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6_北韓과中國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 / 강산

忍齋 黃薔 李相遠 2014. 11. 22.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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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자이신 강산 선생님과 동행하신 노길남 선생님이 바라보시는 순수한 북한 동포에 대한 동족애와 사랑 그리고 그 측은지심을 이해하고 북한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두 분의 생각이 담긴 글을 이곳에 소개를 하지만, 북한 정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을 밝힙니다. 북한정권의 독재와 세습왕조 그리고 여러 경로로 이미 알려지고 확인된 인민에 대한 탄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며 살인마 전두환과 함께 인류의 양심 앞에 처단되어야 할 공적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어제는 시애틀에 사시며 "25년 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를 운영하시는 웹페이지 "사람 사는 시애틀 한마당"에 2014년 9월 24일부터 2014년 11월 18일까지 총 25차례에 걸쳐 게시하신 강산 선생님이 페이스북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그분의 페이스북을 방문하니 통일운동을 하시는 분입니다. 도와드릴 만한 게 내 블로그와 페이스북을 통해 통일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좋을 듯하여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강산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그분의 방북기를 제 블로그에 제 게시합니다. 강산 선생님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모든 볼드체는 원문이 링크되어 있습니다.]


"25년 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연재를 예고합니다. /14-09-24


선양공항에 도착하여 한반도기를 들고 있는 강산 선생님

  선양공항에 도착하여 한반도기를 들고 있는 노길남 선생님과 강산 선생님


제법 오랜 여행을 마치고 이제 막 귀가하였습니다.


이번 여행은 제 자신을 위한 여행이기보다 우리 조국의 미래를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였음을 알리며 시간 나는대로 저의 여행기를 올리기로 하겠습니다.  


사진 두어 장을 올려보겠습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하였던 민족통신의 노길남 박사님이 중국 선양에서 저를 한반도기로 맞아주셨습니다.  우리나라가 분단을 끝내고 저 한반도기 처럼 남과 북이 하나가 된 나라가 되어야만 우리와 후손들이 진정 평화롭게 살아갈만한 아름다운 조국이 되는 것 아닐까요?   그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또한 통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너무도 드문 시절입니다.  


제가 앞으로 정리하면서 써나갈 북부조국 방문기에 많이 소통해주시고 널리 알려서 읽는 이들 모두가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통일꾼들이 되어지길 기원합니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 / 14-09-25


사진은 옥류관에서 바라본 대동강 너머의 평양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1


25년만의 북부조국 방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보니 세월이 참으로 빨리 흘러간 것을 느끼게 된다.  북을 처음 방문한 지 벌써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버린 것이다.  서른 초반이라는 젊디 젊은 나이에 내 삶이 우리 조국의 통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삶이 되어지길 바라는 꿈을 꾸었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하였던가.  그때 북부조국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길이 열렸고 나는 주저없이 나에게 주어진 그 행운을 놓치지 않았었다.  그렇게 처음 북부조국을 방문하였던 일에 대한 동기와 자세한 이야기들은 이번 방문기를 쓰면서 차차 밝혀나갈 기회가 있을 것이다.


어떤 여행도 마찬가지겠지만 북부조국을 방문하는 여행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남부조국의 동포들이 지금 북부조국을 방문하는 것은 정권의 제재로 인하여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해외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가는 동포들이 북부조국을 방문하는 것 또한 먼저 그 여행을 계획하고 이루기 위하여 시간과 금전을 준비하고 노력하는 일에 앞서 분단된 우리 조국의 나머지 절반을 꼭 찾아보겠다는 뜻을 확고하게 세우지 않고는 쉽게 이룰 수 없다.  그렇게 뜻을 세우지 않고 대충 여행을 계획한다면 보통의 여행과 달리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일들로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북부조국을 방문하기 위하여 뜻을 세운다는 것은 먼저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모으는 일이 아닐까?  ‘남도 내 조국이요 북도 내 조국이다’라고 외치며 80년대에 통일운동을 벌여온 선배 운동가들의 외침이 가슴 깊숙히 와 닿아야 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남이 내 조국이라는 것은 누구나 느끼는 일이지만 북도 내 조국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드물다.  조국의 지도를 그리라고 하면 누구나 한반도 전체를 그리지 휴전선 이남만 그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생을 반공교육으로 북을 나쁘게만 알려온 학교교육과 매스컴의 영향으로 북도 나의 조국이고 북의 인민들은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동포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곳과 그 인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품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수많은 애국자들이 빨갱이로 혹은 지금의 유행어인 종북으로 탄압을 받아왔던가?  북에 대하여서는 진실 그대로를 제대로 알아보려는 마음을 품는 것까지 회피하고 금기시하는 것이 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얄팍한 삶의 지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연 그렇게 북에 대하여 진실을 알기를 회피하며 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을 주는대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지혜로운 삶인가?  인간은 동물과 달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고,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고귀한 인격이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귀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누리기 위하여 제도와 법을 만들어 민초들을 세뇌하고 주는대로 덥석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어떻게 제대로 된 사람일 수 있는가?  시키는대로 사는 노예로 살아가는 세상이라해도 정신만은 시퍼렇게 살아있어야 인간이 아닐까?   참 인간은 진실을 바로 알고 바로 판단하고 바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진실을 알기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것이 참 사람인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실을 회피하는 것은 지혜로운 삶이기 보다는 겉으로도 노예로 살지만 그 속마음마저도 노예로 살아가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번 방문을 통하여 이미 25년 전에 방문하였던 북부조국과 그 인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에 관하여 내가 아는 상식과 그동안 읽은 여러 책에서의 내용을 좀더 깊이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널리 알려 통일운동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북에 대하여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드물다.  북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통일운동을 하자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뜻을 세운 것이니 나의 이번 북부조국 여행은 꼭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교적 자유롭게 살아가는 해외동포들 가운데 북부조국을 방문하는 분들이 있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그 가운데 존경하는 신은미 님은 방문기를 통하여 남부조국과 해외동포들이 북에 대하여 조금씩 마음을 열게 하고 지난 7년 동안의 반통일 정권이 들어선 이후 사그라져가는 통일에의 꿈을 민중 속에 생겨나게 하는 귀한 역할을 하고 계신다.  나와 이번에 동행했던 노길남 박사님은 오랜 세월 동안 62차례 북을 방문하면서 로스엔젤스에서 ‘민족통신 인터넷 신문’을 통하여 북에 관하여 진실을 보도해오셨다.  이번 나의 25년만의 북부조국 방문 여행을 결행한 것에 노길남 박사님과의 인연이 크다.  그 이야기들도 차차 방문기 가운데 밝혀나가고 싶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나의 북부조국 방문기는 인터넷 시대에 맞춰 되도록이면 간결하면서도 사진을 곁들여 읽는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며 써나갈 것이다.  그래도 때로는 제법 깊숙하게 어떤 주제에 관하여 쓰기도 해야 할 것 같다.  북부조국에서 그냥 보여주는 곳을 답사하는 관광을 즐긴 것이 아니라 나의 대부분의 여정은 내가 관심있어한 여러 곳을 방문하며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런 가운데 보다 깊이 이해하고 서로 공유하였으면 하는 부분들도 많았다.  작은 노트북을 모두 채울 만큼 열심히 메모를 하였던 것과 사진들을 토대로 그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  그래 스마트폰으로 잠깐 스치듯 읽고 넘어갈 경우도 있겠지만 독자들에게 좀 더 시간을 할애하여 함께 깊숙히 생각해보는 기회도 드리고 싶다.  오늘은 서론이 많이 길어진 것 같다.  시간이 나는대로 몇 주 동안 비워놓았던 나의 생업의 밀린 일들을 처리하면서 방문기를 계속하려고 한다.  읽는 재미가 클 수도 적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운동에 참여한다는 마음으로 함께해 주셨으면 한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  / 14-09-26


사진은 인천공항 인근의 호텔에서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2


북부조국 가는 길에 


오랫동안 그리던 북부조국으로의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지만 북으로 가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어디로 여행을 떠난다하고 알리는 일은 나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 몇몇 외엔 말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그 과정이 어려운 것이다.  장성해서 어른이 된 자녀들도 아버지가 노스 코리아에 간다는 소리에 의아해한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어도 왜 꼭 거길 가야 하느냐하는 얼굴이다.  그래도 아버지가 결정해서 하는 일이니 받아들이고 잘 다녀오라고 한다.  집사람은 25년 전에 내가 결정하여 다녀올 때 묵묵히 그 뜻을 알고 받아들였던 터라 이번에도 별로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찬성하지도 않는다. 


멀리 하와이에 계시는 어머니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다.  나를 이해하는 어머니지만 폐렴으로 잠깐 입원까지 하신 상황에 다시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중국을 거쳐 한국에 다녀온다고 했더니 근래에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하와이로 데리고 온 종교인을 만난 적이 있는데 웬지 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었다고 하면서 나도 그런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하고 오히려 더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절대로 그런 것 아니라고 안심을 시키느라 진땀이 났다.  차라리 북부조국에 간다고 했으면 이미 오래전에 다녀온 곳이라 어머니 마음이 편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마음 속에 간직만 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그렇다고 또 주변에 이야기하면 이웃에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한마디씩 해줄 것이니 어머니의 마음 또한 편하지 않을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한편 시애틀에는 지난 7년 동안 나와 깊이 유대하고 마음을 나누는 여러 동지들이 있다.  이번 여행에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대부분 이후에 북부조국을 방문하고 통일운동에 앞장설 분들이라 그들에게는 오래전부터 나의 여행을 밝혔는데 고맙게도 노잣돈을 주신 분도 계시고, 동지들이 잘 다녀오라고 덕담과 함께 환송까지 해주었다.  나의 세 형제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떠나는 이번 여행을 이들에게 말하고 떠나게 되었으니 이 동지들이 바로 내 혈육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랴.  그렇다.  사회변혁운동이나 통일운동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운동하면서 서로 깊은 믿음으로 맺어진 동지들과 함께 해야만 지쳐 쓰러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시애틀을 떠나 9월 1일 저녁에 인천에 도착했다.  9월 2일에 중국 선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하여 하룻밤을 공항 인근에서 지내야 하였기에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한 공항 인근의 호텔을 찾았다.  저녁을 먹고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 옛 초등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바로 부인과 함께 달려오겠다고 한다.  8년 전 내가 사는 곳으로 친구 부부가 다니러 왔었고 그때 보고는 처음이다. 호텔로 찾아온 이 친구에게도 일단 중국으로 간다고 말해주면서 자세한 것은 다녀와서 이야기하겠다고 하니 나를 깊이 신뢰하는 친구인지라 편하게 대해준다.  한데 친구 부인이 어머니가 물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중국에서 탈북자 선교와 연관된 일로 가는 것이 아닌가하고 물어온 것이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면서도 사실대로 북부조국으로 간다고 지금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 참 안타깝다.  


9년만에 찾은 남부조국에서의 밤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어찌 감회가 없을 것인가?  이곳에도 내가 지난 2년 동안 변혁운동에 뛰어들어 함께 행동하는 동지들이 있다.  함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면서 그룹을 만들어 이제 2천명이 넘는 회원들이 있는 단체다.  인터넷으로만 서로 연결되어 아직 서로 얼굴을 대하지도 못하였지만 참 보고픈 사람들이다.  그래, 다녀온 이후에 이들도 만나야 한다.  당분간 내가 여행을 떠나 인터넷 접속이 잘 안될 것이라는 말만 남겨두었는데 북부조국을 다녀온 후에 연락해서 만나는 것이 좋으리라.  


그렇다.  아직은 북부조국을 찾는 일은 이렇게 조용하게 추진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얼마간은 자유로운 나와는 달리 남부조국의 친구와 동지들은 아직도 보안법의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하지 않은가?  내가 지금 여행의 목적지를 말하지 않는 것은 바로 내 사랑하는 이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민족의 비극이 여기에도 있다. 남부조국 인천에서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3 / 14-09-26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3


선양에서 만난 사람


인천에서 선양으로 가는 비행기는 얼마간의 빈 좌석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승객들이 참 많다.  국제선이라서인지 점심으로는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맛있는 기내식으로 잘 요리된 닭고기와 밥, 그리고 빵과 약과도 나온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모두 비웠다.   비행 시간은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 4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날씨가 흐린데다 창가에 앉지 못하여 착륙 전에 광활한 만주벌판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지만 선양에 다가갈수록 우리 선조들이 고조선 시대와 그 이전부터 이 넓고 광활한 대륙에서 말달리며 살아온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나를 이루기까지 이어온 그 선조들이 어디서 살았는지를 자꾸 거슬러올라가면 결국 오랫 동안 그들이 살던 땅은 바로 이곳 드넓은 만주벌판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고대로부터의 역사를 생각하니 감회에 벅차다.  이 넓은 땅을 모두 잃은데다 한반도마저 지금은 반으로 나눠져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양 공항에 도착하여 제법 긴 여정을 위하여 준비한 큰 가방을 찾아서 나오니 세관에서 열어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미 나라와 나라 사이의 장벽이 많이 무너졌고  사람들의 짐 또한 그 부피가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국경을 초월하여 무역이 활발해진 덕분에 이젠 먼 곳에 여행했다가  물건들을 잔뜩 사오는 경우가 점점 사라지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십 년 전, 내가 미국으로 온 가족이 이민을 떠날 때 제대로 들 수도 없었을 만큼 무거웠던 이민 보따리를 떠올리며 웃음을 머금는다.  이번 여행은 제법 긴 여행이라 큰 가방을 새로 구입하여 갈아 입을 옷을 많이 챙겨왔는데도 겨우 절반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은 상태다.  내 가방이 크긴 하지만 북부조국과 미국 사이엔 무역이 없으므로 내가 북부조국에서 무엇이든 구입하게 될 경우 그건 아주 귀중한 물품이 되며, 내 가방 안에 넣을 공간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하지 못해 애를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게다가  아주 좋은 바퀴가 달려있어 별로 힘들이지 않고서도 밀고 다닐 수 있어 다행이다.


카트에 짐을 실어 밀고 나오니 약속대로 로스앤젤스 민족통신을 운영하시는 노길남 박사님께서 마중을 나오셨다.  나를 향해서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사진을 찍어주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환영받는 주인공을 볼 때처럼 난생 처음으로 공항에서 나를 마중나와 사진을 찍고 환영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이 몸둘 바 모르도록 한다.  박사님은  푸른 색깔의 한반도 기를 꺼내서 내가 들게하고 사진을 찍어주신다.  박사님도 함께 찍자하고는 곁에 섰던 중국인에게 요청하여 나란히 한반도 기를 펼쳐 들고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생각해보니 노길남 박사님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제부터 이곳 중국 선양 땅에서 비로소 북부조국을 찾는 나의 공식 일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노 박사님이 중국에 오실 때마다 사용하신다던 핸드폰에 뭔가 잘못 눌러져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를 공항에서 호텔까지 태워다줄 이곳 젊은 동포에게 김 씨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 여기저기 전화기를 빌려줄 만한 분을 물색하다가 어떤 한국말이 통하는 조선족 동포에게 부탁하여 겨우 전화를 하여 동포 김씨의 차를 타고 선양 시내로 향했다.  


선양 공항 인근의 한적한 풍경들이 점점 새로 짓는 빌딩들로 바뀐다.  엄청나게 많은 빌딩 숲이 새로 건설되고 있다.  생각보다 선양은 아주 큰 도시다.  중국에서 5대 도시 가운데 들어갈 만큼 큰 도시인 것이다.  새로 공사를 하면서 도시가 확장되어가는 곳은 활기에 넘치는 곳이다.  미국 어느 도시 가운데 저렇게 거대한 건물들이 줄지어 들어서는 곳이 있던가?  도시로 몰려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선 이렇게 아파트 건설이 활발히 이뤄져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로 짓는 60층 건물이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동포 김씨가 말해준다.  높고 크고 웅장한 건물을 볼 때마다 카메라를 줄곧 눌러대었다.  


한편으로 지금 막 지어진 저 수많은 아파트들이 팔리지 않게 되어 모두가 어렵게 되었다고 이야기해준다.  중국 정부에서 갑자기 주택융자 받는 것을 까다롭게 했다는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 2008년에 일어났던 일이 이제 여기서도 재현되는 듯하다.  융자를 너무 쉽게 풀어주어 능력에 닿지 못하는 사람들이 집을 구입하게 되었을 때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은 너무도 명확하다.  매월 상환금을 은행에 갚지 못하면 결국 은행에서 그 집을 차압하게 된다.  그러니 융자를 까다롭게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편 미화로 십 만 달러가 되는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주 제한되어 있는데 융자마자 까다로워졌으니 이제 활발하게 건축하던 아파트 공사는 주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미국처럼 새 건물을 짓는 것이 아주 드물게 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돈이 없으면 집을 소유할 수 없다.  내가 북부조국에서 살펴보고 싶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주택문제인 것이다.  그래 중국의 현실 또한 운전하는 동포를 통하여 이렇게 잠깐 살펴보는 것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우리가 가는 씨타는 (서탑이라는 의미)이곳 선양에서도 코리아타운이라 불릴만 할 정도로 한인들이 모여 상가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선양에서 가장 큰 간선도로로 오다가 씨타로 오기 위해서 옆길로 들어섰는데 그 길도 차들과 사람들이 빼곡하다.  자전거에 오토바이들도 많이 붐빈다.  씨타의 거리는 제법 휘황한 간판들과 함께 사람들로 북적인다.  작은 시장골목도 있어 꼭 한국의 장터같은 풍경이다.  저앞에 우리가 찾는 호텔 간판이 보인다.  내가 중국에서 환전할 새가 없었기에 노 박사님이 차비와 내가 묵을 호텔비를 계산하신다.  얼른 환전해서 갚아드리고 앞으로의 이런 비용은 내가 부담해야겠다.  


노 박사님은 서울에서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이 이곳 선양에 와서 7년 만에 상봉하여 어제부터 함께 계신다고 하셨기에 짐을 풀고 호텔 방을 나와서는 박사님의 동생 분을 반갑게 만났다.   


호텔 밖엔 갑자기 아주 세차게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 두 개를 빌려서 나와 노 박사님 동생이 같이 쓰고, 카메라를 챙긴 노 박사님이 작은 우산을 받쳐 들었다.  먼저 환전하는 곳을 찾아갔더니 문을 닫았다.  노 박사님이 그곳 동포에게 물어 다시 원씨가게란 곳을 찾았더니 환전이 가능하다고 한다.  백 불에 613원이니 중국 인민폐와 미화는 대략 6대 1로 계산하면 되겠다.  

다시 빗속을 걸어 백 미터쯤 갔을까?  목란관이라는 이곳 조선족이 운영하지만 북부조국에서 파견된 접대원들이 봉사하는 식당을 찾았다.  내가 박사님과 그 동생분을 위하여 저녁을 내기로 했는데 이왕이면 북부조국 여성들이 공연도 하는 곳이라해서 이곳으로 정한 것이다.  아리따운 안내원이 2층으로 안내해주는데 제법 넓은 홀은 아주 화사한 색상으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밝은데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조선의 여성들이 우릴 반겨준다.  


메뉴에서 4가지 음식을 고르고 맥주를 주문했다.  소 갈비살, 찐 돼지고기 살, 조기구이, 그리고 넉넉한 양의 평양 배추김치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나온 음식이라 사진도 찍었다.   





곁의 박사님 동생은 오랫동안 노 박사님이 미국에 가서는 자신이 어려운 가운데 있어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7년 전 박사님이 서울에 나가셨다가  터놓고 통일운동을 한다는 것을 설명해주니 그런 귀한 일을 하면서 왜 이제서야 알려주는가고 했다고 한다.  박사님은 동생이 형이 하는 일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 지레짐작하고는 미국에서 돈 잘 벌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을 하느라 서울에서 고생을 하는 동생을 잘 돌보지도 못하였노라는 것을 말하지도 못하며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생은 형의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마음을 열고 이해해주었다는 것이다.  아니, 형님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하는데 당연히 동생이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누가 하겠느냐면서 형을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박사님은 동생이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것을 아셨다면 진작 속시원하게 터놓을 것을 하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듣고 보니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 또한 세 동생이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이번 여행에 대하여 알려주지도 않았다.  나이 오십줄인 동생들인데 이해를 하던 않던 간에 일단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강원도가 고향인 박사님이 겨우 4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기에 고학으로 그 어려운 시절에 공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시위에 앞장섰던 노 박사님이 1973년에 정권의 탄압을 피하여 미국으로 유학 길을 떠났고 이후 80년대부터는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동생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형이지만 아버지처럼 여기며 살았다고 했다.  노동자로서, 트럭 운전에 택시 운전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 삶 또한 녹녹치 않았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런 그가 어찌 형에 대한 원망이 없었으랴.  미국에서 잘 살면서 동생을 돌아보지도 않고 있다는 오해도 할 수 있었으리라.  한데 그 형님은 이렇게 미주 지역에서 큰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독립운동하던 조상들이 그 가족들을 잘 보살피지 못하였듯이, 우리 조국의 통일을 위해 민족통신을 운영하며 북부조국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운동을 하고, 재미 동포들이 북부조국을 찾을 수 있도록 그 다리 역할을 하면서 통일운동에 자신의 모든 시간과 재산을 쏟아부어온 것이다.  


그렇게 형제애를 다시 찾은 두 분에게 잔을 올렸다.  지금이 7년만에 상봉한 두 분에겐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아니랴?  기념으로 사진도 찍어 드렸다. 

 

노길남 박사님은 몇 년 전에 북부조국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는데 그동안 60여차례나 북을 오가면서 통일운동을 해오셨다.  지난 봄엔 7순 생일잔치상을  뜻밖에도 북부 조국을 방문하였다가 받으셨고, 그동안의 통일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김일성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이 기쁘고 영예로운 일을 그분을 아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으니 박사님은 올해가 참으로 행복한 해인 듯하다.  이왕이면 한국 정부에서도 노길남 박사께 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도 사정은 그 반대로 노길남 박사님이 운영하는 민족통신은 이명박 정권 이후 한국 정부에서 차단해서 한국에선 인터넷으로 열람할 수조차 없도록 만들어놓았다. 


나와 박사님의 인연은 그렇게 차단당한 민족통신 기사들을 내가 동지 한 분과 함께 운영하는 hanseattle.com 에 수년 전부터 박사님이 올려서 널리 알리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알고 보니 나와 박사님의 인연은 더 이어져 우리는 똑같은 한 분의 통일운동의 스승을 두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25 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4

북의 인민들의 기본 생활을 예습하다

식사를 마치고 맥주를 나누면서 대화하는 가운데 목란관의 봉사원들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북부조국에선 서비스 업종의 종업원들을 일반적으로 접대원 혹은 봉사원으로 부른다고 한다.  여러 악기들의 반주가 이어지며 흥을 돋구는 가운데 아리랑을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도 맑고 곱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아리랑에다 내가 예전에 듣곤 해서 귀에 익은 북부조국에서 부르는 가사가 맨 마지막에 첨부되었다.  ‘저기 저산이 백두산이라지.  동지 섣달에도 꽃만 핀다’ 로 마치자 식당 한 켠을 메운 주로 중국인인 듯한 손님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보낸다.   

이어서 여러 북한 노래, 중국노래와 함께 한복 차림의 가벼운 춤이 곁들어진다.  도라지타령과 그 율동도 참으로 흥겹다.  이 모든 공연이 지금 이 식당에서 서빙을 하던 봉사원들이 직접 노래를 하고, 악기 연주도 하는가 하면 춤도 추는 것라 한다.  

나는 이곳 씨타에 이곳과 비슷한 식당들이 여럿 있다기에 전문적으로 이렇게 공연을 하는 단원들이 여기저기 돌아가면서 찾아와서 공연을 하는 것으로 여겼는데 그렇지 않고 이들은 모두 이 식당의 봉사원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다가 공연을 하고, 다시 공연을 마치고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서빙하는 것이니 무대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 혹은 춤으로 공연하고는 다시 봉사원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북부조국에서는 어려서부터 예능교육을 누구나 받아서 악기 한 두개는 모두 다룰 줄 아는데다 노래와 춤 등 자신의 재능에 따라 기본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이런 공연은 꼭 이 식당에서만이 아니라 이후 북부조국의 호텔에서도 다시 그곳 봉사원들로 이뤄진 공연을 경험하였다.  그래 북에는 직장마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사람들이 넘쳐나서 전문가가 아니면서도 이 정도의 공연은 어디서나 크게 준비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 이곳의 봉사원들은 각자가 가진 그 다양한 재능으로 북부조국을 국외에서 크게 알리는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만큼 재능 많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봉사원으로 접대하는 식당이 어디 흔하며, 그 대접을 받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랴?  그런데도 세 사람이 저녁 만찬을 나누고 맥주 3병을 마시고 공연을 관람하는데  드는 비용은 미국의 일반 식당들보다 오히려 저렴하다. 봉사료로 얼마를 내겠다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고객에게 봉사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 아닌 것이다.  돈보다는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조국을 알리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 방식으로 그들의 운영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공연이 40여 분 동안 이어진 후 조용해진 시간에 우리 테이블에 다가온 한 봉사원에게 내가 평소에 궁금하게 여기던 북의 인민들의 생활에 관한 것을 직접 묻기로 하였다.  서 있는 사람에게 질문하는 것이 미안해서 앉으시라고 하니 앉을 수없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그렇다.  그들은 손님을 존중하긴 하지만 그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니 내가 그 여성의 다리가 아플까를 염려해서 앉으라고 하였지만 그건 거절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의 질문은 사실 아주 쉬운 질문이었지만 북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어 대부분의 남부 조국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질문이다.  그래 연관된 질문을 몇 차례 던졌는데도  거침없이 대답해준 그 봉사원이 참 고맙다.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정도의 생활을 하고 사는가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아주 간단히 월급이 얼마냐고 묻는 것으로 족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이 번 돈으로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북부조국에선 월급의 금액이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그곳 인민들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생활하는지가 궁금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라면 만약 내가 어떤 공장의 직원이라면 월급으로 회사에서 얼마를 주는 것으로 그 대부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지만 사회주의 북부조국에선  과연 어떻게 해주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이후 북부조국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답을 얻었는데 이렇게 식사를 마치고는 미리 그 부분을 예습한 셈이 되었다.
 
박원심 이란 명찰을 단 그 봉사원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들은 말입니다, 월급 자체는 자본주의 사회에 비교하면 참 작게 받는다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월급으로 살아가는데는 충분합니다.’하고 말문을 연다.   먼저 의식주 가운데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북에선 기업소라 불리는 직장에서 각 개인의 노동량에 따라 따로 쌀 배급표를 준다고 했다.  예를 들어서 탄광 노동자는 힘든 일을 하는 만큼 하루 쌀 400그램의 배급표를 주는가하면 자신처럼 노동량이 적은 여성은 200그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보급소에 가서 그 배급표로 쌀을 지급받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족 숫자대로 부식표를 지급받는데 그걸로 반찬을 구입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생각을 더해보았다.  식량이 부족하다고 알려진 북에서 저 정도면 충분하게 밥은 먹을 수 있는 양이다.  그런데 왜 돈으로 지급하지 않고 쌀을 아직도 배급제로 하고 있을까?  여기서 공평과 평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배급제도가 나쁘다는 인식이 우리에겐 은연중 있는 것 같다.  한데 부족한 쌀을 골고루 나눠서 먹기 위해선 배급보다 나은 방법이 있을까?  어떤 약삭빠른 사람이 돈으로 혼자서 백 사람 분의 쌀을 사버린다면 나머지 99명은 돈이 있어도 쌀을 구입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점매석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그래 쌀이 풍부한 미국에 사는 우리에겐 그저 시장에 가면 돈 십 달러 정도의 가격으로 쌀 한 포대를 살 수 있지만 북부조국에선 귀한 쌀을 배급제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는 것이다.  배가 불러도 함께, 배가 고파도 함께 공평하게 나눠 먹으며 견디는 것이리라.  

이후에 북부조국에서 쌀 생산이 더 늘어나 남아돌게 되어 사고 팔도록 해도 가격이 오르는 일이 없다면 배급제는 저절로 소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식량을 국가에서 확실하게 무상으로 보장해준다는 것은 참 귀한 일이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이렇게 인민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식량을 가난하다고 서방세계에 알려진 이 나라에선 무상으로 모두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먹는 것을 모든 인민이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북의 제도에 대하여 자신의 먹을 것은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배울 점이 참 많다.  

사람 사는 일이 어디 쌀만으로 해결되는 일인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먹히는 것은 무엇보다 주택이다.  미국의 경우 노동자들이 버는 월급의 30%-40% 이상이 주거비용으로 나간다.  아파트나 집의 월세 혹은 은행의 원리금 상환에 보통 $1,500 에서 $3,000 정도 나가니 이 비용은 실로 엄청나다.  그래 북의 주택문제는 어떻게 하는가고 물어보았더니 주택은 모두 정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데 그  ‘사용료가 아주 눅습니다’고 답해준다.  무상으로 주택을 제공하는데 무슨 사용료가 있는가 의아해서 알아보니 우리가 주택을 유지하기 위한 부대비용으로 들어가는 전기, 가스, 상수도 하수도 등 콘도나 아파트의 관리비와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그 사용료로 들어가는 비용은 내가 받는 월급에 비하여 아주 저렴하여 아무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윗 사진은 평양 시내의 근래에 지어진 아파트들. 


그럼 직업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보니 ‘직업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육체적인 문제나 연로한 분 등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따로 배려하여 쌀과 부식을 제공한단다.  그러니까 일할 수 있는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건 참 뜻밖의 이야기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청년실업 숫자가 얼마나 많은가?   벌이가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하여 어릴 때부터 얼마나 많은 생존경쟁을 거치면서 공부하고 쉴 틈도 없이 과외로 공부하며, 대학을 나와서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몇십 대 일의 입사시험을 치뤄야 하는 것은 이제 관습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북부조국에선 직업을 갖기 위해서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일할 수 있고, 자신의 필요에 맞는 정도의 음식을  지급받으며, 무료로 제공하는 주택에서 살면서 아주 약간의 사용료를 내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교육도 의료도 무료로 제공하는 사회다.  나라에서 웬만한 것은 모두 보장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북의 인민 생활에 관한 세세한 사항들은 이후 북부조국 여러 곳을 다니며 그 상황에 맞춰 직접 물어보고 답을 들었기에 이후에 다시 자세하게 그 내용들을 옮기기로 할 것이다.  

내 질문에 대한 박 접대원의 대답이 일단락을 짓게 되자 이번엔 노길남 박사님이 좀 더 재미있는 질문을 한다.   북의 남녀 청춘들은 주로 연애결혼을 하는가 아니면 중매결혼을 할까?  박 접대원은 갑자기 대화가 남녀간의 이야기로 넘어가자 약간 생각을 하더니만 중매 80% 연애 20% 정도 될까요..하더니만 아마 중매 70% 연애 30% 정도가 될 것 같다고 말해준다.  노 박사님은 자신이 듣기로는 반반 정도가 된다고 했는데 중매가 더 많은가 보다면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공화국에서 여성이 남성을 결혼상대로 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조건이 3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박 접대원은 서슴없이 대답해주었다.  첫째 조건이라면 군대를 제대한 남성, 둘째는 노동당에 입당한 남성, 셋째 조건으로 가정환경이라고 하였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였더니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라면 그것 하나로도 개인보다는 국가를 위한 삶을 살아온 것이 증명되며, 당원이 되었다면 그 또한 그 남성이 자신의 삶 보다는 나라와 전체를 위하여 몸을 내던지는 삶을 살아온 증거가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정환경을 살펴봄으로 그가 어떤 부모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아 왔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남한의 여성들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면 무어라고 답해줄까?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와 그가 가진 재산을 먼저 보지 않을까?  북과 남의 사회가 그 추구하는 것이 완전히 서로 다른 만큼 배우자의 선택 또한 그 사회적인 요인이 좌우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박 봉사원에게 '남자는 배우자를 선택할 때 여성의 어떤 점을 보게 될까?' 하고 노길남 박사님이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에 대해서 박 봉사원은 남자들은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상대방이 여성다운가를 볼 것 같다면서 가정환경과 생김새도 중요하게 여기고 또 학력도 살펴볼 것 같다고 답해준다.  이 질문은 아무래도 북부조국의 남자들에게 물어봐야 정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박 봉사원의 대답과 얼마나 차이가 날지는 알 수 없다.

밤이 깊어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내일이면 25년 만에 다시 찾는 북부조국 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몸은 피곤한데도 북부조국 방문 생각에 쉽게 잠들지를 못한다.



평양의 아침 출근시간 모습들 / 14-09-29


아무 허락없이 북의 인민들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찍으면서 평양시내 출근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일은 내 양심상 쉽지 않았다. 그건 프라이버시를 귀중하게 여기는 남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론 나의 통일을 위한 마음을 미리 이해한다면 즐겁고 환하게 북의 동포들이 포즈를 취해주었으리라. 그래 노 박사님을 잠깐 서시게 하고는 배경으로 버스를 타는 모습을 찍고는 다시 나를 찍어달라고 하였다. 그래도 출근길의 뒷모습은 허락을 구하지 않고 카메라 셔트를 마구 눌러대었다.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5]가 시작되는 [펌] 25년만에 다시 찾은 북부조국 방문기 II / 강산 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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