉 인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국과 이웃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좋은 품성을 갖춘 사람이 가장 우선이라고 봅니다"라고 말하기에 그래 어제 들은 대답으로는 군대를 제대한 사람이 첫째라고 했는데 그것과 비슷하지만 약간은 다른 대답인데 군대를 제대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닌가하고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기를 "사람에 따라서 군대에 가고 싶어도 신체적인 제약 때문에 갈 수 없는 사람도 있다 말입니다.  그가 어디에서 일하던 열심히 조국을 위해서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이라면 꼭 군대를 제대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우리 공화국에선 자신이 필요한 곳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살 수 있는 곳이고 그런 사람이라면 결혼할 남성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당에 가입해야 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마음을 찡하게 한다.  "상대 남자가 결혼하기 전에 당에  가입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리 다 이루고 준비해서 결혼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도와가며 나라와 인민에게 복무하다보면 당에도 가입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때부터 남편과 함께 이뤄나가면 됩니다"라고 말해주지 않는가?  

참으로 나를 감동케 하는 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황금만능의 사회에서의 결혼관과 이 얼마나 다른가?  아, 생각해보니 한때는 우리 사회도 부분적으로 이렇게 남녀가 사랑만 있으면 결혼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 또한 그런 방식으로 결혼을 했었다. 그렇지만 그건 이미 한 세대 전의 일이었고 또한 사랑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결혼이다.  지금 세태는 청춘 남녀가 대부분 사랑에 빠졌다고 결혼하지 않는다. 결혼하기 전에 어느 정도 미리 경제적으로 안정된 상대방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돈이 우선인 자본주의 사회가 그런 결혼관을 낳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돈벌이가 시원찮으면 그날부터 고생인 것이 현실이니 그걸 피하고 보다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욕망을 어떻게 탓할 것인가?

한데 이 승무원 여성은 결혼할 상대방의 인품이 이웃과 조국을 위하여 얼마나 헌신하고 봉사할까를 생각해보고 그런 상대방을 만나겠다는 결혼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랑만 있으면 결혼하겠다던 한 세대 전 그 시절, 우리 사회의 비교적 순수한 남녀의 애정관보다 좀 더 높은 차원이 아닌가?  인간의 품성이 이렇게 높은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사회라면 우린 그 사회의 깊은 곳곳을 한번 세세하게 잘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먼 길을 돌아서 북부조국을 방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질문에 대답한 두 사람의 답이 많이 다른 것 같지만 한편으로 깊이 들여다보면 그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둘다 자신이 나고 자란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인민에게 봉사하려는 마음이다.  첫번 질문에 대답했던 목란각의 박원심 접대원의 대답 또한 군대를 나오고 당에 가입하고 집안이 좋은 남편을 만나 그들이 더욱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하는 사람을 만나 그런 사람과 함께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봉사하는 삶을 살고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느닷없이 던진 질문에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자리가 못 되므로 (식당에서는 자리에 앉지 못하게 되어 있어 서서 대답을 해주었다) 단답형으로 대답한 것일 뿐이다. 그걸 얼핏 듣고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북한의 여성도 상대 남성이 이뤄낸 것을 결혼을 통하여 얻으려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속마음을 바로 알지 못한 것일 뿐이다.  

북의 여성들에게는 결혼이 그들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면서도 또한 두 사람이 함께 그들의 이웃과 조국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고, 그래 그 길을 위하여 남편이 될 사람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숨김없이 말해준 것이다.    

내가 한성심 승무원에게 정말 훌륭하고 고귀한 생각이라며, 당연히 결혼은 상대방의 사람 됨됨이를 가장 귀하게 여기고 만나 함께 살아가면서 원하는 일을 이뤄내는데 더욱 의미가 있다고 나도 생각한다며, 그래 한성심 승무원이 아주 어린 나이이지만 그 생각이 너무도 귀한 생각으로 여겨진다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크게 존경한다고 말해주었다. 

  

선양 국제공항에서 한참 동안 이륙을 대기하던 비행기가 한성심 승무원에게 질문하고 그 대답을 듣는 동안에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제 승무원으로 일할 시간이다.  승객들에게 오렌지 쥬스를 권하기 시작한다.  이제 곧 북부조국의 하늘로 이 비행기는 진입하게 된다.  기내 방송에서 이 비행기는 압록강 위를 지나고 있다고 알려준다.  끝없이 이어진 하얀 구름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제 드디어 북한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구나 하는 감회에 젖는다.  

공항 대기 시간을 제외하면 선양에서 평양 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의 고도가 낮아지면서 북부조국의 산천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인다.  9월 초순이라 온 산하는 짙푸른 산이고 들이다.  그러면서도 들판의 벼가 익어가는 탓인지 약간의 노란 빛도 곁들여져 참 아름답다.  오른편에 멀찌기 바다도 보인다.  바로 북녘 땅의 황해바다다.  




한반도, 별로 넓지 않은 조국이 해방과 함께 분단되어 토막나 지난 69년 동안 남한의 동포들이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곳에 드디어 비행기는 내렸다.  트랩을 내려와서는 공항청사까지 갈 버스를 타기 전에 노길남 박사님이 기념촬영을 하자고 하신다. 평양에 내려 고려항공이라 새겨진 비행기 앞에서 촬영을 한 지금부터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에서의 나의 일정은 시작된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6 14-10-03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6


평양호텔에 짐을 풀다


비행기에서 평양에 내려 공항청사까지는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했다.  청사에 내려서  짐을 찾으려면 한참 걸려야 한다면서 노박사 님이 냉커피를 사서 건네주신다.  자주 오가는 선배님이 25년만에 찾아와 낯설어하는 후배를 챙겨주시는 마음이라 참 고맙다.  느긋하게 앉아서 짐이 나오길 기다렸다.   공항 밖을 나오니 바로 오른편에 아주 크게 새로 공항 건물을 짓고 있다.  지금 규모의 몇 배가 될 듯하다.   곧바로 마중나온 안내원이 반갑게 우릴 맞아준다.  여성 안내원인 김미향 선생이다.  저쪽에서 대기중이던 차로 향했다.  짐이 많았지만 모두 들어갈 만큼 트렁크의 공간이 넓었다.  승용차의 운전사는 서른 후반으로 보이는 김영호라는 분이다.  


공항 주변은 농촌 풍경에 여기저기 옛 건물들이 그대로지만 시내로 들어오면서 점점  새 건물들이 눈에 띈다.   카메라를 꺼내어 달리는 차 속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노 박사님은 김미향 안내선생과 오랜 구면이라 편안한 사이지만 처음 만난 내가 창밖으로 보이는 기념물이나 건물들이 무엇인가고 물어보는 것도 아직은 쉽지 않다.  나중에 오가는 길에 자세하게 설명해줄 것이니 지금은 그저 사진을 남기면서 평양의 풍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으리라. 







차가 주차장에 닿고 노 박사님과 대화를 나누던 안내선생이 입구에서 꽃을 구입한다.  여기가 어디라고 말하지 않아도 숙소로 가기 전에 먼저 들르게 되는 곳이니 당연히 북부조국의 서거하신 두 지도자를 찾아 인사하게 되는 것이구나하고 깨닫는다.  약간 오르막 길을 오르는 동안 은은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오르는데 마침 신혼 부부와 그 지인들이 내려오는 것을 마주쳤다.  알고보니 북에서는 신혼부부들이 결혼식 전이나 후에 꼭 두 지도자의 동상을 찾는다고 들었다.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면서 더욱 조국과 이웃에 힘을 다하여 헌신하고 봉사하리라는 다짐을 하는 것이리라.  





두 지도자의 동상 앞에 꽃을 바치고 잠깐 묵념을 하는 동안 참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오고 간다.  두 지도자에 대하여 자본주의 세계에서 그동안 그 얼마나 비방하여 왔던가?  아직도 남부조국에서는 두 지도자를 사실 그대로 묘사해도 국가보안법에 위반될 수 있다.  북부조국 인민들이 이다지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두 지도자를 바로 알려면 두 지도자와 온 인민이 합심하여 미국의 끊임없는 전쟁위협과 경제제재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이곳 북부조국을 어떤 사회, 어떤 세상으로 만들어놓은 것인지를 아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나 또한 이 방문기를 완성할 때쯤이면 좀 더 두 지도자에 대한 이해가 커질 것 같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또한 오랫동안 외부로부터 주입된 두 지도자에 대한 평가에서 보다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  북한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위하여 사는 곳이란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거꾸로 두 지도자가 어떤 분이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묵념을 마치고 살펴보니 두 분의 동상 뒤로 가을 하늘이 장엄하게 펼쳐져 아주 신비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양옆으로는 항일투쟁 시기의 인물들의 조상이 새겨져있는데 내가 25년 전에 방문했을 때도 이 모습이었던 것 같다.  북부조국은 김 주석의 권총 두 자루에서 시작한 항일무장투쟁과 그 투쟁에 동참한 수많은 인민들의 투쟁과 그 흘린 피에서 세워진 나라다.  그걸 잊지 않고 새기고 되새기며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이다.



맞은 편으로 평양 시가지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러고보니 두 분의 동상이 늘 내려다보는 평양이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그런 인민을 위한 지도자가 있고, 온 민중이 그 지도자를 사랑하고 함께 호흡하고 일심동체가 되는 나라와 그 사회는 복받은 곳이다.  내가 조금 전에 본 탑에 새겨진 글귀 그대로 “위대한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는 구호로 그치지 않음은  북부조국 모든 인민들이 두 지도자의 유지를 지금도 여전히 그대로 받들어 나가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언덕을 내려가 차를 타고는 숙소로 향했다.  평양호텔이다.  1970년대에 지어진 곳으로  대동강에서 두어 블럭 정도 떨어진 곳에 당시로서는 아주 잘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5층에 노 박사님과 같은 방을 쓰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미국의 웬만한 방 하나짜리 콘도미니엄 구조로 생긴 고급 방이다.  복도에서 들어서면 작은 화장실과 옷장이 있고 넓은 응접실로 연결되어 있는데 커튼을 여니 바로 아래로 큰 길이 펼쳐져있다.  응접실에서 방으로 들어가니 침대 두 개가 있고 거기서도 아래로 같은 전망이 열려 있다.  방엔 아주 넓은 목욕탕 겸 화장실이 따로 달려 있었다.  노 박사님은 응접실의 책상을 쓰기로 하고, 나는 방의 화장대로 사용되는 책상을 사용하기로 했다.


잠시 후 김미향 안내선생과 우리가 머물 동안의 일정에 대하여 의논하기 위해서 5층의 휴게실로 향했다.  여러 곳을 답사하고 인터뷰하는 일정을 제시하였는데 그 가운데 내가 꼭 보고 싶은 것을 아무래도 말해야겠다.  애국열사릉의 홍동근 목사님 묘소를 찾는 일과 이곳 인민들의 생활을 깊숙히 알고 싶고, 또한 농촌을 좀 더 알기 위해서 협동농장을 답사하고 싶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미향 선생은 북을 방문하기 위하여 신청할 때에 미리 그런 사항을 제시하였으면 잘 준비해서 안내할 수 있는데 갑자기 요청하는 일이라 노력은 해보겠지만 준비가 될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그래 이건  북부조국을 바로 알리는 일이고 또한 통일운동과 관계있는 일이니 잘 되도록 부탁드렸다.  





우리를 환영나오신 다른 한 분과 함께 평양호텔의 식당에서 내가 대접하기로 하고 저녁 식사를 하였다.  나는 첫 음식부터 냉면을 찾는다.  냉면의 색깔이 칡냉면처럼 짙은 밤색인데 남쪽처럼 길고 질긴 냉면을 가위로 잘라주는 서비스는 없다.  대동강을 바라보며 처음 먹어보는 평양호텔의 냉면은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냉면과는 좀 다른 맛이다.  이것이 원조 냉면의 맛이로구나 생각하고 먹으니 그 맛이 일품이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먼저 돌아와 쉬려는데 방의 전화벨이 울렸다.  담배 한 대 태우고 오시겠다던 노길남 박사님이 아무 옷차림으로라도 좋으니 어서 나와보라는 것이었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7

조선신보 기자들을 만나다

전화를 하신 노 박사님은 반바지 차림으로라도 나오라고 하셨지만 평양에서의 첫 날인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옷을 차려 입고 복도로 나왔다.  아까 복도를 지나치면서 오른편의 방 하나를 가리키면서 여기가 ‘조선신보’ 평양 사무실이라고 했는데 지금 거기서 전화를 걸었다면서 거기로 얼른 오라고 한 것이다.

문을 노크하니 제법 넓은 사무실에 노 박사님과 두 젊은 여성이 있었다.  나를 미국에서 온 동포라고 소개하면서 그 두 사람과 인사를 시키신다.  한 여성은 ‘조선신보’의 로금순 기자였는데 노 박사님이 얼마 전에 일본 취재여행에서 서로 만나 같은 성씨여서 동생으로 삼았는데 오늘 뜻밖에 평양에서 만나게 된 것이라고 했다.  다른 한 여성은 월간 잡지 ‘이어’의  김숙미 기자인데 이곳 평양에 취재차 몇 달을 머물고 있다고 했다.  노 박사님이 민족통신의  기자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일본에서 나고 자란 3세 동포 기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김숙미 기자가 정성들여 끓여준 차를 나누며 대화를 했다.


우리가 조총련으로 부르던 총련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일본의 동포사회에서 아주 크고 힘있는 단체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산하에 수많은 초.중.고등학교가  있고, 조선대학교가 있으며 이렇게 신문사와 잡지사까지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대도시들마다 한인회가 있지만 몇 곳 외엔 대부분 한인회관 하나 번듯하게 갖고 있지 못한 것에 비하여 일본의 총련은  하나의 작은 나라와도 같은 조직을 갖고 있어 동포사회의 권익을 지켜준다고 한다.   무엇보다 재일동포들이 이렇게 단결되어 있어 총련에서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고  전국에 수백개의 학교들을 운영하고 조선대학교까지 둘 수 있는 것이고, 그 단결의 바탕에는 북부조국에서 해방 직후부터 지금까지 재일동포들을 따스하게 돌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의 지원을 해주었고, 그것은 북이 아주 힘든 상황에서도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일본의 동포들이 총련으로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 동포들의 절대다수가 경상남북도 출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을 둔 2세 혹은 3세이니 원래 고향은 남한이지만 해외에서 제 3의 눈으로 판단하기로 미군정과 이승만 이후의 남한을 모국으로 선택하지 않고 고향방문을 하지 못하면서까지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하여 북한 국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북을 오가며 조국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하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로 보답하고 있다.  내가 대략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이렇게 재일동포 기자들을 통하여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호텔의 아침식사 시간에 다시 만난 로금순 조선신보 기자.

노길남 박사님과 로금순 기자


이틀 후 로금순 기자와 호텔의 아침식사 때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로금순 기자는 북부조국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취재한다기에 근래에 지어진 집들을 답사해볼 기회도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북의 가정집들은 아주 잘 지어졌고 그 크기도 일본의 우리집보다 더 큽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내가 원래 일본 집들은 작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그래도 일본의 부모님들과 함께 사는 우리집은 큰 편인데 여기선 더 크게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집을 무료로 줍니다”라고 말한다.  그래 내가 이곳에선 무료에다 사용료를 얼마인지도 모를 만큼 조금만 낸다고 하는데 일본의 로금순 기자가 살고 있는 집은 어떻게 하는가를 물어보았더니 “아버지가 은행융자금을 갚고 있는데 그 금액이 적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같은 자본주의 세상이니 일본에서도 동포들이 집을 지니고 사는 일에는 내가 사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큰 부담을 안고 사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로금순 기자는 9월 12일에 북측의 기자단들과 함께 인천 아시안게임 취재차 한국에 간다고 했다.  그래 그렇다면 한국에서 여기저기 다닐 수도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한국에 가면 머무는 숙소와 경기장 외에 바깥세상 출입은 한국에서 절대로 금지시키기 때문에 외출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재일동포인데도 남한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것이다.  그 표정이 못내 아쉬워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분단의 아픔은 여기에도 있다.

9.9절 연회에서 다시 만난 김숙미 기자와 함께

로금순 기자와 함께 9.9절 연회에서


추석 다음날이자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일인 9.9절 밤에 평양호텔에서 북을 방문중인 많은 해외동포들이 한 자리에 모인 연회가 있었고 멀찌감치 떨어진 테이블에 김숙미 기자가 앉은 것을 보고는 다가가 기념사진을 찍는데 맞은편에 로금순 기자도 있었다.  반갑게 다시 만나 함께 사진을 남겼다.  북을 떠나기 전에 노 박사님과 함께 만나 저녁 식사라도 나누자고 하였지만 더 이상 함께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북부조국을 재일동포들에게 알리는 일에 열심인 젊은 두 기자의 앞날에 좋은 일이 많이 있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8

대동강변 새벽산책길에서 만난 사람들 

평양에서의 첫 새벽이다.  네 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잠이 깨었다.  옆 침대의 노 박사님도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컴퓨터를 켜신다.  민족통신 취재진이라 노 박사님의 책상엔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다.  북에 머무는 동안 민족통신에 기사를 올리면서 가끔 나를 불러 내게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연합통신 등을 통해 보여주셨는데, 그 인터넷은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어서  한 번도 내가 사용하지 않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번 방문 동안엔 세상 돌아가는 것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살펴볼 시간에 북부조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정리하고 사진 찍은 것을 저장하는 등 더 알차게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여섯 시가 되자 박사님은 미리 말씀하신대로 대동강으로 산책을 나가자고 하신다.  편안한 차림이지만 손엔 노트와 펜, 그리고 작은 카메라를 지참하고 호텔을 나선다.  아래층 로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니 한 두사람 정도 눈에 띌뿐 아직은 조용한 시간이다.   해가 뜨기 전이라 새벽 공기는 시원하고 아직 차들도 별로 다니지 않는다.  길을 건너 대동강 옆의 산책로로 들어서려는데 입구에 아주 잘 생긴 인민군인 한 사람이 서 있다.   

대동강변의 조각상


노길남 박사님이 그 군인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이렇게 먼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법을 나도 좀 배워야 할 것이다.  북부조국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몇몇이나 있는가?  아무 지인이 없는 이곳에서 누가 내게 대화를 청하기를 기다린다면 내가 몇 사람이나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이곳에까지 와서 무엇이든 많이 보고 배우려면 대화로 소통해야만 한다.  우리말로 소통할 수 있는 곳이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말을 건네고 대화를 시작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그렇지만 아무래도 사교적으로 타고나거나 아니면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라날 때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오히려 침묵은 금이라고 배우기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까지 편안하게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기가 어려워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 이번 기회에 언론사의 기자는 어떻게 대화를 터나가는지 지켜보면서 나도 배워보리라.


그런데도 아침 산책길의 첫 대화가 인민군이어서 그렇게 편안한 마음이 아니어서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다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그런데 이 사진이 노길남 박사님께는 정말 귀중한 사진이 될 줄이야 당시엔 아무도 몰랐다.  사실 이번이 62번째 방문길인 노 박사님은 이미 북에서 준비해둔 방문할 곳들 외 처음부터  취재하고 싶어한 두어 가지를 김미향 안내원에게 요청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었다.  그중 한가지가 인민군대를 방문하여 북의 인민군대에서 구타가 있는지를 취재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남한에서 당시 윤일병 구타 사망사건 직후의 시점이라 기자의 입장으로 북의 인민군대는 어떤 곳인지를 취재하여 보도하고 싶어한 것이다.  한데 노길남 박사님의 그 요청은 어떤 이유에선지 실현되지 못했었다.  


실제로 인민군대를 방문할 수만 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사실 인민군대에 구타가 있느냐의 문제는 인민군대를 찾지 않아도 며칠을 지나면서  쉽게 해결되었고 그래 박사님도 그 요청을 철회했다.  왜냐하면 새벽 산책길에서 만나 인터뷰한 군인처럼 우리가 가는 곳곳에서 종종 인민군인들을 만난데다 군대를 오래전에 제대하였거나 막 제대한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접할 수 있었기에 구타나 자살에 관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며칠만에 완전히 해결되었던 것이다.  그래 노길남 박사님이 숙소에서 인터넷으로 바로 그 기사를 민족통신에 올렸었다.  구타나 군대에서의 자살이 인민군대에선 있을 수가 없으며, 그런 단어 자체가 인민군대에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내용의 기사였는데 그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하기로 하자.  


대동강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인민군인과 즉석에서 인터뷰하는 노길남 박사


한편  노 박사님이 그 기사를 올릴 때 바로 내가 찍었던 이 한 장의 사진을 머리 사진으로 잘 활용하였는데 여기 첨부하는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다.  박사님은 자신이 인터뷰할 때 누가 사진을 찍어주지 않아 많은 경우 귀한 장면들을 놓치곤 했다면서 이 사진을 찍은 것을 아주 고마워했다. 그래  오늘은 내가 평생 꿈도 꾸지 못했던 사진기자의 노릇을 멋지게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데 그 사진 또한 내가 뭘 몰랐기 때문에 찍게 된 것이기도 하다.  북에선 우리에게 촬영하는 일에 대해서 제한을 두지 않았지만 내가 며칠을 머무르는 동안 되도록이면 인민군은 촬영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남북이 아직은 대치하는 상황에서 인민군의 사진을 함부로 찍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도 피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내가 남한의 군인들의 사진을 찍어서 북에  유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건 상식인 것이다.  그런데도 가끔 만나게 되는  인민군들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컷다.  무엇보다 정복을 입은 젊은 남여 인민군인들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그냥 스치고 지나치기엔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이후 여러 인터뷰를 통하여 인민군대엔 구타나 자살이 전무하고, 오히려 친 가족처럼 서로 돕고 사랑하며 지낸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박사님이 말씀해주셨을 때 내가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노 박사님은 정말 인민군대에 구타가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 그걸 직접 취재를 통하여 확인하려 한 것인지를 물어보니 정말 모르셨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기합도 세게 받은데다 구타도 당해보면서 군대를 제대한 박사님이 구타가 없는 군대는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듯하다.  그래 박사님은 자신이 올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하신다. 그만큼 이 북부조국은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은 사회인 것이다.


  


인터뷰를 마친 노 박사님과 함께 대동강을 향하여 계단을 내려가는데 음악소리와 함께 사오십 명 정도의 나이 든 여성들이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우리 춤 비슷한 동작으로 운동을 하고 있다. 곁을 지나치는데 춤을 모르는 나도 어깨가 으쓱으쓱 제법 신나는 가락이다.  박사님이 매일 이렇게 운동을 하시냐고 한 여성에게 물어보니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이만한 곳이 어디있냐고 하신다.  운동에 방해를 하지 않으려 멀찍이 떨어져서 사진 몇 장을 남겼다.



대동강변에서 아침운동을 하는 여성들


대동강변에서 휴식하는 사람들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강가에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산책 후 쉬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운동복 차림으로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한 젊은 여성에게 노 박사님이 말을 건네니 친절하게 인사를 한다.  민족통신의 노길남 박사를 이제 북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이 여성은 6년제 체육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한다.  6년제라면 대학원과 같은 격인 듯하다.  현재 22살로 그 학교의 6학년인데 ‘수영연구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수영선수인줄 알았는데 선수가 아니라 수영연구사라고 하니 참 생소하다.  그래 수영연구사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하고 물어보니 수영 선수가 더 나은 기록을 세울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뒷받침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 꿈을 꼭 이루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대동강변에서 만난 수영연구사가 희망인 여성 대학원생


노 박사님은 젊은이들이 걸으면서 그냥 길을 가지 않고 대부분 손에 노트나 책을 들고서 공부를 하면서 걷는다고 해서 살펴보니 정말 그렇다.  북의 젊은이들이 길을 걷는 시간까지 아껴서 공부하는 것이 어쩌면 아주 오래된 관습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25년 전에 원산 시내에서 만났던 중학생 세 명도 당시에 영어 교과서를  손에 들고 바람을 쐬고 있어서 반갑게 만나 대화를 하다가 그 영어 책을  읽어보라고 하니 줄줄 읽고 그 뜻을 해석도 정확하게 했던 것이 생각났다.  열심히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있으니 이 나라의 미래는 밝고 환할 것이다.  그 공부가 특별히 스스로를 위한 공부이면서 또한 이웃과 조국에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한 공부이지 않은가.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9 14-10-10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9


대동강변에서  만난 사람들 (2)


새벽에 약간 끼었던 안개가 걷히면서 대동강 너머 동평양의 건물들 위로 아침해가 떠오른다. 아주 찬란한 태양이다.  오늘은 아주 맑은 날씨가 될 것 같다.  보통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내가 일찍 일어나 일출 모습을 관찰하는 일은 평소엔  거의 불가능한 편이지만 이렇게 북부조국을 여행하다보니 일찍 일어나 새벽산책까지 하게 되어 귀한 평양의 일출 모습을 보는구나 싶어 사진으로 남겼다.  


대동강의 일출 모습


부근에 뱃머리에 용을 장식하여 거북선을 본딴 듯한 유람선이 정박중인데 원한다면 시간 맞춰서 저 배를 타고 대동강을 유람할 수 있다고 한다.  배를 타고 둘러보는 평양의 모습도 볼만할 것 같았지만 오전 오후 두 번 배가 나간다는데  평양에서의 일정이 그렇게 한가하지를 못해서 그 배를 탈 새가 없었다.  유람선 주변엔 낚시꾼들이 빼곡하게 모여있다.  무슨 물고기를 낚느냐고 물어보니 납지러기라고 한다.  보통 여기선 제법 큰 고기들이 낚이곤 했는데  근래엔 큰 고기들은 물지 않고 새끼들이 주로  잡힌다고 한다.  낚시꾼들은 우리보다 훨씬 일찍 와서 여기서 자리를 잡은 듯 한데 아마 날이 새자마자 낚싯대를 던지기 시작했을 것 같다. 




대동강의 유람선과 주변의 낚시하는 모습


조금 떨어진 곳에선 낚싯대를 사용하지 않고 줄낚시를 여러 개 던져서 줄을 팽팽하게 하여 작은 요령을 달아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낚시를 무지 좋아하기에  이런 낚시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오랜 옛날 고향 저수지에서 사촌 형들이 종종 사용하던 방법이다.  추를 달고 낚시에 지렁이 혹은 떡밥을 달고는  휘휘 돌려서 멀리 던져 가라앉게 한다.  그러고는  줄을 팽팽하게 고정하고 저렇게 요령을 달아놓으면 고기가 입질을 할 때 딸랑딸랑 소리가 나서 줄을 챌 준비를 하고 있다가 입질이 세게 올 때 잡아채는 방법이다.  낚싯대가 필요 없고 여러 개의 줄을 던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점이라면 줄을 당길 때 낚싯대와 릴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바닥에서 줄이 헝클어질 우려가 있다.  내가 만일 제대로 준비된 장비가 없이 오지에 고립된다면 이런 방법으로 낚시를 해서 고기를 낚을 것이다.  실제로 옛날 중학교 시절에 낙동강에서 이 방법으로 낚시를 했는데 장어 한 마리를 낚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수십 년만에 이렇게 낚시하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주 큰 고기를 낚았으면 했는데 이 강태공도 아직은 피래미같은 고기만 몇 마리 낚았을 뿐이었다.



줄낚시를 설치해놓은 모습.  납지러기 생선.


유람선 선착장 주변에서 손에는 공책을 든 두 남학생을 만났다.  북의 십대 학생들이다.  운동복 차림의 자유롭게 옷 입은 모습이나  얼굴 생김이 남의 학생들이나 별 다름이 없다.  나이는 열 여섯 살이라고 했다.  한 학생은 스스럼없이 대답을 하고 다른 학생은 낯선 사람이라 편하지 않은지 약간 시선을 외면한다.  어떤 학교에 다니느냐고 물으니 고급중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고급중학교라면 우리의 고등학교다.  북은 2년 전에 11년제 의무교육이던 것을 12년제 의무교육제로 바꿨다고 한다. 고등학교까지 아무런 등록금이 없을뿐 아니라 국가에서 교복도 주는 나라다.  따로  돈을 들여 과외수업이나 개인교습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나라다.



고급중학교에 다닌다는 두 학생과의 대화


12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그저 예사로 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잠깐 기억을 되살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된다.   내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기에 중학교에 바로 진학하여 공부할 수 있었던 친구들은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의무교육이던 초등학교마저 매월 쌀 한 되 값의 기성회비를 내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던 급우들이 여럿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절반 이상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이미 북에서는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당시엔 북이 남쪽보다 더 잘 살았으니 가능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의 의지의 문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제공하려는 나라의 의지와 또한 자녀들을 돈 없어도 교육시킬 수 있도록 그 부모들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나라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란 것이다.  


부모된 마음으로 그 사랑하는 아이들을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어도 돈이 없어 보낼 수 없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 세대에 내 주위에 형이나 누나가 공부하기를 포기하고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하여 힘들게 번 돈으로 동생이 겨우 공부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서 너나 할것 없이 대부분의 부모가 모든 것을 희생해야만 했던 시절을 기억한다면 이미 오래전부터 실시해온 북의 의무교육에 대해서 우리는 당연히 크게 점수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거기서 소 팔고 논 팔아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미래를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그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 곧 모든 인민을 이 나라가 어떻게 사랑하고 대우하는 나라인지를 오래전부터 나라 살림이 풍족하지 못하면서도 의무교육을 실시해온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지 않은가?


지금의 남한의 아이들에게는 한국의 교육제도가 지옥이다.  과외수업 비용으로 돈도 많이 들지만 엄청난 경쟁 가운데 공부해서 대학에 가야만 한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어렵지만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불이익이 크니 누구나 대학을 가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순간부터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 능력이 닿으면 아이들을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보내서 교육받게 하는 가정들이 수없이 많다.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곳을 떠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남한의 교육제도는 바뀔줄을 모른다.  남한의 사회 자체가 지금의 교육제도와 맞춰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돈을 들이지 않고도 공부시킬 수 있다는 제도 자체로는 내가 사는 미국도 북과 마찬가지로 12년제 의무교육이다.   한데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북은 학생들이 전문학교나 대학교로 진학하게 될 때도 등록금이 없다고 한다.  이건 어느 나라보다 월등하게 좋은 제도가 아닌가?  미국의 대학이나 대학원의 등록금은 웬만한 가정의 반년치 수입과 맞먹기 때문에 제법 수입이 좋은 부모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에도 살림살이가 휘청거리게 되고, 그렇지 못한 부모여서 학자금을 부담할 수 없는 학생들은 개인적으로 큰 빚을 지면서 공부하고 사회에 나가 취직을 하자마자 학자금 빚을 갚기에 바쁘다.  


부자 나라들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가난하다고 알려진  북의 재정으로 무료교육을 완전히 시행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생들이 12년제 의무교육을 마치면 원하는 분야에 바로 뛰어들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전문학교에서 무료로 직업교육을 더 받은 후에 직장을 갖게 된다고 한다.  이 부분은 따로 북에서 대화한 것이 있으니 이후에 좀 더 거론할 수 있을 것 같다.



노길남 박사님이 두 학생들에게 학교의 성적은 어떤 방식으로 매기는지 물어보았다.  수 우 미 양 가, 혹은 A B C D F,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성적을 매기는지 물어보니 5 점이 최고 점수고 4점, 3점, 2점 순으로 매기는데 2점부터 낙제라고 한다.  그래 2점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고 물어보니 다시 공부해서 재시험을 치룰 수 있다고 한다.   


잠깐의 만남이지만 헤어지는 두 학생들이 내 아들처럼 사랑스럽다.  그래, 우린 한 민족 한 핏줄의 동포다.  저 아이들이 군대로 가고 남쪽의 동포들, 내 친구과 친지들의 아이들이 군대로 가서 서로 총을 맞대는 이 비극을 이젠 끊어야만 한다.  바로 평화통일이 그 답이다.  우리 모두가 다시금 통일을 외쳐야만 한다.  통일을 이룰 때까지 그 외침이 멈추지 않아야 한다.


옅은 안개 가운데 주체사상탑이 우뚝 서있는 모습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0

대동강변에서 만난 사람들 (3)

조금 더 가다가 쉬고 있는 두 할머니를 만났다.  78세와 81세라고 하는데 아주 건강한 모습이다.   북에선 여성은 56세부터 , 남성은 60세부터 연로보장을 받는다고 한다.  연로보장이 무엇인가하고 알아보니 직장에서 은퇴하여 사회보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이건 미국의 경우 62세 이상 될 때 신청하면  젊어서 일하면서 미리 세금으로 공제한 금액에 따라 사회복지 연금을 받게 되고, 그 돈으로 충분하게 살아가기엔 어렵지만 일단 노인들의 생계는 보장이 되는데, 북에서도  그렇게 나이가 들어 직장에서 물러나면 연로보장을 받는다는 것이다.


대동강변에서 두 할머니와 대화하는 노길남 박사

잘산다는 남한에서 직장을 은퇴하면  죽는 날까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는 소리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집 없는 노인들에게 집을 제공해준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고 얼마 안되는 노인들의 복지연금마저 줄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이 있다면 남한의 정부에서 주는 혜택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식에게 부모를 부양해야 하도록 강요하는 법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은퇴하면 스스로 알아서 살던가, 아니면 그 자식들의 상황이나 생활 형편은 아예 고려하지도 않고 자식들에게 노인들을 부양하도록 국가가 책임을 전가해버리는 것이다.  

 한데 북에선 직장에서 은퇴하면 평생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연로보장을 해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두 할머니에게 연로보장이 어떻게 노인들의 생활을 보장하는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거주할 집과 알곡과 부식이 보장된다는 것은 이미 그동안 귓전으로 들어서 알고 있다.  

두 할머니와 함께한 필자

노 박사님이 두 할머니에게 우리나라가 통일이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 곧바로   “그야 미국놈들 때문이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 얼마나 정확하고 명확한 답변인가?  노 박사님이 정말 바른 답을 주셨다고 칭찬을 하신다.  사실 이렇게 간단하고 확실한데도 남한의 민중들 가운데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연로한 사람들 가운데 이렇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대화중에 다른 두 할머니가 합류한 모습

미국 때문에 통일이 되지 않는 것은 옳은 이야기지만 아무리 미국이 뒤에서 버티고 있다해도 남쪽의 정치인들이 통일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통일해야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통일은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는 꼭 통일을 해야겠다고 나서는데야 미국이 어쩔 것인가?  남한의 정치인들이 통일을 외면하고 민중의 뜻을 외면하는  것이 문제다.  

언제 민중이 통일을 반대했던가?  남한의 민중은 정치인들이 이제 이만하면 됐으니 통일해야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금방 따라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러 방북했을 때 그걸 환영하고 지지했던 대다수 민중의 뜻이 곧 민심이다.  지금 온 나라가  매스컴의 왜곡된 북한에 대한 정보를 지난 7년 동안 제공해온 영향으로 민중 가운데 아무도 통일을 말하지 않고 통일의 꿈을 꾸는 것마저 잃어버린 시절처럼 보이지만 민심이 통일로 향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 증거가 여기에 있다.  이번 아시안 게임 폐막식에 북한에서 3명의 고위급 인사가 방문했을 때 누구 한 사람 그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모두의 기대가 컷고 남과 북이 이제 다시 서로 소통하고 화해하기를 바라고 있다.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엔 남과 북이 평화롭게 지내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단지 남한의 정치인들이 그 민심을 제대로 읽고 반영할 줄을 모르는 것이 통일이 안되는 이유인 것이다.


얼마 걷지 않아서 이번엔 잘 생긴 대학생을 만났다.  어깨에 책가방을 메고 손에 든 공책을 들여다보며 강변을 걸어오다 우리와 마주친 것이다.  우리가 재미동포라고 밝히고 잠깐 대화를 청하니 발걸음을 멈추고 기꺼이 들어준다.  손에 든 노트북으로 무슨 공부를 하는 것인가하고 물어보니 오늘 응용수학 시험이 있는데 시험공부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나이는 28세로 김책공업대의 학생이라 했다. 

왜 김책공업대학이라 부르는가고 물어보니  “김책은 항일혁명 시기에 수령님보다 더 연상이었지만 수령님만을 받들고 혁명투쟁을 같이 한 사람입니다.  수령님이 그 어려운 항일혁명 시기에도 금고 속에 한 장의 사진을 꼭 간직하고 보관하였는데 그 사진이 바로 김책동지였습니다.  우리 김책공업대는 김책동지를 기념하여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지만 실제로는 수령님의 대학입니다”라고 말해준다.

필자와 김책공업대학생의 만남을 기념하기 위해  한 장


다정한 모습의 대학생과 노길남 박사

김책공업대학은 어떻게 입학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니 인민군대에서 복무하였는데 제대할 때 희망대학에 시험을 칠 수 있다고 한다.  대학시험에 합격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하던데  시험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하고 물어보니 “군대에 있는 동안에 짬짬이 공부하여 시험을 쳐서 합격했습니다” 라고 말해준다.  대학생이 된 이후 국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제공해준다고 한다.  아직 미혼이고,  컴퓨터 전공이라고 했다.  참으로 기특하고 친절하고 아름다운 동포 청년이다.  함께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공사중인 무지개호 앞에서.  강 건너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길을 더 가니 이곳은 공사중이라 강변으로는 더 이상 지나갈 수 없다고 한다.  아주 대형 유람선 무지개 호가 강변에 정박중인데 마무리 공사중이라 주변의 통행을 막은 것이다.  완공되면 아마 수 백 명이 탈 수 있을 것 같은 규모다.  계단으로 윗쪽으로 올라오니 사람들이 베드민턴 게임에 한참이다.  쉬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백인 한 사람이 있어 말을 걸어보니 우크라이나에서 비행기 관련 일로 방문하여 체류중인데 이번이 4번째 방문이라고 했다.  그래 옆의 친구처럼 보이는 북한 사람들도 함께 일하느냐고 물어보니 그분들은 오늘 여기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주변 언덕에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다.  북부조국에서도 코스모스는 인민의 사랑을 받는 꽃인가보다.  




산책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나 이제  아침 7시의 길거리는 출근길로 사람들과 차로 붐비기 시작한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이곳 인민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활기찬 발걸음들이다.   노 박사님이 여성 교통보안원 옆을 지나치면서 “수고하십니다”라고 하니 뭔 일인가하고 바라본다.  이어서 “예쁩니다”라고 하니 활짝 웃어준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해도, 그리고 교통보안원이라 해도 여성들에게 아름답다고 하면 기분좋아하는 것은 세상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노길남 박사님이 "이쁩니다"라고 하자 활짝 웃어준 교통보안원이 멀리 보인다.



활기찬 발걸음의 평양 시민들의 출근 모습.  


호텔 바로 옆에서 노 박사님이 바쁜 걸음으로 등교하는 자그마한 여학생에게 말을 건네며 어깨동무를 한다.  손녀처럼 귀여운가보다.  중학교 1학년이라고 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이제 호텔에서 제공하는 아침 식사시간이라 식당으로 향한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1 14-10-14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1


평양 사투리인가 평양 표준말인가


평양호텔의 대식당은 2층 긴 복도를 지나서 있는데 내가 묵는 호텔의 객실과는 반대 방향이다.아침식사 시간에 맞춰 들어가니 천정이 아주 높고 멋진 샹들리에가 장식되어 아름다운 궁전처럼 보이는 넓은 방인데 전면에 대형 금강산의 폭포 그림이 걸려 있어 운치를 살려준다.   규모로 보아 2층도 있어서 한 번에 이백여 명 이상 쉽게 수용할 수 있을 듯하다.




이미 여기저기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중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에서 온 동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우리가 식사할 자리는 안쪽이었는데 부근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있어 말을 걸어보니 일본에서 온 조선대학교 학생들이다.  오늘 오후에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현재 63명 가운데 30명이 생존해있다고 한다.  북부조국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들의 아파트엔 우리도 이후에 방문하여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은 나중에 서술하기로 하겠다.




아침식사는 양식으로 나왔는데 토스트에 버터, 잼, 달걀프라이, 야채절임, 그리고 팟죽이 나왔다.  우린 음식을 가져다준 봉사원에게 미국식으로 식사때 커피도 함께 마실 수 있도록 주문했다.  첫날의 달걀프라이는 손잡이가 달린 프라이팬에 담긴 그대로 식탁에 올려줘서 따끈하게 먹을 수 있었는데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아침을 먹지 않는 습관을 지켜왔는데 그건  옛날 함석헌 옹의 책을 읽고 1일 2식을 실천에 옮겨왔기 때문이다.   그래 심한 노동이나 운동을 하지 않을 경우엔 하루 두 끼만 먹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하고 실천해왔는데 이번 여행에선 워낙 일찍 잠이 깨는 바람에 에너지가  더 필요하기도 하였지만 북부조국에서 여행하면서 만날 수 있는 맛난 음식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어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접대원 한 사람이 다가와 노길남 박사께 인사를 한다. 노 박사님이 자주 오시다보니 이미 구면이 되어 반가워서 찾아온 것이다.  이곳에서 일한 지 11년이 되었다고 하니 벌써 여러차례 노 박사님과 만났을 것이다.   이름표를 보니 최목란 접대원이다.  이곳 접대원들  가운데 제법 오래되어 관리직에 있는 듯하다.  노 박사님이 최목란 접대원에게  남한의 여배우를 닮은 접대원이 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다.  여배우 누구를 닮았을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노 박사님과 대화하다보니 영화배우 문근영이다.  내일은 나온다고 하니 얼마나 닮았을지 사뭇 기대가 된다.


노 박사님을 반갑게 맞이한 최목란 접대원


첫 아침식사를 봉사해준 김은주 접대원과의 대화


우리에게 음식과 커피를 가져다준 사람은 김은주 접대원이었다.  노 박사님이 추석때 제사를 지내느냐고 물어본다.  앞으로 나흘 후면 추석인데 북의 인민들이 추석을 쇠는 방법을 노 박사님은 어느 정도 아시는 듯하다.  김은주 접대원이 묻는대로 대답해준다.  추석날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 방법이 참 특이하다.  추석 전에 유골보관소에서 조상들의 유골함을 찾아서 집으로 가져온다고 한다.  그리고 추석날 아침에  준비한 음식과 함께 그 유골함을 놓고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유골함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이미 널리 자리잡은 것으로 볼 때 북부조국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통의 경우라면  묘지를 사용하지 않고 화장을 하는 것 같다.   유골보관소에서 조상의 유골을 찾아 온다는 것은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내 몸을 낳아준 조상의 뼈를 담은 함을 추석날이나 제삿날에 어루만지면서 그 조상에 대해서 더욱 깊은 마음으로 옛날을 추억하고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것에 감사할 수 있으리라.  종이에 쓴 지방보다 오히려 유골함을 제삿상에 놓는 것이 훨씬 더 후손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남한에서 이렇게 북한처럼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지방마다 그 방법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어렸을 때 내 고향에서는 명절때 제일 큰 집에 모두들 모였었다.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라 나도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나갔기 때문에 절을 하지 않고 멀찌기서 지켜만 보았다.  큰아버지들과 사촌 형들이 마루에 주욱 늘어서서 조상께 올리는 밥과 국을 몇 차례씩이나 바꿔가면서 절을 하였다.   아마 몇 대 선조들의 제사를 같이 지낸 것 같다.  제사가 끝나면 나이 든 몇몇 어른들은 미리 벌초해서 단장한 산소를 찾아뵙고 우리들은 이웃의 친지들을 방문하는 것으로 추석날 아침을 보냈다.   


조상들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기독교 신앙에선 피하도록 하였지만  내 어머니와 나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았다.  음식은 그저 음식일뿐이라 여기고 아무 거리낌없이 먹었다.  그래도 보통의 음식과는 달리 제사 음식에서는 향냄새가 배어들기도 해서 약간 야릇한 기분으로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고향의 친지들과 명절에 한 자리에 모였던  것은 내가 미국 이민으로 남한을 떠나오기 전의 일이니 벌써 서른 일곱해나 되었다.  가끔 방문을 하여도 명절에 맞춰서 가기가 어려웠고 지금은 명절이 되어도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도시의 사촌 집에서 지낸다고 하니 그 규모와 방법이 많이 달라졌으리라.


평양호텔 의무실의 김금석 의사와 노길남 박사

김금석 의사의 응급진료가방


식사를 마치고 2층 복도의 반대편으로 돌아오는데 의무실이라는 방이 있어 그곳을 잠깐 들렀다.  노 박사님이 문을 두드리신다.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호텔의 의무실이란 어떤 곳인가해서 들른 것이었다.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김금석 의사였다.  평양의학대학을 나온 후 17년째 의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전공이 고려치료라고 하는데 남한의 한의사와는 좀 다른 것 같다. 호텔에서 24시간 이 의무실은 문을 여는데 주로 가벼운 환자들의  1차 진료를 여기서 하고, 중환자들은 2차 진료소로 보낸다고 한다.  북의 많은 의사들이 해외에서 봉사를 하는데 김금석 의사 본인도 방글라데시에서 2008년에 4년간 의료기술협조를 하였다고 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어떻게 일했느냐고 하니 영어로 소통하였다고 했다.  


김금석 의사와의 대화


대화를 하는 동안 김금석 의사의 이름을 적다가 한참 애를 먹었다.  김굼석이라고 발음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몇 번을 물어보니 굼은보석할때 굼이라는 것이다.  아, 이건 내가 종종 겪는 문제였다.  금으로 발음할 것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조심하지 않으면 검으로 발음하게 된다.  평양에선 그 금을 굼으로 발음하게 되는가보다.  이 발음이 평양 사투리가 아니고 평양에선 굼으로 발음하는 것이 표준 발음이라고 우긴다면 어쩔 수 없다.  굼으로 발음하는 것을 내가 익혀서 알아듣고 가끔 사용하기도 하면  될 문제다. 무엇보다 북부조국의 수도는 평양이 아니던가.  진료소 한쪽에 어항이 있어 살펴보니 금붕어와 열대어로 보이는 물고기 세 마리가 있다.  따로 김금석 의사에게 금붕어를 발음해보라고 하지 않았지만 "굼붕어"라고 발음하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속으로 크게 웃었다.


금붕어를 평양에서는 '굼붕어'로 발음하는지 나는 모른다.


5층의 숙소로 돌아오는데 숙소 부근의 작은 휴게실에서 웅변을 하는 듯 두 여성들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무슨 일인가 궁금한 차에 박사님이 그쪽으로 향하여 인사를 하니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들려준다.  


조선대학교의 옛스승과 연극배우가 된 제자 사이라는 두 여성을 만남


젊은 여성은 이곳 국립연극극장의 연극배우인데 일본에서 찾아온 조선대학교의 옛 스승을 만난 것이다.  예전엔 스승이었지만 지금 북부조국에 찾아와서는 옛 제자로부터 조국에 대하여 강습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북에 와서 옛 제자와 반갑게 만나 제자로부터 북부조국을 배우는 것이 그렇게 행복해보일 수 없다.  좋은 시간 보내시라고 했다.  같은 호텔에 머무는 동안 자주 만나게 된 조선대학교의 스승과 제자들의 친가족같은 모습은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목격할 수 있었다.  좋은 스승에 좋은 제자들이 나오는 법이다.  모두 북부조국 학교의 전통을 일본의 동포들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리라. 이후에 사진과 함께 그 부분에 대하여서도 쓰게 될 것이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2]가 시작되는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II / 강산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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